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삼국유사 기행(10)- 실성왕

역사는 상상이다. 누구도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보지 않은 1천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제18대 왕인 실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시대 대부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조차 각각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더욱 상상력을 동원하게 한다. 대릉원 한가운데 황남동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 하여 ‘황남대총’이라 이름이 붙은 왕릉. 학자들은 내물왕, 실성왕 또는 눌지왕릉이라고도 추정한다. 남쪽분은 남자, 북쪽분은 여자가 묻혀 있으며 금관과 출토된 유물 등으로 ‘실성왕릉’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다. 삼국유사는 실성왕의 죽음과 눌지왕 즉위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당시 주변 정세 등을 두고 온갖 정황을 역사적 사건과 가치 기준에 빗대어 해석하고 있다. 어차피 오래된 시간이 만든 일들에 대한 상상력을 덧대어 추정한 것에 불과해 사실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성왕의 죽음과 내물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의 이동 과정을 상상해 본다. 공중에서 촬영한 대릉원 전경. 실성왕릉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이 있다. ◆삼국유사 실성왕의희 9년 계축(413)에 평양주의(지금의 경기도 양주)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실성왕은 전왕(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함을 미워하고 꺼려서 그를 죽이려고 고구려 군사를 청하여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곧 창을 뒤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당시 기록 속의 왕들△내물왕: 내물왕은 미추왕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 신라 왕위에 올라 지속적으로 세습체제를 갖추었다. 내물왕은 16대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석씨의 피를 반은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다. 김씨로 왕권을 거머쥐었지만, 석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셈이다. 그러나 내물왕 대에는 백제와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방어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많이 받아야 했다. 당시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나라를 다스리며 왜와 가깝게 지내면서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내물왕 때에는 가뭄과 지진도 자주 일어나 자연재해를 많이 입었다. 농사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 농사를 포기하고, 떠도는 백성들의 수도 늘어났다. 백제의 힘을 등에 업은 왜구의 침략도 잦았다. 내물왕 재위 9년에 이어, 38년에는 왜군들이 금성을 에워싸고 5일간이나 물러가지 않았다. 내물왕은 적들이 배를 타고 육지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퇴각할 때 기병을 앞세워 크게 무찔렀다. 재위 44년 399년에도 백제를 등에 업고 수도까지 침략해 온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내물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 보병과 기병 5만 명이 신라 국경지역으로 들어와 왜군과 가야군을 물리쳤다.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라 47년간 재위하다가 402년에 죽었다. 아들의 나이가 어려 고구려에 볼모로 10년간 잡혀있다 돌아온 실성왕이 왕권을 잡았다. 실성왕의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인 대서지 이찬이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 아류부인이다. 내물왕과는 동서 간이다. 그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내물왕의 두 아들 복해와 미해를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에는 내물왕이 보냈다는 기록도 있지만, 많은 학자가 실성왕이 두 아들을 모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눌지왕: 눌지왕은 신라 19대 왕이다. 내물왕의 아들이고,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은 417년에 즉위해 458년까지 4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열기도 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나누어 주는 한편, 소가 끄는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몹시 원망했다.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자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복수하려 했다. 실성왕은 그가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라고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잔.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사람됨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실성왕이 그를 죽이라고 통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눌지는 도성으로 돌아와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이 부인의 아버지인 장인 실성왕을 살해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형으로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신하들에게 동생들을 데려올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왕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먼저 데려오고, 왜나라에 거짓 항복해 미해를 구하고 자신은 잡혀 죽었다. 이로 인해 제상의 부인 이야기는 벌지지, 망부석, 은을암 등의 설화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흔적△내물왕릉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교촌마을 북쪽에 있고, 1969년 사적 제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형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여 호석을 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밑지름이 22m이고, 높이 5.3m이다. 평지에 목관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다음 흙으로 덮어 봉분을 완성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한 내물왕릉.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고분의 형태로 비추어 내물왕릉이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다. 그러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에 비교해 턱없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석곽묘로 짐작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자연스럽게 지금 현재 지정된 고분은 내물왕릉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현재 내물왕릉으로 지정된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대형 고분. 윗부분이 함몰되어 있으며 규모가 큰 점, 첨성대의 서남쪽 등에 위치한 점을 미루어 학자들은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지정된 내물왕릉에서 서남쪽 500m 지점의 대규모 쌍분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첨성대 서남쪽과 일치하고, 윗부분이 함몰되어 시대적으로 적석목곽분의 형식일 것으로 보여 학자들은 이 고분을 내물왕릉으로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대릉원 가운데 호젓한 호수에 물그림자를 데칼코마니로 만들며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는 왕릉으로, 남북으로 봉분이 이어진 쌍분이다. 황남동 98호분으로도 불리며 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고분의 아래는 남북으로 120m, 동서 80m, 높이 22로 신라 최대의 고분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 황남대총은 쌍분으로 왕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묻힌 남분에서 출토된 유물 모습. 1973년 7월부터 3년여 시간에 걸쳐 발굴한 결과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큰 칼이 나오면서 남분이 왕,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분석됐다. 무덤은 얕게 땅을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에 이중 덧널을 설치하고, 따로 방을 만들어 다양한 껴묻거리를 묻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금귀걸이 등의 유물. 무덤에서는 남분에서만 3만7천여 점을 비롯해 6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금관과 금동관, 금제관드리개, 금목걸이,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 금제허리띠,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 금동신, 은제허리띠, 금은반지 등의 금은으로 만든 유물이 출토됐다. 또 금속용기와 칠기, 토기, 유리용기 등의 생활용구와 무기, 마구류까지 다양하게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귀걸이와 장식, 대형옹기를 포함한 생활용품, 무기류와 마구 등 6만 점이 넘는 대량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실성왕이거나 눌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여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북분에는 금관과 화려한 유물을 넣고 봉분을 더 크게 하지만, 왕인 남분에는 금동관을 넣는 등으로 미루어 눌지왕이 실성왕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눌지왕의 반격석씨들이 왕위 세습을 이어오던 당시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다. 석씨가 왕위를 대물림하던 때에 흘해왕의 아들이 없어 내물왕은 김씨이지만 석씨의 배경에 힘입어 왕좌에 올랐다. 내물왕의 부인은 미추왕의 딸이고, 미추왕의 부인은 석씨 왕손이었다. 미추왕이 처가 석씨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듯 내물왕 또한 석씨의 권세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셈이다. 내물왕은 4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가뭄과 지진, 홍수,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 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내물왕은 당시 김씨로 세력이 미약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방어하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어려움과 실성왕 세력으로부터 절대적인 우세한 힘을 확보해 왕권을 안정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했다. 내물왕과 비슷하게 미추왕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석씨 왕족과도 연대하고 있는 실성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물왕은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근초고왕이 왜나라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했다. 왜군들은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까지 밀고 들어와 나쁜 짓을 일삼았다. 내물왕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면서 고구려의 심한 내정 간섭을 경험해야 했다. 내물왕 후대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제의해 나제동맹을 맺으면서 신라는 대외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실성왕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있으면서 고구려 실세들과 정치적으로 유대를 맺었다. 실성은 고구려 후광을 업고 신라로 돌아와 내물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내물왕에 대한 보복 정치를 단행했다. 내물왕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보해와 미해를 고구려, 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이어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가 볼모로 지내면서 친분을 쌓았던 고구려 사신들을 초청했다. 실성왕은 고구려 사신들에게 눌지를 제거하라는 밀지와 함께 눌지에게 고구려 사신을 마중하게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신들이 눌지의 훌륭한 인품에 반해 실성왕의 밀지를 눌지에게 귀띔해 주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 눌지가 거꾸로 돌아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눌지왕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므로 눌지는 장인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꿈만 꾸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6년 만에 왕좌에서 사라졌다. 눌지왕은 또 고구려와 왜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구하기 위한 구국단을 구성해 파견했다. 고구려에서는 설득전략이 먹혀들어 가 보해를 무사히 빼내어 왔다. 그러나 왜에서는 사정이 달라져 왕을 살해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러나 왜의 왕을 살해하려던 구국단은 성사 직전에 은잠술이 능한 왜의 비밀수호단에 잡혀 미해만 가까스로 도망하고, 모두 참형을 당했다. 눌지왕은 4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후대에 접어들어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수시로 침략해 오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황남대총에서는 금관과 귀걸이와 장식, 대형옹기를 포함한 생활용품, 무기류와 마구 등 6만 점이 넘는 대량의 유물이 출토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무기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주곽의 유물 형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뿔로 만든 잔.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보물 지정

문화재청은 일연스님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을 보물 제2022호로 지정했다. 보물 제2022호로 지정된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 유물은 금속공예품과 도자류 등 총 18점으로 구성된 출토물로 2008년 인각사의 1호 건물지 동쪽 유구에서 발견됐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인각사 근처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에 기린이 뿔을 걸었다 하여 이름을 ‘인각사’로 붙였다. 일연 스님이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성한 사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군위군과 인각사(주지 정화)에서는 ‘군위 인각사지 종합정비사업’을 계획하고, 그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18년까지 발굴조사를 했다. 보물로 지정된 공양구 일괄은 2008년 5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됐으며, 금속공예 11점, 청자 7점 등 모두 18점이다. 인각사지는 6기 문화층으로 분류한 문화층 외에도 인각사의 창건기 유구층으로 판단되는 문화층이 1기 문화층 하부에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이를 통해 인각사가 고려시대 일연스님의 하안소로 지정되면서 사격이 확장됐다는 기존까지의 성과 외에 통일기 전반(8세기 이전)부터 인각사가 존재했으며, 통일기 중반(8~9세기)에 상당한 규모의 사역이 형성돼 있었음을 확인했다. 탑지로 추정되는 유구에 대한 조사과정 중 지표층에서 약 5cm 지점에서 청동 금고가 노출됐는데, 청동 금고 내부에 청동제 탑형 향합, 접시, 가릉빈가상 등이 발견됐다. 청동 반자를 기준으로 해 반시계방향으로 청동 발, 청동 이중합, 금동병향로, 해무리굽(옥벽저, 옥환저) 청자 일괄, 정병 등이 추가로 확인됐으며, 바닥과 외곽에 통일신라시대의 선문타날 평와편과 흑색 연질기와편이 수습됐다. 군위 인각사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불교 의식구 일괄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나며, 동아시아 교류사에서 통일신라 금속공예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승려의 지물을 부장하는 공양물의 성격보다 당시 사찰에서 중요하게 사용한 공양구와 의식구 등을 규범에 맞춰 특수하게 매납하는 방식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5>고령 지산동고분군

고령군은 경북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경남도와 붙어 있고,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시와 붙어 있다. 서쪽에 있는 가야산에서 대가천과 안림천의 물길이 시작돼 주변에 비옥한 평야를 만들며 대가야읍에서 합쳐지고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주산 능선 위에는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서 고령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며 내려다보고 있다. 수많은 둥근 곡선의 봉분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능선을 따라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줄지어 늘어선 왕들의 무덤은 고령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며 내려다보고 있다. 1천500년 전인 5~6세기에 조성된 대가야 시대의 봉분들. 사적 79호로 지정된 지산동고분군이다. 대가야고분의 특징은 높은 산 능선위에 무덤을 축조한 것이다. 지산동고분군의 대표적 대형고분들이 왼쪽부터 2, 3, 4, 5호분의 순서로 열 지어 늘어서 있다. 대가야고분의 특징 중 하나는 높은 산 위에 무덤을 축조한 것이다. 왜 능선의 정상부에 봉분을 두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산 돌출부에 흙을 높이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무덤이 실제보다 더 크고 웅장하며 신성하게 보인다.살아있는 사람들의 시야에 항상 들어오는 곳, 그것도 높이 올려다보이는 위치에 있게 된다. 무덤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후에도 자신의 후손인 왕들이 백성들을 통치해 가는 모습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언제나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조상보다 더 위쪽에 묘지를 조성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권세가 강한 후대로 갈수록 무덤을 위쪽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다. 해방 전부터 대부분 도굴되었으나, 그 후 발굴 조사하는 등 정비작업이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달 지산동고분군에서 국내 최초로 고대 건국신화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국내 최초로 고대 건국신화가 새겨진 토제 방울이 나온 지산동고분군의 발굴조사 현장. 5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5㎝의 토제 방울이 발굴조사 현장에서 나왔는데, 표면에 거북 등껍질 문양을 비롯해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국내 최초로 고대 건국신화가 새겨진 유물로 보인다며 문화재청이 공개한 지름 5㎝의 토제 방울. 이는 '구지가'로 알려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된 ‘수로왕 건국설화’와 같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나 사기 등의 문헌에 기록된 것들이 유물에 투영된 최초의 사례라고 조사팀은 주장했다. 다양한 해석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돼 학계에서는 추가 연구가 진행돼야 그림의 실체가 명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토기와 투구지산동고분에서는 고령양식 또는 대가야 양식으로 독특한 토기들이 나오기도 한다. 신라계 토기와 대가야계 토기는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지산동고분에서 출토되는 고령양식 또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가야토기는 부드럽고 우아해 보인다. 서기 300년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토기는 500년대 중반경에는 남해안은 물론 마산, 창원에까지 퍼져 거의 가야지역 전체에 미친다. 이처럼 넓은 지역에서 대가야양식 토기가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대가야의 국력이 컸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철 생산도 대가야가 국력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고리칼, 쇠창, 쇠도끼, 화살촉 등 많은 무기가 나온다.이들은 전투에서 직접 사용되기도 했지만, 묻힌 사람이 살았을 때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대가야에서는 야구모자처럼 챙이 있는 투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대가야 철기 투구에는 깃털 모양의 장식을 달아 위용이 빛나게 한다. 대가야박물관 부근에 세워진 가야 철기 기마무사의 조각품. 투구의 정수리 부분에는 술같이 생긴 장식이나 깃털 모양의 장식을 달아 위용을 빛낼 수 있게 했다. 이 가운데 지산동고분에서 발견된 야구모자 모양 투구와 갑옷은 신라보다 가야지역과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같은 유물을 통해 대가야와 일본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령군은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해 밖으로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대가야는 각 지방으로 통하는 도로를 가지고 있었고, 강과 바다를 오가는 뱃길을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해안에 도달하는 길은 낙동강을 통하여 지금의 김해 쪽으로 나아가거나, 또 하나는 합천, 진주를 거쳐 사천 앞바다로 나아가는 길 등이 있었다. 대가야는 이와 같은 길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와 배를 이용하여 철과 곡물, 토기 등을 내보내고 생선과 조개, 소금 등을 들여올 수 있었다. ◆금관과 금동관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금관과 금동관도 여러 개 출토됐다. 대가야의 왕이 쓰던 관은 다른 나라의 관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신라의 관이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인데 비해 대가야의 관은 풀잎이나 꽃잎 모양이다.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국보 제138호 '전(傳) 고령금관 및 장신구 일괄'과 보물 제2018호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이다. 고령금관은 끝부분을 다듬어 풀꽃 모양 장식을 세우고, 양 옆에 뿔처럼 튀어나오게 만든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국보 제138호 고령금관은 장식의 양옆에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하였다. 문화재청 제공 보물 제2018호 고령 금동관은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발굴 경위와 출토지가 확실하고 함께 출토된 유물에 의해 5세기 대가야 시대에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지난 2월 이 금동관은 보물로 지정됐다. 최근 보물 2018호로 지정된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 세련된 문양과 출토 사례가 적어 희소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가야가 각종 금속 제련 기술은 물론, 금속공예 기법에도 능해 고유한 기술과 예술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얇은 동판을 두드려 판을 만든 뒤 도금했는데, 일반적 금동관 형태인 출(出)자 형식과 다르게, 넓적한 판 위에 X자 문양을 점선으로 교차해 새긴 점이 특징이다. 가야시대 금동관은 출토 사례가 적어 희소가치가 있고,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단순하고 세련된 문양으로 인해 고유성이 강하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보물 지정에 때맞춰 최근 국립대구박물관은 이 금동관을 상설 전시한다고 발표했다.그동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가야실)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보물지정을 기념해 대구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됐다. ◆44호분다시 새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중턱쯤 오르자, 다른 고분들보다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봉분이 서 있다.지산리 44호분이다. 주산 구릉의 맨 꼭대기에서 열 지어 늘어선 5기의 대형 고분 중에서, 남쪽 아래쪽 경사면에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인 44호분. 오키나와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와 대가야의 해외 활동을 말해준다.1977년 발굴 조사된 이 고분은 3기의 대형 석실과 이를 둘러싸듯이 배치돼 축조된 32기의 소형 순장 돌 덧널이 들어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이 도굴되었지만, 남은 것으로 금귀걸이·금동그릇·은장식쇠창·야광조개국자 등이 나왔다. 특히 일본 오키나와(冲繩)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왔다. 이는 대가야의 활발한 해외 교역 활동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고분의 규모와 구조·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이 고분은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 고분 중 최고의 위계를 가진 왕릉으로 보고 있다. 이 고분의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고대사에서 단편적으로 보였던 순장 기록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게 됐다. 순장(殉葬)이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생전에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를 말한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을 계속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관점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행한 것이다. 특히 44호분에서는 30여 명 이상의 순장자가 묻혀 있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이 있었다. 대가야는 이 전투에서 15세 소년 장수 사다함의 5천 명 선봉대의 기습공격을 당하며 멸망했다. 16대 520년간 지속했던 ‘대왕’의 나라 대가야는 500년대 국제정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대가야를 정복한 신라는 대가야의 지배층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 흩어져 살게 했다.가야금을 만든 우륵은 신라의 중원경(청주)으로 보내졌고,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强首)와 명필 김생(金生)도 대가야의 후손들이지만, 고령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대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인문과 예술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문화재청은 지난달 21일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심의를 거쳐, 가야 고분군(고령 지산동고분군 외 6개)을 등재 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오는 7월 문화재위원회에서 등재 신청 대상으로 결정될 경우, 문화재청은 2020년 1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한다.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2021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이에 발맞춰 고령군에서는 오는 11일부터 14일까지 ‘고령 대가야체험축제’ 행사를 가진다.대가야 생활촌,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대가야읍 일원에서 4일간 개최된다. 고분 제268호분 아래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하늘과 맞닿은 곡선을 바라본다.이제 천천히 내려와야 한다.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니 미세먼지가 시야를 흐려 대가야 시조모인 정견모주가 살고 있는 가야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무덤을 뒤 돌아보았다.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를 느끼게 하는 지산동고분군이었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박순국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