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0) 흥륜사 금당십성-염촉과 의상

신라 역사는 불교의 발전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교가 성했다. 신라는 불국토였다는 말 또한 역사기록 곳곳에 나타난다. 불교의 나라를 상징하듯 신라시대 고승들의 활약이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신라 고승들 중에서도 흥륜사 금당벽화에 그려진 10명의 신라 유명 승려를 신라십성이라 부른다.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염촉 이차돈, 도력으로 설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혜숙·안함, 중국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의상 등은 동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경덕왕 때에 천계를 왕래했던 표훈, 뱀처럼 기어 다녔다는 사파, 대중 불교의 효시를 이룬 원효, 삼태기를 지고 술과 춤을 좋아해 부궤화상으로 불렸던 혜공, 당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신라의 재상 무림공의 아들 자장 등은 서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이번 호에서는 염촉 이차돈과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신라의 고승: 염촉과 의상-염촉은 불교의 황무지였던 신라에 목숨을 던져 불교의 씨앗을 심은 인물로 이차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신라에서 법흥왕 이전에는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 뒤인 527년에 신라의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법흥왕은 그의 마음을 가상히 여겼다. 왕은 이차돈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는 말을 받아들였다.왕의 명령을 받고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자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 이차돈은 순교의 흰 꽃이었다. 잘린 머리가 날아가 경주의 북쪽 산에 떨어져 거기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 순교의 거룩함을 기리는 일이 쌓여갈수록 신라의 불교는 꽃을 피웠고, 꽃 피는 불교에 따라 신라 또한 큰 나라로 발전해 갔다.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의 역사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도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을 모른다. 어렵게 손에 쥔 보물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새로운 보물을 만들어낸다. 신라에 불교가 그런 것이었다.신라 불교가 이렇듯 특별한 길을 걷게 된 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이차돈일 것이다. 불교 없이 신라가 이룩되기 어려웠다면 이차돈 없이 불교 또한 이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이차돈의 할아버지 아진찬 종(宗)은 습보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라는 설명이다.-의상의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의상의 한자 표기가 義湘으로 되어 있지만 義相이나 義想으로 기록돼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덕여왕 때 644년 황복사에서 출가해 승려가 됐다.650년 원효와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당시 고구려 땅)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선사에게서 화엄사상을 배웠다. 668년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했다.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됐고, 신라 하대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부석사,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보원사, 갑사, 국신사, 청담사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로 이름이 높다.의상의 제자인 표훈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고려 숙종이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나라 때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경남 거창 우두산의 의상봉이나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의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화엄사상에 기초해 현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확립했다. 이를 기초로 현실 세계에 정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불국토 사상은 신라의 문화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불국토 사상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토착화하고, 불교가 통일 이후의 현실에서 사회 통합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의 여인의상은 왕족이었다. 관리의 아들로 건장한 체격과 부티 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어릴 때부터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의상은 재주 또한 뛰어나 딸을 가진 귀족들로부터도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의상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근원과 같은 삶의 화두를 해소하는 철학적 고민에 깊이 빠져 19세에 불가에 귀의했다.의상은 불교의 진리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 처음 원효와 유학의 길에 나섰다가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인돼 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당나라 사신이 귀국할 때 그를 길잡이 삼아 유학의 길에 올랐다.의상의 유학길은 신라의 많은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는 한을 남겼다. 남몰래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는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를 동경했던 여인들은 요즘 아이돌을 바라보는 10대 열혈 팬과 같았다. 그렇지만 의상은 훌훌 털고 당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의상의 유학길에 따라 나선 열혈 팬이 있었다. 대신의 딸 선묘 낭자는 오매불망 사랑하던 의상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남장을 하고, 의상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리 타국에서 공부하게 될 의상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를 따라나선 것이다.의상이 당나라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선묘는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서안에 들어선 날 선묘는 드디어 의상 앞에 나섰다. 아무도 인기척이 없는 시간을 틈타 선묘는 “서라벌에서 따라나선 선묘라 합니다. 서방님께서는 아무런 염려하지 마시고 공부에 전념하십시오. 제가 뒷수발을 들겠습니다”라며 그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의상은 너무나 간절한 선묘의 청과 정성에 차마 떨치지 못하고 반승낙을 하고 말았다. 선묘는 그날부터 인정받은 의상의 그림자가 되어 살뜰히 보살피기 시작했다. 의복은 물론 신발까지 흙 하나 묻어있지 않도록 살폈다. 의상이 공부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그림자처럼 붙어 수발을 드는 바람에 의상조차도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게 공부에 전념하게 됐다.의상은 드디어 당나라 조정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당나라 최고의 승려로 인정받던 지엄의 수제자가 됐다.의상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신라로 귀국했다. 선묘가 의상의 보양을 위해 소림사로 약재를 구하러 간 사이에 신라 조정에서 보낸 배는 의상을 태우고 돛을 올리고 신라로 출항했다.천만리 이국땅에 버려진 선묘는 멀어지는 의상의 배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묘의 정성을 진작 알고 있던 동해용왕은 선묘에게 신비한 힘을 불어넣어 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용왕의 힘을 얻은 선묘는 의상의 수호신이 되어 부석사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 터를 마련하고, 그가 입적할 때까지 돌보는 바위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삼국유사 초기본 복원 목판 이관

군위군이 삼국유사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안동 국학원은 1일 삼국유사테마파크 개장에 맞춰 삼국유사 복원 목판 초기본을 군위군으로 완전 이관했다.34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삼국유사 목판 복원 사업에는 전국 최고의 전문 각자장(각수) 7명이 참여했다. 사업 시작 4개월 만인 2016년 2월 삼국유사 조선 중기본 판각 116개 판을 완공했다.이어 10월에는 조선 초기본 판각 114개 판을 완공함으로써 삼국유사 목판 복원사업을 마무리하게 됐다.판각의 크기는 가로 62㎝, 세로 28.6㎝, 두께 4㎝, 글자 크기는 평균 1.4㎝이다. 판각 한 장당 무게는 2.3㎏이다. 판각 양면에는 84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삼국유사 글자는 총 8만9천200여 자다.복원된 목판은 지금까지 안동 국학원 장판각에 보관하고 있다가 삼국유사테마파크 개장과 동시에 조선 초기본 114개 판 및 판가 3개를 항온·항습 관리시설을 구비한 삼국유사테마파크 가온누리관 수장고로 옮겼다. 앞으로 군위군이 보관·전시한다.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군위 삼국유사 테마파크, 7월1일 개장

국내 최초로 삼국유사(국보 제306호)를 주제로 한 ‘군위 삼국유사 테마파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삼국유사 테마파크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어우러진 놀이 한마당, 교육·문화·관광의 구심점이자 랜드마크가 될 종합테마파크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군위문화관광재단은 다음달 1일 전국 최초이자 국내 유일의 삼국유사를 테마로 한 삼국유사테마파크를 개장한다.의흥면 이지리 일원 72만2천여㎡ 부지에 들어선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문화체육관광부 3대 문화권 사업의 하나로 추진됐다.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다양한 전시 및 조형물로 구현해 놓은 복합 문화콘텐츠 공간이다.특히 우리 민족이 보유하고 있는 역사서의 내용을 현재 시점으로 구현했다는데 남다른 의미가 있다.◆삼국유사 가온누리 조성사업2014년 4월 국토교통부는 낙동권 신발전지역 발전촉진지구로 군위군 가온누리 사업지구를 지정했다. 신발전지역 발전촉진지구란 지정문화자원, 역사자원, 자연자원 등 녹색성장 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한 지역을 말한다.군위군은 관광 트렌드를 감안해 삼국유사 고장 군위의 대표 브랜드로서 관광 진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삼국유사 가온누리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삼국유사 가온누리 조성사업의 결과물이다.가온누리 조성사업은 삼국유사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재조명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삼국유사 관련 자료와 연구를 집대성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추진됐다.이 사업을 통해 탄생한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한국의 신화와 역사를 재발견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대표적 문화 관광지로 자리 매김할 것으로 보인다.삼국유사의 신화, 문학, 설화 등 문화콘텐츠와 놀이, 관광 등 다양한 콘텐츠와 문화산업을 접목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문화관광지의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삼국유사 테마파크, 국민 속으로2010년부터 의흥면 이지리 일원(현 일원테마로 100) 72만2천여㎡ 부지에 사업비 1천200억여 원을 들여 조성한 군위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다음달 1일부터 관람객을 맞이한다.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삼국유사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를 전시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또 설화 속 이야기를 구현한 조형물, 가온누리관(전시관), 이야기학교 및 숲 속 학교(교육·체험공간), 해룡슬라이드(사계절썰매장), 해룡물놀이장, 역사돔 등 다양한 시설로 구성돼 있다.테마파크 내에는 삼국유사 속 다양한 설화를 구현해 놓은 조형물이 곳곳에 위치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삼국유사의 서문과 발문을 조형물로 표현한 가온문(정문)과 누리문(후문), 삼국유사의 모든 신화를 담고 있다는 의미로 연출한 17m 높이의 신화목,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준다는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 등이 있다.또 전망대로 만들어진 신라 지철로왕의 사자상, 탄생설화를 표현한 알게이트를 비롯해 벽화(건국이야기길·영웅탄생길), 잔디광장(한울마당), 미로(혜통미로), 야외공연장(가온광장·누리광장) 등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테마파크 중심에 위치한 가온누리관은 삼국유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 체험공간이다.보각국사 일연대선사관, 삼국유사 속 인물들을 판타지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서클영상관, 삼국의 역사와 문화 등을 전시물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히스토리관, 삼국유사 속 여러 교육적인 이야기들을 체험으로 배울 수 있는 설화문화체험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이야기학교와 숲 속 학교’는 삼국유사와 관련 세미나, 강연, 교육 등을 실시한다. 다양한 연령층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관람객 중심 테마파크야외 놀이시설인 ‘해룡놀이터’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물놀이장과 사계절 이용할 수 있는 해룡슬라이드(사계절 썰매장)를 조성했다. 특히 해룡슬라이드는 긴 코스(175m)와 일반 코스(91m) 등 두 구간 운영으로 관람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이와 함께 용담지, 아침향기원 등 산책코스도 마련했다. 용담지 중심에는 팔각정을 설치, 관람객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했다.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체류형 관광지의 필수 조건인 숙박시설도 20곳 보유하고 있다.영웅탄생을 연상시키는 알 모양의 돔 하우스형 숙박시설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영웅들과 나라 이름을 붙여 이용객들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 32㎡(10평형) 10동과 44㎡(14평형) 10동으로 이루어진 역사돔은 다양한 공간 활용도를 자랑한다.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종합안내소 운영을 통해 관람객 만족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 관람객은 안내소에서 테마파크 관련 다양한 정보를 취득할 수 있다. 단체 관람객은 종합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다.또 각종 분실물, 미아 발생 등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종합안내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테마파크는 의무실과 수유실 운영을 통해 관람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휠체어 및 유모차 대여 서비스도 펼친다. 이 밖에 식사할 수 있는 풍류정, 각종 상점 등도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한편 군위문화관광재단은 삼국유사테마파크 개장 행사를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개장일인 다음달 1일부터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을 테마파크 내 곳곳에서 진행한다.군위문화관광재단은 당초 다음달 1일 내외빈을 초청한 개장 행사, 4∼5일 이틀간 개장 축제를 개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사정을 감안,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를 지양하기로 했다. 생활 속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서다.모든 입장객을 대상으로 발열 검사를 실시하고, 손소독제도 비치하는 등 코로나19 감염 확산 방지에 주력한다.◆군위문화관광재단 김영만 이사장 인터뷰군위문화관광재단 김영만 이사장은 “군위군은 변화하는 관광 트렌드를 감안해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의 대표 브랜드로서 삼국유사 가온누리 조성사업을 실시했다”며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삼국유사 가온누리 조성 사업의 결과물이다”고 설명했다.그는 “삼국유사 테마파크를 통해 한국의 신화와 역사를 재발견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대표적 문화 관광지로 자리 매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특히 삼국유사의 신화, 문학, 설화 등의 문화콘텐츠 및 놀이, 관광 등 다양한 콘텐츠와 문화산업을 접목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문화관광지의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자신했다.또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삼국유사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를 전시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며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콘텐츠 공간으로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했다.김영만 이사장은 “전 국민의 사랑받는 테마파크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 더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며 “코로나19 사태로 지친 국민들이 삼국유사 테마파크에서 힐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많은 이용을 당부했다.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면’으로 명칭 바뀐다

삼국유사의 산실인 군위군 고로면이 내년 1월부터 ‘삼국유사면’으로 명칭이 바뀐다.군위군은 지난 15∼19일 5일간 고로면 명칭을 지역의 고유성과 역사성이 담긴 ‘삼국유사면’으로 변경하기 위한 주민 찬·반 투표에서 이같이 결정됐다고 22일 밝혔다.무기명 투표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주민 의견조사에는 지난달 31일 기준 고로면에 주민등록이 돼 있는 852가구 중 486가구(57%)가 참여했다. 이 중 과반이 훨씬 넘는 83.7%인 407표가 명칭 변경에 찬성했다.군위군은 주민대표단체 사전 설문조사 시 결정된 주민 찬·반 의견조사 효력발생 기준(고로면 전체 가구 수 과반 참여 및 참여자 과반 찬성)에 따라 삼국유사면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군은 주민 의견수렴 결과와 명칭변경 실태조사서를 반영해 관련 조례 개정을 시작으로 행정공부 정비, 각종 시설물 교체 등 행정 절차를 거쳐 내년 1월부터 새로운 명칭을 사용할 계획이다.김영만 군위군수는 “이번 주민 찬·반 의견조사 결과는 과감한 혁신으로 지역 발전을 염원하는 고로면 주민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며 “주민들의 소중한 의견이 모여 결정된 만큼 군위가 명실상부한 삼국유사의 고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행·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8) 백률사

삼국유사 전체 총론적인 성격을 가진 기이편에서 신라의 흥망성쇠를 더듬어 보고, 각론이자 본론이라 설명하는 흥법편에서 불교의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본격적인 불교사를 통해 전해지는 불국토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탑상편을 소개한다.탑상편은 황룡사, 영묘사, 흥륜사, 백률사, 천룡사, 무장사, 민장사, 생의사 등의 유명 사찰과 종, 탑 등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삼국유사 탑상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가섭불연좌석에 이어 황룡사 장육, 황룡사 9층탑, 황룡사종과 분황사종, 흥륜사 금당십성 등의 내용이 나타나지만 기행 순서에 따라 백률사편을 먼저 소개한다.◆삼국유사: 백률사계림의 북쪽 산은 금강령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 대비상이 서 있는데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신령스런 이적이 자못 많았다. 어떤 이는 중국의 뛰어난 기술자가 중생사의 불상을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백률사 앞의 바위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두고 사람들은 “이것은 대성이 일찍이 하늘의 도리천에서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돌 위를 걸어간 발자국이다. 이제까지 문드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례랑을 구출해 돌아올 때 나타난 자취”라고도 말한다.천수 3년은 임진년(692)인데 9월7일에 효소왕이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다. 1천여 명의 무리가 따랐는데 안상과 특히 가까이 지냈다. 천수 4년 계사년 늦봄에 무리를 이끌고 금란에 놀러 가다 북명 경계에 이르렀는데 말갈족에게 잡혀가니 무리가 모두 하릴없이 돌아왔으나 안상만 뒤쫓아갔다. 이때가 3월11일이다.왕이 이를 듣고 놀라 “아버님께서 신령스런 피리를 받아 내게 전해 주셨다.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안 창고에 간직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로 국선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단 말이냐, 이럴 어떻게 할꼬”라고 말했다.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뒤덮었다. 왕이 또 깜짝 놀라 창고 안을 살펴보라 했더니 가야금과 피리 두 보배가 없어졌다. “내 어찌 이다지 챙기지 못하여 국선을 잃더니 또 가야금과 피리를 잃어버렸단 말이냐”며 한탄했다.이에 창고지기 김정고 등 다섯 사람을 가두었다. 4월에 전국적으로 “가야금과 피리를 찾는 자에게 상으로 1년치 세금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다.5월15일, 낭의 두 부모가 백률사의 대비상 앞에 가서 정성들여 여러 날을 기도했다. 그러자 홀연히 상 위에 가야금과 피리가 나타나고, 낭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두 부모가 엎어질 듯이 기뻐하며 오게 된 경로를 물었다.“제가 잡혀가 적국에서 목장 일을 하는데 갑작스레 단정한 스님이 손에 가야금과 피리를 들고 나타나 나를 따라오느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안상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이 피리가 둘로 나눠져 두 사람이 각각 하나씩을 타고, 스님은 가야금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서 돌아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고 했다.이런 경위를 들은 왕은 크게 놀라며 낭을 맞아들이고, 가야금과 피리를 안으로 들였다. 금과 은으로 만든 각각 무게가 50냥 되는 다섯 가지 그릇 두 벌, 마납가사 다섯 벌, 굵은 명주 3천 필과 밭 1만 경을 절에 바쳐 부처님 은혜에 보답했다.나라 안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관련된 사람에게 직위를 3급씩 높여주고, 백성들에게 세금 1년치를 면제해 주었다. 절의 주지승은 봉성사로 옮기고, 낭은 대각간에 임명했다. 아버지 대현 아찬은 태대각간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았다. 안상 스님은 대통으로 삼고, 창고지기 다섯 사람은 풀어주면서 각각 5급의 벼슬을 내려주었다.6월12일 혜성이 나타나 동쪽 방면이 어두워지고, 17일에는 또 서쪽 방면이 어두워졌다. 일관이 “가야금과 피리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그러자 혜성이 사라졌다. 그 뒤에 영험스런 이적이 많으나 글이 길어져 싣지 않는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과 고구려 출신 장군의 충돌효소왕 때 화랑의 국선이 되었던 부례랑은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부례랑은 국선이 된 이후 1천여 명의 낭도들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며 낭도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한편 전술훈련 등으로 호연지기를 키웠다.부례랑 일행은 강원도 강릉을 지나 설악산에 이르러 산수를 즐기며 전술훈련을 하기로 했다. 설악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계곡이 깊어 전쟁에 대한 훈련을 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그러나 당시 설악산 일대에는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가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며 1만여 명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설악산 일원에서는 신라의 조정보다 대막호리의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치고 있었다.대막호리는 장군의 후손답게 덩치가 우람하면서 무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덕이 있어 주민들이 모두 잘 따랐다. 그는 일대 목장과 농업, 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자신의 휘하에 두고, 2천여 명의 청년을 군사훈련 시키며 사병으로 키워 외부침입에 대한 방어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 부례랑 일당이 전술훈련을 하면서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대막호리 영역의 가축들을 놀라게 하는 한편 일부에서 농작물을 훼손하기도 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대막호리는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에 크게 분노해 국선 부례랑과 안산 등의 우두머리 20여 명을 체포해 가두어버렸다.당황한 부례랑이 “우리는 신라의 화랑도들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지역을 익히고 전술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으나 대막호리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풀어주지 않았다.대막호리는 “너희들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준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말을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해 세금을 바친 것으로 배부르게 먹고살면서 고마움은 모르고 오히려 핍박하다니 가당찮다”고 꾸짖으며 화를 냈다.부례랑은 대막호리의 단호함에 전령을 불러 궁중으로 급파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를 설득할 수 있는 군사나 강력한 힘을 가진 장수가 필요하다”고 짧게 사연을 적었다.효소왕은 국선 부례랑이 국내에서 볼모로 잡혔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통일 이후 신라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군사가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신문왕에 이어 효소왕 대까지는 당나라와도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교류하며 감히 신라를 넘보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국선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그때 백률사의 주지 스님은 고구려 출신 혜통 국사의 배움을 이어받은 정혜스님이었다. 정혜스님은 국내는 물론 국제 정세에 밝을 뿐 아니라 특히 고구려 신민들의 세계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백률사는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에 이은 국가적인 사찰로 왕실에서도 잦은 법회를 주관하는 신라의 주요사찰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효소왕 또한 백률사 주지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부례랑의 소식을 접하고 바로 정혜스님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왕의 밀지를 받아든 정혜스님은 무승 셋을 대동해 빠르게 설악산으로 이동했다. 화랑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자칫 갈등관계가 깊어질 뻔했던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정혜스님의 주선으로 깨끗하게 오해를 풀고 친하게 되었다.“신라에는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이고, 튼튼하고 건강한 나라를 위한 훈련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는 서로가 이해해야 합니다”는 스님의 말에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경계를 풀고 호탕한 건배를 나누며 뜨거운 관계로 발전해 나라를 위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기로 다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7)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29대 법왕은 28대 혜왕과 같이 즉위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아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당시 삼국시대는 각국이 상대국가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많이 활용했다. 잘못된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방면으로 여러 첩자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강한 나라로 자리를 굳혀가자 고구려와 백제는 앞다투어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백제 법왕은 신라가 황룡사, 분황사, 흥륜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통한 불교를 장려하고, 화랑제도를 통한 교육을 강화해 국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분석해 불교 장려정책을 쓰기로 했다.그러나 법왕의 노력은 짧은 재위기간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30대 무왕이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강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무왕은 법왕의 불교장려 정책에 따라 왕흥사를 대대적인 국찰로 완공했다. 이어 불법을 장려해 나라의 힘을 키워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다.◆삼국유사: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백제 제29대 법왕은 이름이 선이고,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황 10년 기미년(599)에 왕위에 올랐다. 이해 겨울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주며 천렵질 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 했다.다음해 경신년에는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내리고, 그때 도읍지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지으려다 기초만 닦고 돌아가셨다.무왕이 이어 아버지가 기초를 놓은 곳에 기둥을 올려 여러 해 지나 완성을 보았다. 그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며 꽃나무가 빼어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왕은 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짐승들에게도 베푼 너그러움은 온 산에 도탑고/ 돼지며 물고기도 흡족한 혜택에 사해가 인자롭다/ 갑작스레 별세했다 섭섭히 말하지 말라/ 상계 도솔천은 바야흐로 꽃다운 봄이리니.◆백제 법왕과 무왕-법왕은 백제 제29대 왕으로 신라 진평왕 시대인 599년부터 600년까지 1년 남짓 왕위에 있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여선(餘宣) 등으로 전한다. 제28대 혜왕의 맏아들, 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다.법왕은 혜왕과 같이 재위 기간이 짧아 전해지는 기록은 많지 않다. 시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불교를 숭상해 왕위에 오른 599년 12월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모두 놓아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그리고 이듬해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600년에 창건하기 시작해 무왕 때인 634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 때에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흙으로 덮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7년 충남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는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왕흥사가 법왕 이전인 위덕왕 때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법왕에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라 641년까지 집권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장(璋)으로 수나라 기록에는 여장(餘璋)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사서에는 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으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래서 신라와는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무왕은 특히 623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627년에는 무왕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에 머무르며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대규모 정벌은 실현되지 못했다.무왕은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다.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다. 611년에는 수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침공에 대해 의논했다.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관륵을 보내 천문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는데 630년에 사비의 궁궐을 중수했다.또 무왕은 삼국유사에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용의 아들로 탄생해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무왕은 재위 42년째인 641년 3월에 죽고,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이 왕위를 계승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왕과 무왕의 신라 베끼기백제 법왕은 급성장한 신라의 국력에 당황하면서도 황당해하는 한편 그 힘의 바탕에 의문을 가졌다. 백제는 다소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고 자부하던 입장에서 공격을 받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은 이후 반성의 시간을 가진데 이어 만회의 기회를 노렸다.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신라의 성장배경과 힘의 원동력, 허점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첩자를 심어 정보를 수집했다. 결국 신라가 성장한 배경에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탄탄한 정신적 결집을 찾아냈다. 또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의 교육철학이 끊임없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잡기에 나섰다.법왕은 먼저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가는 길을 불교적 심리전파라고 결론짓고, 불교중흥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법왕은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절을 짓기로 하고, 나라의 중심에 거대한 사찰 왕흥사 건설에 나섰다. 왕은 곧 나라이다는 생각에 절을 왕궁처럼 거대하게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하면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또 전국에 불교적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가장 먼저 사냥을 금지하며 살생을 못하게 했다. 백성들이 마음속에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상징적으로 엄격하게 불교적 이념을 전파했다. 지명법사와 같은 유명 고승을 초빙하고, 승려들의 공부를 지원했다.법왕의 이러한 판단은 신라가 흥륜사 건축에 이어 왕궁에 버금가는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영흥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나라의 중심부에 줄줄이 세워 운영하는데 영향을 받았다.법왕의 불교 진흥정책은 다음 무왕에 그대로 전해졌다. 무왕은 신라의 중심부까지 숨어들어 정책은 물론 지리적인 특성까지 속속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파악하고 있었다.무왕은 결국 왕흥사를 완공하고, 온 국민이 하나로 기원하며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동서 쌍탑을 건립했다. 왕흥사는 국민적 염원을 들어주는 미륵불을 안치하면서 미륵사로 이름을 바꾸어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군위도서관, 미래교육 학부모 아카데미 운영  

삼국유사군위도서관이 오는 8월5일까지 학부모 역량 강화를 위해 ‘미래교육 학부모 아카데미’를 운영한다.이 프로그램은 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 패러다임 이해와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학부모의 교육 역량 강화를 위해 마련됐다.교육 철학, 미래 교육, 자녀이해 교육, 진로진학지도 등 4개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수업을 진행한다.강연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열린다.자세한 일정은 삼국유사군위도서관 홈페이지(http://www.gbelib.kr/gw)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문의: 054-382-0524.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6) 법흥왕의 불교

법흥왕은 안정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율령을 제정, 공포하는 등의 다양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불교를 공인해 나라의 국정이념으로 삼고 흥륜사를 건설하면서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법흥왕은 키가 7자나 되는 거인으로 마음도 후덕해 금관가야를 합병하고도 왕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융화정책을 펼쳤다.그러나 기존 귀족들을 중심으로 두텁게 깔렸던 민간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는 왕실 중심으로 진행하는 불교정책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법흥왕은 왕위를 물려주면서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주지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공덕을 쌓는 법회를 주관하다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도 왕권의 강화를 위해 황룡사를 지어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정복군주로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진흥왕도 말년에는 거칠부 등 귀족들의 힘에 밀려 전대 법흥왕의 뒤를 이어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삼국유사: 탑탑안항 사사성장진흥대왕이 즉위한 지 5년인 갑자년(544)에 대흥륜사를 지었다. 547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지고 왔으며, 565년에 진나라 사신 유사가 승 명관과 함께 내경을 받들고 왔다. 이제는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서 있었다. 절의 깃발을 세우고 범봉을 걸며, 불상과 승려들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밭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문이 나라 안에 자애로운 구름으로 덮였다.불국토로부터 보살이 세상에 나오고,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내려오니, 이런 까닭에 세 민족을 통일해 나라를 만들고 사해를 껴안아 한 집을 이루었다. 그래서 덕 있는 이름은 천구의 나무에 쓰고, 신령스런 자취는 은하수에 비추었으니, 어찌 세 분 성인(아도, 법흥왕, 이차돈)의 위엄으로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그 뒤에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억 등이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때는 원화 12년 정유년(817) 8월5일이다. 이때는 제41대 헌덕대왕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그 무덤에 예불하는 신도들을 모아 결사를 만들고, 매달 5일마다 그 영혼의 아름다운 소원을 위해 단을 마련하고 법회를 베풀었다.또 향전에서는 시골 노인들이 그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했는데 5일이 바로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을 따르던 날이다.아, 이런 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신하도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다면 이런 공덕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서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법흥왕은 이미 없어졌던 터에 절을 세웠으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방포를 입었다. 궁중의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대중을 널리 교화시키는 일을 맡았다.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이어받은 성인으로 왕위를 계승해 위엄으로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자 모두 순종하며 잘 따랐다. 이어 법흥왕이 머물렀던 흥륜사에 대왕흥륜사라는 편액을 내렸다.법흥왕의 성은 김씨이고,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책부원구에서는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고 했다.왕이 처음 큰 공사를 시작하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영흥사를 창건하면서, 첫 비구니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을 묘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부서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진흥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고 하였다.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역사서가 적지 않은 것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임금의 교훈이 아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또 대통 원년은 정미년(527)인데 법흥왕은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응천주에 절을 짓고 대통사라 이름하였다. 성스런 지혜는 만세의 큰일을 꾀하게 마련이나/ 구구한 입방아는 추호 같은 뜻을 기만할 뿐이다/ 법륜이 풀려 나와 금륜을 굴러가니/ 순임금 같은 시절 바야흐로 부처님의 시대로 높아지네// -원종 법흥왕에 대한 글이다.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 흰 젖 더욱 깊이 느껴지네/ 어느덧 한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 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염촉 이차돈에 대한 글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흥왕의 뜻을 이은 진흥왕법흥왕은 왕비를 여럿 두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로 시샘한 왕비들의 투기로 아들이 태어날 기미만 보이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렸다.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왕실에서부터 서서히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해 국가이념으로 삼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경영하고 싶었다. 특히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으로부터도 독립한 당당한 나라로 서고자 했다.이를 위해 왕위를 물려받을 적자는 성골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왕족끼리 결혼을 추진했다. 왕은 자신의 딸을 동생과 결혼시켜 왕족, 성골의 신분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다.아들이 없었던 법흥왕은 동생의 아들이자 딸의 아들인 삼맥종을 지극히 사랑해 아들처럼 곁에 두었다. 결국 조카 삼맥종을 태자로 삼았다. 왕의 뜻에 따라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펼 수 있는 어린 삼맥종을 진흥왕으로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법흥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자신이 세운 흥륜사에서 승복을 입고 주지가 되어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홍복을 빌다 입적했다.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10여 년을 보내며 나름대로 국정 운영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진흥왕은 18세가 되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강한 나라를 주장하며 연호를 개국이라 바꾸고 정복군주로 나섰다.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황초령, 마운령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특히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궁궐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후궁 미실의 반대로 황룡사로 바꾸어 건설하고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팔관회를 여는 등으로 불교 진흥정책에 힘을 썼다.진흥왕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제한했던 일반백성들도 공부하고 승려가 될 수 있게 했다. 원광법사 등의 이름 높은 승려가 배출되는 기반을 조성했다.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에서 훗날 사람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미륵불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 지배하는 전륜성왕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의 이름도 동륜과 사륜으로 짓고 스스로 불교를 깊이 믿었다.아울러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를 크게 활성화 시켰다. 화랑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동량으로 키우는 데 성공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그러나 진흥왕은 후궁 미실의 사심이 가득한 전략에 밀려나는 운명을 맞았다. 미실이 진흥왕의 아들 태자 동륜과 정을 나누다 동륜이 다른 후궁에 눈을 돌리자 거칠부와 손을 잡고 제거했다. 이어 진지왕과 관계를 맺으며 왕비로 간택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진지왕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그마저 제거하고, 다시 진흥왕의 손자였던 진평왕을 옹립했다.진흥왕은 죽은 태자 동륜을 위한 추도식을 전대 법흥왕이 입적했던 흥륜사에서 올리다가 미실과 거칠부의 계략에 의해 연금되어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고,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와 삼국유사

배철한제2사회부‘삼국유사’는 군위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군위와 관련된 시설물이나 행사는 물론 농산물 고유브랜드로도 삼국유사가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때 보각국사 일연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의 유사를 모아 지은 역사서다. 삼국사기는 여러 사관이 쓴 정사인데 비해 삼국유사는 일연이 혼자 쓴 이른바 야사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비해 많은 고대 사료를 수록하고 있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 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했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해 줬다.군위군은 삼국유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1천200억 원을 투입해 의흥면 이지리 산 107번지 일원, 22만여 평에 초대형 문화관광단지인 ‘삼국유사테마파크’를 조성해 오는 7월 정식 개장한다.삼국유사테마파크는 초대형 테마파크로 조성되며 삼국유사가온누리 사업이다.명칭에서 알 수 있듯 ‘가온’은 중심을 뜻하고 ‘누리’는 세상을 지칭한다. 군위군은 이를 알리기 위해 초대형 테마파크를 조성에 나섰다. 또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입적한 고로면 인각사가 소재한 지역을 중심으로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지역브랜드로 설정하고 삼국유사와 관련한 콘텐츠 개발에 노력해 왔다.삼국유사테마파크는 총 3지구로 나뉘어 삼국유사 속 콘텐츠를 시각화한 다양한 조형물과 전시, 교육,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면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동시에 제공해 주는 전통문화와 관광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돼 벌써부터 입소문이 퍼지면서 개장과 관련한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삼국유사테마파크는 우리 나라 반 만년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고 역사속 콘텐츠를 개발해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 장터로 찾는 이들의 잔잔한 감동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삼국유사테마파크가 군위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잡길 기원해 본다.

삼국유사 기행 (65) 신라 불교의 공인

새로운 문화나 문물을 수용할 때는 어떠한 계기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의 큰 발전을 가져온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그러한 절차가 있었다. 이차돈이 목숨을 바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면서 널리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열었다.삼국유사는 법흥왕을 원종, 이차돈을 염촉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흥왕이 불법(佛法)의 참됨을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했지만 토착신앙에 뿌리가 깊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왕의 마음을 헤아린 하급관리 이차돈이 불법의 전파를 위한 길을 제시했다. 목숨을 바친 이적으로 귀족들도 감복해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법흥왕의 불교 공인에 이어 신라에는 빠르게 불법이 확산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받아들였지만 국가적인 경영이념으로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뜨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루는 상당한 힘이 됐다.이차돈의 희생은 나라를 크게 일으키고,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큰 사랑의 불씨가 되었다.◆삼국유사: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승려 일념이 편찬한 ‘촉향분예불결사문’에 신라 불교 공인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신라 법흥대왕 때이다. 궁궐 안을 잘 다스리며 해 뜨는 나라의 곳곳을 굽어 살피다가 옛날 한나라의 명제가 꿈을 꾸고 불교가 동쪽을 흘러들어온 일을 생각하고 “과인이 왕위에 오른 다음 백성들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고자 하였노라”고 말했다.그러나 신하들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큰 뜻만을 지키고자 하고, 절을 짓겠다는 신령스런 대책에는 따르지 않았다.대왕이 탄식하며 “과인이 부덕하여 대업을 받들지 못하는구나. 위로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 뭇 백성들의 기쁨을 주지 못하네, 나라를 다스리는 바쁜 중에도 마음을 불교에 두었더니 누가 이 일을 도와주리오”라며 개탄했다.그때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이며 이름을 염촉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 종은 곧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대나무나 잣나무처럼 빼어난 바탕에다 맑은 거울 같은 뜻을 품었다.22세의 염촉이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신이 듣기로는 옛 사람들은 나무꾼에게도 대책을 물었다 합니다. 외람되지만 죄를 무릅쓰고라도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며 뜻을 아뢰었다.“사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고 왕이 말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데 있는 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다”고 듣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다”라 칭찬하며 감복했다.이에 왕은 짐짓 위의를 갖추고 동서로는 풍도를, 남북으로는 상장을 벌려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들여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늦추려 하는가”라며 물었다.이에 여러 신하는 전전긍긍하며 수선스레 맹서하고 여기저기 손가락질만 하는 것이었다. 왕은 사인을 불러 나무랐다. 사인은 얼굴빛을 잃고 어떤 말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왕이 크게 화를 내며 목을 베라 명령을 하니, 형리가 묶어 관아 밖으로 나갔다. 사인이 맹서를 바치자 옥리가 목을 베는데,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하늘은 사방이 캄캄하게 빛을 잃어 어둡고 땅은 육방이 진동하며, 비처럼 내리는 꽃이 표표히 떨어졌다.왕은 슬픔에 겨워 비통한 눈물을 옷에 적시고, 대신들은 근심스러워 식은땀을 관복에 흘렸다. 달디 단 샘물이 홀연히 솟아나고, 물고기와 자라는 다투어 튀어 오르며, 곧은 나무는 먼저 꺾이고, 원숭이는 떼 지어 울었다.춘궁에서 일하던 동료는 피눈물을 흘리며 쳐다보기만 하고, 월정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애끓듯 서러운 이별을 했다.관을 쳐다보며 우는소리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듯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었다 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 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라고 했다.이어 북산의 서쪽 마루에 장사지냈다. 나인이 슬퍼하며 좋은 땅을 골라 절을 짓고 자추사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예를 갖추어 대대로 영화를 지키고, 사람마다 도를 행해 불법의 이로움을 깨달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이차돈의 결심이차돈은 원래 진골 출신의 왕족이다. 아버지가 궁궐에 일하였으나 청렴해 살림살이는 풍족하지 않았다. 차돈은 어려서부터 어질고 착해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글 읽기를 좋아해 일찍이 관복을 입었다.차돈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꿈에 하얀 백조가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을 쪽을 향해 크게 날갯짓을 하는 태몽을 꾸었다. 그래서 큰 사람이 될 것으로 믿고 아무에게도 태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한번은 이차돈이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 온 몸이 멍들고, 옷은 먼지를 덮어써 거지꼴이었다. 못된 왈패들이 서당의 친구를 괴롭히는 현장을 보고, 책을 던져놓고 친구를 끌어안고 뭇매를 맞았다.이렇듯 차돈은 심성이 착하고 의리가 좋아 친구들이 늘 옆에 붙어다녔다. 그러나 차돈은 공부하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차돈은 글 읽기는 물론 무술 수업에도 착실하고 지혜로웠으며, 체격이 관운장을 닮은 장군 틀이었다.이차돈이 차분하게 글 읽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불법의 영향이 크다. 인도에서 당나라와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 유학승과의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사상적으로 불교에 깊게 몰두했다.차돈이 벼슬에 나아가 공무를 보면서도 불교 서적을 읽는데 열중해 그는 이미 신라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그가 스무 살 생일을 맞는 날 저녁, 집에서 성인식을 겸해 관부로 나아간 일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무르익어갈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도인이 찾아왔다. 저녁상을 받은 도인이 차돈에게 부처가 그려진 비단 폭과 경전을 전해주며 불법에 대한 공부에 전념할 것을 주문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그날부터 차돈은 부처님이 그려진 비단을 사당에 걸어두고 매일 경전을 읽으며 불도를 닦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면서 차돈은 부처님이 나타나 빙그레 웃으며 손짓하며 부르는 꿈을 여러 차례 꾸었다.왕이 불교를 널리 알리고 싶어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이 희생할 터이니 여러 신하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를 보이라고 수차례 설득했다. 차돈의 확고한 신념에 법흥왕도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라 여기고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아끼는 신하 차돈의 목을 베자 우유 같은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진동하며 향기나는 꽃 비가 내렸다. 만 백성이 어버이가 돌아가신 듯 슬퍼하며, 한편으로 기뻐하며 찬양하고 불법을 믿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4) 칠처가람 (5·끝) 영묘사

신라는 전불시대에 이미 일곱 곳에 절이 있었다. 불국토로 발전할 인연이 있는 땅이었던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을 설명하는 칠처가람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칠처가람은 황룡사, 분황사와 같이 지금도 크게 울림을 주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사천왕사는 천왕사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 등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국립사찰로 이름이 전해져 유명하다.반면 영흥사와 담암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담암사는 오릉의 남쪽이라는 기록과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영흥사는 절터조차 분명하지 않다.◆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 중 하나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 중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다.현재 흥륜사가 있는 곳이다. 이 절터에서 금당터를 비롯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있었던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출토되면서 지금의 흥륜사가 있는 곳이 영묘사 터로 밝혀졌다.영묘사의 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영묘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개구리가 3, 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의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들었음을 알아채고 병사를 보내 소탕했다는 기록이 있다.영묘사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풍요라는 향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이것이 일할 때 일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작업능률을 올리는 노동요의 시초였다고 한다.경덕왕 23년 764년에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을 개금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세조 6년 1460년에 봉덕사의 신종을 이 절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영묘사는 조선 초기까지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담암사담암사는 담엄사(曇嚴寺)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전불 칠처가람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청전(壻請田)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진다. 절은 신문왕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청전은 사위를 맞아들인 밭이라는 뜻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 오릉 남쪽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고려 중기까지 7대 사찰의 하나로 중시되어 오다가 차차 퇴락해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담엄사지에는 삼층석탑 1기와 당간지주,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담엄사지 중앙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절터는 거의 파괴되고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당간지주와 초석 등의 남은 석재들은 박혁거세의 제전인 숭덕전을 건립하면서 홍살문과 기초 석 등으로 사용했다. 파손된 탑의 팔부신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당간지주 1기는 오릉 내부의 숲에 방치되어 있다.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농경지와 오릉 주차장 부지로 변했으나 신라시대 육부촌 시절에는 이곳에 알영양산촌이 있었다고 전한다.◆영흥사영흥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경주시 황남동에 있었던 절이라 전한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다.기록으로는 세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사학자들은 지금의 서천변 야구장 일대를 영흥사지로 본다.신라 법흥왕 22년 535년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영흥사를 창건했다. 2년 뒤 법흥왕이 왕위를 물리고 출가하자 파도부인도 법명을 묘법이라 하고 이 절에 출가해 머물렀다.진흥왕 33년 572년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부인도 법명을 묘주라 하고는 역시 영흥사에 출가했다.신문왕 4년 684년에 이 절을 관리하는 성전을 설치했다. 경덕왕 18년 759년에 감영흥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지귀의 사랑진평왕 말기에 서라벌 장터에 노리개를 팔아 노모를 봉양하는 훤칠하게 잘 생긴 청년이 살았다.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집과 일터를 오가며 땅만 살피는 사람이라 하여 지귀라는 별명이 붙었다.봄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오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는데 지귀의 점포에 곱게 단장한 아가씨 둘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봄처녀들은 솜사탕을 손에 들고 제비처럼 조잘되며 지귀 점포의 노리개를 요리조리 살폈다.지귀는 손님들의 시중을 곧잘 들며 비위를 잘 맞춰 웬만한 손님은 모두 뭐라도 하나쯤 사들고 가도록 하는 장사의 신이다. 그런 지귀의 상술은 장터에 이미 쫙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로 그의 입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손님이 들면 손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날씨 타령, 허접한 이웃 부부의 싸움 이야기라도 늘어놓는다. 손님이 없을 때는 노래로 흥을 돋우며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기도 한다.그런데 봄비 내리는 그날 운명처럼 찾아온 두 여인의 모습에 지귀는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말 한마디 못하고 아가씨들이 노리개를 들고 재잘대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가격을 묻는 손님의 말도 듣지 못했다.“이거 얼마예요” 방울 노리개와 토끼모양 머리핀을 하나씩 들고 지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쫑알거리는 두 아가씨의 추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귀가 더듬더듬 횡설수설했다.묘령의 두 여인은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의 삶 속으로 여행을 즐기는 진평왕의 공주 선덕과 시녀 만주였다. 지귀의 모습에 재미를 느낀 시녀 만주가 넌지시 장난을 걸었다. “우리 아씨 예쁘지요”라며 눈을 찡긋하자 홍당무가 된 지귀가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노리개를 포장하는 손을 심하게 떨었다.지귀는 선덕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도 설쳤다. 이튿날부터 장터에 나온 지귀는 혹여 그 처녀들이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느라 말을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선덕과 만주는 지귀의 노리개를 사가는 단골이 되었다. 지귀는 어느새 마음속 깊이 선덕을 앉히고 매번 그가 만든 노리개를 선물로 준비해 건네곤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지귀는 그만의 체취가 묻어나는 독특한 인형들을 만들었다. 지귀가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인형들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살아있는 것 같아 선덕도 매우 좋아했다.선덕이 자신이 만든 인형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지귀는 행복에 겨워 밤을 낮 삼아 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진평왕의 죽음으로 맏딸이었던 선덕여왕은 왕위를 이어받아 장례와 국정을 살피는 바쁜 일정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갈 수가 없었다.선덕여왕이 즉위 1년을 맞아 진평왕릉으로 인사차 하는 나들이 행렬을 바라보다 지귀는 까무러치게 놀라버렸다. 자신이 밤낮으로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여인이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 만주도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여왕의 곁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선덕여왕은 즉위 3주년을 맞아 영묘사로 제를 올리러 가면서 만주를 통해 지귀에게 아버지를 닮은 실물크기의 인형을 주문했다. 그 이후 지귀가 깎은 나무인형들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채 영묘사 법당에 하나씩 쌓여갔다. 마침내 지귀는 법당을 가득 채운 인형을 끌어안고 행복한 꿈을 꾸다 심화가 일으킨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에서 삼국유사 기행 신라 불교 공인 과정 둘러봐

삼국유사기행단이 경주지역에서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답사하며 문화콘텐츠 발굴 작업을 이어가는 2020년 첫 번째 기행을 가졌다.삼국유사기행단 40여 명은 지난 23일 황룡사 역사관에서 출발해 흥륜사, 흥륜사지 경주공고, 영흥사지, 신라불교를 공인한 법흥왕릉, 이차돈의 목이 떨어졌다는 금강산 백률사 등을 답사했다.문화해설을 맡은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흥륜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이자 법흥왕이 최초 국립사찰로 지은 절”이라며 “불교공인과 율령공포 등의 많은 업적을 기록하고 말년에 흥륜사에서 승려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다.또 “법흥왕은 불교를 국가경영 철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아끼는 신하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 불교를 공인했다”며 “세상의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면서 법흥왕의 과감한 결단을 칭송했다.이어 “신라의 칠처가람으로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담암사, 영흥사, 사천왕사 등의 대규모 절이 있었다”면서 “신라는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불교가 융성하게 될 인연이 이어지고 있던 땅”이라고 설명했다.삼국유사 기행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는 3~5명씩 소규모로 답사여행을 이어오다 이날 처음으로 40명을 선착순 신청을 받아 진행했다. 기행단 운영은 대구일보와 이노버즈 주관으로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진행하는 사업이다.다음달 삼국유사 기행은 흥륜사의 금당십성, 가섭불연좌석, 황룡사 장륙,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약사불 등에 대한 답사를 이어갈 계획이다.김구석 소장은 “삼국유사 이야기는 황당한 신화, 전설처럼 엮어진 내용도 많이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역사의 단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기행이 2년째 접어들어 신라의 흥망성쇠에 이어 불교의 전래 흥법편, 탑과 불상에 대한 이야기의 탑상편으로 이어지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며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3) 칠처가람 (4) 사천왕사

경주 사천왕사는 낭산자락 선덕여왕릉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호국불교의 의미를 가장 크게 충족시키는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설명된다.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대책을 주문했다. 명랑은 절을 지어 대응하려 했지만 시간이 급박하자 풀과 비단으로 절을 짓고, 12명의 유가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바다에 풍랑을 일으켜 적군을 수장시켰다.사천왕사는 나라를 지킨 호국사찰로 이름을 내걸었고 양지, 월명 등의 유명스님들이 거쳐 간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사찰의 터에는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 당간지주, 두 기의 귀부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목탑의 기단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녹유신장상이 발굴 100년 만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전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양지 스님의 조각솜씨로 전해지는 녹유신장상은 북쪽의 다문천왕상이 없이 3기의 천왕을 면마다 6기씩 잇따라 배치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문무왕의 삼국통일, 호국의지와 맞물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전해지는 사천왕사는 여전히 칠처가람의 하나로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호국사찰 사천왕사신라 호국사찰 사천왕사는 경주시 낭산자락에 문무왕 19년 679년에 창건되었다.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일으켜 674년 신라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낭산 꼭대기 선덕여왕릉과 남쪽 신문왕릉 사이에 위치해 금당과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당간지주, 귀부 2기 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사적 제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신라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해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 밀당을 펼치고 있을 무렵 674년 2월. 당나라에 인질로 있던 김인문으로부터 의상대사를 통해 신라조정에 급보가 날아들었다.백제와 고구려 자리에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해 야욕을 꿈꾸던 당나라가 그들의 도호부와 도독부를 공격한다는 빌미를 꼬투리 삼아 50만 대군을 앞세워 신라를 치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대책을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군의 침략이 빠르게 진행되자 절을 지을 시간이 없었다. 이에 명랑은 풀과 비단으로 오방신상을 만들고, 12명의 유가명승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으로 전해지는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문두루비법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당나라 군사들이 신라의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 풍랑이 크게 일어나 그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당의 고종은 다음해에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명랑대사가 또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신라 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바다에서 몽땅 수장시켜 버렸다.문두루비법을 시전한 단석이 고려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절은 금당 앞에 1기의 탑을 세우는 일탑일가람제로 운영되었다. 사천왕사는 신라 최초의 쌍탑가람으로 발전하는 형식을 보인다.사천왕사에는 명랑과 양지, 경덕왕 당시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멈추었다고 전해지는 월명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덕장 법민과 문두루비법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신라를 가장 신라답게 만든 왕으로 손꼽힌다.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이다. 법민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덕망과 지혜를 갖춘 장군으로 키워졌다. 아버지는 무열왕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이다.법민은 아버지의 의도적인 교육법으로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으로부터 무예수업을 전수받았다. 외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어머니와 박사들에게서 경전공부, 김유신으로부터는 무예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 김춘추의 영리함과 장군으로의 기질을 이어받은 법민은 덕을 갖춘 장수로 자랐다.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백제와의 전쟁터를 누비면서 법민은 논밭에 널브러진 백성들의 시신을 보면서 속으로 다짐을 했다. ‘나는 기필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하겠다.’문무왕은 그러한 다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면서 전쟁터에서는 악착같이 군사들이 적게 다치면서 이기는 전략을 구사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무술을 연마할 때는 가르치는 김유신이 오히려 만류할 정도로 지독하게 매달렸다. “훈련할 때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전쟁터에서 아군의 피 한 말은 될 것입니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실전보다 더 맹렬하게 훈련했다.전쟁터에서 법민은 김유신 뒤에서 그를 보좌하는 한편 그의 전술과 전략을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김유신의 도법과 창술 등의 무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 김유신의 무예를 고스란히 전수받은 법민의 무예 실력도 나중에는 김유신에 버금갈 만큼 뛰어나 적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법민은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었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킨 데 이어 고구려 멸망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백제를 정벌하면서 입은 상처로 아버지 김춘추 무열왕이 661년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문무왕으로 즉위한 법민은 전장에 나가면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갑옷 속에 상복을 입고 투구 안에 두건 쓰는 것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문무왕이었기 때문이다.문무왕은 이기는 전쟁의 비법은 첫 번째가 적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적의 정보를 먼저 분석하는 철칙을 지켰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신라의 충실한 인재들을 알게 모르게 대거 파견해 그들로부터 정보를 입수, 분석했다.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고구려를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문무왕의 전략적 승리다. 적군 깊숙이 심어둔 첩자들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이간질하고, 전력을 약화시켜 결정적인 시기에 총공을 통해 승기를 잡았다.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물리친 문무왕은 당나라의 흑심을 알아채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짜 노골적으로 자극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문무왕은 당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 인문의 안부를 놓치지 않고 물으면서 당나라의 내정에 대한 정보를 얻어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의상대사를 비롯한 자질이 뛰어난 승려와 신하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당나라로 보내 정보를 깨알같이 챙겼다.문무왕은 당나라의 고종과 후궁에서 황비로 등극한 측천무후의 조정에 대한 장악력과 영향력까지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 군사를 빌려 삼국통일의 염원을 이룩했다. 다시 그들을 축출해 독립적인 국가로 우뚝 서는 기틀을 완벽하게 마련했다.문무왕은 측천무후의 측량하기 어려운 심기와 그의 변화무쌍한 성격이 가져오는 신라에 대한 공격성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측천무후의 심기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김인문을 비롯한 당의 조정 깊숙이 첩자를 심어두었다.문무왕의 세심한 전략 덕분에 당나라 군사의 대규모 이동을 파악하고, 빠르게 대응해 그들이 신라 땅을 밟기 전에 모두 수장시켜 난을 피했다. 2년 연속으로 바다를 통해 쳐들어오는 당군을 완벽하게 물리쳤다. 잇따른 해전에서의 패배는 당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게 했다.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문무왕은 절대적 무공을 익힌 비밀결사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평화를 위해 문무왕의 숨은 비책은 대를 이어 왕실에 숨은 전략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남산연구소 삼국유사 찾아가는 길 가이드북 펴내

경주남산연구소가 경주 남산의 삼국유사 유적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을 제작, 배부한다.경주남산연구소는 삼국유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산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현장을 편리하게 답사할 수 있도록 가이드북 ‘경주남산 삼국유사 찾아가는 길’을 제작했다.이 가이드북은 나정과 창림사지, 오릉, 월정교, 인용사지, 도당산, 천관사지, 남산신성, 서출지, 헌강왕릉, 포석정, 삼화령 등 20여 곳을 소개한다. 27쪽 분량이다.경주 남산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신라의 탄생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역사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이 가이드북은 경주 남산을 등반하는 입구 안내소에 비치하고 남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한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남산은 불교유적의 보고이자 신라인들의 영산이며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며 “선조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라 소개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