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의 영화산책…‘이타미 준의 바다’

집은 내 삶의 깊은 명제와도 같다. 남이 지은 집에 거주하며 한번도 내 손으로 집을 지어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집에 맞추어 산다. 사람마다 삶의 숨결이 다른데 비슷한 집에서 비슷하게 살다보면 각자의 고유한 숨결을 찾을 겨를이 없다.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습성은 이 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영상으로 보는 제주도의 수, 풍, 석 뮤지엄은 고요 그 자체이다. 제주의 자연과 이들은 구태여 구분되지 않으며 그것이 분명한 건축물임에도 이미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이 되었다. 이 뮤지엄을 건축한 이타미 준은 유명한 포도 호텔과 방주 교회를 설계한 재일한국인 건축가이다.영상에서는 이타미 준이 지은 건축물들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바람처럼 흘러나온다. 건축이 그토록 아름답고 고요하게 자리 잡은 놀라운 풍경이다. 그리고 건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타미 준의 수 뮤지엄, 풍 뮤지엄, 석 뮤지엄이 왜 그 자리에 지어졌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돌아보면서 깨달은 것은 잘 지은 건축물이란 또 하나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은 자연으로 스며 들어가 나무나 풀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이 또 하나의 자연이 된다. 그리고 나무가 수백 년을 가듯이 그 건축물도 수백 년을 갈 것이다.이 다큐에서는 건축의 선의 아름다운 영상이 물결치듯 흘러다니는 화면 위로 양방언의 음악이 또 하나의 건축물처럼 물결친다. 양방언이라면 중국의 차와 티벳의 말을 교환하기 위한 교역로인 차마고도를 영상화한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의 음악을 만든 재일한국인 2세이다. 그의 음악이 있어 차마고도가 더 아름다운 영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 다큐멘터리와 별개로 이 음악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 다큐의 음악 역시 양방언이 만들었는데 영상과 음악이 건축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깊이 끌어들인다.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경북 영양에 가면 서석지라는 조선시대 3대 민간정원이 있는데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장소에 있다. 첩첩산중,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고 은거하던 사람들은 집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곳에 집을 지었다. 집은 재산증식의 수단인가, 아니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누일 공간인가.차 소리가 시끄럽고 밤이면 폭주족들의 소음으로 창을 닫아야 하는, 거주의 공간으로는 영 못마땅한 곳에 사는 현대인들은 그 서석지의 풍광에 감탄하지만 자신이 거기에 집을 지을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고개를 흔든다. 집은 거주의 공간만이 아니라 유효한 투자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인 건축물이 얼마나 고요하고 적막하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짐 자무쉬 감독 ‘천국보다 낯선’

특별한 생은 없다는 것에 내 운명을 건다. 청소부의 생이 특별하지 않듯이 대통령의 생도 특별하지 않다. 특별한 생이 없는 것처럼 특별한 곳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특별하지 않으니 우리의 생도 그저 그럴 뿐이다. 형식적 실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짐 자무시의 영화답게 장면이 바뀔 때마다 툭툭 끊어지는 형식과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이 마치 우리의 삶 같다. 짐 자무쉬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건넨다.우리의 삶은 유장하게 이어지고, 그 이어짐 때문에 어제와 오늘, 내일이 연결될 것 같지만 실은 영화처럼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일 뿐 이것이 내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헝가리에서 뉴욕으로, 클리블랜드로, 플로리다로 이어지는 에바의 삶이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또 어찌 이 모든 것이 각각 개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뉴욕과 클리블랜드, 플로리다는 모두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영화도 한 장면 장면마다 끊어지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한 장면이 끝나고 짧은 암전,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장면, 우리의 삶도 그러했던가. 하나의 사건이 끝나고 잠깐 암전,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사건들, 삶은 이 사건과 사건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이다.뉴욕에서,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클리블랜드에서의, 플로리다로 가는 길에서의 에바의 삶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절되어 있고, 단절된 듯 하면서 이어져 있다. 그 모든 것이 에바의 삶이니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은 이어질 것이다. 짐 자무쉬는 영화의 형식을 통해 그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우연하게 다가오는 불행과 행운들, 살아 움직이는 동안의 여러 활동들과 모든 것이 단절된 짧은 시간의 암전, 그리고 바뀌는 화면들, 이것이 생이다.메시지는 분명하다.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그 순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 모든 순간이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천국이라도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설고 새롭다는 것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내용의 의미에만 집착하는 우리에게 형식을 통해 대화를 건다. 영화의 형식이 특별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형식으로도 말을 건넨다.현대는 화려한 컬러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짐 자무쉬는 화려한 컬러를 무시하고 침울한 흑백을 선택한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 현재는 때로 몽환적이고 비사실적이며 순간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컬러의 색채감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어렴풋한 안개 같은 시간들, 무어라고 선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들은 언제나 흐릿한 흑백으로 기억된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재의 이 강렬한 컬러들은 실은 착시일지도 모른다. 선명하고 사실적인 현재의 컬러들은 우리의 눈을 교란시키는 환상일지도 모르는 것이다.예술작품에서 형식을 사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고 그 내용을 지배한다. 이것이 예술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그래서 오래 사유할 문제를 남겨준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조근식 감독의 ‘그해 여름’

사랑 이야기는 항상 진부하면서 항상 새롭고 감미롭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사랑만이 때로 우리를 구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해 여름에 시작된 사랑은 수십 번의 그해 여름이 지나가도 어떤 사람에게는 잊혀지지 않기도 한다. 그해 여름은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윤석영 교수의 첫사랑을 찾아 나선 방송국 PD와 작가는 시골마을 수내리에 도착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윤 교수의 첫사랑이었던 정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얼굴이 먹빛으로 변하면서 대화를 회피한다. 무엇이 있음을 직감한 그들은 그 연인의 추억을 파헤쳐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그해 여름을 만난다.시위와 민주인사들의 죽음이 다반사로 일어나던 그해 여름, 아버지를 피해 농활을 갔던 부잣집 아들이었던 윤 교수는 시골에서도 여전히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이 무위도식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우연히 조그마한 시골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는 정인을 만나면서 시들하던 세상이 갑자기 바뀐다. 아버지가 월북하고 오래된 폐가에 남은 정인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주위의 시선에 고개를 숙인 채 도서관과 집만 오가는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윤 교수를 만나면서 그를 따라 도시로 가게 되는데 도시에서 그가 만난 것은 민주화의 거센 시위였다. 학우들이 시위를 하건 말건 관심도 없었던 윤 교수는 학교에 돌아오면서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고 그를 기다리던 정인도 시위 가담자로 잡혀가게 된다.가볍고도 가벼운 이 시대의 사랑에 비추어 보면 그들의 사랑은 수채화처럼 풋풋하지만 사랑이 가벼움이나 풋풋함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들의 사랑 역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못한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 가령 월북자의 딸이라거나 윤 교수가 부유한 집의 아들이라거나 젊은이들이 민주화의 거센 열풍에 몸을 던질 때라는 등의 부수적인 상황들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해 여름만의 상황만은 아니어서 이런 조건들은 지금도 여전히 청춘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그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인은 말한다. 혼자 기차를 타고 떠나면서 “다음엔 이 손 절대 놓지 말아요”라고.윤 교수가 시위 도중 잡혀가서 정인에 대해 물을 때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 영화의 결말을 예고한다. 윤 교수는 그 말 한 마디로 인해 평생을 그녀를 그리워하며 혼자 살게 되고 다음이라는 미래의 시간은 그들에게 오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지만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던 것이다.사랑이 너무나 순수하면 그 순수함 때문에 오히려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는 것이 순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 역시도 사는 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순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바라보는 우리가 그 순수에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사랑도 계산과 이해타산에 따라 정략처럼 이루어지는 시대, 순수해서 오히려 가슴 아픈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화면 위에 아름답게 펼쳐진다.15회 춘사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신인여우상, 음악상 등을 휩쓸었던 영화이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 산책…곽경택·김태훈 감독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전쟁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영웅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 영웅은 언제나 이름 없는 병사들보다는 장군들의 몫이었다. 시체도 찾지 못하고 즐비하게 죽어간 병사들은 제 무덤도 갖추지 못한 채 뼈와 살을 산야에 흩어놓았다.가끔 병사들의 뼈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그칠 때가 많고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 묻힌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들은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잊혀져 간다. 전쟁과 거리가 먼 세대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그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사라져 간다. 그리하여 역사는 언제나 기억의 산물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기억-그것은 회고하는 자의 몫이다.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는 것은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평균나이 17세, 훈련 기간은 단 2주, 272명의 학도병이 투입된 장사리 전투는 그 기억 가운데서도 가장 처절한 기억이다. 일본에 가미카제가 있었다면 우리는 장사리 전투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국가는 젊은이들을 총알 앞에 세웠다. 승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은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가끔 동해안을 돌다가 그 장사리 앞에 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이다. 그때 전투에서 목숨을 바쳤던 그 또래 젊은이들이 해수욕을 하느라 붐비는 그 바닷가에서 한때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육이오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들은 그 바닷가에서 있었던 전투를 잊어가지만 우리 모두가, 특히 국가가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사리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전함이 마치 그들의 몸이 하나하나 쌓여서 만들어진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픈 이유이다.우리나라 어느 산천, 어느 바다에 젊은이들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 처절한 육이오는 이제 서서히 잊혀져 간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내전의 기록만 남긴 채.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한국군은 북한군의 작전을 교란시키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을 펼쳤다. 그 작전에 투입된 젊은이들은 낡은 총과 부족한 탄약을 지급받고 기꺼이 문산호에 올랐다. 그러나 그 상륙작전은 다음 날 거행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가려 간간이 관심 있는 이들에게만 떠올려질 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장사리가 있는 영덕은 한반도의 허리에 있는 지역으로 서해안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적의 교란작전으로는 최상의 작전이었다. 군번도 제대로 부여하지 않은 채 투입된 병사들이 죽어간 후 잊혀져 가던 장사상륙작전은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1980년 7월 ‘장사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를 구성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1997년 회원들이 장사리 바다에서 그때 좌초된 배를 발견하면서 역사는 실제적인 형태를 갖추었다.그들 잊혀진 영웅들을 기억하기 위한 영화 촬영은 장사리 해수욕장과 비슷하게 소나무가 많은 영덕 고래불 해수욕장에서 이루어졌다. 봄이면 아름다운 갯메꽃이 피어나는 고래불 해수욕장은 소나무 숲이 해안가로 길게 뻗어있고 수심이 얕아 영화촬영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고 알려져 있다.아쉽게도 이 영화는 많은 관객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때 희생된 학도병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를 잊은 자에게 미래도 없다는 말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떠올린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마이클 래드포드 감독 ‘일 포스티노’

한때 시가 문장의 최고봉일 때가 있었다. 과거시험도 문학 고시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시가 밥도 먹여주지 못하는 가난한 예술이고, 요즘도 시를 쓰냐는 말이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나 여전히 시는 유효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시를 쓰고 있고, 쓰고 싶어 하고, 향유한다. 아마도 시는 앞으로도 꾸준히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면서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이탈리아의 한 작은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저항 시인인 네루다는 날마다 자기에게 오는 편지를 배달해 주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와 친해진다. 어느 날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가 무엇가요? 네루다는 답한다. 시는 은유지. 은유는 뭔가요? 네루다는 다시 묻는다. 이 섬에서 아름다운 게 뭔가? 베아트리체 루소요. 베아트리체는 마리오가 짝사랑하는 섬의 여인이다.그런 마리오에게 네루다는 은유에 대해서 알려준다.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아버지의 뱃전에 부딪히는 바다 소리, 밤 하늘의 별,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마리오는 네루다에게서 배운 은유의 언어로 베아트리체에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우리의 언어 중에서 은유의 언어를 빼고 나면 사물이나 사건, 사태를 표현할 수 있는게 얼마나 될까. 자연을 자연 그대로 표현할 언어가 우리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비유의 언어를 쓸 수 밖에 없고 특히 은유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다. 마리오는 은유를 익히면서 세계를 다르게 보기 시작하고 자신이 사는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가고 사회주의자인 네루다를 지지하기 시작한다. 마리오 역을 맡았던 마시모 트로이시는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 암 투병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 영화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작품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으니 개봉작을 보지 못한 그도 천국에서 웃을 것이다.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반드시 있다. 이 영화에도 루이스 바칼로프가 작곡한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라는 음악은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의 차준환이 프리 경기에 사용하기도 했다. 원곡은 경쾌하고 밝지만 이작펄만의 바이올린으로 재해석한 곡은 좀 더 음이 깊고 감수성이 짙다.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미와 음악, 시적인 대화 등이 어울려 한 편의 아름다운 시 같다. 영화를 보고나면 시는 문자로 쓰인 어려운 예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고정관념도 깨어질 것이다.오랜 세월이 흐른 후 네루다가 다시 카프리 섬을 찾았을 때 섬에는 마리오 대신 어린 네루다가 살고 있다. 은유를 배우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뜬 마리오는 사회주의 시위 중에 죽었고, 네루다를 그리워하던 마리오는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에게 네루다의 이름을 지어준다.많은 사람들이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아직도 시를 쓰냐는 질문을 던진다. 참으로 어이없고 가당찮은 질문이지만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하지만 낫고 싶지 않아요”라는 마리오의 대답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데이빗 린 감독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막에 사는 큰 낙타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신과 경계는 해소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또 다른 불신과 경계가 생겨나기도 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평화는 늙은이들의 인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네. 불신과 경계에 의해서.”샘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환대와 적의가 동시에 주어진다. 그 사막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아랍부족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로렌스는 그들의 불신과 경계를 깨고 환대를 받고 돌아온다.영국군 장교인 원래 그의 목적은 중동전쟁에서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아내는 것인데 막상 사막에 들어가자 그는 아랍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적의를 환대로 바꾸게 되는 지점이다. 사막에서 왜 아랍인들이 그들의 전통의상을 고수하는지 몰랐던 로렌스는 드디어 영국군 장교의 옷을 벗어 버리고 아랍인의 옷인 토브를 입는다. 사막에서는 사막의 옷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는 아랍인화 되어 간다.아랍은 아랍의 독립이 필요했고, 터키는 터키의 독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영국군은 터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아랍인들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아랍인들은 서구의 사람들을 불신하고 있었다.이 영화는 요즘 흔히 보는 휴대폰으로 보기에는 아쉽다. 사막의 장대한 스케일과 풍경이 화면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랍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터키와 전쟁을 벌여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불신의 벽을 깨고 관계를 맺어 나가는지를 보여 준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진리를 넘어 로렌스는 진정으로 아랍을 이해하고 아랍을 위한 전투를 치른다.이 영화는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접했다. 서구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다면 아랍에는 ‘지혜의 일곱기둥’이 있다. ‘지혜의 일곱 기둥’이란 말은 구약 성서에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란 말에서 인용한 것으로 일곱 기둥이란 아브라함의 종교의 천국, 즉 일곱 개의 천국이다. 이 일곱 천국은 일곱 개의 천국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상층에 있는 것이 아라봇이라는 천국으로 불교의 열반 쯤에 해당될 것이다. 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품절 되어 버린 이 책을 찾느라 중고서점을 한참 뒤진 기억이 새롭다.실제로 로렌스는 전쟁 영웅도 아니고 영국이 중동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내보낸 스파이도 아니다. 그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일체의 척도를 거부하고 자유와 고독을 선택한 조르바 같은 남자이다. 그러므로 푸른 눈을 한 이방인으로 아랍의 사막에 들어가 몸을 던짐으로써 아랍인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이 책과 영화는 아랍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영국군 장교 로렌스의 자서전이며 꿈꾸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정서이다.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꿈을 향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로렌스는 그렇게 말하며 지혜의 빛, 열정의 빛으로 지금도 사막에 살 것만 같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우리의 삶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알고 보면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 않을 것도 없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운명론자가 되는 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본 경험이 많아지면서일 것이다. 누군들 지금의 자신처럼 살고 싶었겠는가. 티 없이 맑은 어린 시절과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늙어가는 자신을 돌아보면 그때 가졌던 꿈과 열정이 속절없어진다.“물고기, 개구리, 뱀 그 중에 하나라도 죽었다면 넌 평생 그 돌을 가슴에 얹고 살아갈 것이다.” 영화에서 뱀과 개구리, 물고기의 몸에 돌멩이를 묶어 놓고 놀다가 잠든 아이의 등에 큰 돌을 묶어 놓은 노승이 풀어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한 말이다. 물고기와 뱀이 죽었으니 아이는 두 개의 돌을 가슴에 얹은 셈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기 자기 가슴에 돌을 얹고 산다.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윤회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늙음 다음에는 젊음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난 계절에 가슴에 얹은 돌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으며 시간이 흐르고 그 돌의 무게로 점점 힘겨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는 일은 점점 무거워진다.계율이 육신의 욕망을 없애지 못하고 비참과 불행을 모두 겪은 청년에게 노승은 담담하게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고 하지만 알면서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세상의 좋은 말들이 모두 우리 가슴에 박히고 삶이 말처럼 흘러간다면 고뇌와 고통은 왜 생기겠는가. 내가 좋은 것은 남들도 좋고, 내가 가진 것들은 언젠가 놓아야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 아름다운 명구들을 하나의 무늬처럼 흘려보낼 뿐이다. 그러면서 봄이 가고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것처럼 아이가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봄이 올 것이다.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미로도 격찬을 받았는데 실제로 영화를 찍은 경북 청송의 주산지는 영화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노란 싹이 움트는 봄, 주산지에 몸을 담근 왕버들이 무성해지는 여름,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을, 하얗게 눈이 뒤덮이는 겨울,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주산지로 오르는 길을 가다 보면 영화에서처럼 아름다운 절 하나가 문득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아 설렘이 깊어진다.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풍경을 담기 위해 잠을 설치며 달려와 삼각대를 걸어놓고 기다리지만 정작 그런 날은 흔치 않을 것이고, 비라도 내리는 날은 주산지에 그 작은 암자가 있는 듯도 하다.영화의 아름다운 영상미는 아마도 김기덕 감독이 파리에서 3년 동안 거리의 화가로 살았던 이력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그는 영화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충무로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오히려 그런 비정형성이 그의 영화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감독사전’의 앙케이트에서 그는 “나는 밤새 파리 시내를 헤매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닭을 사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어스름한 아침, 흑인 청소부들이 거리를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파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들은 그 후 내가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고 모델이었다”고 말한다.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날것의 이미지와 호평과 악평의 사이에서 논쟁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근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날것과 논쟁 사이에는 김기덕만의 휴머니티가 살아 숨쉰다. 아이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업의 질긴 끈을 일러주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아이는 노승의 말처럼 업을 돌멩이처럼 지고 살아가는데 되돌아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묶인 업일지도 모른다.이 영화는 영상을 보지 않고 귀로만 들어도 대사와 음악이 어울려 하나의 드라마를 이루는 묘한 재미가 있다. 51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관객상과 2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술상을 수상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수없이 회자되면서도 정작 본 사람은 많지 않은 영화 가운데 이 영화도 있다.“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왕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의 구멍에 영원히 봉인해 버린 말이다. “모르죠? 옛날엔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봉했다고 하죠.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차우역을 맡은 왕조위는 리첸역을 맡은 장만옥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렇게 묻는다.이 영화의 배경은 1962년의 홍콩인데 이 해는 왕가위 감독이 홍콩으로 넘어온 해이기도 하다. 60년대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으니 왕가위 감독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렸을 때이기도 했을 것이다.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넘어와서 홍콩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홍콩에서는 작년에도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기 위한 시위가 일어나 공항까지 마비되는 상황이 있었는데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 또한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였다.왕가위 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을 ‘화양연가’라고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차우와 리첸의 사랑이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이었다 해도 화양연화라 할 만큼 그들에게는 그 순간이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미완의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억될 수도 있다.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여자이면서도 리첸의 아름다움에 빠져 들었다. 장만옥이 입고 있던 치파오의 매력은 무채색같은 영상미에 더해져 매력을 더했다. 그녀의 몸 자체가 언어가 되었다. 국수 그릇을 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던, 호텔에서 차오의 사랑을 거절하던, 찻집에서 서로의 배우자의 불륜을 암시하던 모든 모습들이 말보다 더 간절한 말이 되었다. 섹시하면서도 우아한 치파오는 장만옥의 매력을 더할 수 없이 빛내 주었으며 그 자체 또한 화양연화였다. 사람의 몸이 저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그렇게 장만옥은 옷으로 자신의 말을 하면서 정작 입은 열지 않는다. 때로는 허공을 보면서, 때로는 가만히 웃는 웃음으로, 또는 표정 없이 흘리는 눈물이 말이 된다. 그런 절제미는 관객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으로 애타게 하지만 사랑을 끝낸 그녀는 다시 건조한 나날로 되돌아간다.좋은 영화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영화의 장면장면마다 흘러나오는 굵직한 첼로음들이 그들의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암시한다. 그들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Nat King Cole이 부른 ‘Quizas, quizas, quizas’는 ‘아마도’ 란 뜻인데 탱고풍의 이 음악이 영화 전체를 허망하게 만든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경쾌해서 오히려 쓸쓸한 음악도 있다.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는데 매번 장만옥의 치파오의 매력에 빠져서 지루한 줄을 몰랐고, 선을 넘지 않으려 하는 그들의 아슬아슬한 사랑에 애가 탔고, 그리고 음악이 좋았다. 영상을 보지 않고 음악만 들어도 머리 속에는 영상이 흘러갈 정도이다.화양연화는 BBC가 선정한 ‘21세기 세계 100대 영화’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작품성에서 인정받은 영화다. 또한 2000년 제53회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최우수예술성취상을 수상한 아름다운 영화이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이창동 감독 ‘버닝’

이 영화는 한국 영화에 대한 나의 모든 고정관념을 깨게 해 준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한국 영화는 시나리오가 부실하고 뭔가 모르게 엉성하면서 재미는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도 이렇게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물론 그 이전의 이창동의 영화 〈시〉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이 영화만큼은 아니었다.이 영화는 두 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는데 하루키의 원작이 훨씬 비중이 크다. 하루키의 단편을 읽고 이 영화를 본다면 이창동이 만들어 놓은 메타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하루 종일 햇살이 잠깐 들어오는, 그것도 남산 전망대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인 집에서 사는 해미와 고향 친구인 종수는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해미는 그곳에서 개츠비 같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그런데 이 남자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한다. 그것도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정기적인.해미는 자기가 어렸을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종수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종수에게는 그 기억이 없고, 해미의 엄마나 언니, 동네 사람들은 우물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종수의 엄마만이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우물은 이 영화의 중요한 하나의 메타포이다.벤은 요리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걸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그것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제물을 만들고 그걸 먹는 것이다.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는 부시맨들이 추는 춤에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있다고 알려준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서 배가 고픈 사람이다. 해미와 종수는 둘 다이지만 벤은 단지 개츠비일 뿐이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판에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것들이 많다고 벤은 말한다. 쓸모없고,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그들은 자신이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것이다.벤은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고 희열을 느끼는데 과연 그가 불태우는 비닐하우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비닐하우스가 쓸모없고 불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벤은 판단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비 같은 것이라서 거기에는 자연의 도덕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도덕이란 무엇일까. 약육강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어느날 벤은 종수의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고 예고하고 해미는 실종된다.이 영화에서 비닐하우스와 우물은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메타포인데 벤에게 쓸모없고 불필요한 수많은 비닐하우스들이 불태워질 것을 깨달은 종수는 벤의 배에 깊숙이 칼을 찔러 넣는다. 세상에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는 없고, 그것들은 원래부터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 것이다.우리는 어떤 비닐하우스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우물에 빠졌을까, 리틀 헝거? 혹은 그레이트 헝거?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워낭소리

40여 살이 된 소의 눈이 천천히 감기고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재빨리 낫을 가져와 코뚜레와 목줄을 잘라준다. 그리고 말한다, “좋은데 가거라. 고생하고 애먹었어.”할아버지는 어릴 때 침을 잘못 맞아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닌다. 30여 년을 둘은 그렇게 살았다. 소가 움직일 때마다 목에 걸린 워낭에서는 딸랑딸랑 천천히 소리가 울린다. 워낭소리는 할아버지와 소의 교감 방법이고 서로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소리이다.봉화 청량사의 가파른 길을 올라 세상의 끝에 서 있는듯한 탑 앞에서 노부부는 소의 명복을 빈다. 소가 죽으니까 안됐냐고 묻는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버럭 고함을 지른다. “그럼 안됐지, 사람이나 짐승이나 뭐가 다르다고.”워낭소리는 어릴 때 늘 듣던 소리였다. 쇠죽을 먹느라, 마굿간을 나오느라, 고개를 흔드느라 소가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거렸다. 소는 천천히 움직이는 짐승이라 워낭소리도 소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소리를 내었다. 산에 소 풀을 먹이러 갈 때도 우리는 워낭소리로 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소마다 워낭소리가 달라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워낭소리만으로도 누구 소인지를 분간했다. 소와 워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귀에는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소가 먼저 죽고 난 후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으면 소 옆에 묻어 달라고 한다. 늘 쟁기를 지고 고랑을 만들던 밭 가운데 있는 소의 무덤을 찾아가 흙 묻고 갈라진 손으로 워낭을 들고 밭둑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번은 봉화장에서 돌아오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이었다고 했다. 소가 잠든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 저 혼자 집을 찾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자동차가 질주하는 이 시대에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봉화 시내를 다니고, 마을 회의에도 참석하신다.동행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조건을 계산해가며 동행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할아버지와 소처럼 30여 년을 함께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동행의 의미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소하고 같이 죽을 걸 염원하지만 죽음이란 게 그렇게 함께 오지는 않는다. 죽음마저도 소와 함께 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염원대로 지금 그들의 무덤은 한 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소가 죽으면 묻어 줄거냐는 동네 사람들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말한다. “당연하지, 장례 치러 줘야지, 상주 할 건데.” 할아버지에게 소는 소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분신이다. 그 긴 세월 동안 할아버지의 다리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 준 소다.봉화는 길마다 골마다 풍경이 아름답다. 거기에 봉화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찍은 ‘워낭소리’가 더해졌을 뿐이다. 풍경이 아름다우니 사람 사는 모습도 아름다워 ‘워낭소리’같은 다큐도 나왔으리라.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름을 바꾸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음양오행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한글 이름이 유행하고 더 이상 음양오행에 바탕을 둔 이름을 짓지 않게 되면서 타인에게 놀림감이 되거나 부르기에 이상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역으로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음양오행에 바탕을 둔 이름을 찾기도 하니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하나의 역설이기도 하다.이름은 하나의 상징이며 기호이기도 하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읊음으로써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 꽃은 수많은 꽃 가운데 하나의 흔들림, 몸짓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하기도 한다. 그가 꽃의 이름을 불러주자 꽃은 비로소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과 치히로는 이명동인이다. 제3의 세계인 백귀야행의 주인은 누구든지 이름을 먼저 빼앗아서 그를 지배한다. 치히로는 온천장에서 ‘센’이라는 이름으로 일하게 되는데 그를 도와주는 하쿠는 치히로에게 본명을 숨기되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원래의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코로나가 유행하는 동안 우리는 환자의 이름을 모르고 숫자 1, 2, 3으로 그들을 호명했다. 그들이 숫자로 불리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원래 속했던 세계에서 벗어나 단지 코로나에 감염된 익명의 환자일 뿐이었다. 회복되면 그들은 다시 번호를 버리고 자신의 이름이 속한 사회로 돌아갈 것이다.치히로는 계약서를 쓰면서 치히로라는 이름 대신에 센이라는 이름을 쓴다. 우리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직위로 불리게 되면서 ‘나’라는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직장에서 김 대리, 손 부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 김 대리와 손 부장의 개인적인 자아는 없다. 철저한 직장의 구성원으로서의 김 대리와 손 부장만 있을 뿐이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거기서 나갈 수 없다는 하쿠의 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뼈아픈 말이다. 치히로가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 치히로에게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었다.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치히로는 센이 되면서 치히로를 잃어버렸고, 센은 치히로가 되면서 센을 잃어버렸다. 이제 어디에서도 센과 치히로는 찾을 수 없다.이름을 바꾸는 것이 쉬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조차 바꾸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자신이 속한 세계가 바뀌지는 않는다.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센과 치히로라는 이름을 통해 우울한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과 끝없고 추한 인간의 탐욕을 보여 주면서 행방불명된 치히로를 찾고 싶었을지도 모른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가버나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0∼24)예수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었으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레바논의 빈민가에서 출생기록조차 없는 12살짜리 자인이라는 한 소년이 동네 아이로부터 빼앗은 스케이트보드 위에 커다란 냄비를 묶어놓고 그 안에 한 살짜리 요나스라는 어린아이를 태워 다닌다. 자인이 요나스를 안고 다니기에는 너무 무거워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유모차인 셈이다.요나스의 엄마는 불법체류자로 구금되어 교도소에 있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인은 요나스를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12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요나스를 태운 냄비는 덜커덩 털털거리며 시장바닥을 헤매다니고 어른들은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두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인과 요나스 같은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음부에까지 낮아진 레바논의 풍경이다.레바논에서 빈곤과 버려진 아이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5년간 이어진 종교전쟁인 레바논의 내전은 최대 23만 명의 사망자와 약 35만 명의 난민을 양산했으며, 수많은 고아가 거리의 아이들이 되었으니 자인과 요나스는 35만 명 중의 한 명인 셈이다.자인은 아이가 많고 가난한 집의 맏이인데 어느 날 여동생 사하르가 초경을 하면서 집주인에게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간다. 11살이었던 사하르는 임신을 하고 결국 하혈로 숨지고 마는데 그걸 안 자인이 사하르의 남편을 칼로 찔러 버린다. 법정에 선 사하르의 남편은 그녀가 결혼이 뭔지나 알 나이였는지를 묻는 변호사에게 “이미 꽃이 피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조혼풍습이 만연한 이슬람에서는 여자 아동의 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딸이 초경을 하면 팔다시피 결혼시켜 버리는데 그들도 그걸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자인은 법정에서 사하르의 남편에게 말한다. “사하르가 감자냐? 아님 토마토인가? 꽃이 피게”“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레바논 빈민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인간의 정의에 대해 물음을 묻게 한다. 자인의 부모, 이웃들은 지금 우리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이지만 그들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생존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정의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버나움은 예수의 예언처럼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영화 속의 가버나움, 레바논 빈민가는 멸망하지 않고 존속되리라고 믿는다. 소돔에는 롯이 있었듯이 가버나움에는 자인 같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리큐에게 물어라'

“내가 머리를 숙이는 것은 오직 아름다움 앞에서 뿐입니다.”자신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리큐가 한 말이다. 리큐는 궁극의 미를 차를 통해 구현해 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이다. 그가 할복을 하던 날, 집 앞에는 3천의 군사가 지키는 가운데 리큐는 자신에게 칼을 꽂는다.휘날리며 떨어지는 붉은 매화처럼 흰옷에 낭자하게 퍼져가던 피는 그가 추구했던 궁극의 아름다움이었을까.그가 도요토미에게 복종을 하지 않은 것은 속임수와 배신을 일삼던 그의 인간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아름다움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군으로 모시던 오다 노부나가는 결국 도요토미에게 희생되었지만 그는 아름다움을 알고 존중하던 사람이었다.일본에서 흔하디 흔한 차로 궁극의 미를 구현하고자 했던 리큐는 찻잔 위에 휘날리는 매화를 담아 내거나 창으로 비치는 대나무의 그림자를 담아낼 줄 알던 사람이었다.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하던 리큐를 통해 소설 ‘금각사’를 떠올렸다. ‘금각사’의 학승은 금각사를 소유하기 위해 절에 불을 지른다. 아름다움은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리큐 역시 나눌 수 없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조선 여자를 자살하도록 만들었고, 그녀가 품고 있던 녹유 향합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극단의 미를 추구하는 극단의 인간형이지만 극단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요즘의 우리가 한 번쯤은 돌아보고 싶은 인간이기도 하다.리큐(利休)는 날카로운 날(刀)의 휴식을 의미한다. 쉬고 있는 날이다. 그러나 날이 쉬고 있다고 해서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날카로운 날을 사용함에 있어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니 날카로움은 여전히 유지된다. 다도의 매력은 바로 이 리큐(利休)에 있으며, 차가운 날(刀)의 휴식이 다도의 궁극의 아름다움인 것이다.쉼이 없는 삶은 여백이 없어서 늘 숨이 막힌다. 삶에서 이 여백을 찾는다는 것은 마음의 내려놓음이며 차는 바로 마음 내려놓음에 가장 적당한 사물이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은 찻잔위로 매화 꽃잎이 날아든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내려놓음이겠는가.이 영화는 일본의 다성이라 불리는 센노 리큐(1522∼1591)를 통해 일본의 다도, 특히 다도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미에 대해서 보여준다.“소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끝에는 썩고 무궁화 꽃은 하루를 피어도 스스로 영화로 여긴다.” 백거이의 방언이라는 시에 나오는 글로 조선 여인이 죽기 전에 남겼던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잊고 사는 궁극의 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이다.제140회 나오키상 수상작이었던 작가 야마모토 겐이치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제37회 일본아카데미상 우수 미술상, 37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최우수 예술공로상을 수상했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 산책…‘바그다드 카페’

바그다드 카페“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을 찾아”코로나 19가 이 도시를 강타하여 많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갈 무렵, 자발적 격리라는 생전 처음 해보는 상황의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어 동네 카페에 나갔더니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제베타 스틸이 부른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주제곡인 Calling you였다.이 음악과 함께 남편과 싸우고 사막에 혼자 내렸던 뚱뚱한 독일 여자 야스민과 사자 머리를 한 흑인 여자 브렌다와 함께 모하비 사막의 황량한 풍경도 떠올랐다.라스베이거스 근처의 모하비 사막에 혼자 버려진 야스민이 펼쳐나가는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잔잔한 행복감을 준다.남편과 싸운 야스민은 사막 한가운데에 커다란 짐가방 하나만 들고 내려서는 터덜터덜 걸어 고속도로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한다.카페의 커피머신은 고장 났고, 게으른 남편은 빈둥거리고, 아직 어린 아들은 아이를 낳아놓은 채 피아노만 쳐대고 딸은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는, 희망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나날을 살아가던 카페 주인 브렌다 역시 사막의 한 가운데 버려진 여자이다.극도로 삶에 지쳐 버리면 타인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무관심해지는 법, 카페의 주인인 브렌다는 고함과 짜증으로 나날을 살아가는데 야스민이 그 카페에 오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야스민은 먼지가 가득한 카페를 청소하고 마술을 배워 카페 식구들에게 웃음을 퍼트리기 시작한다.사막에 버려진 야스민과 게으른 남편을 쫓아내고 살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브렌다는 어느 순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카페에는 야스민의 마술을 보러 온 트럭 운전사들이 넘쳐나고 저녁마다 마술쇼와 함께 웃음이 퍼져나간다.야스민의 선하고 밝은 성격과 삶에 지쳐 웃음을 잃어버린 브렌다가 드디어 카페에 웃음이라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희망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묘한 것이지만 인간은 희망없이는 살 수 없다. 지금의 우리가 그렇다. 사람을 만나자니 전염병이 두렵고, 가게에는 사람들이 찾아들지도 않고, 물건은 소비되지 않아 멈추어 선 공장이 늘어난다.불안이 짙게 내려앉은 도시에는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허공을 떠다니는 공기조차 전염병을 퍼트릴지 몰라서 전전긍긍한다.그러나 이곳에도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료진들이 환자를 돌보고 있고,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누군가는 마스크를 집으로 배달해 주고, 누군가는 코로나에 걸린 장애인 곁을 떠나지 못해 숙식을 함께 하고 또 누군가는 이 도시로 달려와 준 의료진들에게 음식을 보내준다. 그들로 인해 아직 우리에게는 절망보다 희망이 더 많다는 것을 배우며 그래서 삶이란 한번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희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던 브렌다도 마음이 따뜻한 야스민을 통해 아름다운 삶에 눈을 떠가고 희망이라는 낯선 돛단배를 카페로 끌어들인다.제61회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된 불후의 명곡 Calling you를 비롯해서 시애틀국제영화제 작품상, 아만다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바바리안영화제 각본상, 세자르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를 휩쓴 이 영화는 코로나19로 지친 우리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천영애(시인)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마농의 샘’…시인 천영애

한 편의 음악이 영화에서 전개되는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며 끌어가는 힘은 강렬하다.신은 우리들의 희망에 따라 음악을 만들지 않았지만 영화 ‘마농의 샘’ OST인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은 희망을 갈구하는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다. 마농의 운명이 바뀔 때마다 영화에서는 ‘운명의 힘’ 서곡이 흘러나온다. 음악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이다.영화는 붉은 카네이션이 자라는 프랑스 프로방스 언덕에 있는 마농의 옛집을 보여주면서 ‘운명의 힘’ 선율의 흐름 속에서 시작된다. 카네이션은 ‘운명의 힘’과 뒤섞이면서 꽃이 아니라 앞으로 위골랭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세자르 가문의 붉은 피를 예고한다.2부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1부는 1986년에 제작되었고 2부는 1년 후인 1987년에 제작되었다.“마르셸과 재클린 파놀에게 바침”이라고 영화의 서두에 쓰여 있는데, 프랑스 영화 100년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평가되는 이 영화의 감독 클로드 베리가 원작자인 마르셸 파놀과 부부인 재클린 파놀에게 헌정하는 영화인 셈이다.불세출의 배우인 이브 몽땅을 비롯하여 세자르 남우주연상을 받은 다니엘 오떼유, 제라르 드 빠르디유와 그의 실제 부인 엘리자베스 드 빠르디유, 그리고 주인공 마농 역의 엠마누엘 베아르까지 프랑스의 대표 배우들이 모두 출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화려한 출연진만큼 완성도가 뛰어난 이 영화는 전미 영화 비평가협회 작품상 및 시네마 아카데미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탄탄한 시나리오와 뛰어난 배우들의 예술성을 증명했다.이 영화는 자기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세자르 가문의 비극을 그리고 있지만 더 나아가 인간의 악함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악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 자신에게 피해가 끼칠까봐 이웃의 악에 입을 다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접하는 일들이다.사람들은 이웃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불행이 자기에게 닿을까봐 피하고 외면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비사회적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악한 행위를 외면하는 것은 그 악에 동조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세자르 가문의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죄악을 외면하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악의 공범이다. 그래서 마농은 마을로 흐르는 샘을 막아 버림으로써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세자르 가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전부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악은 선을 이길 수 없다는 통속적인 관념 또한 이 영화에서는 위대하다. 선이 언제나 악을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한 사람의 작은 선이 마을 전체의 거대한 악을 이겨낸다. 그것에서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은 이 영화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예술 작품에는 그 작품을 이해할 있는 장치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운명의 힘 선율을 들으면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미리 읽어낼 수 있다.“내가 샘에 대해서 알려줬더라면 그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아직도 가족들과 함께 살아 있을 텐데”라고 했던 마을 사람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마농의 복수를 겪으면서 운명의 힘을 하모니카로 불던 곱추 장을 떠올린다.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던 위골랭은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아들 장을 그리워하며 죽음의 문 앞에서 “오직 굽은 등과 내가 그에게 준 고통만 보였다”고 속죄한다.자식을 죽게 한 위골랭이 속죄와 고통에 비참해하면서 장의 굽은 등과 자신이 장에게 준 고통만 보았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장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부는 하모니카 소리도 들었으리라. 그래서 죽음의 시간에 그는 장의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며 진정한 속죄의 길로 들어섰으리라 믿는다.천영애(시인)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