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세.대구형무소에서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들의 평균 나이다.206명 대 195명.대구형무소의 순국자 수와 당대 최대 규모였던 서대문형무소의 순국자 수다. 대구형무소 규모가 서대문형무소보다 더 작았음에도 순국자 수는 더 많았다. 대구가 애국지사들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이중에는 지역 출신인 여성 독립운동가도 많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인식은 지역에서 조차 낮은 실정이다.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대구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비애와 신화를 톺아본다. 또 지역 애국지사들을 재조명할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이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짚어본다. 〈편집자 주〉 대구형무소 수감을 거쳐 생을 마감한 것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독립운동 투사는 모두 206명이다.당대 최대 규모로 악명을 날린 서대문형무소(195명)보다 선열·지사가 더 많은 것으로 미뤄보면 대구형무소는 말 그대로 생지옥임을 반증한다.외교권을 강탈 당한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일본제국의 통감부(조선총독부의 전신) 대구이사청이 중구 대안동·서내동 일원 300여 년 역사를 가진 경상감영 좌옥·우옥을 접수한 후 대구감옥이란 이름을 붙였다. 1923년 일제는 문화통치기를 거치며 대구감옥의 명칭만 순화시켜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대구형무소’라고 바꿨다.1909년 7월 사법권 및 감옥 사무를 일제에 송두리째 넘기는 기유각서가 체결되자 일제의 입맛에 맞는 주먹구구식 판결로 인해 조선인 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1906~1909년 대구감옥(이하 대구형무소)의 재감 인원은 1일 평균 2.5명에 그쳤지만, 이후인 1909년 11월1일 기준 하루에만 607명이 수감됐다.1909년 결국 삼덕동 102번지로 구내·외 1만3천여㎡(약 4천 평)로 확장 신축 이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감방(감옥)의 넓이는 1천여㎡(322평)에 불과했다.국권을 피탈 당한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천265명, 1921년 1천748명으로 껑충 뛰었고 1930년 이후에도 1천200명~1천300명대를 유지했다.적정 수용 인원 수를 훨씬 초과해 1919년 대구감옥에 투옥된 경북 칠곡 출신 독립운동유공자 장석영 선생의 ‘흑산일록’에 따르면 ‘방마다 사람 수가 적어도 24~25명은 되기에 앉거나 누울 때 빽빽해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혔고, 밤에는 제대로 누울 수도 없어 어떨 때는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기록돼있다.일제가 독립운동 세력에게 자행한 반인권적인 고문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독립운동가의 생명을 단축시켰다.천장에 거꾸로 묶어놓고 각목으로 온 몸을 비트는 ‘비행기식’ 고문, ‘잠수함식’ 물고문 등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 또는 옥외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허다했다.이처럼 위생·고문 등으로 대구형무소의 환경이 특히 열악하자 대구형무소 순국 유공자는 206명에 달해 서대문형무소보다 많았다.1937년말 기준 서대문형무소 수감자가 2천670명(전국 수감자의 17.6%)로 대구형무소(1천254명, 6.5%)가 다음을 이었다.수감자 수는 1천416명 적지만, 순국자 수는 11명 더 많다.독립운동정신계성사업회 이상호 운영위원장은 “복심법원(일제의 고등법원)이 경성·평양·대구 세 군데밖에 없었기에 대구복심법원은 삼남(충남·호남·영남) 출신 독립운동가의 종착지가 됐다”며 “특히 대구·경북 사람들이 많았다. 1939년 1월 기준 대구형무소 수형자 1천147명 가운데 대구를 포함한 경북에 본적을 둔 사람이 709명(62%)에 달한다”고 설명했다.유현제 기자 hjyu@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