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16)- 천사옥대

진평왕은 신라 26대 왕으로 54년 간 왕위에 있었다. 박혁거세 이후 천 년 신라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랜기간 왕좌에 있었다.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이 신라 최대의 영토를 넓힌 뒤를 이어, 이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진흥왕 사망으로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문란한 정치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노리부 등의 귀족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진평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제도를 정비해 왕권 강화에 나섰다. 불교와 샤머니즘적 신앙을 접목해 왕권을 신성시 하는 풍토를 조성하는데도 성공했다. 진평왕 옥대,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보물 ‘천사옥대’를 만들어 절대적인 왕권을 세우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황룡사 9층목탑, 장육존상과 함께 신라 3대 보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무덤은 경주시 보문동 입구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보문사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서쪽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황복사지, 북쪽으로 월성, 황룡사지 등 신라 천 년의 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는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어 성골 귀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도 많은 고충을 겪어야 했다.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절대적인 지지세력을 확보한 이후에야 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진평왕이 나라의 살림을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둔 덕분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잇따라 여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진평왕은 특히 삼촌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나랏일을 돌보도록 벼슬을 주어 왕권다툼을 예방했다. 진평왕의 즉위 과정과 신라 최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정치, 안정적으로 여왕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신라 중대 역사의 일면을 본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척이라 기록해 신체가 매우 장대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금관총에서 발굴된 허리띠가 지금까지 나타난 신라시대 허리띠 중에서 가장 길고 장식이 화려하다. ◆천사옥대 -하늘이 준 옥대[청태 4년(937) 5월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반듯하게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가 10뼘으로 새겨 붙인 장식이 62개였는데 이것을 진평왕의 천사옥대라고 했다. 고려의 태조가 이것을 받아 궁중의 창고에 보관했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며 성은 김씨이다. 태건 11년 기해(579) 8월에 왕위에 올랐다. 키가 11자였다. 내제석궁(다른 이름은 천주사이다. 이 왕이 창건한 것이다)에 행차했을 때, 섬돌을 밟으니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주위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치우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고 했다. 바로 이 돌이 성안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첫 해에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황께서 내게 명하여 옥대를 전해주라고 했습니다”라 하니,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았다. 큰 제사나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옥대를 사용하였다. 그 후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모의하면서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였더니, 황룡사 장육존상이 첫째이고, 그 절에 있는 9층탑이 둘째며,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라 하여 왕은 곧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진평왕릉에서는 사계절 다양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어 산책을 즐기는 시민과 전문 사진 작가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진평왕릉의 여름 저녁놀 풍경.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 내리어 두르시니/ 천자의 곤룡포에 아담하게 어울리네/ 이로부터 우리 임금 몸 더욱 중후하니/ 내일 아침 강철로 섬돌 만들까 하네. ◆진평왕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으로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54년을 재임했다. 박혁거세를 제외하고 신라 천 년 역사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진평왕대에 이르러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이 바야흐로 꽃을 피웠다. 그의 뒤를 이어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보필했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삼한 통일 위업의 기초를 다졌다. 삼한 통일의 모든 것이 진평왕으로부터 시작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평이다. 진평왕은 놓칠 뻔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열세살인 579년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사도부인이 수렴청정을 했다. 진평왕릉 주변에는 역사문화사적들이 많아 학자들을 비롯해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사진은 22일 삼국유사 기행단이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해설을 들으며 토론하는 장면.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의 뜻일 이어받아 전쟁을 치르면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을 신성화하는 데 진력했다. 진평왕은 자신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 백정, 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 마야부인, 동생 둘은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 백반과 국반으로 지었다. 가족 모두가 석가모니족으로 신성화 했다.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생 백반을 진정갈문왕, 국반을 진안갈문왕으로 임명해 왕실의 세력을 친정체제로 두텁게 했다. 동생 둘은 형의 좌우에서 형의 말을 충실히 듣는 심복으로 자라갔고, 자연스레 사도부인 같은 기존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진평왕은 재위 6년 째 되던 해에 수렴청정에서 벗어나면서 건복(建福)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만의 독자적인 역사 만들기에 나섰다. 13년에는 남산성을 쌓고, 이어서 명활성을 고쳐 쌓아 왕경의 주변 방어태세를 굳건하게 했다. 주변국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백제와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그치질 않았다. 신라가 팽창해 가는 만큼, 주변의 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등의 침공에 대응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까지 교류를 이어갔다. 원광법사와 담육 등을 중국에 보내 공부하게 하는 등 불교 진흥에도 크게 노력했다. 진평왕은 황룡사를 크게 중창했다. 동서 금당을 추가로 지어 1탑-3금당의 가람구조로 변화했다. 내부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재위 53년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각돼 칠숙을 잡아 처형시켰는데, 석품은 백제 국경으로 도망쳤지만, 끝내 붙잡아 처형했다. 진평왕은 사촌 동생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이는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딸인 덕만으로 왕위를 이었다. 선덕여왕이다. ◆흔적△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은 경주시 보문동 608번지 남촌마을 앞 보문들과 연접해 고즈넉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적 제180호로 지정된 왕릉이다. 4만3천645㎡ 부지에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고목과 초목이 계절별로 꽃을 피우며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해 힐링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진평왕릉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버드나무, 백양나무 등의 다양한 수종이 숲을 이루며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 쉼터 기능을 한다. 왕릉의 동쪽에 명활성의 흔적, 남쪽 보문사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석조 등의 역사유적들이 있다.서쪽에는 낭산이 나지막하게 솟아 신문왕릉, 선덕여왕릉과 황복사 삼층석탑 등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진평왕릉 북쪽의 소나무. 북쪽으로 보면, 신라 천 년 왕궁터 월성과 황룡사지, 분황사, 첨성대 동부사적지 등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문화유적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진평왕릉 꼭대기에라도 서면, 천 년의 화려한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마치 과거사가 살아 있는 현실로 부활해 눈앞을 지나간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싶다면, 진평왕릉으로 오라고 선전하고 싶다”는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신명나는 문화해설이 너무 사실적으로 들린다. 진평왕릉 서북쪽의 비룡 모습의 고목.△남산신성과 남산신성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공통적으로 신라시대에 남산신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591년에 축조했다. 전체 둘레 5천137m 포곡식 산성이다. 진평왕 13년에 쌓은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남산의 산성 흔적. 산성터에서 동, 서, 남, 북, 동남, 서남문 등 6개소의 문지가 발견됐다. 동문지는 옥룡암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지만, 대부분 파괴되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남문지는 해목령에서 전망대로 가는 순환도로와 연결되는 성벽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폭이 5m 이고, 부근에 신라시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문루가 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산성 내부에는 22개소의 망대가 확인된다. 망대는 동쪽과 남쪽에 18개소가 집중되어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남산신성을 쌓은 내용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신라시대 당시의 지방제도와 관제, 마을편제 등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남산신성 제2비,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9년에 남산신성의 성벽을 증개축했다는 기록이 있고, 길이 100m에 이르는 긴 창고를 비롯, 3개의 대규모 창고터가 발견되면서 지금도 검게 탄 쌀이 보인다. 남산신성에서 10기의 비편이 발견됐다. 1, 2, 3비와 9비는 원형이 그대로 드러나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제3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남산신성터에서 비편이 발견되면서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신해년 591년에 쌓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됐다. 10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순서대로 이름이 붙은 8비와 9비는 남산신성 안에서 발견됐다. 또 1비와 2, 3, 9비는 거의 원상태로 발견돼 산성 축조연대는 물론, 산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과 책임자의 직명과 출신지명, 관등명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남산신성비가 발견된 자리와 규모 등을 비추어 20개에서 200개 정도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성비는 신라 중고기의 지방통치체제와 역역동원 등에 관련한 문제, 촌락구조 문제 등을 파악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진평왕진흥왕의 큰 아들 동륜이 보명궁의 담을 넘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 보명궁주는 진흥왕의 후궁이다. 태자 동륜의 죽음은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불륜의 끝이었다. 진평왕릉 남쪽을 지키고 있는 백양나무. 아버지를 잃었을 때 진평왕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진평왕에게 두 가지 큰 짐을 지웠다. 불명예스럽게 죽은 아비의 자식이라는 짐, 사고가 없었던들 순조롭게 이어졌을 왕위가 한 순간 물 건너 간 것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진평은 이 두 가지 역경을 헤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왕이었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을 바로 돌린 일이기도 했다. 진평왕릉 일대는 20여년 전만해도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었지만, 80% 이상이 고사하고 지금은 20% 정도만 남아있다. 고사목의 흔적. 동륜의 죽음으로 왕이 된 그의 아우 진지왕은 행실이 밝지 못했다. 진평에게 삼촌이 되는 진지왕은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에 폐위되고, 20대 후반의 아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진지왕에게도 당시 아들이 있었다. 용춘 또는 용수라 불렸다. 이 아들은 나중에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 그러나 왕위는 이 아들에게 이어지지 않고 진평왕에게 돌아왔다. 삼촌의 집안에 왕위를 빼앗기는가 싶더니, 사촌을 물리치고 무난히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 이후 박차를 가하는 신라의 발전 분위기로 보아 신라 귀족층, 노리부 등의 실세들은 보다 정치적이지 못한 진지왕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음탕하다는 이유로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진흥왕과 여러모로 닮은 진평을 왕위에 올렸던 것이다. 진흥왕 말기에 진지왕을 지지하는 거칠부 세력과 진흥왕의 뜻과 같이하는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 병권과 내정의 실세였던 거칠부가 진지왕을 추대해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거칠부가 사망하면서 진지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 노리부와 김후직, 진평왕의 동생 등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왕위에 올렸다. 노리부는 가야 출신으로 진흥왕이 전쟁으로 정복한 땅의 인재들을 중용하는 정책에 힘입어 진흥왕을 따르는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노리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후덕함과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김후직과 함께 진평왕을 옹립하고 초기에 상대등에 올라 정사를 주도했다. 귀족 중심의 신라 중기 정치는 진평왕이 54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꾸준히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해, 후반기로 접어들어 절대적인 왕권정치 체제의 기반을 마련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삼국유사군위도서관 인문학 특강 운영

경북도교육청 삼국유사군위도서관(관장 박이현)은 지역주민의 문화수요 충족과 인문학 대중화를 위해 ‘인문학으로 세상을 읽다’라는 주제로 인문학 특강을 4회에 걸쳐 운영한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경주 삼국유사기행단 신라중기 왕들의 발자취 더듬어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 새로운 역사문화콘텐츠를 창조하는 삼국유사 기행단이 지난 22일 선덕여왕릉을 비롯해 신라 중기 왕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지난 2월에 시작한 다섯 번째 기행이다. 삼국유사 기행단이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의 해설로 사천왕사지에서 역사 속에 묻힌 진실들을 찾아 탐방하고 있다. 이날 삼국유사 기행단(이하 삼유기)은 박물관대학, 경주문예대학, 장근희문화답사팀, 음악학원 등의 문화예술인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문화해설로 진행되었다. 이날 삼유기는 해발 100여m로 언덕 같이 나지막한 낭산 자락 사천왕사지에서 시작해 선덕여왕릉, 진평왕릉, 진덕여왕릉, 김유신장군묘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으로 전개됐다. 김구석 소장은 “사천왕사지는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세운 호국사찰”이라며 “밀교를 전승한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으로 당군이 신라에 닿기도 전에 풍랑에 휩싸여 수장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덕여왕릉에서 선덕여왕의 일어나지 않은 세 가지 일을 미리 예지한 지혜와 1949년 안순이의 주도로 대대적인 왕릉 보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일치하는 선덕왕릉의 위치 등에 대해 해석했다. 삼국유사 기행단 40여명이 22일 진덕여왕릉으로 진입하는 등산길을 오르고 있다. 진평왕릉에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진지왕이 화백회의에서 폐위되었다는 것과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이 아버지의 후궁을 탐하다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비사, 진평왕과 동생들을 포함한 가족의 이름이 석가모니 가족과 같게 지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진덕여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이 사적에 기록된 이름과 다르다는 것과 왕릉의 특징에 대한 자세한 유래가 전해졌다. 진덕여왕릉의 호석에는 12지신상이 모두 원피스로 된 무복을 입고, 쥐와 용은 보주를 들고 있다는 등의 특징이 소개됐다. 김유신 장군묘에서도 상당한 오랜 시간 머물면서 비석의 유례와 신라 통일에 이르는 역사, 고분의 진위 등을 추정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경주문화탐방회 장근희 회장은 “역사문화유적을 찾을 때마다 같은 곳이어도 새로운 생각을 하게하고,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면서 “신라 천 년의 유구한 문화역사는 우리민족의 자랑이자 경주의 특별한 매력”이라며 공부해서 많이 알리는 것이 탐방의 목적이라 말했다. 김구석 소장은 “역사를 공부하는 일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점점 깊이 빠져드는 마력이 있어 지치지 않는다”면서 “묻혀버린 사실들을 하나씩 발굴하듯 새로운 내용들을 만날 때마다 차오르는 희열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이 크다”며 역사문화탐방을 이어가는 이유를 말했다. 삼국유사 기행은 대구일보 주관으로 매월 1회씩 문화해설사를 초빙해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간다. 7월 삼유기는 20일 무열왕릉에서부터 시작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15 도화녀와 비형랑

삼국유사의 내용은 설화, 신화로 구성된 부분이 많다. 특히 도화녀와 비형랑조는 죽은 왕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도깨비가 사람처럼 행동하며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부분이다. 진흥왕이 576년 8월에 사망하자, 거칠부를 비롯한 진골 귀족들이 왕의 둘째 아들인 사륜을 신라 25대 진지왕으로 추대했다. 진지왕은 진흥왕 말기에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해 나라의 일을 맡아하는 경험을 쌓았다. 삼국유사 기행단이 무열왕릉 뒤편의 추정 진지왕릉을 답사하고 있다. 진지왕은 즉위하면서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해 나라일은 실질적으로 거칠부가 장악했다. 그러나 거칠부가 사망하면서 진지왕을 지지하던 세력이 무너지고, 진지왕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정치가 극도로 문란하게 됐다. 이에 진흥왕의 측근이었던 귀족세력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지왕 형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손자인 백정을 신라 제26대 진평왕으로 옹립했다. 진지왕의 등극과 폐위 과정에는 권력을 두고 이루어지는 숱한 갈등의 모습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신라시대 중기의 왕권을 둘러싼 세력 다툼과 권력 구도를 짐작하게 한다. ◆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의 딸인 지도부인이다. 태건 8년 병신(576) -고본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왕위에 올라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나, 정치가 어려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 백성의 딸이 있었는데 자색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의 사람들이 도화랑이라 불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보이고자 하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여인으로서 지켜야할 바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거늘, 지아비가 있는 몸으로 어찌 다른 데로 가오리까?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도 끝내 절조를 빼앗지 못할 것이옵니다” 라 고 했다. 왕이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하니, 여인이 “차라리 시장거리에서 목을 베일지라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라 했다. 왕이 “남편이 없으면 몸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라 물으니 “허락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왕이 그녀를 보내주었다. 이 해에 왕이 임금자리에서 쫓겨나서 죽었다. 그후 2년 만에 도화녀의 남편도 또한 죽으니, 죽은 지 열흘 되는 밤중에 홀연히 왕이 옛날의 평상시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네가 예전에 허락을 하였고, 지금은 너의 남편이 없으니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라 하자, 그녀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쭈어 보았다. 부모가 “임금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어기겠느냐?” 하고 딸을 왕의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왕이 머무른 7일 동안 항상 5색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7일 후에 홀연히 왕의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이 이로 인해 태기가 있다가 달이 차서 해산을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면서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비형’이라 했다.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 비형랑의 놀이를 모방해 제작된 비형랑 공연. 진평대왕이 매우 기이한 소문을 듣고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더니, 그는 밤마다 멀리 도망나가 놀았다. 왕이 용맹스런 군사 50인을 시켜서 지키게 했으나, 매번 월성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의 강변에 가서 귀신들을 데리고 놀았다. 군사들이 숲 속에서 엎드려 엿보았더니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새벽종소리가 들리면 제각기 흩어지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가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 드리니 왕이 비형을 불러 “너는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고 하는데 정말이냐?”라고 묻자, 비형랑이 “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개울에 다리를 놓도록 하여라”고 했다. 비형이 왕명을 받들어 그의 무리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완성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을 ‘귀교’라 했다. 왕이 또 “귀신들 가운데 인간 세상에 나와서 나라의 정치를 도울만한 자가 있는가?”라 하자, “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나라의 정치를 도울만합니다”라 했다. 왕이 함께 오라 하여 그 다음 날 비형과 같이 뵈었다. 그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더니, 과연 그는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하여 길달을 아들로 삼게 하자, 임종이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 남쪽에 다락문을 세우게 하고,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래서 그 문 이름을 ‘길달문’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서 도망가자 비형이 귀신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서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성스런 제왕의 혼이 낳은 아들/ 비형랑이 있었던 집이로다./ 날고 뛰는 여러 귀신들아/ 이곳에는 머물지 말지어다.나라의 풍속에 이 글을 붙여 귀신을 쫓는다. ◆진지왕진지왕은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576년부터 579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세자로 임명된 형이 572년 진흥왕 33년에 죽으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사륜(舍輪)이며 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진지(眞智)이며,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따서 사륜왕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사도부인 박씨이다. 그는 기오공의 딸인 지도부인 박씨를 왕비로 맞이해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인 이찬 김용춘을 낳았다. 삼국유사는 어머니를 색도부인 박씨, 왕비는 여도부인 박씨로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은 576년(진흥왕 37) 진흥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지왕은 즉위하고,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해 나랏일을 맡겼다. 즉위한 이듬해에는 직접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대적으로 죄인을 사면했다. 그해 10월 백제가 쳐들어오자, 이찬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병케 하여 일선에서 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내리서성을 쌓았다.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으로 4기의 고분이 나란히 있다. 학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진지왕릉, 문흥왕릉, 진흥왕릉, 법흥왕릉으로 보고 있다. 진지왕 3년에는 중국의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교했다. 또 백제를 공격해 알야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백제는 융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신라 서북지역에 위치한 산산성, 마지현성, 내리서성으로 가는 통로를 막아 신라를 고립시켰다. 진지왕은 그해 가을에 재위 4년 만에 죽었으며, 영경사 북쪽에 매장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죽은 뒤에 애공사 북쪽에 매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이 죽은 뒤에 형인 동륜의 아들인 백정(白淨)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신라 26대 진평왕이다.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과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진덕여왕 등 동륜의 후손들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를 계승해 29대 태종무열왕이 됐다. 신라는 29대 태종무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 진지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조선시대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진지왕릉으로 비정돼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서악동 3층석탑 북쪽 선도산 자락의 진지왕릉. ◆흔적△진지왕릉: 진지왕릉은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일대 선도산 자락에 5기의 고분과 함께 위치해 있다. 진지왕릉은 2011년 사적 제51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선도산의 남쪽 구릉을 따라 형성된 서악동 고분군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5기의 고분은 2기는 능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 3기는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진지왕릉은 능선을 따라 배치된 2번째 고분이다. 서악동 고분군 진지왕릉 가는 길. 진지왕릉은 아래쪽에 있는 문성왕릉과 마찬가지로 산사면의 일부를 깎아 평탄하게 한 후에 지름 20.6m, 높이 5.5m의 크기를 가진 원형봉토분이다. 봉토의 밑둘레에 자연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데 호석으로 추정된다. 봉분 주변에는 왕릉에 걸맞는 석물이나 장식은 아무것도 없다. 매장주체부는 고분의 입지와 인근의 서악동 고분을 보면 횡혈식석실묘로 추정된다. 현재 고분 앞에는 신라진지왕릉이라는 능의 표석과 안내 표지판이 있다. 진지왕의 무덤을 삼국사기는 영경사 북쪽, 삼국유사는 애공사 북쪽이라 기록하고 있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진지왕릉 또한 진지왕의 무덤이라는 지정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이다. 현재 진지왕릉은 1730년에 경주김씨 일족에 의하여 지정되었다. 진지왕릉으로 지정한 원인은 삼국사기에 진지왕의 장지를 진흥왕릉과 함께 영경사 북봉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경사를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추정 진지왕릉. 학자들은 서악동 3층석탑은 형식상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6세기후반의 진지왕릉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1817년 경주를 방문한 김정희는 무열왕릉 뒤편에 나란히 높은 봉분으로 서 있는 4기의 서악동 고분군의 2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보았다. 강인구는 3호분을, 이근직은 무덤의 특징과 묘제, 조영순서 등을 고려하여 서악동 1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보고 있다. 울산에서 경주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상류를 가로지르는 귀교보. △귀교보와 귀교들: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주IC로 들어와 첫 번째 만나는 대형 치미가 세워진 큰 교량이 있다. 이 교량 아래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 상류다. 강물을 거슬러 울산 방향으로 1㎞ 남짓 떨어진 곳에 길게 형성된 보가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 보를 ‘귀교보’라 부른다. 귀교보에서 제방을 넘어 넓게 펼쳐진 귀교들. 귀교보 서쪽에 강을 따라 길게 제방이 있고, 제방 넘어 넓은 들을 귀교들이라 부른다.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이름으로 추정한다. 귀교보와 귀교들 사이에 길게 형성된 귀교 제방길.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지왕의 즉위와 폐위진흥왕은 큰 아들 동륜을 세자로 책봉하고, 둘째 사륜을 대신으로 임명해 나라일에 직접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세자 동륜이 죽으면서 흥륜사를 지어 불교적으로 심취했다. 직접 팔관회를 열어 전쟁으로 죽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주관하면서 서서히 나라일에서 물러났다. 이때 거칠부가 사실상 병권을 잡고 내정에도 깊숙이 개입해 사륜을 왕으로 추대했다. 사륜이 신라 제25대 진지왕으로 등극하면서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신라가 거칠부의 세상이 되었다. 귀교보 입구에 신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를 재현해 세운 교량. 거칠부가 진지왕 2년에 죽자, 그들의 세력은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진흥왕대에서부터 동륜의 아들 백정을 옹립하려던 노리부와 김후직, 화문, 노지 등의 인물들이 실세로 자리를 잡았다. 가야 출신인 노리부 등은 거칠부가 죽은 이후로 나라일은 뒤로 하고, 음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진지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은 신라 최초로 폐위되는 불명예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귀족들은 진지왕에 이어 백정을 신라 제26대 진평왕으로 추대했다. 진평왕은 즉위 당시 10대 초반의 나이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를 만들고, 서서히 국정의 실권을 잡았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3)- 진흥왕

[{IMG01}] 신라 24대 진흥왕은 어려서 즉위해 태후가 10여 년을 섭정했다. 진흥왕은 삼국유사에는 15세, 삼국사기는 7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의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고,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이다. 법흥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의 조카이자 외손자가 왕위를 이은 이색적인 케이스다. 신라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왕위세습을 자녀 또는 형제에게로 이으면서 여자에게도 세습권을 인정했다.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자락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릉(사적 제177호). 흙으로 덮은 봉토분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보호석렬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지만, 보호석은 몇 개만 남아 있다. 학자들은 잘못 지정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진흥왕은 신라 건국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왕이다. 불교 이념을 근간으로 화랑도를 창설해 나라의 동량을 키우는 한편, 정신적 통일기반을 튼튼히 하면서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황룡사 터와 분황사지 사이에 구황동 당간지주가 우뚝 선 주변으로 보리밭이 조성돼 누렇게 익은 황금 보리밭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으로 요즘 방문객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황룡사를 짓고, 최대불상 장육존상을 세운 진흥왕은 아들의 죽음으로 더욱 불교적으로 심취하기도 했다. 진흥왕이 말년에 국사를 편찬하고 병권을 거머쥔 실세 거칠부와 갈등을 빚었다. 43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진흥왕의 사인을 두고, 거칠부와의 갈등에 의심을 두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번 호에서는 진흥왕의 즉위와 친정, 업적에 대해 지금까지 남은 흔적을 더듬어보면서 개괄적으로 알아본다. 다음 호에서 진흥왕의 전쟁과 거칠부와의 갈등을 살펴보면서 진지왕의 즉위 과정도 자세하게 들여다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진흥왕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오를 때 불과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입종갈문왕의 왕비였다. 태후는 임종할 때, 머리를 깎은 뒤 승려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승성 3년(554) 9월에 백제의 군사가 진성에 침략해 와서 남녀 3만9천 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했으나,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렸는데 만약에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 했다. 바로 이 말이 고구려로 전달되니 고구려가 그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진흥왕이 세운 창녕 신라 순수비.◆흔적△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섭정에서 친정체제로 전환하고, 연호를 바꾸어 정복 전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전쟁으로 빼앗은 지역에 차례로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를 순수비로 부른다.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경계를 돌아보면서 세운 마운령 신라 순수비.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남한강 상류를 차지한 것이 그의 영토 확장을 향한 첫발이었다. 특히나 동맹국의 임금이었던 성왕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게 한 것은 백제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은 단양에 단양 적성비를 세웠다. 당시 남한강 유역은 고구려 땅이었고, 중원 고구려비가 근처에 있었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국경지역을 돌아보면서 순수비를 세웠던 것은 1천500년 전이다. 순수비는 비교적 글자들이 깨끗하게 보존된 역사의 기록으로 과거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신라 진흥왕이 세운 북한산 신라 순수비. 낙동강 유역에는 창녕비(561)를 세우고, 북쪽으로 올라가 한강 하류에는 북한산비(555)를, 함경도 지역에는 황초령비(568)와 마운령비(568)를 세웠다. 모두 정복 사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IMG07}] 신라가 한강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비다. 단양 적성비는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에서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에 발견돼 1979년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93cm, 윗너비 107cm, 아랫너비 53cm이다. 단단한 화강암을 물갈이한 뒤, 그 위에 직경 2cm 내외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윗부분은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 측면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비문은 전체 22행에 각 행당 20자씩 새겨져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비면의 288자와 주변의 발굴을 통해 수습된 21자를 합쳐 309자이다. 적성비는 이사부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와 가족 등 주변 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할 목적에서 세웠다. 이 비에는 기존의 문헌 자료에 보이지 않는 지방통치조직과 율령, 조세제도 등의 내용이 기록돼 신라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황룡사 터에 장육존상과 십대제자상 등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불상의 기초석과 중금당의 기초석이 남아 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황룡사역사관이다. △황룡사 터: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 절로 고쳐 지었다. 17년 만에 완성한 역사다. 이어 진흥왕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의 땅에 닿아 진흥왕이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었다. 나중에 선덕여왕이 황룡사 금당 남쪽에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다.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했는데, 백제의 아비지가 645년에 완공했다. 진흥왕부터 4명의 왕이 94년에 걸쳐 황룡사 가람을 완공했다. 그러나 몽골족의 침입으로 1238년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금당터 초석과 불상의 기단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1976년부터 시작된 황룡사지 발굴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이 큰 치미, 금제합, 명문판, 염주, 청동반함, 안합, 금동불 입상, 금동보살 불두 등의 유물 4만여점이 나왔다.경주시는 황룡사터 서쪽에 황룡사역사문화관을 건설해 황룡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면서 찬란한 신라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사교육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방문객들의 마음을 모아 황룡사 복원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신라시대 진흥왕이 화랑제도를 창설하고, 임신년에 두 화랑이 나라에 충성하고 열심히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 내용이 기록된 임신서기석. 보물 제1411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임신서기석: 진흥왕은 화랑제도를 도입해 청년들을 나라의 기둥으로 길렀다. 임신서기석은 신라시대 화랑도 2명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작은 돌비석이다. 1934년 경주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지 부근에서 발견되어 보물 제1411호로 지정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임신년’이라는 시기를 비롯해 74자가 새겨져 있다. 당시 청소년들의 강한 유교 도덕 실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뒤쪽으로 4기의 고분이 남북으로 위치해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 기록으로 가장 왼쪽이 법흥왕릉, 그다음 고분이 진흥왕릉으로 추정된다. -진흥왕릉: 경주시 서악동 삼층석탑 서북 방향의 사적 제177호로 지정된 고분은 진흥왕의 업적에 비해 초라하게 느껴진다. 고분의 높이는 5.8m 정도로 낮고, 지름도 20여m 규모로 정면 외에 삼면이 키 낮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 고분의 아랫부분에는 자연석들이 몇 개 드러나고 있어 보호석렬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에 소재한 진흥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남쪽으로 진흥 왕비의 무덤, 진지왕릉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무열왕릉 북쪽으로 4기의 높은 고분이 있는데 그 중 위에서 두 번째를 진흥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뒤편의 고분을 법흥왕릉으로 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서 기록하고 있는 ‘애공사 북쪽’ 등의 내용을 참고한 주장으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황룡사역사문화관에 추정 복원된 황룡사 장육존상 도해도.◆진흥왕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일곱 살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540년에 즉위한 진흥왕을 대신해 어머니 왕태후의 섭정이 10여년 이어지는 동안 왕업에 대한 공부를 살뜰히 했다. 신라시대 최초의 섭정이다.삼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라고도 불렀다. 법흥왕의 동생 입종 갈문왕의 아들로 534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이다. 갈문왕이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같은 신분끼리 결혼해야 후손이 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당시에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540년 법흥왕이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죽자, 일곱 살의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아버지인 갈문왕도 이미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섭정은 지소부인 태후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정치를 보필한 신하는 이사부와 거칠부였다. 어린 진흥왕을 왕좌에 오르게 하는데도 이사부와 거칠부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사부와 거칠부 모두 법흥왕 대에서 진흥왕 때까지 정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사부는 지증왕 대부터 정계에 진출해 한 세대 앞섰다. 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기개가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해 친정을 시작하면서 연호도 법흥왕 때부터 쓰던 건원에서 개국으로 고쳐 사용했다.진흥왕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영토 확장에 많은 공을 들였다. 관산성 전투로 한반도의 중부를 차지하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기 시작했다. 왕태후는 진흥왕 즉위 첫해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사부를 병부령, 지금의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국가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맡겼다. 귀족들의 협의체인 화백제도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왔던 신라에서 병권을 전담하는 벼슬이 생기고, 왕이 벼슬을 임명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사부는 지증왕 대에 우산국을 점령한 바 있는 장군으로 어린 왕과 군사적 식견이 부족한 왕태후를 도와 진흥왕 초기 군사와 정치를 이끌었다. 신라 최고의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자고 건의한 사람도 이사부이다. 왕태후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왕태후는 국가적 차원에서 지은 최초의 절 흥륜사를 완성하고, 일반 백성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등 불교를 장려했다.진흥왕은 영토확장에 나서면서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화랑제도를 만들어 청소년들을 나라의 동량으로 육성했다.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고 경계 부근에 세운 순수비 분포도. 영토는 진흥왕 최대의 관심사였다. 젊고 패기만만한 진흥왕은 신라가 더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변경을 침략해 지금의 충주와 단양 등 남한강 변에 있는 10개 군을 차지했다. 그리고 3년 뒤 관산성 전투를 통해 한반도 중부를 점령 삼국의 패자적 위치에 올랐다. 젊은 왕의 걸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555년에는 가야연맹에 속해 있던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하주를 설치했고, 이듬해에는 함경남도까지 영역을 넓혀 안변에 비열홀주를 설치했다. 그리고 6년 뒤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의 영토를 완전히 신라에 편입시켰다. 신라의 영토가 한반도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해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삼국통일의 물적, 인적 토대가 되었다. 진흥왕은 연호를 ‘크게 번창하다’는 의미인 ‘태창’으로 다시 바꾸어 영토 확장과 신라의 번영을 자축했다. 이어 진흥왕은 서울을 거쳐 함경남도 함흥의 황초령, 이원군에까지 자신이 개척한 영토를 직접 돌아보면서 백성을 위로하고 포상했다. 또 이를 기념하고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등을 세웠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대구도심서 군위 홍보 이벤트 가져

군위군은 최근 대구 2.28기념중앙공원에서 도심 나들이객을 대상으로 삼국유사 관련 이벤트를 실시하고 군위 여행지를 소개하는 등 관광홍보 행사를 했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군위군, 삼국유사 테마파크 8월 임시개장, 2020년 정식 개장 예정

군위군은 27일, 군청 제2회의실에서 김영만 군수, 심칠 군의회 의장 및 의원과 실과단소장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국유사 테마파크 통합 홍보 마케팅’ 중간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8월 임시 개장을 앞둔 테마파크의 성공적 개장과 운영을 위해 마케팅 타깃 그룹 선정과 정식개장까지 홍보 로드맵, 마케팅 성공 코드 등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전략 등을 발표했다.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삼국유사에 담긴 문화콘텐츠를 시각화, 촉각화한 종합테마파크다. 360도 서클 애니메이션을 통해 삼국유사 속 영웅들의 이야기를 관람할 수 있는 신화서클영상관, 일연스님의 생애와 행적, 저술을 볼 수 있는 일연대선서관, 삼국유사관과 설화체험관 등 전시관으로 이루어진 가온누리관, 해룡 슬라이드와 해룡물놀이장 등의 놀이시설, 삼국유사에 대한 체험교육과 연구를 수행하게 될 이야기 학교·숲속 학교, 그리고 만파식적 해룡과 지철로사자상 등의 조형물과 산책코스 등을 갖추고 있다. 김영만 군수는 “테마파크 성공을 위해 모두 함께 노력해 주길 바라며, 군민 전체가 다 같이 1인 홍보대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군위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오는 8월 임시개장과 함께 시설보완을 거쳐 2020년 정식 개장할 예정이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2)- 지철로왕

삼국유사의 지철로왕은 지증왕이다. 지증왕 이후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신라왕릉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 역대왕의 능묘 소재지나 장례지에 대해서 지증왕까지는 오릉, 미추왕릉, 내물왕릉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의 무덤은 사실상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천마총으로 불리는 대릉원의 고분은 155호고분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경주문화관광자원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 발굴하면서 천마도가 출토돼 천마총으로 이름 지어 졌다. 적석목곽분 마지막 무렵 조성된 지증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부터는 차례로 그 왕릉의 소재지나 장례지가 주변에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방위, 산 이름, 지역명 등으로 나타내고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을 경계로 왕릉의 입지조건이 달라졌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법흥왕릉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라왕릉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바로 신라 고분의 변천 과정을 문헌으로 뒷받침한다. 최초의 석실을 묘제로 채택한 왕릉은 법흥왕릉이다. 이를 기점으로 석실분은 확산되어 갔다. 천마총에서는 1만1천여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목곽과 목관실에 껴묻거리가 가득하고 돌을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어 능의 크기가 대형고분으로 조성됐다. 신라 고분은 6세기 초까지는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었으나 6세기 중엽부터는 입지조건도 구릉지대로 옮겨가고 내부구조도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천마총이 지증왕릉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그럴듯하여 지증왕의 잘 알려지지 않은 왕위 계승과 천마총의 비밀을 풀어본다. ◆삼국유사: 지철로왕제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고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이다. 시호는 지증이니 시호가 이것이 처음이었다. 또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으로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시작됐다. 왕은 영원 2년 경진(500)에 왕위에 올랐다. (혹은 신사년 501년이라고 하나 그렇게 되면 영원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람들을 세 방면으로 보내어 배필을 구했다. 배필을 구하는 사람이 모량부의 동노수라는 나무 밑에 왔을 때, 개 두 마리가 북 만 한 큰 똥 덩어리 한 개의 양 끝을 서로 다투어 가면서 깨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하기를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여기에서 빨래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라 하여 그녀의 집을 찾아가서 알아보니 키가 7자 5치였다. [{IMG03}] 이 사실을 자세히 왕에게 말씀드렸더니, 왕이 수레를 보내어 궁중으로 맞아들여 황후로 책봉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예를 갖추어 축하했다. [{IMG04}] 또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동쪽 바다 가운데에 바람만 잘 불면 이틀 뱃길 거리에 우릉도(지금은 于陵을 羽陵으로 쓴다)가 있다. 주위 둘레가 2만6730보이다. 섬 오랑캐들이 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거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 박이종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박이종이 나무로 된 사자 모양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해서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라 하자 섬 오랑캐가 두려워서 항복했다. 이종을 포상하여 고을의 장으로 삼았다. ◆흔적△천마총 : 천마총은 경주시 황남동 경주역사유적지구 대릉원지구에 있는 신라시대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다. 이칭 별칭 황남동 제155호분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인접 지역 고분군 통합 2000년 12월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 됐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정부의 경주종합개발계획에 의거 황남동 제98호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제98호분은 한국 최대형 고분이므로 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소형의 고분을 발굴하여 경험과 정보를 얻어 발굴한다는 방침을 세워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다. 천마총의 목곽과 목곽실의 유물들. 금관과 다양한 껴묻거리를 볼 수 있다. 1973년 본격 발굴이 시작된 제155호분 천마총도 대형에 속하는 고분이다. 당시까지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완형에 가까운 고분이어서 신라의 왕릉급 대형고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으로 분류된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 금제 관모, 금제과대가 각기 국보 제188호, 제189호, 제190호로 지정돼 있다. [{IMG06}] 껴묻거리 유물은 장신구류 8천766개, 무기류 1천234개, 마구류 504개, 용기류 226개, 기타 796개로 모두 1만1천526개가 출토됐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리잔이 당시에도 인도 등의 해외까지 문물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발굴된 금관은 의식용이라 할 수 있고, 금모는 실용관이라 할 수 있다. 천마도장니의 천마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고구려벽화의 무용총 수렵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고분벽화가 별로 없는 신라의 회화자료로서 천마총의 천마도는 매우 귀중한 대접을 받고 있다. [{IMG04}] 천마총 고분의 축조 연대를 추정하기 위해 목관조각의 방사성탄소측정(원자력연구소 검사) 결과, 서기 340년 전후 70년이므로 축조 연대는 서기 270년∼410년 사이에 들어간다. 이 연대는 목관재료 자체의 연대로 추정하면, 실제 고분 조성 시기는 서기 500년 전후가 될 것이라 본다. 발굴보고서는 소지왕과 지증왕을 이 고분의 피장자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분지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이 지증왕 대까지 축조되고, 법흥왕 대부터는 서악동 무열왕릉의 후방 왕릉군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황남동에서의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는 6세기에 끝났다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또 천마총의 묘단, 목곽부, 적석부, 분구 등 구성요소의 규모가 합리적 비례를 취하고 있고, 목곽, 수장궤 및 천마도, 금관이식 등은 다른 무덤에서 볼 수 없는 발달된 양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황남동에서는 최후 단계인 6세기 초의 무덤으로 추정한다.따라서 잠정적으로 지증왕의 왕릉으로 추정하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보물 617호와 618호 관 꾸미개. 지증왕은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왕으로도 불렀다. 신라의 왕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을 거쳐 처음 왕으로 부르게 했다. 국호를 ‘덕업일신 망라사방’에서 글자를 취해 ‘신라’로 지었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189호 관모.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하게 하고, 소를 이용한 농사법을 장려했다. 재위 6년인 505년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하는 석빙고를 만들고 배를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도도 마련했다. 서울 동쪽에도 시장을 설치하고, 나라 안에 주와 군, 현을 정비해 군주를 파견해 다스리게 하고, 이사부를 통해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벌했다. 신라 23대 법흥왕릉으로 지정된 경주시 충효동 효현리의 고분. 산 속 깊은 곳에 있어 산책로로 인기다. △법흥왕릉: 법흥왕릉은 경주시 충효동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의 서쪽 기슭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능이라 전해지는 고분이다. 사적 제1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고, 외형상으로는 원형 토분으로 되어 있다. 신라왕릉으로는 비교적 작은 편이다. 호젓한 산속에 위치해 새소리, 개구리울음이 들려 산책하기에는 좋은 코스이지만, 법흥왕 이름이 주는 무게에 비해 너무 왜소하여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 법흥왕릉은 수많은 대소고분이 밀집된 경주 시내의 고분군을 벗어나 교외의 야산 구릉 지대에 축조돼 여러 가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 장식물이 없다. 봉분 아래에 호석을 받쳤던 자연석의 일부가 드물게 드러나 있다. 비슷한 유형으로 선도산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이 있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 시내에서 냇돌만 쌓은 평지 돌무지덧널무덤의 호석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천마총 피장자가 착용하고 있던 금관과 금제 허리띠, 신발 등을 발굴 당시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법흥왕은 재위 27년에 애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고분의 남쪽에는 신라 하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애공사지탑’이라 부르고 있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아들이다. 27년간 왕좌에 있으면서 신라역사에 획을 긋는 많을 업적을 남겼다.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병부를 설치하고 상대등을 설치하며, 율령을 반포한 데 이어 불교를 공인했다. 금관가야를 정복해 영토를 넓히고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천마총 안에는 많은 생활 도구와 함께 말안장 등의 마구도 출토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소지왕과 지증왕의 대결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자이고,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이다. 김씨 왕위 세습체계를 이룬 내물왕의 직계 왕손인 셈이다. 그러나 내물왕의 같은 증손자이지만 눌지왕, 자비왕으로 이어지는 맏아들의 소지왕에게 왕위가 이어지면서 지증왕은 사실상 왕좌에 앉기 어려운 처지였다. 지증왕은 외할아버지 눌지왕의 근엄한 모습을 옆에서 바라본 이후 왕좌에 대한 꿈에 사로잡혔다. 이를 눈치챈 지증의 어머니는 왕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벗어나도록 눌지왕에게 부탁하여 일찌감치 주거지를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흥해로 옮겨버렸다. 그러나 지증의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용포를 두른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선명하게 새겨졌다. 자신이 왕이 되어 위풍당당하게 국정을 펼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법흥왕릉 입구는 흙을 다진 산책로가 조성돼 방문객들이 심심찮게 드나든다. 흥해는 넓은 들에 곡식이 넘실거려 풍요로웠고, 바다와 연접해 청년들이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적합한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지증은 평생의 친구 이사부를 만났다. 이사부는 학식이 깊고 무술적 재질도 특출하게 뛰어났다. 지증은 흥해 넓은 들과 산, 바다에서 이사부와 함께 학문을 탐구하는 한편, 말을 달리면서 무술을 연마해 문무를 겸비한 동량으로 성장했다. 지증은 키가 8척에 이르며 단단한 근육질로 뭉친 범 같은 장군상이었다. 지증은 마흔이 지나면서 2살 위인 외사촌 소지왕을 가끔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소지왕이 월성의 보수공사 때문에 명활성에서 집무를 보고 있을 무렵, 지증은 공사에 직접 참여해 월성의 내부는 물론 외부 구조까지 샅샅이 익히게 되었다. 보물 612호로 지정된 천마총에서 나온 봉황 장식 큰 칼과 세 고리 장식 큰 칼.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소지왕이 월성으로 입성할 때를 노려 반란이 일어났다. 왕가에 먼저 입성해 불교를 설파하는 승려와 후궁으로 들어왔던 선혜부인이 눈이 맞았다. 이들은 소지왕이 미색이 뛰어난 벽화를 들여와 아들을 낳자 왕을 제거하기로 하고 거사를 일으켰다. 선혜부인팀과 벽화팀이 충돌하면서 소지왕이 궁지에 몰렸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지증이 이사부와 날랜 무사들을 이끌고 사방에서 월성으로 잠입했다. 지증과 이사부 팀은 지친 두 무리를 소리소문없이 잠재웠다. 소지왕은 이미 거의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난을 평정한 지증은 소지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갈문왕으로 내정을 운영했다. 이사부를 병권과 내정을 함께 다스릴 수 있는 대신으로 발탁해 조정을 손아귀에 넣었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지증왕은 500년 드디어 왕좌에 올라 꿈을 이루었다. 그가 64세가 되던 해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11 -사금갑

사금갑(射琴匣)은 ‘거문고집을 쏘라’고 풀이되는 서출지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삼국유사의 냄새가 가장 짙은 신화 같은 이야기다. 서출지는 경주 남산의 동쪽 가운데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지금도 사적지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경관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유적이다. 서출지 북쪽에는 나무 그늘에 여러 개의 벤치를 설치해 쉼터를 조성해 두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단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서출지를 탐방하고 있다. ‘사금갑’은 쥐와 까치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돼지가 서로 싸우고, 연못에서 신선이 나오는 등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당시 시대 상황을 여러 각도로 추측하게 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글이다. 학자들의 분석이 다양하게 보고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서출지 남쪽에는 신라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아미타불을 염불하던 스님이 있었다는 염불사터에 동서 쌍탑으로 삼층석탑이 복원돼 있다. 임금을 구한 편지가 출토되었던 연못과 신비스런 스님이 있었다던 염불사지로 가본다. 그리고 소지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력을 추측해 새로 삼국유사를 써본다. 삼국유사 사금갑조에 소지왕을 위기에서 구한 편지가 출토된 연못 서출지 전경. 조선시대때 건립된 정자 이요당이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삼국유사 사금갑-거문고집을 쏘라-제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지 10년 되는 무진(488)에 천천정에 행차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소서”라 했다.(혹은 말하기를 신덕왕이 흥륜사에 예불하러 가려는데 길에서 여러 마리의 쥐들이 꼬리를 서로 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괴상히 여겨 돌아와 점을 쳐보니 ‘내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보라’ 등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왕이 말을 탄 무사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으로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으로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도착했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주저주저하며 그것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버리고 길가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노인이 못에서 나와 편지를 주었다. 겉봉에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쓰여 있었다. 무사가 와서 그것을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떼지 않고 단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라 했다. 서출지에는 연꽃이 어우러져 정자와 함께 신비스런 풍경을 연출한다. 둘레길에는 백일홍과 고목들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일관(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이 말씀드리기를 “두 사람이란 것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것은 왕입니다”라 하자 왕도 그렇게 여겨 편지를 떼어 보았다. 그 편지 속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집을 쏘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집을 보고 활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는 중과 궁주(왕비)가 은밀하게 사귀면서 간통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처형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속에 매년 정월 첫 돼지 날과 첫 쥐 날과 첫 말의 날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가서 함부로 움직이지 아니했다. 정월 보름을 ‘까마귀의 제삿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를 지냈으니,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세속의 말로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여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편지가 나온 못을 서출지로 이름을 붙였다. 서출지 동쪽 제방에는 수령 200년 이상 된 소나무가 산책로를 아름답게 하고 있다. ◆흔적: 서출지△이요당: 이요당은 서출지 서편에 한쪽은 저수지 안쪽으로 쑥 들어와 있고, 한쪽은 저수지 둑과 연결된 도로에 접해 있는 조선시대 건축된 정자다. 동남향으로 ‘ㄱ’ 모양의 순수 한옥형 정자로 지어져 자못 풍류가 느껴진다.조선시대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이요당. 요산요수에서 두 개의 요자를 겸한다고 하여 정자 이름이 이요당으로 지어졌다.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과 함께 이요당은 지혜로움과 덕이 넘치는 인품을 두루 갖춘 선비의 풍모를 닮아 반은 물 위에 떠 있고, 반은 땅에 연접해 지어 선비들이 여름에도 시원하게 글을 읽었던 곳이다. 건물 이름 이요당도 요산요수에서 취했다. 조선시대 현종 5년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처음에는 3칸 규모였으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고풍을 연출하고 있다. 임적은 가뭄이 심할 때는 물줄기를 찾아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도왔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덕망이 높았다. 남쪽 양피못 언덕에는 임적의 아우 임극이 지은 산수당이 있다. 한때 양피못을 진짜 서출지라고 주장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현재 서출지가 진짜 서출지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요당의 동쪽은 서출지에 들어와 있어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초석을 돌기둥으로 세웠다. △서출지는 동남산 통일전 남쪽에 연접해 있는 부지면적 7천㎡ 규모의 아담한 연못이다.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깃든 연못으로 지금도 이요당 정자와 함께 향나무와 소나무, 백일홍이 어우러지고, 못 가운데는 연꽃이 가득해 연인들의 산책코스로 인기다. 경주시는 서출지 제방 둘레에 조명등을 설치해 밤에 오히려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해 찾는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서출지 둘레길은 제방 둑으로 꽃길로 조성되어 있다. 야간에도 조명등을 밝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신라 소지왕 때에 연못에서 신선이 편지를 들고 나타나 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역사문화 탐방객들의 필수코스로 손꼽힌다. 또 서출지에서 비롯된 정월 대보름 제사와 찰밥 풍습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풍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출지는 국가에서 사적 138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서출지 남쪽 1㎞ 거리에 염불사지로 전해지는 사찰 터에 동서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있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서출지에서 약 1㎞ 거리에 염불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동서 쌍탑으로 복원돼 있다. 삼국유사에는 ‘피리사’라는 절에 신비스런 승려가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 피리사를 ‘염불사’로 고쳐 부르고 있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고, 2009년 1월 동서 쌍탑으로 삼층석탑을 복원했다. 이때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복원공사내역과 함께 매립했다. 염불사지에는 이거사 터에서 옮겨온 석탑 부재들이 쌓여 있다. 서출지와 이요당의 둘레길 야경. 조명을 받은 이요당이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소지왕의 위기소지왕은 479년에 아버지 자비왕의 뒤를 이어 신라 21대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17대 내물왕부터 실성왕, 눌지, 자비왕까지 김씨들이 왕위를 대물림하고 있었지만, 박씨와 석씨들의 권력을 향한 힘겨루기는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어 연대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박, 석, 김 3성의 왕권 차지를 위한 견제와 타협은 미묘한 권력 구도를 형성하면서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첨예한 대립의 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김씨 왕위세습체제는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힘으로 박씨, 석씨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전략을 동원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와 함께 육부촌장들의 힘겨루기와 백제, 고구려의 침략은 정권을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면서 소지왕의 의지를 지치게 했다. 소지왕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상당히 심취했다. 이름도 아버지는 자비왕, 자신은 스스로 부처를 뜻하는 ‘비처’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라의 불교는 왕실을 비롯해 귀족층에서부터 시작해 백성들에게로 전파되는 형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요당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풍경. 소지왕은 초창기에 백성들을 많이 사랑했던 왕으로 칭송을 들었다. 가뭄에 백성들을 위해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고, 지방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직접 보살피기도 했다. 사방에 우편 역을 설치하고, 도로를 고치고, 시장을 열어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려 했다. 계속되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월성 주변에 해자를 설치하는 한편, 백제와 결혼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다. 외세 침략에 대비하면서 소지왕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적들의 반란에 제대로 견제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지왕은 고구려 등의 침략에 대비해 월성의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해자를 보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공사 기간 동안 소지왕은 명활산성을 궁으로 사용했다. 다시 월성으로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 정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왕권을 노리는 정적들의 공격을 여러 번 받으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번이 가장 강력했다. 이때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었을 때다. 서출지와 염불사지 사이에 이요당을 지었던 임적의 동생 임극이 양피못 옆에 산수당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후궁으로 들어온 선혜부인이 신궁의 승려 묘심과 내통하고, 궁궐과 외부를 잇는 세력을 키워 소지왕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할 계획을 꾸몄다. 소지왕은 반란세력의 기미를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가까스로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숨죽이며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소지왕은 내부적인 정적들의 도전에 직면해 김씨 일족과 박, 석씨 세력의 도움으로 겨우 왕권을 유지하면서 정치싸움에 환멸을 느껴 점점 환락에 빠져들었다. 소지왕은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막연한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한편, 여성 편력으로 내부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권해 죽임을 당했다. 서출지 동북쪽에 수령 300년은 넘은 것 같은 두 그루의 향나무 가지가 맞붙어 연리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해설사의 이야기가 있다. 소지왕의 여성 편력을 이용해 반란세력들은 미모가 뛰어난 벽화를 왕에게 소개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며 정치에 몰입하려 애를 썼지만, 벽화의 조직적이고 개략적인 유혹에 소지왕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결국 소지왕은 반란세력의 힘에 밀려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고, 죽음으로 모든 권력을 놓아야 했다. 소지왕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신라 22대 왕좌에 오른 사람이 지증왕이다. 힘으로 왕좌를 빼앗은 지증왕은 3년여 동안 갈문왕으로 있으면서 왕위에 올라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며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64세에 왕의 권좌에 오른 지증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과 울릉도 영토회복 등의 활약을 하면서 15년 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신라’라는 국호도 지증왕이 처음 사용했다. 지증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계속 이어간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잼라이브 5월7일 힌트, ‘부산유형문화재·31호·지은이’… 삼국유사? 일연?

사진=잼라이브 오늘의 힌트 오늘(7일) 오후 9시 라이브 퀴즈쇼 잼라이브는 '자세히 보아야 푼다 오래 보아야 우승한다' 특집으로 꾸며져 당일 총상금은 500만원이다.이날 잼라이브 5월 7일 힌트는 ''#부산유형문화재 #31호 #지은이'다.제시된 힌트 부산유형문화재 31호는 고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인 '삼국유사'(지은이 : 일연)로 정답은 '일연'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삼국유사는 지난 1991년 11월 19일에 부산 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돼 '삼국사기'와 함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책으로 꼽힌다.이후 2002년 10월 19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고 2013년 보물 419-3호로 승격했다.online@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 미추왕 죽엽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 왕조사를 들여다보면, 왕권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치열한 권력다툼은 조선시대 당파싸움, 오늘날 정치 현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신라왕조는 박, 석, 김씨의 3성으로 이어졌다. 김씨로는 처음 왕위에 올랐던 13대 미추왕릉은 대릉원 내부 가운데 부분에 있다. 수양버들과 여러 화초들이 길을 열고 있는 미추왕릉 입구. 이, 정, 손, 최, 배, 설, 6부촌장들이 박씨를 왕좌에 추대한 이후, 신라의 왕좌는 박, 석, 김 3성씨의 자리로 대물림 되었다. 왕을 옹립했던 6부촌장들의 6성은 한 번도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박, 석, 김 3성의 왕권에 대한 욕심은 왕비조차 다른 성씨에게 양보하지 않은 무섭도록 이어진 집착을 보게 한다. 처음 박씨가 신라의 왕조를 열었고, 석씨가 왕가의 주력세력으로 등장했다가 다시 김씨가 줄잡아 대물림하면서 신라의 왕손은 박, 석, 김 3성의 왕국으로 신라 천 년의 역사로 이어졌다. 대릉원 내부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3성의 왕족 중에서도 김씨가 가장 늦게 세력을 움켜잡았지만, 가장 오랜 기간 신라의 주인 자리를 꿰차는 주력으로 남았다. 신라의 본격적인 흥망성쇠를 감당했던 김씨 왕조를 처음 열어간 미추왕과 죽엽군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대릉원 미추왕릉 서쪽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대총이 연못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삼국유사 미추왕과 댓잎군사제13대 미추이질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으며 겸하여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이사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올라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능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 [{IMG04}] 제14대 유례왕 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했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방어했으나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홀연히 신비스러운 병사들이 와서 도왔는데, 그들 모두가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신라군사들과 힘을 합쳐 적을 쳐서 격파시켰다. 미추왕릉의 뒤편에는 삼국유사에서 죽엽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죽림이 조성돼 있다. 적군들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선왕의 음덕에 의한 공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능을 죽현릉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 36대 혜공왕 때인 대력 14년 기미(779) 4월에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는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복장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이 그 뒤를 따라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능 속에서 왁자지껄하며 통곡하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하소연하는 소리는 “신은 평생 시국을 돕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했으며, 삼국을 통합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사온데, 지난 경술(770)에 신의 자손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내 공적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는 애쓰지 않으려 하오니 왕께서 윤허하여 주옵소서”라 했다. 왕이 대답하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다시 전과 같이 노력해 주오”라 했다. 공이 세 번 청했으나, 왕이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했다. 즉시 공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한 공덕보의 밑천으로 반 30결을 취선사에 내리고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곧 김유신이 평양을 토벌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해 세웠기 때문이다. 미추왕을 추모하며 요즘도 향사를 올리고 있는 숭혜전. 미추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하였을 것이니 왕이 나라를 수호함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삼산과 함께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으며 끊어짐이 없었다. 서열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라고 했다. ◆설화의 의미△13대 미추왕은 김씨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역사다. 4대 석탈해 왕과 함께 왕의 사위 입장에서 왕권을 잡은 것이어서 다음 대를 바로 잇지 못하고 박씨, 석씨 계파로 왕권은 주된 세력의 일족으로 이양되었다. 석씨와 김씨는 꾸준한 세력을 양성해 왕권을 회복하고, 다시 자리를 물려주면서 역사를 이어왔다. 미추왕릉의 남쪽 정면에 있는 제단이 화강석으로 조성돼 있다. △대잎군사 이야기는 신라 제14대 유례왕 때 이서국의 침략을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친 후 36대 혜공왕 시대에 김유신의 후손이 죽임을 당하자 유신의 혼이 미추왕에게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자 미추왕의 혼이 이를 만류했다는 내용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설화에서 미추의 혼과 김유신의 혼은 그 가치의 추구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미추의 혼은 집단적 가치, 즉 국가를 수호하는 호국신적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유신의 혼은 개인적 가치 즉 후손을 지켜주는 왜소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비교했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된 후 백제,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워 공을 세운 후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 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그 공적에 의해 태대각간의 작위를 받았고 죽은 후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이러한 김유신도 설화에서는 미추왕보다 극히 낮게 기록되어 있다. 즉 김유신이 후손을 지켜주는 혼으로, 미추왕은 나라를 수호하는 신령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추왕이 신라왕실의 시조요 조상신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뜻이 담긴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은 대릉원 안에 비교적 규모가 크게 꾸며져 있지만, 호석은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에 벚나무가 우거져 4월이면 화려하게 꽃 대궐로 치장한다.◆미추왕미추왕은 신라 13대 왕으로 김씨 최초의 왕이다. 박씨에 이은 석씨 왕가의 세습 도중에 12대 첨혜왕의 아들이 없어 김씨이지만, 석씨 왕가의 사위였던 미추가 왕위를 이었다. 미추왕의 부인이 바로 11대 조분왕의 딸이었다. 부인이 석씨였기 때문에 아들 대신 사위가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미추왕에 이어 14대 유례왕은 다시 11대 조분왕의 아들 석씨가 왕위를 이었다. 미추왕은 백성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기록에서 이해하게 된다. 즉위 3년에 황산, 지금 충남 논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 때문에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왔다. 대릉원 서쪽에 대형 환도가 출토되면서 검총으로 불리는 100호 고분에도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미추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재위 15년 신하들이 궁궐을 짓자고 했을 때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건축하지 않았다. 재위 23년에는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둘러보면서 백성들을 위로했다. 미추왕의 백성들에 대해 사랑은 죽어서도 이어졌다는 것은 이서국의 침략 당시 댓잎 군사들의 설화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혈통왕위에 오른 박씨, 석씨, 김씨 3성. 이른바 신라의 왕손들은 각자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한 혈통보존과 대물림을 위해 혈안이었다. 그들은 혈통 보존을 위해 족친 간에만 결혼을 허락하고, 부득이한 경우 사위가 왕권을 잇게 하기도 했다. 김알지는 석탈해 왕으로부터 태자에 책봉되지만, 절대적인 권력의 약세를 간파하고 왕좌를 포기했다. 대신 그는 스스로 중요 직책을 맡아 권력의 상당 부분을 좌지우지하면서 일가의 사람을 키웠다. 김씨들을 주요 요직에 오르게 하고, 왕비 자리에 앉게 하는 등으로 권력의 주변에 김씨들을 두텁게 포진했다. 박씨의 권력이 석씨들에게로 이양되고, 김씨 일족들의 꿈도 대를 이어 무르익고 있었다. 김알지의 꿈은 권력층에 인력을 포진하는 한편, 사병을 양성해 세력도 탄탄하게 준비하도록 안배를 했다. 특히 박혁거세로부터 내려오던 궁중의 무예도반을 접목한 가전 비법을 만들어 사병들의 전투력을 강하게 키웠다. 김씨 일가의 세력은 미추왕대에 이르러 어떠한 부족들과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규모와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에도 김씨 일가의 병력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미추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사병들의 세력을 키우는 한편, 왕궁을 지키는 특수 비밀병기를 양성해 호위세력으로 배치했다. 그는 사후에도 왕궁은 그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지켜낼 수 있는 드러나지 않는 힘으로 존재하도록 비밀 무사를 안배했다. 신라 최초의 김씨왕 미추왕과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혜전 정면. 이러한 안배 덕분에 14대 유례왕 대에 이서국이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해 왔을 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왕궁 안으로는 단 한 명의 적군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병기들의 손이 움직인 것이다. 그들이 궁궐을 사수하면서 적들을 몰아내고 전쟁에 승리했지만, 결국 전쟁에 참여했던 일가의 사병들은 크게 타격을 입어야 했다. 김씨 일가의 꾸준한 노력으로 16대 흘해왕으로 석씨의 왕권이 막을 내리고, 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씨의 길고 독점적인 왕좌의 무대가 열렸다. 내물왕 이후 왕비 또한 김씨 이외에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22대 지증왕부터 25대 진지왕까지 4명의 박씨가 왕비의 자리를 겨우 차지했을 뿐이다. 그 외에 46대 문성왕, 52대 효공왕이 박씨 부인을 둔 것이 거의 전부이고, 왕과 왕비는 모두 김씨 일족의 자리였다. 미추왕릉 바로 앞에 세워진 표지석. 이러한 김씨 세습체제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던 힘도 35대 경덕왕을 정점으로 36대 효성왕대에 이르면서 급격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김양상과 김경신이 합작해 내란을 평정하면서 왕을 시해하고 왕좌를 빼앗았다. 이때부터 김씨 왕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이어지면서 화려했던 통일신라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숭혜전 옆에 경순왕의 신도비와 비각 옆에 세워진 현령과 군수 공적비. 왕궁을 지키던 김씨 일가의 비밀병기들도 김양상과 김경신의 갈등으로 내분이 극에 이르면서 세력이 약화하기 시작해 결국 와해됐다. 신라 천 년의 화려한 무대도 결국 사적인 권력욕이 부패의 근원으로 기능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을 주는 역사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 연오랑 세오녀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지금 포항지역의 부부가 일본으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는 내용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삼국유사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신라 아달라왕 때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달라왕은 박혁거세로 시작한 초기 박씨 왕가의 대 이음에 종지부를 찍고, 석씨 왕손의 시작을 허용했던 만큼 어지러운 정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설화는 신라가 국가적으로 내적인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앙적인 부분과 철기문화, 직조기술의 일본 전래를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배경으로 추정되는 포항시 호미곶 해변에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조성돼 새로운 문화관광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해안 가까운 곳에 2층 한옥 형태의 정자 일월대. 포항시는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을 조성해 당시 시대적 배경과 신라의 외교, 신앙적인 배경, 철기문화의 전래 등에 대해 이해하게 하면서 역사문화를 체험하게 한다. 테마공원은 본래의 설화를 재해석하고, 역사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우리의 문화산업의 진화를 추적하게 하는 목적이 드러나는 곳이다. 귀비고 전시실 남쪽에 초가집으로 형성된 신라마을. 그러나 본래의 목적 외에도 푸른 파도 일렁이는 아름다운 동해의 비경을 감상하는 힐링의 시간을 제공하는 덤이 더 크게 와 닿는 문화공간이다. 수천 년에 걸쳐 철의 도시로 명맥을 이어가는 포항에 걸맞은 설화의 현장이다.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 되는 정유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류를 따는데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연오랑 세오녀가 신라시대 일본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갔던 바위로 일컬어지는 거북이 모양의 두 마리 거북바위.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보고 말하기를 “이 분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다” 하고는 왕으로 세웠다. 세오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이 보였다. 그녀도 또 그 바위에 올라갔더니 바위가 역시 전과 같이 세오를 싣고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왕에게 세오를 모셔가니 부부가 서로 만나 세오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의 빛이 없어지자 일관이 말씀드리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으나, 지금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이한 일이 생긴 것이옵니다”라 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두 사람을 오라고 하였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귀비고 전시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축됐다. 2층은 카페와 카페테리아 전망대, 1층과 지하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등의 체험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 드리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궁중의 창고에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삼았다.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의 의미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한 설화는 고려 문종 때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에 실려 있는 것을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설화는 광명의 신인 해와 달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일월신화라는 설과 제철기술자의 집단적 일본 이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는 설, 그리고 세오녀가 일본의 신공왕후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설 등이 있다. 테마공원은 전체가 일본과 한국의 형식을 빌려 정자와 연못 등을 조성한 정원으로 곳곳이 포토존으로 기능하며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소재영의 ‘연오세오설화고’는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의 변음으로 본다. 영일현의 영일, 즉 해맞이의 지명도 태양신화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일본서기’의 천일 창설 화도 태양신화의 이동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동남해안과 일본의 이즈모 지방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의 전승로였음을 감안할 때, 이 설화는 그러한 문화를 따라 이동한 태양신화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도기야는 ‘동국여지승람’에 욱기야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경상도지리지’에 근오지의 오지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와도 동일하여, 연오와 세오가 일본에 건너가 자신들이 살았던 오키의 이름을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보여 진다. 이 점은 일본인 나카다도 출항과 기항지를 영일만과 오키 지부도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이 설화는 일찍이 우리 민족이 일본 땅을 개척하여 통치자가 되고 내왕한 문화적 사실을 원시적 태양신화를 통해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연오와 세오도 광명을 의인화한 명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영규 ‘신라왕조실록’은 연오와 세오의 오는 까마귀로서 태양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이 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태양의 정기를 까마귀로 형상화한 것이다. 귀비고 전시실의 진입로 아래 조성된 바위 조경. 연오와 세오 두 사람은 해와 달에 이상이 생겼을 때 제례를 주관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을 왜국으로 싣고 간 바위는 신격의 내림 상징이거나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이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간 이유는 정치변동에 의한 신변불안으로 망명하였거나, 일본도 제례를 주관하는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이들을 초빙 혹은 납치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해와 달의 빛이 없어졌다 함은 짙은 황사 현상일 수 있는데 당시 흙비가 내린 일도 있기 때문이다. 연오와 세오가 보낸 비단은 제사에 필수적인 용구일 것이다. 이 설화에 나오는 영일현 도기야는 제천의식의 하나인 태양제가 행해진 장소로 추정된다. ◆최두식 ‘삼국유사에 나타난 생명의식’은 천계의 일월성신이 생명 창조에 참여한 신화이다. 일월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사고에서 나온 말로 인간 생명의 원형을 하늘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태양신화의 일본 이동설을 나타낸 것으로 일월의 생명 창조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는 세오의 세는 무쇠의 쇠를 의미한다. 세오녀 부부가 떠남으로써 신라의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고 하는 것은 제철기술자 집단이 일본으로 떠나버린 탓에 고로의 불이 꺼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왕의 부탁을 전하러 온 사신에게 전해진 곱게 짠 비단인 세초는 제철 만들기의 노하우를 상세히 적은 비단으로 여겨진다. 세초는 혹 쇠지어(쇠 만들기)를 나타낸 이두로 볼 수 있다. 그 방법대로 하여 광명을 찾았다는 것은 고로에 다시 불이 타오르게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은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신공황후가 되었으며, 이 신공황후가 비미호(卑彌呼)이다. 테마공원 언덕에 돛을 올린 배 모양의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결국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시사하는 것은 신앙과 정신문화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과 철기문화, 직조기술도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신라 아달라왕이 박씨 왕가의 세습에서 석씨 왕가의 새로운 시작을 통해 신라의 내적 갈등을 읽어볼 수 있게 한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은 철의 도시 포항, 호수 같은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영일만해수욕장을 마주 바라다보는 호미곶 호랑이 꼬리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테마공원은 전시실과 조경시설보다 일몰에 연출되는 절경이 더욱 인기다. 만을 이루는 바다가 크게 타원을 그리며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며 사계절 지루하지 않은 풍경을 선사한다.특히 도심의 빌딩 너머로 석양이 연출하는 일몰의 광경은 보는 이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하면서 자신있게 명소로 추천하게 한다. 테마공원의 일본식 정원으로 조성된 일본 뜰. 바다 풍경과 어울리게 테마공원은 일본식 정원과 한국식 정원을 대비되도록 전시관 진입로의 양편으로 구분해 조성하고 산책로를 설치해 방문객들의 쉼터로 제공한다.일본식 정원과 한국식 정원에는 각각 정자와 작은 호수를 조성해 물그림자에 비추는 데칼코마니의 예술적 풍경을 연출한다. 쌍거북바위는 방문자들이 호기심에 올라타고 사진을 찍는 포토존으로 인기다. 전설의 보물창고 귀비고 앞에는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쌍거북바위가 신화를 현실로 오인하기 좋게 바다를 바라보며 넙죽 엎드려 있다. 호기심 많은 방문객들은 기어코 거북바위 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기념촬영을 시도한다. 해변의 바람이 그대로 들이닥쳐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일월대는 바다 가까이 세워진 한옥형 2층 정자로 운치를 더한다. 언덕 위에는 해풍을 받아 돛을 높게 올린 일본으로 항해했던 목선이 구름을 싣고 둥둥 떠가는 형상으로 설치돼 있어 방문객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경사가 제법 가파른 산책로를 등산하듯 오른다. 테마공원의 절정은 아무래도 ‘귀비고’ 다. 연오랑 세오녀의 솜씨가 기록된 비단을 보관했던 신라의 보물창고 이름을 내건 3층 건물이 전국 건축설계명장들의 공모를 통해 예술적 감성을 풍기며 서 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2년간 10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천890m² 규모로 건축됐다. 귀비고 북쪽으로 산책로가 광장과 연결돼 아래 위로 형성된 조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3층은 전망대와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제공하는 연오랑세오녀 카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 야외테라스 전망대에 서면 공원 전체 시설과 철의 도시 포항의 도심은 물론 너울거리는 파도를 따라 동해까지 시선은 끝없이 펼쳐진다. 귀비고 전시실에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체험 조형물. 1층과 2층은 전시실이다. 전시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를 방문객들이 쉽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VR 영상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일본 뜰 위에 한국식 정원으로 조성된 한국 뜰.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 유일의 일월신화이자 포항의 대표적인 신화 연오랑세오녀의 가치와 의미를 쉽고 편안하게 전달한다. VR 체험공간은 연오랑세오녀가 바다를 건너 일본을 개척했듯이 증강 현실게임을 통해 직접 연오랑세오녀가 되어 모험을 떠나는 체험공간으로 구성했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입구에 설화의 내용을 소개하는 만화가 벽화로 조성된 쉼터 광장.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은 넓은 주차장에 설화를 소개한 벽화가 병풍처럼 둘러친 광장을 형성해 바다를 바라보는 시원한 쉼터를 제공하면서 방문객들을 반긴다. 테마공원은 청룡회관, 일월사당, 해맞이광장, 구룡포일본인가옥거리 등의 주변 관광지와 어울려 철의 도시 포항에 새로운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청소년참여기구 발대식

군위군은 최근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에서 청소년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고 청소년들의 권익증진을 위해 ‘2019년 군위군 청소년 참여기구’ 발대식을 가졌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6)- 석탈해왕

석탈해는 62세의 늦은 나이로 신라의 4대 임금으로 등극해 23년간 통치했다. 지혜가 뛰어난 것이 남해왕의 눈에 들어 공주를 아내로 얻고, 결국 왕위에까지 오르면서 석씨 집안을 왕손으로 잇게 했다. 신라 4대 석탈해왕은 용성국에서 아진포 해안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탈해가 상륙한 지점으로 전해지는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본부 앞에 석탈해탄강기념비와 비각이 있고,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역사에 왕들이 백성들을 위해 진정으로 걱정한 내용이 더러 드러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까지 백성들을 위한 노력을 이해하게 하는 대목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어 백성과 나라를 위해 동해를 지키겠다고 전한 기록이 있고, 김유신 장군과 미추왕 또한 죽어서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석탈해왕은 죽어 동악의 신이 되어 나라를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어, 현대 정치사에도 교훈이 된다. 탄강비 일대에 월성원자력본부가 공원을 조성하고 조형물을 설치해두고 있다. 삼국유사를 통해 석탈해와 김알지의 지혜로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현명하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 절대적인 권력도 양보하고 배려하는 진정한 용기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석탈해는 유언으로 얻은 왕권을 처남에게 양보했다가 늦게 왕위에 올랐다. 김알지는 석탈해왕으로부터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결국 왕위를 사양했다. 여기에서 탈해왕의 지혜와 용기를 삼국유사를 통해 들여다본다. ◆제4대 탈해왕탈해 이사금이다. 남해왕 때였다. 가락국의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떠와서 정박하려 했다. 그 나라의 수로왕과 신하들이 북을 두드리며 맞이하고 머물게 하고자 하는데, 배는 도리어 달아나버렸다. 석탈해가 접안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진포 해변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설립되어 있고, 낚시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구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하늘을 향해 맹세를 하자 곧 열렸다. 그 안에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삼국유사 기행단이 석탈해탄강비를 탐방하며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7일 동안 보살펴주었더니 “우리는 본디 용성국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28용이 사람으로 태어나 5~6세부터 왕위에 이어 올라, 만백성들이 성명을 바르게 닦도록 하였습니다. 여덟 단계의 성골이 있었는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요. 마침 우리 아버지 임금 함달바가 적녀국 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으나, 자리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얻고자 기도드리기 7년 뒤 큰 알 하나를 낳았지요. 이에 왕께서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한 결과, 사람이면서 알을 낳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궤짝을 만들어 나를 비롯한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을 넣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닿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일으켜라’고 빌었습니다.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지켜주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말을 마치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잡고 노비 둘을 이끌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서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봉우리를 보니 마치 초승달과 같아 오래 머물만한 형세였는데 내려가 살펴보니 호공의 집이었다. 간사스럽지만 꾀를 내기로 하였다.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 짐짓 꾸짖는 투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 선조 때 집이오.” 호공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말다툼이 일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자 관아에 아뢰었다. 관리가 물었다. “무엇으로 네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는데 잠시 다른 지방에 가 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그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다. 신라 천 년 궁성 터 월성에는 석탈해 왕을 추도하는 숭신전이 있었다. 지금은 동천동으로 옮겨 세우고, 팔각기둥이 남아 있다. 탈해가 동악에 올라 돌아볼 때였다. 하인에게 마실 물을 찾아보게 했다. 하인은 물을 길어오던 길에 먼저 입맛을 보고 바치려 하자, 그 물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보고 꾸짖자 하인은 “이제부터는 멀건 가깝건 감히 먼저 입맛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입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하인은 완연히 복종하고 감히 속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흔히 ‘요내정’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은 광무제 중원 6년 정사년(67)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석(昔), 곧 옛날 이곳이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을 석 씨로 했다. 어떤 이는 이렇게도 말한다. “작(鵲), 곧 까치가 울어 궤짝을 열었으므로 조(鳥)자를 떼어내고 성을 석 씨로 하고, 궤짝을 해(解) 곧 열어, 알을 탈(脫) 곧 꺼내어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했다.” 23년간 왕위에 있다가 건초 4년 기묘년(79)에 죽어 소천의 언덕바지에 장사지냈다. 뒤에 신령으로 나타나 “내 뼈를 매장하지 말라”고 하므로 열어보았더니, 해골의 둘레가 석 자 두 치요, 신장이 아홉자 일곱치였으며, 이가 엉겨 하나인 것처럼 가지런하였다. 석탈해왕 사후에 그의 시신을 동악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악은 토함산으로 삼국유사 기행단이 토함산에서 흔적을 찾고 있다. 뼈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었으니 천하무적의 힘센 장사의 뼈라 할 만했다. 부수어 소상을 만들고 대궐 안에 봉안했다. 신령이 다시 나타나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고 하여 그곳에 모셨다. ◆흔적: 탈해왕릉, 숭신전, 탄강비석탈해왕의 흔적은 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것들만 전한다. ‘동악’이라 부르는 토함산에 있었다던 우물과 장사지낸 흔적은 없다. 그가 처음 탄강한 아진포 인근, 지금 양남면 나아리 해변의 탄강비, 죽음 이후에 조성된 왕릉, 그를 추모하는 사당 숭신전 등이 있다. 석탈해 탄강 내역을 소개한 글이 기록된 석탈해탄강비. ◆탄강비: 석탈해왕탄강비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본부 정문 옆에 있다. 주변은 월성원전이 넓게 공원으로 조성했다. 탄강유허는 경북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을 삼국사기는 ‘진한 아진포구’라 하고, 삼국유사는 ‘계림동하서지촌 아진포’라 기록하고 있다. 하서리 마을은 탄강비 남쪽에 있다. 조선 헌종 때 석탈해탄강비를 설립하고 하마비를 세웠다. 유허비는 용머리의 좌대나 이수는 없지만, 조선 헌종 11년 1845년에 비석과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자락 남쪽에 송림이 조성되어 있고, 석탈해왕릉으로 전하는 고분이 있다. ◆탈해왕릉: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남쪽 자락 송림에 높이 4.5m, 넓이 15.5m 규모의 탈해왕릉으로 전하는 능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수장했다가 소상을 만들어 동악에 모셔 ‘동악대신’이라 전한다. 왕릉 앞에는 탈해왕이 탄생한 경위와 62세에 왕위에 올라 23년간 제위에 있었다는 것, 동악신이 된 내용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숭신전: 신라 4대왕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표암 남쪽에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은 1898년 권상문 군수의 제안으로 후손 석필복이 월성 안에 지었다. 1906년에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월성 안에 있던 사당을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처음 숭신전이 있었던 월성에는 돌로 만든 팔각형 기둥 두 개가 남아 있다. 숭신전 남쪽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영녕문과 경엄문을 지나면 3칸 맞배집으로 건축된 숭신전이 나온다. 영녕문을 열고 들어서면 상의재와 상인재가 전통한옥의 형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숭신전의 홍살문과 영녕문 사이에 건립된 석탈해왕비명 비각. 홍살문과 영녕문 사이에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 비와 비각이 단아하게 세워져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탈해왕의 지혜탈해는 신라와는 뱃길로 수천 리나 떨어진 용성국의 사람이다. 그는 용성국의 여덟 번째 왕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신체가 특별하게 발달했다. 특히 배움이 빠르고 무술습득 또한 뛰어났다. 결국 위협을 느낀 형들의 모함으로 축출되었다. 다행히 그를 아끼던 대신들이 무기와 식량, 보배들을 큰 배에 가득 실어 호위 병사들과 함께 보냈다. 탈해는 오랜 세월 항해로 지쳤다. 처음 반도에 이른 곳이 가락국이다. 화살과 화공을 피해 신라 아진포로 접안하는데 겨우 성공했지만, 모두 탈진해 실신한 상태였다. 마침 혁거세의 주치의를 담당했던 아진의선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탈해의 신체와 병사들이 가진 세련되게 다듬어진 무기들을 보고는 이들을 호위 병사로 양성하겠다는 욕심으로 치료했다. 아진의선의 탁월한 치료에 의해 탈해는 7일 만에 깨어났다. 원래 잔꾀가 많은 탈해는 깨어나면서 아진의선의 눈에 들기 위해 발톱을 감추고 순한 양처럼 행동해 결국 해안방위를 책임지는 장군으로 임명받게 됐다. 탈해는 세력을 키우면서 해안보다 비옥한 토지가 있는 서라벌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렸다. 토함산에 올라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지세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러다 수비와 공격에 유리한, 호공의 땅이었던 월성을 잔꾀로 빼앗았다. 당시 신라 2대 남해왕은 탈해의 지혜와 무력, 지도력 등에 반하여 사위로 삼고, 왕위를 이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탈해는 그때까지 자신의 세력이 미약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펼쳐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남해왕의 아들이자 처남인 노례왕이 왕권을 잇도록 양보하고 고위직을 택했다. 남해왕 때부터 탈해는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국정을 보살피는 한편, 부지런히 세를 불렸다. 남해왕의 아들 노례왕이 34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탈해는 62세에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 왕릉 남쪽에 숭신전이 있다. 홍살문, 영녕문, 경엄문을 지나야 숭신전이 나온다. 그러나 그때까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부족함을 느끼고 탈해는 지략과 무술에 뛰어난 김알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포섭해 태자로 책봉했다. 그렇지만 김알지 또한 정세에 밝아 덥석 왕위에 오르지 않고, 노례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데 내실을 다졌다. 동악산신이 되었다는 석탈해의 흔적을 찾는 삼국유사 기행단의 토함산 산행. 석탈해와 김알지의 지혜로운 배려와 감각적이고 세심한 주의가 신라를 박, 석, 김의 시대로 이어가는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다. 현시대 정치인들이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관광안내판 새 디자인으로 전면 교체

“삼국유사의 고장인 군위로 놀러 오세요.” 군위군은 최근 관광지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자 관광안내판을 전면적으로 교체 작업에 들어갔다. 관광객이 우보면 도로변에 설치한 리틀포레스토 영화촬영지 관광안내판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군은 삼국유사 테마파크를 비롯해 사라온 이야기마을,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 등 새롭게 조성한 관광지 7곳에 관광안내판을 신설하고, 중앙고속도로 휴게소 등 기존의 10여 곳에는 새 관광지도로 전면 교체할 계획이다. 전문 시각디자이너가 제작한 관광안내판.특히 배우 김태리, 류준렬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우보면 미성리 영화 촬영지에는 전문 시각디자인이 제작한 안내판을 새로 새워 깔끔한 관광지 이미지를 줘 찾는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박용덕 관광 마케팅 담당은 “앞으로도 관광지에 대한 홍보와 병행해 군위군 관광지 이미지 개선에 더욱 세심한 중점을 둘 계획”이라고 밝혔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