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8) 영묘사 장륙

영묘사는 전불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신라시대에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사찰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도깨비들이 하룻밤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선덕여왕이 영묘사 법회에 참석했다는 기록으로도 절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유명사찰이었던 만큼 전하는 설화도 다양하다. 선덕여왕을 사모했던 지귀가 심화로 절을 태워버린 이야기는 유명하다.영묘사에는 신라시대 승려이자 조각가요 도술가, 예술인으로 전해지는 양지 스님의 작품이 여럿이다. 향가로 전하는 영묘사의 장륙존상과 목탑, 기와, 사천왕상 등을 만들고 현판의 글씨도 양지 스님의 솜씨다.영묘사는 기록으로도 전하는 것처럼 유명 일화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절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조차 몰랐다. 흥륜사지로 전해지면서 사적 제15호로 지정했지만 이곳에서 영묘사 명문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지로 전해지고 있다.여기에서 발굴된 얼굴무늬수막새는 2018년 11월27일 대한민국 보물 제2010호로 지정됐다.◆삼국유사: 영묘사 장륙선덕왕(재위 632~647)이 절을 짓고 소상을 만든 인연은 모두 ‘양지 법사전’에 실려 있다.경덕왕(재위 742~765) 즉위 23년(764)에 장륙존상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비용이 조 2만3천700석이 들었다.양지전에서는 불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하였다. 지금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둔다. ◆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선덕여왕 재위시 635년에 창건된 규모 있는 사찰이다. 영묘사에는 당시 최고의 장인으로 전해지고 있는 양지 스님의 작품이 많다. 양지 스님은 영묘사 전탑의 기와, 사천왕상 등을 만들고, 현판도 직접 썼다고 전한다.특히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든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장륙존상은 흙으로 빚었는데 이때 도성의 백성들이 흙을 나르며 부른 향가가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럽더라/ 더럽도다 이 몸이여/ 공덕 닦으러 온다”는 풍요다.장륙존상은 경덕왕 때 금으로 칠했다는 기록도 있다.영묘사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있다. 경주 송화산 기슭 서천변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는 설과 부 서쪽 5리에 있다는 기록, 동천동에 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1976년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 흥륜사지 발굴에서 ‘대령묘사조와’라는 기와편이 발견된데 이어 지속적으로 명문기와가 출토되면서 현재의 흥륜사지가 영묘사지라고 결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발굴조사에서 명문기와편과 금당지, 목탑지, 기단유구, 동서회랑지 등이 발견되면서 영묘사는 삼국시대에 이미 창건되어 선덕여왕과 통일신라 이후에 대대적인 재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영묘사는 조선 중종 재위기인 1515년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묘사 지귀와 선덕여왕 설화선덕여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용모가 아름다워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찬사를 받았다. 여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여왕을 보려고 거리를 메웠다. 활리역의 지귀라는 젊은이도 사람들 틈에서 여왕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 선덕여왕을 부르다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의 행차에 지귀가 백성들 틈에 나타났다. 지귀가 선덕여왕을 부르며 뛰어가자 관리들이 그를 잡았다. 이 소란을 지켜본 선덕여왕이 관리에게 연유를 물었다.지귀가 여왕을 사모하여 미쳐 쫓아온다는 말을 듣고 여왕은 관리에게 지귀가 자신을 따라오게 하라고 전했다. 지귀는 기뻐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을 따라갔다. 여왕은 영묘사 법당에서 불공을 드렸다.지귀는 여왕이 불공을 드리는 동안 목탑에 기대어 기다리다 잠이 들어버렸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나오다 잠든 지귀를 보고, 자신의 금팔찌를 벗어 지귀의 가슴 위에 올려두고 돌아갔다.지귀가 잠에서 깨어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그 기쁨은 불씨가 되어 지귀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올라 온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불은 지귀가 잡고 있던 목탑에 옮겨 붙어 순식간에 탑을 태웠다. 지귀는 온 몸에 불이 활활 일어나는 불귀신이 되었다.여왕은 술사에게 명하여 지귀의 불에서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을 짓게 해 백성들에게 돌렸다. 이때부터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이 생겨났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년의 미소선덕여왕이 도깨비들에게 명하여 연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립했다. 이 때문에 연못에 살며 도를 닦던 이무기가 승천의 기회를 놓쳐 영묘사를 찾는 기도객들에게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그 이무기는 이미 상당한 도력을 지녀 사람으로도 변신하는 재주를 가졌다. 이무기는 영묘사 불목하니 지귀로 변신해 영묘사의 온갖 일에 간섭하며 방해했다.지귀는 노골적으로 부처의 권한을 가로채 영묘사를 찾는 기도객들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영묘사의 기도효험이 높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을 모시는 법사의 도력이 높아 이무기의 장난을 알아채고 여왕에게 이를 아뢰었다.선덕여왕은 법사의 방침에 따라 양지에게 장륙존상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양지 스님도 법력은 이무기의 재주에 못지않았다.양지는 이무기의 방해를 미리 알아차리고, 전국에서 백성들이 장륙존상을 조성하는데 참여하게 했다. 이무기가 가장 싫어하는 땀 냄새가 진동하게 하려는 것이 양지의 비방이었다. 그러나 불상을 조성하는 백성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이무기는 조성해둔 불상을 허물어뜨렸다.이를 지켜본 양지가 하루는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나타나는 이무기의 목을 잡고 물었다. “네 녀석이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국사로 진행하는 불사를 함부로 망치는 일은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어르고는 “네 사정을 알고 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합당한 보상을 할 테니 말하라”고 타일렀다.지귀로 변한 이무기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선덕여왕이 나를 망치게 했으니 선덕여왕과 혼인하게 해 달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양지는 “여왕은 나라의 어머니이므로 사사로운 개인과 혼인할 수 없다. 네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면 죽여 후환을 없애겠다”고 으르자 지귀가 납작 엎드리며 용서를 구했다.지귀는 빌면서 “그렇다면 여왕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제게 주신다면 가슴에 품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살겠다”고 말했다.양지는 지귀가 기어이 영묘사를 허물어뜨리려 한다는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알았다. 여왕님의 금팔찌를 선물하도록 주선하겠다”고 달래어놓고 장륙존상을 완성했다.양지는 장륙존상을 완성한 다음날 여왕이 장륙존상에서 불공을 드리는 동안 금팔찌를 얻어, 불씨를 주술로 심은 뒤 지귀의 가슴에 얹어 주었다. 지귀는 여왕의 팔찌를 보고 기쁨에 겨워 가슴 깊숙이 간직했다. 그러나 그 금팔찌가 자신을 태워 죽이는 불씨라는 것을 지귀는 꿈에도 몰랐다.선덕여왕이 왕궁으로 돌아간 뒤 지귀는 불귀신이 되어 목탑을 태우고 금당으로 뛰어들었지만 장륙존상이 뿜어내는 불력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지귀는 한 줌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5) 황룡사 장륙

신라 24대 진흥왕은 삼촌이자 외할아버지인 23대 법흥왕의 불교를 지향하는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강한 나라를 건설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어머니의 섭정기간 동안 학문을 익히며 무술 연마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왕이 훌륭한 장군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흥왕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나라의 연호를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으로 명명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정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룡사를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평화를 이룩하는 통치이념을 일원화 했다. 왕궁을 크게 짓기보다 황룡사를 지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국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게 했다.◆삼국유사: 황룡사 장륙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얼마 있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의 사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살펴보니 쪽지에 글이 적혀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하고,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양을 함께 실어 놓았다.현의 관리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해 대건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마쳤다.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136푼 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다음해였다.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뒤꿈치까지 이르렀는데 땅을 적시기가 한 자나 되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어떤 이는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나 잘못된 말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공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왕의 태자가 혼자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나무랐다.태자는 왕에게 “힘만으로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일찍이 되지 않으리라 알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 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그러나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크기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데 없었지만 이루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되자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뒷날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을 주면서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왕(아육왕)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00여 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완성해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며 부탁하는 것이었다.불상이 완성되자 동축사의 삼존불도 이 절로 모셔왔다. 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진평왕 5년 갑진년(584)에 금당을 만들었다. 선덕왕 때 절의 첫 지주는 진골인 환희사이고, 2대는 자장 국통, 다음은 혜훈 국통, 다음은 의상 율사이다.지금 전쟁을 겪은 이래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 상만이 남아있다.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다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에 깃든 진흥왕의 통치이념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가지고, 친정하는 진짜 왕으로 등극했다. 가장 먼저 그가 무술수업을 하면서 함께 훈련했던 청년들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진흥왕과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신라의 최고 군사 세력으로 성장해 전쟁터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적군들을 무찔렀다.진흥왕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곡창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금관가야를 정벌해 복속시켰다. 가야를 합병하면서 왕족을 비롯한 인재들을 그대로 영입해 신라인으로 귀속시켰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친정부대로 성장해 화랑과 함께 기존의 신라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다.진흥왕의 군사진영이 짜여지자 곡창지대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성왕을 죽이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교두보로 삼았다.진흥왕은 연이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황초령, 마운령까지 치고 올라가 영토를 최고로 넓혀 재정적, 인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영토를 넓히면서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높여야 귀족층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국력이 안정적으로 유지 확산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왕궁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이때 후궁 미실이 진흥왕을 찾아와 조용하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지금 왕궁을 크게 짓는 것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어 갈등을 조장하며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왕의 반문에 미실은 “왕궁의 규모와 같은 절을 지어 백성들의 평화와 부강한 나라를 기원하는 법회를 지속적으로 올린다면 귀족은 물론 백성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왕실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고 했다.진흥왕은 미실 후궁의 지혜로운 제안을 옳게 여기고 “왕궁을 지으려 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땅이라는 게시니 당장 왕궁을 황룡사로 고쳐 국태민안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미실은 왕의 명령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진흥왕의 마음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에 전국에서 유명 고승들을 비롯해 승려들과 백성들이 황룡사 건축에 참여했다. 17년의 긴 건축기간 동안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태려 애썼다.황룡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왕궁과 맞먹는 대규모의 사역을 자랑하며 최고의 국찰로 완성됐다.신라의 국운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와 고구려조차 밀려오는 신라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 전전긍긍했다.진흥왕 즉위 30년을 넘어가면서 귀족세력들이 암암리에 다시 힘을 길러 왕권에 도전했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다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세우기로 했다. 일장육척에 이르는 본존불과 거대한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십대제자상을 세웠다.장륙존상이 금당의 지붕보다 높아 황룡사 금당을 뜯어내고 다시 지었다. 장륙존상 앞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불상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진흥왕의 세력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실과 귀족층의 연합세력에 밀렸다. 진흥왕은 흥륜사에 감금되면서 정복군주의 삶을 마감했다.진흥왕이 황룡사와 왕궁을 떠나 흥륜사 법당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