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캐럿 다이아몬드/ 이재윤

어딘가 허전해/ 손가락에 반지 하나 끼워본다// 그래도 뭔가 허허로움에/ 굵직한 팔찌 하나 걸어본다// 죄인의 발목에도/ 굵직한 족쇄 하나 채워졌듯이// 목욕탕에서도 발목에/ 열쇠 하나 채우고 안심한다// 갓 태어난 아기도/ 뭔가 쥐고 싶어 한 움큼 허공을 꽉 쥐고/ 팔을 흔들며 울부짖는다// 유아는 엄마 젖꼭지 물어야 잠들고/ 어린이는 인형을 안아야 잠이 드는가 하면/ 남편의 손을 잡아야 잠이 오는 부인도 있다 한다// 죽을 때 유서라도 남겨야 눈이 감기고/ 물에 빠진 자의 손에도 지푸라기 쥐어져 있지만/ 정작 죽을 때 가지고 간 자는 아무도 없다/ 마릴린 몬로의 30캐럿 다이아몬드도「비소리」 (우먼라이프, 2004)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살아있는 동안 권력을 가지고 아무리 재물을 모아도 죽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은 부자라도 저승길 떠날 땐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부귀영화가 덧없고 부질없다. 너무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며 살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경계할 뿐 정신적 성취마저 부인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공수래공수거는 인생무상과 상통한다. 인생무상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이는 마음을 비우고 무욕의 삶을 살도록 중생을 계도하는 도구개념으로 기능한다. 물욕과 식욕, 색욕을 내려놓고 만족의 기준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면 정신적인 포만감이 쉽게 찾아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무상은 행복한 삶을 위한 발상의 전환일 수 있다. 도교의 무위자연과도 유사한 관념이다. 현재의 필요를 초과하는 소유는 무의미하다는 어느 스님의 생각에 수긍한다. 인간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암시일 수 있다.하지만 인간은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집착과 욕심은 본능에 터 잡고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여인이라면 반지와 팔찌를 갈망한다. 아기는 고사리 손을 움켜쥐고 유아는 젖꼭지를 문다. 물에 빠진 자는 지푸라기라도 움켜쥔다. 죽을 땐 유서라도 남겨야 비로소 편히 눈을 감는다. 그렇지만 죽고 나면 그뿐이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가는 사자는 아무도 없다. 세기의 섹스심벌 마릴린 몬로마저 예외일 수 없다. 그녀는 생전에 애지중지 아끼던 30캐럿 다이아몬드 하나도 가져가지 못했다.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이치를 모르지 않겠지만 그걸 알고 무욕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입으론 염불처럼 인생무상을 외지만 머릿속은 집착과 과욕으로 가득 차있다. 최근 공기업 직원의 신도시 땅 투기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조그만 반지 하나 갖고 가지 못하는 판에 땅덩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다. 그만 해도 족할 사람들이 족함을 모르고 무리한 게 뒤탈이 났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토지를 거래할 수 있지만 공정과 신뢰를 무너뜨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영리를 추구해선 안 된다. 불법적인 땅 투기에서 드러나는 공직자의 추태는 정말 좀스럽고 추악하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어려운 마당에 분노게이지를 한껏 밀어 올린다. 수치와 치욕을 모르는 간 큰 투기꾼들에겐 수갑과 족쇄가 제격이다. 수갑과 족쇄마저 욕심내는 것이라면 기꺼이 채워주는 것이 맞는다.오철환(문인)

김영재 네 번째 개인전 ‘The Hunter's Meal’, 021갤러리에서 열려

‘연이은 사냥의 실패로 며칠을 굶주린 사냥꾼이 있다면,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냥감의 커다란 머리나 근사한 뿔이 아닌, 신선한 고기일 것이다.’대구 범어동 021갤러리가 다음달 24일까지 김영재 작가의 네 번째 개인전 ‘The Hunter’s Meal’을 개최한다.작가는 조각 등의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현대 사회에서의 생존, 작가로서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사냥꾼과 사냥감 등으로 비유해 나타낸다.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도축된 고기를 주제로 평면과 입체 두 가지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들을 선보인다.작가가 추구하는 작가주의적 예술성과 대중이 원하는 작품, 또한 미술시장이 원하는 작품이 얽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도축된 고기를 필요로 하는 사냥꾼의 상황과 이어진다.상품과 작품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야만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이 될 수 있었던 조각가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냥을 할 수 있는 도구인 ‘총’이 아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기’ 일지도 모른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선 생존경쟁의 승리자들이 쫓는 삶의 형태를 그들을 위한 트로피로 표현한다.아울러 물질 만능 주의가 팽배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주하는 우선가치에 대한 질문을 사냥꾼과 사냥감, 그리고 조각가의 관계로 서술하고 있다. 문의: 743-0217.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사회적 사막-기 소르망의 social desert/ 이근호

어떤 풍경도 없는 모래바람 속에서 눈을 뜬다/ 몇몇은 영영 눈을 뜨지 못한 아침/ 나무와 건물들이 눈만 빼죽이 내밀고/ 터번을 쓰고 안대를 가린 가로등들은/ 혈관이 늘어나도록 링거를 꽂았고/ 모든 길들은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있다// 감각이 사라지자/ 감각의 대상마저 사라진/ 메마른 은유의 숲에서/ 술잔을 깨뜨려 폭죽을 만들던/ 상처받은 오관 위로 차가운 별이 떨어진다// 초고속열차의 속도와/ 승천하는 공룡의 비늘에서/ 대저택의 견고한 높이를 지키는 렌즈에서/ 선크림을 잔뜩 바른 차량의 행렬에서/ 형형색색의 모래는 쏟아져 내린다// 권력의 검은 풍선들이/ 프로포폴로 잠든 정부의 커튼에 묶인 사이/ 누군가는 고층 집무실 금빛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누군가는 강물 위로 전 생애를 던지지만/ 무심한 강물 대신 젖은 모래가 그들을 받아준다// 세상은 귀한 말씀의 썰물과 밀물로/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었고/ 광화문 세종로 커다란 허파 위로/ 삼각파도에 떠밀린 모래가 모여 섬이 되었다// 크고 낯선 조화의 사막 속으로/ 어린 영혼들이 떠오르는 바다/ 이 땅의 4월은 흐드러지게 진달래가 피는데/ 함성 가득한 거리에 서면/ 성벽으로 막아선 진입차량의 완강한 매연 사이로/ 한쪽은 열대사막/ 다른 쪽은 한랭사막// 낙타들이 줄지어 죽어가는 사막의 밤/ 호스피스 엄마는 밤새 죽음의 그림자를 지키고/ 호스피스 누나는 지난 밤 쓰러지는 술병을 지키다/ 마른기침을 하며 돌아가는 새벽// 거대한 자연은 경외하지만/ 거대한 인공은 소외의 그림자만 길게 늘이는/ 피가 돌지 않는 미세혈관들/ 노란 점퍼를 입은 입이 큰 펌프들이/ 쉴 새 없이 생명수를 뿜어 올리지만/ 바닥이 타 오그라진 수로// 사막에 오면 모두 낙타가 되어야 하고/ 낙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신기루의 나무들은/ 낙타의 높이에 소금방울 반짝이는 잎을 매달고/ 낙타가 우뚝 멈춰 선 곳에서/ 수맥은 딸랑거리는 방울뱀 머리를 내민다// 끝없는 모랫길을 떠나려면/ 착한 이웃을 만나 무리를 지어야 한다// 빌딩도 탱크도 은행도/ 사랑 앞에서는 사라지는 사막/ 사막에 오면 모두 사막이 되어/ 사라진 사막의 풍경을 함께 되살려야 한다「대륜문학」 (대륜문학회, 2020)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복지 사각지대를 사회적 사막(Social Desert)이라고 표현했다. 복지 사각지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의 고도자본주의 시스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거나 불운하게 소외돼 버린 발전과 성장의 어두운 그림자다. 메마른 사막에 오아시스가 존재하듯이 복지 사각지대에도 따뜻한 시선과 어둠을 밝혀줄 등불이 필요하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동정과 자선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방부제이자 모두 살아남기 위한 자기혁신이기도 하다.고속성장에 편승해 성공한 자들이 여가를 즐기는 사이, 권력을 쥔 자들이 향락에 젖어 잠든 사이, 누군가는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피가 돌지 않은 사회는 동맥경화에 걸린 몸과 다르지 않다. 맑은 영혼은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기울어진 사회에 개혁과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눈높이에서 막힌 곳을 사랑으로 뚫고 함께 가야 한다. 사랑 앞에선 사막도 사라진다. 옥토로 바뀐 사막을 보고 싶다. 오철환(문인)

의료분쟁을 지켜보면서

오철환객원논설위원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등에 반발하는 의사 관련단체의 실력행사가 민감한 현안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다. 전국의사 총파업, 전공의 총파업, 의사 국가시험 응시 거부 등으로 의료계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에 임해 전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의료인들이 인술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다. 때 아닌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비난하기 전에 전후 사정을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독신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합계출산율마저 2.0 이하로 떨어져 대학입시대상자가 매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예측 가능한 미래에 이러한 부정적 추세가 개선될 여지는 추호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오래 전에 세운 계획에 맞춰 의대 정원을 지속적으로 늘려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구 1천 명 당 OECD 평균 의사 수가 적다는 이유는 설득력이 없다. 젊은 의사 비율과 인구대비 의사증가율은 OECD 평균보다 높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래 추세를 수정해가는 것이 정상이다. 또 의료보험을 비롯한 의료시스템의 국가별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의료의 질도 당연히 따져볼 일이다. 의사 부족과 의대 정원 조정은 그 연후에 도출되는 결과물이 돼야 한다.공공의대 설립 목적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지역별 전공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시도된 것 같다. 하지만 의사 관련 단체들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세게 반발한다면 확정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재검토해보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화를 통해 윈·윈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전향적 자세가 절실히 요청된다. 국민을 위한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한다면 바꾸지 못할 정책이 없다. 급변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 변하지 않는 환경은 없고 영구불변의 진리는 없다.의사 수의 지역별 불균형은 다른 방법으로 조정해야할 과제이다. 예컨대 농어촌 등 무의촌 주민이 인근 거점도시 의료서비스를 신속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인프라를 깔아주는 것이 현실성 있고 경제적인 방법일 수 있다. 의사의 환자 접근성이 현실적으로 구현되기 어렵다면 환자의 의사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성도 크다. 굳이 가지 않으려는 의사 가족을 억지로 벽지로 보내려고 강요하는 것보다 환자가 쉽게 의사를 찾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낫다. 더하기가 안 되면 빼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전공별 불균형은 의료수가 조정이나 지원금 등을 활용하는 방법이 합리적이다. 자본주의와 자유경쟁 하에서 어떤 영역이라도 난이도와 보상에 따라 명암이 갈리기 마련이다. 누구나 위험과 수고에 비해 보상이 더 큰 일을 선호한다. 의사라고 예외일 수 없다. 흉부외과 등이 의대생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는 희생에 비해 소득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시정해야 할 필연성이 정의라면 사회적 합의를 거쳐 시장실패에 정부가 적극 개입할 정당성이 확보된다. 의료보험수가를 조정하거나 정부가 직접 지원금을 주는 방법을 상정할 수 있다. 미곡의 수매량과 수매가를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기존 의대를 활용해 공공의대 설립 목적을 점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도 하나의 선택지다. 남원이나 순천에 새로이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것보다 전북대 의대나 전남대 의대의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이 반발이 적고 더 효과적이다. 지역발전에 더 실속 있고 지속 가능한 방안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생색내기 위해 기획된 조잡한 정책이 아닌지, 특정지역의 지역공약사업에 무리한 모험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지, 그것이 의심스럽다. 실패한 의학전문대학원 모델이라는 점도 께름칙하다.의료인들의 전폭적인 참여가 절실한 때에 그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법안을 꼭 이 시점에 발의한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의료계가 거세게 반발할 거란 사실을 몰랐다면 정말 무능한 것이고, 그걸 알고도 이런 일을 벌였다면 위중한 재난을 틈타 중대한 정책을 슬쩍 도둑질하려 했다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데모 현장에서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의 습성을 지배세력이 된 지금에도 버리지 못하고 적과 싸우듯이 국민을 이기려고 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 클리셰다. 정권에 해악을 미치는 이슈를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 덮으려는, 여론조작을 위한 이이제이적 충격전술이라면 이는 망국적인 최악의 선전선동에 다름 아니다. 이 상황에서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과 중국의 충돌

윤정대변호사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을 강행하자 미국은 중국에 홍콩 특별지위를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이 홍콩에 대해 일국 양제 원칙을 위반하여 내지화(內地化)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소련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개방정책을 추구해왔다. 1971년 중국이 미국의 탁구선수단을 초청함으로써 유명한 핑퐁외교가 시작되고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1976년 마오저뚱 사후 덩샤오핑에 의해 개방개혁이 본격화되었고 미국은 중국에 대해 경제포용정책을 펴 중국의 개방을 지원하여 왔다. 미국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로 편입됨으로써 미국과 이익을 공유하는 민주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중국은 개인숭배가 극으로 치닫은 마오저뚱이 1976년 사망한 이후 등소평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유지되었다. 화궈펑, 후야오방, 자오쯔양, 장쩌민, 후진타오로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리의 교체가 이어지면서 정치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사라지는 분위기였다. 중국의 사회주의 정치지도체제가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힘입어 점차 자유민주적인 정치체제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 임기제한인 10년에 맞춰 2013년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 자리를 물러준 이후 양상이 달라졌다. 시진핑은 중국몽을 내세우면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2018년 국가 주석 임기제한을 철폐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면서 장기집권에 나섰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과 이익을 공유하는 민주적인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대립하는 거대한 사회주의 패권국가가 된 것이 아닌가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닉슨은 이미 1994년에 중국에 대해 미국의 경제적 포용정책이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중국 개방의 물꼬를 튼 덩샤오핑은 중국은 완전히 굴기할 때까지 그것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미국에 맞서지 말아야 한다는 유훈을 남겼다. 덩샤오핑은 그의 흑묘백묘론에서 나타나듯이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정치인이다. 덩샤오핑이 미국에 맞서지 말라고 유훈을 내린 것은 미국과 정면대결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국력이 중국보다 월등히 낫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전제되어 있다. 등소평이 사망한지 24년 정도 경과했다. 중국의 국력이 상당히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중국의 힘은 인해(人海) 에서 나오는 것으로 미국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따라갈 수 없다. 중국 증시 시가 총액이 미국 증시의 시가 총액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더라도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덩샤오핑의 유훈에는 경제발전을 국가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외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저뚱 사상, 사회주의 노선, 인민민주독재, 공산당 영도 등 4대 노선으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고수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중국 정치지도부가 미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을 강행한 것은 경제발전에 따른 인민의 자유민주정치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치지도부는 지금 중국이 대만, 북핵, 무역, 홍콩 등의 문제에 미국에 사사건건 끌려 다니면 오히려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 위험이 높아지고 중국은 미국의 제재와 공격에 그 어느 때보다 중국은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고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시기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계속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공산주의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정치제도라는 투 트랙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국 국민들이 마우저뚱과 시진핑을 숭배한다고 해서 또한 드러내고 사회주의 정치제도의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해서 마오저뚱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4억 중국 국민은 늘 거대한 국가권력과 마주해왔다. 그들은 체제에 순응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3권에는 “중국인들은 온 천지가 소용돌이에 휩싸여도 납작 업드려만 있으면 결국은 끝날 날이 온다며 낙관적이다. 적응력도 뛰어나다.”, “변화가 닥치면 신념은 일단 접어두는 경우가 많다. 내노라하는 혁명가나 직업정치가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숭배가 습관이 된 국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으로 포장한 전제 국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중국의 지배 계층의 사고는 과거 황제 시대의 지배계층의 사고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사대부 지배계층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져 중국을 철저하게 떠받들었다. 이 소국 열등감은 좌파들의 사회주의 열등감과 함께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신간 시집

날마다 봄빛은 더 푸르게 짙어져만 간다. 지겨운 집콕에서 벗어나 가벼운 차림으로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떠날 때 시집 한 권이 함께하면 더 즐겁지 않을까? 서점 신간코너에 새로 들여놓은 시집 몇 권을 옮겨온다.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김호진 지음/시와반시/93쪽/1만 원김호진 시인의 2번째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가 출간됐다. 2002년 출간된 첫 시집 ‘생강나무’가 삶과 우주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면서 그 대답을 향한 애끓는 몸짓이었다면, 이번에 나온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는 현실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애잔한 순간과 풍경들을 따라간 절절한 흔적 같은 것들이다.현직 약사이기도 한 김호진 시인의 이 시집은 열정적으로 살아온 작가의 섬세하고도 진정성 있는 실존적 고백을 담은 결실이다.시집과 함께 실린 문학적 산문 ‘나선 곳’에서 시인은 “젊은 날 소리 없이 스며든 철학적 질문들이 존재에 대한 근원적 해답을 요구하며 오래도록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시가 그리움과 자유, 철학적 질문들을 통해 근원적인 해답을 궁구해가는 경로에서 시작됐음을 고백하고 있다.이번 시집에는 유독 ‘애잔한 순례자’같은 유동적인 ‘길’의 이미지가 많고, 그 위를 아득하게 감싸고 있는 슬픔의 문양이 짙게 배여 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려는 ‘그리움’이란 감상(感傷)을 동반한 심리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어떤 깊은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갈망에서 오는 근원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그의 시선은 주류로부터 밀려난 주변자들을 한결같이 향하고 있는데, 한적한 시골에서 탑을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김노인과 군청 앞에서 농민의 세상을 외치던 이씨가 그들이고 약값 대신 쑥떡을 두고 간 허리 굽은 할매가 그들이다. 이는 자신의 상처나 그리움을 기록하면서도 낱낱 존재자들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늘을 동시에 투사하는 관찰과 표현의 미학을 낳고 있다.같은 선상에서 그는 유독 오지를 찾아 떠도는데, 석양 무렵 시신을 태우는 인도 갠지즈 강가 화장터이기도 하고, 오체투지로 고행의 길을 가는 티벳의 히말라야 부근이기도 하고, 하늘거울에 비친 풀밭의 음표들이 반짝이는 시원(始原)의 땅 몽골에서 우기에 끊긴 구겨진 길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다 불쑥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발해의 유적지를 찾아 가는가 하면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다시 타클라마칸사막에 갈 꿈을 꾸기도 한다.이렇듯 그는 잃어버린 대상을 ‘그리움’으로 투시하고 거기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의 낭만주의자이고, 못 타자들에게는 따스한 사랑을 확인해가는 현실주의자다. 하지만 김호진 시인 스스로는 삶의 깊이를 측정하는 진중한 ‘성찰’의 시인이다.◆공중부양사/김요아킴 지음/애지/142쪽/1만 원김요아킴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2003년 등단 이후 줄곧 삶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성찰, 그리고 사회적 쟁점이 발생하는 고비와 길목마다 시인으로서의 현실참여와 문학적 응답을 회피하지 않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왔다.그는 이번 시집에서도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일상의 시공간을 바로 비추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만드는 데 온 마음을 다한다. 지난한 현실의 경계에서 통증 깊은 서사와 서정을 버무리며 삶의 안녕을 묻는 그의 시세계는 우리시대의 문학적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은 3, 4부의 시편을 구성하는 ‘금곡동 아파트’ 연작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연작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소외 의식과 장소 상실감을 문명 비판적 시각에서 표현하며 부서진 ‘대지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금곡동은 도시 개발과 자연 파괴의 공간이지만, 고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생의 배움을 얻는 장소이다.표제작 ‘공중부양사’도 아파트 외벽 창문을 청소하는 노동자에 관한 작품으로 시인은 노동자의 삶과 시적 화자의 생을 오버랩시킴으로써, 생활과 존재의 흔들림 속에서도 버티고 견뎌내야 할 마음과 삶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기어코 ‘오늘’을 살아내야 할 삶의 통점을 받들어 ‘내일’로 나아간다.시인은 역사적 사건을 소환하고 기억하는 작업도 이어간다. ‘유감(有感)’과 ‘초량, 소녀 앞에 서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위안부 강제동원의 폭력성을 조명하고 있으며, ‘불턱 방담(放談)’, ‘현무암 각질 서비스’ 등은 해방공간 제주에서 벌어진 참담한 국가 폭력의 슬픔을 애도하고 있다.또 ‘진혼을 위한 서곡-괭이 바다’, ‘뼈무덤-그날, 여양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마산 여양리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을 증언의 형식으로 복원하고 있으며, ‘사드, 그리고 Donna Donna’와 ‘임진강’, ‘둥근 만남-널문리 주막마을에서’ 등은 신냉전 체제의 위험을 비판하며 평화를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백무산 지음/창비/129쪽/9천 원한국 노동시를 대표하는 백무산 시인의 신작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가 출간됐다. 백석문학상 수상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5)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열 번째 시집이다. 1984년 무크지 ‘민중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대변해왔던 시인은 그동안 끊임없는 시적 갱신과 변모를 거쳐 노동시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최근 10여 년간에 펴낸 세 권의 시집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가 모두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성과도 인정받았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노동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는 웅숭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친다. 치열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면과 시대상을 침통한 눈으로 응시하는 고백록과도 같은 묵직한 시편들이 서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노동 현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나 생태 문제 등으로 시 세계의 폭을 넓혀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특히 ‘시간’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전복적 사고를 보여준다. 시인은 ‘혁명의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정지의 힘’을 예찬하면서 이 ‘정지의 힘’이야말로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를 찾는 길이라고 역설한다.이는 삶의 과정은 없고 오로지 목표만 존재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감각, ‘인간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길이다. 그것은 또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모든 건 완성된 것에서 시작돼 카운트다운될 뿐, 자본의 폭력에 얽매여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자본주의 논리에 길들여진 삶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수록 시인은 ‘풍경을 풍경으로 이해’했던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내비친다.이렇듯 삶에 밀착돼 다가올 시대를 예감하는 백무산의 시는 현란하고 뒤틀린 언어들을 비집고 나오는 사람의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늘 우리 곁에서 희망의 노래로 빛날 것이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공동칼럼…코로나 사태로 전세계가 한국을 주시하는 이면에는

이명훈소설가세계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요즘 의료체계가 공적으로 비교적 잘 되어 있고 국민들이 질서를 제법 잘 지키는 것 뿐인데 전세계의 느닷없는 주목이 의아하기도 하다. 세계가 이렇게 나약했던가. 가벼운 조소마저 인다.팬데믹이 지속될 경우 혹 사재기 같은 행위로 질서가 무너지면 어렵게 일궈진 이 위상이 실추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질서가 무질서보다 개인적으로도 유리하다는 집단적인 합의가 생겨나는 듯하다. 말을 바꾸면 공공선이 이기심에도 유리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세계가 한국을 주시하는 데는 깊은 것이 숨어 있어 보인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이 이기적으로 살면 전체는 효율적으로 잘 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아담 스미스는 윤리 역시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에 바탕을 둔 고전주의 경제학은 보이지 않는 손을 중시하며 은근히 절대화시킨다. 그렇게 패여진 수로에 세계가 익숙한 나머지 그게 당연하다는 집단 체면에 빠져 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그런 방식이 이번 사태를 더 키운 면도 있다. 익숙한 방식이라 제어도 잘 안되는 듯 하다. 그런 세계가 한국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한국을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현상 아래의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그 파악까지 내려서는 게 중요하다. 공공선, 윤리, 그 가치들과 어우러지는 정서 등이 아닐까?그동안 익숙한 이기심의 논리 궤도에서 이탈해 새로운 방식으로 한 사회가 돌아갈 때 사회의 회복이 효과적이란 사실. 그에 대한 깨달음이 소중하다. 그런 깨달음이 집단지성의 수레를 타고 돌면서 이기심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의 위험과 폐단에 대한 비판, 반성이 수반되면서 공공선이 새롭게 부각되고 그에 입각한 세계 질서가 이룩되는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의 지금 질서와 정서가 그 모티프가 된다면.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에 대해 통제가 더욱 강해져 빅 브라더 사회가 될 가능성, 자율적 시민 역량이 더욱 증대하는 사회가 될 가능, 그 양극 사이 선택의 기로에 인류가 있다고 말한다.자본주의 3.0이라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뿌리부터 뒤흔들려 자본주의 4.0 체제로 이행하리라는 또다른 논객의 글도 있다. 그 외에도 무수한 견해들이 팬데믹이 강해지는 요즈음 전세계에서 쏟아질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해석에 성찰의 눈을 돌리는 것도 사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될 것 같다. 이기심을 과대 평가한 것이 자본주의라면 이기심을 과소 평가한 것이 사회주의이다.냉전까지 세계는 그 두 이념 및 제도 간에 극렬한 파워 게임을 벌였다. 구소련 해체 이후 자본주의의 승리, 그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잡아 오늘까지 이른다. 소수의 인간을 위해 지구의 모든 것들을 수단화한 것이 그 흐름의 핵심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로 인해 지구엔 엄청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것들의 연쇄 속에서 코로나 19가 터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국제간 벽을 넘어 개인 개인에게 치명적인 공포로 와닿는 코로나 정국. 그속에서 세계 시민들은 왜 한국을 주시하는 걸까? 이기심이 당연하다는 세계관으로 인해 추방되다시피한 공공선에 대한 갈망과 요청. 그것이 세계 시민들의 제도화되고 길들여진 마음의 심층을 흔든 것은 아닐까? 지주로 삼은 것들이 뒤흔들림과 동시에 마음 속에 생겨난 공허와 결여, 결코 제도화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이 자극된 것은 아닐까?그 말이 맞다면 둔탁한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한 마음의 길에 걸맞는 훌륭한 옷을 입히는 것이 바람직한 길일 것이다. 그 방향의 모색 및 성취가 코로나19가 주는 세계사적, 문명사적 교훈의 하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