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69) 흥륜사 금당십성-아도화상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이전부터 칠처가람이 일어나 많은 고승이 활동하는 불법(佛法)과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 신라가 불교와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는 것은 칠처가람으로 우선 설명이 된다.전법시대의 사찰 흥륜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담엄사, 천왕사 등의 칠처가람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신라의 불교를 크고 깊게, 널리 알려 융성하게 일으켰던 고승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다. 고승들이 행한 놀라운 이적들은 기록으로 또는 입으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들과 관련된 유명사찰도 신라의 터 곳곳에 위치하고 있거나 사라지고 없어도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더듬어 보게 한다.신라의 고승 중에도 최초의 국찰로 전해지는 흥륜사의 금당에 벽화로 그려져 있었던 열명의 고승, 신라 십성으로 불리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이번 호에서는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과 안함을 만나본다.◆삼국유사: 흥륜사의 금당 십성동쪽 벽에 경(庚)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서쪽 벽에 갑(甲)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신라의 고승: 아도화상과 안함-아도화상: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승려로 전해지는 아도화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도는 아두라고도 불리며 고구려에 순도가 처음 불교를 전하고 2년이 지난 시기에 고구려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다.또 그의 국적은 분명하지 않으며 눌지왕 때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따르는 승려 3명과 지금의 구미지역 모례의 집에서 머물다 죽었다고도 전한다.이어 삼국유사에서 아도는 고구려의 사신이 신라에 와 머물며 신라의 여인과 사이에 탄생해 16세에 고구려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 불교를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아도가 불법을 전파하다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펴지 못하고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들어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구미시 해평면에는 아도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리사가 있다. 도리사는 아도가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에 절을 지어 그렇게 부른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도리사에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아도화상의 석상, 사적비, 탱화, 세존사리탑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아도화상의 석상은 높이 1m에 이르는 입상으로 윤곽이 뚜렷하며 기이한 느낌을 준다.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 중에서는 가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 외에도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좌선했던 바위로 전해지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좌선대, 아도화상이 입적한 곳이라는 금수굴 등이 있다.-안함(安含)은 신라의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전히 귀족들의 세력에 따라 나라의 정책이 운영되던 진지왕시대에 태어나 왕권안정을 찾아가던 진평왕 시대를 지나 선덕여왕 9년에 입적한 고승이다.안함은 흥륜사 십성 중의 한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고승 혜숙과 함께 이포진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중국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서 황제를 만나 뜻을 전하고 대흥사에 머물렀다.중국에서 십성에 이르게 한 비법과 현의와 진문을 5년 동안 배우고 605년에 우전국의 비마진제, 농가타 등의 서역 승려들과 함께 귀국했다. 신라에 서역의 승려들이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안함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했는데 승려 담화가 이를 필수했다. 저서로는 견문록 참서(讖書) 1권을 저술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1권을 저술했는데 그가 안홍(安弘)이라는 설도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의 환생-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겼으나 거짓 항복한 신라 장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아도는 신라에 태어나 그 신라 장군의 후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아도는 신라를 방문한 고구려 대신이었던 아버지 힘을 빌려 신라에서 다시 태어났다.그러나 아버지 아굴마가 고구려로 돌아가 버리자 어린 아도를 돌봐줄 힘이 부족한 어머니에게서 제대로 무술수업을 받지 못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아도는 먹고살기에도 어려워 겨우 글을 깨치는데 급급할 정도였다.어머니는 아도가 답답해하자 16살이 되던 해에 고구려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 뜻을 펼치라고 주문하며 아버지와의 약조와 증표를 전해 주었다.-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고구려 조정의 중요인물로 성장해 나라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 아도는 어렵게 아버지 굴마를 만났다.굴마는 아도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아보고 이름이 높았던 현창화상에게 아도를 보내 불법을 공부하게 했다. 아도는 삶의 참 이치를 깨달으며 복수에 대한 마음을 까마득히 잊고, 백성들의 깨우침을 인도하기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고구려에서 5년여 불법에 대한 공부를 익힌 아도는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아도는 어머니를 찾아가 아버지와의 만남과 공부한 내용을 낱낱이 전하고 신라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뜻을 알렸다.어머니의 동의를 얻은 아도는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전파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에 대해 어두웠던 궁중에서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오히려 배척하고, 아도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휘말려 오히려 핍박하게 됐다.그러던 중 왕비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며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왕은 전국에 방을 내려 왕비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는 3년간 세비를 면해주고, 큰 집을 하사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용하다는 의원들이 몰려들었지만 병을 고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아도가 궁으로 들어가 왕비의 병을 고쳤다. 아도는 고구려 현창화상에게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도력에 대해서도 배움을 얻어 이미 도력이 뛰어나 그가 마음먹은 일은 작은 산이라도 가볍게 옮길 수 있었다.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었지만 왕의 후의에 반해 귀족들은 여전히 불교와 아도화상을 업신여기며 불교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도는 신라 궁궐에서 불교를 전파하려던 꿈을 포기해야 했다.궁궐에서 사당을 지어놓고 선대왕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일을 담당하던 세력의 핍박은 노골적이어서 아도가 견디기 어려웠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한 아도는 궁궐에서 도망해 구미로 발길을 옮겨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어우러진 곳에 도리사를 짓고 암암리에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그러나 끈질긴 신라 귀족들의 불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아도는 후일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승려로 환생해 불법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할 것을 다짐하며 굴을 파고 입적에 들었다.-원효로 환생: 아도는 원효로 환생했다. 처음 화랑이 되어 전쟁터를 전전하며 장군으로 눈길을 끌게 됐다. 그러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갑옷을 벗은 원효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원효의 고민이 깊어지면서 전생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기로 했던 뜻을 생각해내고 불법공부에 매진했다. 아도는 고구려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의상을 대동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첩자로 오인받아 구속되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신라로 돌아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화쟁사상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아도는 삼생에 거쳐 그리던 불법을 만천하에 전하는 일을 해내는 훌륭한 승려로 후대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6) 법흥왕의 불교

법흥왕은 안정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율령을 제정, 공포하는 등의 다양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불교를 공인해 나라의 국정이념으로 삼고 흥륜사를 건설하면서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법흥왕은 키가 7자나 되는 거인으로 마음도 후덕해 금관가야를 합병하고도 왕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융화정책을 펼쳤다.그러나 기존 귀족들을 중심으로 두텁게 깔렸던 민간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는 왕실 중심으로 진행하는 불교정책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법흥왕은 왕위를 물려주면서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주지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공덕을 쌓는 법회를 주관하다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도 왕권의 강화를 위해 황룡사를 지어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정복군주로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진흥왕도 말년에는 거칠부 등 귀족들의 힘에 밀려 전대 법흥왕의 뒤를 이어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삼국유사: 탑탑안항 사사성장진흥대왕이 즉위한 지 5년인 갑자년(544)에 대흥륜사를 지었다. 547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지고 왔으며, 565년에 진나라 사신 유사가 승 명관과 함께 내경을 받들고 왔다. 이제는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서 있었다. 절의 깃발을 세우고 범봉을 걸며, 불상과 승려들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밭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문이 나라 안에 자애로운 구름으로 덮였다.불국토로부터 보살이 세상에 나오고,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내려오니, 이런 까닭에 세 민족을 통일해 나라를 만들고 사해를 껴안아 한 집을 이루었다. 그래서 덕 있는 이름은 천구의 나무에 쓰고, 신령스런 자취는 은하수에 비추었으니, 어찌 세 분 성인(아도, 법흥왕, 이차돈)의 위엄으로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그 뒤에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억 등이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때는 원화 12년 정유년(817) 8월5일이다. 이때는 제41대 헌덕대왕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그 무덤에 예불하는 신도들을 모아 결사를 만들고, 매달 5일마다 그 영혼의 아름다운 소원을 위해 단을 마련하고 법회를 베풀었다.또 향전에서는 시골 노인들이 그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했는데 5일이 바로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을 따르던 날이다.아, 이런 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신하도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다면 이런 공덕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서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법흥왕은 이미 없어졌던 터에 절을 세웠으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방포를 입었다. 궁중의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대중을 널리 교화시키는 일을 맡았다.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이어받은 성인으로 왕위를 계승해 위엄으로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자 모두 순종하며 잘 따랐다. 이어 법흥왕이 머물렀던 흥륜사에 대왕흥륜사라는 편액을 내렸다.법흥왕의 성은 김씨이고,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책부원구에서는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고 했다.왕이 처음 큰 공사를 시작하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영흥사를 창건하면서, 첫 비구니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을 묘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부서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진흥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고 하였다.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역사서가 적지 않은 것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임금의 교훈이 아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또 대통 원년은 정미년(527)인데 법흥왕은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응천주에 절을 짓고 대통사라 이름하였다. 성스런 지혜는 만세의 큰일을 꾀하게 마련이나/ 구구한 입방아는 추호 같은 뜻을 기만할 뿐이다/ 법륜이 풀려 나와 금륜을 굴러가니/ 순임금 같은 시절 바야흐로 부처님의 시대로 높아지네// -원종 법흥왕에 대한 글이다.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 흰 젖 더욱 깊이 느껴지네/ 어느덧 한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 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염촉 이차돈에 대한 글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흥왕의 뜻을 이은 진흥왕법흥왕은 왕비를 여럿 두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로 시샘한 왕비들의 투기로 아들이 태어날 기미만 보이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렸다.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왕실에서부터 서서히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해 국가이념으로 삼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경영하고 싶었다. 특히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으로부터도 독립한 당당한 나라로 서고자 했다.이를 위해 왕위를 물려받을 적자는 성골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왕족끼리 결혼을 추진했다. 왕은 자신의 딸을 동생과 결혼시켜 왕족, 성골의 신분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다.아들이 없었던 법흥왕은 동생의 아들이자 딸의 아들인 삼맥종을 지극히 사랑해 아들처럼 곁에 두었다. 결국 조카 삼맥종을 태자로 삼았다. 왕의 뜻에 따라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펼 수 있는 어린 삼맥종을 진흥왕으로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법흥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자신이 세운 흥륜사에서 승복을 입고 주지가 되어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홍복을 빌다 입적했다.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10여 년을 보내며 나름대로 국정 운영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진흥왕은 18세가 되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강한 나라를 주장하며 연호를 개국이라 바꾸고 정복군주로 나섰다.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황초령, 마운령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특히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궁궐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후궁 미실의 반대로 황룡사로 바꾸어 건설하고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팔관회를 여는 등으로 불교 진흥정책에 힘을 썼다.진흥왕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제한했던 일반백성들도 공부하고 승려가 될 수 있게 했다. 원광법사 등의 이름 높은 승려가 배출되는 기반을 조성했다.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에서 훗날 사람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미륵불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 지배하는 전륜성왕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의 이름도 동륜과 사륜으로 짓고 스스로 불교를 깊이 믿었다.아울러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를 크게 활성화 시켰다. 화랑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동량으로 키우는 데 성공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그러나 진흥왕은 후궁 미실의 사심이 가득한 전략에 밀려나는 운명을 맞았다. 미실이 진흥왕의 아들 태자 동륜과 정을 나누다 동륜이 다른 후궁에 눈을 돌리자 거칠부와 손을 잡고 제거했다. 이어 진지왕과 관계를 맺으며 왕비로 간택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진지왕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그마저 제거하고, 다시 진흥왕의 손자였던 진평왕을 옹립했다.진흥왕은 죽은 태자 동륜을 위한 추도식을 전대 법흥왕이 입적했던 흥륜사에서 올리다가 미실과 거칠부의 계략에 의해 연금되어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고,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5) 신라 불교의 공인

새로운 문화나 문물을 수용할 때는 어떠한 계기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의 큰 발전을 가져온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그러한 절차가 있었다. 이차돈이 목숨을 바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면서 널리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열었다.삼국유사는 법흥왕을 원종, 이차돈을 염촉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흥왕이 불법(佛法)의 참됨을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했지만 토착신앙에 뿌리가 깊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왕의 마음을 헤아린 하급관리 이차돈이 불법의 전파를 위한 길을 제시했다. 목숨을 바친 이적으로 귀족들도 감복해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법흥왕의 불교 공인에 이어 신라에는 빠르게 불법이 확산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받아들였지만 국가적인 경영이념으로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뜨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루는 상당한 힘이 됐다.이차돈의 희생은 나라를 크게 일으키고,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큰 사랑의 불씨가 되었다.◆삼국유사: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승려 일념이 편찬한 ‘촉향분예불결사문’에 신라 불교 공인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신라 법흥대왕 때이다. 궁궐 안을 잘 다스리며 해 뜨는 나라의 곳곳을 굽어 살피다가 옛날 한나라의 명제가 꿈을 꾸고 불교가 동쪽을 흘러들어온 일을 생각하고 “과인이 왕위에 오른 다음 백성들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고자 하였노라”고 말했다.그러나 신하들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큰 뜻만을 지키고자 하고, 절을 짓겠다는 신령스런 대책에는 따르지 않았다.대왕이 탄식하며 “과인이 부덕하여 대업을 받들지 못하는구나. 위로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 뭇 백성들의 기쁨을 주지 못하네, 나라를 다스리는 바쁜 중에도 마음을 불교에 두었더니 누가 이 일을 도와주리오”라며 개탄했다.그때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이며 이름을 염촉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 종은 곧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대나무나 잣나무처럼 빼어난 바탕에다 맑은 거울 같은 뜻을 품었다.22세의 염촉이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신이 듣기로는 옛 사람들은 나무꾼에게도 대책을 물었다 합니다. 외람되지만 죄를 무릅쓰고라도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며 뜻을 아뢰었다.“사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고 왕이 말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데 있는 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다”고 듣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다”라 칭찬하며 감복했다.이에 왕은 짐짓 위의를 갖추고 동서로는 풍도를, 남북으로는 상장을 벌려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들여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늦추려 하는가”라며 물었다.이에 여러 신하는 전전긍긍하며 수선스레 맹서하고 여기저기 손가락질만 하는 것이었다. 왕은 사인을 불러 나무랐다. 사인은 얼굴빛을 잃고 어떤 말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왕이 크게 화를 내며 목을 베라 명령을 하니, 형리가 묶어 관아 밖으로 나갔다. 사인이 맹서를 바치자 옥리가 목을 베는데,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하늘은 사방이 캄캄하게 빛을 잃어 어둡고 땅은 육방이 진동하며, 비처럼 내리는 꽃이 표표히 떨어졌다.왕은 슬픔에 겨워 비통한 눈물을 옷에 적시고, 대신들은 근심스러워 식은땀을 관복에 흘렸다. 달디 단 샘물이 홀연히 솟아나고, 물고기와 자라는 다투어 튀어 오르며, 곧은 나무는 먼저 꺾이고, 원숭이는 떼 지어 울었다.춘궁에서 일하던 동료는 피눈물을 흘리며 쳐다보기만 하고, 월정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애끓듯 서러운 이별을 했다.관을 쳐다보며 우는소리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듯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었다 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 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라고 했다.이어 북산의 서쪽 마루에 장사지냈다. 나인이 슬퍼하며 좋은 땅을 골라 절을 짓고 자추사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예를 갖추어 대대로 영화를 지키고, 사람마다 도를 행해 불법의 이로움을 깨달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이차돈의 결심이차돈은 원래 진골 출신의 왕족이다. 아버지가 궁궐에 일하였으나 청렴해 살림살이는 풍족하지 않았다. 차돈은 어려서부터 어질고 착해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글 읽기를 좋아해 일찍이 관복을 입었다.차돈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꿈에 하얀 백조가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을 쪽을 향해 크게 날갯짓을 하는 태몽을 꾸었다. 그래서 큰 사람이 될 것으로 믿고 아무에게도 태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한번은 이차돈이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 온 몸이 멍들고, 옷은 먼지를 덮어써 거지꼴이었다. 못된 왈패들이 서당의 친구를 괴롭히는 현장을 보고, 책을 던져놓고 친구를 끌어안고 뭇매를 맞았다.이렇듯 차돈은 심성이 착하고 의리가 좋아 친구들이 늘 옆에 붙어다녔다. 그러나 차돈은 공부하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차돈은 글 읽기는 물론 무술 수업에도 착실하고 지혜로웠으며, 체격이 관운장을 닮은 장군 틀이었다.이차돈이 차분하게 글 읽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불법의 영향이 크다. 인도에서 당나라와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 유학승과의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사상적으로 불교에 깊게 몰두했다.차돈이 벼슬에 나아가 공무를 보면서도 불교 서적을 읽는데 열중해 그는 이미 신라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그가 스무 살 생일을 맞는 날 저녁, 집에서 성인식을 겸해 관부로 나아간 일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무르익어갈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도인이 찾아왔다. 저녁상을 받은 도인이 차돈에게 부처가 그려진 비단 폭과 경전을 전해주며 불법에 대한 공부에 전념할 것을 주문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그날부터 차돈은 부처님이 그려진 비단을 사당에 걸어두고 매일 경전을 읽으며 불도를 닦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면서 차돈은 부처님이 나타나 빙그레 웃으며 손짓하며 부르는 꿈을 여러 차례 꾸었다.왕이 불교를 널리 알리고 싶어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이 희생할 터이니 여러 신하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를 보이라고 수차례 설득했다. 차돈의 확고한 신념에 법흥왕도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라 여기고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아끼는 신하 차돈의 목을 베자 우유 같은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진동하며 향기나는 꽃 비가 내렸다. 만 백성이 어버이가 돌아가신 듯 슬퍼하며, 한편으로 기뻐하며 찬양하고 불법을 믿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에서 삼국유사 기행 신라 불교 공인 과정 둘러봐

삼국유사기행단이 경주지역에서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답사하며 문화콘텐츠 발굴 작업을 이어가는 2020년 첫 번째 기행을 가졌다.삼국유사기행단 40여 명은 지난 23일 황룡사 역사관에서 출발해 흥륜사, 흥륜사지 경주공고, 영흥사지, 신라불교를 공인한 법흥왕릉, 이차돈의 목이 떨어졌다는 금강산 백률사 등을 답사했다.문화해설을 맡은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흥륜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이자 법흥왕이 최초 국립사찰로 지은 절”이라며 “불교공인과 율령공포 등의 많은 업적을 기록하고 말년에 흥륜사에서 승려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다.또 “법흥왕은 불교를 국가경영 철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아끼는 신하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 불교를 공인했다”며 “세상의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면서 법흥왕의 과감한 결단을 칭송했다.이어 “신라의 칠처가람으로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담암사, 영흥사, 사천왕사 등의 대규모 절이 있었다”면서 “신라는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불교가 융성하게 될 인연이 이어지고 있던 땅”이라고 설명했다.삼국유사 기행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는 3~5명씩 소규모로 답사여행을 이어오다 이날 처음으로 40명을 선착순 신청을 받아 진행했다. 기행단 운영은 대구일보와 이노버즈 주관으로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진행하는 사업이다.다음달 삼국유사 기행은 흥륜사의 금당십성, 가섭불연좌석, 황룡사 장륙,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약사불 등에 대한 답사를 이어갈 계획이다.김구석 소장은 “삼국유사 이야기는 황당한 신화, 전설처럼 엮어진 내용도 많이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역사의 단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기행이 2년째 접어들어 신라의 흥망성쇠에 이어 불교의 전래 흥법편, 탑과 불상에 대한 이야기의 탑상편으로 이어지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며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9) 불교의 전래

우리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교육한다. 그러나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가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더러 시선을 끌기도 한다.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수긍이 가기도 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오늘날 불교가 민중 속 깊숙이 퍼진 것과 다르게 삼국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이후 원효대사가 주장한 소승불교가 일반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는 본격적으로 백성들에게 전파되면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또 건축, 조각,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화예술로 승화되었다.아도화상이 전해 출발한 신라에서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발전하면서 화랑정신과 결합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근원이 되어 국민들에게 국가적 이념으로 승화했다.삼국유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례로 살펴보고, 화려하게 불교문화로 꽃피운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써본다.◆삼국유사: 불교의 전래-순도가 고구려에 오다고구려 본기에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또 4년(374)에 아도가 진나라에서 왔다. 다음해 2월에 초문사를 짓고 그곳에 순도가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를 짓고 아도가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비롯된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승전에서 “두 사람이 위나라에서 왔다”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실은 전진에서 온 것이다. 또 말하기를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 한 것도 잘못이다.고구려시대 안시성, 다른 이름으로 안정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 요수는 다른 이름으로 압록이고,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 어찌 개성의 흥국사를 이르는 것이겠는가.일연선사는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이라고 읊었다.-마라난타가 백제 불교를 열다백제 본기에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왔다. 예의를 갖추어 궁중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했다. 다음해에 도읍지인 한산주에 절을 짓고 승려 열 사람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이것이 백제에서 불교가 시작된 것”이라 적고 있다.또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년(392) 2월에 불교를 잘 믿어 복을 얻도록 하였다.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이다.일연선사는 “천운이 창조되던 처음에는/ 대체 쉬웁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늙은이는 춤과 노래에 실어 절로 풀고/ 옆 사람까지 이끌어 눈뜨게 했다”고 읊었다.-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놓다신라 본기는 “제19대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으로 왔다. 그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잘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옷과 향기나는 물건들을 내려주었다. 왕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쓰일 데를 알지 못해,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온 나라를 돌며 물어보라 했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더니만 이는 향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정성을 신성에게 알리는 것이오. 만약 이것을 태워 소원을 빌면 영험이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고 적었다.때마침 왕의 딸이 병석에 눕자 사람을 시켜 묵호자를 불러왔다. 향을 태우며 빌자 딸의 병이 곧장 나았다. 왕은 기뻐하며 많은 상을 내리려 하는데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또 21대 비처왕 때에 아도화상이 세 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왔다.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한데 여러 해를 머물다 병 없이 죽었다. 같이 왔던 세 사람은 머물며 경문과 율법을 가르쳤는데 더러더러 믿는 사람이 생겨났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아도의 어머니는 고구려 사람으로 이름은 고도령이다. 고도령은 평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을 경영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아굴마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그 식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도령과 가까워지게 되어 아도를 낳았다.고도령은 아도가 12살이 되자 “네 아버지는 중국의 대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분이시다. 중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공부를 하라”고 일러 보냈다.아도가 중국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도의 아버지는 궁궐에서 재상의 지위에 올라 황제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아들을 황제에게 인사를 시켰다. 황제는 아도를 아껴 곁에 두고 3년이나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공부하게 했다.아굴마는 15살이 된 아도를 공부가 깊은 현창스님에게 보내 불법에 대해 철저하게 배우도록 했다. 아도는 재치가 있었다. 궁중에서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며 많은 공부를 빠르게 습득한 데 힘입어 불법에 대한 이해도 습자지에 먹물 스며들듯 빨아들였다.아도의 불교 철학에 대한 이해는 남달랐다. 현창스님과의 일문일답식 공부에서 세상의 이치를 막힘없이 풀어내며 민중들의 고뇌를 해소해 줄 수 있는 답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아도가 20세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신라 미추왕의 성국공주를 소개해주며 신라로 돌아가는 길 안내를 맡으라 일렀다. 이어 황제는 현창스님이 아도에게 부탁한 것과 같이 신라에 불법을 먼저 전하라고 당부했다.아도는 성국공주를 호위해 신라까지 무사히 들어와 미추왕을 만났다. 미추왕은 공주를 안내해 온 아도의 인품과 늠름한 모습에 이끌려 궁궐에 머물게 했지만 생소한 불교에 대해서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그러던 중 성국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용하다는 무당과 의사들도 고치지를 못하자 미추왕이 전국에 방을 내려 공주의 병을 고쳐주면 후한 상을 줄 것이라 했다. 이에 아도가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려 공주의 병을 깨끗하게 고쳤다.왕이 크게 기뻐하며 아도화상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도화상은 절을 지어 불법을 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이에 왕은 궁궐 서쪽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어 아도가 관장하게 했다.미추왕이 죽은 다음 대신들이 요상한 주문을 외운다며 아도를 몰아내었다. 아도는 이때 이미 세상에 대한 이치를 모두 터득하고, 술법을 익히고 있었지만 술법을 세상에 드러내어 펼쳐보이지는 않았다.아도화상은 이들을 피해 속림 모록의 집에서 절을 짓고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도가 절을 짓고 신라 서민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이 도화와 이화가 만발한 땅이어서 사람들은 절 이름을 도리사라 불렀다.아도화상은 이미 속세의 정리에서 벗어나 달관한 도사로 깨달음을 터득하고 있었다. 궁궐에서 끈질기게 그를 추격해오자 아도화상은 자신이 지은 도리사의 지하 석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면벽 수행하다가 그 자리에서 입적했다. 그의 앞에는 인연이 닿는 후세에 다시 오리라는 글을 남겨두고, 편안히 잠든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불교, 개신교 신년 모임 열고 새해 업무 들어가

불교와 개신교가 잇따라 신년 모임을 열고 새해 업무에 들어갔다.대한불교조계종은 지난 8일 대구 동화사에서 ‘종정예하 신년하례·대종사 법계품서식’을 열었다.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은 신년 법어에서 “종교는 인간 내면의 정화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면서 “불교의 가르침인 지혜와 자비가 정치와 사회의 기본이념이 돼 생명존중과 인류의 행복이 실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총무원장 원행스님은 “모든 종도들과 힘을 합쳐 백만 원력 결집 불사를 통해 한국 불교의 미래를 올곧게 세우겠다”며 “갈등과 대립으로부터 종단이 국민과 불자들에게 신뢰받고 사회에 등불이 되도록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함께 치러진 대종사 법계품서식에서는 노스님 12명이 조계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에 올랐다. 이로써 종단 내 대종사는 모두 60명으로 늘어났다.대종사는 수행력과 지도력을 갖춘 승랍 40년 이상, 연령 70세 이상 스님들에게 주어지는 종단 최고 법계다. 출가 수행자로서 진리를 깨달은, 존경받는 선지식으로서 지위를 의미하기도 한다.대구기독교총연합회 신년 교례회와 ‘나라와 대구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기도회’가 지난 3일 범어교회에서 열렸다.이날 행사는 1부 음악공연에 이어 2부 예배와 3부 신년 인사회 순서로 진행됐다.2부 예배는 남덕교회 최원주 목사(상임회장)의 사회로 시작해 대구성시화대표본부장인 김홍기 목사(동부제일교회)의 기도와 대표회장인 장영일 목사(범어교회)의 설교에 이어 직전회장인 박병욱 목사(대구중앙교회)의 축도로 마무리됐다.장영일 목사는 '담을 뛰어 넘어 갑시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권자이심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용기를 갖고 담을 허물어 세계로 뻗어가는 대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또, ‘나라와 대구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와 ‘2019년 부활절 연합예배를 위하여’, ‘교회연합과 부흥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특별 기도 시간도 가졌다.마지막 3부 순서에서는 권영진 대구시장과 배지숙 대구시의회 의장, 강은희 대구시 교육감, 김부겸 국회의원, 이태훈 달서구청장, 김대권 수성구청장 등 지역 기관장과 국회의원, 교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 교례회가 열렸다.신년 인사회에서 권영진 대구시장은 “대구시 신청사 이전, 통합신공항 유치 등 큰 일을 앞두고 있다. 이를 위해 대구지역 기독교인들이 기도해달라”고 당부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김문오 달성군수,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으로부터 표창

김문오 달성군수가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으로부터 불교문화 창달 및 진흥, 종교인 화합에 이바지한 공적으로 표창을 받았다.팔공총림 동화사(주지 효광스님) 신도회는 지난 18일 호텔 인터불고에서 ‘대구·경북 불교 지도자 송년의 밤’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지역 사찰 스님, 신도회 임원, 신행단체 임원, 기관단체 및 정계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종정은 조계종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종단의 가장 큰 어른으로 종정 표창은 지방자치단체장에게는 최초로 수여됐다.김문오 군수는 지난 2014년, 전국 폐사지 5천393개소 중 전국 최초로 비슬산 대견사를 복원‧중창했으며 일연스님 삼국유사 재조명사업 추진, 비슬산 108km 둘레길을 조성했다.또 최근에는 ‘대구에서 가장 맛있는 물’로 선정된 비슬산 천천수 개발과 금수암 전망대 설치, 비슬산 산사음악제 등 불교문화 진흥에 이바지했다.특히 ‘대견사 중창백서’, ‘일연, 비슬산, 37년’ 등 발간과 일연스님 동상 및 비석제막,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에 대한 치적을 역사적으로 고증했고, 달성군 종교인연합회를 발족‧운영해 기독교와 천주교 등 종교인의 화합에도 일조했다.김문오 달성군수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구상한 대견사를 전국 최초로 복원, 중창하며 감회가 새로웠다. 앞으로도 전통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지속적으로 노력해 후손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김재호 기자 kjh35711@idaegu.com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우학스님 포교대상 선정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우학스님이 제31회 조계종 포교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조계종 포교원(원장 지홍스님)은 최근 포교대상 심사위원회를 통해 제31회 포교대상 수상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포교대상은 포교활동을 통해 불교와 종단발전에 지대한 공이 있는 사찰, 개인 및 단체를 대상으로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매년 연말에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우학스님은 포교에 대한 남다른 원력으로 지난 1996년부터 현재까지 10여 곳의 도량을 설립했다.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를 창건해 대사회 활동과 도심포교 및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사회복지법인 무일복지재단과 의료법인 무일의료재단을 운영하며 지역사회 곳곳에 부처님 법이 퍼지도록 하는 데 이바지 하고 있으며, 참좋은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법인 무일학원을 설립해 불교인재를 양성에도 공헌하고 있다.한편 포교대상 시상식은 3일 오후 2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봉행된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구미 불교문화의 관광자원화…천년세월 우리 삶에 스며든 불교…민족의 맥을 잇는 문화가 되다

한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공공재’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어디 여행이라도 가려면 가장 먼저 그곳에 유명 사찰이 있는지를 알아본다. 물론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에는 볼만한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그밖에 의성 고운사처럼 몇몇 사찰은 평소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사찰 음식을 장만해 대중들에게 공양하기도 한다.또 마을의 어느 할머니나 어머니는 ‘무슨 무슨 보살이네’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만큼 불교는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불교문화의 이해구미의 불교를 연재하면서 중간 중간 불교문화를 소개했다.인도 불교에서 시작된 탑의 유래와 구미에 남아 있는 탑의 형태, 구미 불교의 종단 변화, 불교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용의 의미, 일주문과 천왕문의 의미, 금오산의 사찰 분포 형태, 불상의 구별방법과 보살과의 차이점, 불상마다 다른 손 모양(수인) 등이 그것이다.종교와는 별도로 유교를 유교문화, 이슬람을 이슬람문화라고 부르듯이 불교를 불교문화라고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종교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다.하지만 불교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불교를 신앙해서 될 일만은 아니다. 우린 문화를 어려서부터 생활 속에서 체득하기도 하지만 학교 등에서 배운다.불교문화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불교문화를 이해하려면 역시 배워야 한다.구미의 대표적인 농악인 무을농악이 태어난 곳이 무을 연악산 자락의 수다사란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불교는 1천600여 년 이상 우리의 삶 속에 함께하면서 특유의 어울림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발전시켜왔다.그래서 불교문화를 이해해야만 불교문화와 결합한 우리의 전통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불교문화의 진정한 저력이다.‘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불교문화를 알아두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찰의 전각과 불상 등 문화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불교문화의 관광자원화지난 1일 광주불교사찰순례단 40여 명이 제주를 찾았다.이들은 관음사와 천왕사 등 제주불교 성지순례 길을 탐방한 후 제주불교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체험했다.이들이 도보로 걸었던 길은 제주가 제주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만든 불교 성지순례 길, 일명 ‘절로 가는 길’이다.제주는 2012년 ‘지계의 길’을 시작으로 6개의 불교순례 길을 조성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최근 관광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제주시는 도보순례 길 활성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제주불교순례 길은 마음의 혼돈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무아’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제주시는 이를 위해 보시의 길(대원정사~해륜사, 42.9㎞), 지계의 길(관음정사~관음사, 14.2㎞), 인욕의 길(관음사~존자암, 21㎞), 정진의 길(존자암~남국선원·선덕사, 18.6㎞), 선정의 길(선덕사·쌍계암~광명사, 39.6㎞) 등의 순례코스를 지정했다.제주의 불교성지순례는 최근 일상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걷는 즐거움과 함께 종교를 통한 마음의 안식과 여유를 가져다주는 건강과 치유의 관광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제주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는 불교문화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경기도는 ‘경기방문의 해’ 사업 중에 평택시 수도사 전통사찰 음식 학습체험관, 포천시 자인사와 파주시 보광사 투어, 양평군 용문사의 ‘산사로 떠나는 마음여행’ 등 불교를 테마로 한 사업들을 포함하기도 했다.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해 도지사 선거 당시 호국불교의 숨결이 이어지는 경북의 전통사찰과 불교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전통사찰의 보존과 관리, 불교문화 홍보와 관광자원화를 약속한 바 있다.이 도지사는 “유명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 미술, 불교 문학, 불교유적, 순례길, 그리고 무형적 문화로서 불교 음악과 의례의식, 수행생활 등을 종합해 체계적이며 독창적인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문화관광 테마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구미 불교문화 관광자원화구미는 아도가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한 신라불교초전지다.이후 통일신라 때에는 신라불교의 성지로 지역 곳곳에 융성했던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가탑과도 견줄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륵사 폐탑이 그렇고, 아도가 창건했다는 도리사가 그렇다.구미시는 장세용 시장 취임 이후 최근 문화와 관광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관광진흥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이에 자문할 전문가 자문회의를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하지만 국내 최고 산업도시라는 명성에 밀려 새로운 관광콘텐츠를 찾기란 쉽지 않다.그래서 장 시장이 주륵사 폐탑 복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구미의 불교문화 자원은 어떤가. 충분하다.아도화상이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파했던 구미시 도개면에 신라불교 초전지가 있다.신라불교 초전지는 경북도 3대 문화권(유교·신라·불교권) 조성 전략 사업에 선정돼 국·도비와 시비 등 400억 원을 들여 2017년 10월13일 개관했다.3만6천여㎡(1만1천 평)나 되는 부지에 초전기념관과 전통한옥체험관, 대강당, 불교음식체험관, 단체생활관과 전시가옥 등을 갖췄다.발우공양과 각종 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휴일에는 대관하기 어려울 정도다.이곳에선 기존 사찰 템플스테이와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객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있다.하지만 여기까지다. 지역 곳곳에 산재한 불교문화자원과의 연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도리사가 지척에 있고 주륵사 폐탑지가 바로 곁에 있지만 이와 연계한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도리사와 수다사 인근에는 아름다운 임도가 있다. 이를 이용한 순례길 걷기 등의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불자들은 윤달이 되면 각기 다른 세 곳의 절을 한꺼번에 순례하며 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삼사순례를 행한다. 최근에는 윤달과 관계없이 불자들 사이에서 성행하고 있다.구미시 사암연합회를 통해 삼사순례객을 모으고 다른 지역 불자 단체들과 교류하며 순례행사를 갖다 보면 더 많은 외지 불자들이 신라 때 찬란하게 꽃피웠던 구미의 불교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구미를 찾을 것이다.물론 의성 고운사처럼 사찰도 사찰 나름의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천생산 천생사처럼 가을이면 국화 축제를 연다든지, 도개 문수사의 와인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도 괜찮다.각 사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계해 관광자원화할 수도 있다.◆대혜 스님(금오산 약사암 주지)이 시대 최고의 과제는 경제와 관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고 그 쓰일 곳을 만드는 것은 관광이 큰 몫을 담당한다.그런 면에서 구미는 큰 가치가 있는 곳이다.산업지향적인 구미에서 관광마저 진흥시킨다면 구미의 발전은 약속된 것이라 확신한다.불교와 유교 등 역사적 문화와 천혜의 자연 그리고 현재 산업기지인 구미 국가산업단지를 관광자원화할 수 있다면 구미는 한국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이다.금오산은 어느 도시의 산보다도 특별하다. 이 때문에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감탄한다.최초의 도립공원에 걸맞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할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수많은 산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올라보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금오산 마애여래불뿐만 아니라 곳곳의 등산로와 전망대, 역사적 가치는 전국 세 곳의 금오산 중의 으뜸이다.금오산과 신라 최초의 불교 전래지 모례원, 태조산 도리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금오산 약사암에서 굽어보는 낙동강은 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세계 어느 지역의 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또 구미 국가산단은 생산에 그치지 않고 산업의 역사를 가르치고 그에 따른 전시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산업문화로 만들어 낸다면 국내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이제는 공장만 지어서 윤택한 삶을 사는 시대는 아니다.경제와 문화가 조화를 이룰 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후손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이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천 년을 한결같이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진리 체득한 이, 모두 ‘붓다’ 사찰엔 다양한 부처 있어 손모양으로 제 이름 말하네

사찰에는 많은 부처가 있다.석가모니불 외에 미륵불이니, 아미타불이니, 약사여래불이니, 아미타불이니 그 수를 세고 외우기도 어려울 정도다.왜 이렇게 많은 부처가 존재할까. 불교 학자들은 불교가 ‘진리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래서 유교나 도가, 희랍철학 등과 같이 노력해서 진리를 체득한 이들, 즉 진리와 하나가 된 인간을 ‘성인’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들을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진리가 곧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라는 말로 이 때문에 다양한 부처가 있을 수 있다.◆셀 수 없이 많은 부처현재를 관장하는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다.하지만 인간세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이를 관장하는 부처가 연등불(과거), 미륵불(미래)이다. 시간적 차이를 둔 이들을 합쳐 삼세불이라고 한다.또 위치상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서쪽에는 아미타불이 있는데 이를 삼계불이라고 부른다.공간상 우주에는 지구 외에 다른 많은 세계가 있다. 이곳에도 진리를 체득한 이들이 있으며 이들을 동서남북, 상하 등 방위로 표현해 10방의 부처, 즉 시방불이라고 한다.그러다 보니 사찰엔 많은 부처를 모시고 있다. 통상적으로 법당 가운데 부처를 앉히고 양쪽에 두 보살을 두는 협시가 일반적이다. 일종의 비서 역할이다.대웅전 석가모니불 곁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극락전 아미타불 옆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뜻을 받든다.금오산 약사암처럼 약사여래불 곁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앉힌다.이와는 달리 보살이 주존이 될 경우에는 보살보다 낮은 협시가 함께 모셔진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 곁에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지장전 지장보살 곁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앉아 있다.◆불상은 손으로 말한다불상을 자세히 보면 손 모양이 모두 다르다. 불상의 이름은 이를 통해 구별할 수 있다. 이를 ‘수인’이라고 한다.처음 인도 불교는 인도문화를 중심으로 오른손을 강조해 오른손이 주가 됐지만 불교가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왼손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화했다.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오른손과 왼손이 혼합해 쓰이고 있다.우리나라 각 사찰에 모셔져 있는 불상 중 비로자나불의 경우 인도문화와 중국문화가 혼재된 보습을 보인다.앞서 불상의 이름을 수인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은 구품인, 비로자나불은 지권인 등 특정 수인을 사용한다.항마촉지인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마왕을 항복시킨다는 뜻으로 석굴암의 석가모니불이 이 모양을 하고 있다.약사여래불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상태에서 왼손은 약기인이 된다.(약그릇을 들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손의 방향이 바뀐 불상도 여럿 있다)극락이라는 이상세계를 주관하다는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양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대 동그랗게 만드는 손 모양으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돈 내놓아라’라고 하는 모습이다.마지막으로 비로자나불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든 뒤 왼손의 검지를 세워 말아쥐는 모습이다.◆부처와 보살보통 불상은 의복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모양은 상투의 모습이 종교적으로 변화한 육계(정수리가 두둑하게 솟아오른 모습으로 최고의 지혜를 나타냄)와 나발(머리카락이 소라고둥처럼 틀어 말린 모양)로 특이하다.불상은 약사여래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물건을 손에 쥐지 않는다. 수행자의 무소유를 강조한 것이다.이에 비해 보살상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의 국왕을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보살상에는 왕관(보관)과 영락이라고 하는 다양한 길이의 구슬장식과 장신구를 표현한다.귀고리와 팔찌, 발 찌를 한 보살도 볼 수 있다.보살상은 갖고 있는 물건으로 구별한다. 문수보살은 칼을 쥐고 있고 보현보살은 폐업경(불교경전)을 들고 있거나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관세음보살은 군지라는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대세지보살은 폐업경이나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는다.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은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보살로 이마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달을 상징하는 하얀 원이 묘사된다.잘 알다시피 지장보살은 육환장과 투명한 보주를 들고 있다. 금오산 법성사 마당에 가면 큰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 상을 만날 수 있다.구미에는 규모가 아주 큰 불상 2구가 거대한 암벽에 조각돼 있다.하나는 보물 제1122호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고 또 하나는 보물 제490호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다.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라고 불렸다.하지만 형태 등을 종합해 본 결과 보살의 모습이 아닌 부처의 모습이라고 판단해 문화재청이 2010년 마애여래입상이라고 명칭을 변경했다.이처럼 천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윤곽은 흐릿해지고 일부는 손상돼 당초 만든이의 생각과는 다른 이름이 붙는 경우도 생겨났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인동에서 선산으로 가는 길목 황상동 속칭 돌고개(석현)라는 고갯길 왼쪽, 산과 공장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선 큰 바위가 있다.신라의 영원한 통일을 기원하며 사방정토, 극락세계가 이 땅에 성취하길 위해 만든 석불상으로 보물 제1122호인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돌부처는 높이가 7.2m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바위의 면이 고르지 못하고 곳곳에 균열과 부서짐이 심하지만 보존상태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인근에는 금강선원이라는 절과 석불상 정리 괴장에서 나온 작은 파편들이 있어 예전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마여여래입상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육계가 있고 잘 정제된 듯한 얼굴의 이목구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턱 끝까지 내려온 큰 귀다.대체로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의 이 불상은 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있다. 왼손은 바닥이 안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밖을 향하게 해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인의 모양으로 보아 구품인, 즉 아미타여래에 가깝다.이에 비해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모서리에 조각돼 있다. 여래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다.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도 원만 상으로 처리됐다. 귀는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처첨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이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은 아마도 경주인 듯하다. 신라시대와 통일신라 때 제작된 대부분의 마애불상이 수도인 경주로 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물론 금오산 해발 800m에 있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도 큰 바위 모서리를 활용해 같은 방향을 응시하도록 만들었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에는 구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에서 파견된 한신이라는 장군이 어느 전쟁터에서 백제군에게 포위됐다.그런데 꿈에 보살이 희모시자(중국 항주의 승려회통에 기록, 아미타불을 말함)로 변신하고 나타나 도망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이에 한신 장군은 보살이 알려준 대로 작전을 수행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한신은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지만 생명의 은인이었던 희모시자, 즉 아미타불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 황상동 이곳 암석에 희모시자의 모습을 조각했다고 한다.현재 균열에 따라 보호각을 씌워 둔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더 이상의 균열을 방지하고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정밀안전진단과 데이터 분석연구를 진행하고 있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나, 금오산 마애여래입상과 같은 석불상은 절벽이나 바위의 면을 조각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다.대부분 조성될 때 그 모습, 그 위치에 있어 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의 전파 경로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금오산 약사암…기암괴석 험지의 맨 꼭대기, 가장 뛰어난 절경에 내려앉은 ‘천년고찰’

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은 통일신라 이후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기 전까지 수많은 절이 곳곳에 들어서며 불교의 꽃을 피웠다.금오산은 동쪽에서 바라다보면 큰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와불 형태가 도드라져 보인다.평지지형에는 제법 큰 규모의 절이 지어지고, 산록에는 그 지형에 맞게 아담한 절이 들어섰다. 또 깎아지른 절벽 끝이나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자리한 절들도 생겨났다.신령한 영산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1천여m 가까운 산 정상에도 절은 자리했다. 금오산 정상에는 약사전과 보봉사, 동양사가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보봉사와 동양사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신라시대 창건했다는 약사전만 약사암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불교의 성지 금오산시절을 깜빡한 추위가 살을 에이게 하는 날. 금오산(976.5m)에는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평일 때 이른 강추위에도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에는 많은 등산객이 몰려 사진찍기에 바쁘다.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선굴이 있다. 고려 때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곳인데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도선굴 아래에 대혈사라든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일선지에는 ‘대혈사는 금오산 북쪽에 있다. 임진란 후에 중창하였고, 서원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 ‘야은 선생이 항상 대혈사 인근 누각 위에 거치하였고, 금산에서 대나무를 손수 옮겨 여기에 심었다. 고을 사람들이 대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지금도 오히려 짙푸르고 무성한데, 이름을 야은죽이라 한다’고 했다.이와 관련된 야은 길재의 시가 전한다.대나무 빛은 봄가을로 절의를 굳게 하고(竹色春秋堅節義)/ 흐르는 시내물은 밤낮으로 탐욕을 씻어주네(溪流日夜洗貪婪)/ 마음의 근원이 깨끗하여 티끌이 없으니(心源瑩淨無塵滓)/ 이로써 바야흐로 도리의 참맛을 알 수 있다네(從此方知道味甘)오래된 절과 영남 성리학의 문을 연 유학자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다.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멀리서 바라다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산이라는 이야기다.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해 오래 산을 탄 등산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산이다.그래서 일부 구간의 이름은 일명 ‘할딱고개’이기도 하다. 대혜폭포에서 수백m 정도 거리인데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가 급하긴 마찬가지다.또 이를 통과해도 8부 능선에 있는 철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철탑 인근은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안전시설을 설치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다.철탑을 지나면 평지가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다시 개축했다는 금오산성의 내성을 지날 때까지는 평지다.하지만 정상을 500여m 남겨두고 다시 급경사가 이어진다.할딱고개와 철탑까지는 그래도 잠시 쉬면서 뒤돌아서 멀리 구미시내와 낙동강을 조망하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정상을 앞둔 이곳은 주변을 둘러봐도 참나무뿐이다. 눈을 시원하게 하는 그 무엇도 없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면 사고가 날 수 있는 곳이 금오산이다.정상 부근 작은 돌을 쌓아올려 만든 탑이 멀리 보인다. 한 노인이 사연을 담아 탑을 쌓았다는 이곳은 보봉, 백운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보봉사가 있었다고 한다.금오산 정상은 현월봉(976.5m)이다. 초승달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 각오는 했지만 추위가 만만찮다. 산을 오르며 느끼지 못했던 칼바람에 등산객들이 우왕좌왕한다.◆성속의 경계에 있는 약사암현월봉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약사봉이다. 그 아래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약사암이 자리를 하고 있다.정상에서 내려와 동쪽을 향하면 ‘동국제일문’이라고 쓴 약사암 일주문이 나온다.일주문은 앞으로의 공간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상징문이다. 일주문 너머는 부처님의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약사암 일주문을 지나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길 양옆으로 막아선 엄청나게 큰 바위틈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내가 서 있는 쪽은 음지이고, 겨울이고, 어둠이고, 세속적인 데 비해 바위 아래로 드러난 모습은 양지이고, 여름이고, 광명이고 성스럽다.경북 8경으로 꼽히는 금오산에서도 가장 절경인 곳, 그곳에 약사암이 있다.인공으로 만든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서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을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은 전각 뒤로 마치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절벽, 약사봉은 그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인 약사암은 신라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초년에 천하 비경을 찾아 이 바위 아래에서 참선할 때 하늘의 선녀가 하루 한 끼의 주먹밥을 내려주어 하루하루 요기를 했고 약사여래가 내려와 시중을 들어줘 사바와 번뇌에서 벗어나 고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약사암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학자며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의 일선지와 정조 23년(1799년)에 간행된 범우고에도 남아있다.일선지에 ‘약사전은 약사봉 아래에 있다. 돌 벼랑이 높이 솟은 곳에 바위틈을 타고 작은 암자를 지었다. 나무다리를 건너 절벽을 붙잡고 들어가는데 그 아래가 만 길이나 아득히 깊어서 내려 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또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 3리에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의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삼형제 불상 중 하나 이곳에계단을 내려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오른편에 삼성각이, 왼편에 본당인 약사전이 있다. 이는 모두 근세에 조성한 것이다.마당이라고 하지만 그 아래에 종무소 등 다른 건물이 이 마당을 지붕으로 삼고 있다.약사전은 1985년에 중수한 법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약사전에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있다.약사전 옆에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조여래좌상은 약사전에 모신 불상이며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을 두텁게 입혔으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새로 금을 입히기 전인 1960년대 사진을 통해 원만한 얼굴모습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우상학의 약사암 중수기(1935년)에는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구, 삼형제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그 중 1구는 김천 직지사에 다른 1구는 김천 증산면 수도암에 봉안했다고 한다.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수도암 석불좌상은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과 김천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3형제라고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이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또 다른 이야기도 약사전 중수기에 전한다. 석불을 모시게 된 배경과 약사전을 중수하게 된 이유다.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인 박유술이 불상을 만들고 금오산에 와서 석봉대 아래 쉬고 있을 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고 하며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우상학이 중수했다고 한다.약사전 석조여래좌상 옆으로는 일광, 월광보살이 협시돼 있으며 후불탱, 신중탱, 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만길 낭떠러지, 어마어마한 약사봉 절벽을 붙잡고선 약사암약사전을 뒤로하고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과 칠곡이 훤하게 보인다.약사전 바로 아래는 최현이 일선지에서 지적했듯이 천길 아니 만길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 너머로 종각이 있는데 출렁다리에 의지해 건너야 한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안전을 우려해 출렁다리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또 약사전 아래로는 좁은 철 구조물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는 동쪽 암벽에서 용출하는 약수를 받기 위해 만든 다리다. 이 약수가 나온다는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최근에는 이곳의 주지인 대혜스님이 국내 최소 크기의 마애불을 발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대혜스님은 약사암에서 멀지 않은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인근에서 부처님이 좌선하는 모습을 새긴 손바닥만 한 마애불을 발견했다.그는 “지난 추석쯤 우연히 바위 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발견했는데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방법이나 바위에 새겨진 글들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대혜스님은 이 마애불을 보호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약사암 난간 끝에서 내려다보는 공간의 아름다움은 마침내 낙동강과 그 평야를 끌어들여 눈앞에 펼쳐지게 하고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금오산 법성사…금오산 채우는 법성사 개울 물소리…도심 가까운 절에서 잠시 쉬어간다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서 움트기 시작한 신라불교는 낙동강 건너 선산읍으로, 국보 182~184호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된 고아읍으로, 이어 구미의 명산 금오산 등 구미 전역으로 확산했다.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신라불교의 성지로 우뚝 선 것이다.구미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한 금오산은 예부터 지역의 명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 수많은 절터 남아 있어금오산이 불교와 관련 깊다는 것은 옛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원래 대본산이었던 금오산은 한 때 남숭산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중국 황하강 유역에 있는 중국 오악 중의 하나인 숭산과 생김새가 비슷하다해 붙여진 이름이다.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숭산이라 하고 황해도 해주(천태종과 관련이 깊다)에 북숭산을 두었다.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 천태종을 창종한 후 문도들을 이끌고 남숭산(금오산)으로 옮겨와 수도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1편 신라 이후의 구미불교 중 선봉사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다.그가 대각국사 의천으로 호국불교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면서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을 높였다.금오산은 해발 1천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칭한 것은 모두 불교와의 연관성에서다.이렇듯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절이 금오산에 자리를 잡았다.1968년 진행했던 선산지구고적조사 보고서에는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또 다른 조사에서도 유구와 유적, 표석이 남아 있는 금오산 평지와 산록부, 정상부에 입지한 절터 18곳이 확인되기도 했다.이 조사에서 확인한 금오산 평지와 곡저부의 절터는 대혈사, 갈항사, 선봉사, 옥림사 등 7곳이다.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신라의 고찰 갈항사와 대각국사비가 있는 선봉사의 경우 규모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이에 비해 산록에 있던 절은 2단이나 3~4개의 계단식 터를 갖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며 규모도 작았다.물론 정상부에 있었던 절 또한 규모가 상당히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는 현존하는 약사암과 같이 입지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다만 성안의 동남쪽에 있었던 진남사는 터의 규모로 보아 상대적으로 잘 갖추어진 가람배치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금오산 절터, 지형에 맞춰 규모와 가람배치또 금오산에 자리했던 절들은 금오산의 지형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으로 지어졌다.산록배치형인 구미시 수점동 절골의 절터는 남과 북의 단애가 결정되는 지점의 폭포수나 병풍바위 등 수직적 구조를 배경으로 가람을 배치해 성속의 공간 구분이 명확한 도량조건을 갖췄다.또 현존하는 약사암과 같이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봉사와 동양사는 정상의 장점을 살려 가장 먼저 해를 맞거나, 구미지역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금오산 정상 보봉에서 조금 내려선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사터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자기, 옹기파편, 구들장 일부가 발견됐다.특히 약사암이나 보봉사 처럼 해발 8~900m 수준의 봉우리와 정상부에 입지한 절터는 거대한 암석이나 화강암 단애를 배경으로 조형된 것이 지형적 특색이다.금오산에 있던 절에 대한 기록은 최현의 일선지에도 등장해 그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일선지에 ‘금오산의 최상봉이 보봉이다. 봉 아래에 작은 사찰이 있으니 곧 보봉사이다. 남동쪽 수백 리를 두루 바라볼 수 있다’라던가 ‘동양사는 보봉사 동쪽에 있다. 아침 햇빛이 먼저 비치기 때문에 이름으로 하였다. 시선이 미치는 곳은 보봉과 다름이 없고, 산에는 해송이 많다’고 적었다.또 ‘전종사와 보제사는 금오산 서쪽 기슭에 있었다. 임진란에 함께 불탔다’고 기록하고 ‘도선굴은 금오산 북쪽에 있다. 상하로 푸른 절벽이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가운데에 바위 구멍이 있다.(중략) 민간에 전하길, 고려의 신승 도선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고 전한다.◆고려시대 창건했던 옥림사터에 재창건한 법성사이렇듯 남숭산, 즉 금오산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령스러운 산으로 예부터 많은 절이 모여 있었다.이곳에 현재 천 년 고찰 약사암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해운사, 고려말 창건했다가 폐사됐다는 옥림사터에 지어진 법성사 등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법성사는 현대 창건한 절이다.금오산 상가 주차장에서 구미시 형곡동을 잇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형곡동 전망대에 미치지 못해 오른편에 법성사라는 절이 있다.기록에 따르면 법성사 인근에 제법 규모를 갖춘 옥림사가 있었다고 한다. 옥림사는 고려말에 창건해 조선 중기인 정조 때 폐사됐다가 다시 고종 때 중건된 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폐사됐다고 한다.조선말인 고종 때 재건 당시에는 법당 6칸과 방 10칸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법성사는 구미지역에서 도심에 가장 가까운 절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절은 1962년 7월 해운사 주지로 부임한 지우 스님이 현 절터에 토굴을 마련하고 수행했던 곳이다.이후 1991년 4월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해 정면 3칸 규모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2층 누각형식의 종각, 천불전, 요사채, 종무소 등을 갖추고 있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법성사를 바라보면 절 앞으로 키만 늘씬하게 키운 소나무 몇 그루가 종각과 대웅전을 가리고 섰다.종각을 통해 대웅전을 올려다본다. 언제 칠했는지 단청이 가을 단풍마냥 곱다. 종각 아래인 천왕문에 들어서면 양편으로 사천왕이 그 큰 눈을 부라리며 호기롭게 지키고 서 있다.불교에서는 이 사천왕이 수미산(불교의 우주론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상상의 산) 중턱에 살면서 4방위를 관장하며 악으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 역시 부처님의 성역을 악과 사사로움으로부터 지켜내는 상징이라고 한다.대웅전에 다가가기 전에 종각 아래, 즉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누하진입이라고 한다. 종각루 아래를 지난다는 말이다. 이는 절을 찾은 이가 부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절 건축의 숨은 의도이다.종각을 통과하면 조금은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계단 위로 대웅전이 앉아 있다. 초기에는 법당과 요사채를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 왼편에 요사채를 새로 지었다.대웅전 오른편 뒤쪽에 문화재가 한 점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84호인 금오산 법성사 석가여래불상(좌상)이다.이 불상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헌종 6년(1840) 하고미면에 살던 정민기씨의 꿈에 5대조 할아버지가 자신의 소유 전답이 있는 원남동 일명 부처골에 나타났다. 이튿날 아침 그곳에 가보니 부처 형상의 불상이 있어 그 자리에 토담집을 지어 보존 관리해왔다는 것.이후 1965년께 지금의 구미문화예술회관(구미시 송정동)이 있는 곳으로 옮겨와 보관하다가 이 일대가 신시가지로 조성되면서 1970년께 법성사 창건주인 지우 스님과의 인연으로 법성사에 기증했다고 한다.이 석가여래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대좌 위에 나나의 돌로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불두는 마멸이 심한 상태였다.그래서 보존 중 마멸되거나 부서진 곳을 시멘트로 고쳤다가 2009년께 시멘트 등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아직 곳곳에 고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이 불상은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약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있다.대웅전 왼편에는 절에 있는 전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형태의 전각이 하나 있다. 산신각이다.전하는 말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 남겨진 무속인의 건물을 부수려 했으나 중장비 기사가 이를 꺼려 형태를 남겨둔 채 법당으로 꾸민 것이라고 한다.법성사는 그 규모와 맞게 단출하다. 아니 깔끔한 인상이다. 법성사는 왕성한 사회봉사 활동으로도 유명하다.1996년 봉사단체인 자비회를 결성한 법성사는 2002년에는 법운사회복지회를 설립하고 효행장학금과 중·고생 급식비, 학자금, 저소득층 생활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라오스 동북부 생쾅주 반폰통 지역의 교육지원 사업 등에도 적극적이다.법성사 왼편은 금오산 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있다.금오산은 원래 계곡이 깊지 않아 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법성사 옆 개울은 마를 날이 없다.앞서 선산지구고적조사 보고서에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었다. 아마도 이 말은 법성사 개울 물소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사자암 절벽과 문수사…반은 동굴에 반은 목조건물 ‘반쪽짜리 법당’ 재미난 이름 차 한 잔 건네며 방문객 반겨

우리가 늘 보거나 상상하는 절의 모습은 이렇다.아름드리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넓은 산중에 물로 씻어낸 듯 깔끔한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화강석으로 만든 탑과 석등을 자리에 맞게 배치한 모습이다.또 그 소리는 어떤가. 가끔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에 몸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는 풍경소리, 그리고 간간이 절 옆을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 정도일 것이다.아마도 이런 모습이 일반적인 절,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한 사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청량산 중턱에 이 같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절이 있다.◆납석사의 오랜 흔적 남아이곳에 있는 문수사는 꽃과 음악이 있는 서정적인 절이다. 임진왜란 당시 당진현감인 정방준의 처 초계 변씨의 슬픈 전설이 서린 도개면 신곡리 문암산을 정면으로 보고 구불구불 농로를 따라간 곳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주차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청량산이다. 청량산 중턱에 문수사가 있다. 문수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절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데 현재의 절은 1948년 창건했다고 한다. 절터 곳곳에 널린 석탑 부재 등으로 미뤄 이곳에 오래전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기록에도 이곳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선산부사를 지낸 인재 최현은 일선지 불우편 ‘납석사조’에 ‘납석사는 신곡 문암 북쪽에 있다. 절 뒤에 석굴이 있는데 방 몇 칸이 들어갈 정도이다’라고 적었다.일선지가 지목한 위치와 일치하고 탑신부와 석탑 파편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납석사는 현재의 문수사와 부속 건물인 사자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에 남아 있는 각종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창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의 불교 탄압에 따라 언제 폐사되고 또 몇 차례 중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이후 1865년(고종 2년) 도적(일부에서는 일제가 도굴했다고 한다)의 침입으로 폐사된 것을 1948년 혜봉선사가 재창건했다.절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혜봉선사가 재창건할 당시 꿈에 노승이 말을 타고 내려와 사기를 편람 했다고 한다.이를 해몽하니 노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승마는 사자라고 해서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청량산, 절의 이름을 문수사라 지었다고 한다.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불과 50여 년도 안 됐다.혜향화상이 1972년 다시 절을 중건하고 1993년부터 절에서 서북쪽으로 150m 올라간 곳에 사자암을 짓기 시작해 2000년 완공했다.사자암 건립 이후 ‘반쪽짜리 법당’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유적과 유물산 내 암자 중 사자암은 천연동굴 입구에 목조 건물을 덧댄 구조로 문경 대승사에서 옮겨온 불상과 4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 탱화 중에는 1873년(고종 10년) 제작된 산신탱화가 있는데 국내 남겨진 산신 그림 중 비교적 오래된 유물에 속한다.문수사에는 2006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78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경전은 한국의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문수사에 있는 묘법연화경은 서체와 판식, 도각 등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고산 화엄사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간행연도가 1477년(성종 8년)으로 확실하고 완질본이어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또 문수사 극락보전 옆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 상은 통일신라 때의 석조 불상으로 높이가 82㎝로 작지만 전체적으로 신체 균형이 잘 잡혀 있다.하지만 머리부분이 부서지고 얼굴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윤곽을 알 수 없다.불신과 대좌와 광배가 모두 같은 돌에 조각된 보살상으로 양감 있는 어깨와 허리는 가늘게 표현하고 가슴은 풍만하고 결가부좌한 하반신은 다소 좁게 표현했다.전문가들은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등에서 당대 일급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 균형잡힌 신체의 비례나 섬세한 조각수법 등 여러 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때 통일신라 말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국화 향기와 선율로 가득한 문수사문수사 입구부터 가을의 고즈넉함을 알리는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한 산중을 울린다. 일주문은 없다. 청량산 정상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다.문수사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절이다. 절 식구들의 바지런함이 절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을 낙엽이 산중 곳곳에 쌓여가는데도 절 마당에는 낙엽 하나 찾아볼 수 없다.본전인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은 비탈면인데 각종 조경수와 꽃으로 장엄했다. 계단을 올라 극락보전 앞에 다다르니 가을 국화가 한 가득이다.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동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도록 한 찬불가와 극락보전 앞 국화가 이 절의 성격을 말해준다.꽃향기와 음악의 선율이 어울리는 서정적인 절이다. 극락보전 옆에는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자리를 차지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형상은 그을리고 망가졌지만 자애로움과 당당함은 그대로이다.극락보전 뒤 비탈면에는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숲은 솔바람 길을 따라 사자암까지 이어진다. 극락보전 옆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석탑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설 때 어느 나무인지 모를 소나무에서 솔방울 하나가 떨어져 산사의 적막을 깨는 댕그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온다.잔잔한 찬불가가 내리깔린 솔바람 길에 들어서니 날은 서지 않았지만 제법 찬 바람이 솔숲을 스친다. 찬불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조금씩 계단을 오르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상념이 사라진다.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일을 다음에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산비탈을 따라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자극적이지 않은 솔 향기를 뿜어낸다.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랐을까. 여유롭게 걸은 탓에 그리 힘들지 않다. 아니 찬불가가 주는 편안함에 힘들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계단 옆 수줍게 핀 들국화의 모습에 취해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어느덧 큰 절벽에 몸을 기댄 규모가 꽤 큰 암자가 나온다.문수사의 보물, 사자암이다. 2층으로 된 사자암 옆으로 산신각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사자암이란 암자가 기대선 절벽이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라는 데 어느 모습이 사자의 모습인지 사실 분간하긴 어렵다. 하지만 청량산 중턱 널찍하게 펼쳐진 절벽은 그 자체로 위엄이다.옛 납석사 방 몇 칸이 들어설 정도의 석굴이 있었다는 사자암은 2층 목조건물이다. 사자암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절벽에 몸을 붙이고 있다.1층은 참선방, 2층은 삼존불을 모신 법당이다. 산존불은 바깥으로 드러난 목조 건물의 안쪽인 동굴에 있다. 법당의 절반이 동굴, 나머지 절반은 목조건물이어서 ‘반쪽짜리 법당’이라고 불린다.참선방에는 항상 차가 준비돼 있다. 사자암을 찾는 이면 누구나 들러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절벽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사자암에서 바라보는 전경을 빼놓을 수 없다. 늙어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멀리 도개 신곡리의 누런 황금 들판이 보인다.사자암 바로 아래에는 데크로 만든 무대와 객석이 있다. 매달 보름을 전후해 이곳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가끔 와인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한다.그래서 문수사는 꽃과 차 향기, 선율이 있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절이다. 땡그랭, 땡그랭 풍경소리가 산중에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박자를 맞춘다. 사자암을 둘러보고 차향에 취해 문수사를 내려오는 길, 미련이 나를 붙잡고 자꾸 뒤돌아서게 한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