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행복나눔 가을 무료 콘서트 보러오세요

김광석 행복나눔이 주관하고 김광석 스토리하우스가 주최하는 ‘2019 김광석 행복나눔 가을 무료 콘서트’가 오는 9일 오후 3~7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콘서트홀과 김광석 소극장에서 열린다. 콘서트는 1·2부로 진행된다. 1부 행복콘서트는 오후 3~5시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 콘서트홀에서, 2부 나눔콘서트는 오후 6~7시 김광석 소극장(떼아르뜨 분도)에서 진행된다. 탤런트 김동석의 사회로 진행되는 1부에는 뮤지컬 배우 노현희, 팝페라 가수 젬마 김현주와 최의성, 아이돌 5인조 혼성 그룹 디아이피엠엑스(DIP mx), 신세대 퓨전국악그룹 우리가, 아코디언 연주가 김준영이 무대에 오른다. 2부는 가수 박두한의 단독 무대로, 김광석의 히트곡들로 꾸며질 예정이다.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금오산 마애여래입상…하늘로 뻗은 험지 가까스로 오르니 고난 다 이겼다 내미는 자비로운 손

정상에 이르는 길은 된비알의 연속이다. 몹시 험한 비탈길이라는 의미의 된비알 곳곳에는 거대한 암석이 솟아 있다. 금오산 기암괴석 곳곳에도 단풍이 물들었다.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이 아니라 원래의 자연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문화재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채미정∼케이블카∼해운사∼대혜폭포∼오형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으로 길을 잡았다.대혜폭포 입구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된다. 정상을 밟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할딱고개의 시작이다.숨이 가빠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르다 하여 할딱고개 또는 깔딱 고개란다. 하늘로 향한 계단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고 그 길 끝나면 험준한 산길이다.그곳에서도 2㎞가 넘는 길을 오르내려야만 목적지에 닿는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심장이 쿵쾅거린다.보물 제490호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석공은 산꼭대기에 붙어 있는 거대한 암벽 속에 원래 있던 부처를 밖으로 현신해 내었다.그 앞에 잠시 합장하고 섰다.마애불은 절벽 중간에 나투었으니 저절로 우러러보게 돼 가슴이 뛰고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시간을 돌에 새긴 그림, ‘마애불’ 속에 그 천 년의 시간이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앞에 서면 옷깃이 여며진다.◆10세기경 고려 불상금오산 마애여래불은 상호와 신체 등 각 부분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의 형식을 계승한 10세기경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아직 비슷한 예가 없으므로 고려 초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전체 높이는 5.5m, 불상 높이는 4.2m이다. 1968년 12월19일 보물로 지정됐다.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옷 주름 문양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즉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의 광배인데 이 말은 부처나 보살의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배의 모양이라는 뜻이다.머리 부분 광배의 윤곽은 3중의 선으로 표현됐다. 머리 부분에서 이어져 내린 2중의 선으로 다시 신체부분의 빛을 표현했다.전체 광배의 내부에는 불꽃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3면 보관이 있으나 조각장식은 마멸로 분명하지 않다.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약간의 부피감도 있지만 긴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작고 오뚝한 콧잔등으로 이어져 있다.예리한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코밑에는 길게 표현된 인중과 함께 입술을 가늘게 조각해 다소 경직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태이다.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내려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여래상에서 나타나는 우견편단(右肩偏袒)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선각으로 표현된 옷 주름은 어깨에서 한 번 접혀진 다음 왼팔과 허리를 감싸며 흘러내리고 있다. 하반신에서는 반원형의 옷 주름도 부드럽게 표현돼 있다.가슴과 배, 팔 등 신체 각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며 발은 다소 묵직하고 큼직하게 조각됐다.이 마애여래불은 장대한 신체에 전체적으로 윤곽은 뚜렷하지만 세부적인 신체의 굴곡은 생략돼 있다. 오른발에 무게중심이 옮겨지도록 허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튼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했다.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상체에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대좌는 불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 부각돼 있다.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 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는 불교에서 여래나 보살이 취하는 수인(手印)의 하나이다.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자세이다.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시무외인과 함께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형태이며, 그래서 이 두 수인을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저 산 아래, 우리 인간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인 것이다. 천수천안은 아니라도 부처의 큰 능력을 상징하듯 왼손을 더욱 길게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두려워 말라. 우환과 고난은 이미 지나갔다.’ 펼친 부처의 긴 손으로 더 많은 중생의 시름을 다 받아 주겠다는 자세로 보인다.그 뜻을 헤아리듯 자연암벽에 매달려 마애불을 새긴 석공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암벽 밖으로 나툰 마애불은 자연 속의 기운과 우리 민초들의 삶, 그 모든 것들이 함축돼서 하나로 연결된 형상이다.천 년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이 부처를 친견했을 것이다.의상이나 도선, 사명대사도 마애여래 앞에 섰을까 지극한 정성이, 스쳐 지나는 객의 발길도 오랫동안 붙든다.마애불은 태양을 향해 동남쪽으로 서 있어 해돋이 빛을 온몸으로 받아 낸다. 북동쪽으로는 구미 공단, 금오지와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가을 들판을 남쪽으로 휘돌아나가는 낙동강 구비도 보인다.마애불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산 정상부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전면의 평평한 공터에는 현재 주춧돌이 남아있고 흩어진 기와 조각들, 암벽에는 연결구조의 흔적도 보인다.1618년(광해군10) 간행된 경상도 선산도호부 읍지 일선지(一善誌)에 ‘금오산 제일 높은 곳 아래 보봉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으니 남동쪽으로 수 백리를 바라볼 수 있다’(金烏山 最上峰下有有小刹是也...通望南東數百里)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약사암 불상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거친 비탈길을 올라가면 약사암이 있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눌지왕(417∼457)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조선 중기 사명대사 유정이 금오산성을 쌓으면서 중창한 바 있다. 1990년대에 중창하며 법당 왼쪽에 요사채를 지었고, 그 앞 봉우리 바위 위에 종각을 새로 지어 주변 산세와도 어우러진 풍광을 보여 준다.거대한 암벽 끝에 불은 제비집처럼 이 작은 절집은 온몸으로 시간의 질곡을 버텨 온 결과물이다.중국 유학서 돌아온 의상대사도 이 산에 들어와 수행했다.각고의 정진 끝에 깨달은 바 있어 앉은 자리에 작은 절집하나 짓고 하산했는데 그곳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암자이다.이곳 법당 안에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불상이 있다.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석불인데 그 위에 금박을 두텁게 입혔다.수도산 수도암의 석불좌상(보물 제296호),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삼 형제 부처라고 불린다. 세 불상이 동시에 빛을 뿜는 방광(放光)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약사암 설명문에는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 있다.산새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가을 해는 짧아서 벌써 석양이다. 암벽 틈에도 단풍이 저녁노을처럼 붉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둠이 산자락을 덮기 시작한다. 하산은 야간산행이다.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왕의 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니 기운 한 번 느껴볼 요량으로 미적거렸다.마애불이 자리 잡은 산을 떠나 내려가지만 벼랑 끝에 새겨진 부처는 절망 끝에 선 중생을 언제나 다독인다.마애불의 경우 암벽에 조각돼 있기 때문에 조성 당시의 바로 그 장소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은 없다.천년세월 풍파 속에 절은 사라져도 묵묵히 원래의 자리를 지키며 오늘도 내일도 서 있을 것이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경주엑스포 스토리가 있는 체험형 야간산책로 인기

경주의 밤이 화려하게 빛난다. 경주엑스포가 신화와 이야기가 있는 체험형 산책로를 조성하고, 레이저조명 홀로그램으로 화려하게 단장해 밤을 밝히고 있다.경주엑스포가 ‘신라를 담은 별’이라는 주제로 이번 엑스포 기간에 새로 개발한 산책로 주변에 화려한 레이저조명을 설치해 밤하늘에서 별이 춤추고, 숲 길 곳곳에 빛을 쏟아지게 장치해 경주의 밤을 낮보다 더 밝게 물들이고 있다. 경주타워와 함께 이번 엑스포의 4대 킬러콘텐츠의 하나다.엑스포가 전국 최초로 선보인 야간 체험형 산책 코스 ‘신라를 담은 별(루미나 나이트 워크)’은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며 관람객의 발걸음을 야간의 경주로 이끌고 있다.산책로는 22년간 경주엑스포공원 내의 유휴부지로 머물러 있던 ‘화랑 숲’을 최초로 개발해 2㎞ 길이의 다양한 체험이 있는 둘레길로 탈바꿈시켰다.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조명으로 길을 밝힌 야간 산책길이 아닌 스토리가 접목된 체험형 코스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1시간 동안 지루할 틈이 없는 인터랙티브 탐험을 선보인다.‘신라를 담은 별’에 녹아든 스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 토기’를 모티브로 경주엑스포가 자체 개발한 3D애니메이션 ‘토우대장 차차’가 이끌어 간다.‘토우대장 차차’는 악마에게 잡혀간 신라의 왕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신라 소녀 ‘유지’와 용감한 군인 ‘차차’(기마인물형 토기의 환생)의 모험이 그려진 이야기이다.이 이야기에 맞게 산책길 입구에서는 집채만 한 기마인물형 토기 동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본격적인 산책로에 들어서면 대형 ‘주령구’가 스크린으로 변해 스토리의 시작을 알린다.특히 이승과 저승의 이동통로를 콘셉트로 꾸며진 ‘시공간의 터널’은 화려한 레이저와 LED조명, 3D홀로그램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환상적인 체험의 장을 만들고 있다.관람객이 직접 북을 쳐 악마를 물리치는 ‘야샤와의 전투’ 코스를 지나면 경주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억새밭에 도달한다.지난 코스의 장면을 실루엣으로 다시 보여주는 둥근 모양 입체 스크린과 사방에 흩어져 비추는 조명이 흔들리는 억새와 어우러지며 가을밤의 정취를 절정에 이르게 한다.주낙영 경주시장은 23일 저녁 공무원들과 함께 둘러보며 “신라의 이야기와 유물, 유적을 빛과 첨단영상 기술로 재현한 점이 아주 훌륭하다”며 “경주엑스포 야간 프로그램이 관광객을 경주로 유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신라를 담은 별’이 펼쳐지는 ‘화랑 숲’은 낮에는 전국 최초 맨발전용 둘레길인 ‘비움 명상길’로 변해 고즈넉한 여유를 제공하며 화려한 밤과는 다른 ‘반전매력’도 선보이고 있다.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이번 엑스포를 통해 경주지역에서는 최초로 야간 관광 프로그램을 도입했다”며 “경주엑스포가 시도하는 다양한 콘텐츠가 많은 사람에게 즐거운 체험이 되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관광객 유치로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옥동서원…청렴하기에 가난했던 재상 참된 정치인의 표상을 만나다

옥동서원(사적 제532호)은 1518년 조선조 중종 13년에 건립된 사액(賜額)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황희의 영정과 함께 황맹헌, 황효헌의 위패도 배향돼 있다.호국의 명산 백화산 자락, 상주시 모동면 옥동서원을 찾은 날은 때마침 가을 향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옥색 도포로 의관을 정제한 유림들이 황희 정승에게 향을 사르고 무릎을 꿇어 잔을 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제의의 모습이었다.장독대에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새벽이 떠올랐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 정(精)과 성(誠)을 다한다는 것은 관계의 지극함을 이해하는 의지이다. 제의는 삶을 지극하게 하고 저승과 이승, 망자와 산자, 과거와 현재의 교감을 가능하게 한다.망자를 추모하는 제의의 참뜻은 무엇일까?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일, 뿌리의 기억을 더듬어 그리운 마음을 일깨우는 일, 그분의 후손 됨을 감사하는 일, 다시 만날 그날까지 편안한 영면을 기원하는 일….그렇다면 망자를 추모하는 제의의 참뜻은 무엇이어야 할까? 망자를 모셔오는 일, 망자를 만나는 일, 망자와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일, 망자의 정신을 길이길이 계승하는 일….그러므로 유림들의 향사는 황희 정승의 혼령을 모셔오는 의식이고 옥동서원은 황희 정승의 삶의 발자취를 만나 교감하는 신성한 공간이어야 했다. 600년 전 황희 정승을 뵙고 싶었다.◆청백리 표상 황희 정승황희 정승은 여말선초의 이름난 충신, 대표적인 청백리의 표상이었다.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다.천첩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인권에도 유의했다.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진흥 등에 앞장섰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경제, 안보, 인권, 외교, 문화 등 어느 하나 소홀한 것 없이 챙긴 멀티 지도자였다.이른바 조국사태로 조국의 앞날이 캄캄한지 오래인 터에 어찌 황희 정승의 리더십이 그립지 않겠는가. 마지막 읍(揖)을 마친 유림들이 제주(祭酒) 상에 둘러앉아 환담을 하는 동안 서원 경내를 천천히 걸었다.경덕사, 5칸의 강당, 문루, 전사청, 제물을 마련하는 고사, 관리인이 거주하는 화직사, 묘직사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멀리 금강이 흐르는 산 끝에 유생들이 시를 읊던 팔각정이 자리 잡고 있다.향사 때 유생들의 거처 및 행사 장소로 사용된 문루는 2층 형식이다.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懷寶門), 위층 남쪽은 진밀료(縝密寮), 북쪽은 윤택료(潤澤寮), 중간의 마루는 청월루(淸越樓)라 현액돼 있다. 특이한 건물구조이다.17~8세기 서원 건축에서 나타나는 강학 쇠퇴와 향사 강화의 배치구도와 특징이 잘 남아 있어 건축사적 의미도 크다고 전한다. 옥동서원은 ‘갈천문집’, ‘방촌선생문집’ 등 총 5종 241책의 책 판을 비롯해 각종 고문서 300여 권, 현판 11개 등의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 또한 높은 서원이다.건물의 외양은 세월에 빛바래어 소슬했으나 서원 곳곳에서 황희 정승의 두고 간 발자취, 삶의 체취가 짙게 느껴졌다. 황희 정승의 삶의 일화가 담겨 있는 ‘두문불출’과 계란 속에 뼈가 있다는 뜻을 가진 ‘계란유골’이란 말이 떠올랐다.◆‘두문불출’과 ‘계란유골’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가 정권을 잡고 왕이 되자 고려의 신하들은 조정을 떠났다. 그 중 개성의 두문동에 72명의 신하가 숨어들어 아무리 설득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러 신하들을 나오게 하려 했지만 모두 나오지 않아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문 닫아걸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은 이렇게 태어난다. 황희 정승 또한 두문동에 들었던 선비 중의 한 사람,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삶의 의지가 그 말 속에 녹아 있다.청렴하기로 이름난 재상 황희는 집이 가난해 먹을 것이 없었다.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오늘 하루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모두 황희 대감께 드리라”고 명한다. 그날 하루 종일 큰 비가 내려 통행하는 물품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 무렵 겨우 계란 한 꾸러미가 들어왔지만 그나마 모두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계란유골’의 탄생 배경이다. 청빈한 삶의 극단을 보여준 일화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한글날, 조국 사태가 촉발시킨 민심의 분노가 광화문을 뒤덮고 있다.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정신이 없겠다. 두문불출, 계란유골처럼 ‘조국사태’란 말도 어느 날 국어사전에 실릴지 모르겠다. ‘조국에 의해 조국이 어지럽게 된 사건을 이르는 말’이라고 흑백사진 같은 뜻풀이를 할 것이다. 앞의 조국은 고유명사이고 뒤의 조국은 보통명사라고 보조설명도 곁들일지 모르겠다.600년 전 황희 정승의 일화가 ‘두문불출’과 ‘계란유골’의 뜻풀이를 도와주듯 600년 후 후손들이 ‘조국사태’라는 말의 생성 배경에 대한 백(back) 브리핑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공지능에게 의뢰하면 되리라. ‘내로남불’과 ‘후안무치’를 주제어로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면 되리라. 인공지능은 무사 공평할 테니까. “나르시시즘적 성격장애를 가진 자(집단)의 수오지심(羞惡之心) 마비에서 비롯된 자기성찰의 결여로 말미암은 사건”이라는 심층 분석까지 기대해도 좋으리라. 황희 정승에게 가르침을 구한다면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봄날이었어, 두문동 부근 논둑길을 걷고 있을 때의 일이었지. 늙은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몰아 밭을 갈고 있었어. 두 마리 소 중에 어떤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지. 농부는 갑자기 나를 데리고 멀리 밭 가에 서 있는 나무 밑으로 갔어.“검은 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 소는 일을 잘하지요” 라고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어. “아니, 하찮은 소에 대해 물어보는데 여기까지 와서 귀에 대고 말할 필요가 무엇이오?” 의아해서 되물었지.“글을 배운 선비라는 자가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농부의 책망에 얼굴이 화끈거렸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하자 소도 농부도 오간 데 없었어. 농부의 가르침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불언장단(不言長短) 말조심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지. 세치 혀를 조심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의 잘잘못을 향해 함부로 쏘아붙인 말은 독 묻은 화살로 되돌아 와 제 심장에 꽂히기 일쑤임을 명심해야 해. 내가 욕먹지 않는 재상으로 사초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언행을 신중히 하라는 늙은 농부의 가르침 덕분이었어.”시월의 산골 저녁 답은 깊고 스산했다. 말이란 무엇인가. ‘소주/쏘주/쐬주’에서 보듯 말이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말이 통용되는 사회와 그 말이 생성된 시대의 민 낯이다.인터넷을 떠도는 독화살 댓글들을 보라. 흉흉한 세태의 민 낯임이 분명하다. 서원 관리인으로부터 주안상을 대접받았다. 문화재청이 공모한 ‘2015년 살아 숨 쉬는 서원 활용화 사업’에 선정됐다고 했다.소학강좌, 붓글씨 쓰기, 부채 만들기, 선비 복장하고 제향 체험하기, 방촌 선생이야기를 소재로 한 북 아트와 마당놀이, 땅 따먹기, 비석 치기, 천 년 옛길 걷기, 백화산 포도축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옥동서원 활성화 사업도 의욕만 앞세우다 유야무야 되는 일이 돼 버릴까 걱정이었다. 말뜻 그대로 활성화 사업이 되려면 옥동서원만의 차별화된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고, 백화점식 나열이 아닌 선택과 집중이 전제돼야 한다.묵언수행 프로그램은 어떨까? 2박3일 동안, 그것이 어려우면 하루 동안만이라도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황희 정승의 600년 전 그날, 두문동 논둑길을 산책하는 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역사의 가르침 어느 한 구절만이라도 뼛속 깊이 새기는 묵언수행 프로그램, 멋지지 않겠는가! 황희 정승의 어록을 서원 곳곳에 거울처럼 걸어두고 말이다.나라의 근본은 오직 백성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本固邦寧)백성에게 믿음을 잃고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없다.(未有失信於民而能治其國者也)사람들이 분노하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고,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면 재변이 따른다.(人旣痛憤天必厭之天必厭之則災變隨之矣)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경북도교육청정보센터 대중음악 히치하이킹…배순탁 작가 인문학 강연

경북도교육청정보센터가 최근 학부모, 지역민 등 100여 명을 대상으로 ‘취향저격 인문학’ 프로그램을 개최했다.이날 행사에 배순탁 작가(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는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음악의 취향을 만드는 방법’이란 주제로 강연했다.작가의 책 ‘현대 팝 스토리’, ‘청춘을 달리다’를 기반으로 한 이번 특강은 그동안 음악작가와 평론가 활동으로 다진 내공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자리가 됐다.배 작가는 “작가는 취향과 영감은 절대 제 발로 찾아가지 않고 자기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며 “음악적 안목과 취향이란 것이 생활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또 “대중적인 팝과 영상을 청중들에게 보여주며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해석해 주는 시간을 가짐으로 청중들에게 음악을 듣는 새로운 관점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강연 참가한 김동훈(59)씨는 “10대, 20대 때 들었던 음악을 나이가 들어 듣게 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고 한 곡의 음악을 들려주는데도 작가의 박학다식한 설명이 뜻깊은 시간이 됐다”며 “우리 일상에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삶을 좀 더 값지게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김유태 관장은 “앞으로 다양한 주제의 책을 기반으로 인문학 프로그램의 지속적인 개발 및 운영을 통해 시민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남동해 기자 namdh@idaegu.com

유쾌하고 감독적인 스토리로 온 가족이 함께하는 공연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올 가을, 전 세대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공연이 12일 저녁 7시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 무대에 오른다. ‘식구를 찾아서’는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두 할머니와 세 마리 동물들이 나오는 소박한 휴먼 드라마 뮤지컬이다. 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박복녀 할머니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운 아들에게 버림받은 지화자 할머니의 눈물겨운 외로움과 소외를 유기된 세 마리 반려동물이 등장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치유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너무나 현실적인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는 따뜻한 감동과 해학으로 현대사회의 노인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작품이다. 발랄한 성격의 두 할머니와 반려동물의 좌충우돌 해프닝이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이 함께하는 감동을 선사하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최하고 안동문화예술의전당이 주관하는 2019년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민간예술단체 우수공연으로 진행된다.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는 7세 이상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료는 전석 1만 원이다.자세한 내용은 안동문화예술의전당 홈페이지(http://art.andong.go.kr)에서 확인하면 된다. 문의: 054-840-3600.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구미시 신중년 여성리더 아카데미…자신의 가치 찾고 긍정적 사고 확립

구미시가 지난 8일 구미대학교에서 ‘신중년 여성리더 아카데미’를 열었다.이번 교육과정은 생산인구의 핵심 연령층인 신중년 세대의 지속적인 사회활동 지원과 자기 이미지 관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해 개설됐다.교육은 50~60대 여성을 대상으로 매주 화요일, 11주간 총 24시간으로 진행된다.구미시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수, 강사들을 초청해 퍼스널 컬러, 보이스 스타일링 찾기, 스토리로 드는 오페라, 아름다운 중년의 성 등 정신적·신체적·사회적 이미지메이킹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박성애 사회복지국장은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50~60대 여성들이 이번 교육을 계기로 스스로 가치를 찾고 긍정적 사고를 확립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류성욱 기자 1968plus@idaegu.com

의료관광 전문 매거진 ‘대구메디투어’ 발행

대구시가 의료관광 전문 매거진 ‘대구메디투어(DAEGU MEDITOUR)’ 창간호를 지난 1일 발행했다. 대구메디투어 발행은 문화체육관광부 ‘2019년 의료관광 클러스터사업’의 일환이다. 의료산업의 중심 메디시티 대구의 저력으로 세계인들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됐다. 대구시는 6월부터 기획회의, 자료 수집, 취재 및 인터뷰, 다국어(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번역, 디자인 편집 과정을 거쳐 대구의료관광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창간호는 대한민국 의료특별시 메디시티 대구의 의료관광 소개 등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담아 전문성과 가독성을 높였다. 메디시티 대구 성장스토리,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JCI) 인증 대구선도의료기관 등을 소개했다. 예약 콜 서비스 의료관광 홍보도우미 택시 운영, 대구의료관광 할인카드 발급, 해외 진료상담회 개최, 대구SNS홍보단 활동사항 등도 기사화했다. 대구시는 창간호 2만부를 제작했으며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 베트남, 캐나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에 있는 24개 해외홍보센터, 156개 외국인 환자 유치의료기관 등에 배부한다. 대구메디투어 매거진 2호는 다음달 중 발행된다. 주제는 ‘여성을 위한 의료관광’이다. 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벼슬 버리고 강산에 살기를 노래하던 가문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목숨까지 내던져

기차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린다.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6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앞에는 시퍼런 낙동강이, 뒤로는 태백산 줄기 영남산(映南山)이 에워싼 배산임수의 명승절경에 자리 잡은 임청각(臨淸閣)은 그러나 잘려나간 마당에 가림막이 둘러쳐져 낙동강 조망을 막아 버렸다. 낙동강은 가까이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합수돼 남해로 긴 물줄기를 이룬다.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임청각(안동시 임청각길 63)은 뻔한 위치임에도 정작 가는 길은 꽤나 복잡하다. 안동역에서 임청각길을 따라 안동댐으로 가다가 법흥육거리에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따라가면 만난다. ◆임청-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임청각은 고성이씨 12세 이증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의흥군수를 내려놓고 중형 이굉(李宏)과 함께 중종 때인 1515년 건립했다. 고려 밀직부사를 지낸 이황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향헌공 이원의 여섯째 아들 참판공 이증(李增)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에 이거한 것이 정착의 시작이다.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동쪽 언덕 위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청’을 따왔다. 당초 99칸이었는데 1940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강제로 행랑채와 부속채 등이 철거되고 현재 70여 칸만 남았다. 이명의 아들 이굉(李肱)도 벼슬보다는 산수 간의 풍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한다. 백부가 지은 귀래정(歸來亭)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한 것이다. 그 아들 이용(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니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것이다. 3대가 과거급제 아닌 귀거래를 실천했으니 ‘고성이씨삼세유허비’가 세워졌을 만하다.중앙선 철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고택 임청각에 들어서면 ‘국무령이상룡생가’라는 커다란 문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칸 맞배지붕의 문지방 없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바로 눈앞으로 군자정이 보인다.왼쪽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서 임청각 정침 마당에 선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이 마당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임청각이 들어선 자리가 산비탈 청석자리여서인지 깊지 않은 우물물이 맑다.석주 선생의 종손 이창수(55)씨는 “우물 앞에 있는 사랑채는 3명의 정승이 난다는 태실이다. 석주와 철종 때 좌의정이었던 낙파 유후조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후 외손들은 이 방에서 해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집 전체 구조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용(用)자 형태로 지어졌다.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내려 그 정기를 받으려는 염원이 건축에도 담겨 있다. 동쪽으로 담장 샛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가 썼다. 별당 건물로 기단 위에 누상주와 주하주로 구성된 군자정 누마루는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지어졌다. 넒은 마루에는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 과정이 영상물로 볼 수 있도록 했다.군자정에 있는 많은 현판은 임청각의 역사와 임청각을 지켜온 후손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 석주가 남긴 거국음(去國吟)과 아들 이준형의 피가 묻은 유서에서부터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의병장 고경명, 백사 윤훤, 파서 이집두 등의 시가 걸려 있다.임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과 고성이씨 16세 이복원은 사돈간이었다. 고경명의 시 ‘제임청각’은 임란 직전 동래부사였던 고경명이 이복원의 회갑연에 참석해 임청각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시판에는 고경명의 또 다른 별호 고태헌(高苔軒)이라 서명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내려다 삼부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의 아내 고성이씨는 16살인 시동생 고용후를 비롯한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친정 임청각으로 피란 와서 지냈다.“당시에는 영호남 간 혼인으로 교류했으니 지역감정은 없었음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이창수씨는 말한다. 이후 안동에 피란 왔던 고용후가 과거에 급제하고 안동부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는 피란 당시 은혜를 입었던 고성이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 일가 등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종손 이창수씨는 임청각에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3가지를 빌리지 않았으니 첫째가 자식의 대를 끊이지 않음이요, 둘째는 글을 빌리지 않았고 셋째는 돈을 빌리지 않았다고 자존심을 내건다. 분재기에 따르면 한 때는 노비만도 408명이나 되는 대가였고 한문공부도 나름 했는데 현재는 자신의 아버지(이철증)가 넷째였고 자신은 먼저 돌아가신 종손 (이도증)의 맥을 이었으니 삼불차도 이제 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성지임청각은 보물(182호)이기도 하거니와 근세에 와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으니 정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한 곳이기도 하다.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을 비롯,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과 동생(이상동·봉희), 조카(이형국·운형·광민), 당숙 이승화, 손부 허은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된다. 석주는 구한말 1905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이 돼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과 국민 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해 간도로 망명한다.54세의 나이에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형, 조카 형국과 문형 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유학 서적을 접어놓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난다. 이때 조상의 신주도 땅에 묻어 버려 임청각 사당에는 위패가 없다. 이런 석주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만주에서는 길림성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2년에는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고 1919년 한족회를 조직해서 자치활동에 힘썼다.서로군정서를 조직해서 독판(督辦)으로 활약했고 1926년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웠다. 69세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선 뒤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노력하다가 1932년 5월12일 김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석주가 순국한 뒤 귀국한 아들 동구 이준형은 일제의 추적에 월곡면 도곡리로 피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만주로 망명한 석주가 임청각을 매각한 계약금을 갖고 갔다. 그러나 집안에서 계약금을 두 배나 주고 임청각을 되찾았다. 이를 두고 이창수씨는 “계약을 ‘물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석주의 가족들은 호적을 만들지 않았고 임청각이 4명의 문중 대표 이름으로 소유권을 명의신탁했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가 명의자 4명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1명은 끝내 거절했다.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80·이창수의 숙부)이 최근까지 10여 년간 뛰어다니며 후손들을 상대로 소유권 말소 판결은 얻어냈으나 소유권 등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공중에 뜬 상태다. 이항증 선생은 “보수적인 선비였던 석주가 종중 씨나락까지 팔진 않았다”며 일부의 임청각 소유권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법원 소송에 비용도 많이 들었고 몸도 지쳤다”며 임청각의 소유권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도 한 방법임을 시사했다. ◆탑동파임청각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탑동고택은 앞마당에 국보 16호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두고 있어 탑동파 고택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고성이씨 12세 참판공파 이증의 3남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 이복원은 다섯 아들을 둔다. 그 중 셋째 이적 (李適)은 처음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에 분가했다가 다시 임청각 기슭 영남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니 그가 탑동파의 파조가 된다.탑동고택은 1천여 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정자인 북정 등과 잘 꾸며진 연못을 둔 아름다운 고택이다.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이 안채를 건축하고 손자 이원미가 1719년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했다. 대청 북쪽에 영조 때인 1775년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북정이 있다.임청각과 탑동종택이 모두 일제때 군부대가 수용되거나 철도 건설 당시 인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철도 건설로 철거 훼손돼 옛날의 풍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탑동파 종손 이재익(80)씨는 어릴 때 넓은 백사장에서 멱감고 놀았던 낙동강이 댐 건설과 환경변화로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고 아쉬워 한다. 2025년이면 중앙선 철로가 현 경북도청 쪽으로 이설되면 임청각과 탑동고택이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학의 부리서 빛나는 황금빛 불상 이목구비 가득 어린 온화함으로 깨달음의 순간 굽어살피신다네

가마솥더위가 이어지는 여름날 아침, 절집 기행에 나선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의 동학산(動鶴山)은 학의 형상이다. 그 이름도 학이 울며 날아와 앉았다하여 부쳐진 것이라 한다. 659년 신라의 승려 혜공이 한눈에 명당임을 알아보고 산 동쪽 자락 즉,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경흥사(慶興寺)를 창건했다. 절 터 좌우에는 학의 날개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다시 하나씩 있고, 건너편 계곡 앞쪽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이 계류는 금호강의 지류인 남천으로 흘러든다.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신라시대에 이미 창건됐고, 고려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4~5개의 부속 암자도 있었으며 가람 동쪽에 수십 명의 학승이 상주하던 큰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외부와 차단된 지형적 특성을 지닌 때문인지 절집을 찾아갈 때도 내비게이션이 잠시 혼란스럽게 했지만, 입구까지 잘 데려다 준다. 돌계단이 나타난다. 막돌로 쌓은 석축 사이로 파르스름한 이끼가 잔뜩 붙어있다. 사람들이 자주 밟지 않은 계단인 것 같다. 절 마당까지 승용차가 바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니 두 그루 은행나무 사이로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좌우 대칭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 사이로 대웅전이 좌정해 있다. 이 절의 유일한 금빛 보물이 있는 곳이다. 배롱나무 두 그루도 붉게 빛나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른 아침시간이라 법당 안은 조용하다. 누군가 한사람이 부처를 향해 계속 절을 올리고 있다.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 경북 유형문화재였다가 2012년 2월22일 보물 제1750호로 승격됐다.원래는 지금의 명부전에 있었는데 1993년 대웅전을 완공하면서 이전·봉안했다. 1970년대 파손부위를 수리할 때, 본존불의 복장에서 1644년(인조22)에 작성된 복장기가 나왔다. 이로써 사찰의 창건연기는 물론 정확한 불상의 조성시기와 명확한 조성주체, 불상 제작자 등을 알 수 있었다.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35년부터 선승들이 동학산 남쪽 기슭에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고자 도모하였고, 수화원 청허(靑虛)를 비롯한 조각승들이 목조불상을 조성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17세기 전국에 걸쳐 크게 활약한 조각승인 청허의 조각세계를 연대적으로 이해하게하는 자료이다. 조각의 경향에서도 양감이 절제되고 고요한 상호,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가 돋보인다. 강직한 직선위주의 선묘, 주름표현 등에서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어 당시의 불상연구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불상의 재료는 은행나무인데 옛날에는 절을 창건할 때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훗날 불상을 조각할 때 그 은행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은 우선 크기에 있어서 높이가 1.58m이어서 위엄이 넘친다.등신대 크기의 황금빛 불상이 대좌 위에 앉아있으니 시선은 저절로 위로 우러러 보게 된다. 위엄을 갖춘 얼굴이지만 작은 이목구비가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손의 형태로 불교의 의미를 표현하는 수인은 깨달음의 순간을 알리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통견 법의와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지른 주름이 잘 드러나 있다. 1.2m 높이의 좌우 협시불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모두 화려한 보관을 썼다. 머리카락이 두 귀를 감싸면서 어깨 뒤로 내려 왔으며, 특별한 다른 장식은 없으나 우아한 모습이다. ◆수미단 부재이 절에는 또 하나의 문화재인 수미단이 알려져 있다. 불상을 모셔놓은 단을 불단 또는 수미단이라 한다. 이 명칭은 수미산(須彌山)에서 유래했다.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등록된 이 문화재의 명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5호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 . 1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수미단은 현재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잔존 부재가 명부전 수미단의 일부로 삽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반적인 수미단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지금 남아있는 부재는 원래 수미단의 1/5 혹은 그 이하의 양으로 추정된다. 조각기법 그리고 조각 면의 구성과 배치, 채색이 뛰어나 당시 불교 목조 공예품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목조삼존불을 안치할 때 지금의 명부전인 대웅전을 짓고 수미단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이 수미단은 한 단만 남아 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부재에 조각된 소재는 게·물고기·개구리 등의 동물, 연꽃·모란 등의 식물, 용·기린 등의 짐승들이다. 상상의 동물로 표현된 기린의 꼬리 부분은 비스듬히 하늘로 향했는데 붉은 색으로 외곽선을 칠하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도 달려 나가는 생동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색감도 근래에 덧칠한 흔적이 없어 고색이 완연하다. 정면 왼쪽 끝에는 검은색 게가 풀꽃 무늬 사이에 새겨져 있다. 앞면과 뒷면이 서로 뚫린 이중투각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입체감이 더욱 돋보인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목공이 혼신의 힘으로 칼질을 했을 것으로 느껴진다. 명부전을 나와 대웅전 뒤편 언덕을 오른다. 독성각,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래된 몇 기의 부도가 한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 앉아있다. 부도는 수행자의 마지막 흔적이며 뒤를 잇는 사람들에게 정진을 당부하는 무언의 상징이다. 부도에는 수행 승려의 사리가 모셔져있다. 부도에 피어난 거무죽죽한 이끼의 흔적과 한여름 동학산의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다. ◆승병의 훈련공간 경흥사는 임란 당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승병의 훈련공간이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승병들이 호국의 군사력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사명대사도 이곳에 머물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승병의 근거지인 밀양 표충사가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구릉지에 모셔져 있던 많은 부도들은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지금 남아있는 부도는 광복 이후 신도들이 수습해 보존될 수 있었다. 부도에는 각각 ‘해운당 치흠’, ‘금구당 선각’, ‘지월당 혜휘’ 같은 명문이 남아있어 주인을 알 수 있다. 거의가 별다른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종형 부도이다. 그래도 이 부도들은 그렇게 경흥사를 지키고 있다. 타고르의 신께 바치는 시, 키탄잘리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공간이다.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 당신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의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절을 떠나기 전에 보물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을 한 번 더 보려고 대웅전을 옆문을 열었다. 끊임없이 절을 올리던 사람도 없고 법당은 텅 비어 고요하다. 황금빛 불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누군가에게 절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절은 역사이고 문화이며 정신이니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천천히 불상을 바라보았다. 약간 살이 오른 얼굴 형상에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이다. 양쪽 입술은 살짝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문득 의심 한 덩어리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나무를 재료로 만든 것으로 이토록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나무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가. 부처는 제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참 모습이 왜곡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진리를 등불삼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했던 가르침은 바로 형상 그 너머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아차리라고 한 것이다. 다시 절집을 나와 이끼 낀 돌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간다. 잘 자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배웅해 준다. 목조불상의 세계를 보고나서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숨을 쉰다는 것을 알았다. 매미들의 긴 하모니도 들려온다. 여름이 깊어 간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망망대해 위로 ‘귀로’ 알리는 빛과 소리 우리 영토 지켜온 숭고한 마음 기억되길

등대는 외롭다. 외딴 곳에, 혼자, 서 있어서, 등대는 외롭다. 등대가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소리로 안개 속에 길을 내어 항구를 알리는 것은 외딴 곳에 혼자 서 있는 등대의 외로움, 외로움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해보자면 항구를 알리는 등대의 빛과 소리는 외로움의 꿈, 외로움의 육체이다. 등대의 외로움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아무리 망망대해 난바다라 하더라도 돌아갈 항구가 저기 저 깜박이는 등대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안심되고 푸근하겠는가. 요컨대 거친 바다로 출항한 어부들이 만선의 꿈을 싣고 무사안전하게 귀항할 수 있는 것은 등대의 외로움, 외로움의 힘이 등촉을 밝힌 빛과 소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낱 감상이나 감정의 소모적인 부산물이기 십상인 ‘외로움’이 어떻게 어부들의 무사귀환과 단란한 식탁의 평화를 담보하는 빛과 소리, 그 생성과 숭고의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지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과 같은 노랫말에서 보듯, 그것은 한 겨울의 거센 파도를 잠재워 작은 섬을 지키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가진 등대지기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등대지기의 부재, 혹은 작은 섬을 지키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소실된 상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 때 등대의 외로움은 평화의 담보가 아닌 고립무원의 표상으로, 등대의 빛과 소리는 구조를 요청하는 조난신호로 그 빛깔이 변한다. 작은 섬을 내 나라로, 등대지기를 나라의 책임자로 바꾸어 놓고 보라. 등대의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처한 내 나라의 외로움이고, 등대가 쏘아 올리는 빛과 소리는 위기에 처한 내 나라, 대한민국의 딱한 처지를 알리는 외마디 절규가 된다. ◆경북도 기념물 제154호 지정죽변등대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등대길 52(37° 03.5′N, 129° 25.8′E), 용의 고리처럼 생겼다는 용추곶에 외롭게 서 있었다. 갈매기만 저만치 멀어진 갯바위를 떠돌 뿐 주차장은 텅 비었고, 사무실 출입문에는 ‘출장중입니다’ 라는 안내 글이 붙어 있었다. 물론 등대는 자동시스템의 작동으로 제 일을 하겠지만, 사무실을 잠근 ‘출장중입니다.’ 안내 표지는 등대지기의 부재를 알리는 것처럼 곤혹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죽변등대를 찾은 날은 마침 7월24일, 독도 상공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공군기가 뒤얽혀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벌어진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변등대는 높이 16m의 백색 8각형 콘크리트구조이다. 윗부분으로 갈수록 몸체가 작아져서 안정감과 수직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민흘림기둥에 둥근 머리를 얹고, 통풍이 잘 되도록 창문의 위치를 각 층마다 다르게 설치했다. 내부 계단은 철재 주물, 등대 안에는 1911년 일본의 수로부에서 설치한 대리석으로 된 수로측량 원표가 보존되어 있다. 천정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등대 윗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보수공사로 건축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건축적 가치도 가치이지만, 등대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깊어 경북도는 2005년 9월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했다. 1910년 11월24일 최초로 불을 밝힌 이래 동해항로의 중간 지점,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곳(128km)에 서서 20초마다 1섬광(빛이 닿는 거리 20마일), 50초마다 1회(소리가 닿는 거리 3마일)씩 빛과 소리를 보내는 광파와 음파 표지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죽변등대는 1907년 일본사람들이 세웠다. 등대가 서 있는 육지 끝 용추곶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해상을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했던 자리였다. 또한 이곳은 왜구의 침범과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해 신라시대 진흥왕 10년 보루성을 구축하고 화랑을 상주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왜구를 막기 위해 봉화를 올리던 그 자리에, 일본군이 망루를 설치하고 등대를 세우다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변을 들락거리는 파도처럼 아침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독도 상공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공군기 30여 대가 뒤얽혔다. 3시간 동안이나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영토에서 열강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이다 청일, 러일 전쟁이 터졌던 구한말 때와 안팎 사정이 판박이이다. 등장하는 국가까지 똑같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우리 주권이 군사 · 외교적으로 위협받은 사태를 청와대와 여당은 먼 산 불구경하듯 한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선 ‘일본 경제침략대책특위’까지 구성하더니 중 · 러가 영공을 침략해 오자 ‘기기 오작동이라더라’며 대신 변명해주기 바쁘다.” 제 정신 가진 등대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에 의하면, 죽변곶 봉우리 일대에는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화살의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보호했다고 한다. 죽변(竹邊)은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등대 주변에는 키 작은 대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대나무 군락 사이로 난 산책로가 용소(龍沼) 해안까지 닿아 있었다. 두 눈 부릅뜨고 왜군의 침략을 지키던 화랑들의 그 길을 천천히 걷는다. 바닷바람에 이따금 대숲이 일렁인다. 용이 승천하였던 곳이라 전해 내려오는 용소가 출렁거린다. 조선조적 용소는 베옷 입고 머리 풀어 기우제를 올리던 곳이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풍어제를 올리는 곳,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다지는 이 지역의 성소이다. 승천하는 용의 푸른 기상은 어디로 갔는가. 등대가 외로움의 까치발을 하고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인이 그리운 시대7월25일, 북한은 원산에서 동해로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등대지기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미연합사는 “북 미사일이 대한민국이나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다”고 했다. 남한 전역을 때릴 수 있는 미사일을 우리 군이 추적도 못 했는데 이것이 위협이 아니면 무엇이 위협인가.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날 26일 기자들이 북의 미사일 위협에 대해 아홉 번이나 묻는데도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600km를 날아가는 탄도 미사일 발사가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한 것이어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니! 남쪽으로 쏘았다면 그건 위협이 아니라 폭격 아닌가. ‘용의 꿈길’이라 부르는 등대 주변 구불구불 이어진 대숲 길을 걷노라니 자책과 반성의 대나무 화살촉이 아프게 날아든다. 죽창가를 부른다고 의병이 봉기하겠는가. 의병이 봉기한들 일본과 벌이고 있는, 무역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승천하는 용의 푸른 기상은 웰빙문화가 좀 먹은 지 이미 오래이고, 나라를 지키려는 생성과 숭고의 의로운 공동체의식은 무상복지의 달콤함에 함몰되고 없는 터에 의병봉기를 기대하다니, 망상에 가까운 착각이고 환상이다. 더더구나 믿고 따를 등대지기마저 보이지 않는 터에 죽창가를 외치다니, 정치인은 없고 정치꾼만 우글거리는 세태에 금 모으기 운동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잠꼬대란 말인가. 죽변등대가 흰옷 입은 민초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분노를 넘어 고뇌가 필요한 시대이다. 분노는 감정이어서 눈 앞을 흐리고, 고뇌는 지성이어서 선 자리를 헤아려 갈 길을 밝힌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윌리엄 맥닐의 명제에 밑줄을 그어보라. 감정의 돌팔매질, 선동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전쟁에 이기려면 줄을 맞추어 걷는 군사들의 대오, 전략이 필요하다. 평화로 평화를 지킨다는 발상은 얼마나 현실에 맹목인 낭만적 허상인가. 국제관계란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이다. 정글은 힘없는 아이를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켜주지 않는다. 초인이 그리운 시대이다. 해가 지면 죽변등대는 등명기를 밝히고 안개 짙은 날에는 사이렌을 울릴 것이다. 그것은 등대지기를 부르는 외로운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애타는 파수꾼의 몸짓일 것이다. 초인은 어떻게 오는가. 거북선 횟집에서 천 년을 기다려도 죽은 이순신은 살아오지 않는다. 초인의 출현은 로또복권처럼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초인은 민족과 역사의 푸른 기상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고뇌의 산물이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드라마 '황금정원', 첫 회부터 파격전개… 막장스토리로 '화제'

지난 20일 첫 방송된 MBC 주말극 '황금정원(극본 박현주, 연출 이대영, 제작 김종학프로덕션)'이 첫 회부터 '막장스토리'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황금정원'은 인생을 뿌리째 도둑맞은 은동주(한지혜 분)가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을 담은 미스터리 휴먼 멜로 드라마다.사비나(오지은 분)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고아로 자란 동주는 돈을 모으기 위해 행사가수 알바를 뛰다 사비나와 호텔 룸 바에서 맞딱뜨리게 된다. 첫 회부터 두 사람의 만남과 새엄마 신난숙(정영주 분)과의 충격적인 재회 등이 연이어 등장했다.닐슨코리아 기준 이날 방송은 2회 기준 수도권시청률 7.4%를 기록했으며 순간 최고 시청률은 8%까지 기록하며 흥행 청신호를 밝혔다.'황금정원'은 매주 토요일 밤 9시 5분에 4회 연속 방송된다.online@idaegu.com

연극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 오는 28일까지 엑터스토리에서

연극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가 오는 28일까지 엑터스토리에서 진행된다.연극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는 2006년 대구시립극단 공연을 시작으로 13년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서울 대학로 ‘제이제이글로벌’에서 2013~2014년에 장기 공연을 진행했고 동구문화재단 초청공연, 대구문화재단 우수작 선정, 소공연 특성화 지원사업 등 총 200여 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줄거리는 국가에서 결혼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위해 결혼 사업을 추진한다.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 아이 셋만 낳으면 포상금으로 10억을 주는 큰 사업에 시범모델로 뽑힌 순박한 농촌총각 ‘백만석’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은 감기처럼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며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서로 다른 목적으로 찾아오는 신선녀와 박복혜. 과연 백만석은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엑터스토리는 2008년 설립 당시부터 창작극을 중심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지역을 대표하는 연극단체다. ‘레알도둑’, ‘개장수’ 등 다수의 레퍼토리 공연을 제작해 왔다.티켓 2만 원. 문의: 053-424-8340.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레이나 맞아? 못 알아볼 정도의 동안 얼굴… 아이돌 비하인드스토리

애프터스쿨, 오렌지캬라멜로 활동한 가수 레이나의 근황이 화제가 되고 있다.자신의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레이나는 최근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레이나는 갈수록 더 어려진 모습에 팬들은 "갈수록 어려진다", "여전히 스물 다섯 같아"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레이나는 작년 8월부터 유튜브로 개인 방송을 시작해 꾸준히 활동 중이다.아이돌 활동 시절 비하인드 스토리, 개인 일상, 여행과 같은 다양한 컨텐츠를 업로드 하고 있으며 특히 게임 방송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online@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