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화재단, 신라문화제자문위원회 구성·운영 나서

경주문화재단이 지역의 역사 문화를 상징하는 전국적인 문화 축제인 제48회 신라문화제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신라문화제자문위원회(이하 자문위) 구성·운영에 나선다.재단은 오는 30일까지 자문위원을 모집하고 위원회 운영에 들어간다.모집 분야는 모두 3개 부문으로 축제 기획 콘텐츠, 홍보 마케팅, 시설 인프라이다.자문위원은 재단이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회의에 참석해 축제 아이디어와 실행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다.회의에서 도출된 우수 아이디어는 신라문화제 프로그램으로 채택해 진행된다.재단은 연말에 우수 위원을 선정해 상장 및 부상을 수여할 예정이다.접수는 경주문화재단 통합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성한 후 이메일(sillabell@naver.com)로 제출하면 된다.자문위원 선정은 신라문화제 화백위원회 심사를 거쳐 이뤄진다.제48회 신라문화제 행사는 오는 10월 열릴 예정이다.오기현 경주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축제의 성공여부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한다. 이번 신라문화제가 자문위원회를 통해 시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시민 중심의 축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주낙영 경주시장은 “천년왕국 신라의 힘찬 부활을 꿈꾸는 신라문화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피운 우리 경주가 21세기 세계문화를 선도하는 문화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갈 것”이라며 “코로나19로 제약받았던 생활에 활력을 되찾고 침체한 지역경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시민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성원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8>선도성모

경주 선도산 성모설화가 삼국유사 제7편에 10가지 설화와 함께 편집 소개되고 있다. 성모설화는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중국 황제의 딸이라 기록하고 있어 이채롭다. 삼국유사 기이편에서는 육부촌장들이 나정 우물가에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알이 있어 쪼개 보니 단정한 사내아이가 나와 박혁거세라 이름 짓고, 그를 키워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박혁거세의 탄생을 두 가지 설화로 각각 다르게 소개하고 있다. 성모설화에서의 박혁거세 탄생에 대한 기록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할 정도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를 기념하는 행위들은 이어지고 있다. 감통편에 등장하는 안흥사는 선도산 마애삼존입상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된다.마애불상 앞에 성모사당이 있고 서북쪽 200m 지점에 성모유허비가 복원돼 울타리 안에 보관되고 있다. 유허비에서 앞을 바라보면 경주 시가지, 신라 서라벌땅이 훤하게 조망되고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과 그의 주검이 있는 오릉도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삼국유사: 선도성모가 불사를 좋아하다진평왕 대에 지혜라는 이름의 여승이 있었는데 어진 행실이 많았다.안흥사에 머무르며 불전을 새로이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꿈에 비취옥으로 머리를 장식한 예쁜 모습의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신모이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이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찾아다가 주존 부처님 세 분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명의 부처와 6류성중 및 여러 천신과 오악의 신들을 그려라. 해마다 봄 가을에 열흘 동안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아라”고 말했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가 좌석 밑을 파서 황금 160냥을 찾아 불전 수리를 이뤘으니 이러한 공적은 모두 신모가 일러주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그 사적만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불법의 행사는 없어져 버렸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으니 그의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내 말하기를 “솔개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고 말했다. 사소가 편지를 받고 솔개를 날려보내자 이 선도산으로 날아와 멈추므로 마침내 여기에 와서 집을 짓고 지선이 됐다.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했다.신모가 오랫동안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가 평안토록 도우니 신령스럽고 신이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삼사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등급으로는 여러 명산대천 제사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이 매를 이용한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때 이 산에 올라가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리고 신모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매를 찾게 되면 꼭 작위를 봉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매가 날아와 책상 위에 앉으므로 신모를 대왕의 작위에 봉했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성한 아들을 낳아 신라의 처음 임금이 됐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인이 태어난 근본이었을 것이다.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닭은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신모가 일찍이 하늘나라의 여러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그의 남편에게 줬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신비스런 영험을 알게 됐다. 또 국사에서 김부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김부식이 정화 연간(1111~1117년) 어느 때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어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에 갔더니 한 사당에 여자 신선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접대임무를 맡은 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분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이어서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됐습니다. 황실의 딸은 땅의 신선이 돼 선도산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분의 상입니다”고 이야기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 신모가 금을 시주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하여 불법을 열어 부처의 가르침에 이르는 길을 열었으니 어찌 한갓 오래 사는 술법만 배워 몽롱한 것에만 얽매일 것이랴!’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서연산에 와 있은 지 몇십 년 되었던가/ 선녀들 불러다 신선의 옷 짜게 했네/ 오래 사는 신선술도 오묘함이 없지 않으나/ 부처님 찾아뵙고 옥황상제 됐다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선도산에는 오래 전부터 산신 성모가 거처하고 있었다.서라벌을 발 아래로 굽어보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성모는 직접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그들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보내 아름다운 세상을 꾸려보기로 했다. 성모는 진한 여섯 부락의 촌장들이 하나의 나라를 구성해 튼튼한 울타리를 형성하고, 가족들의 평온한 삶을 영위하려는 뜻을 헤아렸다.또 육부촌장들이 회합을 가지는 날을 택해 백마가 되어 나정에 알을 낳고 기다렸다. 육부촌장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남산 나정쪽에서 신비스럽게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하늘로 오르며 퍼지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달려갔다. 나정에 도착해 보니 백마가 알을 두고 길게 울더니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촌장들이 알을 깨뜨리자 훤칠하게 잘생긴 아이가 나왔다. 육부촌장들은 저마다 훌륭한 지도자를 기다려 오던 터라 하늘에서 큰 인물을 점지해준 것으로 해석하고 아이를 키워 지도자로 삼기로 했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서 벌써 어른의 신체로 늠름하게 성장했다.머리도 뛰어나게 총명했다.어른들이 10년 이상 공부해야 할 내용들을 다섯 살이 된 이후 1년에 모두 이해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는 성모가 현몽을 통해 아이가 잠들었을 때 지혜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육부촌장은 아이를 박혁거세라고 이름 지었다.혁거세는 일곱 살이 되면서 육부촌을 돌면서 촌마다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무술과 비학을 익혔다.육부촌이 지역적인 특성을 감안해 부락별로 비축한 창술, 궁술, 도법과 검법, 약제술, 기문둔갑술, 전쟁의 전술과 전략을 집대성한 비법까지 모두 익혔다. 성모는 혁거세가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적극 나서서 도왔다.약제 공부를 할 때는 산삼과 기이한 약초를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체력을 키우는 훈련을 할 때는 신비스런 힘을 가진 영물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등의 기연을 만들어 줬다. 혁거세가 여섯 부락을 순회하면서 무술과 학문을 익혀 13세가 됐을 때는 칠척 장신에 근엄한 모습의 지혜로운 장군이 돼 있었다.그의 무술 실력은 육부촌에서 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이 난 열 명의 장정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그의 옷자락 하나 찢을 수 없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대장군이었다. 그의 지혜 또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마을마다 논쟁이 되는 일들은 혁거세가 논리적인 해석으로 서로 이해하게 하며 깔끔하게 오해를 풀어주는 등으로 육부촌에서는 이미 척척박사로 떠받들었다. 성모는 혁거세의 일을 거들어 줄 현명한 여인을 알영정 계룡에게서 태어나게 해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혁거세는 뛰어난 자질에다 덕을 쌓아 신라 왕이 되고부터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선정을 베풀었다. 혁거세는 신라 왕위에 오른 이듬해 꿈을 통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경위를 이해하고, 모후가 선도산의 성모라는 것을 알았다. 혁거세는 선도산에 사당을 지어 매월 초하루에 직접 제를 올리며 모후의 덕에 감사를 드렸다. 성모사에 제를 올리는 일은 혁거세가 죽은 이후에도 신라 궁중에서 행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로 빠지지 않고 이행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시, 미탄사지 추가발굴로 신라왕경인 생활상 파악

경주시가 삼층석탑과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됐던 황룡사지 남쪽의 미탄사지 일대에서 추가 발굴조사를 올해 연말까지 진행한다.이번 발굴조사는 신라왕경특별법의 일환에 따라 추진되며 시는 불교문화재연구소와 함께 구황동 433-1번지 일원 미탄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928호) 주변 정비 및 복원을 위한 기초학술자료를 확보할 예정이다.또 시는 통일신라 명문기와류와 막새류, 남석제 등이 무더기로 출토된 신라왕경 사찰인 미탄사의 추가 조사에서 신라왕경인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발굴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연차별로 추진된 1·2·3차 발굴조사에 이은 4차 발굴 조사다.이번 발굴의 주요 목적은 미탄사지 삼층석탑 북쪽 구역 하층유구 및 삼층석탑 하부 조사이다. 앞선 3차례의 발굴 조사로 미탄사지 12곳에서 건물터와 우물터, 담장, 배수로 등이 발견됐고, 금동대좌, 인화문 토기편을 비롯한 중요한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2014년에 진행된 시굴조사에서는 ‘味呑(미탄)’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돼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미탄사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도 올렸다. 한편 미탄사의 정확한 건립연대나 조성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 지은 삼국유사에 사찰 이름이 등장하고 조선시대 지리지류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미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지금까지 진행됐던 시굴 및 발굴 조사를 통해 미탄사의 위치를 확인하고, 미탄사와 더불어 신라 학자 최치원의 고택인 독서당의 위치까지 방증하는 중요한 유구와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며 “올해도 발굴을 진행해 미탄사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할 것이다”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시, 기림사 일원에 신라차 다원 개설…6월부터 운영

경주시가 양북면 기림사 일원에 신라시대 차 문화를 복원하는 신라차 다원을 조성한다.시는 기림사 사적기와 삼국유사 등 각종 문헌을 통해 전해지는 신라시대부터 경주가 차 문화 형성의 중심 역할을 한 차 문화의 성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양북면 기림사 왕의길 주변에 ‘신라차 다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번 조성 사업은 단순한 차밭 조성이 아닌 지구별로 다양한 차나무 식재 패턴과 사계절 차나무의 성장 모습을 담은 그라스 정원을 조성해 경주만의 특색 있는 다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주시는 신라 왕족 출신 김교각(696~794년) 지장보살이 당나라 구화산에서 차나무를 전파했다는 구화산 화성사기 등의 문헌을 바탕으로 양북면 기림사 일원에 현대식 차 정원을 복원할 계획이다. 조선시대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는 기림사 약사전 벽면에는 차를 공양하는 헌다화가 그려져 있다. 경주시는 물론 신라차영농조합법인도 사업비를 투입해 신라차 다원을 조성한 후 오는 6월부터 운영을 시작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이번 복원사업을 통해 신라가 한반도 차 문화 형성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 재조명될 것”이라며 “신라차 다원은 왕의길, 기림사, 감은사지, 문무대왕릉과 연계해 새로운 문화관광 인프라가 될 것이다”고 기대했다. 한편 기림사 측은 “김교각 스님이 신라시대 당시 경주에서 차 나무 종자를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가 퍼뜨렸다”며 “차 문화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지난해부터 세계차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6>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

혜통은 신라 신문왕 시대에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해 효소왕 시대에 국사까지 지낸 고승으로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것으로 삼국유사는 소개한다. 혜통은 신라에 밀교를 뿌리 내리게 한 명랑법사와 같이 서남산 남간마을이 고향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가족에 대한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며 무외삼장법사의 제자로 많은 공부를 하고 신라로 돌아와 금광사에서 기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지금까지 남은 그의 흔적이 담긴 유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주 서남산 자락의 남간마을은 남간사라는 절이 있었다 해 마을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남간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논 가운데 우뚝 서있고, 마을안길에 신라시대의 돌우물이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남간마을에는 지금도 집집마다 석탑이나 석등, 주춧돌 등의 신라시대 절이나 건축물에 사용됐을 석재들을 곳곳에 쌓아두고, 집의 주춧돌이나 부뚜막의 기초석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삼국유사: 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승려 혜통은 그의 가족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속인으로 있을 때 집은 남산의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지금의 남간사 동쪽 마을이다)에 있었다. 하루는 집의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 가보니 뼈는 옛날에 살던 굴속으로 돌아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바라보고 놀라 한참이나 이상히 여기며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느낀바가 커 속세를 버리고 승려가 돼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혜통은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을 찾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말하기를 “신라 사람이 어찌 감히 불법을 닦을 그릇이 되겠느냐”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혜통이 알고 싶어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있으니 조금 후에 이마가 터지면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무외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고는 화로를 치우고 터진 곳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신비스런 주문을 외우자 상처가 아물어 전과 같이 됐으나 왕 자 무늬의 흉터가 생겼다. 이로 인해 왕화상으로 불렀다. 혜통의 재질이 뛰어나므로 삼장이 심법의 비결을 전해 줬다. 이때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이 나서 고종이 무외삼장에게 치료를 청하니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혜통이 고종의 명을 받고 별실에 거처하면서 흰콩 한 말을 은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흰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여 병마를 쫓으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또다시 검은콩 한 말을 금으로 된 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흰색과 검은색의 병사들이 힘을 합쳐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이 뛰쳐나오고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신라의 문잉림으로 가서 매우 심하게 사람을 헤쳤다.이때에 정공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혜통을 보고 말하기를 “스님이 쫓아낸 독룡이 우리나라로 와서 심한 해를 끼치니 속히 가셔서 없애 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혜통은 정공과 함께 인덕 2년 을축(665)에 본국으로 돌아와 용을 내쫓았다.용이 또 정공을 원망해 이번에는 정씨의 문밖에 있는 버드나무에 의탁해 살고 있었으나 정공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나무가 무성한 것만 좋아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신문왕이 세상을 뜨니 효소왕이 즉위해 신문왕의 무덤을 만들고자 장사지낼 길을 내는데 정씨의 버드나무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관원이 그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했다. 정공이 성을 내어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이 나무는 못벤다”고 하자 관원이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왕이 크게 노해 법을 집행하는 관원에게 “정공이 왕화상의 신비스런 술법을 믿고 장차 불손한 일을 꾸미려고 왕명를 업신여겨 거역하며 제 목을 베라 하니 좋아하는 대로 해주어라”고 명령했다.이리해 그를 목 베어 죽이고 그의 집을 흙으로 묻어버렸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므로 필시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당히 그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한 후 즉시 병사를 소집해 그를 찾아 잡게 했다. 혜통은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지붕으로 올라가 사기병과 붉은색 먹을 묻힌 붓을 들고 병사들에게 “내가 하는 것을 보라”고 하며 병의 목에 한 획을 긋고 “너희들은 각자의 목을 보거라”라고 했다. 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고 깜짝 놀랐다.혜통이 또 “만약 병목을 자르면 응당 너희들의 목도 잘릴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호통쳤다. 병사들이 황망히 달아나 붉은 줄이 그어진 목을 한 채 왕 앞으로 달려 나아가자 왕이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 할 수 있겠느냐”하고 말 한 후 그대로 내버려뒀다. 왕녀가 갑자기 병이 나자 혜통을 불러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자 혜통이 말하기를 “정공이 독룡의 해를 입어 나라의 형벌에 억울하게 당했습니다”고 했다.왕이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후회해 즉시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용은 정공에게 원한을 갚고 기장산으로 가서 곰신이 되어 해독을 심하게 끼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혜통이 그 산속으로 들어가 용을 타이르고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줬더니 곰신이 된 용의 해가 그제야 없어졌다. 신문왕이 등에 종기가 생겨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했다.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나았다.그러자 혜통이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양민인 신충을 잘못 판결해 종으로 했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어 윤회환생할 때마다 보복을 하는 것이옵니다. 지금의 몹쓸 종기도 신충 탓입니다. 신충을 위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어 그의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옳게 여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했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임금께서 절을 세워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나게 됐으므로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외치는 소리가 났던 곳에는 절원당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밀본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용궁에 들어가서 신인을 얻어 처음으로 신유림에 절(지금의 천왕사)을 세우고 여러 번 이웃나라의 침입을 기도로 막았다. 이후 명랑스님이 무외삼장법사의 핵심사상을 전하고 속세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만물을 감화시켰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통의 신통력혜통은 경주 서남산 기슭의 남간마을에서 태어났다.어릴 때 수달 한 마리를 죽여 개울 옆에 버렸다.다음날 그 수달이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 가보았더니 뼈만 남은 수달이 새끼를 끌어안고 있었다.그 이후 충격을 받아 삶에 대한 궁극적인 고뇌에 빠져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깎고 불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혜통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스승을 찾아 공부를 하다가 당나라 무외삼장법사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혜통은 문전박대하는 무외삼장에게 화로를 머리에 이고 버티면서 자질을 인정받아 제자가 됐다. 혜통은 당 고종의 여식을 단지 주문으로만 치료하면서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 이름을 떨쳤다. 신문왕 때 다시 신라로 돌아온 혜통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문제 있는 곳에 나타나 해결해주는 만통법사로 통했다. 특히 혜통은 살아 있는 것은 철저하게 그 목숨을 보호해 주기로 유명했다. 혜통과 마주 앉아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스스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 갈등은 저절로 풀렸다. 혜통이 기장 장안사에서 머무는 동안 소문을 듣고 민원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혜통이 늦은 시간 장안사로 돌아오는 길에 불광산의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나무토막을 던져 줬다.토끼는 도망가고 나무토막을 냉큼 받아 문 호랑이는 나무토막을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그 다음부터 호랑이는 장안사를 맴돌며 혜통이 던져주는 나무토막으로 연명하며 살생을 잊고, 장안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에 신라 천년궁성 역사문화의 조명시설 건립

경주에 신라의 천년 궁성으로 자리매김했던 월성의 발굴 과정과 당시 역사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월성 운영시설이 들어선다. 문화재청이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 추진단과 16일 경주 교촌마을 맞은편 광장에 월성 발굴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고, 신라 천년의 역사문화를 재조명할 수 있는 경주 월성 발굴조사의 운영시설 건축을 위한 착공식을 가졌다. 경주 월성 발굴조사 운영시설은 신라 왕경과 월성발굴조사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업무·전시 시설로 교촌마을 앞 황남동 407번지 일대에 조성된다. 문화재청은 1년 간의 공사를 진행한 후 2022년 상반기에 완공할 예정이다.운영시설은 2천370㎡ 부지에 지상 1층의 한옥 구조로 지어진다.주변의 경주 교촌한옥마을의 경관을 고려해 지붕에는 기와가 얹힌다. 운영시설은 사무동과 전시동, 유물수장고, 목재수장고의 4개 동으로 구성된다. 사무동에는 월성 발굴조사 담당자의 업무공간과 회의실이 있고, 출토 유물을 보관‧관리하기 위한 수장고가 들어선다.전시동은 대(大)전시실 소(小)전시실 그리고 각종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강당으로 구성된다. 2곳의 전시실에는 경주 월성 발굴조사 성과를 실제와 유사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실감형 콘텐츠가 갖춰진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월성 발굴조사 운영시설이 건립되면 신라 왕경과 월성에 대한 학술조사를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수행하는 기틀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월성 운영시설이 들어서면 세계적인 신라의 역사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새로운 역사문화 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경주 간묘(諫墓), 신라의 충신 김후직(金后稷)의 무덤세상이 상당히 어지럽다. 현역에서 물러나 가능하면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나라의 돌아가는 꼴이 정상적이지 못한 것 같다. 약속을 쉽게 저버리거나 심지어 거짓말까지 일삼는 최고 지도자들의 처신도 그러하고, 그 주변에 얼쩡거리는 자들이 하나같이 코앞에 어른거리는 소인배적 이해관계에만 탐닉해 어제 했던 말과 오늘의 행동이 판연히 달라져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얼굴 한번 붉히지 않는 철면피 같은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나 자신이 할 말을 잊는다.긴 역사 속에서 비슷한 사례가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새로이 발전과 도약의 길로 나섰던 나라에는 추상같은 어조로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과오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었던 충신의 직간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체로 혼란과 쇠퇴가 거듭되다가 결국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이를 하나의 교훈으로 삼는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치는 당혹스러운 정치사회적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직간(直諫)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긴 호흡과 넓은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나라 안팎의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자세를 촉구하는 준엄한 꾸짖음의 목소리가 그리운 시대이다. ◆직간(直諫)이 그리운 시대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가운데서 이런 민초들의 소망이 담긴 유적이 하나 남아 있어 소개해 두고자 한다. 바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간묘가 그것이다.김후직(金后稷)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는 간묘는 현재 황성공원 뒤편 주택가 가운데 좁은 길옆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중형급의 원형 봉토 무덤이다.무덤 앞에는 아담한 상석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앞면에 “신라 간신 김후직묘(新羅 諫臣 金后稷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다.비석의 뒷면에는 1710년(숙종 36)에 경주부윤 남지훈(南至熏)이 쓴 지문(誌文)이 새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남지훈은 ‘동경지(東京誌)’에 수록된 김후직의 행적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고 난 뒤에까지 국왕인 진평왕에게 간언해 그릇된 행동을 고치게 했으므로 이를 “묘간(墓諫)”이라고 하면서, 중국 춘추시대 시신(屍身)이 된 사어(史魚)가 위 영공(靈公)에게 간언해 잘못을 고치게 했다는 “시간(屍諫)”에 비길만한 가치 있는 행위였음을 찬양했다. 어쩌면 공자가 사어에 대해 ‘화살처럼 곧은 군자’라고 평가했던 사실에 자극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사실 간묘가 김후직의 무덤인지 여부는 역사학이나 고고학적 측면에서 검증되지 않았다. 무덤의 축조 시기나 입지 등에서 미루어 보면 무덤의 내부구조는 굴식 돌방무덤일 터이고, 그렇다면 후대에 도굴 등의 피해를 입어 설령 과학적 발굴조사를 시행한다고 해도 묘주(墓主)가 김후직인지를 밝혀내기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그럼에도 이 무덤은 진평왕에게 죽어서 무덤에 묻힌 뒤에도 간언을 했던 충신 김후직의 무덤으로 구전돼 왔고, 조선시대의 각종 지방지에 거듭 수록되었던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정치가 어지럽고 사회가 혼란에 빠져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누군가가 직간을 통해 폐정(弊政)이 고쳐지기를 바랐던 민초들의 소박한 소망들이 이 무덤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김후직의 “묘간(墓諫)”묘비를 지은 경주부윤 남지훈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경지’에서 김후직의 행적을 알게 됐지만, 가장 자세한 내용을 전하면서 원전(原典)에 가장 가까운 것은‘삼국사기’ 김후직 열전(列傳)이다. 이제 열전에 근거해 관련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김후직의 가계는 지증왕의 증손(曾孫)으로만 기록돼 있다. 그런데 그가 섬긴 신라의 25대 진평왕의 계보 또한 지증왕(고조)→법흥왕(증조)→진흥왕(조)→동륜태자(부)→진평왕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두 사람은 멀어도 재종숙질 사이로서 김후직은 근친 왕족이었던 셈이다. 김후직은 580년(진평왕 2)에 이찬(伊湌)의 관등으로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됐다. 진평왕은 그의 숙부였던 24대 진지왕(眞智王)이 재위 4년 만에 난정(亂政)으로 나라를 어지럽혀 왕위에서 쫓겨난 후, 진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김후직이 병권을 장악하는 병부령이라는 요직에 임명된 사실에서 보면, 그는 진평왕의 즉위에도 공이 컸던 훈신(勳臣)이었던 것 같다.그런데 왕위에 오른 얼마 후부터 진평왕은 자못 사냥을 좋아하게 되었다. 열전에는 이런 왕의 행태에 대해 병부령인 김후직이 간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면서,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하게 놀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광부(狂夫)・엽사(獵士)와 더불어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리어 스스로 그치시지 못합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했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그 중의 하나가 있어도 혹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보면, 안으로 마음을 방탕히 하면 밖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십시오”김후직은 이름 자체가 중국 주나라의 시조이자 농업신의 명칭을 따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중국 문물에 매우 밝았던 인물이었다.유학사상에 근거한 군왕의 덕치(德治)를 바탕에 깔고, 노자와 서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점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 다만 김후직의 이러한 지극한 간언이 거듭됐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말하자면 즉위 공신이자 근친 왕족인 김후직의 건의를 진평왕이 거절한 셈인데, 이런 사단(事端)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문면(文面) 그대로가 아니라 국왕과 귀족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가 깔려있는 것으로 본다.사실 아버지 동륜태자가 요절해 숙부인 진지왕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왕손 백정(白淨; 진평왕의 즉위 전 이름)은 일단 왕위계승 후보에서 한 걸음 멀어진 존재가 됐다.그러나 진지왕이 제대로 정치를 펴지 못하고 왕위에서 축출된 후, 유력 진골 귀족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즉위 사정으로 말미암아 그가 집권한 초기에는 아무래도 귀족들의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야망이 컸던 젊은 진평왕은 각종 제도를 정비해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유력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그러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진평왕은 친히 인솔하는 친위 군사력을 양성해 자신만의 무력기반으로 삼으려고 하였다.결국 병부령 김후직의 간언의 대상이 된 진평왕의 빈번한 사냥 활동은 친위 군사력을 양성하고 있는 국왕과 이를 견제하면서 전통적인 특권을 고수하려는 진골 귀족간의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었다.김후직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은 진평왕은 마침내 친위 군사력으로 시위부(侍衛府)를 조직해 왕권을 보위하는 핵심 부대로 삼았으며, 귀족이 아니라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전제왕권 체제로 변모시켜 나갔다.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부령에서 물러난 김후직은 어쩌면 시대적 흐름과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치의 실현을 꿈꾸며, 병들어 죽을 즈음에 그의 아들 3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남의 신하가 돼 능히 임금의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했다. 아마 대왕이 놀이를 그치지 아니하면 패망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이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주려 생각하니 모름지기 내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아들들이 그 유언에 따라 왕의 사냥길 길목에 무덤을 조성했는데, 뒷날 왕이 다시 사냥길에 나갈 때, 무덤에서 “가지 마시오”라고 간언해 왕을 일깨웠고, 진평왕은 김후직의 충성심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깨달아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비록 오래된 고대 왕조의 사례이지만, 혼탁한 작금의 우리나라 사정을 돌아보면 생각할 바가 없지 않다. 옛날 멀리서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이 누군가 나타나 직언을 통해 현실의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새 시대가 다가오기를 바랐던 소망들이 간묘에서 돌아서는 발길을 붙잡는 듯 했다.이문기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1>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의 불교를 꽃피운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의상과 원효는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종교인이면서 사상가이자 철학자, 정치인이며 성인으로 손꼽힌다.의상과 원효는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승으로 전해지며 기록이 남아있는 국제적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상은 중국에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배워 신라에 그 뿌리를 내렸다.원효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를 꽃피우는 일에 앞장섰다.이 때문에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의상과 원효의 이름이 없는 사찰이 없을 정도다. 원효와 의상 두 성인 모두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부처의 길을 안내했다.원효가 스스로 실천적으로 민중과 함께 살다간 수행자라면 의상은 실천적 불교에 힘쓰면서 제자들을 길러 제자들이 전국 십대사찰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한 교사적 성인이었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입적과 시기를 같이해 중국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왕실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호국승려이기도 하다. 의상은 양양의 낙산사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탁월한 십대제자를 길러내 신라의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워 국사, 법사, 대사 등으로 불린다. ◆삼국유사: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의상법사의 아버지는 한신이며, 성은 김씨이다.나이 스물아홉에 서울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해,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다가 국경의 수비군이 간첩으로 오인해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영휘 초년(650)에 때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 배에 편승해 중국으로 들어갔다.처음에 양주에 있었는데 양주의 장군 유지인이 청해 의상을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 지엄을 만났다.지엄이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와 중국까지 덮었는데 나무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 청소를 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바로 도착하는 것이었다.극진한 예절로 그를 맞이하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어제 꾼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의상이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그윽하고 미묘한 데까지 해석하니, 지엄은 학문을 서로 이야기할 동반자를 만나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 김흠순(인문이라고도 한다)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갇혀 있었는데 당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유하여 먼저 돌아가게 했다. 의상이 함형 원년 경오(670)에 귀국해 이 일을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의 고승 명랑을 시켜 임시로 밀교의식을 행할 단을 세우고 비법으로 기도하니,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의봉 원년(676)에 의상이 태백산으로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자 영험스런 감응이 뚜렷이 나타났다. 종남산 지엄의 제자였던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면서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도 함께 보냈는데 글은 이러하다. ‘서경의 숭복사 중 법장이 해동 신라의 화엄법사님의 시종을 드는 분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년이 됐으나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과 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중략)’ ‘우러러 받들건대 스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끝없는 연기를 드날리시고 겹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하니 기쁨이 뛸 듯이 깊어집니다. (중략)’ ‘분수에 따라 전수받아 가진 것을 버려둘 수도 없어서 이 공부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다만 스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결해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래서 스님의 은미한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를 만들었습니다. 근래에 승전법사가 옮겨 써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오니 스님께서는 좋고 나쁜 점을 상세히 검토하시어 경계해야 할 바와 깨우쳐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중략)’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였습니다.’의상은 이에 10여 곳의 사찰로 불법을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남악의 화엄사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지으니 일승의 중추가 되는 요점을 모두 실어 천년의 귀감이 되게 했으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었다.이 밖에는 저술이 없지만 솥 안의 고기 맛을 보는데 한 점의 고기로도 충분할 것이다.법계도서인은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됐으며 이 해에 지엄도 입적했으니 이는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간에 전해지기로 의상은 바로 부처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인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열 명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승려들이 우두머리가 됐다.그들 모두가 성인과 버금가며 각자 전기가 남아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의 골암사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지통이 추동기를 지었는데 직접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의 글에는 오묘한 경지에 이른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머물면서 항상 천궁을 오갔다.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이 함께 탑을 돌면서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탑에는 사다리와 돌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계단에서 3자나 떨어져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그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시 괴이하다고 여길 터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과 선묘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선묘 낭자를 만났다.선묘는 의상의 인물됨에 한눈에 푹 빠져버렸다.그러나 이미 불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의상과의 세속적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선묘는 그냥 의상의 옆에서 머물기로 작심하고 그를 돌보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이 고국 신라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중요한 정보를 들고 선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신라로 떠나는 배에 올라버렸다.의상이 신라로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묘는 용이 돼 뒤따르며 풍랑을 잠재워가며 의상의 뱃길을 인도했다. 의상이 신라에서 국왕을 만나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낱낱이 보고했다.이어 낙산으로 올라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뜻에 따라 낙산사를 건립했다.또 신라 국왕의 명을 받아 영주 부석사를 건립했다. 부석사에서 불법에 매달리는 의상을 보살피기 위해 선묘는 용이 돼 밤이면 암자에 운무를 드리우고 지붕에 똬리를 틀어 도적이든 짐승이든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며 의상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선묘는 밤이 늦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당당한 자세의 의상을 보다가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선묘의 눈에는 의상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낭군이었다. 그날따라 의상의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여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의상도 그날따라 선묘를 내치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줬다. 선묘는 그만 황홀경에 빠져 극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벽에 머리를 꽝 부딪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지만 생생한 느낌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선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선묘의 품에는 의상의 목침이 안겨있고, 어깨 위에는 그의 도포가 덮여있었다. 의상은 꼿꼿한 자세로 아미타불 앞에서 여전히 염불을 암송하고 있었다. 선묘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덮고 있던 의상의 도포를 곱게 개켜 두고는 지붕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선묘는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낭군님은 이미 불가의 제자다. 임의 공부에 방해가 돼서는 아니 된다. 나를 다스려야겠다’고 재차 다짐한 선묘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바위로 바꿔 버렸다. 스스로 욕심을 억제하고, 임의 옆에 머물며 돌볼 수 있는 부석이 돼 천 년 만 년 대사의 옆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팔우정공원에 신라 관모 조형물 설치 새로운 볼거리

경주시는 천마총 관모 조형물은 1500년 전 신라 관모를 모티브로 신라시대의 찬란했던 금속공예의 위상과 우수성을 재조명한 작품으로 지난해 9월부터 5개월 동안 제작해 최근 설치 공개하고 있다고 지난 1월31일 밝혔다.경주시와 경주문화재단이 추진한 이 사업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위축된 지역예술인들에게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시민과 관광객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일상에서 예술을 만나는 공공미술프로젝트 사업’으로 진행됐다.조형물은 높이 6.6m 폭 4.2m로 팔우정로타리에 우뚝 솟아 새로운 볼거리가 되고 있다. 조형물 내부에는 신라이야기를 테마로 한 회화작품 14점도 함께 전시해 경주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팔우정공원 인근 대릉원 돌담길 벽면의 지역작가 20명이 신라시대 유적과 유물을 모티브로 한 도자타일 작품 40점과 연계되면서 인기를 끌것으로 기대된다.경주시 관계자는 “신라천년의 귀하고 아름다운 유물문화재를 실내가 아닌 야외로 끌어내어 그 우수성과 가치를 재조명하고 역사문화도시인 우리 경주의 새로운 명물로 부상되어 경주를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5>원광법사(상)

원광법사는 신라십성에 이름은 오르지 않아도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의 조정에서조차 그의 공부를 높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신라 진평왕이 중국에 원광법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돌아왔다. 원광법사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들의 수련지침을 마련했다.청소년들이 수련하는 지침으로 삼았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표상으로 삼을 계율로 전해온다.그는 당시 중국으로 보내는 나라의 문서는 물론 왕실에서 작성하는 모든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삼국유사는 그의 일대기에 대해 당나라의 속고승전과 수이전 두 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각각 소개했다.두 기록은 원광법사의 성이 박씨와 설씨로 다르게, 또 죽음에 이른 나이도 99세, 84세로 다르게 전한다. 속고승전과 수이전에 전하는 원광법사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원광법사당나라 속고승전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씨 이다.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집안 대대로 이 땅에 살았다.또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도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해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연구했다. 그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다.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도 모자라지 않았다.끝내 스물다섯 살에 친척과 벗들을 떠나 배를 타고 중국 금릉으로 갔다.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불릴 때였다.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다.원광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했더니 칙명으로 허락했다.이렇게 해서 그가 처음으로 승려가 돼 구족계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해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연구는 8정에 통해 선한 일을 밝힘은 쉽게 행해지고, 질박하고 정직함은 어그러짐이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당시 산 밑에 살고 있던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했다.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해 마음에 꼭 들어 했다.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나라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하였다.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게 되어 잡혀 죽게 될 참이었다.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했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다.원광이 위기에 임해 감응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나라와 진나라의 문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개황 9년(589)에 수나라 임금이 있는 서울로 와서 지냈다.이때는 불법의 초회를 맞아 섭론종이 처음으로 일어나니 경전의 오묘한 말씀을 삼가 받들어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의 명성이 서울에 높이 드날렸다. 멀리 신라 본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했다.신라의 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해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온 나라가 그에게 쏠려 떠받들었고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교화하는 도리도 그에게 물었다.벼슬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실상은 나라를 통틀어 돌아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기회 있는 대로 교훈을 널리 펴서 지금까지도 모범으로 내려오고 있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99세이니 바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었다. 임종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 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진평왕은 신하들과 사냥하기를 좋아해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말을 타고 고성 숲을 내달렸다.진평왕 35년 초여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꿩이나 노루 멧돼지도 새끼를 낳아 번식이 한창일 때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은 활을 둘러매고 숲으로 들어갔다.이때는 봄 가뭄이 길어 농작물이 타들어가 백성들이 농사에 힘겨워 할 때였다. 몰이꾼들이 이리저리 뛰며 짐승들을 몰아대는데 훤칠하게 키 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은 아니하고 장미덩쿨 주변을 맴돌았다.진평왕은 시위를 당겨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노루가 가슴과 목에 살을 맞고 숲속으로 들어가 고꾸라졌다. 왕이 대신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목과 가슴에 통증이 심해져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어의가 백방으로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왕이 전국에 방을 붙여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고 점점 깊어져 수라상조차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이때 내인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원광법사의 내력이 심후해 만사에 통달했으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건의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광이 궁으로 들어와 불법에 대한 강론을 벌인지 7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거뜬하게 나아버렸다.원광법사가 강론을 펼칠 때는 가끔 몸체에서 신비한 광채가 나면서 방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기도 했다. 병이 완전히 나은 왕은 그때부터 원광법사를 곁에 두고 불법에 대한 강론은 물론 국사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하며 국사로 모셨다. 특히 호시탐탐 나라의 경계를 넘보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의 병력지원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원광이 작성했는데, 이를 읽어본 중국황제가 문장에 감탄하며 대뜸 병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치게 했다. 원광은 왕의 지나칠 정도의 존경과 대우를 받아 입적할 때까지 왕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나랏일을 도왔다. 법사는 100세가 되는 날에 황룡사 법당에서 고요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10일이나 공중에 뜬 채로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어 사방에서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박물관 한국 고대유리와 신라 특별전

국립경주박물관이 내년 3월1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특별전을 개최해 유리제품을 통한 신라의 역사문화교류에 대한 사실을 조명한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 고대 유리를 주제로 한 유리제품 1만8천여 점을 전시하는 최초의 대규모의 전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전시품에는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봉황 모양 유리병(국보 제193호)을 비롯한 국보 3건과 보물 8건이 포함돼 있다. 4천500년 전 지중해 지역에서 탄생한 유리는 기원전 1세기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되면서 로마 제국에서 널리 사용됐다.고대 동아시아에서 유리는 서역에서 온 진귀한 보물로 여겨졌다.오색을 띠며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주로 장신구에 활용됐다. 신라 능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유리그릇은 매우 놀랍고도 이례적 사례이다.이제까지 7개의 능묘에서 제대로 형태를 갖춘 유리그릇으로는 15점이 발견됐는데, 특히 황남대총의 경우 8점에 이른다.황남대총의 유리는 세계 다른 지역의 유리보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우며 다채로운 색과 기형을 보여준다. 최근 조사를 통해 유리제품의 생산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게 됐다.이집트, 시리아-팔레스타인, 코카서스 산맥 이남,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 졌을 거라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신라로 전해진 유리그릇은 신라인의 국제적 감각, 높은 심미안, 특별한 취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더불어 이번 특별전에서 고대 유리의 유형 중에서 주류를 이루는 구슬의 무궁무진한 변주를 선보인다.각양각색의 단색 유리구슬 이외에 상감이나 금으로 장식해 한층 화려한 모습을 띠는 유리구슬을 전시하고 제작방식도 설명한다.또 삼국시대 대표작을 중심으로 나라별 특색도 알려준다.예를 들어 백제의 다채로운 색, 가야의 수정과 유리의 조화, 신라의 청색 물결 등이라는 키워드로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한국 고대 유리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며 “이번 특별전은 한국 고대 역사와 유리를 둘러싼 여러 의문점의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전시휴식공간으로 탈바꿈

국립경주박물관이 2018년부터 3년 간 리모델링한 전체 전시의 주제관인 신라역사관을 8일 공개한다.내진설계 등을 마친 신라역사관은 안전하고 쾌적한 시설로 거듭나게 됐다. 경주박물관은 1실부터 4실까지 나누어져 있던 신라역사관을 3실로 통합하고, 남쪽 벽을 통유리로 리모델링해 안전하면서 편안한 관람시설로 꾸몄다. 신라 황금문화를 집중 조명한 신라역사관 2실을 2018년, 신라 천년의 태동을 소개하는 1실은 2019년, 삼국통일과 융성하는 통일신라 문화를 다룬 3실과 4실은 올해 하나의 전시실로 통합했다. 이번 개편을 통해 지진에 대비한 안전 강화는 물론 바닥부터 천정까지 시설 전면을 재구축해 한층 세련되고 편안한 공간으로 조성했다.또 중앙홀 공간을 확장 개선해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했다. 미로와 같던 이전의 전시공간을 한눈에 들어오는 열린 구조로 개선하고, 4m에 이르는 대형 유리 진열장을 설치해 개방감을 극대화하면서 감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라의 중앙 집권화와 삼국 통일과정, 통일신라 문화를 다루는 기존의 신라역사관 3·4실은 보다 알기 쉽고 통일성 있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3실로 통합했다.신라미술관에 있던 국은기념실을 이전해 1천200여 점의 문화재를 선보인다. 특히 신라역사관 3실은 최신의 연구 성과와 그간 축적된 신 발굴 자료를 엄선해 전체적으로 더욱 알차고 짜임새 있는 전시로 구성했다. 전시 전반부에서는 신라가 왕권을 강화하고 주변국을 복속하면서 통일을 이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또 신라 관등제의 성립과 신라 중앙 정부와 지방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 실물을 처음으로 상설 전시해 눈길을 끈다. 후반부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한층 발전하는 통일신라 문화를 소개한다. 신라 궁성과 왕경의 정비 과정, 당나라로부터 받아들이는 복식과 의복 등 통일신라 문화 전반을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연출했다. 진열장 유리는 모두 전면 저반사 유리(가시광선 투과율 99% 수준)를 채택해 편안하게 감상하도록 했다.이와 함께 조명도 박물관 전시에 최적화된 최신 LED로 전면 교체해 전시품 감상의 몰입도를 높였다. 경주박물관은 2016년 발생한 경주 지진 이후 관람객과 문화재 안전을 최우선으로 각종 면진 성능 개선 사업을 마쳤다.이를 통해 전시실은 규모 8.0의 지진에도 전시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신기술을 도입했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박물관 본래의 가치를 지키고, 관람객과의 소통의 폭은 더 넓히기 위한 국립경주박물관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신라천년의 왕궁 경주 월성 야간에 무지개궁궐로 변신

신라 천년의 왕궁터 경주 월성이 무지개 조명 설치로 야간에 화려한 궁성으로 부활한다.월성의 야경 조성으로 월성 일대의 동부사적지가 새로운 야간 문화관광 유적지로 떠오를 전망이다. 경주시는 월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월성 북동쪽 400m 구간에 경관조명 개선사업을 시행해 야간에 월성을 무지갯빛으로 환하게 밝혀 새로운 야간문화관광자원으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월성 구역에는 2004년부터 2년간 월성 북편 1.1㎞ 구간에 경관조명등 280개가 설치됐었다.하지만 15년이 지나자 조명등 노후화로 인해 전체 조명등의 1/3 가량만 점등되며 나머지는 빛을 잃었다.또 이로 인한 전기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아 교체해야 한다는 민원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경주시는 월성 경관조명 개선사업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사적지 환경을 조성하기로 하고 조명등과 음향시설 개선작업에 나섰다.2억5천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존 방전등을 친환경 에너지 절약형 LED 풀 컬러 조명등으로 교체하고 원격 조명제어시스템과 음향설비 등을 구축했다. 기존 설치된 배관과 배선을 최대한 활용해 공사비를 절감한 것.또 조명연출이나 표출시간을 원격으로 조정이 가능하도록 해 조명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월성의 야간 경관조명은 일몰 후 월성의 고즈넉한 정취와 어울리는 은은한 무지개 칠색의 불빛으로 연출된다.매시 정각부터 10분간은 ‘월성의 사계’와 ‘신라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한 화려한 조명과 다채로운 음악이 어우러지는 ‘조명쇼’가 펼쳐져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는 최근 경주의 야경을 대표하는 동부사적지 일대에 다양한 경관조명등을 설치하고 있다.지난해 첨성대에 팔색으로 변신하는 조명시설을 설치해 SNS 등에서 이색적인 볼거리로 소개되고 있다.지난달 계림숲의 야간조명등 설치에 이어 월성까지 무지갯빛으로 야간조명시설을 설치해 동부사적지 일대가 유명 야간관광자원으로 떠오른 것.경주시는 이번 월성 경관조명 개선사업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보여 월정교~계림~첨성대~월성~동궁과 월지로 이어지는 구간이 문화재 야간관광의 핫 플레이스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야간에도 천년고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야간 경관조성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에 놓인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겠다”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서예원 ‘석비’

구름이 지구를 수백만 번 감고 돌았으리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사계절은 또 몇 번이나 오고 갔을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없어지고 주변의 풍광이 생경할 정도로 바뀌어갈 즈음, 낯선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꿋꿋이 돌 위의 글씨를 붙잡고 버텨온 것이었다.깊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서 숨이 안 쉬어질 때면,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본인의 몸통에 아로새겨진 그때의 기록을 품고, 다시 빛 볼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1988년 추운 겨울에서야 땅속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잘 견뎌냈다고 혼잣말을 내뱉어보았다.처음 만난 세상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이었을 터. 기뻐할 새도 없이 포클레인으로 온몸이 들려져 길옆 개울에 무참히 버려지는 수모를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돌 몸통에 끝까지 붙들어두어 잃지 않았던 글씨들 덕분에, 마침내 그 가치를 증명해 내기에 이르렀다.석비는 모든 수고로움을 의연히 견뎌내어, 새로운 시대에 빛을 보았다. 당대에는 이름 없는 비석이었을지 모르나, 현대에는 과거 신라의 역사와 발자취를 좇는 사람들에게 ‘울진 봉평리 신라비’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신라 법흥왕 시대에서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그렇게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새겨진 기록은 단순하지만 그 기록이 말해주는 당시 시대상 덕분에, 이 석비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비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신라시대 비석들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중에는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세운 비석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진흥왕이나 법흥왕처럼 왕으로 태어나 특별한 업적을 세우며 살진 않았을 테니.울진 봉평리 신라비도 그 관심의 일부였다. 석비 발견 계기를 읽고 그 보존도 단순하게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전시관이 있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안에는 고비(告碑)와 함께, 울진 봉평리 신라비 발견을 특종으로 다룬 옛 신문기사도 전시되어 있었다. 획기적 사료라는 헤드라인에서 당시 사람들의 흥분과 떨림이 전해져왔다.신라 법흥왕 때 울진 지역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이들에 대한 처리와 형벌에 대해 회의하고 형벌을 집행한 내용이다. 현대로 치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석비를 통해 그 시대의 그 삶을 본다. 그 시절에도 제도를 갖추고 법을 집행하면서 온전한 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본다. 다시 돌 위에 간신히 남아 매달려 있는 글자들을 보았다. 바람과 물과 시간이 앗아가려 한 과거의 삶이 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엄숙해졌다.전시관 안 중앙에 보존되어 서 있는 그 위용을 한참 바라보았다. 발견된 날짜를 생일로 하면, 나보다 10개월 늦게 태어난 석비였다. 4면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땅 위에 제힘으로 온전히 발붙이고 서 있기 힘들어 보이긴 했으나, 중심은 잘 유지하고 있었다.감탄이 나왔다. 종이는 찢어지고 물에 젖고 불에 타서 영속성이 떨어진다. 돌은 다르다. 엄청난 충격으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 이상, 제 모양을 유지한다. 오죽하면 바람도, 물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천천히 돌의 표면에 흠집만을 내지 않던가.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비석도, 문명도, 참으로 위대하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이 글자라는 도구로 천 년 후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는 까닭이다.‘우리가 살던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어. 거기는 어때?’바람은 불고, 물은 흘러갔다. 사람은 생과 사를 반복하고, 시대는 변해왔다. 높이 204㎝의 공간에 거벌모라의 숨결을 그대로 담은 채, 비석은 그 오랜 생을 달려온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을.우리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도 바로 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건, 1천500년을 살아낸 이 비석 덕분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인 결과이며, 결국 역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신라인들도 우리보다 조금 일찍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 뿐. 결국 우리는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고 삶과 애환을 공유하는 같은‘인간’임을, 이 석비(石碑)를 통해 안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경주문화재야행으로 신라의 달밤 즐기고 누리자

코로나19 여파로 연기된 경주문화재야행 행사가 30일부터 11월1일까지 오후 5~10시 월정교와 교촌마을 일대에서 열린다.경주문화원은 경주시가 개최하는 경주문화재야행은 전통문화를 오늘날의 문화예술 형태로 발전시켜 관광활성화를 이끌고자 마련된 사업이다. 야행이 열리는 월정교와 교촌 일원은 신라와 조선의 역사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이곳에는 신라 시원인 계림, 신라궁성 월성, 왕릉과 고분들이 있는 동부사적지, 월정교지, 춘양교지 등의 문화재가 널려 있다.또 보물 경주향교 대성전, 국가민속문화재인 경주 최부자댁을 비롯해 사마소 등 신라와 조선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경주시와 경주문화원은 이 공간에서 야로, 야설, 야화, 야사, 야경, 야시 등의 일곱 개 주제로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를 연다. 행사는 ‘신라설화 인형극’, ‘교촌 달빛 버스킹’, ‘무형문화재 풍류마당’과 달밤에 여성들이 손에 손잡고 부르는 ‘월월이청청’ 등으로 진행돼 야행의 분위기와 흥을 돋운다.대성전 뜰에서 별을 보는 ‘신라의 밤 천체관측’, ‘신라복 체험’, ‘청사초롱 만들기’, ‘십이지 소원지 달기’, ‘아트 마켓’, ‘최부잣집 곳간을 열다’ 등도 펼쳐진다. 올해는 코로나 상황을 감암해 인터넷 사전 신청 300명으로 제한해 접수했으며 현재 예약이 완료됐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