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5) 황룡사 장륙

신라 24대 진흥왕은 삼촌이자 외할아버지인 23대 법흥왕의 불교를 지향하는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강한 나라를 건설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어머니의 섭정기간 동안 학문을 익히며 무술 연마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왕이 훌륭한 장군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흥왕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나라의 연호를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으로 명명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정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룡사를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평화를 이룩하는 통치이념을 일원화 했다. 왕궁을 크게 짓기보다 황룡사를 지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국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게 했다.◆삼국유사: 황룡사 장륙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얼마 있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의 사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살펴보니 쪽지에 글이 적혀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하고,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양을 함께 실어 놓았다.현의 관리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해 대건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마쳤다.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136푼 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다음해였다.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뒤꿈치까지 이르렀는데 땅을 적시기가 한 자나 되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어떤 이는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나 잘못된 말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공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왕의 태자가 혼자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나무랐다.태자는 왕에게 “힘만으로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일찍이 되지 않으리라 알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 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그러나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크기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데 없었지만 이루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되자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뒷날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을 주면서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왕(아육왕)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00여 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완성해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며 부탁하는 것이었다.불상이 완성되자 동축사의 삼존불도 이 절로 모셔왔다. 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진평왕 5년 갑진년(584)에 금당을 만들었다. 선덕왕 때 절의 첫 지주는 진골인 환희사이고, 2대는 자장 국통, 다음은 혜훈 국통, 다음은 의상 율사이다.지금 전쟁을 겪은 이래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 상만이 남아있다.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다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에 깃든 진흥왕의 통치이념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가지고, 친정하는 진짜 왕으로 등극했다. 가장 먼저 그가 무술수업을 하면서 함께 훈련했던 청년들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진흥왕과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신라의 최고 군사 세력으로 성장해 전쟁터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적군들을 무찔렀다.진흥왕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곡창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금관가야를 정벌해 복속시켰다. 가야를 합병하면서 왕족을 비롯한 인재들을 그대로 영입해 신라인으로 귀속시켰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친정부대로 성장해 화랑과 함께 기존의 신라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다.진흥왕의 군사진영이 짜여지자 곡창지대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성왕을 죽이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교두보로 삼았다.진흥왕은 연이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황초령, 마운령까지 치고 올라가 영토를 최고로 넓혀 재정적, 인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영토를 넓히면서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높여야 귀족층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국력이 안정적으로 유지 확산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왕궁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이때 후궁 미실이 진흥왕을 찾아와 조용하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지금 왕궁을 크게 짓는 것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어 갈등을 조장하며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왕의 반문에 미실은 “왕궁의 규모와 같은 절을 지어 백성들의 평화와 부강한 나라를 기원하는 법회를 지속적으로 올린다면 귀족은 물론 백성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왕실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고 했다.진흥왕은 미실 후궁의 지혜로운 제안을 옳게 여기고 “왕궁을 지으려 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땅이라는 게시니 당장 왕궁을 황룡사로 고쳐 국태민안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미실은 왕의 명령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진흥왕의 마음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에 전국에서 유명 고승들을 비롯해 승려들과 백성들이 황룡사 건축에 참여했다. 17년의 긴 건축기간 동안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태려 애썼다.황룡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왕궁과 맞먹는 대규모의 사역을 자랑하며 최고의 국찰로 완성됐다.신라의 국운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와 고구려조차 밀려오는 신라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 전전긍긍했다.진흥왕 즉위 30년을 넘어가면서 귀족세력들이 암암리에 다시 힘을 길러 왕권에 도전했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다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세우기로 했다. 일장육척에 이르는 본존불과 거대한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십대제자상을 세웠다.장륙존상이 금당의 지붕보다 높아 황룡사 금당을 뜯어내고 다시 지었다. 장륙존상 앞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불상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진흥왕의 세력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실과 귀족층의 연합세력에 밀렸다. 진흥왕은 흥륜사에 감금되면서 정복군주의 삶을 마감했다.진흥왕이 황룡사와 왕궁을 떠나 흥륜사 법당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6) 법흥왕의 불교

법흥왕은 안정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율령을 제정, 공포하는 등의 다양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불교를 공인해 나라의 국정이념으로 삼고 흥륜사를 건설하면서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법흥왕은 키가 7자나 되는 거인으로 마음도 후덕해 금관가야를 합병하고도 왕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융화정책을 펼쳤다.그러나 기존 귀족들을 중심으로 두텁게 깔렸던 민간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는 왕실 중심으로 진행하는 불교정책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법흥왕은 왕위를 물려주면서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주지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공덕을 쌓는 법회를 주관하다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도 왕권의 강화를 위해 황룡사를 지어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정복군주로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진흥왕도 말년에는 거칠부 등 귀족들의 힘에 밀려 전대 법흥왕의 뒤를 이어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삼국유사: 탑탑안항 사사성장진흥대왕이 즉위한 지 5년인 갑자년(544)에 대흥륜사를 지었다. 547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지고 왔으며, 565년에 진나라 사신 유사가 승 명관과 함께 내경을 받들고 왔다. 이제는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서 있었다. 절의 깃발을 세우고 범봉을 걸며, 불상과 승려들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밭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문이 나라 안에 자애로운 구름으로 덮였다.불국토로부터 보살이 세상에 나오고,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내려오니, 이런 까닭에 세 민족을 통일해 나라를 만들고 사해를 껴안아 한 집을 이루었다. 그래서 덕 있는 이름은 천구의 나무에 쓰고, 신령스런 자취는 은하수에 비추었으니, 어찌 세 분 성인(아도, 법흥왕, 이차돈)의 위엄으로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그 뒤에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억 등이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때는 원화 12년 정유년(817) 8월5일이다. 이때는 제41대 헌덕대왕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그 무덤에 예불하는 신도들을 모아 결사를 만들고, 매달 5일마다 그 영혼의 아름다운 소원을 위해 단을 마련하고 법회를 베풀었다.또 향전에서는 시골 노인들이 그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했는데 5일이 바로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을 따르던 날이다.아, 이런 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신하도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다면 이런 공덕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서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법흥왕은 이미 없어졌던 터에 절을 세웠으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방포를 입었다. 궁중의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대중을 널리 교화시키는 일을 맡았다.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이어받은 성인으로 왕위를 계승해 위엄으로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자 모두 순종하며 잘 따랐다. 이어 법흥왕이 머물렀던 흥륜사에 대왕흥륜사라는 편액을 내렸다.법흥왕의 성은 김씨이고,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책부원구에서는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고 했다.왕이 처음 큰 공사를 시작하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영흥사를 창건하면서, 첫 비구니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을 묘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부서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진흥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고 하였다.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역사서가 적지 않은 것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임금의 교훈이 아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또 대통 원년은 정미년(527)인데 법흥왕은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응천주에 절을 짓고 대통사라 이름하였다. 성스런 지혜는 만세의 큰일을 꾀하게 마련이나/ 구구한 입방아는 추호 같은 뜻을 기만할 뿐이다/ 법륜이 풀려 나와 금륜을 굴러가니/ 순임금 같은 시절 바야흐로 부처님의 시대로 높아지네// -원종 법흥왕에 대한 글이다.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 흰 젖 더욱 깊이 느껴지네/ 어느덧 한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 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염촉 이차돈에 대한 글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흥왕의 뜻을 이은 진흥왕법흥왕은 왕비를 여럿 두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로 시샘한 왕비들의 투기로 아들이 태어날 기미만 보이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렸다.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왕실에서부터 서서히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해 국가이념으로 삼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경영하고 싶었다. 특히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으로부터도 독립한 당당한 나라로 서고자 했다.이를 위해 왕위를 물려받을 적자는 성골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왕족끼리 결혼을 추진했다. 왕은 자신의 딸을 동생과 결혼시켜 왕족, 성골의 신분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다.아들이 없었던 법흥왕은 동생의 아들이자 딸의 아들인 삼맥종을 지극히 사랑해 아들처럼 곁에 두었다. 결국 조카 삼맥종을 태자로 삼았다. 왕의 뜻에 따라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펼 수 있는 어린 삼맥종을 진흥왕으로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법흥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자신이 세운 흥륜사에서 승복을 입고 주지가 되어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홍복을 빌다 입적했다.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10여 년을 보내며 나름대로 국정 운영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진흥왕은 18세가 되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강한 나라를 주장하며 연호를 개국이라 바꾸고 정복군주로 나섰다.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황초령, 마운령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특히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궁궐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후궁 미실의 반대로 황룡사로 바꾸어 건설하고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팔관회를 여는 등으로 불교 진흥정책에 힘을 썼다.진흥왕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제한했던 일반백성들도 공부하고 승려가 될 수 있게 했다. 원광법사 등의 이름 높은 승려가 배출되는 기반을 조성했다.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에서 훗날 사람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미륵불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 지배하는 전륜성왕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의 이름도 동륜과 사륜으로 짓고 스스로 불교를 깊이 믿었다.아울러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를 크게 활성화 시켰다. 화랑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동량으로 키우는 데 성공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그러나 진흥왕은 후궁 미실의 사심이 가득한 전략에 밀려나는 운명을 맞았다. 미실이 진흥왕의 아들 태자 동륜과 정을 나누다 동륜이 다른 후궁에 눈을 돌리자 거칠부와 손을 잡고 제거했다. 이어 진지왕과 관계를 맺으며 왕비로 간택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진지왕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그마저 제거하고, 다시 진흥왕의 손자였던 진평왕을 옹립했다.진흥왕은 죽은 태자 동륜을 위한 추도식을 전대 법흥왕이 입적했던 흥륜사에서 올리다가 미실과 거칠부의 계략에 의해 연금되어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고,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1) 칠처가람 (2) 황룡사

황룡사는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나서면서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바꿔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황룡사는 진흥왕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했지만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선덕여왕 때에 구층목탑을 지으면서 현재의 사찰 규모로 발전했다.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륙존상은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것만 보아도 황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드러난 황룡사의 역사 이면에 미실이라는 신라의 여걸이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발휘한 권력지상주의의 내력이 적힌 야사를 들어보는 것도 호사롭다.◆역사 속의 칠처가람, 황룡사황룡사는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황룡사는 칠처가람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이를 고쳐 사찰로 지으면서 황룡사라 했다. 공사는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했다.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황룡사를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고, 그들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바로 신라의 땅이라 인식했다.현재까지 발굴에 따르면 황룡사 부지는 약 8만여㎡에 달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사역지 주변에는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남아 있다.삼국시대 가람 배치의 정형인 일탑에 일금당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일렬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 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황룡사에는 신라 삼보 중에서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고, 화성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어 절의 품격을 짐작하게 한다. 또 황룡사의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역대의 왕들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황룡사에 친행해 100명의 고승이 모여 백고좌강회를 열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황룡사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지 옆을 지날 때 신인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큰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 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다.자장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귀국해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했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했다.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탑의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했다.황룡사 구층목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의 아홉 나라를 상징한다. 이는 이들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다. 고종 25년인 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다.황룡사에는 또 장륙존상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에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 남아 있다.황룡사에는 또 성덕대왕 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몽고군이 침략해 방화로 없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황룡사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와 미실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의 위상을 드러내고, 불교를 통한 국가통치이념을 정립해 안정적인 국가 경영, 귀족과 백성들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건립한 국가사찰이다.진흥왕의 이 같은 황룡사 건립에 대한 생각은 후궁 미실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졌다.미실은 신라시대 왕실의 여인을 배출하는 대원신통이라는 혈통의 계승자로 왕실의 여인이었다. 미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옥진에게 색공을 교육받았고, 출중한 외모에다 왕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 학문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다양한 기예를 익혀 뛰어난 인물로 왕실은 물론 저잣거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미실은 자신이 타고난 미모와 자질을 십분 활용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의 재주에 못지않은 욕심이 왕의 권세와 화랑도까지 손아귀에 넣고 당대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했다.미실은 처음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과 일가를 이루었으나 뛰쳐나와 화랑 사다함과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왕가로 돌아와 진흥왕의 후궁이 되어 본격적인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미실의 욕심은 진흥왕의 뜻과 교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진흥왕은 미실의 뜻에 따라 정복군주로 백제와 고구려 땅을 침략해 영토를 넓히는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황룡사도 미실의 입김으로 태어났다. 진흥왕 심맥종이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궁을 크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미실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나라의 사찰을 크게 일으킨다면 왕의 권위는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에 마음을 바꿔 황룡사를 지었다.미실은 황룡사 금당 옆에 왕실의 복을 비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미실은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권력의 최고 실세로 행세해 진흥왕 이후 진지왕 옹립과 폐위, 진평왕 옹립에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다.미실의 탁월한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색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진흥왕이 직접 칼을 들고 백제, 고구려 정복전쟁의 선두에 나서고 있을 때 태자로 임명되었던 진흥왕의 큰아들 동륜도 미실의 치마폭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미실의 정치적 사랑방은 황룡사 사당이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도 황룡사에서 피로를 풀며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해소해 정치적인 불만을 잠재웠다.미실의 정치적 야욕은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다. 거칠부와 손잡고 진흥왕을 흥륜사로 유폐시킨 이후 진지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미실을 왕비로 책봉하겠다던 진지왕이 약속을 어기고 여색을 탐하자 진지왕도 미실의 손에 처참하게 왕좌에서 쫓겨나야 했다.미실은 황룡사 사당에서의 정치로 가야출신 노리부와 손잡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그리고는 다시 왕의 여자로 실력을 행사하다 진평왕 10년 609년에 병들어 죽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신라문화제로 매일 10만 인파 몰려 활기 넘친다

경주지역이 잔치분위기로 활기가 넘친다.신라문화제가 열리는 황성공원 일대와 경주시가지에 지난 주말 동안 1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과 시민이 몰렸기 때문이다. 지난 3일 시작된 신라문화제는 오는 9일까지 열린다.지난 4일 이색적인 개막행사로 신라문화제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차에 탄 진흥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의 행진에 이어 화랑들의 무예 퍼포먼스는 봉황대에서 출발해 경주역, 경주세무서를 거쳐 황성공원으로 시가행진을 했다. 신라고취대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한 시민들의 가면행렬이 1.5㎞의 띠를 이루며 볼거리를 제공했다.젊음의 끼와 재능을 맘껏 발산하는 신라 K-POP 커버댄스는 예선을 통과한 홍콩팀을 비롯한 6개 팀이 황성공원 특설무대에서 열띤 경연을 벌여 분위기를 무르익게 했다.또 경주예술의 전당 화랑홀에서 삼국시대 충신 박제상과 국대부인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치술신모’를 경주시립극단에서 창작 음악극으로 선보여 관람객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문화예술행사도 다양하게 열렸다. 아름다운 한국 전통음악인 시조를 널리 알리고 전승하기 위한 ‘전국시조경창대회’가 서라벌문화회관, 신라의 관리 선발제도인 ‘독서삼품과 재현’이 전국 문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예술의 전당에서 각각 열렸다.이 밖에 ‘신라검법 경연’과 마상무술 시범공연은 실내체육관 옆 광장에서,‘원효예술제’는 분황사, 충담재는 첨성대 사적지에서 열리는 다양한 체험행사도 진행된다.한편 9개 분야 45개의 종목을 선보이는 신라문화제는 9일까지 황성공원과 시가지 일원에서 열린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