2019 수필대전 ‘능지탑 문무왕을 찾아서’

입선 김춘기 낭산 서쪽에 위치한 능지탑을 찾았다. 낭산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울산 방향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104m 높이의 나지막한 야산이다. 신유림이라 불리기도 한 신령스러운 성산으로 정상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남쪽은 사천왕사지가 있다. 이 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이 화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4각모양의 2층탑으로 여느 탑과는 달라서 얼른 탑이라고 납득하기에는 색다른 모습이다. 기단을 복원하고 상부를 쌓았는데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5층탑이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탑 뒤에 성격이 규명되지 않는 토단이 있다. 혹시 토단 위에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유해를 얻어 태웠을까? 그 연기는 용의 형상으로 동해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거슬러 신라를 더듬어 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지키려는 왕의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탑돌이를 하면서 왕을 찾는다.문무왕은 신라 30대 왕으로 아버지 김춘추의 뜻을 이어 삼국통일을 꿈꾼다. 통일을 이룬 후에도 이 땅을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싸움을 걸어오는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고 물리쳐서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그 후 왕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뜻을 담아 사천왕사를 지어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하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왕은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인도식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서 유해를 동해의 바위에 장사지냈다. 최초의 수중 무덤 대왕암이 그것이다.신라왕들은 대부분 사후에도 편히 살기 위해 많은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경주는 고분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도심에 산처럼 높이 만들어진 능(총)들이 널려있다. 대부분 신라왕과 왕비의 능이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부장품을 가져가려고 무덤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껴묻거리(함께 묻을 도구) 상자를 넣을 방을 나무덧널로 설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들었다. 많은 물건을 넣고 물건을 도난당하지 않기 위한 양식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금관, 장신구, 무기, 마(馬)구, 그릇 등 엄청난 양이다. 심지어 어떤 마립간(왕)은 심부름할 소녀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살아서 누린 권력과 재력을 사후까지 누리겠다는 끝없는 욕심이 빚은 제도이다. 사(死)자의 권력과 지위에 따라, 때로는 산자의 권력에 따라 껴묻는 부장품의 양이 늘어났으니 사후에도 지위를 누리며 땅속에서 죽음을 살고 있다. 정작 부장품들은 주검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 사용된 흔적은 없다.불교에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한다. 빈 몸으로 떠남이 마땅하다. 이승의 것은 산자의 몫, 떠나는 이들이 행여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법정스님은 이승의 삶에서조차 무소유를 설파했다. 불교를 국교로 받들던 신라의 왕이라면 그 정도의 철학은 지녔어야 왕이다. 산처럼 높이 쌓은 능 안에서 이승의 도구로 저승의 삶을 살기 위해 채움은 불교의 교리도 아니고 지도자의 영도력도 아니다. 이승의 도구가 저승에서도 맞겠는가? 모두가 비움의 미학을 알지 못한 인간의 짧은 생각과 욕심이 만들어낸 관습이다.문무왕은 오로지 이 땅만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죽음에까지 이어진다. 극성스러운 왜구가 해안을 토색질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기에 부처님 힘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자신을 불태워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왕은 깨달음도 남달랐다. 죽음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알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지난날의 영웅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능을 크게 만들어도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기가 굴을 팔 것이다.’ 라는 기록만 봐도 그의 깨달음은 천년을 뛰어넘는 위대한 통찰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지의법사에게 늘 자신은 죽어 호국 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말했다. 지의법사가 “용은 축생보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하니 왕은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인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 라고 답한다. 이처럼 왕은 짐승으로 환생하는 업보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호국’의 길만을 생각했던 것이다.감포 바다 수중 왕릉 대왕암 앞에 섰다. 생즉사 사즉생의 문구가 눈앞에 일렁거린다. 사후까지 잘살아 보겠다던 숱한 왕들은 땅속에서 무거운 침묵에 빠져 죽음을 살고 있고, 뜨거운 장작불에 몸을 불살라 나라를 지키려던 문무왕은 후손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살아가고 있다. 끝나버린 죽음과 천년을 살아온 죽음이 오롯이 대비를 이룬다. 요즘처럼 일본과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왕이 보내준 보물 만파식적이 그립다. 피리소리에 묘책이 얹혀 달려오기라도 한다면 위기를 넘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여행자의 가슴에 청량제가 된다. 하얀 포말을 담은 푸른빛 바다를 거느리고 오늘도 문무왕은 나라를 지키는 작전회의 중일 것이라는 믿음을 위안 삼으니 돌아오는 발길이 한결 가벼워진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용포가 아닌 갑옷이 익숙 평안함을 버리고 끝 향한 전쟁터로

문무왕은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왕으로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과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터이니 동해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은 눈물겹다. 문무왕은 나라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철저하게 방어함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했다. 스스로 무술을 익혀 전쟁터에서는 가장 앞에 나서서 적을 무찔렀다. 661년 왕위에 오르자 남산신성을 보수하고, 월성에서도 잘 보이는 게눈바위 부근에 큰 창고를 지었다. 백성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배가 든든한 마음이 들도록 무기와 쌀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의 유지를 받들어 고구려로 말을 몰아 668년 기어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용포를 벗어두고 갑옷을 입고 전쟁의 선봉에 섰다. 왕으로써 자신의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왕은 끝내 당나라 군사들까지 완전히 몰아내면서 진정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문무왕은 오늘날 위정자들이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길어 간단하게 요약해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의 전쟁사를 스토리텔링해 기술한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2)왕이 처음 왕위에 올라 남산에 큰 창고를 설치했다. 길이가 50보이고 너비가 15보이다. 이곳에 쌀과 무기를 저장했는데 이것이 우창이며 천은사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이 좌창이다.591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850보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평왕 때 처음 쌓았다가 이때 와서 다시 수리한 것이다. 또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서 3년 만에 끝내고 안복의 냇가에 칠성을 쌓았다.또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고 이미 관리책임자를 정하였다. 이때 의상법사가 이를 듣고 글을 올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의 땅에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못할 것이오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게 할 수 있으나, 정치와 교화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재해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라 하자 왕이 그때서야 이 일을 중지하였다. 또 고구려를 친 후 그 나라의 왕손을 데려와 진골의 직위를 주었다.왕이 하루는 배다른 아우인 거득공을 불러 “네가 재상이 되어 모든 관리들을 두루 다스리어 온 나라를 태평하게 하라”고 했다. 거득공은 “그렇다면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이 겪는 부역의 괴로움과 안일함, 세금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관리들의 청렴과 부패 여부를 보고 난 후에 그 직책을 맡았으면 합니다”고 하니 왕이 이를 승낙했다.거득공이 비파를 들고 거사의 차림을 하고는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천), 북원경(지금의 충주)을 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에 도착하여 두루 고을을 돌아다녔다. 무진주 관리인 안길이 그를 비범한 사람으로 보고 집으로 모셔 정성껏 대접했다. 후일 안길이 서울에 올라와 거득공을 찾았다. 거득공은 안길을 후하게 대접하고, 임금께 전자의 일을 설명했다. 이에 왕은 성부산 아래에 있는 땅을 무진주에서 상수리 하는 자의 소목전으로 주어 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다. 산 아래 밭 30묘가 있어 종자를 석 섬이나 뿌렸는데 풍년이 들면 무진주에도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무진주 또한 그렇지 못하였다고 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의 대비책문무왕은 어릴 때 외삼촌인 김유신으로부터 실전무술과 신비의 검술을 전수받았다. 김유신을 가까이 두려는 김춘추의 술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평소 그의 실력을 절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전쟁터 선봉에서 길을 열 때는 신검을 휘둘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적군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아군들의 희생이 줄어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술전략들도 법민은 고스란히 몸으로 체득해 배웠다.단지 문무왕은 자신의 무술을 철저하게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다. 왕은 스스로 무술을 익히는데 무서우리만치 집요했다. 때문에 서른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실력은 김유신의 솜씨에 거의 육박했다. 문무왕은 그러한 자신의 실력을 절대 혼자 익히고 버리지 않았다. 전쟁터를 누비며 자질이 뛰어난 화랑들을 하나씩 몰래 자신의 휘하로 포섭해 아무도 모르는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동주, 서작, 남현, 북무는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자신의 호위무사이자 절대심복으로 삼았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적군 깊숙이 침투해 적장과 유력 인사들을 살상해 적군의 예봉을 꺾고, 힘을 빼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또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이 시전될 때 동서남북을 지키면서 침투하는 적의 첩자들을 척살하기도 했다.삼국통일을 이룩하고도 문무왕은 백성들에게는 무기를 묻고, 전쟁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평화스럽게 위장을 했지만 당군과 왜병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 비밀병기가 바로 비밀결사대였다.문무왕의 비밀결사대 주력부대는 남산에 은거했다. 월성과 동궁에서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게눈바위에 비밀 망루를 설치하고 궁성, 동궁의 결사대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문무왕은 남산 게눈바위 인근에 넓은 창고를 지어 곡식과 무기를 비치하고, 비밀결사대가 은밀히 은거하며 훈련장소로 활용하도록 했다.문무왕은 동궁과 월지를 지어 군사들의 훈련소로 활용했다. 평소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대신들의 회의와 연회 등을 위해 문이 열렸다.그러나 특히 월지는 당나라 군사와 왜병들이 침략할 때 반드시 거치는 바다 임해전의 모형대로 설계하고, 비밀결사대와 수군, 장수들의 전략적 훈련장소로 활용했다. 동궁과 월지의 군사적 활용도는 외부는 물론 궁중에까지 철저하게 비밀리에 운영됐다. 문무왕의 비밀결사대가 가장 활성화되었을 때는 300여명에 까지 이르렀지만 100명 규모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 100여명의 정예병들은 모두가 살수로 키워졌다. 아주 실전적인 무술을 익히고 음악과 시문 등의 문무를 겸한 인재로 양성해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예리한 눈을 가진 무인들도 이들을 무인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연했다. 문무왕의 비밀결사대는 그의 아들 신문왕으로 이어졌다. 김흠돌의 난을 소리 소문 없이 일거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비밀결사대의 뛰어난 정보력과 감히 일반 병사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걸출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결사대는 궁중을 호위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전을 지키는 숨은 비밀병기로 운영되어 왕의 측근들조차 감쪽같이 몰랐다. 이들은 왕의 사설 군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통일신라 초기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두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한 것도 비밀결사대의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신검이라 불리는 절대적인 검술의 무학을 문무왕이 고스란히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무왕의 전쟁 종식을 향한 집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죽으나 사나 신라백성 걱정 동해바다에 잠들어 수호 용이 되다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신라 제30대 왕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였다.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된 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에게는 부왕이 미처 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668년 당나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의 군사들은 철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왕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터를 누볐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후에 무기를 묻었다. 이어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노라며 바다에 묻혔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진정한 성군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1)총장 무진(668년)에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0년 2월에 당은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치게 했다.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하자,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당 고종이 문무왕의 동생인 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귀국하여 왕에게 알렸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김천존의 추천으로 명랑법사에게 비법을 물었다. 명랑법사는 남산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개설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벌써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절 집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이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법을 썼다. 이에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다. 671에 당나라가 다시 5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나, 다시 문두루 비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당시에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을 따라 감옥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랫동안 법석을 열었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 즉시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이라 하며 본국에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새 절에서 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이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그 절을 망덕사라 했다.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하여 당나라 황제가 인문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고 강수를 통해 인문을 석방해달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황제가 감명을 받고 인문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해인 6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보위하겠노라” 하니, 법사가 “용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찌 용이 되려 하십니까?”라 했다. 왕이 답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약에 추한 인연에 따라 축생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라던 바와 꼭 맞는 것이오”라 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두루비법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되 천 년이 지나도 그 양은 변하지 않는다. 태양열에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얼음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니 모습은 바뀌어도 전체 질량은 그대로 인 것이다. 단지 겉모습이 변하여 사람들이 종종 오인하는 일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모든 무기를 모아 산 아래 묻었다. 그리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전쟁은 없으니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지어다.”군사들은 토함산 북쪽 계곡에 무기를 묻고 무장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쟁은 그렇게 문무왕의 마음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 고종이 설인귀를 앞세워 50만의 군사로 신라를 공격하러 배를 띄웠다. 마침 당나라에 수도 중이던 의상대사가 옥중에 갇힌 왕의 동생 김인문을 면회하러 갔다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 신라의 궁궐에 위급한 정황을 알렸다. 문무왕의 고민을 풀어줄 해법은 딱 하나였다. 세상에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은 하나씩만 존재한다. 급하여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움직이다 보면 예상 밖의 평지풍파를 맞게 된다. 용궁에서 도를 닦은 명랑대사가 사천왕사를 지어 불법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지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불법으로 백성들의 안녕을 지키고자 했다. 나라를 지킬 도량을 짓는 일은 신승 양지가 맡았다. 그러나 양지가 미처 서까래도 올리기 전에 적군들의 배가 신라의 경계를 넘어섰다. 명랑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가명승들에게 위급을 알리는 전서구를 날렸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열흘이면 모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명랑과 해괴망측한 모습을 한 승려들이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12방향에 세웠다. 명랑은 왕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열흘간 비단으로 지은 도량 근처에 사람이 드나들게 해서는 아니되옵니다”라며 유가명승들이 술법을 펼치는 곳의 경계를 당부했다. 왕은 특별히 김유신으로부터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무예를 익히고 있었다. 왕 또한 비술을 네 명의 제자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왕은 그 네 명의 비밀스런 검사들에게 비법이 진행되는 도량의 동서남북을 방위하게 했다. 명랑을 비롯한 12명의 고승들은 12방향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도 밥을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가끔 진언을 외우는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비단으로 지은 절은 안개에 휩싸여 누구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됐다. 싸우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때 동해안에는 난리가 났다. 먼 바다에서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났다가 뒤집어지고 하면서 당나라군사들의 배가 서로 부딪치고, 좌우 앞뒤로 흔들리면서 파손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배 위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당나라의 35만 병사 중에 살아 돌아간 이들은 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가 미리 낌새를 알아채고 재빨리 후퇴를 지시하면서 재빠르게 배를 돌린 병사들이다. 그 이후 설인귀는 스스로 북방장군으로 임명해줄 것을 촉탁해 신라 쪽으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오래 살아남은 신책이었다. 문무왕은 사천왕사를 완공하고 명랑법사를 주지로 임명해 백성을 위한 불법을 이어가도록 명했다. 김유신은 명랑법사가 시전하는 문두루비법을 눈여겨보았다. 나라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왕에게 건의하여 신라로 들어오는 관문에 호국사찰 원원사를 건축했다. 사천왕사와 원원사를 건축하고 당나라군사는 물론 왜국에서도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