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뾰족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 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하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타임비, 2013) 하이힐 구두는 모던 걸의 대표적 필수 아이템으로 꼽혔다. 감색 투피스 정장에 하이힐을 신은 여성은 멋쟁이 숙녀의 전형이었다. 사슴 같은 목, 잘록한 허리와 날렵한 발목에 가늘고 긴 하이힐은 환상적인 콤비네이션이다. 푸짐한 가슴과 빵빵한 히프가 함께 어울린다면 그야말로 심장을 때리는 도발적인 그림이다. 경쟁력 있는 우성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한 경쟁에서 이성의 눈을 끌어당겨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는 손쉬운 미학적 콜라보다. 하이힐 구두는 지금까지도 빠질 수 없는 젊은 멋쟁이 여성의 상징이다. 신발이기보다는 패션 장신구에 가깝다. 목과 허리와 발목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지만 하이힐은 노력만 하면 누구나 가늘고 긴 것을 장착할 수 있다. 눈물겹고 피나는 연습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의지만 있으면 대부분 적응가능하다. 그래서 여고생이 교문을 나서면 가장 먼저 갖춰 신는 건지 모른다. 키도 작은 데다 신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은 동양여성에게 하이힐은 양 단점을 효과적으로 보완하면서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어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정장치다.허나 하이힐도 기능적인 면에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발을 기형적으로 변형시킬 뿐 아니라 걷기에도 엄청 불편하다. 가늘고 날렵한 이미지를 포기하고 키 높이 기능만 살린, 전반적으로 두꺼운 신발바닥에 넓고 투박한 굽을 장착한 구두가 일반화되고 있긴 하지만 위험하고 활동성이 떨어지긴 매일반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에 사로잡혀 뾰족구두군은 여전히 여성구두의 절대적 강자로 굳건히 자리를 굳히고 있다. 뾰족구두의 아성을 깨는 것은 ‘가는 세월’이다. 나이가 들면 종족 보전의 본능이 퇴화하게 마련이다. 갱년기가 오고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확 떨어진다. 아울러 신체의 균형 감각도 떨어져서 넘어질 위험성마저 커진다. 멋이나 외모보다 편의성이나 실리를 따지고 미적인 아름다움보다 내적인 성취감을 추구한다. 멋있는 구두보단 편안한 구두를 선호한다. 굽이 평평하고 낮아진다. 굽을 낮추면서 인생의 참모습을 깨친다. 하이힐로 땅을 콕콕 찍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팠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또닥거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는지 깨닫는다. 겉멋에 취해 끄덕거리며 건들건들 살아왔다. 굽을 낮추고 세상을 보니 비로소 진실 된 세상이 보인다. 뾰족구두를 신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낯설고 부끄럽다. 이젠 큰 발이든 작은 발이든, 편견 없이 다 담을 수 있는 하얀 고무신이고 싶다. 모두 이해하고 관용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오철환(문인)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