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삼국유사 기행(10)- 실성왕

역사는 상상이다. 누구도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보지 않은 1천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제18대 왕인 실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시대 대부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조차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더욱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대릉원 한가운데 황남동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 하여 ‘황남대총’이라 이름이 붙은 왕릉. 학자들은 내물왕, 실성왕 또는 눌지왕릉이라고도 추정한다. 남쪽분은 남자, 북쪽분은 여자가 묻혀 있으며 금관과 출토된 유물 등으로 ‘실성왕릉’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다. 삼국유사는 실성왕의 죽음과 눌지왕 즉위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당시 주변 정세 등을 두고 온갖 정황을 역사적 사건과 가치 기준에 빗대어 해석하고 있다. 어차피 오래된 시간이 만든 일들에 대한 상상력을 덧대어 추정한 것에 불과해 사실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성왕의 죽음과 내물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의 이동 과정을 상상해 본다. 공중에서 촬영한 대릉원 전경. 실성왕릉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이 있다. ◆삼국유사 실성왕의희 9년 계축(413)에 평양주의(지금의 경기도 양주)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실성왕은 전왕(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함을 미워하고 꺼려서 그를 죽이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하여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곧 창을 뒤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당시 기록 속의 왕들△내물왕: 내물왕은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 신라 왕위에 올라 지속적으로 세습체제를 갖추었다. 내물왕은 16대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석씨의 피를 반은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다. 김씨로 왕권을 거머쥐었지만, 석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셈이다. 그러나 내물왕 대에는 백제와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방어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많이 받아야 했다. 당시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왜와 가깝게 지내면서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내물왕 때에는 가뭄과 지진도 자주 일어나 자연재해를 많이 입었다. 농사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 농사를 포기하고, 떠도는 백성들의 수도 늘어났다. 백제의 힘을 등에 업은 왜구의 침략도 잦았다. 내물왕 재위 9년에 이어, 38년에는 왜군들이 금성을 에워싸고 5일간이나 물러가지 않았다. 내물왕은 적들이 배를 타고 육지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퇴각할 때 기병을 앞세워 크게 무찔렀다. 재위 44년 399년에도 백제를 등에 업고 수도까지 침략해 온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이 신라 국경지역으로 들어와 왜군과 가야군을 물리쳤다.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라 47년간 재위하다가 402년에 죽었다. 아들의 나이가 어려 고구려에 볼모로 10년간 잡혀있다 돌아온 실성왕이 왕권을 잡았다. 실성왕의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인 대서지 이찬이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 아류부인이다. 내물왕과는 동서 간이다. 그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내물왕의 두 아들 복해와 미해를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에는 내물왕이 보냈다는 기록도 있지만, 많은 학자가 실성왕이 두 아들을 모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눌지왕: 눌지왕은 신라 19대 왕이다. 내물왕의 아들이고,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은 417년에 즉위해 458년까지 4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기도 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한편,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몹시 원망했다.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자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복수하려 했다. 실성왕은 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라고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잔.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사람됨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실성왕이 그를 죽이라고 통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눌지는 도성으로 돌아와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이 부인의 아버지인 장인 실성왕을 살해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형으로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신하들에게 동생들을 데려올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먼저 데려오고, 왜나라에 거짓 항복해 미해를 구하고 자신은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제상의 부인 이야기는 벌지지, 망부석, 은을암 등의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흔적△내물왕릉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교촌마을 북쪽에 있고, 1969년 사적 제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형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여 호석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밑지름이 22m이고, 높이 5.3m이다. 평지에 목관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다음 흙으로 덮어 봉분을 완성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한 내물왕릉.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고분의 형태로 비추어 내물왕릉이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다. 그러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에 비교해 턱없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석곽묘로 짐작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자연스럽게 지금 현재 지정된 고분은 내물왕릉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현재 내물왕릉으로 지정된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대형 고분. 윗부분이 함몰되어 있으며 규모가 큰 점, 첨성대의 서남쪽 등에 위치한 점을 미루어 학자들은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지정된 내물왕릉에서 서남쪽 500m 지점의 대규모 쌍분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첨성대 서남쪽과 일치하고, 윗부분이 함몰되어 시대적으로 적석목곽분의 형식일 것으로 보여 학자들은 이 고분을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대릉원 가운데 호젓한 호수에 물그림자를 데칼코마니로 만들며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는 왕릉으로, 남북으로 봉분이 이어진 쌍분이다. 황남동 98호분으로도 불리며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고분의 아래는 남북으로 120m, 동서 80m, 높이 22로 신라 최대의 고분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황남대총은 쌍분으로 왕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묻힌 남분에서 출토된 유물 모습. 1973년 7월부터 3년여 시간에 걸쳐 발굴한 결과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큰 칼이 나오면서 남분이 왕,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무덤은 얕게 땅을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에 이중 덧널을 설치하고, 따로 방을 만들어 다양한 껴묻거리를 묻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금귀걸이 등의 유물. 무덤에서는 남분에서만 3만7천여 점을 비롯해 6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금관과 금동관, 금제관드리개, 금목걸이,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 금제허리띠,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 금동신, 은제허리띠, 금은반지 등의 금은으로 만든 유물이 출토됐다. 또 금속용기와 칠기, 토기, 유리용기 등의 생활용구와 무기, 마구류까지 다양하게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귀걸이와 장식, 대형옹기를 포함한 생활용품, 무기류와 마구 등 6만 점이 넘는 대량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실성왕이거나 눌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북분에는 금관과 화려한 유물을 넣고 봉분을 더 크게 하지만, 왕인 남분에는 금동관을 넣는 등으로 미루어 눌지왕이 실성왕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눌지왕의 반격석씨들이 왕위 세습을 이어오던 당시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다. 석씨가 왕위를 대물림하던 때에 흘해왕의 아들이 없어 내물왕은 김씨이지만 석씨의 배경에 힘입어 왕좌에 올랐다. 내물왕의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고, 미추왕의 부인은 석씨 왕손이었다. 미추왕이 처가 석씨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듯 내물왕 또한 석씨의 권세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셈이다. 내물왕은 4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가뭄과 지진, 홍수,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 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내물왕은 당시 김씨로 세력이 미약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방어하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어려움과 실성왕 세력으로부터 절대적인 우세한 힘을 확보해 왕권을 안정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내물왕과 비슷하게 미추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석씨 왕족과도 연대하고 있는 실성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물왕은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왜나라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했다. 왜군들은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나쁜 짓을 일삼았다. 내물왕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면서 고구려의 심한 내정 간섭을 경험해야 했다. 내물왕 후대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제의해 나제동맹을 맺으면서 신라는 대외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실성왕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있으면서 고구려 실세들과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었다. 실성은 고구려 후광을 업고 신라로 돌아와 내물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내물왕에 대한 보복 정치를 단행했다. 내물왕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보해와 미해를 고구려, 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이어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가 볼모로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던 고구려 사신들을 초청했다. 실성왕은 고구려 사신들에게 눌지를 제거하라는 밀지와 함께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게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신들이 눌지의 훌륭한 인품에 반해 실성왕의 밀지를 눌지에게 귀띔해 주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 눌지가 거꾸로 돌아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므로 눌지는 장인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꿈만 꾸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6년 만에 왕좌에서 사라졌다. 눌지왕은 또 고구려와 왜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구하기 위한 구국단을 구성해 파견했다. 고구려에서는 설득전략이 먹혀들어 가 보해를 무사히 빼내어 왔다. 그러나 왜에서는 사정이 달라져 왕을 살해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러나 왜의 왕을 살해하려던 구국단은 성사 직전에 은잠술이 능한 왜의 비밀수호단에 잡혀 미해만 가까스로 도망하고, 모두 참형을 당했다. 눌지왕은 4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후대에 접어들어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수시로 침략해 오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귀걸이와 장식, 대형옹기를 포함한 생활용품, 무기류와 마구 등 6만 점이 넘는 대량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무기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주곽의 유물 형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뿔로 만든 잔.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 미추왕 죽엽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 왕조사를 들여다보면, 왕권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치열한 권력다툼은 조선시대 당파싸움, 오늘날 정치 현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신라왕조는 박, 석, 김씨의 3성으로 이어졌다. 김씨로는 처음 왕위에 올랐던 13대 미추왕릉은 대릉원 내부 가운데 부분에 있다. 수양버들과 여러 화초들이 길을 열고 있는 미추왕릉 입구. 이, 정, 손, 최, 배, 설, 6부촌장들이 박씨를 왕좌에 추대한 이후, 신라의 왕좌는 박, 석, 김 3성씨의 자리로 대물림 되었다. 왕을 옹립했던 6부촌장들의 6성은 한 번도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박, 석, 김 3성의 왕권에 대한 욕심은 왕비조차 다른 성씨에게 양보하지 않은 무섭도록 이어진 집착을 보게 한다. 처음 박씨가 신라의 왕조를 열었고, 석씨가 왕가의 주력세력으로 등장했다가 다시 김씨가 줄잡아 대물림하면서 신라의 왕손은 박, 석, 김 3성의 왕국으로 신라 천 년의 역사로 이어졌다. 대릉원 내부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3성의 왕족 중에서도 김씨가 가장 늦게 세력을 움켜잡았지만, 가장 오랜 기간 신라의 주인 자리를 꿰차는 주력으로 남았다. 신라의 본격적인 흥망성쇠를 감당했던 김씨 왕조를 처음 열어간 미추왕과 죽엽군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대릉원 미추왕릉 서쪽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대총이 연못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삼국유사 미추왕과 댓잎군사제13대 미추이질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으며 겸하여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이사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올라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능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 [{IMG04}] 제14대 유례왕 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했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방어했으나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홀연히 신비스러운 병사들이 와서 도왔는데, 그들 모두가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신라군사들과 힘을 합쳐 적을 쳐서 격파시켰다. 미추왕릉의 뒤편에는 삼국유사에서 죽엽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죽림이 조성돼 있다. 적군들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선왕의 음덕에 의한 공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능을 죽현릉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 36대 혜공왕 때인 대력 14년 기미(779) 4월에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는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복장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이 그 뒤를 따라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능 속에서 왁자지껄하며 통곡하고 흐느끼는 듯한 소리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하소연하는 소리는 “신은 평생 시국을 돕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했으며, 삼국을 통합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사온데, 지난 경술(770)에 신의 자손이 아무 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내 공적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는 애쓰지 않으려 하오니 왕께서 윤허하여 주옵소서”라 했다. 왕이 대답하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다시 전과 같이 노력해 주오”라 했다. 공이 세 번 청했으나, 왕이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했다. 즉시 공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한 공덕보의 밑천으로 반 30결을 취선사에 내리고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곧 김유신이 평양을 토벌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해 세웠기 때문이다. 미추왕을 추모하며 요즘도 향사를 올리고 있는 숭혜전. 미추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하였을 것이니 왕이 나라를 수호함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삼산과 함께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으며 끊어짐이 없었다. 서열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라고 했다. ◆설화의 의미△13대 미추왕은 김씨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역사다. 4대 석탈해 왕과 함께 왕의 사위 입장에서 왕권을 잡은 것이어서 다음 대를 바로 잇지 못하고 박씨, 석씨 계파로 왕권은 주된 세력의 일족으로 이양되었다. 석씨와 김씨는 꾸준한 세력을 양성해 왕권을 회복하고, 다시 자리를 물려주면서 역사를 이어왔다. 미추왕릉의 남쪽 정면에 있는 제단이 화강석으로 조성돼 있다. △대잎군사 이야기는 신라 제14대 유례왕 때 이서국의 침략을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친 후 36대 혜공왕 시대에 김유신의 후손이 죽임을 당하자 유신의 혼이 미추왕에게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자 미추왕의 혼이 이를 만류했다는 내용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설화에서 미추의 혼과 김유신의 혼은 그 가치의 추구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미추의 혼은 집단적 가치, 즉 국가를 수호하는 호국신적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유신의 혼은 개인적 가치 즉 후손을 지켜주는 왜소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비교했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된 후 백제,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워 공을 세운 후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 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그 공적에 의해 태대각간의 작위를 받았고 죽은 후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이러한 김유신도 설화에서는 미추왕보다 극히 낮게 기록되어 있다. 즉 김유신이 후손을 지켜주는 혼으로, 미추왕은 나라를 수호하는 신령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추왕이 신라왕실의 시조요 조상신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뜻이 담긴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13대 미추왕의 능은 대릉원 안에 비교적 규모가 크게 꾸며져 있지만, 호석은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에 벚나무가 우거져 4월이면 화려하게 꽃 대궐로 치장한다.◆미추왕미추왕은 신라 13대 왕으로 김씨 최초의 왕이다. 박씨에 이은 석씨 왕가의 세습 도중에 12대 첨혜왕의 아들이 없어 김씨이지만, 석씨 왕가의 사위였던 미추가 왕위를 이었다. 미추왕의 부인이 바로 11대 조분왕의 딸이었다. 부인이 석씨였기 때문에 아들 대신 사위가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미추왕에 이어 14대 유례왕은 다시 11대 조분왕의 아들 석씨가 왕위를 이었다. 미추왕은 백성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기록에서 이해하게 된다. 즉위 3년에 황산, 지금 충남 논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 때문에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왔다. 대릉원 서쪽에 대형 환도가 출토되면서 검총으로 불리는 100호 고분에도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미추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재위 15년 신하들이 궁궐을 짓자고 했을 때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건축하지 않았다. 재위 23년에는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둘러보면서 백성들을 위로했다. 미추왕의 백성들에 대해 사랑은 죽어서도 이어졌다는 것은 이서국의 침략 당시 댓잎 군사들의 설화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혈통왕위에 오른 박씨, 석씨, 김씨 3성. 이른바 신라의 왕손들은 각자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한 혈통보존과 대물림을 위해 혈안이었다. 그들은 혈통 보존을 위해 족친 간에만 결혼을 허락하고, 부득이한 경우 사위가 왕권을 잇게 하기도 했다. 김알지는 석탈해 왕으로부터 태자에 책봉되지만, 절대적인 권력의 약세를 간파하고 왕좌를 포기했다. 대신 그는 스스로 중요 직책을 맡아 권력의 상당 부분을 좌지우지하면서 일가의 사람을 키웠다. 김씨들을 주요 요직에 오르게 하고, 왕비 자리에 앉게 하는 등으로 권력의 주변에 김씨들을 두텁게 포진했다. 박씨의 권력이 석씨들에게로 이양되고, 김씨 일족들의 꿈도 대를 이어 무르익고 있었다. 김알지의 꿈은 권력층에 인력을 포진하는 한편, 사병을 양성해 세력도 탄탄하게 준비하도록 안배를 했다. 특히 박혁거세로부터 내려오던 궁중의 무예도반을 접목한 가전 비법을 만들어 사병들의 전투력을 강하게 키웠다. 김씨 일가의 세력은 미추왕대에 이르러 어떠한 부족들과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규모와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에도 김씨 일가의 병력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미추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사병들의 세력을 키우는 한편, 왕궁을 지키는 특수 비밀병기를 양성해 호위세력으로 배치했다. 그는 사후에도 왕궁은 그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지켜낼 수 있는 드러나지 않는 힘으로 존재하도록 비밀 무사를 안배했다. 신라 최초의 김씨왕 미추왕과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혜전 정면. 이러한 안배 덕분에 14대 유례왕 대에 이서국이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해 왔을 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왕궁 안으로는 단 한 명의 적군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병기들의 손이 움직인 것이다. 그들이 궁궐을 사수하면서 적들을 몰아내고 전쟁에 승리했지만, 결국 전쟁에 참여했던 일가의 사병들은 크게 타격을 입어야 했다. 김씨 일가의 꾸준한 노력으로 16대 흘해왕으로 석씨의 왕권이 막을 내리고, 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씨의 길고 독점적인 왕좌의 무대가 열렸다. 내물왕 이후 왕비 또한 김씨 이외에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22대 지증왕부터 25대 진지왕까지 4명의 박씨가 왕비의 자리를 겨우 차지했을 뿐이다. 그 외에 46대 문성왕, 52대 효공왕이 박씨 부인을 둔 것이 거의 전부이고, 왕과 왕비는 모두 김씨 일족의 자리였다. 미추왕릉 바로 앞에 세워진 표지석. 이러한 김씨 세습체제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던 힘도 35대 경덕왕을 정점으로 36대 효성왕대에 이르면서 급격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김양상과 김경신이 합작해 내란을 평정하면서 왕을 시해하고 왕좌를 빼앗았다. 이때부터 김씨 왕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이어지면서 화려했던 통일신라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숭혜전 옆에 경순왕의 신도비와 비각 옆에 세워진 현령과 군수 공적비. 왕궁을 지키던 김씨 일가의 비밀병기들도 김양상과 김경신의 갈등으로 내분이 극에 이르면서 세력이 약화하기 시작해 결국 와해됐다. 신라 천 년의 화려한 무대도 결국 사적인 권력욕이 부패의 근원으로 기능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을 주는 역사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6)- 석탈해왕

석탈해는 62세의 늦은 나이로 신라의 4대 임금으로 등극해 23년간 통치했다. 지혜가 뛰어난 것이 남해왕의 눈에 들어 공주를 아내로 얻고, 결국 왕위에까지 오르면서 석씨 집안을 왕손으로 잇게 했다. 신라 4대 석탈해왕은 용성국에서 아진포 해안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탈해가 상륙한 지점으로 전해지는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본부 앞에 석탈해탄강기념비와 비각이 있고,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역사에 왕들이 백성들을 위해 진정으로 걱정한 내용이 더러 드러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까지 백성들을 위한 노력을 이해하게 하는 대목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어 백성과 나라를 위해 동해를 지키겠다고 전한 기록이 있고, 김유신 장군과 미추왕 또한 죽어서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석탈해왕은 죽어 동악의 신이 되어 나라를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어, 현대 정치사에도 교훈이 된다. 탄강비 일대에 월성원자력본부가 공원을 조성하고 조형물을 설치해두고 있다. 삼국유사를 통해 석탈해와 김알지의 지혜로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현명하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 절대적인 권력도 양보하고 배려하는 진정한 용기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석탈해는 유언으로 얻은 왕권을 처남에게 양보했다가 늦게 왕위에 올랐다. 김알지는 석탈해왕으로부터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결국 왕위를 사양했다. 여기에서 탈해왕의 지혜와 용기를 삼국유사를 통해 들여다본다. ◆제4대 탈해왕탈해 이사금이다. 남해왕 때였다. 가락국의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떠와서 정박하려 했다. 그 나라의 수로왕과 신하들이 북을 두드리며 맞이하고 머물게 하고자 하는데, 배는 도리어 달아나버렸다. 석탈해가 접안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진포 해변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설립되어 있고, 낚시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구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하늘을 향해 맹세를 하자 곧 열렸다. 그 안에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삼국유사 기행단이 석탈해탄강비를 탐방하며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7일 동안 보살펴주었더니 “우리는 본디 용성국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28용이 사람으로 태어나 5~6세부터 왕위에 이어 올라, 만백성들이 성명을 바르게 닦도록 하였습니다. 여덟 단계의 성골이 있었는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요. 마침 우리 아버지 임금 함달바가 적녀국 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으나, 자리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얻고자 기도드리기 7년 뒤 큰 알 하나를 낳았지요. 이에 왕께서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한 결과, 사람이면서 알을 낳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궤짝을 만들어 나를 비롯한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을 넣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닿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일으켜라’고 빌었습니다.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지켜주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말을 마치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잡고 노비 둘을 이끌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서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봉우리를 보니 마치 초승달과 같아 오래 머물만한 형세였는데 내려가 살펴보니 호공의 집이었다. 간사스럽지만 꾀를 내기로 하였다.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 짐짓 꾸짖는 투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 선조 때 집이오.” 호공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말다툼이 일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자 관아에 아뢰었다. 관리가 물었다. “무엇으로 네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는데 잠시 다른 지방에 가 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그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다. 신라 천 년 궁성 터 월성에는 석탈해 왕을 추도하는 숭신전이 있었다. 지금은 동천동으로 옮겨 세우고, 팔각기둥이 남아 있다. 탈해가 동악에 올라 돌아볼 때였다. 하인에게 마실 물을 찾아보게 했다. 하인은 물을 길어오던 길에 먼저 입맛을 보고 바치려 하자, 그 물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보고 꾸짖자 하인은 “이제부터는 멀건 가깝건 감히 먼저 입맛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입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하인은 완연히 복종하고 감히 속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흔히 ‘요내정’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은 광무제 중원 6년 정사년(67)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석(昔), 곧 옛날 이곳이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을 석 씨로 했다. 어떤 이는 이렇게도 말한다. “작(鵲), 곧 까치가 울어 궤짝을 열었으므로 조(鳥)자를 떼어내고 성을 석 씨로 하고, 궤짝을 해(解) 곧 열어, 알을 탈(脫) 곧 꺼내어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했다.” 23년간 왕위에 있다가 건초 4년 기묘년(79)에 죽어 소천의 언덕바지에 장사지냈다. 뒤에 신령으로 나타나 “내 뼈를 매장하지 말라”고 하므로 열어보았더니, 해골의 둘레가 석 자 두 치요, 신장이 아홉자 일곱치였으며, 이가 엉겨 하나인 것처럼 가지런하였다. 석탈해왕 사후에 그의 시신을 동악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악은 토함산으로 삼국유사 기행단이 토함산에서 흔적을 찾고 있다. 뼈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었으니 천하무적의 힘센 장사의 뼈라 할 만했다. 부수어 소상을 만들고 대궐 안에 봉안했다. 신령이 다시 나타나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고 하여 그곳에 모셨다. ◆흔적: 탈해왕릉, 숭신전, 탄강비석탈해왕의 흔적은 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것들만 전한다. ‘동악’이라 부르는 토함산에 있었다던 우물과 장사지낸 흔적은 없다. 그가 처음 탄강한 아진포 인근, 지금 양남면 나아리 해변의 탄강비, 죽음 이후에 조성된 왕릉, 그를 추모하는 사당 숭신전 등이 있다. 석탈해 탄강 내역을 소개한 글이 기록된 석탈해탄강비. ◆탄강비: 석탈해왕탄강비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본부 정문 옆에 있다. 주변은 월성원전이 넓게 공원으로 조성했다. 탄강유허는 경북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을 삼국사기는 ‘진한 아진포구’라 하고, 삼국유사는 ‘계림동하서지촌 아진포’라 기록하고 있다. 하서리 마을은 탄강비 남쪽에 있다. 조선 헌종 때 석탈해탄강비를 설립하고 하마비를 세웠다. 유허비는 용머리의 좌대나 이수는 없지만, 조선 헌종 11년 1845년에 비석과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자락 남쪽에 송림이 조성되어 있고, 석탈해왕릉으로 전하는 고분이 있다. ◆탈해왕릉: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남쪽 자락 송림에 높이 4.5m, 넓이 15.5m 규모의 탈해왕릉으로 전하는 능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수장했다가 소상을 만들어 동악에 모셔 ‘동악대신’이라 전한다. 왕릉 앞에는 탈해왕이 탄생한 경위와 62세에 왕위에 올라 23년간 제위에 있었다는 것, 동악신이 된 내용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숭신전: 신라 4대왕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표암 남쪽에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은 1898년 권상문 군수의 제안으로 후손 석필복이 월성 안에 지었다. 1906년에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월성 안에 있던 사당을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처음 숭신전이 있었던 월성에는 돌로 만든 팔각형 기둥 두 개가 남아 있다. 숭신전 남쪽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영녕문과 경엄문을 지나면 3칸 맞배집으로 건축된 숭신전이 나온다. 영녕문을 열고 들어서면 상의재와 상인재가 전통한옥의 형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숭신전의 홍살문과 영녕문 사이에 건립된 석탈해왕비명 비각. 홍살문과 영녕문 사이에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 비와 비각이 단아하게 세워져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탈해왕의 지혜탈해는 신라와는 뱃길로 수천 리나 떨어진 용성국의 사람이다. 그는 용성국의 여덟 번째 왕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신체가 특별하게 발달했다. 특히 배움이 빠르고 무술습득 또한 뛰어났다. 결국 위협을 느낀 형들의 모함으로 축출되었다. 다행히 그를 아끼던 대신들이 무기와 식량, 보배들을 큰 배에 가득 실어 호위 병사들과 함께 보냈다. 탈해는 오랜 세월 항해로 지쳤다. 처음 반도에 이른 곳이 가락국이다. 화살과 화공을 피해 신라 아진포로 접안하는데 겨우 성공했지만, 모두 탈진해 실신한 상태였다. 마침 혁거세의 주치의를 담당했던 아진의선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탈해의 신체와 병사들이 가진 세련되게 다듬어진 무기들을 보고는 이들을 호위 병사로 양성하겠다는 욕심으로 치료했다. 아진의선의 탁월한 치료에 의해 탈해는 7일 만에 깨어났다. 원래 잔꾀가 많은 탈해는 깨어나면서 아진의선의 눈에 들기 위해 발톱을 감추고 순한 양처럼 행동해 결국 해안방위를 책임지는 장군으로 임명받게 됐다. 탈해는 세력을 키우면서 해안보다 비옥한 토지가 있는 서라벌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렸다. 토함산에 올라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지세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러다 수비와 공격에 유리한, 호공의 땅이었던 월성을 잔꾀로 빼앗았다. 당시 신라 2대 남해왕은 탈해의 지혜와 무력, 지도력 등에 반하여 사위로 삼고, 왕위를 이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탈해는 그때까지 자신의 세력이 미약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펼쳐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남해왕의 아들이자 처남인 노례왕이 왕권을 잇도록 양보하고 고위직을 택했다. 남해왕 때부터 탈해는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국정을 보살피는 한편, 부지런히 세를 불렸다. 남해왕의 아들 노례왕이 34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탈해는 62세에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석탈해 왕릉 남쪽에 숭신전이 있다. 홍살문, 영녕문, 경엄문을 지나야 숭신전이 나온다. 그러나 그때까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부족함을 느끼고 탈해는 지략과 무술에 뛰어난 김알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포섭해 태자로 책봉했다. 그렇지만 김알지 또한 정세에 밝아 덥석 왕위에 오르지 않고, 노례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데 내실을 다졌다. 동악산신이 되었다는 석탈해의 흔적을 찾는 삼국유사 기행단의 토함산 산행. 석탈해와 김알지의 지혜로운 배려와 감각적이고 세심한 주의가 신라를 박, 석, 김의 시대로 이어가는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다. 현시대 정치인들이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