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정양자 ‘백산가에 뜬달’ 당선소감

당선 문자를 받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가슴 속은 마구 쿵쾅거렸습니다. 뒤이어 복받쳐 오르는 울컥함은 더욱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 응모하는 것을 망설였습니다. 이제는 방향감각을 찾은 듯합니다.길을 모르고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해독하지 못하는 이정표로 방황한 시간이었습니다. 일상의 모서리에 쓸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강을 건너며 헤매기도 했습니다. 머리에서 엉킨 이야기들을 문장으로 옮기지 못하고 행간에서 서성이는 긴 시간도 있었습니다.글을 쓰는 일은 나를 비우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단단한 뼈대를 세우고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유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부족한 글재주는 폭넓은 독서를 통해 내 것으로 만들고 수필로 풀어내려합니다. 격려의 뜻으로 주신 상을 마중물 삼아 보다나은 작품으로 잦아 올려보겠습니다. 더욱 관조하는 자세로 저만의 색을 입힌 글밭을 일구어 나가겠습니다.저의 작품에 격려의 눈 맞춤을 보내주신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대구일보사장님 그리고 관계자님께 감사드립니다.경북문화체험과의 인연도 소중하게 여기며 좋은 작품을 빚어낼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습니다.△부산출생△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세명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언제나 그랬었지-천식 일기/ 김세환

가을 초입부터/ 잔가지 흔들어놓고// 턱없이 파고드는/ 빛살 고운 아린 몸살// 깊은 밤 하얗게 밝혀도 도도하게 피는 꽃// 한땐 자작나무/ 눈빛 깊던 맑은 바람// 편한 숨 과욕이라며/ 숨길 조여 헐떡이다// 그래도 못다 한 노래 서걱이며 타는 밤// 분주한 꽃길 따라/ 잰걸음 서두르다// 연약한 바람 앞에/ 얼굴 붉혀 송구한 날// 허전한 빈 들에 와서 다시 쓰는 젖은 시 「대구시조 제23호」(2019, 그루)김세환 시인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7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가을은 가을이게 하라」 「산이 내려와서」 「어머니의 치매」 「깨어 있는 사람에게」 「돌꽃」 등이 있다. ‘언제나 그랬었지’에는 부제로 천식 일기가 있다. 천식은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생기는 외인성천식과 기관지가 민감한 사람에게 세균이 침입해 생기는 내인성천식이 있고 자율신경계의 기능이 잘못돼 생기기도 한다. 폐기관지의 근육이 위축되고 기관지 점막이 부풀어 오르며 기관지 샘에서 점액이 과다하게 분비되면서 이때 나온 점액 때문에 기관지가 막혀 천식 발작 증상이 나타난다. 한 번 증상이 나타나면 한 시간 반에서 몇 시간 정도까지 계속 지속되므로 고통이 큰 병이다. 1970년대 중반 절박하게 겪은 일 중 하나가 천식이었다. 3년 간 천식을 앓으시는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천식이구나, 하고 자탄하곤 했었다. 밤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고, 연해 이어지는 거친 기침은 전신을 쥐어뜯듯 옥죄었다. 온몸의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오죽하면 천식 일기까지 시조로 쓰게 됐을까? 좀체 떠나갈 줄 모르고 몸을 괴롭히니 그것을 이기는 방도로 천식 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어쩔 수 없다면 동행해야 한다. 다만 늘 조심하고 잘 통제하면서 그 기세를 면밀히 방어하는 길밖에는 없다. 요즘은 워낙 의학이 발달해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잘 따르기만 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가을 초입부터 잔가지 흔들어놓고 턱없이 파고드는 빛살 고운 아린 몸살, 이라고 천식을 두고 노래한다. 함께 한 세월이 짧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또한 깊은 밤 하얗게 밝혀도 도도하게 피는 꽃, 이라고 하니 화자의 넉넉한 마음씨가 그대로 잘 드러나고 있다. 한때는 자작나무 눈빛 깊던 맑은 바람이었고, 편한 숨 과욕이라며 숨길 조여 헐떡이기도 했다. 그래도 못다 한 노래 서걱이며 타는 밤이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분주한 꽃길 따라 잰걸음 서두르다 연약한 바람 앞에 얼굴 붉혀 송구한 날에 시의 화자는 마침내 허전한 빈 들에 와서 다시 젖은 시를 쓰고 있다. 제목 ‘언제나 그랬었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늘 흔들림 없이 살며 천식조차도 때로 벗 삼아 동행하면서 삶을 영위하겠노라는 다짐 같은 것을 시의 행간 곳곳에서 읽는다. 사뭇 긍정적인 시선으로 자아와 세계를 관망하면서 내면을 다독이는 화자의 모습에 따사로운 눈길을 보내고 싶다.빛살 고운 아린 몸살과 도도하게 피는 꽃, 눈빛 깊던 맑은 바람과 다시 쓰는 젖은 시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보듬어 안으며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는 점에 신뢰가 간다. 이제 가을이 깊어져서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목덜미에 차다. 이리저리 떨어져 흩날리는 잎들이 스산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한 마음으로 만추의 단풍 길을 걸으며 소소한 행복을 고이 지켜갈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이명/ 이익주

밟고 오른 시간의 늪 서서히 파헤치며/ 철철이 읊어댄다 자진모리 흥에 맞춰/ 헝클린 오선 위에다 곡을 붙여 떼창이다// 누구냐 분란의 주범 호작질로 딴지 걸며/ 가파르게 올랐다 잽싸게 내리닫는/ 맴도는 세월의 원성 골이 깊은 해금 소리「대구시조」(2019, 제23호)이익주 시인은 경북 칠곡에서 출생해 198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달빛 환상」 「금강송을 읽다」와 시조선집으로 「향목의 노래」(고요아침, 우리시대 현대시조선 135)가 있다.‘이명’에서 이명은 바깥세계에 소리가 없는 데도 귀에 잡음이 들리는 현상이다. 특정한 질환이라기보다 귀에서 들리는 소음에 대한 주관적 느낌인 셈이다. 즉 외부로부터 청각적인 자극이 없는 상황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느끼는 상태여서 의학적으로는 자신을 괴롭히는 정도의 잡음이 들리는 경우를 두고 이명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이명’에서 화자는 밟고 오른 시간의 늪 서서히 파헤치면서 철철이 읊어대는 것을 듣고 있다. 그것도 자진모리 흥에 맞춘 것이다. 자진모리장단은 잦은몰이 또는 덩더궁이라고도 부른다. 잦은몰이는 빠르게 몰아간다는 뜻이다. 자진모리는 중중모리보다는 빠르고 휘모리보다는 느린 장단이다. 판소리에서 어떤 일을 길게 나열하여 서술하거나 극적이고 긴박한 장면에서 쓰인다. 그런데 화자는 이명에서 자진모리 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소리는 헝클린 오선지 위에다 곡까지 붙여서 떼창으로 연주 중이다.그래서 누구냐, 하고 도발적으로 물으면서 분란의 주범이 호작질로 딴지를 걸며 가파르게 올랐다 잽싸게 내리닫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것은 곧 맴도는 세월의 원성이면서 골이 깊은 해금 소리로 화자에게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해금은 속칭 깽깽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는 당악과 향악에 고루 쓰인다고 하나 악학궤범에서는 향악에만 쓴다고 기록했다. 현을 잡는 위치와 당기는 강약으로 음높이를 조절한다. 해금은 주로 대나무로 만들며, 활시위는 말총을 이용한다. 두 줄로 된 한국의 전통 찰현악기로서 소리는 청아하지만 연주하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악기다. 화자가 하고 많은 악기 중에 이명을 해금 소리로 끝맺고 있는 점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 깽깽이가 품고 있는 무언가 슬프고도 아름다운 선율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나이 들면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혼자 있다가 보면 이명 현상과 맞닥뜨리게 되는 때가 흔하다. 그래서 온갖 일들이 클로즈업 되어 눈앞에 어른거릴 때 때로 이명에 시달리면서 또 때로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남모를 추억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다.그는 또 ‘북소리’에서 희망가를 부른다. 북소리는 전쟁터에서는 진군을 재촉하는 사기충천의 소리로, 경기장에서는 힘찬 응원의 소리를 낸다. 이 작품에서는 시선이 좀 다르다. 술렁이는 지평선 출발선상에 올라 봄볕이 보낸 낭보 두근대며 펼쳐들게 되는 그때 바람벌 말발굽 소리 양수처럼 터지는 상황을 시의 화자는 직시한다. 봄볕이 보낸 낭보가 바람벌 말발굽 소리와 결합하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북소리는 마침내 달빛도 떨려오는 아득한 마지노선 불길처럼 휘감겨 기둥으로 솟았다가 이내 묵묵히 바람의 함성을 울림으로 잠재운다. 각자 자존과 위의를 지키기 위한 방도로 북소리를 마음 속 깊이 압축파일로 저장해 놓았다가 삶속에 조금씩 풀어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해금소리, 북소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시인의 눈길이 따사롭다. 이정환(시조 시인)

어머니 설법/ 하순희

내 몸에 상처진 것들 뜨락에 꽃으로 핀다/ 발목 걸고 넘어지던 무수한 일들도/ 생명을 실어 나르는 나뭇가지 물관이 되어// “한 세상 살다 보믄 상처도 꽃인 기라/ 이 앙다물고 견뎌내몬 다 지나가는 기라/ 세상일 어려븐 것이 니 꽃피게 하는 기라// 그라모 니도 므르게 다아 나사서/ 더 께져 아물어진 헌디가 보일기다/ 마당가 매화꽃처럼 웃을 날이 있을 기다”「종가의 불빛」(2019, 고요아침)하순희 시인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1989년 ‘시조문학’지에 추천완료, 199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별 하나를 기다리며」 「종가의 불빛」 동시조집 「잘한다잘한다 정말」과 시조선집 「적멸을 꿈꾸며」(현대시조 100인선 90번, 태학사, 2004) 등이 있다.‘어머니 설법’에서 애틋하고 애절한 어머니의 사랑을 읽는다. 내 몸에 상처진 것들이 뜨락에 꽃으로 피는 것을 보면서 발목 걸어 넘어지던 무수한 일들도 생명을 실어 나르는 나뭇가지의 물관이 되는 것을 느꺼워한다. 이어서 어머니의 말씀이 한 세상 살다 보믄 상처도 꽃이며, 이 앙다물고 견뎌내몬 다 지나가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또한 세상일 어려븐 것조차도 니 꽃피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이른다. 그라모 니도 모르게 다아 나아서 더 께져 아물어진 헌디가 보일 것이라면서 마당가 매화꽃처럼 웃을 날이 다가오리라고 조언한다. 어머니의 육성을 들려주듯 구어체로 생생하게 진술함으로써 정감을 더할 뿐만 아니라 적잖은 위로와 힘이 되고 있다.그의 다른 작품 ‘어머니의 유산’ 역시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아흔 셋 길 떠나신 초계 정씨 내 어머니는 자 하나 가위 하나 버선 한 켤레로 남으셨지만, 그 가르침 즉 바르게 선하게 살아라 그른 길은 자르거라, 라는 말에서 보듯 단정하면서 단호하신 데가 있는 분이었다. 자나 가위가 그냥 남겨진 것이 아님을 엿본다. 그리고 차운 발을 데우는 버선처럼 살거라, 라는 말씀이 떠올라 꽃다지 피는 봄날 여린 쑥을 캐면서 바람결에 날아서 오는 환청 같은 그리움에 젖어들기도 한다. 하여 떨어지는 꽃그늘로 더디 오는 후회 앞에 나뭇가지 적시며 빗줄기에 스미는 청매화 향기로라도 가닿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긴 여운을 안긴다.또 한 편 어머니에 관한 글 ‘조장’은 더욱 간절하다. 마음 쓸쓸히 헐벗은 날 그 목소리 들린다면서 잘 있제 잘 하제, 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그래서 푸른 울타리로 살거라, 라는 말씀이 큰 울림을 준다. 내 죽으믄 무덤 만들지 말고 말짱 태워서 곱게 가루 내어 찹쌀밥 고루 버무려 새한테 주거라, 라는 마지막 부탁은 실로 애절하다. 말짱 태우는 일은 자식으로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하고자 한다. 참으로 숭고하다. 이렇듯 숙연한 날 때 없이 헛헛해 오는 저린 손을 비비면 바람소리 물소리 선연한 풍경소리 가운데 깊은 뜻 새소리로 남아 젖은 길을 날아오르는 것을 본다.신석기시대, 북방계 민족이 사용하던 토기로 그릇 표면에 빗살과 같은 무늬를 새겨 넣었고 밑바닥은 대개 둥글거나 뾰족하게 만든 토기를 보며 상상력을 작동한 ‘즐문토기’에서 그 당시 도공이 마디마디 각인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새로이 잎을 내는 맥문동 여린 꽃대에 내리며 녹아버리는 흰 눈발에서 시의 화자는 영혼을 흔드는 무늬를 본다.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여러 문양을 아로새겨간다. 어떤 무늬가 우리 속에 수놓이고 있는지는 모를 테지만, 언제 불러도 늘 부르고 싶은 어머니를 한 번씩 마음 속 깊이 울먹울먹 부르면서…. 이정환(시조 시인)

오키나와의 화살표/ 오승철

오키나와 바다엔 아리랑이 부서진다/ 칠십여 년 잠 못 든 반도/ 그 건너/ 그 섬에는/ 조선의 학도병들과 떼창하는 후지키 쇼겐// 마지막 격전의 땅 가을 끝물 쑥부쟁이/ “풀을 먹든 흙 파먹든/ 살아서 돌아가라”/ 그때 그 전우애마저 다 묻힌 마부니 언덕// 그러나 못 다 묻힌 아리랑은 남아서/ 굽이굽이 끌려온 길,/ 갈 길 또한 아리랑 길/ 잠 깨면 그 길 모를까 그려놓은 화살표// 어느 과녁으로 날아가는 중일까/ 나를 뺏길 반도라도/ 동강 난 반도라도/ 물 건너 조국의 산하, 그 품에 꽂히고 싶다 「화중련」(2020, 상반기호) 오승철 시인은 제주 출생으로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개닦이」, 「사고 싶은 노을」, 「터무니없다」, 「오키나와의 화살표」 등이 있다.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회자된 적이 있다. 맞는 얘기다. 제주에서 태어나서 한평생 제주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시인이 쓰는 거개의 시편들이 제주를 노래하고 있다면 그 작품들은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잘 활용하여 시의 지경을 넓히고 있다. ‘오키나와의 화살표’를 보자. 본문에 나오는 인물 후지키 쇼겐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그 후 조선학도병 740인의 위령탑 건립과 유골 봉안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의 최남단에 있고, 류큐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첫 수 첫줄부터 눈길을 끈다. 오키나와 바다엔 아리랑이 부서진다, 라는 구절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우리 겨레의 노래인 아리랑이 먼 이국땅 바다에서 부서진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조선학도병들이 희생된 곳이기 때문이다. 칠십여 년 잠 못 든 반도 그 건너 그 섬에는 조선의 학도병들과 떼창하는 후지키 쇼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마지막 격전의 땅 가을 끝물에 우리나라 남부 지역과 일본에 분포하는 여러해살이풀인 쑥부쟁이를 등장시키면서 풀을 먹든 흙을 파먹든 살아서 돌아가라, 라고 외친다. 그때 그 전우애마저 다 묻힌 마부니 언덕에서다. 그러나 못 다 묻힌 아리랑은 남아서 굽이굽이 끌려온 길이요, 갈 길 또한 아리랑 길이어서 잠 깨면 그 길을 모를까 그려놓은 화살표를 통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노래한다. 하여 어느 과녁으로 날아가는 중일까, 라면서 나를 뺏길 반도라도 동강 난 반도라도 물 건너 조국의 산하인 그 품에 꽂히고 싶다, 라고 시의 화자는 조선 학도병의 간절한 염원을 애절하게 대변하고 있다. 오래된 장르인 한국시조문학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동시대성에 치열하게 직면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는 그런 점에서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시인이다. 작품 속에 제주 4·3사건을 적잖게 노래했고, 제주 특유의 정서와 풍광과 애환을 시조 3장의 행간에 담는 일에 매진해 왔다. 대구의 명소 수성못의 물꼬를 튼 산파는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다. 1914년 개척농민으로 가족과 함께 물 건너 왔다가 가뭄과 홍수 피해를 막고자 인공 못인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를 기리는 행사가 해마다 대구에서 열리고 있다. 이런 일은 한일 간의 우호·교류 증진에 이바지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후지키 쇼겐이나 미즈사키 린타로는 우리가 오래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일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편‘오키나와의 화살표’를 한 번 더 음미해 보았으면 좋겠다. 이정환(시조 시인)

겸재의 물안개-인왕제색도/ 윤금초

겸재의 물안개-인왕제색도/ 윤금초빗기 아직 덜 가신 산녘/ 물안개 인왕을 가둔다.// 주저 않고 그어 내린 저 준법 바위벼랑/ 물소리 댓바람소리 여름한낮 떠메고 간다.// 숨 돌릴 겨를 멀리/ 단숨에 녹여낸 듯/ 먼 산 검정 암벽, 가까운 산 미점으로// 검푸른 인왕의 낯빛 에누리 없이 받아낸다.「좋은시조」(2020, 여름호) 윤금초 시인은 전남 해남 출생으로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 입상과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어초문답」, 「땅끝」, 「무슨 말 꿍쳐두었나?」, 「앉은뱅이꽃 한나절」 외 다수가 있다. 그는 현실적 시간 속에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는 우의로서의 시조의 가능성을 연 시인이다. 반세기 넘는 성상 동안 남다른 시조사랑으로 창작과 더불어 시조이론서 저술과 후학 양성에도 힘써 시조문단을 융성케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시인들은 그림을 보고 시를 쓸 때가 많다. 특별한 감흥이 일어나면 속으로 오랫동안 궁굴리다가 한 편의 시로 완성한다. 이처럼 시는 그림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시를 보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겸재의 물안개’도 그러한 연유에서 빚어진 작품이다.‘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5세인 1751년 비온 뒤의 인왕산 정경을 그린 것이다.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았던 정선이 비온 뒤 맑게 개고 있는 산의 모습을 화동 언덕에서 바라보며 받은 인상과 감흥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도달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명품이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기 그지없다. 빗기 아직 덜 가신 산녘 물안개가 인왕을 가두는 것을 본다. 이로 말미암아 은은한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또한 주저하지 아니 하고 그어 내린 저 준법 바위벼랑을 통해 물소리와 댓바람소리가 여름한낮을 떠메고 간다. 여기서 준법은 산수화를 그릴 때 산, 바위, 흙으로 쌓아 올린 둑 등의 입체감, 양감, 질감, 명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을 처리하는 유형적인 기법을 가리키는데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화법이라고 한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를 그리면서 준법을 원용한 것이다. 이 화법은 숨 돌릴 겨를 없이 단숨에 녹여낸 듯이 먼 산은 검정 암벽으로 가까운 산은 나무나 산수 등을 그릴 때 붓을 옆으로 뉘어서 가로로 찍는 작은 점인 미점으로 처리한다. 그 순간 검푸른 인왕의 낯빛을 에누리 없이 받아내게 된다. 두 수의 시조 ‘겸재의 물안개’에서 보듯 인왕제색도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산수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역동적인 바위벼랑과 함께 화면에서 물소리와 싱그러운 댓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겸재가 변화와 무게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편필과 묵찰법을 활용해 실경들을 사생하면서 창안한 산수화 기법으로 완성한 인왕제색도는 수백 년이 지난 후 한 편의 시조 ‘겸재의 물안개’로 변주돼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고유의 화풍이어서 더욱 값어치가 있듯 무엇보다 고유의 시인 시조로 ‘인왕제색도’를 담백하게 노래하고 있어서 마음을 정화시킨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찾아 한동안 뚫어지도록 바라보다가 역시 놀라운 그림이구나 하고 찬탄하면서 시인의‘겸재의 물안개’를 다시 읽는다. 이처럼 그림과 시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정신의 위의를 다시 한 번 깨우쳐주고 있어서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바쁜 일상을 잠시 밀쳐두고 가까운 산에 올라 여름 숲의 싱그러움을 맛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정환(시조 시인)

명옥헌/ 고성만

나는 그 연못에서 고갤 묻고 울었습니다/ 당신도 그랬나요/ 하마 많이 아팠겠지요/ 물 위엔 붉은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져요// 인연은 바람 같다 그렇게들 말하지만/ 이미 늦어 때늦어/ 말매미 울음소리/ 당신도 나의 자취도/ 하마 많이 스러졌겠지요시조집 「파란, 만장」 (2020, 고요아침) 고성만 시인은 전북 부안 출생으로 201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파란, 만장」이 있다. 그의 첫 시조집은 신선한 시어 차용, 빈틈없는 구성력, 맺고 푸는 음보의 능수능란함이 눈길을 끈다.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에 치중하고 있는 점도 바람직하다. 다양한 전개 방식을 통해 정형화를 탈피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점도 좋다. 그는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존재론적 성찰과 자연친화적인 서정 세계, 무구한 사랑에 대한 탐구에 힘쓰고 있다. 이처럼 「파란, 만장」이 함유하고 있는 시 세계는 다채롭다. 폭과 깊이가 있다. 감각의 촉수가 섬세해 사물과 세계를 육화하는 기량이 남다르다. 또한 그의 시편은 그의 자애로운 품성처럼 촉촉이 젖어 있고, 독자의 마음에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명옥헌’을 보자. 읽는 동안 눈물이 저절로 맺힐 듯하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의 정자다. 정자의 한가운데에 방이 위치하고 그 주위에 ㅁ자 마루를 놓은 형태로 소쇄원의 중심건물인 광풍각과 동일한 평면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호남 지방 정자의 전형이라고 한다. 방이 있는 정자에서는 별서의 주인이 항상 머무를 수 있고, 공부를 하거나 자손들을 교육할 수도 있다.담양의 명소 명옥헌에서 화자는 나직이 읊조린다. 나는 그 연못에서 고개를 묻고 울었다고. 고개를 묻고 울만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그랬는지 조심스레 묻는다. 하마 많이 아팠을 것이라고. 그 아픔의 정도는 물 위에 붉은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넉넉히 헤아릴 수 있다. 인연은 바람 같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은 적이 있는 화자는 말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미 늦어 때늦어, 라는 수사를 통해 속 깊이 자탄한다.말매미는 곤충강 노린재목 매미아목 매미과의 곤충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매미다. 가로수에서 무리를 지어 울며 밤에도 불빛이 있으면 합창을 하는데 울음소리는 무엇을 쏟아 붓듯 시끄럽게 운다. 시의 화자가 왜 말매미 울음소리를 제시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젠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신도 나의 자취도 하마 많이 스러졌겠지만 어찌 서로 마음 깊이 나눈 이야기들이 가실 길이 있을까, 하면서 배롱나무 꽃이 만개한 명옥헌과 더불어 기억 속에 생생히 새기고 있을 것만 같다. 시조집에서 읽은 작품 중에 인상 깊은 단시조로 ‘문득,’이 있다. 이별이라니 문득, 이 말을 들었을 때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라면서 마음에 자라나는 뼈 물결치는 메아리, 라고 맺고 있는 애절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 받으면 한순간 평온은 무너져 내리고 캄캄한 절망의 벽과 맞닥뜨리게 된다. 어쩌면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보다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연의 끈이 종내 끊어지고야 만다면 어찌 쉬이 견디랴. 물결치는 메아리를 감당치 못하고 온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지도 모른다.그의 시는 이처럼 아름답고 아프고 슬프다. 그러나 한 방울의 이슬 같은 슬픔이 우리 삶을 견인하는 힘이 될 수 있기에 슬픔조차 행복한 일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이정환(시조 시인)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세상은/ 김연희

황금네거리 이면 도로엔 붉은 십자가가 다섯, 입구가 가리어진 모텔이 여남은 개// 세상은/ 사랑으로 넘쳐나고// 폐지 리어카는/ 비에 젖고 「정음과 작약 창간호」 (2017, 그루) 김연희 시인은 강원도 태백 출생으로 201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서예·문인화가이기도 하다. 시중유화, 화중유시의 길을 찾아 묵묵히 걸으며 예술혼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고 있는 시인이다. 우리 살고 있는 대구라는 큰 도시는 살기 좋은 곳이다. 특히 오래 전부터 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숲이 우거진 곳이 많아 푸른 대구라고 불러도 좋을 만하다. 얼마 전 대구를 처음 방문한 이가 생각보다 교통도 편리하고 도심지가 깨끗해 아늑한 느낌을 안겨준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대구는 살기 좋은 곳이다. 물론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상철인 3호선 하나만 보고도 서울에서 온 손님이 신기해하면서 한 번 타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3호선은 실제로 아주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나쁘지 않다. 이젠 명물이 됐다. 안전하게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단시조 ‘세상은’은 세상살이의 모순을 조심스레 풍자하고 있다. 그 비유가 간명하면서도 적절해 읽는 맛을 더한다. 초장과 중장을 이어 붙인 장면 설정을 눈여겨볼 일이다. 대구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황금네거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 이면 도로엔 붉은 십자가가 다섯이나 보인다고 하고 또한 입구가 가리어진 모텔이 여남은 개가 있다고 진술한다. 화자는 굳이 왜 이러한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보이는 대로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다.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와 잠과 휴식의 공간인 모텔은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아가페와 에로스다. 어쨌거나 사랑이다. 그래서 화자는 종장 전구에서 세상은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다고 뒤틀어서 노래한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구현되고 있는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타정신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화자의 시선은 어느 한 곳으로 꽂힌다. 즉 폐지 리어카가 비에 젖고 있는 광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는 듯하지만, 마냥 비에 젖고 있는 폐지 리어카는 그 사랑의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한 정황이다. 이것은 생생한 현장 비유다. 단시조 ‘세상은’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은 이렇듯 의미심장하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려운 이웃을 배려했으면 하는 간절한 뜻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마음을 크게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크루지처럼 지독한 구두쇠도 종내 마음 문을 열고 크게 베푸는 것을 오래전 이야기 속에서 읽은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시인은 시로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구호나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고급한 언어로 직조된 적절한 비유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으로 세상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어두운 길을 밝힐 수 있는 것이 비단 등불만은 아닌 것이다. 잘 빚어진 한 편의 소우주는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만구성비로 그 생명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많이 봐왔다. 일러 명작, 명시라는 작품들이다. ‘세상은’을 되풀이해서 음미해 보라. 어떤 삶을 살아가야 옳은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직시할 수 있지 않는가? 이정환(시조 시인)

극단시소 창단 10주년 기념공연 ‘더 해프닝’, 대구 남구 우전소극장 무대에 올려

극단시소(대표 안건우)가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으로 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더 해프닝’을 무대에 올린다.지난 2016년 초연 이후 세 번째 공연으로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대구 남구 대명동 대명공연거리 우전 소극장에서 공연된다.‘더 해프닝’은 배우의 연기력이 압권인 2인극으로 초연 이후 계속해서 극중 선우 역할을 맡아온 지역 연극계를 대표하는 관록의 배우 이송희씨가 주역을 맡는다.또 이번에 새롭게 합류한 신예연기파 배우 이우람씨가 상대역인 태식을 맡아 연기대결을 펼친다.연극은 사설감옥에 갇힌 두 남자의 이야기다.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 두 명의 남자가 각자의 사연과 슬픔과 분노를 삭이며 감옥 안에서 외롭고 처절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같은 방에 모이게 되면서 이들의 짧은 동거가 시작 된다.모든 것이 너무나 다른 두 남자. 닿을 수 없는 공간의 거리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갈등은 증폭 되고, 악마같은 시간의 흐름은 잊고 싶었던 둘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놀라운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올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된 작가이자 연출가인 안건우 극단 시소의 대표가 쓴 작품이다.안 대표는 “‘더 해프닝’을 통해 관객이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시대에 스스로 만든 외로움 같은 감옥의 쇠창살을 뚫고 나와 욕망이 무뎌지고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2010년 창단해 연극 ‘굿킬’을 시작으로 ‘해일’, ‘늙은 창녀의 노래’, ‘더 해프닝’ 등의 창작극을 통해 관객과 함께해온 극단시소는 2015년 제27회 거창국제연극제에서 ‘행복한 가’로 대상과 연출상을 차지한 내공있는 극단이다.극단 시소의 10주년 기념공연 ‘더 해프닝’의 관람료는 예매 1만5천 원, 현장매표 2만 원이다. 문의: 010-9448-0338.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헌시

헌시 성국희 당신은 궁서체로 새겨진 책입니다/ 밥상머리 하신 말씀 밑줄 붉게 그어놓고/ 아직도 못다 읽은 책, 아버지란 책입니다당신은 뿌리 깊은 한 그루 나무입니다/ 바람 잘 날없었어도 꿋꿋하게 버텨내신/ 당신은 밑동이 굵은 아버지란 나무입니다당신은 어디서든 길이 되는 지도입니다/ 길 잃은 자식들 앞에 이정표가 되어주신/ 당신의 깊은 주름살, 아버지란 지도입니다당신은 지지 않는 저 하늘의 태양입니다/ 사남매 삶 속에서 늘 밝은 빛이 되신/ 당신은 가장 뜨거운, 아버지란 태양입니다글이 되고 그늘이 되고 길이 되고 빛이 되신/ 아버지, 그 이름 앞에 큰절을 올립니다/ 갚아도 못 다 갚을 사랑, 당신께 바칩니다-『미쳐야 꽃이 핀다』(목언예원, 2020).....................................................................................................................성국희는 경북 김천 출생으로 2011년 서울신문과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꽃의 문장』『미쳐야 꽃이 핀다』가 있다. ‘헌시’는 아버지 고희에 부쳐라는 부제가 있는 사부곡이다. 간절한 마음이 전편을 관주하고 있다. 딸에게 아버지는 특별한 분이다.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딸을 어여삐 여기고 세상의 모든 딸은 아버지를 극진히 생각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딸은 훌륭하게 자라서 훗날 좋은 어머니가 된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나 딸에게는 큰 나무다. 어머니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넉넉히 받은 자녀는 비뚤게 자랄 수가 없다. 그래서 화자는 당신은 궁서체로 새겨진 책이라고 말한다. 밥상머리에서 하신 말씀을 밑줄 붉게 그어놓고 아직도 못다 읽은 책이 아버지라는 책이라고 힘주어 이야기 한다. 칠순이라면 적잖은 연륜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회갑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가 많았다. 요즘 70세는 아직도 청년이다. 건강을 잘 유지한 분들은 활기가 넘친다. 화자는 또 당신은 뿌리 깊은 한 그루 나무로서 바람 잘 날 없었어도 꿋꿋하게 버텨내신 밑동이 굵은 아버지라는 나무라고 노래한다. 어디서든 길이 되는 지도여서 길 잃은 자식들 앞에 이정표가 되어주신 깊은 주름살은 아버지라는 지도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당신은 지지 않는 저 하늘의 태양이기에 사남매 삶 속에서 늘 밝은 빛이 되신, 가장 뜨거운 아버지라는 태양이라고 형용한다. 하여 글이 되고 그늘이 되고 길이 되고 빛이 되신 아버지, 그 이름 앞에 큰절을 올리면서 고희를 경하 드린다. 갚아도 못 다 갚을 사랑을 당신께 바친다. ‘헌시’는 다소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정서가 진중하고 절절하여서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로서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흔히 돌아가시고 나서 기리는 마음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한 가운데 고희를 맞은 아버지를 위해 시인으로서 이러한 사부곡을 써서 직접 육성으로 읽어드리게 되니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 아버지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법하다. 그 어떤 효도보다 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기에 복된 일이다. 그는 젊은 시인으로서 시조라는 시의 한 갈래를 선택하여 창작자의 길을 걷고 있는데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고뇌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신작 시조집 곳곳에 자신만의 시조론을 개진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고 궁구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귀해 보인다. 이정환(시조 시인)

낭길

낭길 정경화섬은 아주 조용히, 길 하나를 낳았네/ 육지서 따라온 시간 잠시 멈춰 두라며/ 새우란 금빛 향기가 계집처럼 반기네섬은 아주 가파른, 길 하나를 닦았네/ 손금보다 짜디짜도 투정 말고 걸으라며/ 파도살 목쉰 호령이 귓밥을 깨우네섬은 아주 먼, 길 하나를 열었네/ 아무나 밟지 않아 뒷모습이 더욱 푸른/ 통치마 추슬러 놓고 고름 슬몃 풀어두네.....................................................................................................................정경화는 대구 출신으로 2001년 동아일보와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풀잎』『시간 연못』, 시조선집 『무무무 걸어 나오고』등이 있다.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시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시인이다. 낭길은 청산도 절벽에 난 길을 이른다. 길 이름이 미묘한 울림을 안긴다. ‘낭길’의 첫 줄은 섬은 아주 조용히, 길 하나를 낳았네로 시작된다. 시를 쓸 때 첫줄을 뽑아내는 일은 지난하다. 첫머리만 잘 풀리면 술술 전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모두 고심을 많이 한다. 낭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섬이 출산한 길이다. 아름다운 섬 청산도가 낳은 길인만큼 의미가 크다. 그 길에는 육지의 삶을 먼발치에 밀쳐버리라는 귀한 생명이 서식하고 있다. 육지에서 따라온 시간을 잠시 멈춰 두라고까지 하는 존재는 바로 새우란이다. 금빛 향기가 계집처럼 반기고 있다. 별안간 계집이라고 하니 다소 뜻밖일 수 있지만 몹시 정겨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향기조차도 금빛이니 최상의 향연과 맞닥뜨렸다. 행운이 따른 것이다. 섬이 낳은 길은 아주 가파른 길이다. 잘 닦아놓기는 했지만 쉽게 오고갈 수 없는 험한 길이다. 그 길을 손금보다 짜디짜도 투정 말고 걸으라며 파도살 목쉰 호령이 귓밥을 깨우는 것을 듣고 있다. 그래서 섬은 아주 먼 길 하나를 열었고 그 길은 아무나 밟지 않아 뒷모습이 더욱 푸르러 통치마 추슬러 놓고 고름을 슬몃 풀어두고 있다. 미묘한 장면의 연출이다. 그리고 셋째 수에 나타난 통치마라는 시어를 통해 첫수에서 계집이라는 말이 왜 등장했는지 헤아릴 수 있다. 누구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림을 그리거나 시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특히 여행을 통해 시상을 얻기 좋은데 막상 돌아와서 써보려 하면 수월치가 않다. ‘낭길’은 여정에서 얻은 작품이지만 기행시는 아니다. 그 속에 화자만이 구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고 미학적 의미형성과 미묘한 가락이 축조되어 있다. 어떻게 시가 생산되는지를 ‘낭길’은 여실히 보여준다. 그 길은 실로 아무나 밟을 수 없는, 밟아서는 아니 되는 가파른 길이다. 육지의 삶에 계속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신성한 길이다. 먼 남도 땅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청산도는 시인의 시 ‘낭길’을 통해 다시금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 부여는 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다. ‘낭길’은 운율종결어미인 네를 각 수마다 두 번 씩 여섯 번 되풀이하고 있다. 소월의 시 ‘산유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낳았네, 반기네, 닦았네, 깨우네 열었네, 라고 다섯 번을 3음절로 이어가다가 마지막을 풀어두네라고 4음절로 마무리함으로써 리듬에 변화를 준 것도 눈여겨볼 점이고, 각 수 초장에서 조용히, 길 가파른, 길 먼, 길이라고 세 번 반점 처리를 한 것도 의도적인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이렇듯 치밀한 전략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시는 정말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더욱 도전의식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올해가 가기 전‘낭길’을 읊조리며 청산도를 한번 찾아가보시기를…. 이정환(시조 시인)

꽃마니

꽃마니임채성심마니 삼을 찾듯 꽃을 좇아 꽃마니라/ 아내 몰래 할부로 산 카메라 둘러메고/ 꽃 앞에 납작 엎드린 꽃마니가 있었네야생의 꽃을 탐해 야생으로 사노라며/ 해돋이 해넘이를 마른 숲에 묶어 두고/ 뭇 꽃과 눈을 맞추는 꽃마니가 있었네노루귀 처녀치마 앉은부채 얼레지까지/ 그 싹 행여 밟을세라 고승 같은 걸음발로/ 본 꽃도 보고 또 보는 꽃마니가 있었네성에 낀 가슴속에 못다 일군 꽃밭뙈기/ 홀로 피는 봄꽃처럼 도시를 멀리한 채/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가 아직 있네........................................................................................................................임채성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고 시조집으로 『세렝게티를 꿈꾸며』『왼바라기』와 시조선집『지 에이 피』등이 있다. 언어 감각과 개성이 남다르고 우리를 둘러싼 삶과 세계를 직시하면서 한 편의 시조로 형상화하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꽃마니’는 호흡이 긴 작품이다. 심마니 삼을 찾듯 꽃을 좇아 꽃마니라에서 보듯 아름다운 꽃을 찾아 카메라 앵글을 맞추는 화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카메라는 아내 몰래 할부로 산 것이다. 그것을 둘러메고 꽃마니는 꽃 앞에 납작 엎드린다. 자연 앞에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화자는 야생을 꿈꾼다. 그의 첫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에서 보듯 야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아프리카 세렝게티를 마음껏 내닫고 싶어 하듯이 야생의 꽃을 탐해 야생으로 살고자 한다. 그것은 곧 해돋이 해넘이를 마른 숲에 묶어 두고 뭇 꽃과 눈을 맞추는 꽃마니의 삶이다. 온갖 꽃들로부터 받는 영감은 늘 새로운 것이다. 그들과 눈을 맞추면서 한없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각양각색의 꽃은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이자 삶을 새롭게 하는 정서적 자극이 되기도 한다. 그 생김새와 향기는 또 다들 달라서 마음을 끌어당긴다. 묘한 아름다움을 필설로는 다 표현하지 못한다. 노루귀 처녀치마 앉은부채 얼레지까지 그 싹을 행여 밟을세라 극히 조심스러운 걸음발로 본 꽃도 보고 또 본다. 본 꽃을 또 보아도 더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면서 성에 낀 가슴속에 못다 일군 꽃밭뙈기를 생각한다. 그는 홀로 피는 봄꽃처럼 도시를 멀리한 채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로 지금도 어느 산골짜기나 들판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꽃마니’는 제2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평은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평가하고 있다.‘꽃마니’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정형시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꽃마니’의 매력은 시의 눈인 심마니의 변용 즉 꽃마니의 발견과 명명에서 발현된다. 아내 몰래 할부로 산 카메라 둘러메고 나가서 뭇 꽃과 눈을 맞추거나, 보고 또 보는 홀림에 빠지거나 심마니와 꽃마니로 시를 찾아 헤매는 ‘시마니’까지 담보한 것이다. 낯익은 꽃과 낯익은 형식에 부여한 새로움은 말맛을 높이는 리듬과 함께 반복의 활용을 더욱 유장하게 만든다. 넷째 수 종장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에 오면 한 편의 완결이자 극치를 이룬다.정형의 기율은 옛것이되 시조의 형식은 태생적으로 변용과 변주가 가능하다.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각 마디마다 얼마간의 변화가 가능하다. 흔히 이것을 두고 가변성이라고 한다. 요체는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에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담긴 내용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 그때 시조는 현재적 가치를 지닌 시의 한 갈래로서 그 몫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 꿈에 보고

뻐꾸기가 쓰는 편지-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 꿈에 보고 박기섭뻐꾸기 봄 한철을 갈아낸 그 먹물을 내가 받네 내가 받아 한 장 편지를 쓰네 어디라 머리칼 한 올 잡아볼 길 없는 네게 너 있는 그곳에도 봄 오면 봄이 오고 봄 오면 멍든 봄이 멍이 들고 그런가 몰라 서럽고 막 그런가 몰라 꽃 피고 또 꽃 진 날에 너 나랑 눈 맞춰 둔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꽃이면 꽃이랄 것가 꼭 꽃만도 아닌 것아 너 다녀간 꿈길 끝에 찬비만 오락가락 오락가락 찬비 속에 목이 젖은 먼 뻐꾸기 젖은 목 말리지 못한 채 먹점 찍는 먼 뻐꾸기-《발견》(2019, 겨울호).....................................................................................................................박기섭은 달성 마비정 출생으로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키 작은 나귀타고』『默言集』『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엮음 愁心歌』『달의 門下』『角北』『서녘의, 책』등과 시조선집『비단 헝겊』이 있다. 그는 등단 이후 주정과 주지를 넘나들며 개성적인 목소리의 발현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현대시조가 나아갈 방향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내밀한 서정세계로 출발해서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주지적인 시조 세계를 개척하여 시조가 단아한 서정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우는데 크게 기여했다.‘뻐꾸기가 쓰는 편지’는 그가 얼마나 농밀한 서정세계를 시조로 잘 읊조리는지 여실히 알게 하는 시편이다. 부제 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 꿈에 보고라는 구절에서 보듯 크나큰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뻐꾸기 봄 한철을 갈아낸 그 먹물을 내가 받네 내가 받아 한 장 편지를 쓰네라는 대목에서 이미 그 곡진함은 다 전해진다. 내가 받네 내가 받아라는 표현은 다른 이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반복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종장 어디라 머리칼 한 올 잡아볼 길 없는 네게는 더욱 절절하다. 아우의 머리칼 한 올이라도 잡아 보고 싶은 그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더욱 애타는 것이다. 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꿈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잊고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늘 간절한 마음이 있어 꿈에 본 것이다. 그것도 봄 꿈이다.얼마나 애절하면 봄 앞에 멍든을 수식하고 있을까. 또한 서럽고 막 그런가 몰라라고 혼잣말을 한다. 꽃 피고 또 꽃 진 날에 그럴까 하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리고 너 나랑 눈 맞춰 둔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꽃이면 꽃이랄 것가 꼭 꽃만도 아닌 것아라면서 아우를 부르니 슬픔은 극치에 다다른다.‘뻐꾸기가 쓰는 편지’는 이렇듯 애잔하다. 작품의 배경이 된 먼저 간 아우로 말미암아 고조된 슬픔이 네 수의 시조로 체현되어 그 절절함이 심금을 울린다. 그만이 운용하는 절묘한 리듬과 말의 되풀이로 시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는 점도 한몫을 하고 있다. 내가 받네 내가 받아, 봄 오면 봄이 오고 봄 오면 멍든 봄이,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찬비만 오락가락 오락가락 찬비 속에, 목이 젖은 먼 뻐꾸기 젖은 목 말리지 못한 채, 라는 대목에서 보듯 앞 구절을 받아 뒤 구절로 넘기는 치밀한 시적 장치로 음악성을 확보함으로써 가락이 넘실거리면서 의미를 심화시킨다. 그만이 해낼 수 있는 개성적인 작법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시인 박방희 시집 '허공도 짚을 게 있다' 발간

시는 사상의 꽃이며 말들의 향연이다. 가장 간결하면서 가장 짧고, 가장 재빠르면서 가장 힘이 센 말들의 향연… 이 ‘말들의 향연’인 ‘시의 축제’를 연출해놓은 박방희 시인의 신간 시집 ‘허공도 짚을 게 있다’가 발간됐다.‘세상’, ‘낮달’, ‘몽당연필’, ‘대구’, ‘함께라면’ 등 13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말과 글의 군더더기를 빼고, 최소한의 언어만을 사용한 듯 간결한 작품들이 인상적이다.짧은 시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기도 한다.시인은 발문에서 “그동안 내 시는 많이 변모했다. 무엇보다 말수가 줄어들었다.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나는 말 많은 게 싫다. 한 마디의 말, 한 문장의 말로 사물의 핵심을 찔러야 한다고 믿는다”며 “서정의 넋두리가 아닌 극서정으로 가는 시, 짧고 명료한 촌철살인의 시를 선호 한다”고 말했다.3부에 실린 ‘함께라면’은 그의 걸작품이고 약속이며 모든 ‘심술의 때’를 다 벗어버리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이상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주식과도 같은 라면, 이 라면의 이름에다가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집단명사 ‘함께라면’을 명명한 솜씨는 시인이기에 가능한 ‘명명의 힘’이라 할 수 있다.시인의 시에는 아름다운 말도 장식적인 표현도 필요 없고, 거창한 사상이나 구호를 앞세울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한 시대와 한 문화 전체를 다 담아내고, 단 한 줄의 시구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연출해낼 수 있으면 된다.1946년 성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1985년부터 ‘일꾼의 땅’, ‘민의’, ‘실천문학’ 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동시, 동화, 소설, 수필, 시조부문 신인상을 받거나 신춘문예에 당선 또는 추천됐다.방정환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금복문화상(문학부문), 유심작품상(시조부문) 등을 수상했다.시집 ‘나무 다비’, ‘사람 꽃’을 비롯해 시조집 ‘꽃에 집중하다’와 동시집 ‘판다와 사자’ 등 27권의 작품집을 출간했다. 현재 마천산 자락에서 전업 작가로 살며 대구문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문향만리…정선 아우라지 고사목

정선 아우라지 고사목 구애영누가 이 고사목에 주석을 달 수 있을까/ 바람의 고랭지에서 온몸을 녹이고 있다/ 제 안을 텅 비워놓은 청령포의 비문인 듯한때는 새들의 노래 곁가지에 새겨놓고/ 그래서 스스로의 감정 그늘에 드리웠을까/ 더 이상 쓸쓸할 일 없는, 볕뉘 한줌 얹혀 있다통증 같은 망국의 시간 눈을 감고 따라가면/ 가만히 얼굴 포개준 편운이 내려올 듯/ 오롯한 직립을 버려 수평이 된 별책이여-『시조시학』(2018, 겨울호)..................................................................................................................구애영은 2010년 시조시학,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모서리 이미지』『호루라기 둥근 소리』등이 있다. ‘정선 아우라지 고사목’은 중후한 시편이다. 깊이 있는 사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높은 산에 오르면 이따금 고사목과 만나게 된다. 여러 곳으로 견고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는 한 그루의 예술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운 나무가 숨을 거두었을까. 그런 안타까움이 크다. 벋은 가지 모양이 하도나 미묘하여 그대로 그림이 되고 그대로 조소가 되는 나무이건만 숨 멎은 지 오래여서 이젠 무슨 말을 건네도 바람만 들을 뿐이요, 구름만 알 뿐이다. 화자는 누가 이 고사목에 주석을 달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바람의 고랭지에서 온몸을 녹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치 제 안을 텅 비워놓은 청령포의 비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때는 새들의 노래를 곁가지에 새겨놓고 스스로의 감정을 그늘에 드리웠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쓸쓸할 일 없는 볕뉘 한줌 얹혀 있는 고사목이다. 통증 같은 망국의 시간 눈을 감고 따라 가다보면 가만히 얼굴 포개준 편운이 내려온다. 오롯한 직립을 버려 수평이 된 별책에 대한 소회로 끝맺고 있다. 별책이여, 라는 감탄조로 마무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사목에서 주석과 별책을 떠올린 점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고사목이 아니다. 정선 아우라지 고사목이다. 문학적 상상력이 발동하는 곳이 정선 아우라지가 아닌가. 더구나 청령포의 비문과 통증 같은 망국의 시간에서 보듯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고사목이되 역사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고사목은 아픈 역사의 한 상징물로도 읽힌다. ‘정선 아우라지 고사목’이 중후한 느낌을 안겨주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또 ‘난전이어도 좋은 꽃밭’에서 공터 맨드라미가 닭 벼슬처럼 서 있다고 말하면서 그로부터 꽃술 전부의 사유가 환히 터졌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세가 표표하더라도 화살이자 과녁이라고 살핀 점도 눈길을 끈다. 또한 잠행하던 기억 속에서 내 귓불처럼 붉혔으리라는 유추도 그렇고 난전이어도 좋은 꽃밭, 바람소리 못 알아듣는 아직도 끓어오르는 신열을 철없이 허공에 거는 일도 그러하다. 이렇듯 ‘난전이어도 좋은 꽃밭’은 비범한 착상과 언어 운용으로 시의 맛을 한껏 고양시킨다. 시를 쓰는 이라면 누구나 절창을 남기고 싶어 한다. 언제쯤 맞닥뜨리게 될까 생각하면서 노트를 펼친다. 언젠가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현상이나 정경을 유의미한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어떤 새로운 느낌은 다가온다. 순간 포착이다. 놓치지 않고 잡아채어 옮겨 적은 다음 속으로 궁굴리기를 거듭하다가 보면 한 편의 시는 탄생한다. 왜 시인들은 이토록 시와 씨름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애영 시인처럼 시 창작에 일생을 건 이는 시 쓰기의 고통과 더불어 그 즐거움을 안다. 삶의 동력이 곧 시이기에 오늘도 꽃그늘 아래서 한 편의 시를 구상하며 사색에 잠긴다. 이정환(시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