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대중불교의 꽃을 피운 양대산맥으로 원효와 함께 의상(625~702)을 앞줄에 기록한다. 의상과 원효는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종교인이면서 사상가이자 철학자, 정치인이면서 성인으로 손꼽힌다. 의상과 원효는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승으로 전해지며 신라십성으로 기록이 남아있는 국제적인 인물로 평가 받는다.의상은 중국에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배워 신라에 그 뿌리를 내렸다. 원효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에 꽃 피우는 일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전국의 오래된 사찰 중 의상과 원효의 이름이 없는 곳이 없다 할 정도다. 원효와 의상 두 성인 모두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부처의 길을 안내했다. 원효가 스스로 실천적으로 민중과 함께 살다 간 수행자라면 의상은 실천적 불교에 힘쓰면서 제자들을 길러 제자들이 전국 십대사찰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한 교사적 성인이었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입적과 시기를 같이해 중국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왕실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호국승려이기도 하다. 의상은 양양의 낙산사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탁월한 십대제자를 길러내 신라의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워 국사, 법사, 대사, 조사 등으로 불린다. ◆의상의 일대기의상은 화엄종의 시조라고 해 조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의상에 대한 기록은 출가한 나이를 비롯해 그의 행보를 전하는데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의상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의상법사의 아버지는 한신이며, 성은 김씨이다. 나이 열아홉에 서울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얼마 안 돼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해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다가 국경의 수비군이 간첩으로 오인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영휘 초년(650)에 때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 배에 편승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양주에 있었는데 양주의 장군 유지인이 청하여 의상을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 지엄을 만났다. 지엄이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와 중국까지 덮었는데 나무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하여 청소를 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바로 도착하는 것이었다. 극진한 예절로 그를 맞이하면서 조용히 “내가 어제 꾼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하면서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의상이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그윽하고 미묘한 데까지 해석하니, 지엄은 학문을 서로 이야기할 동반자를 만나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 670년 경에 신라의 승상 김흠순(김인문이라고도 한다)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갇혀 있었는데, 당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인문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정보를 줘 신라로 들어가 알리게 했다. 의상이 함형 원년 경오(670)에 귀국해 이 일을 문무왕에 전하자 신인종의 고승 명랑을 시켜 임시로 밀교의식을 행할 단을 세우고 비법으로 기도하며 풍랑을 일으켜 당나라 군사들을 수몰시키고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의상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 양양에 낙산사를 세웠다. 이어 의봉 원년(676)에 의상이 태백산으로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제자들을 길러 신라에 불교의 진리를 널리 펼쳤다. ◆의상을 쫓는 선묘낭자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선묘 낭자를 만났다. 선묘는 의상의 인물됨에 한눈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나 이미 불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의상과의 세속적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선묘는 그냥 의상의 옆에서 머물기로 작심하고 그를 돌보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이 고국 신라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중요한 정보를 들고 선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신라로 떠나는 배에 올라버렸다. 의상이 신라로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묘는 용이 되어 뒤따르며 풍랑을 잠재워가며 의상의 뱃길을 인도했다. 의상이 신라에서 국왕을 만나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낱낱이 보고했다. 이어 낙산으로 올라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뜻에 따라 낙산사를 건립했다. 또 신라 국왕의 명을 받아 영주 부석사를 건립했다. 부석사에서 불법에 매달리는 의상을 보살피기 위해 선묘는 용이 돼 밤이면 암자에 운무를 드리우고 지붕에 똬리를 틀어 도적이든 짐승이든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며 의상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날 선묘는 밤이 늦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당당한 자세의 의상을 보다가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선묘의 눈에는 의상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낭군이었다. 그날은 특히 의상의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여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의상도 선묘를 내치지 않고 포근하게 안았다. 선묘는 그만 황홀경에 빠져 극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벽에 머리를 꽝 부딪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지만 생생한 느낌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선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선묘의 품에는 의상의 목침이 안겨있고, 어깨 위에는 그의 도포가 덮여있었다. 의상은 꼿꼿한 자세로 아미타불 앞에서 여전히 염불을 암송하고 있었다. 선묘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덮고 있던 의상의 도포를 곱게 두고는 지붕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선묘는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낭군님은 이미 불가의 제자다. 님의 공부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나를 다스려야겠다’고 재차 다짐한 선묘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바위로 바꿔 버렸다. 스스로 욕심을 억제하고, 님의 옆에 머물며 돌볼 수 있는 부석이 돼 천 년 만 년 동안 대사의 옆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의상과 진신석가불법에서는 아미타불을 도와 사바세계의 중생을 구하는 현세불의 으뜸으로 관세음보살을 첫 손에 꼽는다. 관음보살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준다. 이런 관음보살이 지상에 상주하는 곳은 8곳뿐이라고 전한다. 대한민국에는 양양 낙산사가 유일하게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전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포타란, 중국 절강성의 보타산, 티벳의 포달라궁, 대만의 보타락사에도 상주한다. 일본에는 기이의 보타락가와 시모츠게 두 곳이다. 그리고 인도 남해안의 보타락가에 관음보살이 상주한다. 의상은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깊은 공부로 빠르게 성장해 궁극에 이르는 공부를 하고 싶어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최고의 선각자로 손꼽히는 지엄을 찾아가 수학했다. 학문적인 이론에서는 이미 지엄을 앞질러 스승이었던 지엄도 깜짝 놀라워하면서 의상을 제자라기 보다 도반으로 삼아 수도에 임했다. 의상은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고향의 중생들을 구하라는 게시를 듣고 서둘러 신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에 당나라 황실에 억류돼 있는 김인겸을 만나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의 뜻을 알아차리고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전했다. 이어 의상은 꿈에서 보았던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양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양양에서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벼랑에 좌선하며 관음보살을 만날 날을 기다렸다. 꼬박 1주일의 기다림 끝에 파도가 미치지 않는 동굴에서 환한 빛이 동해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백팔배를 올리고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는 영광을 체득했다. 관음진신은 두 개의 구슬을 주면서 벼랑이 끝나는 평탄한 언덕에 대나무 두 그루가 동해로 휘어져 있는 곳에 도량을 열고 경전의 뜻을 전하라 이르고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의상은 다시 백팔배를 올리고 구슬을 소중하게 보듬어 안고 벼랑을 기어올랐다. 관음의 말처럼 평평한 곳에 육장에 이르는 대나무 두 그루가 동해를 향해 쓰러질 듯 휘어져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곳에 절을 짓고 낙산사라고 불렀다. 의상이 낙산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꿈에 용왕이 나타나 붉은 구슬을 주면서 태백산 중턱에 절을 지어 기도를 하면 외적들의 침략이 없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될 것이라고 일렀다. 잠에서 깨어보니 품에 꿈속에서 용왕이 줬던 구슬이 안겨 있었다. 신기하게 생각한 의상은 관음보살이 용신으로 변신해 게시를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부랴부랴 행장을 꾸려 태백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태백산 중턱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면서 잡초가 무더기로 수북하게 쌓인 곳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하다가 잠에 들었는데 다시 용신이 나타나 의상이 앉아있는 수풀더미가 절터라고 일러줬다. 의상은 조용히 일어나 108배를 올리고, 앉은 자리에 절을 지었다. 그리고 붉은 구슬을 사리함에 넣어 모시고는 밤낮으로 염불을 외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의상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오는 중생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어 태백산 일대가 늘 분주했다. 의상은 자신이 깨달은 부처님의 진리를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의상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하나같이 훌륭하게 성장해 나라의 기둥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특히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열 명의 승려를 의상의 10대 제자라고 불렀다. 의상은 부석사에서 조용히 앉은 자세로 입적했다. 의상이 입적할 때 그의 몸이 화려한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바람처럼 동해쪽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생시처럼 꼿꼿하게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