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비롯한 경북지역 일대는 신라 1천 년의 향기가 묻어나는 역사문화 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특히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유적을 쉽게 접할 수 있다.다만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흔한 역사문화 유적을 시민의 소득으로 연결하는 문화산업화 사업은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라는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다는 평가다. 대구일보는 신라의 오랜 역사를 꾸려온 왕, 장군, 학자, 승려, 화랑 등 신라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역사문화를 인물 중심으로 스토리를 입혀 재구성한다.이를 통해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키는 문화산업화에 나설 계획이다. 먼저 신라사람의 흔적을 찾고 기행단을 구성해 그들의 삶이 묻어 있는 역사 현장을 탐방한다.또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통해 풍성한 문화자원을 개발한다.이 같은 과정을 담은 이야기를 매주 한 차례에 걸쳐 연재하며, 이를 책으로 발간해 전국의 국공립도서관 등에 배부할 예정이다.일련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경주와 경북지역의 역사문화를 산업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가장 먼저 신라 최초의 왕이 된 박혁거세의 흔적을 찾았다.박혁거세에 대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역사 기록에서는 알에서 탄생한 신비한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하지만 중국 황제의 딸이 낳았다는 설화도 전해지면서 학계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그의 죽음도 신비스럽다. 신화처럼 전해지는 역사를 실현 가능한 이야기로 꾸며본다. ◆기록 속의 박혁거세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를 두 가지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진한 땅에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 여섯 부족의 시조들이 기원전 69년 3월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강변에 모여 덕을 갖춘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우자고 의논했었다. 그때 남산자락 나정에서 이상스런 기운이 번지고 있어 함께 다가가서 살펴보니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더니 날아갔다. 그 옆에 알이 있었는데 쪼개어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뭍짐승이 춤을 추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그래서 혁거세라 이름 짓고, 사람들이 다퉈 경하 드리며 왕으로 추대했다. 중국 황실의 딸 사소는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 황제가 솔개의 발에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고 했다. 사소는 솔개를 따라 선도산에 집을 짓고 신선이 됐는데, 이 산을 서연산이라고 불렀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했다. 그리고 신모는 신선이 돼 선도산에 오래 살면서 많은 덕을 베풀었다. 왕이 계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계림국이라고 했다. 서라벌 또는 사라, 사로라고도 했다.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또한 죽어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려고 했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는 바람에 몸을 다섯으로 나눠 각각 묻고 오릉으로 만들었다. 뱀이 나타났다고 해서 사릉이라고도 한다. ◆박혁거세 흔적신라 최초의 임금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죽음 또한 하늘로 올라갔다가 죽어 땅으로 몸만 떨어졌다는 신비로운 설화로 전해지고 있으며 관련 흔적이 유적으로 남아있어 단순한 신화나 전설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은 경주 탑동에 흔적이 남아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한 결과 우물터와 팔각정의 거대한 건물터가 드러났으며 ‘나정’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1천3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또 선도산 정상 부근에는 박혁거세를 낳은 신모가 살았고, 그 신모를 위해 제사를 올리는 사당 ‘성모사’가 있으며 주변에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역사를 고증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처음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렸던 궁궐은 창림사가 있었던 절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창림사지에서는 삼층석탑과 건물지, ‘창림’이라는 명문기와 등의 많은 유물이 나왔다.박혁거세의 죽음을 전하는 설화와 같이 왕의 무덤은 다섯 기의 봉분으로 조성돼 오릉으로 불리는 사적으로 남아있다. 오릉 옆에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그 정신을 기려 사당의 이름을 ‘숭덕전’이라고 지었다. 학자들은 여러 기록을 참고해 박혁거세는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고, 일찍이 철기문화를 가진 뛰어난 무기로 보유하며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당시 부족들을 규합해 신라를 세웠다고 분석하고 있다. ◆스토리텔링: 박혁거세 덕으로 다스리다박혁거세의 아버지는 진한 사람으로 인자하고 지혜로웠다.그의 얼굴은 항상 웃음기를 띠고 환했다. 훤칠한 체격으로 무술 실력이 뛰어났으며,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사냥한 고기를 팔기도 하고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다.그래서 평판이 좋았다. 사람들은 그를 ‘덕마니’라고 불렀다. 어느 날 덕마니가 바닷가에서 난파선에 떠내려온 사람을 구했다. 그는 중국 황실의 넷째 아들이었다. 왕자는 지혜로우면서도 호기심이 많아 여행을 좋아했다. 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왕자가 풍랑을 만나 진한 땅으로 표류해 덕마니를 만난 것이다. 왕자는 무예를 비롯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는 이미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는 진한 덕마니의 보살핌으로 10년이나 살면서 그의 지식과 각종 비법을 덕마니에게 고스란히 전수했다. 왕자가 죽음을 앞두고 덕마니에게 부탁했다. 중국 황실에 자신이 체득한 비법들을 기록한 책과 왕자의 편안한 죽음을 직접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덕마니는 왕자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행장을 꾸려 중국으로 건너가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태자가 직접 기록한 문서들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덕마니에게 3년만 머물러 주기를 간청했다.왕자의 경황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었던 황제의 욕심이었다. 황제는 날이 갈수록 덕마니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됐다.이후 셋째 공주와 결혼하도록 했고, 덕마니는 황제의 사위가 돼 벼슬을 하게 됐다. 아들과 딸을 낳았다. 덕마니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공부한 모든 것을 어린 아들에게 전수했다. 아들의 얼굴이 덕마니를 닮아 박과 같이 훤하다고 해서 혁거세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세상을 밝게 하라는 뜻도 함께 담았다. 덕마니는 죽음을 앞에 두고 아내와 아들에게 “나를 있게 한 진한 땅의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일이 나의 가장 큰 책임”이라며 “나는 죽어 이 땅에 묻힐지언정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을 정리해 진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라”고 유언했다. 혁거세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한 줌 재로 변한 유골을 보쌈에 넣은 채 황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황제는 딸과 손자 혁거세에게 많은 보물과 무기, 군사를 실은 큰 배 10척을 주고 편안하게 잘 살라고 기원하며 배웅했다. 혁거세는 어머니와 함께 남산자락에 작은 마을을 만들어 함께 온 사람들과 거주지를 마련했다. 혁거세는 아버지에게 배운 무술과 많은 지식들을 다시 정리하는 한편 황제가 호위무사로 보낸 무송도사로부터 창과 활, 검과 도, 다양한 비기들의 제조와 기술과 함께 군사적 전술 전략도 배웠다. 박혁거세는 이미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사들을 단련하고 있었다. 주변 진한마을의 부족들은 아직 청동기문화로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 무예 또한 혁거세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는 진한의 육부촌장들을 소집해 회의를 개최했다. 육부의 촌이 함께 뜻을 모아 튼튼한 나라로 발전시켜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실력 대결을 거쳐 최초의 신라 왕이 됐다. 육부촌장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실력을 가진 혁거세를 존경하며 따랐다. 박혁거세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교육하면서 덕으로 다스렸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