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품정리사

유품정리사정명섭 지음/한겨레출판/396쪽/1만4천 원 조선 시대, 죽은 여인들을 위한 유품정리사가 있었다면? 이 책은 작가의 이러한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유품정리사'는 2000년대 초반 고독사가 늘어난 일본 사회에서 성장하며 4차 산업시대의 새로운 직업군으로 꼽히는 직종이다. 작가는 21세기 직업군을 18세기로 옮겨와 새로운 여성 서사 소설을 선보인다. 죽인 여인들의 지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유품을 대신 정리하는 유품정리사. 작가는 이러한 직업적 특성을 미스터리한 죽음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사용한다.이 책은 조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유품정리사가 된 화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품에 남아 있는 삶의 흔적들을 통해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그간 정명섭 작가가 보여줬던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오롯이 녹아 있다. 여기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건들, 젠더의 역할과 정체성을 고착화시키는 사회,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굴레를 쓰는 모순 등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뜨거운 메시지를 담았다.역모 혐의로 의심받던 화연의 아버지가 죽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사건, 포도청은 이를 자살로 마무리한다. 저잣거리에서는 임오화변의 가담자들을 숙청하려는 대비마마(혜경궁 홍씨)의 흑막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사건 이후, 화연의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과천으로 내려가지만 화연은 끝내 한양에 남아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한다. 화연은 사건을 담당한 포교 완희를 찾아가 재수사를 요청하고, 완희는 수사에 대한 확답 대신 뜻밖의 제안을 한다.그렇게 화연은 몸종 곱분과 함께 죽은 여인들의 시신과 물건을 정리하는 대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로 한다.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됐지만, 유품을 정리하면서 화연은 규방에서는 알지 못했던 세상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들은 왜 죽은 것일까? 그녀들은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화연의 물음이 커질수록, 여인들의 죽음 이면에 놓인 비밀은 아득하게 멀어져만 간다. 죽은 이들의 물건만으로 화연과 곱분은 죽음의 비밀을, 세상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화연의 아버지의 죽음 뒤에는 어떤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일까?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화연과 곱분이 유품을 정리하며 알게 되는 여인들의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화연의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임오화변 가담자 가족들의 목소리다. 화연의 아버지 장환길은 사도세자의 폐위 교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근신 중이었다. 화연의 아버지뿐 아니라 임오화변에 가담한 자들은 제 자리를 보존하지 못했으며, 궐에서 쫓겨나 비명횡사하거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여인들의 죽음을 정리하는 화연과 곱분 앞에 창포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의 사건과 녹색 도포의 비밀스러운 행적이 머문다. 당시 임금의 말을 따랐지만, 현재 임금의 아비를 죽인 데 동조한 셈이 된 이들과 그의 가족들. 그 억울함은 말 못 할 깊은 원한만을 새긴다. 그러던 어느 날, 화연과 곱분이 조사하던 여인들과 임오화변에 연루된 이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사라지고야 만다.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그리고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되는 정조. 소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궁궐 밖 사람들의 시선으로 담아내 저잣거리의 이야기꾼처럼 풀어낸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비아이' 마약 논란 이전 아버지 김씨 24억 횡령 혐의로 구속… 부전자전

YG엔터테인먼트의 소속 가수 비아이(B.I·본명 김한빈)의 마약 의혹이 보도되면서 과거 비아이의 아버지인 김모씨의 횡령 사건 또한 재조명되고 있다.김씨는 비아이 데뷔 직전인 2014년 공범 1명과 지분 보유정보를 허위 공시, 투자금 181억 원을 모았고 회사자금 23억 9천만원을 나눠 쓴 혐의를 받았다. 당시 서울남부지검은 김씨를 자본시 장법 위반과 특정경제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당시 횡령 약 24억원과 투자금 180억원이 공중으로 날아가며 피해금액만 200억원 이상었으며 직원들은 월급을 받지 못하고 연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해당 사실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범죄가 부전자전이네', '훔친 수저로 잘먹고 잘살았었네', 'YG는 어떻게 저런 사람들만 모았지?'등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online@idaegu.com

“어쩌다 이렇게까지 해야 됐나”

오래전 미국에 가족 이민을 간 한 아버지가 10대 아들이 자꾸 말썽을 일으키자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 아들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해 위기를 모면했다. 아버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참았다. 그 후 방학을 맞아 부자가 한국에 왔다. 공항에 도착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지금 혼내 주려는데 어디 이번에도 경찰에 신고해 봐라.” 물론 우스개 얘기다. 그런데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자식이 부모를 경찰에 신고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것도 같다.정부가 민법상 친권자 징계권 범위에서 체벌을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현행 민법 915조에는 ‘친권자는 보호 또는 교양을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체벌은 부모의 징계권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을 것이란 얘기다. 법무부는 각계 의견을 수렴해 내년 말까지 민법개정안을 만들 계획이다. 세계적으로는 현재 54개국이 자녀체벌을 금지하고 있고, 친부모 징계권을 명문화해 놓은 국가는 한국, 일본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그러나 정부의 법 개정 움직임을 바라보는 장년층들은 별로 탐탁잖을 듯하다. 그들에게는 ‘귀한 자식은 매를 주고, 미운 자식은 밥을 주라(명심보감)’는 구절이 여전히 자녀교육의 금과옥조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국민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복지부가 2017년 12월 4일~8일 전국 20세 이상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6.8%가 “사랑의 매가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고 답했다. 대다수의 의견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다만 자녀 교육에 체벌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진 국민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인데 그깟 꿀밤, 회초리 한 대 때리는 것이 체벌이고 학대냐”라는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이에 반해 법 개정을 추진하는 정부 입장을 수긍하게 하는 또 다른 현실가정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동보호전문기관 등에 따르면 자녀 학대로 신고된 부모 수가 2013년 5천454명에서 2017년 1만7천177명으로 많이 증가했고, 이들 기관에 2017년 2차례 이상 신고된 재학대 사례 2천160건 가운데 2천53건(95%)이 부모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이다.많은 부모가 아이를 엄하게 키우는 것과 아이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죽하면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서 2011년 아동체벌금지법 제정을 한국정부에 촉구했을까.물론 엄한 자식 교육의 전통과 근래 벌어지고 있는 자녀 학대 문제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르다. 그래서 말인데, 이 두 가지를 한 데 묶어 법에 규정해 놓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또 만약 구분해서 법 조항을 마련한다면 그 구분 기준은 어떻게 할 것인지 간단치 않아 보인다.여기에 이번 법 개정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결국 훈육인가, 학대인가를 가르는 명확하면서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할 텐데 그게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는 구체적 법조문이 아니라 기존 판례를 잣대 삼아 아동학대 사건을 처리해 왔다 한다. 가령, 아이가 멍들거나 다치도록 때리거나, 주먹으로 배를 때리거나 밀어서 넘어뜨리면 학대라는 식이었다.앞으로 예정대로 민법이 개정되면 친부모도 자녀를 체벌하면 죄가 된다. 그래서 이 법은 부모에게는 아무리 훈육이 목적이라도 스스로 행동을 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생기게 하고, 또 매를 들어선 안 된다는 심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란 게 정부에서 내놓은 긍정적 측면이다. 이밖에 체벌 금지를 사회적으로 합의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그렇더라도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부모 자식 사이가 어쩌다 국가에서 법을 만들어 개입해야 할 지경까지 가게 됐는지, 세태가 씁쓸할 따름이다. 일각에서는 아동학대법 등 기존 법으로도 충분한 억제력이 있는데, 굳이 법을 개정해야 하느냐는 지적도 한다. 일을 풀어가는 데 있어 강도를 높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란 얘기일 것이다.

대한민국 1% 엘리트 ‘홍정욱’ 누구길래… 아버지는 영화배우

15일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 지분 47.8%가 중흥건설그룹에 넘어간 것으로 알려지며 홍정욱 회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온라인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른 홍정욱은 기업인이자 언론인으로 헤럴드·올카니카 회장이며 사단법인 올재의 이사장이다.홍 회장의 아버지는 유명한 영화배우 남궁원으로 알려져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1970년 서울 출생 후 중학교때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하버드대학교 학사, 스탠퍼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인 홍 회장은 2001년 병역이행을 위해 귀국해 2002년 12월 경영난에 시달리던 헤럴드를 인수해 국내 최연소 언론사 CEO가 됐다.2008년 부터 2012년까지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 18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online@idaegu.com

박한별이 유인석 위해 쓴 탄원서 “어린 자녀의 아버지…” 네티즌 ‘황당’

배우 박한별이 영장심사를 받는 남편 유리홀딩스 전 대표 유인석을 위해 직접 탄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고 한다.박씨는 탄원서에 “제 남편은 이 상황을 회피하거나 도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불구속 상태에서 계속해서 충실히 조사받을 것을 한 가정의 아내로서 약속드립니다”고 썼다.이 외에도 유씨가 10번이 넘는 경찰 조사에 성실히 출석했다는 사실과 어린 자녀의 아버지라는 점 등이 탄원서에 기재됐다. 박씨와 유씨 사이의 자녀는 지난달 첫돌을 지났다고 한다.박한별의 탄원서 내용을 들은 네티즌들은 "저런 일에 자식 핑계 대지마라", "어린 자녀 둔 아버지가 그런 짓을?"이라며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법조계에 따르면 14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신종열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승리와 유씨의 영장실질심사에서 박씨가 변호인을 통해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는 A4용지 3장 분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필로 작성됐다고 전해졌다.해당 사실이 전해지자 박한별의 소속사 플라이업엔터테인먼트 측은 "자세한 사항은 배우의 개인적인 부분이라 우리도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입장을 밝혔다.online@idaegu.com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중략)//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중략)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중략)/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시집『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비, 1998)...........................................................카프카는 “나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씌어졌다. 글 속에서 나는 평소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다 대고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해냈다.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카프카 문학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 아버지란 존재 안에 도사린 상징성을 해독하지 않고는 무엇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며 미궁이다. 법과 권위의 표상이며, 가족 내 모든 권력의 실체이며 몸통이었던 아버지는 성장하며 카프카를 억압한다.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를 막대한 영향력으로 포획하고 일방적으로 가문의 DNA를 주입시키려 했다. 카프카는 이런 아버지의 권력에 저항하는데, 문학은 그 저항의 한 방편이며 응전이었다.이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있었던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신경림 시인은 마치 카프카처럼 저항하며 문학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그 시대 아버지의 전형인 동시에 내 아버지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의 아버지는 당시 사회가 나에게 스며드는 하나의 방식이며, 내가 사회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까지는 아니었으나, 나와 아버지의 관계도 늘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가득한 불화였다. 세상 떠나신지 30년이지만 내게 심심하면 쏘아붙였던 ‘머저리’란 함경도 사투리가 귀에 쟁쟁하다.그때 드리워졌던 그늘에서 여전히 기를 못 펴고 세상에 주눅 들곤 했던 성격도 아버지로부터의 억압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내 성격 형성에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평생 하급공무원으로 살면서 너무나 거침없고 호방한 아버지였다. 한껏 취기가 오른 늦은 밤 귀가길, 골목어귀에서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무례와 똥배짱으로 동네 아이들에게 창피해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당신은 그 자식이 성에 차지 않았을 테지만 나도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고1때인가 헤밍웨이의 자서전 한 대목 ‘나는 아버지를 일찍 잃어버리는 행운을 얻었다’에서 눈이 번쩍 뜨여 나도 좀 더 이른 결별이 와주기를 기도한 적이 있다. 다행히 단발성 기도에 그쳤던 것은 순전히 어머니란 존재 때문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하유지 지음/다산책방/312쪽/1만3천800원이 책은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참고서 편집자 서른세 살 영오가 죽은 아버지 유품으로 남긴 수첩에 적힌 세 사람을 찾아 나서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이 넘어버린, 타인과의 관계가 힘에 부치는 그녀 앞에 나타나는 왠지 모르게 절반쯤 부족한 사람들이 함께 나머지 절반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열일곱 살 미지가 사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서른세 살과 열일곱 살. 둘다 나름의 어려움이 있고 사는 모습 또한 그리 녹록하지 않다. 어딘가 절반쯤 비어 있는 것 같은 삶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너무 멀리 와 있고, 돌아갈 수는 없다.영오에게 죽은 아버지가 남긴 것은 월세 보증금과 밥솥 하나, 그 안에 담긴 수첩이 전부다. 어머니가 4년 전 폐암으로 죽은 뒤 겨우 6~7번 만난 아버지였다. 앞뒤 맥락도 없이 수첩에는 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만이 적혀 있다. 영오는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했던 학교의 교사인 홍강주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나머지 두 명을 찾아 나선다. “200그램쯤의 무게만 겨우 버티는 작은 플라스틱 고리 같고 사는 게 너무 바빠, 숨과 숨 사이가 서울과 부산 사이보다 먼” 서른세 살 여성 오영오의 고단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미지는 영오가 편집한 ‘튼튼국어’를 풀다가 문제가 재밌다는 이유로 매일 전화를 거는 열일곱 소녀다. 홍강주가 교사로 일하는 새별중학교 학생이며 졸업을 앞두고 있다. 치킨 가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둔 엄마는 고등학교 진학을 거부하는 미지와 12월31일 회사에서 기막히게 잘린 아빠를 귀양 보내듯 개나리아파트로 쫓아냈다. 옆집에는 성격이 괴팍한 할아버지 두출이 산다. 미지와 두출은 ‘버찌’라는 고양이를 통해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아간다.이 책은 시종일관 담백하게 또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열일곱도 좌충우돌이고 서른셋도 어김없이 서툴고 그러니까 마흔 너머의 삶도 어딘가 부족하지 않을까. 어딘가 심하게 부족한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들을 만나 유쾌하게 삶을 채워가는 이야기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수첩, 거기에 남긴 이름에서 시작한 작은 기적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감동이 담겨있다.영오와 미지, 세상과의 관계가 서툴렀던 두 사람은 어김없이 관계가 서투른 사람들을 만나며 어쩔 수 없이 세상 밖으로 나선다.저자는 마지막에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나 여기 다다른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이제 괜찮다고요. 곧 괜찮아질 거라고요. 당신은 영오이면서 미지니까요. 당신은 결국 우리니까요. 우리는 함께 나아갑니다. 벽을 뚷고 그 너머로 나아갑니다. 어떤 벽은 와르르 무너지고 어떤 벽은 스르르 사라져요.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괜찮습니다”고 위로의 말을 전한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연극 ‘행복한 家(가)’ 오는 21일까지 우전소극장 진행

극단 뉴컴퍼니는 오는 21일까지 우전소극장에서 연극 ‘행복한 家(가)-아버지 사용법’를 선보인다.2015 거창국제연극제에서 국내 연극 부문 대상, 연출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안건우 작가의 대본이다. 뮤지컬 ‘만화방미숙이’, ‘미용명가’로 잘 알려진 이상원 연출가가 연출을 맡았다.가장인 아버지가 빚을 지고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 남겨진 모녀는 슬픔을 느낄 틈도 없이 사채업자의 빚 독촉에 시달린다. 이에 모녀는 어쩔수 없이 막다른 선택을 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사고로 위장하여 보험금을 타 내는 것이다. 이에 모녀는 그동안 쓸모없게 만 여겼던 아버지를 두고 '아버지 사용법'을 고민한다.빚을 지고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 아버지 역은 성석배 극단 처용 대표가,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고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 역은 최근 막을 내린 대구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최영주가 맡았다. 딸 역에는 차세대 연기자 최시내, 사채업자 역은 안건우 극단 시소 대표, 장 교장 역은 대학 연극반 출신들이 주축이 된 극단 1972 소속 배우 장인규가 연기한다.문의: 010-3529-9166.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유족들 심리치료 등 지원해야

“사랑하는 우리 아들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오늘따라 너희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 이렇게 불러본다.”개구리 소년 중 한 명인 철원(당시 13세)군의 아버지 우종우(71)씨는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와룡산 중턱에서 이같이 외쳤다.그는 “매년 추모제를 지낼 때마다 이제 아이들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 그럴 수 없다”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을 삼켰다.영구미제로 남은 개구리소년 사건 추모제가 26일 오전 11시 유골발견 현장인 대구 달서구 와룡산 세방골에서 열렸다.개구리소년 사건은 1991년 3월26일 달서구에 살던 성서초등학교 어린이 5명이 와룡산으로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 후 11년 만인 2002년 9월26일 와룡산 세방골 중턱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지만 끝내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이날 추모제는 진상 규명 결과 발표, 추도사 낭독, 헌화 등 순으로 진행됐다.올해는 어느 때보다 슬프고 안타까웠다. 개구리 소년의 아버지 3명의 건강상태가 매우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시민의모임(이하 전미찾모) 회장은 “호연(당시 12세)군 아버지 조남환(63)씨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술과 함께 살다가 알코올성 치매가 있다”며 “영규(당시 11세)군 아버지 김현도(65)씨는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찬인(당시 10세)군 아버지인 박건서(67)씨 역시 양다리 관절 수술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라고 말했다.종식(당시 9세)군의 아버지인 김철규씨는 2001년 간암으로 숨졌다.추모제 참가자들은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위원회’ 설치와 재수사를 촉구하고자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공식 요청하기로 했다.또 개구리 소년 5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비 건립도 추진한다.나주봉 전미찾모 회장은 “세월호 사태 등과 달리 개구리 소년의 유족들은 그 어떤 국가 지원도 받고 있지 못하다”며 “유족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한 심리치료와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유족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김현수 기자 khsoo@idaegu.com

걸그룹 아버지로부터 2억 7천만원대 채무 불이행 피해자… "걸그룹 누구?"

지난 6일 방송된 KBS JOY '코인법률방2'에서는 전 걸그룹 멤버의 아버지 A씨로부터 채무 불이행 피해를 당했다는 피해자가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이날 방송에서 피해자는 A씨와의 인연을 설명하며 약 23년 전 모 걸그룹 멤버의 회유로 수년에 걸쳐 2억 7천만원대의 재산을 빌려준 후 변제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피해자에 따르면 피해액이 2억 1천400만원과 가계수표 1천만원, 대위변제금 2천 500만원, 신용카드 부정사용 691여만원, 항공권 명목으로 빌려간 500만원 등 총 2억 7천여만원에 이른다고 설명했다.심지어 A씨는 피해자의 돈을 사업 자금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 사용한 후 미국으로 떠난 사실이 알려져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다.이 같은 사실이 전파를 타자 실시간 급상승어에 '걸그룹 빚투'가 오르며 그 걸그룹이 누구인지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한편 피해자는 온전히 넘겨받은 변제 부담으로 빚쟁이, 신용불량자가 됐으며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online@idaegu.com

존속살해 무기수 김신혜 그날 사건의 정황은?…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신혜(42) 씨의 재심 첫 재판이 비공개로 열린다.이 사건은 가정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며 어릴 적 이혼한 엄마 대신 아버지와 동생들을 보살핀 김씨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2003년 3월 6일 밤 가족들을 만나러 귀향길에 오른 김씨는 자정에 넘어 고향에 도착했다. 이튿날 새벽 아버지가 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차에 치였다면 상처도 있을텐데 그런것이 보이지 않았으며 어릴때 앓았던 소아마비로 걸음이 불편했던 김씨의 아버지는 6km나 떨어진 도로에 쓰러져 있었다.여러 의심스러운 정황에서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이 큰딸 김씨였다.고인의 몸에서는 '독실아민'이라는 수면 유도제 성분이 검출됐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가 수면제 30알을 잘게 갈아 양주에 섞어 아버지에게 권했고 그것을 마신 아버지를 자신의 차로 길가에 버리고 온 것으로 조사 됐다.또한 숨진 아버지가 김신혜씨와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는 내용도 경찰 조서에 포함됐다.그런데 남동생에 따르면 자백을 했다는 그녀가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이 이상했다며 "누나가 멍하니 서있었어요. 누가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고"라고 말했다.이후 검찰 조사와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한 김씨는 수감된 뒤에도 무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모두 경찰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었다.경찰이 김씨를 체포한 이유는 김씨 남매의 고모부 때문이라고 경찰은 주장했다.김씨의 고모부는 "아버지를 죽인 게 맞냐고 하니까 자백을 했어요 당시에" 라고 김씨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이어진 경찰 조사에서 김씨의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한 메모와 송금 계획이 적혀있는 종이가 발견됐으며 고인의 몸에서 나온 약물 또한 조사 결과 처방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수면유도제가 고농도로 압축돼 검출됐다.전문가에 따르면 이정도의 양을 표시 안 나게 일반적인 술이라고 먹일 방법은 없다고 보인다는 것. 아버지가 마셨다는 양주병과 유리잔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렇다면 처음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살해했다고 밝힌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동생 대신 제가 징역살이를 하려고 제가 죽였다고 했다"고 말했다.김씨는 "장례식장에서 고모부가 나를 불러내더니 "간밤에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이고 찾아와 뒤처리를 도왔으니 집안 전체를 생각해 자수를 해라"라고 충고했다"며 믿을 수 없다고 남동생과 먼저 이야기를 하려했지만 고모부가 극구 말렸다고 주장했다.이어 "저한테 허위자백을 하라고 했다. 네가 희생이 되면 너도 살고 우리도 산다"고 말했다.남동생 준호 씨 또한 아버지가 누나와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는 진술도 고모부가 시킨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저렇게 말을 해야 누나가 나올 수 있다고 믿고 말한 거예요"라고 말했다.현재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고향을 떠나 지낸 막내 지혜씨 또한 아버지가 성추행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했으며 "고모부가 아빠한테 성추행 당한 적 없냐고 화를 내시면서, 왜 계속 강압적으로 당했으면서 거짓말 하냐고 자꾸 그랬다"며 "고모부가 그렇게 얘기를 하라고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당시 장례식장에서 김씨와 고모부의 대화도 "언니는 아니라고 했고 고모부가 오빠를 보겠다는 언니를 강압적으로 밀어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김씨는 사건 당시 압수수색 영장 없이 집을 수색당했으며 담당 형사가 김씨의 집을 뒤질 때 경찰이 아닌 자신의 군대 동기를 데려갔다는 것도 사실로 확인됐다. 또한 잘못된 방법으로 얻어낸 수사 결과들과 경찰로부터 숱한 폭력을 당했다고 김씨는 주장했다.김씨의 이러한 억울함은 18년만에 수사 과정의 부당함이 인정돼 2015년 11월 복역 중인 무기수 중 처음으로 재심 대상자로 인정받았다. online@idaegu.com

(사건파일) 말다툼 도중 자신 무시한다고 아버지 흉기로 찌른 20대

늘 해오던 아버지와의 말다툼이었지만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끓어 올랐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은 절정으로 치닫았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청년은 119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가슴을 움켜쥔 아버지의 상태를 차분한 목소리로 전했다.그는 20대의 끝자락, 잘못 쏘아 올린 오발탄처럼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씨앗은 어린 시절 술에 취했다 하면 어머니와 자신에게 자행되는 폭행을 마주하면서 싹을 틔웠다. 외동으로 태어나 그 외로움과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학창시절에는 사춘기까지 겹치면서 분노조절 장애와 우울증으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도 했다.30년 가까이 함께 살았지만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와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삶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길 10여 년, 보안업체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고 구직에 대한 희망도, 구직해야 한다는 의지도 시들해져만 갔다.말다툼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에서 시작됐다. 청년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아버지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말았다.대구 강북경찰서는 25일 말다툼 도중 아버지를 흉기로 찌른 혐의(존속살해미수)로 A(29)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A씨는 지난 23일 오후 8시49분께 북구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 B(58)씨와 말다툼을 벌이던 중 흉기로 가슴 부위를 한 차례 찌른 혐의를 받고 있다.A씨는 범행 직후 직접 119에 신고했다. 아버지 B씨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A씨는 경찰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말다툼을 벌였다고 진술했다.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중략)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 누구나 어린 시절 공중목욕탕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나도 초등 1학년 때까지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에 입장했던 아련한 향수가 있다. 아버지가 목욕탕 데려가는 걸 인색해 하는 데다 어머니 손이라야 구석구석 매매 씻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등 2학년 때 같은 반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여탕에서 마주쳤다는 민망한 소문을 들은 이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여탕에 가는 일은 그만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그때서야 남탕과 여탕을 가로막은 벽의 존재를 실감했다.당시 ‘가족탕’은 어떤 사람들이 이용할까? 남녀불문 온 가족이 오순도순 서로 등을 밀어주며 목욕하는 곳이 맞을까? 따위의 궁금함과 함께 막연한 부러움을 가졌다. 흥얼흥얼 늘어진 가락의 시조창이 들렸다. 물론 그때는 그게 시조인지 주술인지 그냥 넋두리인지 알지 못했다. ‘얼른 들어와!’ 아버지는 깊숙이 탕 속에 몸을 담군 채 나에게 손짓한다. 머리만 보이는 아버지와 나의 간격엔 수증기로 자욱했다. 나는 한쪽 발을 천천히 내밀어 보지만 이내 발을 뺀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 사내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몇 번의 힘겨운 시도 끝에 겨우 탕 속에 마련된 돌계단에 작은 엉덩이를 올려놓았다.그러나 ‘아버지, 뜨거워서 얼른 들어가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물건이 아버지의 그것을 압도할 때까지 아버지의 조바심과 나의 머뭇거림은 계속되었다. 물론 씨알이 굵어지고 구근이 토란만 해졌을 때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을 가진 않았다. 그 전까지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사내답지 못했으며, 따라서 아들답지 않았다. ‘아버지, 사실 그때 너무 뜨겁고 두려웠거든요.’ ‘그리고 영식이가 차 선생님 가슴에 안겨 들어가는 걸 봤는데 그게 많이 부러웠어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물컹한 추억 속에서 다행인 것은 광활한 만주벌판 같은 아버지의 등을 최선을 다해 밀어드렸을 때 돌아서 씩 웃으시던 아버지를 본 기억이었다.

‘대유학자’ 아버지 업적 방방곡곡에 아들의 효심이 빚어낸 서원을 다녀오다

[{IMG01}] 〈1〉 옥산서원-아버지의 이름으로-회재 이언적과 잠계 이전인 대구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에 넓은 안강들을 가로지르다 북쪽으로 자옥산을 향해 좁은 2차선 시골길을 달려 옥산서원(玉山書院·이하 서원)에 닿는다. 자옥산 계곡을 흐르는 자계천변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옥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서원은 조선조 도학자이자 대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 ~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문인 및 경주 유림들이 세웠다. 서원 앞 개천을 건넌다. 옛날에는 입구에 있던 하마비를 옮겨 놓은 듯 계곡 건너편에서 하릴없이 서원을 지키고 있는 하마비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한여름이면 제법 물살이 거셌을 것 같은 계류가 넓은 청석판을 깔고 흐른다. 회재가 세심대(마음을 씻는 곳)라 이름 붙였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정문에 이르니 역락문(亦樂門), 공자가 말한 군자의 3가지 즐거움을 이곳에서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문인 소재 노수신이 이름 지었다. 묵직한 돌계단을 딛고 역락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의 커다란 2층 누각을 마주친다. 무변루(無邊樓)다. 가운데 3칸은 아래 위 모두 틔워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고 양쪽 1칸씩은 벽체로 막아 아래는 아궁이와 굴뚝을, 위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양 끝의 방들은 몸체에서 달아내어 누마루를 돌렸다. 벽을 허물어 외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한 보통의 누각과 달리 벽을 모두 닫아 대청과 누마루가 모두 막혔으니 무변루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2층 대청 안쪽에 걸린 편액으로 심오한 뜻을 품은 이름이라 짐작할 뿐이다. 아마 편액의 한 편에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니누나”라는 부기에서 무변루의 의미를 짚어본다. 무변루를 내려 계단을 올라서면 강당 격인 중정 구인당(求仁堂)이다. 정면 5칸 측면2칸인데 가운데 3칸은 마루를 틔웠고 양 옆은 무변루처럼 온돌을 놓았다. 그런데 온돌방 전체에 봉창 하나 없이 꽉 막아 놓았다. 가운데 걸린 커다란 편액 玉山書院(옥산서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인 54세에 쓴 것이다. “만력 갑술년(1574) 사액 후 266년 되는 을해년(1839)에 화재로 불타버려 다시 써서 하사한다”는 내용이 편액에 뚜렷하다. 서원 사액 당시 선조가 아계 이산해에게 명하여 쓰게 했던 것을 추사가 다시 쓴 것이다. 추사의 힘이 한껏 느껴지는 글씨체다. 대청 안쪽 구인당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의 동재와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좁고 긴 맞배지붕 건물로 실용성이 가미된 서생들의 생활공간이었다. 강당 뒤에는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고 출입이 금지돼 있다. 구인당 뒤 왼쪽 체인묘 옆으로 회재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비각 안 신도비는 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비석 위에는 두 마리 용이 휘감고 비석 아래에는 거북이 앞발은 땅을 굳게 딛고 버티고 있다. 서원 곳곳의 편액 글자 한 자 한 획이 모두 대가들의 솜씨 경연장이다. ◆ 회재 이언적 회재는 옥산에서 10km 떨어진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번(蕃)을 따라 양동에서 옥산의 정혜사(지금은 국보 40호인 13층 석탑만 남아 있다.)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공부했다.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정혜사 옆 아버지가 기거하던 독락당에서 살았고 귀양지 평안북도 강계에서 독락당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생을 마감했다. 회재는 김굉필, 정여창, 이황,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후 후손들의 노력으로 문묘에 종사되고 있으니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자고 일어나면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만큼 사화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조선조 정변기. 말 한마디, 잘못된 만남 한번이 생사를 가르던 살얼음 딛듯 아슬아슬한 시대, 회재는 2번이나 정변에 밀려 낙향한다. 그가 택한 곳은 본가가 있는 양동이 아닌, 10km 떨어진 독락당이었다. 중종 26년 1531년, 41세의 회재는 성균관 사간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종의 사돈인 김안로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기자고 했지만 회재는 그가 소인이라며 반대했다. 이 일로 파직되고 고향 독락당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7년 만에 불려 올라간다. 홍문관 응교로 다시 등용된 회재는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좌찬성으로 있던 명종 1년(1561년) 소윤과 대윤의 싸움이 극에 달한다. 역사에서 을사사화로 부르는 정파싸움에서 회재는 소윤의 편을 들어 공신이 되기도 했지만 파직되고 두 번째 귀향한다. 57세 되던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수렴첨정하던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괴문서 대자보 사건)으로, 쫓겨 내려와 독락당에 은거하던 회재도 이번에는 비껴가지 못한다. 을사사화 잔당이 남아 사건을 일으켰다며 연루된 것이다. 그는 “군자는 죽음에 이르러도 놀라거나 원망하지 않는 법이다. 내 머리가 희기 전에 벼슬을 버리고 이 산에 돌아오리라” 하고 국경 근처인 평안도 강계 땅으로 유배된다. 그리고는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옥산서원 건립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원이다. 회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서원은 사액서원으로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그 독락당 인근에 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아들 잠계 이전인과 손자 구암 이준과 치암 이순이 건립한다. 회재가 죽은 지 19년 지난 1572년, 회재의 학문을 기리고 뜻을 펴겠다는 뜻에서다.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였고 보물급 문서가 많은 서원으로 알려졌다.창건 당시 향중 사림 13명이 서원 건립을 건의했다고도 한다. 당시 대사성 허엽의 서원 기문에는 “선생의 문인 구봉 권덕린과 손자 구암 이준의 노력에 의해 창건됐다. 경주 본주 읍민들의 협조와 경산군수를 역임한 손자 이준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확보에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1574년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처음엔 40여 칸이었으며 사당 강당 동재와 서재 누각 등으로 서원의 기본을 갖췄다. 1835년 판각이 불타서 다시 지었고 1839년 강당이 불나 이듬해 중건했다. ◆ 아버지와 아들 회재는 18세때 16세인 함양 박씨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24살에 급제해 25살에 경주주관학교에 있을 때 감포만호 석귀동의 셋째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사촌의 아들 이응인을 양자들이고 그는 양동 무첨당에, 둘째부인 양주 석씨에게서 난 아들 이전인은 독락당 주인이 된다. 면천한 석씨는 회재의 모친 손씨 부인을 노후에 독락당에서 지성껏 모셨다고 전한다. 서자 이전인은 회재의 귀양지인 평안도 강계에서 7년 동안 회재를 극진히 모시고 같이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당시 회재의 학문적 성과는 아들 잠계 전인과 손자 준의 설득을 거쳐 퇴계가 인정하게 된다. 회재가 유배지 강계에서 대학장구보유, 예학의 선구가 된 봉선잡의와 구인록,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정리한 진수팔규를 지은 것도 모두 아들 이전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회재의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또 세상에 알린 것도 모두 이전인의 공이었다. 유배지에서 사망한 아버지 회재의 시신을 고향 옥산까지 운구해 온 것도 전인이다. 회재가 명종 8년(1553년) 11월23일 사망했지만 죄인이라 공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상여는 석 달이나 걸려 이듬해 2월에야 고향에 도착했다. 당시 실세인 문정왕후를 피해 평안도에서 동쪽 강원도 태백을 거쳐 안동 청송 영천으로 운구해 왔다고 ‘회재 주손’ 이해철 (71)씨는 설명한다. 이전인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인 1566년 회재가 중종 인종 명종 3대를 섬긴 충효를 상소해 회재는 죽은 지 13년 만에 사면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아들 이전인에게도 종1품 판사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전인은 “아버지의 복작 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병을 빙자해 사양했다. 이전인의 효성이 성인 회재를 가능하게 했다고 후손들은 입을 모은다. ◆회재 아들 잠계와 퇴계 퇴계는 생전 10살 위인 회재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잠계 이전인이 1560년 아들 준과 순을 데리고 퇴계를 찾아 회재의 행장을 부탁하고 학문적 성과를 확인받으면서 퇴계는 회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전인의 호 묵계도 이 때 퇴계가 지어준 것이다.퇴계는 “선생의 학문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며 “경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실토했다고 행장에 적었다. 퇴계는 “일찍이 선생이 그렇게 유도한 분인 줄 알았더라면 만나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하면서 아쉬워했다. 이단을 배척하고 정주학을 수립한 회재의 학문은 퇴계가 급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로소 퇴계의 학문이 체계적으로 성립된 셈이라고 이해철 씨는 말한다. 이를 이르러 학계에서는 “무회재면 무퇴계”라 이른다고 이 씨는 강조했다. 세상에서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이어 회재야말로 퇴계의 학문을 성숙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은 5년 뒤인 1565년에야 완성된다. 퇴계는 회재의 진수팔규를 명종에게 올려 학문적 깊이를 평가했고 선조대에 회재의 복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기대승에게 부탁해 회재의 신도비명을 짓게 했다. 무회재면 무퇴계란 말이 유림 사이에 회자된 연유다. ◆옥산서원과 문화재 회재의 서원에는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회재의 벼슬살이 과정의 교지 등과 학문의 깊이를 말해 주는 것으로 주로 그가 독락당에 있을 때와 강계에 유배돼 있으면서 저술한 것들이다. 국보인 삼국사기 본질 9책 50권이 서원 경내 유물전시관에 있으나 열람할 수 없다. 또 서책 1천382책과 보물급 문화재들이 독락당 유물관에 보관돼있다. 유물 보전과 관련해 주손 이해철씨는 “1970년대 경찰서 지인을 앞세워 유물 몇 점을 700만 원에 팔라는 제의를 받았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낸 뒤 그날 밤 한 숨도 못잤다. 당시 집을 두세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궁색한 살림살이에 고민이 되기도 했다.약속일이 되어 찾아 온 사람은 생각해 봤느냐고 했다. 머뭇거리니 포은의 시 한 편을 더 넣어서 900만 원 줄 테니 생각해보라고 했다”며 “조부가 총알을 무릅쓰고 난리 중에도 보관했는데 내가 이걸 팔고 어떻게 선조고 제사를 지내느냐는 생각으로 유혹을 뿌리쳤다”고 회고했다.이경우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