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에 건립되는 문화재수리재료센터 본격화... 내년 6월까지 56억 7천만 원 투입

봉화군 법전면 풍화리에 들어서는 ‘문화재 수리재료센터’ 건립이 구체화하고 있다.총사업비 339억 원을 들여 내년 9월 착공해 2023년 12월 완공 예정이다.문화재청은 내년 6월까지 문화재 수리재료센터 설계를 마무리하고 경북도 및 봉화군과 협의를 거쳐 토지 매입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26일 밝혔다.센터는 목재보관소, 치목장, 부재보관소, 재료실험실, 운영 관리시설, 공용 공간 등으로 구성된다. 예상 대지 면적은 21만㎡, 연면적 9천900㎡다.총 예산 339억 원 중 내년 6월까지 56억7천만 원을 투입해 부지 등을 매입한다.문화재 수리재료센터는 문화재 수리 재료를 국가가 확보하고 공급하기 위해 설립한다.특히 지름 45㎝가 넘는 대형 국산 소나무, 자연스럽게 휜 소나무, 강과 산에서 수집한 자연산 막돌 등 문화재 수리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워 수입해야 하거나 공사 단가보다 비싼 품목을 주로 취급한다.앞서 문화재청은 문화재 수리시장에서 일부 품목의 수급 불균형을 파악해 2013년 문화재 수리용 소나무 공급체계 개선 용역을 진행했다. 2018년 센터 건립 부지로 백두대간을 따라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이 많은 봉화를 선택했다.봉화 주변 지역에는 문화재청이 산림청과 협약을 통해 관리하는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이 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대형 소나무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건조해야 강도와 내구성이 좋지만 관리비용 때문에 민간에서 공급하기는 쉽지 않다”며 “센터가 건립되면 문화재 수리 사업과 지역 경제가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박완훈 기자 pwh0413@idaegu.com

대구 북구을 무소속 주성영 예비후보 “구암동 고분군 · 팔거산성 역사테마 공원 조성하겠다”

무소속 대구 북구을 주성영 예비후보의 공약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주 예비후보는 최근 북구 교육 발전 공약에 이어 24일 “구암동 고분군과 팔거산성의 창조적 복원을 통해 역사 테마 공원으로 조성하고, 일원에 철쭉. 진달래. 해바라기 군락지도 함께 조성, 금호강과 연결된 함지산 전역을 힐링테마공원화 함으로써 북구를 대표할만한 관광 명소로 만들겠다” 고 약속했다.주 예비후보는 “지역 내 역사 문화유산들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지속 가능한 문화관광 인프라로 조성하고, 지역 상권 등과 연계한 음식 , 서비스 산업 기반 확대, 일자리 창출 등 지역 경제 활성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하게 만들 것” 이라며 이를 위해 △ 역사문화거리 조성 △ 전시관 설치 △ 팔거산성 복원 △ 고분박물관 △ 학술대회 개최 △ 야외공원 △ 문화축제 등 다양한 발전책을 제시했다.주 예비후보는 또 “문화유산을 자원으로 활용할 때 지역의 경제발전과 활성화를 도모 할 수 있어며 또한 지역의 정체성을 높이고 존재가치도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며 “문화재는 보존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좀 더 일반인들에게 다가가고 생활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문화재 활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그러면서 “관광자원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역사의 도시, 문화의 도시, 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한편 구암동 고분군은 대구를 대표하는 삼국시대 중요 유적으로 지역 내 함지산 서쪽 능선에 346기의 대규모 고분군으로 영남에서는 보기 힘든 적석 석곽 구조로 2018년 사적 제544호로 지정되었고, 고대역사문화 체험 특구로 지정된바 있다.또 팔거산성은 5~6세기 삼국시대 축조된 성곽이다. 조선시대 팔거현이라 불렸던 지역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팔거산성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대구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이창재 기자 lcj@idaegu.com

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2) 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

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코로나19 바이러스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요람도 비켜가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기간 구미공단 지역은 외지인의 방문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를 거치면서 기세를 얻은 낙동강은 구미들을 가로지르며 한층 도도해진다. 그 낙동강은 경상도의 젖줄이 되었고 구미를 한국 산업화의 기지로 만들었다. 구미에서 낙동강은 남북으로 흐르며 기존 시가지, 구미1공단과 인동, 구미2·3공단을 나눈다. 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면 2공단과 3공단, 구미공단 지킴이 인동(仁同)이 있다. 이 가운데 척화비는 눈에 띈다.구미 척화비는 구미3공단에서 구미 산동 해평 방면으로 넘어가는 석현 고갯길을 넘어가다 길가에 서 있으며 150년 전 조선인의 결기가 그대로 서려 있다.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온다.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다.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자손만대에 이를 경고한다. 병인년 짓고 신미년 세운다.) 뒤로 갈수록 글자가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척화비와 문헌을 통해 글자를 해독한 것이다.조선말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국내정치에 외치를 이용하기 위해 병인양요 이후 강력한 쇄국정책을 편다. 대원군이 1866년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학살하자 프랑스가 자국 신부의 학살을 핑계로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 개항을 요구한 것이 병인양요다. 5년 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 로저스 사령관이 군함 5척을 앞세우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진격해 온 것이 신미양요다.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 개항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대원군은 나라 문을 더욱 굳게 닫았다. 그리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를 막아내자는 굳은 결의를 비석으로 새겨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종로 네거리와 부산 동래, 경주 등 도시에서 충청 전라도의 산골까지 전국 곳곳에 무려 200여 기의 척화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같았고 시기도 같았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땅 속에 파묻히거나 바다에 빠뜨려지기도 했고 부서지기도 했다. 지금 포항 장기면사무소나 청도, 부산 용두산공원 등에 33기가 남아 있는데 자연석 화강암 척화비는 이곳뿐이다.구미 구포동의 척화비도 당시 한 석공이 조상의 묘지 상석을 만들려고 다듬다가 지역민들의 저지로 살아남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최근에야 이곳 길가에 자리를 잡고 이젠 경북도 문화재자료 22호로 지위까지 얻어 기억을 살릴 수 있게 됐다.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강의 동쪽 야산에 동락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동쪽인 이곳은 칠곡군 인동면이었고 그 인동이 낳은 조선명유 장현광을 모신 사원이 동락서원이다. 동락(東洛)은 동방의 이락(伊洛)이니 송나라 학자 정호 정이 형제가 수학하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말한다.동락서원은 옆에 있는 한옥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그 모태로 한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57세 되던 1610년 제자 장경우 선생이 낙동강변 동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장현광 선생이 직접 부지암정사라 이름하고 만년을 이곳에서 강학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정사는 선생이 돌아가신 17년 뒤인 1654년 서원의 체제를 갖추고 이듬해 서원으로 개칭,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76년 숙종때 동락서원이란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대원군때 철폐됐다. 1904년 영당을 새로 건립하고 1932년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당을, 1971년 부속건물까지 복구해서 중창하고 장현광 선생과 장경우 선생을 배향했다.외삼문인 준도문을 들어서면 윤회재와 근집재가 동서쪽에 자리하고 경북도 문화재자료 21호인 중정당 뒤로 사당인 경덕묘가 있다. 중정당 서쪽 처마와 붙어있는 신도비는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부지암정사에 동락서원이 들어서자 후손들은 당초 부지암정사 창건 뜻을 살리기 위해 1885년 정사를 건립했다. 그러나 구미공단이 들어서고 구미대교가 놓이면서 1975년 서원 옆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장현광 선생은 서원 옆 낙동강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어 그 심오함에 흠뻑 빠졌었다고 오홍석 구미시 문화계장은 말한다. 그 깊이는 성리학의 깊이나 인간의 깊이와 같이 깊고 나의 마음과 같이 알 수 없는 깊이라며 부지에 대해 의미를 더했다.서원 앞 400년도 더 된 보호수 은행나무는 여헌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데 암수 딴 그루인데도 해마다 엄청난 은행을 맺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기도처로도 유명해졌다. 후손 장세곤씨는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금줄을 쳐보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들의 정성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소연이다.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장현광 선생은 20세에 벌써 학문이 완숙 단계에 들어섰을 만큼 일생을 인간과 자연, 우주를 아우르는 학문과 저술에 바친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다. 7세에 부친으로부터 글자를 배우면서 글귀를 만들었고 8세에 부친이 돌아가신 뒤 자형 노수함에게 글을 배웠다. 18세에 공부한 것을 종합 포괄하여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했으니 바로 ‘우주요괄’ 10첩이 그것이다.향시에 두 차례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나가지 않았고 벼슬도 대부분 사양했다. 조정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잇따라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대부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여헌학연구회의 자료에 따르면 선생에게는 37차례의 관직 제수가 있었으나 출사한 것은 외직 두 번과 내직 세 번이 전부였다. 선조는 38세의 선생에게 전옥서 참봉을 내렸으나 모친상 중이어서 부임하지 않았으니 처음 관직은 42살 때 보은현감(종6품)이었다. 그것도 6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그만뒀다.보은현감으로 나갈 당시 선생이 밝힌 출처(出處)는 지금 세상의 관리들에게도 경계로 삼을 만하다. “벼슬에 나아갈 만한 의리가 없으면 벼슬하지 말 것이니, 학문이 넉넉하지 않고, 시기가 적당하지 않고, 예로서 대접하지 않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단호한 선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선생의 방대하고 심오한 학문은 유학과 제자백가의 학설은 물론 이단시하던 노자와 불교 사상까지도 비평과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주 자연인으로 일생을 살았고 자신의 호처럼 전국을 떠돌며 나그네처럼 살았으니 그 바탕을 도(道)에 두고 있으니 인조가 내린 선생의 제문에 “500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생전 두 번의 대사헌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84세에 인조의 남한산성 굴욕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20년 뒤인 1657년 효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받았으니 선생의 인품과 충절을 공인받은 것이다.마애여래불(摩崖如來佛)인동 구미3공단에서 선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의 척화비를 가기 전에 맞은 편 산등성이에 높이 7.2m, 어깨폭 2.8m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빚은 마애불(보물 제 1122호)이 풍상을 겪고 마모돼 가고 있다. 지금 문화재청이 안전 검사를 하고 있다는데 앞쪽은 멀쩡해 보여도 옆모습을 보면 바위의 균열이 심해 곧 부셔져 무너질 듯 위태롭기 짝이 없다. 구미공단이 들어서서 한국 산업화를 이룬 주역으로 성장해오는 동안 마애불이 지켜보고 또 지켜준 덕이었다면 오늘날 구미공단의 위기는 마애불의 위기에서 오는 것인가 턱없는 상상도 하게 만든다.초승달 모양의 눈썹과 굳게 다문 작은 입술, 평평한 코와 어깨까지 늘어진 귀의 모습은 무심한 듯 근엄하고 자상한 속을 짐작케 한다. 옷을 걸쳤으니 그 선이 팽팽한 속살을 비치듯 얇아 바람에 날리는 듯하고 두 다리는 연화대에 얹었는데 풍만하게 보인다.안내문에는 백제군에 쫓기던 당나라 장수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한 뒤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불상을 새겼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 같은데 머리 위에 얹힌 판석은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한다.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동쪽 구미3공단 너머 천생산이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마애불도 이겨내지 못했음인지 옛날 산속이었을 마애불 앞은 공장들이 틀어막고 또 길이 나면서 마애불도 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공단 주변환경과 차량 진동 등 산업화의 현장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문화재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다.1천년을 지켜오던 마애불이 문화재청의 프라스틱 보호 시설 설치 이후 습기와 진동에 균열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고 보면 빠른 진단 결과가 나와서 안전하게 보호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구미공단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경주 조선시대 관아건물 경북도문화재로 지정

==경주문화원 부지 내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 건물인 내아(왼쪽), 부사(가운데), 양무당 등이 경북도문화재 제177호 기념물로 지정됐다.==경주문화원 부지 내 조선시대 지어진 100년 이상된 건축물 3동이 경북도문화재로 지정됐다.경주시는 최근 ‘경주부 관아 건물’이 경북도문화재 제177호 기념물로 지정됐다고 밝혔다.경주부 관아 건물인 내아·부사·양무당 등 3동의 건물은 18세기 말에 제작된 ‘경주읍내전도’와 ‘동경통지’에서 실재(實在)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적어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다.부사와 양무당은 옮겨 세워졌지만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내아는 창건된 이래 현재의 위치에서 큰 변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래 1975년까지 경주박물관 건물로 활용됐다는 근대적 의미까지 더하고 있다.경주부 관아건물은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거 현재 경주문화원이 관리하고 있다. 내아·부사·양무당은 현재 향토사료관, 도서실, 민속품 수장고로 운용되고 있다.경주시 관계자는 “1986년 12월 경북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된 경주문화원 내 ‘경주 동부동 은행나무’와 이번에 지정된 경주부 관아 건물은 도지정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키고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존관리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김천출신 작곡가 나화랑 생가 문화재등록

-문화재로 등록된 김천 출신 작곡가 나화랑 생가(왼쪽)와 문화재 등록 예정인 김천고등학교 본관 전경.-김천 출신으로 이미자가 부른 ‘열아홉 순정’을 작곡한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 생가가 현지조사 5년 만에 등록문화재가 됐다.김천시는 문화재청이 지난 9일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나화랑이 태어나고 자란 ‘김천 나화랑 생가’를 문화재로 등록했다고 10일 밝혔다.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 있는 나화랑 생가는 안채 108㎡, 사랑채 138㎡, 창고 40㎡로 구성된다. 건립 시기는 1921년이다.문화재위원회는 앞서 2016년 김천시가 제출한 활용 계획서를 검토한 뒤 등록을 보류하면서 유사 사례에 대한 종합 조사를 지시했다.이에 문화재청은 동시대 음악가 중 월북자나 친일 인사 등을 제외한 32명을 추렸다. 그중 나화랑 업적에 견줄 만한 사람으로 고복수, 이난영, 현인, 김교성, 김부해, 김서정, 김화영, 손석우, 왕평, 이시우, 조춘영, 형석기 등 12명을 선정했다.이들이 머문 생가는 지난해 조사에서 대부분 없거나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돼 나화랑 생가가 지닌 희소성 및 상징성이 인정됐다.등록문화재 중 문화·예술 인물과 관련된 문화재는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 약 10건이다.나화랑은 광복 후 KBS경음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다. ‘무너진 사랑탑’과 ‘늴리리 맘보’ 등 가요 500여 편을 작곡했다.이와 함께 ‘김천고등학교 본관, 구 과학관’ 등 2건도 문화재청이 30일간 문화재 등록을 예고해 국가문화재 등록 가능성을 높였다.‘김천고 본관과 구 과학관’은 1931년 육영사업가 최송설당이 민족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설립한 김천지역을 대표하는 사학이다.개교 초기 건축된 ‘김천고 본관’은 김천고의 상징이다. 또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박길룡 작품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았다.‘김천고 구 과학관’ 역시 1930년대 근대학교 건축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외부 공간 구성이 신축 당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크다.안희용 기자 ahyon@idaegu.com

봉화 녹동리사와 직방당, 경북도 문화재 기념물 지정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녹동리사와 직방당이 경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됐다.봉화군에 따르면 녹동리사와 직방당은 괴담(傀潭) 배상열(1759~1789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조선 후기 고종 연간에 내려진 서원훼철령으로 인해 현재 강당만 남아있다. 서원의 강학적 기능과 재향 공간 등 조선 중·후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직방당은 괴담 배상열이 삼각법을 이용해 고도를 측정하고 전답 면적을 계산했다. 낮에는 해시계로 시간을 측정하고, 밤이면 별자리를 관측한 장소다.천문관측 기구인 ‘선기옥형’, 역학서인 ‘역설제도와 하도지도’ 등 1천여 점이 남아 있어 당시 천문학 연구 성과의 가치와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았다.한편 봉화 녹동리사와 직방당이 경북도 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봉화군은 국가지정문화재 등 총 103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게 됐다.박완훈 기자 pwh0413@idaegu.com

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1) 경주 서출지

경주 서출지K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쥐띠 해이고 하니 연초에, 경주 서출지를 대구일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이었다. 좋은 제안이어서 나도 무자생 쥐띠라며 웃었다. 내 기억 속의 서출지는, 글이 나온 못이 아닌 쥐가 나온 서출지(鼠出池)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심 기이했다. 인터넷을 뒤적여 1500여 년 전 소지 마립간이 다스리는 신라 땅을 살폈다.봄날이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었다. 바람도 쐬고 민심도 살필 겸 왕은 시종과 일관을 거느리고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동했다. 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올라 수심을 달래고 싶었다. 고구려와 말갈의 잦은 침략도 문제였지만 왕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궁내까지 손길을 뻗친 불교의 잠입에 대한 전통 토속 신앙의 보이지 않는 반발, 그로 인한 갈등이었다. 묵호자가 전래한 부처의 가르침은 일선군 모례의 집에 굴실을 만들어 아도화상을 모시는 등 민심에 스며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왕실의 구병(救病)활동으로 불교의 영향력이 날로 조정 깊숙이 그 세를 얻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월성신의 운행을 점쳐 왕위를 보필하던 뿌리 깊은 토속 신앙의 세력이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교의 전파를 금하던 조정이고 보면 토속 신앙에 대한 위협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신라 21대 소지왕(毗處王) 즉위 10년 무진(戊辰)년의 일이었다. 천천정으로 거동하는 왕의 행렬을 앞뒤로 날아들며 까마귀가 까옥 까옥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이 행렬을 멈추고 까마귀의 심상찮은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소서” 쥐가 두 손을 모으고 사람의 말로 왕에게 아뢰었다. 까마귀를 뒤따르는 왕의 행렬이 천천정 남쪽 피촌(避村)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돼지 두 마리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돼지의 싸움을 지켜보던 왕의 행렬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라진 까마귀의 행방을 찾아 피촌 주변을 배회하는데 한 늙은이가 연못 가운데서 서찰을 들고 홀연히 솟아올랐다. 늙은이의 서찰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두 사람이 죽느니 오히려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이에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개봉을 명한 서찰에는 ‘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서 거문고 갑을 활로 쏘자 피가 흘러나왔다.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승려(焚修僧)와 궁주(宮主)가 금갑 속에 숨어서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출지(書出池)는 글(서찰)이 나온 못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내 기억 속의 서출지가 서(鼠)출지인 것은 까마귀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통역하는 쥐의 이미지가 남달라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출지를 찾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쥐들을 불러내었다. “너는 쥐들의 활동이 왕성한 자시(子時)에 태어났으니 잘 살게 될 거야” 어머니는 자주 쥐를 앞세워 어린 내게 먼 앞날을 축복해 주곤 하셨다. “천석! 천석!” 아버지는 쥐에 물린 손가락을 치켜들고 천석을 외치셨다. 쥐에 물리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러주신 쥐와는 달리 내가 만난 쥐는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기도 했다. 낯 선 도시 허름한 아파트에 살 때의 일이었다. 싱크대 물관을 타고 침입한 쥐들은 밤마다 거실 구석을 눈에 불을 켜고 뒤적이곤 했다. 빗자루를 들고 쫓으려 해도 나를 쏘아보는 쥐의 악착같은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사적 제138호, 경주 서출지 (慶州 書出池)는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연못이다. 겨울바람이 불어서 을씨년스러웠고 인적이 끊겨 황량했다. 서출지를 가득 매운 연꽃 군단도, 못가의 배롱나무도, 독야청청한 소나무 밑 벤치도, 조선 현종 5년에 임적(任勣)이지었다는 이요당(二樂堂)도 마찬가지였다. 회색 풍경 속에 부스스한 몸을 움츠리고 스산한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문화유적이란 당대 역사가 숨 쉬는 현장이며 세월의 침식을 비껴서는 상징의 육체이다. 왜 임금의 가마는 심산유곡이 아닌 못가의 천천정(天泉亭), 하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를 향했을까? 왜 사금갑 설화를 만든 사람은 하늘 샘, 맑은 못으로 그 배경을 설정했을까? 맑은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성찰의 거울이니까 그러했을 것이다. 거개의 설화가 그러하듯이 서출지 전설 또한 우화(寓話)이다. 우화란 세상을 비추는 반성의 거울, 가장 직접적인 인간사의 알레고리이다. 서출지 전설에 비친 당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세월을 거슬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승려는 궁주와 간통을 범하고, 왕을 시해하려 함으로써 왕권에 도전한다. 이에 맞서 쥐, 까마귀, 돼지, 그리고 신령한 노인 등은 왕권을 수호한다. 일관은 왕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관(日官)은 고대 사회에서 일월성신의 운수를 알려주는 관직으로, 전통적인 규범과 의례를 현실 정치 영역에 반영하는 존재였다. 승려와의 간통은 궁중 세력과 불교 세력 간의 야합을 뜻한다. 사금갑 설화는 궁중 불교 세력과 일관으로 대변되는 토속 신앙 세력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의 반영으로 읽힌다.아름드리 소나무 밑 벤치에 앉아 신라적 서출지의 그날을 떠올려 본다. 까마귀는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전하고, 쥐는 까마귀의 울음을 인간의 말로 번역해서 들려주고, 돼지는 왕의 행렬을 못가에 세워 신령한 늙은이의 서찰을 받게 한다. 그날의 까마귀와 쥐와 돼지와 신령한 노인을 만나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신령스러운 그들은 2020년 오늘의 궁핍한 세태에 대해 어떤 지혜로운 이야기를 전해줄지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상상을 해본다.갈등 없는 시대, 대립 없는 사회는 없다. 대립과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과 목적, 그 성격과 가치의 문제이다.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향한 것일 때 갈등과 대립은 발전의 동력이지만, 공화를 등져버린 패거리의 배타적 이해에 얽매인 것이라면 그것은 공동체 파국의 원인이 된다. 끼리끼리 똘똘뭉쳐 저 잘났다 큰소리치는 진영 간의 이전구투, 국론분열의 소모적 멱살잡이가 끝날 줄 모르는 지금/여기/우리에게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인 서찰이 전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까마귀가 전하는 하늘의 대답을 쥐가 통역해서 들려주면 좋겠다.한 사람을 위해 두 사람을 죽인다는 것,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 받은 민주사회의 통치자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던 고대사회의 임금과는 그 처지가 사뭇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전자가 상대적 가치라면 후자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서출지 전설에 비추어 보건대 우화로서 사금갑 설화는 공동체(국가)에 해악을 가져오는 존재를 무찌르는 구조의 반영이다. 두 사람을 죽여 한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승려의 간통이라는 행위로서 상징되는 질서의 파괴 혹은 혼돈에 대한 질서와 정의, 공동체의 수호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올해는 경자년 육십간지의 37번째 해, 경(庚)은 백(白)이므로 하얀 쥐의 해라고 한다. 검은 쥐가 아닌 하얀 쥐, 무언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을 가져본다. 1년에 다섯 차례, 한 번에 10여 마리의 새끼를 낳는 엄청난 번식력을 가진 쥐는 다산의 상징이고, 미륵에게 부싯돌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세상의 모든 뒤주를 가져도 좋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함경도 지방의 전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쥐는 재물과 풍요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일과 지진 등 지각변동을 미리 알아차리고 남 먼저 피난 가는 예지력에서 보듯 쥐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까뮈의 〈페스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베르베르의 장편 〈고양이〉에서와 같이 문학작품의 주요 인물로 쥐가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는 캐릭터, 지혜를 상징하는 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먹고 사는 경제문제도, 죽고 사는 안보문제도, 끝없이 으르렁거리는 편싸움 문제도, 법과 정의와 공정 문제도,,,,,,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경자년!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하얀 쥐의 지혜가 그리운 시절이다.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단청장 정연호...대구시 무형 문화재로 지정돼

대구시는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2’,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대구 광덕사 신중도’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연호(66세)’씨를 무형문화재 단청장 보유자로 인정했다. 문화재는 10일 지정 고시된다. 유형문화재 제90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2’는 당나라의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 80권 가운데 권22 승도솔천궁품으로 세존이 도솔천궁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검푸른색의 종이에 금가루로 정성스럽게 옮겨 쓴 고려시대 사경이다. 유형문화재 제91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은 현세의 죄업을 모두 소멸시키고 장수의 법을 설법한 밀교 계통의 경전으로 흔히 ‘장수경’이라 한다. 주로 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장수, 그리고 자신 선대의 극락왕생 및 가정의 화목을 기원할 목적으로 간행한 대표적 불경이다. 유형문화재 제92호 ‘대구 광덕사 신중도’는 해외에 유출되었다가 경매를 통해 환수된 것이다. 제작 기록에 따르면 1812년(가경17) 11월에 순천부 영취산 흥국사 보현전에 봉안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한 불화승 도일 등이 조성한 작품이다. 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장 보유자로 인정된 전연호(66)씨는 무형문화재 단청장의 전수교육조교로서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으며 단청 기능을 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구시 박희준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이번 지정으로 대구시에는 총 278건의 문화재를 보유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달서구청, 문화재 안내판 시민자문단 모집

대구 달서구청은 오는 14일까지 사적 제411호 진천동 입석의 문화재 안내판 제작과정에 참여할 시민자문단을 모집한다고 6일 밝혔다. 진천동 입석 안내판은 전문용어들이 많아 주민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민원이 제기돼 왔다. 이에 구청은 시민자문단(전문가 1명, 지역주민 4명)을 구성해 안내문안의 난이도, 개선사항 및 아이디어를 수렴해 누구나 읽기 쉬운 안내판을 제작할 예정이다. 자문단 지원방법은 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하면 된다. 한편 올해 사적으로 지정된 지 22년째를 맞은 진천동 입석은 최초의 청동기시대 제단 유적이다.김현수 기자 khsoo@idaegu.com

의성금성면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예고

의성군 금성면 일대 자리 잡은 고분군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이 일대에는 신라 세력이 5∼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374기가 밀집해 있다.문화재청은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학미리·탑리리에 있는 고분들을 묶은 경북도기념물 ‘의성 금성면 고분군’을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고 20일 밝혔다.의성군 금성면 일대는 삼국시대 의성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의 역사·문화와 신라의 발전 과정을 해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져 왔다.1960년 의성 탑리리 고분군 발굴 이후 매장문화재 조사 17회, 학술조사 9회가 진행된 이곳에서는 신라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묘(돌무지덜넛무덤)를 변형한 묘제(墓制)가 확인됐다.무덤 내부에서는 머리에 착용하는 관, 귀걸이, 허리띠 장식, 고리자루칼 등 신라 수도 경주와 관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위세품이 발견됐다.또 지역적 특색이 돋보이는 이른바 ‘의성양식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의성양식 토기 특징은 고배(굽다리접시), 항아리, 뚜껑 등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토기는 생산과 유통이 꾸준히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의성군은 금성면 고분군에 대한 사적 지정을 신청하면서 신라 거점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유구(건물의 자취)와 유물이 경주와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김주수 의성군수는 “이번 지정을 계기로 고분군에 대한 정비종합복원계획을 세워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복원을 통해 역사문화콘텐츠 개발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고 밝혔다.김호운 기자 kimhw@idaegu.com

고령군 보물 신청대상 선정 및 문화재자료 지정예고

고령군은 ‘개포리 석조보살좌상’이 보물 신청대상으로, ‘노강서원 고문헌’이 문화재 자료로 지정예고 됐다고 14일 밝혔다.고령 개포리 석조보살좌상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다. 잘 다듬어진 타원형의 판석 위에 새겨진 보살좌상으로 전체적으로 조각의 깊이가 얕고, 손과 발을 유난히 작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판석 뒷면에 명문이 있어 985년이라는 명확한 제작시기를 알 수 있다.머리에는 3면으로 나누어진 보관을 썼는데 가운데 면에는 화불이 선명하고 왼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있고, 옷은 보살의 천의가 아닌 불상의 대의 형식으로 가사를 걸쳤다.또 둥글넓적한 얼굴에 옆으로 긴 눈, 이목구비가 중앙으로 몰려 있는 얼굴 모습은 고려 전기 보살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코와 왼쪽 무릎 부분이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손상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어 한국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신청했다.고령 노강서원 고문헌은 조선후기 영남지역 노론계 서원의 하나인 노강서원에서 소장하였던 고문헌 24점이다.원임안, 원록, 계안, 심원록과 서원 관련 시문 및 필적 등으로 대부분 18세기 중반∼20세기에 작성된 것이다.필사본으로 된 유일본일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영남지역 노론계 서원의 역사, 인적 구성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20세기 이후 작성된 원임안 2점, 계안 2점, 노강서당 낙성운 1점을 제외한 19점을 일괄 문화재자료 지정대상으로 선정, 문화재자료로 지정예고 됐다.고령군은 2013년부터 8건의 문화유산을 문화재로 지정, 4건의 향토문화 유산을 지정했다. 현재 7건의 문화유산을 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거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기 위한 행정 절차를 밟고 있다.곽용환 고령군수는 “선조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문화재 보존 관리를 통해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지정문화재 지정과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지정 등을 통해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김재호 기자 kjh35711@idaegu.com

안심창조밸리 공영주차장 8월 조성

문화재 발굴로 제동이 걸렸던 대구 동구 안심창조밸리 내 공영주차장 조성사업이 다시 추진된다.이르면 다음달 착공해 오는 8월 공영주차장이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지난해 말 공영주차장이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문화재 발굴로 지연됐었다. 14일 열리는 전문가 검토 회의를 통해 문화재 발굴 결과와 보존 필요성 검토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주차장 조성이 재개된다. 공영주차장은 동구 괴전동에 조성되며 주차 면수는 250면에 달한다. 공영주차장 인근에는 도심 휴양지인 안심창조밸리가 조성됐고, 주변은 5천 세대 이상의 아파트 대단지가 있다. 이에 따라 주차난이 상당할 것으로 우려됐지만 이번 공영주차장 완공으로 주차난은 상당부분 해소될 전망이다. 또 영천과 경산의 주민이 공영주차장에 차량을 세우고 지하철로 대구로 가는 환승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구청 관계자는 “현재 발굴된 문화재를 포함해 추가된 것들 모두 역사적 가치가 높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만큼 공영주차장 조성사업이 곧 진행될 것”이라며 “겨울철이라는 기후적 요소가 있지만 2월 초 착공해 오는 8월이면 완공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동구청, 지난해 문화재 정비 19건 완료

대구 동구청이 지난 한 해 정비사업을 통해 보수한 문화재가 19점으로 집계됐다.올해도 23점을 보수할 예정이다. 9일 동구청에 따르면 지난해 보수·정비사업을 통해 완료한 동구 내 문화재 수는 모두 19점으로 2017년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추진해왔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113억 원을 투입해 79점에 대한 보수·정비가 이뤄지고 있으며, 일부는 완료됐다. 등록문화재 제303호로 지정된 ‘대구 구 동촌역사’는 지난해 지붕에 누수가 발생해 5천만 원을 들여 기와와 굴뚝을 보수했고 도색작업도 했다. 동구 입석동에 있는 대구 구 동촌역사는 1917년 개통돼 2008년 폐역됐다. 현재 동촌역사 작은도서관으로 활용 중이다. ‘효목동 조양회관’의 경우 2018년 현관 포치의 벽돌이 노후돼 전면 해체하고 복원했다. 2층 강당의 누수 흔적이 발견돼 지붕 공사도 함께 진행했고, 모두 7천200만 원이 투입됐다. 아침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의미의 효목동 조양회관은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 유적지로 등록문화재 제4호다. 불로동 고분군의 정밀지표조사 및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고분군 내 예초, 민묘이장, 봉분정비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전기시설 정비, 재난방지시설 설치, 정밀실측 등 문화재에 대한 다양한 점검 및 관리가 진행 중이다. 동구청은 올해도 27억2천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23점을 추가로 보수·정비한다. 지난해 국가 민속문화재 제261호인 백불암 고택의 보본당 번와(기와 교체 작업) 공사과정에서 흰개미로 인해 부식된 목재가 다수 발견됐다. 올해 기둥 해체작업도 포함해 보수 범위를 확대한다.백불암 고택 대문채의 지붕과 목재에도 부식이 발생해 함께 보수한다. 천연기념물 제1호인 도동 측백나무는 생육실태를 과거 자료와 비교·분석해 향후 보존관리 방향성과 활용 방안에 대한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대구 동구청 김기일 문화관광과장은 “동구 내 지정된 문화재 수는 모두 96점으로 대구지역에서 38%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문화재 보존에 더욱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김천시 봉산면 소재 고 나화랑 선생의 생가 국가문화재 등록 예정

‘열아홉 순정’ ‘닐리리 맘보’ ‘무너진 사랑탑’ 등의 작곡가 나화랑 생가(김천시 봉산면)가 국가문화재로 등록될 예정이다.문화재청이 오는 28일까지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등록한다.‘김천 나화랑 생가’는 광복 후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고 나화랑(본명 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과거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동시대 활동했던 음악가의 생가가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현존하는 생가라는 점에서 음악사적 및 지역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았다.작곡가 나화랑(1921~1983년)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닐리리 맘보’ 등 생애 500여 편의 가요를 남기고 수많은 음반을 양산해 한국 대중가요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김충섭 김천시장은 “나화랑 생가가 국가등록문화재가 되는 것은 지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다”며 “인근의 ‘김천 신리 영천이씨 정려비(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387호)’, ‘율수재(도 문화재 자료 제541호)’와 함께 또 하나의 문화관광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안희용 기자 ahyon@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