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상주 퇴강성당

상주시 조암산 자락 아래, 낙동강의 옛 물미 나루터에 자리잡은 ‘퇴강성당’.퇴강성당(경북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 398)이 상주의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늘 빠지지 않는 건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 때문만은 아니다. 선교사 없이 신자들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일 정도로 신앙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44명의 성직자와 15명의 수도자를 배출해 경북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요 거점으로 인정받는 등 명실상부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인 것이다.1956년 재건립된 퇴강성당의 본당과 사제관 건물은 지역 천주교회의 역사와 건축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히고 있다.지역 천주교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성당이라는 점과 고딕 양식으로 이뤄진 근대 건축물 등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경북 문화재자료 제52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퇴강성당 신자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시각으로 성당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종교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들 한다.한적한 시골마을에 붉은 벽돌로 뒤덮인 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퇴강성당을 찾아 떠나보자.◆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퇴강성당은 1903년 상주 사벌면 퇴강리 물미마을에 공소성당이 설립된 후, 1922년 본당으로 승격됐다.이후 신자 수가 줄어 다시 공소(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 및 천주교건축물)로 유지되다가 2003년 준본당으로, 2007년 본당으로 재승격됐다.특이하게 해외 선교가 아닌 마을 주민들이 자진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본당으로 정식 승격됐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초창기 천주교 유입과 닮아있어 지역 주민들이 갖는 천주교 신앙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도 성당 인근 마을 주민의 80% 이상이 성당을 찾고 있다.퇴강성당의 출발점은 1899년.당시 퇴강마을 주민 3명인 김운배(세례명: 호노리오), 김종록(세례명: 클레멘스)와 최면집(세례명: 말딩)은 가실 본당 문경 공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이후 마을의 친지와 가족, 이웃들에게도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자연스레 마을 이름을 딴 ‘물미 공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1930~1940년에는 본당과 관할 공소 천주교 신자만 1천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하지만 1968년 안동교구 함창성당 관할 공소로 예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경제 개발과 산업화로 인한 이농 현상으로 신자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게 되면서다.현재 퇴강성당은 대략 300~400명의 신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전체의 40%에 육박하는 고령화 본당이 돼가고 있다역대 본당 신부로는 1922년 본당의 제1대 신부인 이종필(마지아) 신부를 시작으로 제2대 이성인(야고보) 신부, 제3대 정수길(요셉) 신부를 거쳐 현재에는 제12대 박재식(토마스) 신부(2013년~현재)가 주임 신부로 임하고 있다.2007년 본당으로 재승격한 후 3명의 수녀를 배출했다.제1대 정요한(황아가다) 수녀, 제2대 최아가다(이발바라) 수녀, 제3대 고재노베파(김베드로) 수녀다.◆고딕 양식의 근대 건축물퇴강성당은 지역 천주교회 건축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무엇보다도 1950년대부터 본당과 사제관이 잘 보존돼 있어 근대 건축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특히 본당은 높은 첨탑을 상징하는 12세기 이후 중세 서유럽의 건축 양식인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건립돼 수직 효과를 강조했고 천국에 닿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소망을 잘 드러내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지역 명소로도 유명하다.첨탑 뿐 아니라 성당 본당 건물은 입면과 평면 구조물이 독특하다.외벽은 콘크리트 기초 위에 벽돌을 쌓은 ‘영식 쌓기’를 이용해 고딕 양식을 잘 표현했고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내각이 모두 직각이면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의 ‘단랑식’(측량을 없앤 폭 넓은 구조)으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줄기둥의 아케이드(기둥으로 지탱하는 아치 또는 반원형의 천장 등을 연속해 건축한 구조물) 천장도 근대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운 멋을 뽐내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본당 남쪽 정면의 주 현관 바로 앞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성모 마리아상을 기준으로 현관을 바라보면 첨두형 아치 형식(예각으로 이뤄진 아치로 고딕식 아치형 천장의 특징)의 주 출입구가 눈에 띈다.또 부 출입구에는 나르텍스(초기 기독교 시대 성당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좁고 긴 현관)가 위치해 본당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세례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회개하러 온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나르텍스 중앙 상부에는 8각의 첨탑을 둔 1개의 종탑이 있다.삼종기도(오전 6시, 낮 12시, 오후 6시)를 알리기 위해 쓰이는 종탑은 평소 전등을 달아 야간에도 성당 건물을 비추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종탑의 유‧무에 따라 성당의 빛 공해도가 달라질 정도다.본당의 창문도 붉은 벽돌을 이용해 반원형 아치 형식으로 장식됐다.벽면의 플라스터(석고, 회반죽, 흙 따위를 물로 개어 바르는 데 쓰는 재료) 기둥 사이에 벽돌을 이용한 인방(창, 출입구 등 벽면 개구부 위에 벽을 지지하는 나무 또는 돌로 된 수평재)과 창문틀을 만들어 창을 달았다. 건축물의 상부 무게를 버티면서 멋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겠다는 의미다.스테인드글라스(색판 유리조각을 접합시키는 방법으로 채색한 유리판) 유리창도 고딕 양식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특별한 유물과 관광 자원이 있지 않더라도 건축물이 주는 모던함과 감각적인 조형미, 웅장한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당의 전형을 퇴강성당은 갖고 있는 것이다.◆퇴강성당의 정신을 이어가다퇴강성당의 주보성인(가톨릭 신자 개인 또는 단체나 성당을 보호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수호자)은 ‘성모 마리아’다.퇴강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죽은 후 육체도 영혼과 더불어 승천했다는 가톨릭의 교의(성모승천)를 믿으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퇴강성당의 정신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에서 숨지고 땅에 묻힐 때까지의 수난을 기억하는 14처의 기도에서 엿볼 수 있다.본당을 지나 성지순례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14개 비석으로 이뤄진 14처가 보인다.신자들은 이 곳을 순서대로 돌며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가 주는 역경을 기념하며 묵상을 하거나 ‘주모경’(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기도를 한다.1999년 퇴강성당 신자들은 천주교 봉도전교 100주년 기념비를 설립하며 선대들이 이어 온 천주교 신앙을 되새겼다. 100년 전 하느님의 백성이 된 선대 신자들의 영세 기념을 통해 하느님을 봉도하게 된 큰 은총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다.이들이 전하고 싶은 퇴강성당의 정신은 이 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교회의 역사와 과거의 신앙적 역할을 알리고 성당을 미래의 성지로 개발하는 등 진실된 신앙생활을 통해 신자들 간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2012년 성당 내 낡은 교육관을 허물고 새로운 교육관을 재건축할 때도 전문 기술이 필요한 요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공사를 신자들의 손으로 직접 해냈다는 점에서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마음이 평소 신자들의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또 2014년부터 상주시와 함께 어르신 사랑방학교와 시골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주민들과 소통하고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일하는 종교의 모습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그래서일까. 퇴강성당에 대해 신자들이 만나자마자 얘기하던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말 속에는 성당이 발원할 때 신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지역사회와의 공존이 과거의 시각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하늘의 모후여, 우리를 보호하소서’라는 천주교 신앙의 토대가 조용하지만 힘있게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것도.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흥암서원

흥암서원여름철이어서 서원 마당은 잡초들로 붐볐다. 여름철이어서라기보다는 서원을 돌보지 않은 무관심이 잡초를 불러들였다고 해야 옳겠다. 들판에 자생하는 풀들이 채소밭을 침범하면 그 이름이 잡초로 바뀐다. ‘풀’이 ‘잡초’로 이름이 바뀌어 지는 순간 그것은 제거돼야 할 몹쓸 처지가 된다. 채소밭을 뒤덮은 잡초들이 그러하듯이 서원의 뜰에 붐비는 잡초들은 선비의 고적한 기운을 해친다. 잡초들로 붐비는 일상, 잡초들이 들끓는 정치로부터 민족사의 비극은 시작된다. 날뛰는 잡초들의 소음이 견디기 힘들어 뉴스 채널을 끄고 사는 나날이었다. 맥 빠진 민초들은 미스터 트롯으로 마음을 달래는 날들이었다. 흥암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61호)을 찾았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흥암사, 진수당, 집의재, 의인재, 어필비각 등 경내 건물을 가진 흥암서원(상주시 연원동 769번지)은 숙종 28년(1702년)에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흥암사는 동춘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팔작지붕의 진수당은 강당, 집의재와 의인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였다. 어필비각 안에는 숙종이 지어준 ‘흥암서원(興巖書院)’이라 새긴 비가 있다. 찾는 이의 발길도 없고, 좁은 농로 한 끝에 방치된 듯 스산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대원군의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곳이었다. 동춘당 송준길은 누구인가? 그가 잡초로 들끓는 오늘의 세태를 향해 던지는 역사적 가르침은 무엇인가? 조선조 후기 문신이었던 송준길(1606~1672년)은 효종 때 판서를 지낸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 당색은 서인, 율곡 이이를 사숙한 기호학파의 중심이었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었다. 장인이기도 한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해 퇴계학맥을 이은 그를 사표로 받들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릴 만큼 당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분이다. 광해군의 난세에 등을 돌리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효종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발을 딛는다. 1649년 즉위한 효종이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였다.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돼 집의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는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준길은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한다. 침략만 받아온 조선의 역사임을 상기할 때, 그 성패와 상관없이 ‘북벌’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 찡한 바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효종의 북벌론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이었다.◆삼전도의 치욕 아직도 남아1637년 1월 조선은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남한산성에서 끌려나온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바닥에 머리를 찧는 예를 행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다.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간다. 1645년 2월이었다. 청국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국과의 화친을 주장했고, 차남인 봉림대군은 청과의 전쟁을 주장한다. 청 태종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는 자신을 ‘화살을 맞은 새’라 자탄하며 청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칠 때였다. 효종은 소현세자를 멀리하고 경계한다.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원손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한다. 임금으로 즉위한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의 인물을 등용, 북벌을 준비한다.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의 군사력을 정비하고, 이완을 대장으로 어영청군을 크게 증가시킨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 송준길 등을 등용해 군비를 확충한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을 씻으려는 북벌계획은 효종의 승하와 함께 수포로 돌아간다.후대의 논객들이 지적하듯이 효종의 북벌론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만주 벌판을 달리려 한 허황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성 없는 지배계층의 지속된 북벌의식은 청나라 문화의 유입을 막아 정치적 쇄국주의, 문화적 폐쇄주의를 낳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전도의 역사적 치욕을 씻으려는 자세와 정신, 국격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 했던 당당한 북벌의지마저 폄하돼서는 안 된다. 서원 뒤뜰의 잡초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무성했다. 담당 관청에게 까닭을 묻는다면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뻔한 대답을 들려줄 것이었다. 그렇게 방대한 추경예산으로 왜, 문화재 앞뒤 마당 잡초 뽑는 일자리는 늘리지 않는가. 길가 휴지 줍기보다, 가로등 소등하기보다 조상의 얼을 지키는 일이 하찮다는 말인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돈과 밥과 권력과 무관한 일에는 침묵해도 좋은가. 위대한 침묵도 있고 비열한 침묵도 있다. 죽을 때까지 묵언 수행하는 수도사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의 제목은 Into Great Silence이고, 한 시인이 신군부시절 지식인들의 비굴함을 풍자한 침묵은 ‘침을 퉤퉤 뱉어 만든 묵’이다. 신문 기사를 옮긴다.북한의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이날 ‘옥류관 주방장 오수봉’이 쓴 글을 내보냈다. 오수봉은 “평양에 와서 우리의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에 오늘은 또 우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으니 이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그 더러운 똥개무리들(탈북민 단체)과 그것들의 망나니짓을 묵인하며 한 짝이 되여 돌아친 자들을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조선비즈 2020.06.13.) 국민들의 마음에 오물을 끼얹은 모멸적인 언동에 왜 침묵하는가. 하찮은 주방장 말쯤이야… 전략적 차원의 위대한 침묵인가. 꼬리를 감추는 비열한 침묵인가. 안타깝고 딱하다. 안타깝고 딱한 오늘의 시점에서 효종의 북벌의지를 바라보니 그것이 한갓 계란으로 바위 치는 허황된 꿈이었다 하더라도 그날의 꿈은 당당했으므로 숭고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민(安民)과 내치(內治)가 먼저이고, 안민과 내치의 근본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격군심(格君心)에 있다는 송준길의 주장은 탁월한 바 있다.송준길은 존명배청(尊明排淸)과 복수설치(復讐雪恥) 운동을 추진한다. 현실을 직시한 송준길의 북벌운동은 허황한 꿈에 앞서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조선은 수년간 지속된 대기근과 청의 대약진이라는 악조건 속에 처해있었다. 이에 송준길이 추진한 현실 정책은 외양에 앞서 내수를 다지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이었다. 내치(內治)는 외양(外攘)의 근본이고, 치병(治兵)은 안민이 우선이라고 했다. 내수의 핵심은 양민(良民)과 격군심(格君心)이었다. 송준길은 군주의 덕성함양과 심성수양이 곧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백성의 마음, 임금의 됨됨에 달렸다는 것이었다.◆북벌 진출의 한을 남긴 채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송준길의 죽음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늘도 안타까워, “이날 붉은 기운이 하늘로 솟고 그 빛이 땅을 비추니 길을 가던 사람이 바라보고는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는데, 와서 보니 선생이 막 운명하였다. 이해 10월 성관(星官)의 ‘소미성이 동방에 떨어졌다.’라는 발언이 있었는데, 권상하는 송준길의 죽음이 바로 성관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고 애석해 하였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잡초 북적이는 흥암서원을 나서며 ‘격군심(格君心)’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격군심이라는 말이 구한말 이 땅을 찾았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를 불러내었다. 강자 앞에 굽실대는 조선인들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했던 비숍이, 러시아 자치구 프리모스키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당당한 삶의 현장을 만난 뒤에는 자신의 생각을 고친다. “정부가 부패하지 않고 잘해주기만 한다면,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우수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정부를 거꾸로 읽으면 부정(不正/不淨)이 된다. 당당하지 못한 정부는 거꾸로 된 정부이다. 당당한 국민이 당당한 정부와 당당한 역사를 만들고, 당당한 정부가 당당한 국민과 당당한 역사를 만든다. 아무리 물러서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효종의 북벌의지, 동춘당 송준길의 북벌운동은 당당했으므로 아름다운 민족사의 한 획이었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연 이사장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대구 건축자원 스토리 담긴 대구 건축문화기행 상품 개발

대구시와 대구관광뷰로는 대구의 천년 역사를 품은 3대 문화(신라·가야·유교) 건축자원을 활용한 관광콘텐츠를 개발하고 코로나19로 지친 관광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16일 대구시에 따르면 관광콘텐츠는 3대 문화권을 아우르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대구의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즐긴다는 의미로 ‘천년 대구를 거닐다’로 이름 붙였다. 대구 내 산재한 3대 문화의 건축 자원과 자원에 담긴 스토리를 결합해 몰입도를 높인 스토리텔링형 건축기행이다.핵심코스 3개, 보조코스 9개로 구성돼 있으며 단순한 건축물 관람이 아닌 관광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코스로 구성했다. 대구시는 3대 문화권 코스개발과 함께 건축문화기행의 3가지 테마에 맞는 12개의 코스 소개하는 대구여행 정보가 함께 수록된 ‘천년대구를 거닐다’ 안내용 가이드북을 제작했다. ‘천년 대구를 거닐다’ 상품 운영 시 활용될 전담 해설사 양성 교육을 진행한다.건축학회나 건축학과 학생 등 고건축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팸투어를 실시하는 등 하반기 시범투어를 거쳐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품을 운영할 예정이다. 대구시 박희준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코로나19로 지친 관광객들이 대구의 건축문화기행과 함께 천년 대구를 거닐며 잠시 잊었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김광석스토리하우스에서 화재…김광석 유품 불에 타

대구 출신 가수 고 김광석의 유품이 있는 전시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8분 만에 꺼졌다. 9일 대구 중부소방서에 따르면 지난 8일 오후 9시29분께 중구 대봉1동에 있는 김광석스트리하우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로 건물 1층 내부 65㎡와 에어컨, 진열장 등이 타 530만 원(소방서 추산)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김광석이 생전에 사용했던 소파와 탁자 등도 훼손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발화지점 위쪽 전등선에 약간의 단락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등 전기적 요인으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의뢰 등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다.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안동 함벽당

함벽당(涵碧堂)은 안동시 서후면의 산골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정자이다(경북 문화재자료 제260호). 천등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절집인 개목사를 바라고 산길을 올라가노라면, 길섶에 동남쪽을 향해 두어 길 높이의 막돌로 쌓은 석축이 보인다. 그 석축 위에 조성된 대지에 함벽당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높다란 석축으로 말미암아 정자가 마치 누각처럼 보이기도 한다.서쪽으로 난 작은 사주문(四柱門)을 지나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정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T’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뒤편에 3칸의 온돌방 2개를 배치하고 가운데 칸 앞으로 2칸의 대청을 앞으로 길게 뽑아 놓았다. 평난간을 두른 우물마루 대청을 맞배지붕이 덮고 있다. 보통 정자에서 흔히 보이는 건축적 장식이 거의 없고, 사용된 목재 또한 우람한 맛이 없다. 그저 작고 소박하다는 느낌만 줄 뿐이다. 화려함을 경계했던 정자를 세운 사람의 의도가 엿보인다. 함벽당은 세 번에 걸쳐 주인이 바뀌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조선 명종 때의 절충장군 강희철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 마을 가야촌에 살면서 처음으로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함경당(涵鏡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외손자였던 북후면 도촌에 살던 옥봉 권위(1552~1630)가 정자를 물려받았다. 이 무렵 매원 김광계(1580~1646)가 인근의 봉정사를 유람하다가 함경당에 들러 친구로부터 주식(酒食)을 대접받은 일화가 그가 쓴 ‘매원일기’에 남아 있어, 함벽당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그 후 함경당은 이 마을에 살다가 문과에 급제해 내외 관직을 역임하고 귀향한 류경시(1666~1747)의 소유가 돼 후학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장소로 이용됐다.다만 당호가 함경당에서 함벽당으로 바뀐 까닭은 이렇게 전해진다. 함경당의 새 주인이 된 류경시는 주위 사람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새로 당호를 짓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양 주실에 살던 외종형인 옥천 조덕린(1658~1737)이 그를 항상 “함벽주인(涵碧主人)”이라 칭했고, 문생과 후학들도 류경시를 “함벽선생(涵碧先生)”이라 부르면서 정자 명칭이 어느덧 함벽당으로 정착됐고 또 류경시의 아호(雅號)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현재의 건물은 창건 당시인 17세기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류경시가 작고한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62년(철종13)에 대대적으로 중건했음이 건축 수법이나 ‘중건기’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온통 천지가 짙푸른 녹음 속에 묻혀 있는 이즈음에 함벽당 난간마루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푸르름 속에 잠겨 있는 집”이라는 당호가 가진 의미가 저절로 깨우쳐진다. ▲류경시과 함벽당 둘러보기함벽당의 주인 류경시는 관향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흠약(欽若), 호가 함벽당(涵碧堂)으로 전주류씨 세거지인 안동 무실(水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집이 가난해 솔방울에 불을 붙여 밤새 책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니 세숫물이 먹물처럼 까맸다거나, 개목사에 들어가 ‘맹자’를 읽었는데 방에서 나와 주변의 나뭇잎을 보았더니 거기에 맹자의 글이 모두 쓰여 있더라는 일화 등이 그것이다. 아호가 천태공인 할아버지의 권유로 안동 풍산에 사는 고산 이유장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후일 강원도 원주의 우담 정시한과 안동으로 돌아 온 갈암 이현일을 찾아가 학문을 물은 바가 있어, 그들의 문인록(門人錄)에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류경시는 1694년(숙종20)의 갑술환국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후, 폐서인이 돼 쫓겨났던 왕비 민씨(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했음을 기념해 시행된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들게 됐다. 내직으로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사, 평안도사를 거쳐 용강현령, 한산군수, 풍기군수, 양양부사, 순천부사를 지냈다.그는 관료로서 생활하는 동안 특히 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일화 한두 가지만 소개해 두고 싶다. 황해도사로 부임했을 때 장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 아들이 이번에 시행되는 도회시(都會試)에서 합격할 수 있게 해달라며 꿩을 뇌물로 바치자, 그를 잡아 장형을 내리고 아들은 응시를 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소문이 알려져 평안도사로 재임 중에 평안도의 문교행정을 관찰사로부터 전적으로 위임받았는데, 강서현령 윤순이 도회시 고시관으로 참여했다가 “이번 시험에는 사적으로 청탁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이 모든 것은 공의 공정함과 염치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아빠찬스’라는 말로 빈정대며 분개해 마지않는, 자식의 좋은 학교 진학을 위해 각종 부정을 꺼리지 않았던 어느 장관 역임자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회 기득권층의 얼굴 두꺼운 표리부동함과 불공정성과 비교할 때, 공의 이런 일화는 한여름의 시원한 샘물 같은 청량감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는 특히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후일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다.용강현령으로 재임 중의 일이었다. 용강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교통로로서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재물을 비축해 두는 지칙고(支勅庫)가 두어져 있어, 거기에 은전 수만 꿰미가 비축돼 있었다. 이전의 현령들은 이를 유용해 백성들에게 고리로 빌려주거나 장사 자금으로 전용해 사복(私腹)를 채워왔다. 그러나 류경시는 그런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녹봉에서 엽전 8천 꿰미를 내놓아 믿을만한 읍내 사람 8명을 뽑아 관리하게 해 지척고의 부족분을 메꾸었다. 뒷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현명(1690~1752)이 그의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참으로 큰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엽전 2천 꿰미를 더 보태어 백성들을 도왔다고 한다. 조정으로 복귀한 조현명은 뒷날, 류경시를 ‘당금(當今) 제일의 목민관’이라 일컬었다고 전한다.◆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을 높여한편 그는 ‘문무겸재(文武兼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가 양양부사로 부임할 당시 강릉에서 양양에 걸친 일대에는 도적떼가 크게 번성해 조정의 큰 우환거리였다. 새로 부임하자 말자 그는 적당들이 여파령(黎婆嶺)에서 대관령(大關嶺)에 걸친 산중에 소굴을 마련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강릉태수와 힘을 합쳐 도적들을 소탕했다. 먼저 화전민 몇 사람을 포섭해 그들로 하여금 적당들을 회유하게 하는 계교를 써서 결국 적당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러나 토벌 후에는 괴수 몇 사람만 처형하고 원래 양민들인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양민이 되돌림에 그 후 강양 일대가 평안해졌다고 한다. 학문에만 뛰어난 문신이 아니라 군사 운용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28년(영조4) 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으로부터 기호지방 병영에도 이를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라는 명이 떨어졌다. 잠시 금강산 유람을 떠났던 그는 즉시 양양으로 복귀해 군기를 보수하고, 군사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태평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진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류경시는 밤에는 ‘육도삼략’과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병서를 강론하고, 낮에는 훈련을 시켜 5일이 지나자 제법 군용을 갖추게 됐다. 이를 직접 목격한 승지 이휘진과 정언 최규태 등이 “류공은 가히 문무겸재라 이를만하다.”라고 찬탄했다고 한다.이렇듯 함벽당은 얼핏 소박하고 자그마한 정자 건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함벽당 류경시 선생의 맑은 정신이 깃들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답사 당일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함벽당 11대 종손 류건기(91)옹은 여전히 꼿꼿한 유자(儒者)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해 받은 류옹의 문집격인 ‘성헌만록(誠軒漫錄)’에 실린 각종 문장을 음미하면 유자의 풍취가 가슴에 아련히 와 닿는다. 또 선대 종손인 농포공도 퇴계학맥을 이은 근대의 선비⋅학자로서 문집인 ‘농포문고(農圃文稿)’와 1909년부터 1951년까지 40여 년 간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보며 기록한 일기인 ‘농포일기(農圃日記)’를 남겼다. 이문기 경북대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청도 운문사 비로전

코로나19로 일상생활이 바뀐 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오면서 땅에는 새싹이, 나무에는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봄 풍경, 정취를 느껴볼 틈도 없이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마스크처럼 답답한 연속의 나날이다.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청도 운문사로 향했다. 대구에서 가까우면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다.수헌(壽軒) 이중경(1599~1678)이 쓴 오산지(鰲山志)에 따르면 청도는 예로부터 ‘산과 시내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길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산천청려, 대도사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그 말 그대로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운문댐을 지나 구비진 길 사이사이엔 신록의 짙푸름이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신록 속에 가라앉은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맡아보는 자연 그대로의 공기인지. 적어도 이곳에서 코로나19는 먼나라 이야기임을 새삼 느낀다.차를 멀리 주차해놓고 운문사까지 걸어갔다.주차장에서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어린이들도 쉽게 걸어갈 수 있을만큼 쉬운 길이다.여느 사찰과 달리 계단이 많지 않다. 천천히 걸으며 절로 향하는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스스로의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보라는 부처님의 뜻이 아닐까. ◆비로전운문사에 도착하자마자 비로전으로 향했다.보통 대웅보전이 사찰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운문사의 경우 비로전이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로전은 1105년(고려 숙종 10년) 운문사 제3중창주인 원응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불전이다. 1985년 보물 제835호로 지정됐다.현재 건물은 2006년 해체 수리 당시 종도리에서 발견된 ‘순치십년계사구’에 상량했다는 묵서명을 통해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종도리 묵서명과 함께 발견된 ‘운문사 법당 기문’과 ‘건륭 삼십팔년 계사 유월 십삼일 대웅전 중집기’, ‘불기 이천구백육십이년 대웅전 중집약기’ 등을 통해 1653년 중창한 이유와 그 후의 중수 사실도 알 수 있다.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 불전으로는 큰 규모에 속한다. 기단은 크고 작은 자연석에 진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이용해서 마무리한 혼합식 기단이다. 양 측면과 정면에는 4면의 장대석 디딤돌을 이용해 계단을 마련했고 정면 계단 좌우에 해태 두 마리를 두었다.기단 위에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주춧돌인 덤벙주초를 놓고, 외진주(바깥기둥) 12기와 내진주(안둘렛기둥) 2기 등 총 14기의 기둥으로 평면을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의 어칸에는 5짝 분합문을 달고 협칸에는 4짝 분합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2짝 분합문을 두었다. 배면의 좌우 협칸은 쌍창으로 구성하고 어칸에는 2짝 분합문을 달았다. 다른 창살이 격자무늬인 것과는 달리 전면 어칸 창살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비로전에 들어가 보니 ‘#덕분에 챌린지’를 하고 있는 듯한 불좌상이 눈에 띈다. ‘덕분에 챌린지’는 코로나19로 힘쓰고 있는 의료진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캠페인의 일종이다.한 눈에 보아도 흔히 알고 있던, 그동안 봐 왔던 부처님의 모습과는 다름을 알 수 있었다.바로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비로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불상으로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며 ‘진신’ 또는 ‘법신’이라고 한다.소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210㎝ 무릎 너비 152㎝로 중형 규모다. 머리는 나발에 중간 계주와 정상계주를 표현했다. 상호는 반쯤 뜬 눈에 오똑한 콧날, 꽉 다문 입술을 표현해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수인은 가슴까지 들어 올린 후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을 취했으며 다리는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좌상의 가부좌 형식에서 일반적인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오른발을 왼발 앞에 놓아 반가좌의 자세를 취했는데 이런 자세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둑도 가치를 알아본 탱화소조비로자나불좌상 뒤로 탱화가 눈에 들어온다.비로전에 봉안돼 있는 후불탱인 ‘비로자나삼신불회도’다.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1755년 임한을 수화사로 19명의 화승이 제작했다. 현재 보물 제1613호로 지정돼 있다.삼신불회도는 법신 비로자나불과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표현했다.화폭이 가로 520㎝, 세로 460㎝로 큰 규모에 속한다.화면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됐다.중앙에는 삼신불, 하단에는 협시보살과 사천왕, 상단에는 설법을 들으려는 십대 제자와 성중들이 표현돼 있다. 비로자나불 좌우로는 문수·보현 보살이 협시로 배치됐으며 하단에는 좌우 3위씩 총 6위의 보살이 자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로자나불 아래 양쪽 각 4위의 보살이 대칭을 이루어 중앙에 집중된 모습이다.또 상단에는 오색구름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는 타방불이 내려오는 모습이 표현됐다.비로자나삼신불회도가 가진 가치는 큰 규모에 속하는 탱화임에도 잘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특히 이 삼신불회도는 존상의 배치 외에 도상적, 구도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삼신불회도의 경우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각각 한 폭의 그림으로 구분해서 그리는 경향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 삼신불회도는 한 폭에 법신, 보신, 화신의 설법 장면을 모두 묘사했다. 이로써 19세기 한 폭에 그려지는 삼신불회도의 구도가 완성되지 이전 형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이처럼 비로자나삼신불회도의 가치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먼저(?) 알아봤다.때는 1940년대 여름. 당시 한 스님이 아무리 잠을 자려고 해도 잠에 들지 못했다. 결국 새벽 2시께 툇마루에 잠시 앉아 있기로 했다. 그런데 비로전 안에서 수상한 불빛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수상함을 느낀 스님이 비로전으로 발걸음 했고 도굴꾼들이 탱화를 떼어 내려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른 스님들을 깨워 도굴꾼을 내쫓았다.문화재보호법이 없던 시절인 1940년대에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판을 쳤다. 스님의 불면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지금도 운문사에서는 이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꼼꼼하게 보아야 보인다비로전을 방문했다면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다. 가치 있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아무 생각 없이 비로전에 들어갔다면 소조비로자나불좌상과 탱화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절에 온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구석구석 살펴볼 필요가 있다.누구에게 충고를 하랴. 나 역시 고봉 스님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숨겨진 보물을 눈앞에 두고 못 찾았을 것이다.소조비로자나불좌상 뒤로 작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부처님께 절을 올리기 전 오른쪽 어깨가 불좌상 쪽으로 향하도록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기 위해 마련됐다. 도는 이유는 ‘인도의 전통예법’에 따라 존경하는 대상에 대해 오른쪽 어깨를 보이는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보통 오래된 사찰은 십중팔구 불좌상 뒤로 공간이 있다.비로전 후불벽 뒷면에 서면 나란히 앉아 있는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가 보인다. 이 벽화는 보물 제1817호로 지정돼 있다. 화면이 크기는 세로 290㎝, 가로 524㎝다.후불벽 뒷면에 관음보살도가 있는 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여수 흥국사 대웅전, 순천 동화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등 10여 점이 알려져 있다.하지만 관음보살과 달마대사가 한 벽면에 나란히 표현된 것은 운문사가 유일하다.화면 오른쪽에 그려진 관음보살도는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백의관음, 선재동자, 정병, 청조, 청죽 등으로 이뤄진 화면 구성은 전형적인 보타락가산이 배경인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준다.화면 왼쪽에는 험준하게 중첩된 암산의 깊은 암굴에서 수행하는 달마대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 수행했다는 일화를 실재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이 벽화는 두 가지 다른 주제를 한 화면에서 다루지만 관음보살의 보타락가산과 달마대사의 소림굴이 단절된 공간이 아닌 하나로 연결된 공간임을 강조한 구성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다시 소조비로자나불좌상 앞으로 왔다.그러니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인형이 보인다. 불단 서쪽 천장 아래에 반야용선에 오르기 위한 ‘청의동자’가 그것. 반야용선은 중생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반야용선이 출발할 때 한발 늦은 보살에게 사공이 밧줄을 던졌고 청의동자가 붙잡고 배에 오르려고 한다.청의동자와 반야용선을 누가 천장 아래에 매달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무 상태를 봐서 100~200년 전으로 추정할 뿐이다.운문사 비구니들은 청의동자를 ‘악착보살’이라고 부른다.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악착같이 올라가고 수행을 위해서는 악착같이 참아야 한다는 뜻에서다.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에 갈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을 다다르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전 세계가 코로나19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지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반야용선에 오르려는 청의동자처럼 우리 스스로 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해 힘든 현재 상황을 조금 더 참고, 생활 방역을 철저히 한다면 코로나19 사태도 어느 순간 종식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달서구 곳곳서 도시재생 뉴딜사업 추진

대구 달서구가 올해 하반기부터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침체되고 있는 죽전동과 송현1동이 대상지며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도시재생 사업이다. 죽전동은 지역적 명칭을 중심으로 한 골목상권 살리기를, 송현1동은 사람을 주제로 한 노후 환경 개선이라는 각 특징을 설정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21일 대구 달서구청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340억 원을 투입, 죽전동 ‘죽전 대나무꽃 만발스토리’와 송현1동 ‘든·들 행복빌리지 조성사업’을 진행한다. 죽전동 뉴딜사업은 오는 7월 착공 예정인 거인나라 어린이공원의 리모델링부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춘추공원 등 2곳의 공원에 친환경적인 요소들을 담아 정비한다. 달서구청은 사업을 통해 건물주, 임차인과 3자간 상생협약을 맺고 기업 경영 지원과 같은 지역 골목상권 살리기에도 나선다. 또 사회적기업의 육성과 지원 역할을 하게 될 사회적경제지원센터도 조성하며, 죽전네거리에서 서대구 KTX역 가는 방향으로 604m의 특화거리 ‘파죽지세길’도 만든다. 송현1동 뉴딜사업은 사람에 중점을 둔 노후 환경 개선이 핵심이다.송현공원(송현동 240번지 일원) 주변 8만4천500㎡ 부지를 대상으로 추진하며 예산은 170억 원이다. ‘든·들 행복빌리지 조성’은 나이 ‘든’ 사람과 나이 ‘들’ 사람이 함께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의 사업이다.다음달 12면 규모의 마을주차장 조성 공사를 시작으로 단계별 뉴딜사업을 진행한다. 든·들행복주택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창년창업공작소, 시니어공동작업장이 새롭게 마련된다.마을협동조합이 운영하게 될 든·들C(문화)센터와 어르신의 여가를 위한 든·들S(시니어)센터도 들어선다. 달서구청은 또 지난해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모에서 탈락한 상인3동의 뉴딜사업을 보완해 오는 7월 재도전한다. 달서구청 김철균 도시재생과장은 “죽전동은 소규모 상권을 살리는 데 집중하고, 송현1동은 노후된 시설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원활한 부지 매입으로 달서구 내 뉴딜사업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사업을 통해 주민이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경주남산연구소 삼국유사 찾아가는 길 가이드북 펴내

경주남산연구소가 경주 남산의 삼국유사 유적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을 제작, 배부한다.경주남산연구소는 삼국유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산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현장을 편리하게 답사할 수 있도록 가이드북 ‘경주남산 삼국유사 찾아가는 길’을 제작했다.이 가이드북은 나정과 창림사지, 오릉, 월정교, 인용사지, 도당산, 천관사지, 남산신성, 서출지, 헌강왕릉, 포석정, 삼화령 등 20여 곳을 소개한다. 27쪽 분량이다.경주 남산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신라의 탄생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역사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이 가이드북은 경주 남산을 등반하는 입구 안내소에 비치하고 남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한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남산은 불교유적의 보고이자 신라인들의 영산이며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며 “선조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라 소개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6) 고령 관음사 신중도

괴질이 지구촌을 뒤덮어 기본적인 사회시스템 마저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병고로부터 속절없이 고통을 받게 되면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게 된다. 바로 지금이 종교에 관계없이 명상과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기독교의 성화나 사찰의 불화도 경배의 대상이 된다. 신중도(神衆圖)라는 불화의 형태가 있다. 예로부터 절 집 내부 벽면에 가장 많이 장엄되고 있다. 신중도는 말 그대로 여러 신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불교 발상지 인도에서는 이미 여러 종교가 있었는데 그들의 신은 불교와 다투는 대신 부처님을 지키는 호법신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유입되면서 원래 있던 토착 신앙을 흡수하게 되는데 산신과 용왕, 칠성이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모든 제신들이 불화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신중도는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교류한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그림이다. 신중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구촌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불교적 메시지나 지혜라도 찾아보려는 것이다.◆안정된 구성과 섬세한 기법의 고령 관음사 신중도지난해 3월25일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관음사 신중도’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3호로 지정됐다. 1908년 금어(金魚)인 원일(圓日)과 진규(眞珪)에 의해 제작된 화면 119.8×112.2㎝ 크기의 불화이다. 금어는 불모(佛母)라고도 불리며 불화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이 불화는 하단의 붉은 색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자, 봉안처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처음 조성 당시의 사연도 적혀 있다. 원래 해인사 백련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했었다. 함경남도에 사는 박씨라는 여 신도가 세상을 떠난 남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단독시주했다. 안정된 구성과 섬세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후기 불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문화재청은 기록하고 있다.고령 관음사에는 신중도 외에도 2점의 문화재가 더 소장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2호 ‘아미타여래도’와 2017년 5월2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84호로 지정된 관음사 칠성도이다. ‘아미타여래도’는 신중도와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고 동시에 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됐다. 이 불화는 관음사의 주불전인 관음전의 후불화로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이 서방 정토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화면의 정중앙에 아미타여래가 연화대좌에 앉아 있으며 좌우 협시로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4위가 유희좌 형식의 자세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유희좌는 한쪽 다리는 세우고 다른 한쪽은 대좌 아래로 내려뜨린 자세를 말한다. 그 뒤 편으로 가섭, 아난, 지장보살을 포함한 4위의 보살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아미타여래의 배경으로 법신에서 퍼져 나오는 오색파장의 광채가 화려하고 아름답다.칠성도에 대하여 문화재청은 화기를 통해 1892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 제작자, 시주자 등 제작체계와 후원자를 알 수 있어 이 시기 불화 연구에 있어 기준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이 칠성도는 인물의 얼굴과 옷주름 등에 명암법을 도입하여 입체적인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고 했다. 병풍을 배경으로 마치 단체 사진 찍듯 존상들을 배치한 형식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기록했다.마스크를 단단하게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색채의 연등들이 절 집 마당에 가득 걸려있는 고령 관음사를 찾았다. 현재 당우로는 정면의 관음전을 중심으로 칠성각과 산신각, 천불전, 범종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1911년 합천 해인사의 포교당으로 창건되었고 1956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관음사에서도 대한불교 조계종의 방침에 따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및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정진’이 진행되고 있다. 한달 동안 전국 1만5000여 사찰에서 진행되는데 회향식은 5월30일(음력 윤달 4월8일) 열린다.인적 없는 관음전에 올라 삼배를 올리고 신중도 앞에 섰다. 불단 우측 벽면 유리 액자 속에 장엄되어 있다. 합장하고 고요히 바라보니 그 속의 신중들이 일제히 깨어나 웅~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극적인 순간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1백 년 전, 한 화승의 지극 정성이 있었다. 작가들은 매일 목욕재계하고 항상 깨끗한 옷을 입으며 말도 하지 않는 등 철저한 계율을 지켰고 법식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수행의 연장으로 색채 작업을 했으며 이를 바라보는 신도들에게 환희심을 느낄 수 있는 불화로 완성시켰다. 경전에 나오는 여러 보살과 수호 신장들을 그린다고 해서 형상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 그려내야 한다.관음사 신중도에는 황금투구를 쓰고 금강저를 든 ‘위태천(韋太天)’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뒤편으로는 역삼각형 구도로 좌측에 범천, 우측에 제석이 배치돼 있다. 주변으로 천녀와 천동, 일천·월천대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 하단에 무장한 천룡팔부 신중 4위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그런데 이 신중도의 중심인물인 위태천은 질병 퇴치를 담당하기도 하는 신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코로나가 불러온 거리두기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리스 신화처럼 재미있는 스토리가 연결된다.◆하루빨리 괴절이 사라지길 기원하며위태천은 인도 서사시의 시기인 기원전 600년경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브라만 즉 바라문의 신이었다가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열반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다비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마왕 첩질귀(捷疾鬼)가 갑자기 나타나 불사리를 빼앗아 달아났다. 이때 위태천은 즉각 뒤쫓아 수미산 정상까지 달려가 상대를 제압하고 무사히 찾아왔다고 한다, 높이 132만km로 알려진 눈 덮힌 수미산을 한순간에 뛰어올랐다는데 흔히 달리기를 잘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경 약찬계에 나오는 첩질귀도 빛처럼 발이 빠르고, 순식간에 사리를 낚아챈 것으로 보면 날렵한 귀신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괴질과 병을 옮기는 야차이며 사천왕의 부하였다. 중생에게 고통을 주는 코로나19는 현대판 서질귀라 할 수 있겠다. 위태천은 그를 누르고 이겼으니 신중도의 중앙에 그려 넣어질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위장군’, ‘위태보살’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일본 프로야구계에서는 도루 잘하는 발빠른 야구선수를 ‘이다텐’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태천을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다. 지금은 스포츠의 신으로서, 또 아이들의 병을 재빠르게 제거하는 신으로서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존재가 되어 있다. 신중도의 위태천 앞에서 다리와 허리 건강을 빌고 도난 방지 대한 기원도 한다. 인도의 힌두 신화에서는 창이나 그 밖의 무기를 쥐고 공작새를 타고 다닌다. 위태천은 불탑의 도굴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상은 금박 찬란한 새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합장한 팔 위에 칼 혹은 금강저를 가로질러 놓는 모습이다.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의 목판화인 ‘소자본묘법연화경’등에서 사경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으로 등장했다. 조선시대 신중탱화에서는 무장들을 이끄는 대장격으로 나타난다. 불경을 간행할 때 권두 또는 권말에 동진보살 즉 위태천을 판각해서 경전의 수호를 상징하는 경우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현재 관음사 신중도 하단의 무장한 호법 신중들은 위엄 있는 기세로 눈을 부라려 위협하거나 단호함을 드러낸 표정이다. 대조적으로 위태천의 얼굴은 둥글 넙적하며 단정한 이목구비에 무표정하게 묘사하였다. 그래서인지 중앙에 위치하며 정면을 직시하는 시선에서 더욱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신중들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영험과 불가사의한 힘을 기대한다. 한 달 간 전국 사찰에서 펼쳐지는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정진’이 잘 회향되어 신중도 위태천의 위신력이 발휘되기를 기원해 본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한국국학진흥원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개최

한국국학진흥원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한다.공모 작품 접수기간은 오는 8~25일 오후 5시까지이다.이번 공모전은 전통 소재를 활용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출판, 공연, 게임, 전시, 관광 등 문화콘텐츠로써 사업화가 가능한 콘텐츠 기획안을 모집한다.전통문화 창작 소재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의 시각에서 전통 기록을 재해석해 미래를 선도하는 문화콘텐츠를 기획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기획됐다.공모전은 전국의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박사과정 제외) 대상으로 3~4명을 팀으로 구성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공모에 선정된 8팀에게는 5개월간 전문가와 함께하는 교육형 멘토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보완된 기획(안)과 피칭, 홍보부스 심사를 통해 오는 11월 중 최종 시상한다.올해로 6회째 개최하는 공모전은 참가하는 모든 팀이 함께 성장하는 교육형 공모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실제로 이 공모전을 통해 창작자의 꿈을 이룬 성과가 도출되고 있다.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 도전하는 참가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며 “이번 공모전은 한국인의 문화정체성을 토대로 예비 문화콘텐츠 기획자들의 창의성과 가능성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공모전 접수는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http://story.ugyo.net) 내의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서 진행된다. 역대 공모전 메뉴를 통해 1~5회 수상작 작품집과 피칭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의 : 054-851-0843.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5)포항 칠인정

포항 칠인정. 2020년 봄날을 코로나19와 국회의원 총선이라는 국가적 국민적 이벤트가 관통했다. 코로나19는 국민적 협조 속에 극복되어가고 있다. 총선 결과 지역에서는 현 정권 심판이라는 역대 선거의 중간평가 관례를 보였으나 전국적으로는 지역민심과 달리 현 정책 지지세로 나타났다.역사에도 있었다. 이미 600여 년 전, 이 땅에 왕조의 흥망이 교체되었을 때. 그 때 뜻있는 망국의 유민들은 거취를 분명히 했다. 그들은 더러 산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고 일부는 두문동(杜門洞)을 만들기도 했다. 그 자취 중 하나인 포항 흥해읍 초곡리 칠인정(七印亭·경북도 문화재 369호)을 찾는다. 칠인정을 찾은 날은 바람이 몹시도 불었다. 포항시내에서 영덕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흥해읍을 못미처 아파트 공사장을 지난다. 도시가 온통 옛길과 새길이 뒤엉킨 데다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자칫 큰 길을 가면서도 길을 잊기 일쑤였다. 선린대학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초곡리가 나왔다. 수백 년 전 옛날이면 깊은 산속이었을 길가에는 새로 전원주택촌이 들어서 있다. 마을 입구 소나무 숲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아 옛날 왜구의 습격도 피해갈 수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더듬어 길을 올라가 만나는 마을 이름이 사일(士逸)이라니, 참으로 선비가 숨어 지낼 만한 곳이었을 법하다. 초곡리는 인동장씨 집성촌이다. 이곳 인동장씨들은 600여 년 전 고려말 이곳으로 들어온 장씨 10세손 장표를 흥해파의 파조로 모시고 있다. 장표(張彪)는 고려말 공민왕때 정6품 무인으로 흥의위(興義衛) 보승랑장(保勝郞將)을 지낸 장수였다.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인동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영일의 도음산 자락 초곡으로 숨어든다. 그는 초곡에 초막을 짓고 은거했으니 마을 이름 사일이 만들어졌을 것이다.마을 끝 칠인정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정자를 호위하고 있다. 칠인정 앞 네모꼴 연못은 원래 아름다운 연못이었는데 문화재 당국이 보호한다며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오히려 경관을 해친 꼴이 됐다고 장표의 20세 후손 장실근(71)은 회상한다. 어릴 때 이 연못 근처에서 뛰놀았다며 그 풍류를 찾을 길어 안타깝다고 한다. 연못 주위의 모란은 활짝 만개해서 계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500년은 되었음직한 두 그루 느티나무는 이제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300년 넘은 연못 앞 세 그루 배롱나무는 아직 잎을 피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정자는 여러 차례 중수했다. 태종 때 정자가 세워진 뒤 370년 뒤 어느 가을 태풍에 정자가 휩쓸려 사라졌고 후손들이 새로 지었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기금을 마련해 새로 짓고 괴목도 다시 심었다.마을 뒤 정남향으로 경사면에 지어진 정자는 뒷면으로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했고 2층 누각 형태로 건축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는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불을 때는 함실을 만들어 놓았다. 왼쪽에는 효우재(孝友齋), 오른쪽에는 경수당(慶壽堂)이라 문패를 걸었다. 온돌방 앞으로는 양쪽에 세살창살의 여닫이문이 달렸고 옆에는 외짝 세 살 여닫이이문이 달려있다. 중수 후 칠인정 현판은 조선 정조대 초서의 대가 송하 조윤형이 썼다.가운데 개방형 마루에는 사간정 정언 남경희의 칠인정기와 후손 장택영, 장석영이 쓴 칠인정중수기, 권엄의 상량문, 회재의 후손 이정엄의 방문기 등이 수두룩 걸려 있다. 더 많은 시인묵객 선비들이 이 곳을 찾아 기록을 남겼으나 모두 걸어놓을 수 없을 정도라고 장근실 씨는 자랑한다.장표가 환갑이 되던 태종 9년(1409), 급제한 그의 네 아들과 세 명의 사위가 모두 관복을 입고 허리띠를 차고 축하연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관복의 관인들을 풀어 기념식수한 괴목에 묶었다고 정자 앞 설명서에는 적혀있다. 정자 이름이 칠인정이 된 연유다. 정자 현판 칠인정은 뒷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명필 조윤형의 편액 칠인정은 국립국학원에 보관돼 있다.사실 관인을 묶었는지 또는 허리띠 끈을 묶었는지는 기록이 다르지만 정자 이름이 인(印)자가 들어가고 정자의 중수기 등 여러 기록에 따라 도장을 묶었다는 것이 정확할 수 있겠다. 또 정자 앞 느티나무도 설명서에는 회화나무로 적고 있는데 중수기 등 기록에는 분명히 쌍괴수(雙槐樹)라고 했으니 처음부터 두 그루 느티나무였을 것이다. 이 느티나무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면 ‘우 우’ 소리를 냈다고 하고 6·25 한국동란때도 그런 소리를 냈다는 소문에 대해 후손들은 그냥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한다.어쨌든 그는 불사이군의 충절로 초곡에 숨어들어 초막을 짓고 은신했지만 자손들의 출사만은 허락했으니 시절의 선비라 부를 만하다. 그의 유언에 자신은 고려의 신하요 가문은 고려조의 10세충효세족이라 말하고 있으면서 자손에게는 자손의 시대 임금인 조선에 충성하라고 명했음이다.그의 아들은 봉화현감 을제, 운봉현감 을하, 중림우 을해, 청하현감 을포 등 넷이고 사위는 봉상소윤 유정봉, 강진재 이읍, 주부령동정 이현실 등 삼인이다. 부모의 자랑은 자식의 출세에 있고 자식의 효도 중 제일은 벼슬길에 올라 청운에 이름을 높이는 것이니 은둔지사 장표로서는 참으로 자랑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인패(印佩)를 차고 환갑연에 참석했으니 정자 이름을 후세에까지 남길 만하지 않은가.더구나 을제의 아들 윤문은 해적들을 토벌해서 공신이 되었고 그 아들 셋이 모두 벼슬을 했으니 ‘3세7인’(三世七印)이라고 남경희의 중수기는 적었다.뒷날 칠인정을 중수한 뒤 장표의 후손 장택영이 쓴 칠인정중수기에는 장표가 임종할 때 “우리 집안은 10대로 고려의 충신이었고 나는 고려시대 태어나 나라가 망하였으나 따라 죽지 못하였다. 나의 수연에 그대들이 헌수함은 자식된 도리로 당연하겠으나 나는 어버이를 잃은 슬픔보다 더하다. 나는 옛 신하 복장으로 선왕을 뵈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조선의 은혜를 입었으니 힘을 다해 내 조상이 고려를 섬긴 심정으로 임금을 섬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라”고 유언했다. 장택영의 중수기가 근세(1985년)에 쓴 것이지만 후손으로서 옛 기록을 참고해 썼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자신 고려의 신하로 불사이군의 심정으로 초곡동에 숨어들었지만 자식들만은 출사를 막지 않았던 것이다. 은거의 대명사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고사를 상기시킨다. 혜강은 대대로 조조의 위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사마씨의 진나라에 기댈 수는 없었다. 그는 끝내 진나라 사마소의 초빙을 거절하고 목숨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의 아들 혜소는 같은 죽림칠현 산도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서 진 혜제의 시중이 된다. 정치적 격랑기 변란이 일어나고 모든 신하들이 도망가지만 혜소는 마지막까지 황제를 지키다가 순사한다. 이는 정치적 이유로 자발적 격리를 선택한 지사의 명분이 대를 이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보여 준 것이다.정조 때 문인 남경희가 쓴 칠인정기가 정자마루 한가운데에 걸려 있다. 기문에서 남경희는 “장표 공은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면서 자손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의(義)가 없다고 하여 마땅히 의(宜)를 좇았다. 지금 임금도 성군이요, 공도 당세의 절의사인데 세상이 야은 길재나 운곡 원천석만 절의군자로 칭송하면서 공은 알아주지 않으니 나타내고 묻어지는 것이 때가 있는가?”하고 세상이 장표의 절의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장표의 불사이군 충절은 그의 묘비에서도 나타난다고 장표의 21세후손 장재우 씨는 얘기한다. 칠인정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마을 산비탈 장 공의 묘 옆에 있는 묘비는 옆으로 향하고 있다. 동행한 장표의 20세 후손 장지화(67) 씨는 햇빛을 바로 받기가 민망해서였을 것이라고 했다. 장표 공의 묘지가 600년 전 들어섰지만 비석은 후대에 세워졌을 것이고 그 후손들이 불사이군 절의를 표현하기 위해 묘비를 옆면으로 향하게 세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장 공의 불사이군 절의가 칠인정의 수많은 현판 시문과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더구나 인동장씨 흥해파는 장표 공의 칠인정 기록에서 확인한 것처럼 후대로 내려와 수많은 국가동량과 학계 경제계 인사들을 배출했다. 그것이 조상의 음덕임을 증명하듯 해마다 열리는 장표 공의 시제에는 다투어 제상을 주관하려 해 이미 8년 후의 유사까지 정해졌다고 장표의 21세 후손 장재우(77) 씨는 자랑한다.장표 공의 모지를 지키는 재실 옆에는 참으로 희귀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소나무는 밑둥이 마치 커다란 용이 똬리를 튼 듯 자리를 잡고 위로는 용이 승천하듯 용틀임하는 모양으로 가지를 뻗어내고 있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소나무는 10여년 전 어느 기업인이 수억원을 주고 사겠다고 계약하고는 부도가 나서 잔금을 치르지 못해 지금도 공의 산소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영일민속박물관칠인정에서 5km 남짓 흥해읍 소재지에 한 때 흥해군의 동헌으로 쓰였던 제남헌(齊南軒)이 지금은 영일민속박물관으로 바뀌어 보존되고 있다. 1983년 개관된 박물관 전시실에는 농기구에서 생활용구 토기 등 2300여 점이 전시 보관되고 있는데 군 단위 민속박물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박물관으로 지정된 영예를 갖고 있다. 넓은 앞마당엔 600년 된 회화나무가 위용을 보여주고 대원군 척화비도 보존되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4) 의성 금성산고분군과 조문국

의성 조문국(召文國)박물관은 닫혀있었다. 조문국의 역사를 알리는 유물유적이 코로나19를 피해 격리수용되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책자 몇 권을 받아들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격리수용’이란 말이 도처에서 체감되는 현실이 착잡했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의 극단인 격리수용이란 단절과 구속의 안팎 사태를 함축한다.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의 관계망이 차단된 병적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격리수용이란 말은 햇볕 들지 않는 미궁처럼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를 거느린다. 언제쯤 격리수용된 고독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갑갑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이웃이라는 ‘곁’이 있어 행복했던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는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땅과 하늘은 청정하고 인심은 다정다감했을 조문국의 그날이 궁금한 이유이다.조문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伐休尼師今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벌휴이사금 2년, 정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다.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다. 군주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에서와 같이 벌휴이사금 2년에 패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그 전부이다. 그것도 조문국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자리에 부수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벌휴이사금 2년은 서력기원 185년, 그러니까 조문국은 지금으로부터 1835년 전에 신라에 복속된 고대 부족국가이다.역사의 전면에서 지워진 나라, 패망의 기록으로 그 정체를 짐작할 수밖에 없는 조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km 지점 금성면 대리동 산 384번지, 조문국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금성산고분군은 박물관 동쪽 지척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경상북도 기념물에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155호)승격되었지만 인적이 끊겨 스산했다. 따뜻한 봄날이 무색한 날이었다. 고분군 사이에 조성한 작약꽃밭이 붉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작약꽃밭이 환한 꽃망울을 터뜨릴 무렵이면 조문국의 하늘 밑을 찾는 발길도 잦을지 모르겠다.때마침 고분군을 찾은 젊은 부부가 힐끗, 나를 쳐다보며 마스크를 낀다. 그것이 경계가 아닌 예의라도 되는 듯이 나도 젊은 부부를 힐끗, 쳐다보며 마스크를 끼었다. 마스크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 격리수용의 징표이다. 반가워야할 한적한 야외에서의 만남이 힐끗 쳐다보는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조문국 백성들도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려야 하는 날들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벌휴이사금조에서 보듯,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한 해의 풍흉을 예지하는 성인으로 임금을 믿고 따랐던 순하고 착한 백성들에게 어찌 바이러스인들 침투할 수 있었겠는가.조문정(관망대)에 올라 〈〈조문국의 부활〉〉, 〈〈의성 금성산 고분군〉〉, 〈〈조문국의 지배세력과 친족집단〉〉등의 책자를 여기저기 훑어본다. 1960년 탑리리 고분군이 발굴된 이래 17차례의 매장문화재 조사와 9번의 학술조사의 결과를 묶은 출판물들이다. 발굴조사단은 신라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을 독자적으로 수용한 사실을 확인하고, 관과 귀걸이, 허리띠장식, 고리자루칼 등 다양한 형태의 착장형 위세품을 찾아낸다. 위세품(威勢品)이란 왕이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시키면서 지방수장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이다. 이들은 출토 유물의 수량과 우수한 품질의 위세품들을 근거로 고분의 형성 시점을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기 전, 초기 국가를 이루고 있던 국읍(國邑) 시기로 추정한다. 뿐만 아니라 고분군의 위치와 출토유물들을 통해 조문국 옛터인 의성 지역이 신라의 단순한 북방 거점지역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점을 밝혀낸다. 필자들은 한결같이 조문국은 신라 황금문화의 원산지로서 김씨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지역이었으리라고 적고 있다. 경상도 북부지역에 금광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 근거였다.1호 고분 경덕왕릉은 고분군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능(陵) 둘레 74m, 전통적인 고분 형식의 봉분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과 가로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 있다. 노랑나비 한 쌍이 날고 있었다. 조문국의 마지막 왕, 전설의 주인공이 말없이 나를 맞았다.조선 숙종조 〈〈허미수 문집〉〉에 기록된 전설이다.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일구기 위해 작은 언덕을 일구던 중이었다. 갑자기 사람이 드나들만한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둘레에 금칠을 한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안 금소상(金塑像) 머리에 쓰고 있는 금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했지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라”고 이른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극겸의 외밭이었다.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난다. “내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陵)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 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현령께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다.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왕의 존엄을 지키려는 조문국 유민들의 집단무의식이 경덕왕릉 전설을 만들었을 것이다. 경덕왕은 자신의 나라를 정복한 구도에게 딸의 혼인을 허락한 운모공주의 아버지이다. 어느 왕조이든 마지막 왕이란 비운의 대명사이다. 경덕왕은 망국의 지도자로서 감내해야 할 비운의 시름이 깊었을 것이다. 구도와 운모공주의 혼인은 망국의 비운을 딛고 자신의 백성을 지키려는 경덕왕의 지략에 따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는 “조문국의 운모공주가 구도에게 시집 가서 옥모를 낳았다”고 기술한다. 구도는 경주에 부인이 있었지만 운모공주와 다시 결혼했던 것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김씨 왕조 시조인 김알지의 6세손인 구도는 최초의 김씨 왕인 13대 미추왕의 아버지다. 구도는 자신의 아들 미추를 왕위에 옹립하는데 조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경덕왕은 자신의 백성을 지키는데 김씨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구도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신라는 991년 동안 56명의 임금이 있었다. 한국사 왕조 중 즉위한 왕의 오르내림이 가장 심한 나라였다. 왕위 찬탈을 위한 왕족 3성 박, 석, 김씨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잦았다. 박씨 왕조는 아달라를 끝으로 석씨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석씨 세력과 김씨 세력이 연대를 형성해 박씨를 밀어냈던 것이다. 아달라의 뒤를 이은 왕이 석탈해의 손자 벌휴이사금이다. 독자적으로는 임금을 낼 힘이 없었던 김씨 세력은 막강한 부를 가진 조문국 맹주들의 지원을 청했을 터이고, 조문국 사람들은 신라로부터 자신들의 세력과 지위를 지키는데 구도의 힘을 빌었을 것이다. 마침내 김씨 세력은 급성장해 왕위 세습을 독점하게 된다. 조문국 지배자들은 망국의 유민이 아니라 운모공주가 신라의 왕비를 배출하는 인통(姻統)인 진골정통이 된 데서 보듯 신라 왕조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막강한 실력자가 된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운모공주와 구도의 혼인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되풀이 되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있는 곳에 이합집산의 모략이 있고 모략이 있는 곳에 살벌한 다툼이 뒤따르니 딱한 노릇이다.차를 몰아 벚꽃 길을 달렸다.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왕왕거렸다. 반성도 성찰도 없이, 다투어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몰골들이 꼴불견이었다. 마스크를 뒷자리로 벗어던지며 혼잣말로 묻고 혼잣말로 대답했다. 코로나 돌림병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그 출처이다. 코로나 돌림병은 왜 왔는가? 빈부격차도 없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의 공포를 살포하는 바이러스의 생태를 보라, 그것은 분명,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으리라. 백신은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나? 모르모트 실험실에는 답이 없다. 일등을 하지 않으면 살맛을 잃는 경주마 신세인 우리 삶의 처지를 벗어나야 하고, 너와 나의 아픔과 애환을 공유하는 영적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코로나19가 종식된다하더라도 또 다른 악성 바이러스가 수시로 찾아와 마스크를 채워 우리네 삶을 숨통 조일 것이다. 힐끗힐끗 서로를 적처럼 경계하는 격리수용의 끔찍한 일상을 강요할 것이다.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대구 서구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로 추억 여행 떠나자

대구 서구 비산1동 비봉초 북편에 조성된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이 지역의 어둡고 낙후된 이미지를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전환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비산1동 일원 철로변의 다양한 위험 요소들을 제거한 덕분에 이곳이 안전하고 쾌적한 골목길로 탈바꿈했다.또 테마가 있는 주거 재생과 마을 브랜드 활성화 구축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서구청은 지난해 비산1동의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 조성 사업을 완료했다.특히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한 사업 추진으로 비산1동의 보행 환경을 개선하고 우범지대를 최소화시키는 효과를 거뒀다.‘원고개 마을 스토리길’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4가지 스토리로 담아낸 골목길이다.먼저 ‘원님길’은 원고개 전설을 모티브로 원님이 행차하던 모습을 골목길에 담았다.‘향수길’은 원고개 마을의 과거·현재·미래를 표현해 낸 길이다.지역의 발자취는 물론 마을만의 이야기를 풀어낸 게 특징이다.‘산책길’은 주민들과의 사회적 활동을 증진시키고 사람간의 정을 느낄 수 있는 테마길로 만들어졌다.‘하늘담장길’은 비산시영아파트 동편 담장을 허물어 야간에도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등·하교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이 길은 비산 성당과 가장 인접한 탓에 종교적인 관광 명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구름다리의 역할도 할 수 있다.이 밖에 최근 ‘원고개 마을 스토리길’ 인근에 들어선 ‘원고개 희망공작소’도 마을 공동체 향상과 상호 협력을 통한 마을 기업 육성에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서구청 관계자는 “비산1동의 노후화된 계단과 주택가 벽면, 경사로 등을 재정비하면서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며 “다양한 사업을 통해 서구 곳곳을 안전하고 쾌적한 정주 환경으로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