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3) 청도 장연사지

8부..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3)청도 장연사지들녘에는 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움트고 있지만 지난겨울부터 번진 괴질로 회색빛 하늘까지 침울해 보인다. 어디선가 마음 편안해질 곳을 찾다가 시간의 흔적만 남은 폐사지로 향한다.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도 위안을 주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텅 빈 옛 절터에 서면 헛된 욕심을 하나씩 허물 수 있고 그럴수록 마음은 편안해질 것이다.대구에서 가까운 폐사지 중에는 청도군 매전면에 장연사지(長淵寺址)가 있다. 장연리 장수골 입구에서 육화산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니 희뿌연 연무가 가득하다. 마을은 완만한 경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석탑이 있는 장연사지의 존재 등으로 보아 마을 형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장수곡(長水谷) 또는 절골로도 불린다. 장연교에서 마을로 들어서면서 왼쪽 계곡 건너편 낮은 구릉에 감나무 밭이 있고 그 가운데 나란히 서있는 두 탑이 보인다. 청도 장연사지에는 절집이 있었겠지만 모든 전각들은 허물어지고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비바람에 시달려온 석탑과 무너진 석조물만이 천 년 세월을 꿋꿋이 지키고 있다. 지금은 향화와 독경소리가 사라져 적막뿐인 절터는 사색의 공간으로 적합하다. 천 년의 시간을 흘러온 그곳은 산전수전 다 겪은 온화한 할머니처럼 찾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장연사는 언제 세워지고 언제 사라졌는지 학계에서도 기록을 찾아내지 못해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지금도 절터에 남아 있는 탑의 양식으로 봐서 통일신라 후기에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천 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곳폐사지 마당에 서 있는 ‘청도 장연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1980년 9월16일 문화재청에 의해 보물 제677호로 지정됐다. 두 탑은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각각 하나의 돌을 다듬어 만든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3층의 탑신은 네 개씩의 우주(隅柱·모퉁이에 세운 돌기둥)와 지붕돌에는 4단씩의 층급받침이 눈에 들어올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이중기단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전체 높이가 동탑은 4.6m, 서탑은 4.84m로 무난하고 평범한 석탑이다. 주위에 들어선 감나무들과 어울린 분위기 또한 평범하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멋을 지닌 불국사 석가탑의 아름다움도 연상된다. 석탑은 종교철학으로 따지면 드높은 정신세계를 알리는 상징이자 엄격함과 고귀함을 지닌다.서탑은 일찍이 무너져 있었는데 개천가에 버려졌던 석재들을 모아서 1980년 2월에 복원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몸돌과 지붕돌 모서리에 크고 작은 손상이 있으며 하층기단은 대부분이 보충한 석재로 이루어졌다. 긴 세월 동안 비바람을 이기고 이끼를 벗하며 처연하게 서 있는 석탑, 오랫동안 동탑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켜왔는데 서탑을 다시 복원하여 나란히 서있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동탑은 1984년 12월 수리를 위해 해체 복원했다. 당시 1층 몸돌 상단에서 놀랍게도 사리장치가 나타나 관심을 끌었다. 목합(木盒)이 나왔는데 뚜껑에 두 줄의 선이 그어진 것 말고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물레를 돌려 표면을 고르게 다듬고 전체에 금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칠은 거의 벗겨졌다. 내부는 좁고 깊게 파여져 있는데 그 속에서 유리로 만든 녹색 사리병이 발견됐다. 사리합의 높이는 11.8㎝, 사리병은 3㎝이다. 재질이 나무로 만든 사리합은 그 예가 무척 드물다고 하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절터였음을 증언해 주는 각종 석물들은 절터 서편에도 즐비하게 놓여있다. 절의 역사를 말해 주는 석조 문화재들이다. 폐허에 덩그러니 남은 돌덩이들이지만 신라석공의 손을 거친 이후, 천 년 세월이 지났다. 비록 돌이어도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들을 속에 품고 있는 것 같아 부드러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폐사지는 볼 것이 별로 없겠지만 그래서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무너지고 깨진 돌조각에서 선조들의 깊은 신앙과 세월의 무상을 함께 느낄 수 있다.청도는 감의 고장이다. 장연사지에서 내려와 하천을 건너면 또 감나무 밭이 있고 그 안에도 당간지주가 서 있다. 이 석물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특히 눈길을 끈다. 신라시대의 당간지주에 수놓은 무늬가 조선시대의 반닫이나 삼층장의 백통 장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쪽을 제외한 3면을 곱게 다듬고 바깥쪽에 선명하게 양각했다. 돌에 새겨진 곡선이 대칭적이어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운 점에서 특별한 석조유물이라 할 수 있겠다. 순례객의 발길이 끊어진 빈 절터의 당간 지주가 지닌 이미지는 기다림이다. 이는 사람들이 떠나 버린 동구 밖 느티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장연사지의 석물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탑에서 개울을 건너서 골짜기를 따라 마을 쪽으로 오르면 바로 오른쪽에 사원재(思遠齋)라는 재실이 있다. 그 마당에도 원래 장연사지에 있었다는 사각형의 석조와 또 하나의 당간지주가 잡초 속에 놓여 있다.마을의 고샅길을 잠시 빠져나오면 작은 절집이 나온다. 그 옛날에는 큰절 장연사의 부속암자가 있던 곳으로 추측하는 장소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도량은 단출하다. 대적광전, 삼성당, 심검당, 요사채가 전부다. 12년 전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 장연사(長蓮寺)이다. 현재 이 절에는 두 점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장연사소장 묘법연화경’은 유형문화재 제517호인데 1420년(세종2)에 화엄대사 성거(省琚)가 등재본을 필사하고 판각한 판본의 후쇄본이다. 보관상태가 양호하여 조선 초기의 묘법연화경 판본 계통을 연구하는 서지학의 중요한 자료이다. 또 한 점은 유형문화재 제518호인 ‘장연사소장 정선동래선생 박의구해’(精選東萊先生 博議句解)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전래되어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필독서로서 후대까지 꾸준히 열독된 서적이라 한다. 권극중(權克中)의 발문에는 1417년(태종17)의 간행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책으로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천 년 전 치열했던 불법의 수행도량이 오늘날에도 다시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장연사 주지 월제스님은 “폐사지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정밀한 지표조사와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 지역의 폐사지에서는 한국의 불교미술사를 포함하여 역사를 다시 쓸 만한 획기적인 자료의 출현이 언제든 기대된다. 방치되어 있던 폐사지에서 갑자기 국보급 유물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지자체 단위의 사업에서는 역사자원을 활용한 관광콘텐츠 확충으로 연결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도 다방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정밀한 지표조사와 관리 필요돌아가는 길에 다시 장연리 입구 옛 절터로 내려왔다. 감나무 사이를 걸으며 역사적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것은 천 년 전 신라문화에서만 느끼는 아스라한 정취이다. 통일신라 당시의 가람은 불국사의 절집 배치처럼 거의 쌍탑 일금당식(雙塔 一金堂式)이었다. 장연사지 이곳도 한때는 두 탑이 뜰 가운데 서있고 그 뒤로 금당이 자리 잡은 반듯한 가람으로 우뚝했을 것이다. 절 마당 앞으로 계류가 흐르는 전형적인 가람 배치는 건너편에서 반야용선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건너오는 스토리로 연결된다. 당시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앞 개천을 따라 멀리 있는 동창천까지 뿌옇게 흘러갔다는 내력도 있으니 절의 규모도 짐작된다. 탑돌이를 하기위해 몰려오는 사람들로 사시사철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과거 화려했던 영화와 위엄은 사라지고 없고 쓰러져 버린 절터에서 쓸쓸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지나온 내력도 사라진 연유도 모른 채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그 이름과 몇몇 석물들만을 지상에 남겨놓고 있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 이는 그 빈 공간에서 말없는 깨달음을 발견한다. 석탑 옆 잔디밭에는 연두색 새싹도 보인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삶이 번잡해져 빈 절터를 서성일 때 마음은 홀로 외롭고 홀로 따스하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대구 서구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로 추억 여행 떠나자

대구 서구 비산1동 비봉초 북편에 조성된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이 지역의 어둡고 낙후된 이미지를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전환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비산1동 일원 철로변의 다양한 위험 요소들을 제거한 덕분에 이곳이 안전하고 쾌적한 골목길로 탈바꿈했다.또 테마가 있는 주거 재생과 마을 브랜드 활성화 구축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서구청은 지난해 비산1동의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 조성 사업을 완료했다.특히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한 사업 추진으로 비산1동의 보행 환경을 개선하고 우범지대를 최소화시키는 효과를 거뒀다.‘원고개 마을 스토리길’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4가지 스토리로 담아낸 골목길이다.먼저 ‘원님길’은 원고개 전설을 모티브로 원님이 행차하던 모습을 골목길에 담았다.‘향수길’은 원고개 마을의 과거·현재·미래를 표현해 낸 길이다.지역의 발자취는 물론 마을만의 이야기를 풀어낸 게 특징이다.‘산책길’은 주민들과의 사회적 활동을 증진시키고 사람간의 정을 느낄 수 있는 테마길로 만들어졌다.‘하늘담장길’은 비산시영아파트 동편 담장을 허물어 야간에도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등·하교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이 길은 비산 성당과 가장 인접한 탓에 종교적인 관광 명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구름다리의 역할도 할 수 있다.이 밖에 최근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 인근에 들어선 ‘원고개 희망공작소’도 마을 공동체 향상과 상호 협력을 통한 마을 기업 육성에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서구청 관계자는 “비산1동의 노후화된 계단과 주택가 벽면, 경사로 등을 재정비하면서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며 “다양한 사업을 통해 서구 곳곳을 안전하고 쾌적한 정주 환경으로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2) 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

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코로나19 바이러스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요람도 비켜가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기간 구미공단 지역은 외지인의 방문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를 거치면서 기세를 얻은 낙동강은 구미들을 가로지르며 한층 도도해진다. 그 낙동강은 경상도의 젖줄이 되었고 구미를 한국 산업화의 기지로 만들었다. 구미에서 낙동강은 남북으로 흐르며 기존 시가지, 구미1공단과 인동, 구미2·3공단을 나눈다. 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면 2공단과 3공단, 구미공단 지킴이 인동(仁同)이 있다. 이 가운데 척화비는 눈에 띈다.구미 척화비는 구미3공단에서 구미 산동 해평 방면으로 넘어가는 석현 고갯길을 넘어가다 길가에 서 있으며 150년 전 조선인의 결기가 그대로 서려 있다.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온다.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다.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자손만대에 이를 경고한다. 병인년 짓고 신미년 세운다.) 뒤로 갈수록 글자가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척화비와 문헌을 통해 글자를 해독한 것이다.조선말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국내정치에 외치를 이용하기 위해 병인양요 이후 강력한 쇄국정책을 편다. 대원군이 1866년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학살하자 프랑스가 자국 신부의 학살을 핑계로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 개항을 요구한 것이 병인양요다. 5년 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 로저스 사령관이 군함 5척을 앞세우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진격해 온 것이 신미양요다.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 개항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대원군은 나라 문을 더욱 굳게 닫았다. 그리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를 막아내자는 굳은 결의를 비석으로 새겨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종로 네거리와 부산 동래, 경주 등 도시에서 충청 전라도의 산골까지 전국 곳곳에 무려 200여 기의 척화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같았고 시기도 같았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땅 속에 파묻히거나 바다에 빠뜨려지기도 했고 부서지기도 했다. 지금 포항 장기면사무소나 청도, 부산 용두산공원 등에 33기가 남아 있는데 자연석 화강암 척화비는 이곳뿐이다.구미 구포동의 척화비도 당시 한 석공이 조상의 묘지 상석을 만들려고 다듬다가 지역민들의 저지로 살아남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최근에야 이곳 길가에 자리를 잡고 이젠 경북도 문화재자료 22호로 지위까지 얻어 기억을 살릴 수 있게 됐다.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강의 동쪽 야산에 동락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동쪽인 이곳은 칠곡군 인동면이었고 그 인동이 낳은 조선명유 장현광을 모신 사원이 동락서원이다. 동락(東洛)은 동방의 이락(伊洛)이니 송나라 학자 정호 정이 형제가 수학하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말한다.동락서원은 옆에 있는 한옥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그 모태로 한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57세 되던 1610년 제자 장경우 선생이 낙동강변 동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장현광 선생이 직접 부지암정사라 이름하고 만년을 이곳에서 강학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정사는 선생이 돌아가신 17년 뒤인 1654년 서원의 체제를 갖추고 이듬해 서원으로 개칭,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76년 숙종때 동락서원이란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대원군때 철폐됐다. 1904년 영당을 새로 건립하고 1932년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당을, 1971년 부속건물까지 복구해서 중창하고 장현광 선생과 장경우 선생을 배향했다.외삼문인 준도문을 들어서면 윤회재와 근집재가 동서쪽에 자리하고 경북도 문화재자료 21호인 중정당 뒤로 사당인 경덕묘가 있다. 중정당 서쪽 처마와 붙어있는 신도비는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부지암정사에 동락서원이 들어서자 후손들은 당초 부지암정사 창건 뜻을 살리기 위해 1885년 정사를 건립했다. 그러나 구미공단이 들어서고 구미대교가 놓이면서 1975년 서원 옆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장현광 선생은 서원 옆 낙동강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어 그 심오함에 흠뻑 빠졌었다고 오홍석 구미시 문화계장은 말한다. 그 깊이는 성리학의 깊이나 인간의 깊이와 같이 깊고 나의 마음과 같이 알 수 없는 깊이라며 부지에 대해 의미를 더했다.서원 앞 400년도 더 된 보호수 은행나무는 여헌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데 암수 딴 그루인데도 해마다 엄청난 은행을 맺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기도처로도 유명해졌다. 후손 장세곤씨는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금줄을 쳐보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들의 정성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소연이다.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장현광 선생은 20세에 벌써 학문이 완숙 단계에 들어섰을 만큼 일생을 인간과 자연, 우주를 아우르는 학문과 저술에 바친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다. 7세에 부친으로부터 글자를 배우면서 글귀를 만들었고 8세에 부친이 돌아가신 뒤 자형 노수함에게 글을 배웠다. 18세에 공부한 것을 종합 포괄하여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했으니 바로 ‘우주요괄’ 10첩이 그것이다.향시에 두 차례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나가지 않았고 벼슬도 대부분 사양했다. 조정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잇따라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대부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여헌학연구회의 자료에 따르면 선생에게는 37차례의 관직 제수가 있었으나 출사한 것은 외직 두 번과 내직 세 번이 전부였다. 선조는 38세의 선생에게 전옥서 참봉을 내렸으나 모친상 중이어서 부임하지 않았으니 처음 관직은 42살 때 보은현감(종6품)이었다. 그것도 6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그만뒀다.보은현감으로 나갈 당시 선생이 밝힌 출처(出處)는 지금 세상의 관리들에게도 경계로 삼을 만하다. “벼슬에 나아갈 만한 의리가 없으면 벼슬하지 말 것이니, 학문이 넉넉하지 않고, 시기가 적당하지 않고, 예로서 대접하지 않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단호한 선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선생의 방대하고 심오한 학문은 유학과 제자백가의 학설은 물론 이단시하던 노자와 불교 사상까지도 비평과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주 자연인으로 일생을 살았고 자신의 호처럼 전국을 떠돌며 나그네처럼 살았으니 그 바탕을 도(道)에 두고 있으니 인조가 내린 선생의 제문에 “500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생전 두 번의 대사헌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84세에 인조의 남한산성 굴욕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20년 뒤인 1657년 효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받았으니 선생의 인품과 충절을 공인받은 것이다.마애여래불(摩崖如來佛)인동 구미3공단에서 선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의 척화비를 가기 전에 맞은 편 산등성이에 높이 7.2m, 어깨폭 2.8m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빚은 마애불(보물 제 1122호)이 풍상을 겪고 마모돼 가고 있다. 지금 문화재청이 안전 검사를 하고 있다는데 앞쪽은 멀쩡해 보여도 옆모습을 보면 바위의 균열이 심해 곧 부셔져 무너질 듯 위태롭기 짝이 없다. 구미공단이 들어서서 한국 산업화를 이룬 주역으로 성장해오는 동안 마애불이 지켜보고 또 지켜준 덕이었다면 오늘날 구미공단의 위기는 마애불의 위기에서 오는 것인가 턱없는 상상도 하게 만든다.초승달 모양의 눈썹과 굳게 다문 작은 입술, 평평한 코와 어깨까지 늘어진 귀의 모습은 무심한 듯 근엄하고 자상한 속을 짐작케 한다. 옷을 걸쳤으니 그 선이 팽팽한 속살을 비치듯 얇아 바람에 날리는 듯하고 두 다리는 연화대에 얹었는데 풍만하게 보인다.안내문에는 백제군에 쫓기던 당나라 장수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한 뒤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불상을 새겼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 같은데 머리 위에 얹힌 판석은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한다.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동쪽 구미3공단 너머 천생산이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마애불도 이겨내지 못했음인지 옛날 산속이었을 마애불 앞은 공장들이 틀어막고 또 길이 나면서 마애불도 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공단 주변환경과 차량 진동 등 산업화의 현장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문화재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다.1천년을 지켜오던 마애불이 문화재청의 프라스틱 보호 시설 설치 이후 습기와 진동에 균열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고 보면 빠른 진단 결과가 나와서 안전하게 보호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구미공단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1) 경주 서출지

경주 서출지K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쥐띠 해이고 하니 연초에, 경주 서출지를 대구일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이었다. 좋은 제안이어서 나도 무자생 쥐띠라며 웃었다. 내 기억 속의 서출지는, 글이 나온 못이 아닌 쥐가 나온 서출지(鼠出池)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심 기이했다. 인터넷을 뒤적여 1500여 년 전 소지 마립간이 다스리는 신라 땅을 살폈다.봄날이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었다. 바람도 쐬고 민심도 살필 겸 왕은 시종과 일관을 거느리고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동했다. 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올라 수심을 달래고 싶었다. 고구려와 말갈의 잦은 침략도 문제였지만 왕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궁내까지 손길을 뻗친 불교의 잠입에 대한 전통 토속 신앙의 보이지 않는 반발, 그로 인한 갈등이었다. 묵호자가 전래한 부처의 가르침은 일선군 모례의 집에 굴실을 만들어 아도화상을 모시는 등 민심에 스며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왕실의 구병(救病)활동으로 불교의 영향력이 날로 조정 깊숙이 그 세를 얻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월성신의 운행을 점쳐 왕위를 보필하던 뿌리 깊은 토속 신앙의 세력이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교의 전파를 금하던 조정이고 보면 토속 신앙에 대한 위협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신라 21대 소지왕(毗處王) 즉위 10년 무진(戊辰)년의 일이었다. 천천정으로 거동하는 왕의 행렬을 앞뒤로 날아들며 까마귀가 까옥 까옥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이 행렬을 멈추고 까마귀의 심상찮은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소서” 쥐가 두 손을 모으고 사람의 말로 왕에게 아뢰었다. 까마귀를 뒤따르는 왕의 행렬이 천천정 남쪽 피촌(避村)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돼지 두 마리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돼지의 싸움을 지켜보던 왕의 행렬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라진 까마귀의 행방을 찾아 피촌 주변을 배회하는데 한 늙은이가 연못 가운데서 서찰을 들고 홀연히 솟아올랐다. 늙은이의 서찰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두 사람이 죽느니 오히려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이에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개봉을 명한 서찰에는 ‘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서 거문고 갑을 활로 쏘자 피가 흘러나왔다.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승려(焚修僧)와 궁주(宮主)가 금갑 속에 숨어서 간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출지(書出池)는 글(서찰)이 나온 못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내 기억 속의 서출지가 서(鼠)출지인 것은 까마귀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통역하는 쥐의 이미지가 남달라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출지를 찾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쥐들을 불러내었다. “너는 쥐들의 활동이 왕성한 자시(子時)에 태어났으니 잘 살게 될 거야” 어머니는 자주 쥐를 앞세워 어린 내게 먼 앞날을 축복해 주곤 하셨다. “천석! 천석!” 아버지는 쥐에 물린 손가락을 치켜들고 천석을 외치셨다. 쥐에 물리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러주신 쥐와는 달리 내가 만난 쥐는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기도 했다. 낯 선 도시 허름한 아파트에 살 때의 일이었다. 싱크대 물관을 타고 침입한 쥐들은 밤마다 거실 구석을 눈에 불을 켜고 뒤적이곤 했다. 빗자루를 들고 쫓으려 해도 나를 쏘아보는 쥐의 악착같은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사적 제138호, 경주 서출지 (慶州 書出池)는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연못이다. 겨울바람이 불어서 을씨년스러웠고 인적이 끊겨 황량했다. 서출지를 가득 매운 연꽃 군단도, 못가의 배롱나무도, 독야청청한 소나무 밑 벤치도, 조선 현종 5년에 임적(任勣)이지었다는 이요당(二樂堂)도 마찬가지였다. 회색 풍경 속에 부스스한 몸을 움츠리고 스산한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문화유적이란 당대 역사가 숨 쉬는 현장이며 세월의 침식을 비껴서는 상징의 육체이다. 왜 임금의 가마는 심산유곡이 아닌 못가의 천천정(天泉亭), 하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를 향했을까? 왜 사금갑 설화를 만든 사람은 하늘 샘, 맑은 못으로 그 배경을 설정했을까? 맑은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성찰의 거울이니까 그러했을 것이다. 거개의 설화가 그러하듯이 서출지 전설 또한 우화(寓話)이다. 우화란 세상을 비추는 반성의 거울, 가장 직접적인 인간사의 알레고리이다. 서출지 전설에 비친 당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세월을 거슬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승려는 궁주와 간통을 범하고, 왕을 시해하려 함으로써 왕권에 도전한다. 이에 맞서 쥐, 까마귀, 돼지, 그리고 신령한 노인 등은 왕권을 수호한다. 일관은 왕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관(日官)은 고대 사회에서 일월성신의 운수를 알려주는 관직으로, 전통적인 규범과 의례를 현실 정치 영역에 반영하는 존재였다. 승려와의 간통은 궁중 세력과 불교 세력 간의 야합을 뜻한다. 사금갑 설화는 궁중 불교 세력과 일관으로 대변되는 토속 신앙 세력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의 반영으로 읽힌다.아름드리 소나무 밑 벤치에 앉아 신라적 서출지의 그날을 떠올려 본다. 까마귀는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전하고, 쥐는 까마귀의 울음을 인간의 말로 번역해서 들려주고, 돼지는 왕의 행렬을 못가에 세워 신령한 늙은이의 서찰을 받게 한다. 그날의 까마귀와 쥐와 돼지와 신령한 노인을 만나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신령스러운 그들은 2020년 오늘의 궁핍한 세태에 대해 어떤 지혜로운 이야기를 전해줄지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상상을 해본다.갈등 없는 시대, 대립 없는 사회는 없다. 대립과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과 목적, 그 성격과 가치의 문제이다.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향한 것일 때 갈등과 대립은 발전의 동력이지만, 공화를 등져버린 패거리의 배타적 이해에 얽매인 것이라면 그것은 공동체 파국의 원인이 된다. 끼리끼리 똘똘뭉쳐 저 잘났다 큰소리치는 진영 간의 이전구투, 국론분열의 소모적 멱살잡이가 끝날 줄 모르는 지금/여기/우리에게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인 서찰이 전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까마귀가 전하는 하늘의 대답을 쥐가 통역해서 들려주면 좋겠다.한 사람을 위해 두 사람을 죽인다는 것,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 받은 민주사회의 통치자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던 고대사회의 임금과는 그 처지가 사뭇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전자가 상대적 가치라면 후자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서출지 전설에 비추어 보건대 우화로서 사금갑 설화는 공동체(국가)에 해악을 가져오는 존재를 무찌르는 구조의 반영이다. 두 사람을 죽여 한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승려의 간통이라는 행위로서 상징되는 질서의 파괴 혹은 혼돈에 대한 질서와 정의, 공동체의 수호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올해는 경자년 육십간지의 37번째 해, 경(庚)은 백(白)이므로 하얀 쥐의 해라고 한다. 검은 쥐가 아닌 하얀 쥐, 무언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을 가져본다. 1년에 다섯 차례, 한 번에 10여 마리의 새끼를 낳는 엄청난 번식력을 가진 쥐는 다산의 상징이고, 미륵에게 부싯돌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세상의 모든 뒤주를 가져도 좋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함경도 지방의 전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쥐는 재물과 풍요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일과 지진 등 지각변동을 미리 알아차리고 남 먼저 피난 가는 예지력에서 보듯 쥐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까뮈의 〈페스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베르베르의 장편 〈고양이〉에서와 같이 문학작품의 주요 인물로 쥐가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는 캐릭터, 지혜를 상징하는 쥐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먹고 사는 경제문제도, 죽고 사는 안보문제도, 끝없이 으르렁거리는 편싸움 문제도, 법과 정의와 공정 문제도,,,,,,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경자년!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하얀 쥐의 지혜가 그리운 시절이다.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안동지역 스토리텔러 류필기 씨, ‘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대통령 표창 수상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이자 스토리텔러인 류필기씨가 지난 1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류씨는 각지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한국형 스토리텔링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해외공연단 구성 및 투어 산업을 기획·진행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해외 진출 유공 문화 교류 공헌 부문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은 해외 진출 유공자와 방송영상산업발전 유공, 게임산업 발전 유공 등 3개 부문 정부 표창과 애니메이션, 캐릭터, 만화 등 3개 부문의 정부 시상으로 총 6개 부문 33명(건)을 시상하고 있다.해외진출 유공부문 대상은 2017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방시혁 대표가 방탄소년단(BTS)의 세계적인 성공으로 수상했다. 2018년에는 배틀그라운드게임으로 유명한 펍지 김창환 대표가 받았다.한편 안동지역으로서는 2017년 ‘엄마 까투리’로 애니메이션 부문 대통령상을 받은 이후 두 번째 쾌거이다.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김광석 행복나눔 가을 무료 콘서트 보러오세요

김광석 행복나눔이 주관하고 김광석 스토리하우스가 주최하는 ‘2019 김광석 행복나눔 가을 무료 콘서트’가 오는 9일 오후 3~7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콘서트홀과 김광석 소극장에서 열린다. 콘서트는 1·2부로 진행된다. 1부 행복콘서트는 오후 3~5시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 콘서트홀에서, 2부 나눔콘서트는 오후 6~7시 김광석 소극장(떼아르뜨 분도)에서 진행된다. 탤런트 김동석의 사회로 진행되는 1부에는 뮤지컬 배우 노현희, 팝페라 가수 젬마 김현주와 최의성, 아이돌 5인조 혼성 그룹 디아이피엠엑스(DIP mx), 신세대 퓨전국악그룹 우리가, 아코디언 연주가 김준영이 무대에 오른다. 2부는 가수 박두한의 단독 무대로, 김광석의 히트곡들로 꾸며질 예정이다.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금오산 마애여래입상…하늘로 뻗은 험지 가까스로 오르니 고난 다 이겼다 내미는 자비로운 손

정상에 이르는 길은 된비알의 연속이다. 몹시 험한 비탈길이라는 의미의 된비알 곳곳에는 거대한 암석이 솟아 있다. 금오산 기암괴석 곳곳에도 단풍이 물들었다.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이 아니라 원래의 자연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문화재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채미정∼케이블카∼해운사∼대혜폭포∼오형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으로 길을 잡았다.대혜폭포 입구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된다. 정상을 밟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할딱고개의 시작이다.숨이 가빠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르다 하여 할딱고개 또는 깔딱 고개란다. 하늘로 향한 계단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고 그 길 끝나면 험준한 산길이다.그곳에서도 2㎞가 넘는 길을 오르내려야만 목적지에 닿는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심장이 쿵쾅거린다.보물 제490호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석공은 산꼭대기에 붙어 있는 거대한 암벽 속에 원래 있던 부처를 밖으로 현신해 내었다.그 앞에 잠시 합장하고 섰다.마애불은 절벽 중간에 나투었으니 저절로 우러러보게 돼 가슴이 뛰고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시간을 돌에 새긴 그림, ‘마애불’ 속에 그 천 년의 시간이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앞에 서면 옷깃이 여며진다.◆10세기경 고려 불상금오산 마애여래불은 상호와 신체 등 각 부분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의 형식을 계승한 10세기경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아직 비슷한 예가 없으므로 고려 초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전체 높이는 5.5m, 불상 높이는 4.2m이다. 1968년 12월19일 보물로 지정됐다.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옷 주름 문양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즉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의 광배인데 이 말은 부처나 보살의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배의 모양이라는 뜻이다.머리 부분 광배의 윤곽은 3중의 선으로 표현됐다. 머리 부분에서 이어져 내린 2중의 선으로 다시 신체부분의 빛을 표현했다.전체 광배의 내부에는 불꽃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3면 보관이 있으나 조각장식은 마멸로 분명하지 않다.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약간의 부피감도 있지만 긴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작고 오뚝한 콧잔등으로 이어져 있다.예리한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코밑에는 길게 표현된 인중과 함께 입술을 가늘게 조각해 다소 경직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태이다.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내려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여래상에서 나타나는 우견편단(右肩偏袒)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선각으로 표현된 옷 주름은 어깨에서 한 번 접혀진 다음 왼팔과 허리를 감싸며 흘러내리고 있다. 하반신에서는 반원형의 옷 주름도 부드럽게 표현돼 있다.가슴과 배, 팔 등 신체 각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며 발은 다소 묵직하고 큼직하게 조각됐다.이 마애여래불은 장대한 신체에 전체적으로 윤곽은 뚜렷하지만 세부적인 신체의 굴곡은 생략돼 있다. 오른발에 무게중심이 옮겨지도록 허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튼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했다.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상체에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대좌는 불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 부각돼 있다.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 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는 불교에서 여래나 보살이 취하는 수인(手印)의 하나이다.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자세이다.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시무외인과 함께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형태이며, 그래서 이 두 수인을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저 산 아래, 우리 인간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인 것이다. 천수천안은 아니라도 부처의 큰 능력을 상징하듯 왼손을 더욱 길게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두려워 말라. 우환과 고난은 이미 지나갔다.’ 펼친 부처의 긴 손으로 더 많은 중생의 시름을 다 받아 주겠다는 자세로 보인다.그 뜻을 헤아리듯 자연암벽에 매달려 마애불을 새긴 석공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암벽 밖으로 나툰 마애불은 자연 속의 기운과 우리 민초들의 삶, 그 모든 것들이 함축돼서 하나로 연결된 형상이다.천 년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이 부처를 친견했을 것이다.의상이나 도선, 사명대사도 마애여래 앞에 섰을까 지극한 정성이, 스쳐 지나는 객의 발길도 오랫동안 붙든다.마애불은 태양을 향해 동남쪽으로 서 있어 해돋이 빛을 온몸으로 받아 낸다. 북동쪽으로는 구미 공단, 금오지와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가을 들판을 남쪽으로 휘돌아나가는 낙동강 구비도 보인다.마애불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산 정상부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전면의 평평한 공터에는 현재 주춧돌이 남아있고 흩어진 기와 조각들, 암벽에는 연결구조의 흔적도 보인다.1618년(광해군10) 간행된 경상도 선산도호부 읍지 일선지(一善誌)에 ‘금오산 제일 높은 곳 아래 보봉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으니 남동쪽으로 수 백리를 바라볼 수 있다’(金烏山 最上峰下有有小刹是也...通望南東數百里)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약사암 불상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거친 비탈길을 올라가면 약사암이 있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눌지왕(417∼457)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조선 중기 사명대사 유정이 금오산성을 쌓으면서 중창한 바 있다. 1990년대에 중창하며 법당 왼쪽에 요사채를 지었고, 그 앞 봉우리 바위 위에 종각을 새로 지어 주변 산세와도 어우러진 풍광을 보여 준다.거대한 암벽 끝에 불은 제비집처럼 이 작은 절집은 온몸으로 시간의 질곡을 버텨 온 결과물이다.중국 유학서 돌아온 의상대사도 이 산에 들어와 수행했다.각고의 정진 끝에 깨달은 바 있어 앉은 자리에 작은 절집하나 짓고 하산했는데 그곳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암자이다.이곳 법당 안에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불상이 있다.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석불인데 그 위에 금박을 두텁게 입혔다.수도산 수도암의 석불좌상(보물 제296호),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삼 형제 부처라고 불린다. 세 불상이 동시에 빛을 뿜는 방광(放光)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약사암 설명문에는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 있다.산새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가을 해는 짧아서 벌써 석양이다. 암벽 틈에도 단풍이 저녁노을처럼 붉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둠이 산자락을 덮기 시작한다. 하산은 야간산행이다.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왕의 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니 기운 한 번 느껴볼 요량으로 미적거렸다.마애불이 자리 잡은 산을 떠나 내려가지만 벼랑 끝에 새겨진 부처는 절망 끝에 선 중생을 언제나 다독인다.마애불의 경우 암벽에 조각돼 있기 때문에 조성 당시의 바로 그 장소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은 없다.천년세월 풍파 속에 절은 사라져도 묵묵히 원래의 자리를 지키며 오늘도 내일도 서 있을 것이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경주엑스포 스토리가 있는 체험형 야간산책로 인기

경주의 밤이 화려하게 빛난다. 경주엑스포가 신화와 이야기가 있는 체험형 산책로를 조성하고, 레이저조명 홀로그램으로 화려하게 단장해 밤을 밝히고 있다.경주엑스포가 ‘신라를 담은 별’이라는 주제로 이번 엑스포 기간에 새로 개발한 산책로 주변에 화려한 레이저조명을 설치해 밤하늘에서 별이 춤추고, 숲 길 곳곳에 빛을 쏟아지게 장치해 경주의 밤을 낮보다 더 밝게 물들이고 있다. 경주타워와 함께 이번 엑스포의 4대 킬러콘텐츠의 하나다.엑스포가 전국 최초로 선보인 야간 체험형 산책 코스 ‘신라를 담은 별(루미나 나이트 워크)’은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며 관람객의 발걸음을 야간의 경주로 이끌고 있다.산책로는 22년간 경주엑스포공원 내의 유휴부지로 머물러 있던 ‘화랑 숲’을 최초로 개발해 2㎞ 길이의 다양한 체험이 있는 둘레길로 탈바꿈시켰다.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조명으로 길을 밝힌 야간 산책길이 아닌 스토리가 접목된 체험형 코스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1시간 동안 지루할 틈이 없는 인터랙티브 탐험을 선보인다.‘신라를 담은 별’에 녹아든 스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 토기’를 모티브로 경주엑스포가 자체 개발한 3D애니메이션 ‘토우대장 차차’가 이끌어 간다.‘토우대장 차차’는 악마에게 잡혀간 신라의 왕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신라 소녀 ‘유지’와 용감한 군인 ‘차차’(기마인물형 토기의 환생)의 모험이 그려진 이야기이다.이 이야기에 맞게 산책길 입구에서는 집채만 한 기마인물형 토기 동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본격적인 산책로에 들어서면 대형 ‘주령구’가 스크린으로 변해 스토리의 시작을 알린다.특히 이승과 저승의 이동통로를 콘셉트로 꾸며진 ‘시공간의 터널’은 화려한 레이저와 LED조명, 3D홀로그램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환상적인 체험의 장을 만들고 있다.관람객이 직접 북을 쳐 악마를 물리치는 ‘야샤와의 전투’ 코스를 지나면 경주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억새밭에 도달한다.지난 코스의 장면을 실루엣으로 다시 보여주는 둥근 모양 입체 스크린과 사방에 흩어져 비추는 조명이 흔들리는 억새와 어우러지며 가을밤의 정취를 절정에 이르게 한다.주낙영 경주시장은 23일 저녁 공무원들과 함께 둘러보며 “신라의 이야기와 유물, 유적을 빛과 첨단영상 기술로 재현한 점이 아주 훌륭하다”며 “경주엑스포 야간 프로그램이 관광객을 경주로 유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신라를 담은 별’이 펼쳐지는 ‘화랑 숲’은 낮에는 전국 최초 맨발전용 둘레길인 ‘비움 명상길’로 변해 고즈넉한 여유를 제공하며 화려한 밤과는 다른 ‘반전매력’도 선보이고 있다.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이번 엑스포를 통해 경주지역에서는 최초로 야간 관광 프로그램을 도입했다”며 “경주엑스포가 시도하는 다양한 콘텐츠가 많은 사람에게 즐거운 체험이 되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관광객 유치로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옥동서원…청렴하기에 가난했던 재상 참된 정치인의 표상을 만나다

옥동서원(사적 제532호)은 1518년 조선조 중종 13년에 건립된 사액(賜額)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황희의 영정과 함께 황맹헌, 황효헌의 위패도 배향돼 있다.호국의 명산 백화산 자락, 상주시 모동면 옥동서원을 찾은 날은 때마침 가을 향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옥색 도포로 의관을 정제한 유림들이 황희 정승에게 향을 사르고 무릎을 꿇어 잔을 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제의의 모습이었다.장독대에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새벽이 떠올랐다. 정성을 들인다는 것, 정(精)과 성(誠)을 다한다는 것은 관계의 지극함을 이해하는 의지이다. 제의는 삶을 지극하게 하고 저승과 이승, 망자와 산자, 과거와 현재의 교감을 가능하게 한다.망자를 추모하는 제의의 참뜻은 무엇일까?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일, 뿌리의 기억을 더듬어 그리운 마음을 일깨우는 일, 그분의 후손 됨을 감사하는 일, 다시 만날 그날까지 편안한 영면을 기원하는 일….그렇다면 망자를 추모하는 제의의 참뜻은 무엇이어야 할까? 망자를 모셔오는 일, 망자를 만나는 일, 망자와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일, 망자의 정신을 길이길이 계승하는 일….그러므로 유림들의 향사는 황희 정승의 혼령을 모셔오는 의식이고 옥동서원은 황희 정승의 삶의 발자취를 만나 교감하는 신성한 공간이어야 했다. 600년 전 황희 정승을 뵙고 싶었다.◆청백리 표상 황희 정승황희 정승은 여말선초의 이름난 충신, 대표적인 청백리의 표상이었다.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다.천첩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인권에도 유의했다.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진흥 등에 앞장섰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경제, 안보, 인권, 외교, 문화 등 어느 하나 소홀한 것 없이 챙긴 멀티 지도자였다.이른바 조국사태로 조국의 앞날이 캄캄한지 오래인 터에 어찌 황희 정승의 리더십이 그립지 않겠는가. 마지막 읍(揖)을 마친 유림들이 제주(祭酒) 상에 둘러앉아 환담을 하는 동안 서원 경내를 천천히 걸었다.경덕사, 5칸의 강당, 문루, 전사청, 제물을 마련하는 고사, 관리인이 거주하는 화직사, 묘직사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멀리 금강이 흐르는 산 끝에 유생들이 시를 읊던 팔각정이 자리 잡고 있다.향사 때 유생들의 거처 및 행사 장소로 사용된 문루는 2층 형식이다.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懷寶門), 위층 남쪽은 진밀료(縝密寮), 북쪽은 윤택료(潤澤寮), 중간의 마루는 청월루(淸越樓)라 현액돼 있다. 특이한 건물구조이다.17~8세기 서원 건축에서 나타나는 강학 쇠퇴와 향사 강화의 배치구도와 특징이 잘 남아 있어 건축사적 의미도 크다고 전한다. 옥동서원은 ‘갈천문집’, ‘방촌선생문집’ 등 총 5종 241책의 책 판을 비롯해 각종 고문서 300여 권, 현판 11개 등의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 또한 높은 서원이다.건물의 외양은 세월에 빛바래어 소슬했으나 서원 곳곳에서 황희 정승의 두고 간 발자취, 삶의 체취가 짙게 느껴졌다. 황희 정승의 삶의 일화가 담겨 있는 ‘두문불출’과 계란 속에 뼈가 있다는 뜻을 가진 ‘계란유골’이란 말이 떠올랐다.◆‘두문불출’과 ‘계란유골’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가 정권을 잡고 왕이 되자 고려의 신하들은 조정을 떠났다. 그 중 개성의 두문동에 72명의 신하가 숨어들어 아무리 설득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러 신하들을 나오게 하려 했지만 모두 나오지 않아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문 닫아걸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은 이렇게 태어난다. 황희 정승 또한 두문동에 들었던 선비 중의 한 사람,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삶의 의지가 그 말 속에 녹아 있다.청렴하기로 이름난 재상 황희는 집이 가난해 먹을 것이 없었다.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오늘 하루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모두 황희 대감께 드리라”고 명한다. 그날 하루 종일 큰 비가 내려 통행하는 물품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 무렵 겨우 계란 한 꾸러미가 들어왔지만 그나마 모두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계란유골’의 탄생 배경이다. 청빈한 삶의 극단을 보여준 일화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한글날, 조국 사태가 촉발시킨 민심의 분노가 광화문을 뒤덮고 있다.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정신이 없겠다. 두문불출, 계란유골처럼 ‘조국사태’란 말도 어느 날 국어사전에 실릴지 모르겠다. ‘조국에 의해 조국이 어지럽게 된 사건을 이르는 말’이라고 흑백사진 같은 뜻풀이를 할 것이다. 앞의 조국은 고유명사이고 뒤의 조국은 보통명사라고 보조설명도 곁들일지 모르겠다.600년 전 황희 정승의 일화가 ‘두문불출’과 ‘계란유골’의 뜻풀이를 도와주듯 600년 후 후손들이 ‘조국사태’라는 말의 생성 배경에 대한 백(back) 브리핑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공지능에게 의뢰하면 되리라. ‘내로남불’과 ‘후안무치’를 주제어로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면 되리라. 인공지능은 무사 공평할 테니까. “나르시시즘적 성격장애를 가진 자(집단)의 수오지심(羞惡之心) 마비에서 비롯된 자기성찰의 결여로 말미암은 사건”이라는 심층 분석까지 기대해도 좋으리라. 황희 정승에게 가르침을 구한다면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봄날이었어, 두문동 부근 논둑길을 걷고 있을 때의 일이었지. 늙은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몰아 밭을 갈고 있었어. 두 마리 소 중에 어떤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지. 농부는 갑자기 나를 데리고 멀리 밭 가에 서 있는 나무 밑으로 갔어.“검은 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 소는 일을 잘하지요” 라고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어. “아니, 하찮은 소에 대해 물어보는데 여기까지 와서 귀에 대고 말할 필요가 무엇이오?” 의아해서 되물었지.“글을 배운 선비라는 자가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농부의 책망에 얼굴이 화끈거렸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하자 소도 농부도 오간 데 없었어. 농부의 가르침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불언장단(不言長短) 말조심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지. 세치 혀를 조심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의 잘잘못을 향해 함부로 쏘아붙인 말은 독 묻은 화살로 되돌아 와 제 심장에 꽂히기 일쑤임을 명심해야 해. 내가 욕먹지 않는 재상으로 사초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언행을 신중히 하라는 늙은 농부의 가르침 덕분이었어.”시월의 산골 저녁 답은 깊고 스산했다. 말이란 무엇인가. ‘소주/쏘주/쐬주’에서 보듯 말이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말이 통용되는 사회와 그 말이 생성된 시대의 민 낯이다.인터넷을 떠도는 독화살 댓글들을 보라. 흉흉한 세태의 민 낯임이 분명하다. 서원 관리인으로부터 주안상을 대접받았다. 문화재청이 공모한 ‘2015년 살아 숨 쉬는 서원 활용화 사업’에 선정됐다고 했다.소학강좌, 붓글씨 쓰기, 부채 만들기, 선비 복장하고 제향 체험하기, 방촌 선생이야기를 소재로 한 북 아트와 마당놀이, 땅 따먹기, 비석 치기, 천 년 옛길 걷기, 백화산 포도축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옥동서원 활성화 사업도 의욕만 앞세우다 유야무야 되는 일이 돼 버릴까 걱정이었다. 말뜻 그대로 활성화 사업이 되려면 옥동서원만의 차별화된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고, 백화점식 나열이 아닌 선택과 집중이 전제돼야 한다.묵언수행 프로그램은 어떨까? 2박3일 동안, 그것이 어려우면 하루 동안만이라도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황희 정승의 600년 전 그날, 두문동 논둑길을 산책하는 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역사의 가르침 어느 한 구절만이라도 뼛속 깊이 새기는 묵언수행 프로그램, 멋지지 않겠는가! 황희 정승의 어록을 서원 곳곳에 거울처럼 걸어두고 말이다.나라의 근본은 오직 백성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本固邦寧)백성에게 믿음을 잃고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없다.(未有失信於民而能治其國者也)사람들이 분노하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고,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면 재변이 따른다.(人旣痛憤天必厭之天必厭之則災變隨之矣)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유쾌하고 감독적인 스토리로 온 가족이 함께하는 공연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올 가을, 전 세대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공연이 12일 저녁 7시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 무대에 오른다. ‘식구를 찾아서’는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두 할머니와 세 마리 동물들이 나오는 소박한 휴먼 드라마 뮤지컬이다. 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박복녀 할머니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운 아들에게 버림받은 지화자 할머니의 눈물겨운 외로움과 소외를 유기된 세 마리 반려동물이 등장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치유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너무나 현실적인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는 따뜻한 감동과 해학으로 현대사회의 노인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작품이다. 발랄한 성격의 두 할머니와 반려동물의 좌충우돌 해프닝이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이 함께하는 감동을 선사하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최하고 안동문화예술의전당이 주관하는 2019년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민간예술단체 우수공연으로 진행된다.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는 7세 이상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료는 전석 1만 원이다.자세한 내용은 안동문화예술의전당 홈페이지(http://art.andong.go.kr)에서 확인하면 된다. 문의: 054-840-3600.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구미시 신중년 여성리더 아카데미…자신의 가치 찾고 긍정적 사고 확립

구미시가 지난 8일 구미대학교에서 ‘신중년 여성리더 아카데미’를 열었다.이번 교육과정은 생산인구의 핵심 연령층인 신중년 세대의 지속적인 사회활동 지원과 자기 이미지 관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해 개설됐다.교육은 50~60대 여성을 대상으로 매주 화요일, 11주간 총 24시간으로 진행된다.구미시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수, 강사들을 초청해 퍼스널 컬러, 보이스 스타일링 찾기, 스토리로 드는 오페라, 아름다운 중년의 성 등 정신적·신체적·사회적 이미지메이킹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박성애 사회복지국장은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50~60대 여성들이 이번 교육을 계기로 스스로 가치를 찾고 긍정적 사고를 확립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류성욱 기자 1968plus@idaegu.com

의료관광 전문 매거진 ‘대구메디투어’ 발행

대구시가 의료관광 전문 매거진 ‘대구메디투어(DAEGU MEDITOUR)’ 창간호를 지난 1일 발행했다. 대구메디투어 발행은 문화체육관광부 ‘2019년 의료관광 클러스터사업’의 일환이다. 의료산업의 중심 메디시티 대구의 저력으로 세계인들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됐다. 대구시는 6월부터 기획회의, 자료 수집, 취재 및 인터뷰, 다국어(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번역, 디자인 편집 과정을 거쳐 대구의료관광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창간호는 대한민국 의료특별시 메디시티 대구의 의료관광 소개 등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담아 전문성과 가독성을 높였다. 메디시티 대구 성장스토리,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JCI) 인증 대구선도의료기관 등을 소개했다. 예약 콜 서비스 의료관광 홍보도우미 택시 운영, 대구의료관광 할인카드 발급, 해외 진료상담회 개최, 대구SNS홍보단 활동사항 등도 기사화했다. 대구시는 창간호 2만부를 제작했으며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 베트남, 캐나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에 있는 24개 해외홍보센터, 156개 외국인 환자 유치의료기관 등에 배부한다. 대구메디투어 매거진 2호는 다음달 중 발행된다. 주제는 ‘여성을 위한 의료관광’이다. 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벼슬 버리고 강산에 살기를 노래하던 가문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목숨까지 내던져

기차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린다.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6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앞에는 시퍼런 낙동강이, 뒤로는 태백산 줄기 영남산(映南山)이 에워싼 배산임수의 명승절경에 자리 잡은 임청각(臨淸閣)은 그러나 잘려나간 마당에 가림막이 둘러쳐져 낙동강 조망을 막아 버렸다. 낙동강은 가까이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합수돼 남해로 긴 물줄기를 이룬다.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임청각(안동시 임청각길 63)은 뻔한 위치임에도 정작 가는 길은 꽤나 복잡하다. 안동역에서 임청각길을 따라 안동댐으로 가다가 법흥육거리에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따라가면 만난다. ◆임청-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임청각은 고성이씨 12세 이증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의흥군수를 내려놓고 중형 이굉(李宏)과 함께 중종 때인 1515년 건립했다. 고려 밀직부사를 지낸 이황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향헌공 이원의 여섯째 아들 참판공 이증(李增)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에 이거한 것이 정착의 시작이다.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동쪽 언덕 위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청’을 따왔다. 당초 99칸이었는데 1940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강제로 행랑채와 부속채 등이 철거되고 현재 70여 칸만 남았다. 이명의 아들 이굉(李肱)도 벼슬보다는 산수 간의 풍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한다. 백부가 지은 귀래정(歸來亭)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한 것이다. 그 아들 이용(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니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것이다. 3대가 과거급제 아닌 귀거래를 실천했으니 ‘고성이씨삼세유허비’가 세워졌을 만하다.중앙선 철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고택 임청각에 들어서면 ‘국무령이상룡생가’라는 커다란 문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칸 맞배지붕의 문지방 없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바로 눈앞으로 군자정이 보인다.왼쪽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서 임청각 정침 마당에 선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이 마당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임청각이 들어선 자리가 산비탈 청석자리여서인지 깊지 않은 우물물이 맑다.석주 선생의 종손 이창수(55)씨는 “우물 앞에 있는 사랑채는 3명의 정승이 난다는 태실이다. 석주와 철종 때 좌의정이었던 낙파 유후조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후 외손들은 이 방에서 해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집 전체 구조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용(用)자 형태로 지어졌다.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내려 그 정기를 받으려는 염원이 건축에도 담겨 있다. 동쪽으로 담장 샛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가 썼다. 별당 건물로 기단 위에 누상주와 주하주로 구성된 군자정 누마루는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지어졌다. 넒은 마루에는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 과정이 영상물로 볼 수 있도록 했다.군자정에 있는 많은 현판은 임청각의 역사와 임청각을 지켜온 후손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 석주가 남긴 거국음(去國吟)과 아들 이준형의 피가 묻은 유서에서부터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의병장 고경명, 백사 윤훤, 파서 이집두 등의 시가 걸려 있다.임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과 고성이씨 16세 이복원은 사돈간이었다. 고경명의 시 ‘제임청각’은 임란 직전 동래부사였던 고경명이 이복원의 회갑연에 참석해 임청각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시판에는 고경명의 또 다른 별호 고태헌(高苔軒)이라 서명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내려다 삼부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의 아내 고성이씨는 16살인 시동생 고용후를 비롯한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친정 임청각으로 피란 와서 지냈다.“당시에는 영호남 간 혼인으로 교류했으니 지역감정은 없었음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이창수씨는 말한다. 이후 안동에 피란 왔던 고용후가 과거에 급제하고 안동부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는 피란 당시 은혜를 입었던 고성이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 일가 등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종손 이창수씨는 임청각에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3가지를 빌리지 않았으니 첫째가 자식의 대를 끊이지 않음이요, 둘째는 글을 빌리지 않았고 셋째는 돈을 빌리지 않았다고 자존심을 내건다. 분재기에 따르면 한 때는 노비만도 408명이나 되는 대가였고 한문공부도 나름 했는데 현재는 자신의 아버지(이철증)가 넷째였고 자신은 먼저 돌아가신 종손 (이도증)의 맥을 이었으니 삼불차도 이제 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성지임청각은 보물(182호)이기도 하거니와 근세에 와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으니 정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한 곳이기도 하다.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을 비롯,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과 동생(이상동·봉희), 조카(이형국·운형·광민), 당숙 이승화, 손부 허은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된다. 석주는 구한말 1905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이 돼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과 국민 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해 간도로 망명한다.54세의 나이에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형, 조카 형국과 문형 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유학 서적을 접어놓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난다. 이때 조상의 신주도 땅에 묻어 버려 임청각 사당에는 위패가 없다. 이런 석주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만주에서는 길림성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2년에는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고 1919년 한족회를 조직해서 자치활동에 힘썼다.서로군정서를 조직해서 독판(督辦)으로 활약했고 1926년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웠다. 69세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선 뒤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노력하다가 1932년 5월12일 김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석주가 순국한 뒤 귀국한 아들 동구 이준형은 일제의 추적에 월곡면 도곡리로 피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만주로 망명한 석주가 임청각을 매각한 계약금을 갖고 갔다. 그러나 집안에서 계약금을 두 배나 주고 임청각을 되찾았다. 이를 두고 이창수씨는 “계약을 ‘물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석주의 가족들은 호적을 만들지 않았고 임청각이 4명의 문중 대표 이름으로 소유권을 명의신탁했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가 명의자 4명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1명은 끝내 거절했다.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80·이창수의 숙부)이 최근까지 10여 년간 뛰어다니며 후손들을 상대로 소유권 말소 판결은 얻어냈으나 소유권 등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공중에 뜬 상태다. 이항증 선생은 “보수적인 선비였던 석주가 종중 씨나락까지 팔진 않았다”며 일부의 임청각 소유권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법원 소송에 비용도 많이 들었고 몸도 지쳤다”며 임청각의 소유권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도 한 방법임을 시사했다. ◆탑동파임청각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탑동고택은 앞마당에 국보 16호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두고 있어 탑동파 고택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고성이씨 12세 참판공파 이증의 3남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 이복원은 다섯 아들을 둔다. 그 중 셋째 이적 (李適)은 처음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에 분가했다가 다시 임청각 기슭 영남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니 그가 탑동파의 파조가 된다.탑동고택은 1천여 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정자인 북정 등과 잘 꾸며진 연못을 둔 아름다운 고택이다.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이 안채를 건축하고 손자 이원미가 1719년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했다. 대청 북쪽에 영조 때인 1775년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북정이 있다.임청각과 탑동종택이 모두 일제때 군부대가 수용되거나 철도 건설 당시 인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철도 건설로 철거 훼손돼 옛날의 풍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탑동파 종손 이재익(80)씨는 어릴 때 넓은 백사장에서 멱감고 놀았던 낙동강이 댐 건설과 환경변화로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고 아쉬워 한다. 2025년이면 중앙선 철로가 현 경북도청 쪽으로 이설되면 임청각과 탑동고택이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학의 부리서 빛나는 황금빛 불상 이목구비 가득 어린 온화함으로 깨달음의 순간 굽어살피신다네

가마솥더위가 이어지는 여름날 아침, 절집 기행에 나선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의 동학산(動鶴山)은 학의 형상이다. 그 이름도 학이 울며 날아와 앉았다하여 부쳐진 것이라 한다. 659년 신라의 승려 혜공이 한눈에 명당임을 알아보고 산 동쪽 자락 즉,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경흥사(慶興寺)를 창건했다. 절 터 좌우에는 학의 날개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다시 하나씩 있고, 건너편 계곡 앞쪽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이 계류는 금호강의 지류인 남천으로 흘러든다.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신라시대에 이미 창건됐고, 고려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4~5개의 부속 암자도 있었으며 가람 동쪽에 수십 명의 학승이 상주하던 큰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외부와 차단된 지형적 특성을 지닌 때문인지 절집을 찾아갈 때도 내비게이션이 잠시 혼란스럽게 했지만, 입구까지 잘 데려다 준다. 돌계단이 나타난다. 막돌로 쌓은 석축 사이로 파르스름한 이끼가 잔뜩 붙어있다. 사람들이 자주 밟지 않은 계단인 것 같다. 절 마당까지 승용차가 바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니 두 그루 은행나무 사이로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좌우 대칭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 사이로 대웅전이 좌정해 있다. 이 절의 유일한 금빛 보물이 있는 곳이다. 배롱나무 두 그루도 붉게 빛나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른 아침시간이라 법당 안은 조용하다. 누군가 한사람이 부처를 향해 계속 절을 올리고 있다.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 경북 유형문화재였다가 2012년 2월22일 보물 제1750호로 승격됐다.원래는 지금의 명부전에 있었는데 1993년 대웅전을 완공하면서 이전·봉안했다. 1970년대 파손부위를 수리할 때, 본존불의 복장에서 1644년(인조22)에 작성된 복장기가 나왔다. 이로써 사찰의 창건연기는 물론 정확한 불상의 조성시기와 명확한 조성주체, 불상 제작자 등을 알 수 있었다.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35년부터 선승들이 동학산 남쪽 기슭에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고자 도모하였고, 수화원 청허(靑虛)를 비롯한 조각승들이 목조불상을 조성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17세기 전국에 걸쳐 크게 활약한 조각승인 청허의 조각세계를 연대적으로 이해하게하는 자료이다. 조각의 경향에서도 양감이 절제되고 고요한 상호,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가 돋보인다. 강직한 직선위주의 선묘, 주름표현 등에서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어 당시의 불상연구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불상의 재료는 은행나무인데 옛날에는 절을 창건할 때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훗날 불상을 조각할 때 그 은행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은 우선 크기에 있어서 높이가 1.58m이어서 위엄이 넘친다.등신대 크기의 황금빛 불상이 대좌 위에 앉아있으니 시선은 저절로 위로 우러러 보게 된다. 위엄을 갖춘 얼굴이지만 작은 이목구비가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손의 형태로 불교의 의미를 표현하는 수인은 깨달음의 순간을 알리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통견 법의와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지른 주름이 잘 드러나 있다. 1.2m 높이의 좌우 협시불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모두 화려한 보관을 썼다. 머리카락이 두 귀를 감싸면서 어깨 뒤로 내려 왔으며, 특별한 다른 장식은 없으나 우아한 모습이다. ◆수미단 부재이 절에는 또 하나의 문화재인 수미단이 알려져 있다. 불상을 모셔놓은 단을 불단 또는 수미단이라 한다. 이 명칭은 수미산(須彌山)에서 유래했다.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등록된 이 문화재의 명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5호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 . 1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수미단은 현재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잔존 부재가 명부전 수미단의 일부로 삽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반적인 수미단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지금 남아있는 부재는 원래 수미단의 1/5 혹은 그 이하의 양으로 추정된다. 조각기법 그리고 조각 면의 구성과 배치, 채색이 뛰어나 당시 불교 목조 공예품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목조삼존불을 안치할 때 지금의 명부전인 대웅전을 짓고 수미단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이 수미단은 한 단만 남아 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부재에 조각된 소재는 게·물고기·개구리 등의 동물, 연꽃·모란 등의 식물, 용·기린 등의 짐승들이다. 상상의 동물로 표현된 기린의 꼬리 부분은 비스듬히 하늘로 향했는데 붉은 색으로 외곽선을 칠하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도 달려 나가는 생동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색감도 근래에 덧칠한 흔적이 없어 고색이 완연하다. 정면 왼쪽 끝에는 검은색 게가 풀꽃 무늬 사이에 새겨져 있다. 앞면과 뒷면이 서로 뚫린 이중투각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입체감이 더욱 돋보인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목공이 혼신의 힘으로 칼질을 했을 것으로 느껴진다. 명부전을 나와 대웅전 뒤편 언덕을 오른다. 독성각,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래된 몇 기의 부도가 한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 앉아있다. 부도는 수행자의 마지막 흔적이며 뒤를 잇는 사람들에게 정진을 당부하는 무언의 상징이다. 부도에는 수행 승려의 사리가 모셔져있다. 부도에 피어난 거무죽죽한 이끼의 흔적과 한여름 동학산의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다. ◆승병의 훈련공간 경흥사는 임란 당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승병의 훈련공간이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승병들이 호국의 군사력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사명대사도 이곳에 머물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승병의 근거지인 밀양 표충사가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구릉지에 모셔져 있던 많은 부도들은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지금 남아있는 부도는 광복 이후 신도들이 수습해 보존될 수 있었다. 부도에는 각각 ‘해운당 치흠’, ‘금구당 선각’, ‘지월당 혜휘’ 같은 명문이 남아있어 주인을 알 수 있다. 거의가 별다른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종형 부도이다. 그래도 이 부도들은 그렇게 경흥사를 지키고 있다. 타고르의 신께 바치는 시, 키탄잘리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공간이다.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 당신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의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절을 떠나기 전에 보물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을 한 번 더 보려고 대웅전을 옆문을 열었다. 끊임없이 절을 올리던 사람도 없고 법당은 텅 비어 고요하다. 황금빛 불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누군가에게 절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절은 역사이고 문화이며 정신이니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천천히 불상을 바라보았다. 약간 살이 오른 얼굴 형상에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이다. 양쪽 입술은 살짝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문득 의심 한 덩어리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나무를 재료로 만든 것으로 이토록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나무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가. 부처는 제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참 모습이 왜곡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진리를 등불삼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했던 가르침은 바로 형상 그 너머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아차리라고 한 것이다. 다시 절집을 나와 이끼 낀 돌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간다. 잘 자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배웅해 준다. 목조불상의 세계를 보고나서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숨을 쉰다는 것을 알았다. 매미들의 긴 하모니도 들려온다. 여름이 깊어 간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