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 년의 역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상반기, 발전 성장기, 멸망 하반기라는 세 단계로 분류한다면, 원성왕대는 혜공왕으로부터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멸망을 향한 하반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기다. 혜공왕 시절 김경신(원성왕)은 37대 선덕왕이 된 김양상과 손잡고 김지정의 난을 진압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혜공왕을 살해하고 내물왕계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왕은 내물왕의 11대손이다. 선덕왕이 즉위하고 김경신은 상대등이 돼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며 꿈에 그리던 왕좌에 대해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선덕왕이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어 조카 김주원에게 이양할 계획이었다.결국 내물왕 12대손 김경신은 선덕왕이 죽자 김주원에 앞서 왕좌에 올라 38대 원성왕이 됐다. ◆원성왕신라 제38대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이름은 김경신이다. 아버지는 효양이고, 어머니는 박씨 계오 부인이다. 왕비는 각간 김신술의 딸이다. 785년에 왕위에 올라 798년까지 13년간 왕좌에 앉아 있었다. 원성왕은 왕위를 이어받는 과정이 석연치 않아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신라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만파식적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보관하고 있다고 백성들에게 전파했다.원성왕은 즉위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당시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춘추를 풀어 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곡례, 논어, 효경 등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했다. 원성왕은 또 조상의 5묘를 만들어 제사하는 등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을 다양하게 찾았다.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고 재상과 중앙, 지방정부의 조직을 정비했다. 발해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두텁게 하고, 봉은사를 건립해 불교를 재정비했다. 원성왕은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태자가 죽자 둘째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차례로 죽자 첫째 아들 인겸의 아들이자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삼았다. 준옹이 나중에 39대 소성왕이 됐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중국을 비롯 일본에서도 사신을 보내 보물 만파식적을 보고 싶어 하는 등으로 호시탐탐 신라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연회국사가 번번이 해결책을 내놓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꿈보다 해몽김양상과 함께 혜공왕을 시해하고 김양상을 왕위에 옹립하면서 상대등이 되어 신라의 실질적인 최고의 권력자 행세를 하던 김경신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한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차곡차곡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덕왕이 약속과는 다르게 자신의 조카 김주원에게 왕위를 이양하기로 공포하고, ‘상재’라는 상대등보다 높은 지위의 벼슬을 만들어 왕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김경신은 귀족회의를 주재하는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하면서 차기 왕위를 꿈꾸었지만 김주원이 상재로 윗자리를 점하고 있어 마땅한 해법을 찾으려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이때 김경신이 꿈을 꾸었다. 너무나 생생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이름난 점술가를 불러 해몽을 부탁했다. 쓰던 모자를 벗고 흰갓을 쓰고, 12줄 악기를 들고 천관사의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점술가는 “모자를 벗은 것은 관직에서 떠날 징조이고, 나무로 만든 악기를 든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감옥에 갇힐 징조”라고 해몽했다.이에 두려움이 엄습해와 김경신은 문밖 출입을 삼가고 안방에 틀어박혔다. 아찬 여삼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 김경신을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김경신이 누차 돌아가라고 했지만 한사코 고집을 부려 여삼을 방 안으로 들였다. 여삼은 김경신의 꿈 이야기를 듣고, 바로 일어나 큰절을 올리고는 “나중에 귀하게 되시고 저를 박대하지 않으신다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김경신의 허락을 얻은 여삼은 “모자를 벗은 것은 공의 위에 앉을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줄 악기를 든 것은 12대 후손까지 대를 이을 것이며,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가게 된다는 암시”라고 해몽했다. 이에 김경신이 내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겠냐고 묻자 여삼은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시면 답이 있을 것”이라며 계략을 상세하게 풀어 제시했다. ◆원성왕의 즉위경덕왕이 신라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경덕왕에 이어 36대 왕위에 오른 혜공왕은 8살부터 24살까지 16년 간 왕위에 있었지만 마음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고 대신들에게 휘둘리며 수시로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몸살을 앓다 결국 반란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혜공왕의 목숨을 앗아간 반란을 김양상과 함께 진압한 김경신은 전략가이면서 행동가이지만 직접 행하는 것보다 심복이나 주변 인물을 시켜서 뜻을 이뤄가는 지시형 스타일이다. 김지정의 난을 유발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도 김경신의 전략에 의한 작품이다. 이 또한 김경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철저한 계획에 따른 하나의 절차였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상대등의 자리를 꿰찬 김경신은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김경신은 선덕왕과 대신들이 자신보다 위의 상재로 있는 김주원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있을 때도 노골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장기적인 충실한 계획이 있었고 그는 또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경신은 상대등으로서 입지를 굳혀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인사와 재정, 공부와 형부, 예부까지 대신들을 모두 자신의 수족으로 채웠다. 그 시간이 5년이나 걸렸지만 김경신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선덕왕 재위 6년에 이른 어느 여름, 태풍이 동해안을 휩쓸고 서라벌에 상륙할 때였다. 김경신은 조용하게 병부의 대신을 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태풍이 서라벌을 지나갈 무렵 알천이 범람하는 때가 거사일이요. 만약에 대비해 병사들을 배치하고, 대신들에는 거사가 완전히 이뤄지기까지는 함구하시오”라며 조용히 밀지를 내렸다. 김경신은 전략가답게 김주원의 집이 알천을 건너 북쪽에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권을 손에 넣는 방법을 선택했다. 알천이 범람하면 북쪽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길은 차단된다. 토함산 고개를 넘어 명활산성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지만 지세가 험하고, 우기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목 때문에 군사들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알천은 매년 여름 적어도 두세 번은 범람했다.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면 궁궐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북쪽의 집을 고집했던 데는 뚜렷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선조들의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것과 복잡한 업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김경신은 그 두 가지를 아주 적절하고도 교묘하게 이용했다. 상재의 위치에 있는 김주원에게 잡다한 민원성 업무는 모조리 넘겼다. 골치 아프게 내전에서 일하도록 주원을 묶어두고, 대내외적인 큰 행사는 상대등인 김경신 자신이 처리하면서 실권을 휘둘렀다. 김경신은 “백성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중요한 일은 상재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원을 인정해주는 척하며 철저하게 내전에 고립시켜 각 부서의 실권자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다. 내성적인 김주원의 성격을 파악한 김경신의 약삭 빠른 처세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주도면밀해서 김주원도 뭐라고 항변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다. 선덕왕 6년 785년 음력 칠월 그믐께, 긴 장마가 기승을 부리며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돌변해 알천이 크게 범람한 깊은 밤. 비수를 품은 김경신이 왕을 치료하는 의사를 대동하고 왕의 침소를 찾았다. 내실 주변에는 살수의 눈을 번뜩이는 김경신의 병사들이 곳곳에 몸을 숨기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편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만 겨우 일으켜 앉은 선덕왕은 주치의가 들고 온 약사발을 청하여 받아 들었다. 왕은 김경신을 지긋이 바라보며 “내가 진작 대업을 경에게 넘겨야 하는데 눈 어두운 대신들의 중언부언에 밀려 늦었소.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라오”라며 부탁하고는 천천히 약사발을 기울였다. 선덕왕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과 김경신이 추진하는 전략을 인지하고, 그의 뜻을 암묵적으로 따르기로 벌써 작정하고 있었다. 선덕왕은 이제나저제나 하던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왕좌에서 밀려나며 세상을 떠났다. 왕표를 받아든 김경신은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오. 아무도 피 흘리지 않고, 백성들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겠소”라며 고개를 떨구는 선왕을 반듯하게 누이고는 천천히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 당당한 자세로 왕좌에 올랐다. 선덕왕과 함께 손잡고 왕권을 탈취했던 김경신이 드디어 신라 제38대 원성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52대 효공왕까지 모두 14명의 왕이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혈육간에 피를 부르는 전쟁으로 얼룩지면서 결국 신라 멸망으로 치닫는 신호탄이 돼버렸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