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7)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신라 35대 경덕왕은 통일신라의 문화예술을 비롯해 정치적으로도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시기의 왕이다. 경덕왕이 불교적인 면에서 이룬 업적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흔적들도 많다. 가장 큰 불교적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들 수 있다. 또 성덕대왕신종, 황룡사종, 분황사 약사불 주조 등의 큼직한 일들이 경덕왕 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특히 성덕대왕신종의 네 배에 이르는 거대한 황룡사대종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최근까지 바다 아래서 발견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신고에 따라 문화재청이 나서 발굴 작업을 펼치기도 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몽고란 때에 동해천으로 싣고 가려다 풍랑을 만나 동해바다에 침몰되었다는 설이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양북면 봉길리 마을에는 예부터 태풍에 파도가 몰아칠 때면 바다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는 구전도 신빙성 있게 들린다.분황사 약사불 또한 거대한 크기로 조성되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봉덕사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던 성덕대왕신종은 여러 곳으로 이동되면서 경주지역의 명물로 주목받다가 국보 제29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삼국유사: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신라 제35대 경덕대왕(재위 742~765)이 천보 13년 갑오(754)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니, 종의 길이는 1장3촌이고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천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 이찬과 삼모부인이요, 장인은 이상택 하전이었다. 고려 숙종조(1095~1105)에 새로운 종을 만드니 길이가 6척8촌이었다.또 이듬해 을미(755)에 분황사의 약사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6천700근이며, 장인은 본피부 강고 내말이었다.왕은 또 황동 12만 근을 희사해 아버지 성덕왕(재위 702~737)을 위한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혜공왕(재위 765~780) 건운이 대력 경술(770) 12월에 유사에 명해 공장들을 모아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봉덕사는 효성왕(재위 737~742)이 개원 26년 무인(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에 성덕대왕신종지명이라고 했다. 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이니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를 위해 시주한 쇠이므로 성덕종이라 한 것이다.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 한림랑 김필월이 교를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장황해 수록하지 않는다.◆봉덕사와 봉덕사종-봉덕사는 경주 북천가에 있던 신라시대 사찰이다. 봉덕사는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과 효성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복을 빌기 위해 창건했다는 기록들이 있다.또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위해 창건하기 시작해 효성왕 시대에 완공해 성덕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봉덕사는 경주 북천가에 있었지만 현재는 수몰되어 종을 제외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는 봉덕사종은 신라 혜공왕이 주조한 종으로 구리 12만 근이 들었다. 종을 치면 소리가 100여 리까지 들린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에 침몰하자 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했다.-봉덕사종은 종신에 새겨진 이름에 따라 성덕대왕신종으로 불린다. 경덕왕이 성덕왕의 덕을 기리며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주조를 시작해 혜공왕 때에 완성했다.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왕실에서 왕권의 권위와 존엄성을 드러내고 왕실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주조했다는 것과 경덕왕이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해석한다.종은 771년에 완성해 봉덕사에 달았다. 조선시대 수해로 봉덕사가 수몰되자 영묘사로 옮겼다. 다시 봉황대로 옮겨 보존하다가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어두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현재 경주문화원으로 옮겨 달았다가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준공되면서 옮겨 관리하고 있다.1992년 제야의 종으로 33번 타종한 뒤 중단했다가 학술조사를 위해 1996년 다시 타종하고, 2001년 10월9일, 2002년 10월3일, 2003년 10월3일 타종행사 이후 안전을 위해 타종을 완전히 중단했다.-분황사 약사여래불은 무게 30만6천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이었다는 기록이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1998년 분황사 보광전을 고쳐짓기 위해 해체작업을 하던 중에 발견한 기록에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탔다. 현재 불상은 1609년에 동 5천360근으로 조성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현재 약사불의 왼손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 39년 을미 4월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갑오년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믿기 어렵다.현재 보광전의 약사불은 불상의 얼굴이 둥글고 육감적이며 세속적인 느낌을 준다. 옷 주름 표현과 전체적인 조형기법, 보광전 보수 때 발견된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이 불상은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대종과 봉덕사종황룡사대종과 봉덕사종은 우선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봉덕사종은 황룡사종의 1/4에 불과했지만 봉덕사종 역시 황동 12만 근으로 만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종이다. 사찰의 종을 이렇게 엄청난 크기로 조성한 배경에는 왕실의 권력다툼이 숨어있다.종을 치면서 기원하는 일은 부처 앞에서 기도로 염원하는 일보다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기도하는 이의 마음이 소리의 울림을 통해 세상에 전파되면서 공명하여 뜻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경덕왕은 통일신라의 최고 절정기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해 왕위세습에 대한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도모했다.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낳는 일이 안정된 왕실을 바탕으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경덕왕은 소원하는 바는 부처님의 공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고, 황룡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는 일이었다.종의 규모가 클수록 소원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경덕왕은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크기의 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왕의 이러한 마음을 헤아리고,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폐비되어 출궁된 삼모부인이 종을 만들기 위한 49만7천581근의 무쇠를 경덕왕에게 시주했다.황룡사대종이 엄청난 크기로 주조돼 황룡사에 걸리자 귀족들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폐위된 삼모부인의 시기하는 마음이 후비로 들어온 만월부인의 태기를 가로막아 왕자를 보기 어렵게 할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암중세력다툼으로 번졌다.급기야 만월부인은 아들이 생기지 않자 경덕왕에게 부탁해 최고의 장인을 불러 신종을 만들도록 했다. 이에 경덕왕은 성덕왕의 덕을 기리고 백성들의 안녕과 나라의 홍복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봉덕사를 짓고, 봉덕사종을 주조하도록 명했다.봉덕사종의 주조가 늦어지자 만월부인은 경덕왕을 통해 황룡사대종 타종을 금지토록 했다. 경덕왕은 “황룡사대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사들이 전쟁에 나아갈 때와 정월초하루 제례 외에는 타종을 금하라”며 엄명을 내렸다.황룡사대종을 타종하고 전쟁에 나아가면 아무리 불리한 여건에서도 군사들이 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몽고 군사들은 신라의 국경을 넘어서면서 첩자를 보내 황룡사대종의 목어를 숨겨버렸다. 황룡사대종 타종을 못하고 몽고전에 출전한 신라 군사들은 맥없이 쓰러지고, 결국 황룡사까지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황룡사대종의 신비한 힘을 믿은 몽고군은 배를 이용해 대종천으로 종을 실어 가려다 풍랑을 만나 동해에 가라앉아버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6) 황룡사 구층목탑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시대 건축 기술과 문화 예술적 감각을 자랑하는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목탑은 황룡사장륙존상, 진평왕 옥대와 함께 신라삼보에 손꼽힐 정도로 특별했다.황룡사 구층목탑은 천 년이 지나 획기적으로 발달한 현대 과학과 건축기술로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눈길을 끄는 순수 목조건축물의 기술과 탁월한 예술성을 자랑한다.역사학자는 물론 건축기술자들의 고증을 통해 순수 목조건축물을 높이 82m, 현대 아파트 30층에 이르는 건축물을 못 하나 없이 끼워 맞추기식의 공법으로 당당하게 세웠다.황룡사가 들어선 지역은 저수지를 메운 습지대로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 건축물을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최고의 건축공법인 판축기법을 도입해 육중한 건축물이 지진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신라 제27대 선덕왕(재위 632~647)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이 주는 법을 받아 감응했다.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은 천축 찰리종족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 공공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한 것이다”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자장은 이것이 바로 대성이 변화한 것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중국의 태화지를 지나는데 문득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보리(깨달음)를 구하려고 합니다”고 했다.신령스러운 사람이 절을 하고 또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과 접해 있으며 또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고 하였다.신령스러운 사람이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이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자장이 묻기를 “고국에 돌아가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령스러운 사람이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이 와서 조공해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형체를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신하들과 의논했다.신하들이 “백제로부터 공장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이에 보물과 비단으로써 백제에 공장을 청했다. 아비지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고, 이간 용춘이 일을 주관해 소장 200명을 인솔했다. 처음 찰주를 세우는 날에 공장은 꿈에서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공장은 마음속으로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고 컴컴해지는 가운데 늙은 승려 한 명과 장사 한 명이 금당 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승려와 장사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했다.찰주기에는 “철반 이상의 높이는 42척이고, 그 이하는 183척이다”고 했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황룡사구층탑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 계단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이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했다.이는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진평왕의 천사옥대를 이른다. 신라삼보 때문에 그 모략을 중지했다. 주나라에 9정이 있어서 초나라 사람이 감히 북방을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것이다.또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설립기’에는 신라 제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9한이 침노했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이요, 제2층은 중화요, 제3층은 오월이요, 제4층은 탁라요, 제5층은 응유요, 제6층은 말갈이요, 제7층은 단국이요, 제8층은 여적이요, 제9층은 예맥이라고 했다.또 국사와 절의 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553년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대인 정관 645년에 탑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효소왕 즉위 7년 무술(698) 6월에 벼락을 맞아 성덕왕 때의 경신년(720)에 다시 탑을 수축했다. 경문왕(재위 742~765) 때인 무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수축했다.본조 광종(재위 949~975)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 세 번째로 벼락을 맞아 현종(재위 1094~1095)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아 숙종(재위 1095~1105)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수축했다. 또 고종(재위 1213~1259) 25년(1238) 무술 겨울에 서산의 병화(몽고의 침입)로 탑과 장륙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타버렸다고 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의 울음선덕여왕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여왕은 백성들의 평화를 무엇보다 우선해 생각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심지어 왜에서까지 침략이 끊이지 않아 군사정책에 많은 고민을 했다.선덕여왕이 즉위 10년에 접어들 때 신하들이 왕의 고민을 헤아리고는 “당나라에 유학중인 자장법사의 법력이 뛰어납니다. 황제에게 간청해 자장을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심이 가한 줄 아뢰오”라며 간청했다.선덕여왕은 나라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헐벗음을 장구한 필설로 기록해 많은 보석들과 함께 당태종에게 보내면서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당나라의 황제는 여왕의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는 자장을 불러 크게 위로하면서 신라로 돌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을 타일렀다. 황제는 부처님의 사리 100낱을 선물하면서 “9층탑을 건설할 때 심초 석에 넣고 건축물을 세워 팔관회를 주관하며 지성으로 부처님께 기도한다면 인근의 나라들이 항복해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자장이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며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건의했다. 여왕은 크게 기뻐하며 구층 목탑을 건축할 수 있는 장인 아비지를 백제로부터 초빙해 대역사를 시작했다.아비지가 주춧돌을 놓기 전날 백제의 궁궐이 불에 타는 꿈을 꾸고, 불안해 목탑 건축을 중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아비지의 꿈에 거대한 역사와 도사가 나타나 “이놈 이탑은 신라뿐 아니라 백제, 고구려, 왜 등의 만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건축하는 것이니 게으름을 피우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며 호통을 치고는 60여 개의 기둥을 세우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꿈에서 깬 아비지는 “이탑은 운명적으로 세워야 할 신의 탑”이라 생각하고 즉시 서둘러 목탑 건축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황룡사구층목탑은 장륙존상과 같이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에 위험이 닥치면 심초석이 울며 몸을 흔들어 건물 전체가 지진이 온 것처럼 흔들렸다.탑이 645년 완공된 이후 처음 흔들린 것은 647년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다. 기와가 떨어질 정도로 흔들렸고, 결국 선덕여왕은 이 난으로 죽음을 맞았다. 다시 목탑이 흔들린 것은 당나라가 50만 수군을 동원해 신라로 진격해 올 때였다. 견훤이 서라벌로 진격해 올 때와 몽고군이 신라를 유린할 당시 1238년에는 기왓장이 떨어지고, 지붕이 무너질 듯 크게 흔들리며 심초석이 소리 내어 울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5) 황룡사 장륙

신라 24대 진흥왕은 삼촌이자 외할아버지인 23대 법흥왕의 불교를 지향하는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강한 나라를 건설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어머니의 섭정기간 동안 학문을 익히며 무술 연마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왕이 훌륭한 장군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흥왕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나라의 연호를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으로 명명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정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룡사를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평화를 이룩하는 통치이념을 일원화 했다. 왕궁을 크게 짓기보다 황룡사를 지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국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게 했다.◆삼국유사: 황룡사 장륙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얼마 있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의 사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살펴보니 쪽지에 글이 적혀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하고,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양을 함께 실어 놓았다.현의 관리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해 대건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마쳤다.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136푼 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다음해였다.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뒤꿈치까지 이르렀는데 땅을 적시기가 한 자나 되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어떤 이는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나 잘못된 말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공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왕의 태자가 혼자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나무랐다.태자는 왕에게 “힘만으로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일찍이 되지 않으리라 알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 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그러나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크기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데 없었지만 이루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되자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뒷날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을 주면서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왕(아육왕)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00여 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완성해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며 부탁하는 것이었다.불상이 완성되자 동축사의 삼존불도 이 절로 모셔왔다. 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진평왕 5년 갑진년(584)에 금당을 만들었다. 선덕왕 때 절의 첫 지주는 진골인 환희사이고, 2대는 자장 국통, 다음은 혜훈 국통, 다음은 의상 율사이다.지금 전쟁을 겪은 이래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 상만이 남아있다.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다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에 깃든 진흥왕의 통치이념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가지고, 친정하는 진짜 왕으로 등극했다. 가장 먼저 그가 무술수업을 하면서 함께 훈련했던 청년들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진흥왕과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신라의 최고 군사 세력으로 성장해 전쟁터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적군들을 무찔렀다.진흥왕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곡창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금관가야를 정벌해 복속시켰다. 가야를 합병하면서 왕족을 비롯한 인재들을 그대로 영입해 신라인으로 귀속시켰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친정부대로 성장해 화랑과 함께 기존의 신라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다.진흥왕의 군사진영이 짜여지자 곡창지대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성왕을 죽이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교두보로 삼았다.진흥왕은 연이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황초령, 마운령까지 치고 올라가 영토를 최고로 넓혀 재정적, 인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영토를 넓히면서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높여야 귀족층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국력이 안정적으로 유지 확산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왕궁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이때 후궁 미실이 진흥왕을 찾아와 조용하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지금 왕궁을 크게 짓는 것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어 갈등을 조장하며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왕의 반문에 미실은 “왕궁의 규모와 같은 절을 지어 백성들의 평화와 부강한 나라를 기원하는 법회를 지속적으로 올린다면 귀족은 물론 백성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왕실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고 했다.진흥왕은 미실 후궁의 지혜로운 제안을 옳게 여기고 “왕궁을 지으려 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땅이라는 게시니 당장 왕궁을 황룡사로 고쳐 국태민안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미실은 왕의 명령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진흥왕의 마음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에 전국에서 유명 고승들을 비롯해 승려들과 백성들이 황룡사 건축에 참여했다. 17년의 긴 건축기간 동안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태려 애썼다.황룡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왕궁과 맞먹는 대규모의 사역을 자랑하며 최고의 국찰로 완성됐다.신라의 국운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와 고구려조차 밀려오는 신라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 전전긍긍했다.진흥왕 즉위 30년을 넘어가면서 귀족세력들이 암암리에 다시 힘을 길러 왕권에 도전했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다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세우기로 했다. 일장육척에 이르는 본존불과 거대한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십대제자상을 세웠다.장륙존상이 금당의 지붕보다 높아 황룡사 금당을 뜯어내고 다시 지었다. 장륙존상 앞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불상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진흥왕의 세력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실과 귀족층의 연합세력에 밀렸다. 진흥왕은 흥륜사에 감금되면서 정복군주의 삶을 마감했다.진흥왕이 황룡사와 왕궁을 떠나 흥륜사 법당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황룡사 중문·남회랑, 국내 첫 AR로 재탄생

경주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신라 왕경 핵심 유적인 황룡사 중문과 남회랑을 국내 최초로 실물 크기 증강현실(AR)로 복원해 문화관광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경주시는 지난 26일 지역 문화재 해설사를 비롯해 박물관, 대학생, 문화재 동호회 등을 대상으로 1차 시연회를 진행했다. 시연회를 통해 디지털 재현 콘텐츠를 통한 유적의 이해와 관심도를 높여 활용 가능성을 확인했다.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재를 디지털로 복원한 사례는 2019년 돈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건물을 구성하는 부재를 하나하나 만들어 세부사항을 표현하고,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도록 실제 건축물 크기를 AR로 복원한 것은 황룡사가 최초의 사례다.이번에 복원을 마친 부분은 황룡사가 가장 크고 화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통일신라 시기의 황룡사 중문과 남회랑이다.일반시민과 관광객들이 황룡사 역사관에서 준비한 태블릿PC 등을 활용해 AR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내년 1월부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남문에서 북쪽으로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자리하고 있는데 중문 양쪽에 남회랑이 이어져 있다. 이번 중문과 남회랑 복원은 2018년 8월 1차로 완성한 제작물을 최근 보완, 완성했다.중문은 2층 규모의 우진각 지붕 형태와 1층 규모의 맞배지붕 형태 두 가지 모습으로 구현했다. 남회랑도 중문에 맞춰 2가지 형태로 만들었다.이번 복원은 체험자와 건축물의 거리를 계산해 원근감을 최대한 살렸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이 있다. 실감나는 AR 복원을 위해 시간에 따른 그림자를 계산하고 재질을 다양화해 건물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체험하는 것처럼 사실감을 최대한 살려 황룡사를 실제로 거니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오는 2024년까지 황룡사 금당을, 이후에는 강당과 목탑도 디지털로 복원할 계획이다”며 “앞으로 다양한 문화재를 디지털로 복원해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2) 흥륜사 금당십성-자장과 표훈

자장은 신분이 상당히 높은 신라 진골 대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황제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덕망이 높은 승려였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그를 돌려줄 것을 요청해 돌아오게 할 정도로 자장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었다.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은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이 되어 왕실에서 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목탑이 준공되고 황룡사 제2대 주지로 주석했다.반면 대덕 표훈은 삼국유사에서 천제를 만나 왕의 뜻을 전하는 등으로 천궁에까지 드나드는 술법을 펼치는 도력이 높은 승려로 전해진다. 표훈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 하나로 불국사에 머물면서 아들이 없던 경덕왕의 심부름으로 천제를 만나 부탁해 혜공왕을 낳게 했다.자장과 표훈은 신라시대 불교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신라 십성으로 선정됐다. 같은 금당십성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자장이 널리 알려진데 반해 표훈은 삼국유사에 잠깐 등장하는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전해지는 신라십성 자장과 표훈의 단면을 살펴본다.◆삼국유사: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대덕 자장은 김씨이고, 본디 진한의 진골 무림 소판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뒤를 이을 자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에 삼보에 마음을 기울여 천부관음에게 나아가 자식 하나 낳기를 바라며 축원했다.“만약 사내아이를 낳으면 불교의 바다에 나루터와 다리가 되도록 키우겠나이다.”문득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가슴 속으로 들어오더니 아이를 가져서 석가모니와 같은 날 태어났다. 이름을 선종랑이라 했다. 정신은 맑고 뜻이 슬기로웠으며 글은 빛나고 생각이 높아 세상의 맛에 물들지 않았다.일찍 부모를 여의고는 더욱 세상의 번잡한 것이 싫어졌다. 처자식을 버리고 밭과 동산을 내놓아 원녕사를 만들었다. 홀로 그윽하고 험한 곳에서 지내며 호랑이와 승냥이도 피하지 않고 고골관을 닦았다. 조금이라도 권태로움이 닥치면 곧 작은 방을 지어 둘레에는 가시나무 담을 두른 채 그 안에 벌거벗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면 곧 가시바늘이 찔러댄다. 머리는 기둥에 달아두고 명상이 흐려지는 것을 물리쳤다.마침 재상 자리가 비자 귀족 집안 간에 의견이 맞아 여러 차례 자장을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오지 않으면 참형을 내리겠다”는 칙명을 내렸다.자장이 이를 듣고 “내가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깨고 백년을 사는 일은 바라지 않노라”고 했다.사정을 들은 왕이 출가를 허락했다. 이에 바위 수풀 속으로 깊이 숨어서 먹는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이상한 새가 과자를 물고 와 공양하니 손으로 받아먹었다. 아련히 꿈속에 하늘의 사람이 내려와 오계를 주자 그제야 비로소 골짜기를 나왔다. 동네의 남녀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자장은 변방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며 서쪽으로 가 큰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평 3년 병신년(636)에 칙명을 받아 제자 승실 등 열 명 남짓 데리고 서쪽 당나라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았다.산에는 만수대성의 소상이 있었다. 그 나라에서 이 상에 대해 “하늘님이 기술자를 데리고 와 만든 것이다”라고 전해 내려온다. 자장은 이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겼다. 꿈에 불상이 이마를 만지더니 산스크리트어로 된 계를 주었다. 하지만 깨어나서도 해석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특이하게 생긴 어떤 스님이 오더니 해석해 주었다.또 “비록 수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한들 이 글을 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자장은 이미 성스러운 가르침을 입었음을 알고, 북대를 내려와 태화지를 거쳐 당나라 서울로 들어갔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승광별원에서 편히 지내게 해 주었다. 은총을 내림이 빈번하고 두터웠다. 그러나 자장은 그 번잡스러움을 싫어해 황제에게 글을 올리고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낭떠러지에 들어가 바위를 잇대 방을 지었다. 3년을 지내는 동안 사람과 신이 계를 받고 신령스런 응답이 날마다 번갈아 나타났다. 글이 너무 길어져 싣지 않는다.다시 서울에 들어오자 황제가 사람을 보내 위로했다. 비단 20필을 내리고 옷감으로 쓰도록 했다.정관 17년 계묘년 (643)이었다. 본국의 선덕왕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는 허락해 주면서 궁궐로 불러들여 가사 한 벌과 좋은 비단 500단을 내려 주었다. 세자도 200단을 내렸으며 여러 가지 예물을 갖추어 주었다. 자장은 자기 나라에 경전과 불상이 충분치 못하다 하여 대장경 1부와 여러 번당에서 화개까지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해 모두 실었다.본국에 이르니 온 나라가 크게 환영했다. 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쓸 것과 시중들 사람을 충분히 내려주었다. 한번은 여름에 궁중으로 불러 들여 대승론을 강독했으며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일곱날 일곱 밤을 강연했다.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어둑어둑 깔려 강당을 덮었다. 남녀 승려와 신도 모두 그 신이스러움에 깊이 감탄했다.조정에서 “불교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지만 부처님의 일을 맡아 받들고 수행하는 규칙이 없는 채 지내고 있다. 잘 짜여진 규정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잘 정돈할 수가 없다”고 의논했다. 의논에 따라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는 칙령이 내렸다. 무릇 승려들을 하나로 이끌어 가도록 모든 권한을 승통에게 주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자장과 당 태종의 약속자장은 신라 소판 무림공의 아들로 590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진평왕 12년으로 진흥왕의 정복전쟁 후유증에 의한 외세침략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자장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자식마저 등진 채 깊은 산으로 들어가 처절한 수신의 길을 걸었다. 골방에서 알몸으로 가시덤불 속에 앉아 머리는 천정에 매달아 졸음을 좇아가며 불도 삼매경에 들었다.왕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려 불렀지만 목숨을 걸고 응하지 않았다.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 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며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그에게 승려의 길을 갈 것을 허락했다.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청량산에서 기도하며 정진해 문수보살로부터 사구계를 받았다. 이에 당나라 태종의 신임과 예우를 받으며 장안에서 수도했다.당 태종 이세민은 반역 호족들을 진압하는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자 아버지인 당 고조로부터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천책상장의 별호를 얻을 정도로 호걸이었다.이러한 태종이 나라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복전쟁을 이어나가자 자장은 그의 신임을 바탕으로 신라와의 전쟁 불가론을 펼쳐 불가침의 약속을 얻어냈다. 태종이 고구려 정복의 꿈을 펼치며 승승장구 할 때의 일이라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자장은 당시 볼모로 당나라에 와있던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과 머리를 맞대어 신라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김인문은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신라가 고구려를 칠 수 있는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자장은 태종에게 신라와의 협력을 다짐하는 약속을 얻어냈다.자장은 태종의 야욕을 간파해 고구려와 맞대면하고 있던 거란을 꾀어 고구려와 전쟁하도록 종용하고, 약해진 거란과 고구려를 한꺼번에 침략하는 전략을 제시해 더욱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자장은 신라와의 동맹을 제의해 태종의 선심을 얻는데 성공했다.그러나 태종의 야욕에 찬 속마음을 헤아린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데 집중했다.이때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신라에 화엄사상을 소개하며 승려들의 질서를 세우는데도 크게 공헌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2) 칠처가람(3) 분황사

경주 분황사는 황룡사와 이웃해 있으면서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의 하나로 손꼽힌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634년에 건립해 자장, 원효와 같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유명 사찰이다.황룡사가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였다면 분황사는 서민들을 위한 불법을 실천했던 대중불교의 산실이었다는 차이점을 들 수 있다.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분황사에서도 불법(佛法)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원효가 많은 저술활동을 펼쳤고, 약사여래입상, 모전석탑,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 우물 등의 유적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다.설총과 고개를 돌렸다는 원효의 소상 이야기, 원성왕이 당나라 사신들에게서 되찾아 온 분황사의 용에 대한 전설, 도천수대비가를 낳은 기적 같은 영험의 이야기도 분황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신라의 불교 칠처가람, 분황사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황룡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분황사가 건립됐다.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과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주석하게 했다. 이어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의 1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썼다.경덕왕 당시에 조성해 봉양했던 30만6천700근에 이르는 약사여래입상,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 등은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유실됐다.분황사에는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 남아 있다. 분황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에 파괴됐지만 조선시대에 수리하려다 오히려 더욱 파손되었는데 1915년에 다시 수리했다. 지금은 3층으로 남아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7층 또는 9층으로 추정된다.석탑의 기단에 배치된 수호상도 이색적이다. 내륙을 향한 곳에는 사자상, 동해 방향에는 물개를 힘이 넘치는 역동적인 조각상으로 세워두고 있다.석탑의 면마다 감실을 설치하고 금강역사 2구씩을 새겨 수호신으로 세웠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국보 제3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분황사에는 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돌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외형은 팔각형으로 다듬어져 있고, 내부는 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불법에서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우물로 원불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 용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인 795년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의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병에 넣어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빼앗아왔다고 한다. 이후부터 분황사의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 부른다.분황사 우물 동편에는 고려시대 조성한 원효의 화쟁국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의 좌대가 남아 있다. 비석좌대에는 조선시대 김정희가 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분황사와 원효원효의 아명은 서당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신체적 발달과 성숙한 지혜로 주변 어른들이 깜짝깜짝 놀랄 행동을 보였다. 활달한 성격으로 무예 연마하기를 좋아하는 한편 책 읽기를 좋아했다.일찍 화랑도가 되어 천하를 떠돌며 수련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김유신의 귀신 같은 몸놀림과 칼의 춤을 본 이후로 무예수업에 심취하기도 했다.그러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불교에 천착하게 됐다. 불교에 귀의하면서 스스로 법명을 원효라 짓고 불교적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서적을 섭렵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 당의 앞선 지식을 배우며 불법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결국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에게 첩자로 오인 붙잡혀 신라로 돌아와야 했다.혜공 등의 선사들에게서 불법을 익히면서 또 한계를 느껴 의상과 다시 당나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당항성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 깨닫고는 혼자 신라로 되돌아왔다.유학길에서 돌아온 원효는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귀족중심의 왕실불교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원효는 온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방법을 찾는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이때 진덕여왕 승만이 원효의 그릇이 한없이 크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황룡사에 주석하게 하고, 수시로 황룡사에서 원효의 강론에 참여했다.원효의 거침없는 달변과 그의 훤칠한 외모에 진덕여왕은 점점 인간적인 감정에 빠져들었다. 진덕여왕과 함께 강론을 듣던 요석 또한 원효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어하면서도 때론 그것에 매달리곤 했다.진덕여왕은 원효의 강의와 인간적인 매력에 푹 빠져 황룡사 나들이를 자주하는 한편 수시로 원효를 궁으로 불러들여 국사에 대한 고견을 청취하기도 했다.진덕여왕이 말년에 이르러 원효에게 국사를 운영하는 어려움과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놓으며 곁에 머물러 주기를 당부했다. “혼자 걷는 길은 너무나 멀고 힘들게 느껴지네요. 가까이에서 손잡고 이끌어 주시길 감히 청하옵니다”며 승만은 직접적인 고백을 털어놓았다.원효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여왕을 응시하다가 “이 몸은 이미 불법에 귀의한 처지라 한 곳에 마음을 둘 수 없다 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특별한 하나의 존재에 미치기도 하지만 결국 만물에 머무는 근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라며 조용히 왕실을 벗어났다.원효는 궁에서 나와 주석하던 황룡사 금당에서 사흘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곡기를 끊은 채 오로지 염불만 외다 달이 이끄는 길을 따라 사라져버렸다.진덕여왕은 원효가 황룡사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여왕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끝내 원효를 다시 대면하지 못했다.깊은 산 속에서 도를 구하다, 나라의 곳곳을 다니며 걸식하며 불법을 전하기도 하고, 공부를 이어가던 원효는 진덕여왕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는 다시 서라벌로 돌아왔다.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고,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원효는 불법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할 방안을 모색했다.원효는 걸인의 행색으로 서라벌 거리를 떠돌며 무애춤을 추고 다녔다. 아이들과는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준다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세울 텐데”라는 노래를 불러 궁궐에까지 들리게 했다.당시 무열왕은 백제를 정벌해 사위와 딸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쳐 삼국통일을 이룩하려면 먼저 국민들의 여론을 하나로 묶고, 나라의 방향을 전달하는 이념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이때 노래를 들은 왕은 원효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요석궁으로 불러들여 딸과 인연을 맺어 주었다.원효는 요석과의 해후를 통해 설총을 낳고, 궁궐의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분황사에서 세상을 구할 이론을 하나로 엮어 책을 쓰는 일에 열중했다. “존재의 특별함은 있다. 또 없다. 마음의 근원을 따라가면 만물은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 차별 없이 자비의 마음을 가진다면 누구나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해 백성들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원효대사가 분황사에서 대중불교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1) 칠처가람 (2) 황룡사

황룡사는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나서면서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바꿔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황룡사는 진흥왕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했지만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선덕여왕 때에 구층목탑을 지으면서 현재의 사찰 규모로 발전했다.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륙존상은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것만 보아도 황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드러난 황룡사의 역사 이면에 미실이라는 신라의 여걸이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발휘한 권력지상주의의 내력이 적힌 야사를 들어보는 것도 호사롭다.◆역사 속의 칠처가람, 황룡사황룡사는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황룡사는 칠처가람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이를 고쳐 사찰로 지으면서 황룡사라 했다. 공사는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했다.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황룡사를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고, 그들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바로 신라의 땅이라 인식했다.현재까지 발굴에 따르면 황룡사 부지는 약 8만여㎡에 달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사역지 주변에는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남아 있다.삼국시대 가람 배치의 정형인 일탑에 일금당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일렬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 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황룡사에는 신라 삼보 중에서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고, 화성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어 절의 품격을 짐작하게 한다. 또 황룡사의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역대의 왕들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황룡사에 친행해 100명의 고승이 모여 백고좌강회를 열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황룡사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지 옆을 지날 때 신인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큰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 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다.자장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귀국해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했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했다.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탑의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했다.황룡사 구층목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의 아홉 나라를 상징한다. 이는 이들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다. 고종 25년인 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다.황룡사에는 또 장륙존상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에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 남아 있다.황룡사에는 또 성덕대왕 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몽고군이 침략해 방화로 없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황룡사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와 미실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의 위상을 드러내고, 불교를 통한 국가통치이념을 정립해 안정적인 국가 경영, 귀족과 백성들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건립한 국가사찰이다.진흥왕의 이 같은 황룡사 건립에 대한 생각은 후궁 미실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졌다.미실은 신라시대 왕실의 여인을 배출하는 대원신통이라는 혈통의 계승자로 왕실의 여인이었다. 미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옥진에게 색공을 교육받았고, 출중한 외모에다 왕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 학문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다양한 기예를 익혀 뛰어난 인물로 왕실은 물론 저잣거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미실은 자신이 타고난 미모와 자질을 십분 활용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의 재주에 못지않은 욕심이 왕의 권세와 화랑도까지 손아귀에 넣고 당대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했다.미실은 처음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과 일가를 이루었으나 뛰쳐나와 화랑 사다함과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왕가로 돌아와 진흥왕의 후궁이 되어 본격적인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미실의 욕심은 진흥왕의 뜻과 교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진흥왕은 미실의 뜻에 따라 정복군주로 백제와 고구려 땅을 침략해 영토를 넓히는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황룡사도 미실의 입김으로 태어났다. 진흥왕 심맥종이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궁을 크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미실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나라의 사찰을 크게 일으킨다면 왕의 권위는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에 마음을 바꿔 황룡사를 지었다.미실은 황룡사 금당 옆에 왕실의 복을 비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미실은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권력의 최고 실세로 행세해 진흥왕 이후 진지왕 옹립과 폐위, 진평왕 옹립에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다.미실의 탁월한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색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진흥왕이 직접 칼을 들고 백제, 고구려 정복전쟁의 선두에 나서고 있을 때 태자로 임명되었던 진흥왕의 큰아들 동륜도 미실의 치마폭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미실의 정치적 사랑방은 황룡사 사당이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도 황룡사에서 피로를 풀며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해소해 정치적인 불만을 잠재웠다.미실의 정치적 야욕은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다. 거칠부와 손잡고 진흥왕을 흥륜사로 유폐시킨 이후 진지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미실을 왕비로 책봉하겠다던 진지왕이 약속을 어기고 여색을 탐하자 진지왕도 미실의 손에 처참하게 왕좌에서 쫓겨나야 했다.미실은 황룡사 사당에서의 정치로 가야출신 노리부와 손잡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그리고는 다시 왕의 여자로 실력을 행사하다 진평왕 10년 609년에 병들어 죽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황성공원에 야간 명물 등장

경주시 황성공원 내 황룡사 9층 목탑이 다양한 색상으로 변하는 조명등으로 치장해 야간 명물로 등장했다.경주시에 따르면 시민의 숲인 황성공원 시민운동장 입구에 설치된 조형물 ‘황룡사 9층 목탑’에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하는 LED 조명을 설치해 야간에 불을 밝힌다.경주시는 LED 조명 설치에 앞서 황룡사 9층 목탑 조형물 부분 보수를 거쳐 RGB 색상을 다양한 파스텔톤 형태로 연출했다.조명등을 설치한 황룡사 9층 목탑 조형물은 ‘2009 경주 술과 떡잔치’ 조직위원회에서 현수막 등 광고 판매 수익금으로 건립했다. 높이 9m, 폭 4.8m로 철골 구조물과 섬유강화플라스틱(FRP)과 스티로폼으로 구성됐다.경주시 장병규 도시공원과장은 “야간에 황성공원 이용객들에게 볼거리 제공을 위해 설치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의 볼거리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