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말간 백합꽃같이~…나는 마당 넓은 집에 살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최신설비가 잘 갖춰진 학교였다. 일제강점기에 기생신분으로 큰 부를 쌓은 할머니가 사비를 털어 학교를 세워 국가에 헌납하였다 한다. 인근지역의 생활여건이 좋아서 비록 공립이었지만 부잣집아이들이 많이 다녔다. 나는 마을아이들을 넓은 마당에 불러 모아 상전노릇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엇이 잘못되었든지 해방촌으로 이사를 갔다. 골목을 따라 흐르는 도랑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골목 안 초가집이 이사 가는 집이었다. 그 아래채 두 칸짜리 방에 살아야 했다. 애가 둘이라고 속여 얻었다. 부모님과 여동생 셋이 한방을 쓰고, 할아버지, 막내삼촌, 형 그리고 내가 한방을 썼다. 집은 좁았지만 작은 꽃밭이 있었다. 동네아이들을 불러 꽃밭을 놀이터로 제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전학한 학교는 학생 수가 엄청 많았다. 한 반에 백 명 남짓했다.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나는 같은 반에 전학 온 소녀와 걸상을 같이 사용했다. 그 소녀는 하교할 때 늘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초가집을 지나 큰길까지 갔다가 소녀와 헤어지고 나서야 다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소녀는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가 집안에 산포도나무가 있어서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 여우같았다.해방촌 아이들은 마른버짐이 핀 얼굴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다녔다. 나의 단짝 소녀는 하얀 얼굴에 항상 성한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소녀의 옷은 철지난 옷 같았지만 보통아이들의 옷과 완연히 달랐다.소녀와 나는 노래를 잘 해서 함께 합창단에 들어갔다. 합창연습을 하기위해선 고학년 선배들이 수업을 마치는 오후까지 기다려야 했다. 도시락을 못 싸와 점심을 굶고 노래하였다. 사는 게 넉넉해 보였지만 소녀도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여 합창단을 그만두었다.2학년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 소녀가 무단결석을 하였다. 비슷한 구역에 살고 가까이 지낸 탓에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소녀의 집을 찾아갔다. 정확한 위치는 몰랐지만 성모당 근처라는 건 알았다. 성모당까지 안내하자 선생님은 그 건너편 고아원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원장수녀님이 맞아주었다. 결정이 늦어져 미리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예쁜 옷을 입은 소녀가 나와 고개를 숙였다. 눈알이 발갛게 되어있었다. 소녀의 미국 입양이 결정되었다고 수녀님이 아쉬워했다. 소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양이 말간 백합꽃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6·25가 남긴 전쟁의 상흔으로 방방곡곡에 성한 곳이 없었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대구지역도 그 유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빈손으로 쫓겨 온 피난민들이 자리 잡은 해방촌은 인간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했다. 피난민 아이들도 덩달아 조악한 환경에서 자라야 했다. 그 열악한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도 부모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지금의 풍요는 모두 그 희생으로 영근 과실이다.주인공은 부촌에서 부유하게 살다가 부모의 갑작스런 도산으로 해방촌으로 이사 간 초등학교 저학년 소년이다. 극적인 환경변화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어린만큼 제법 잘 적응한다. 소년의 눈에도 가난은 부끄럽게 비친다. 그렇지만 순수한 사랑은 가난도 초월하는 힘으로 다가온다. 초가집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집 소년이지만 소녀는 부유한 미국인의 입양도 마다할 만큼 그와 헤어지기 싫다. 「소나기」의 순수한 사랑이 뽀얀 백합으로 피어난다.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