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숙과 혜공은 신라십성으로 손꼽히는 신라시대 진평왕 당시의 고승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일부 책에서만 겨우 만나볼 수 있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혜공은 그래도 원효와 도력을 겨루며 오어사라는 절의 이름을 낳은 인물로 회자되고 있지만 혜숙은 그가 깨달았던 깊은 공부에 비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이 크게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시대로 읽혀진다.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들의 이력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 등의 경력을 흔히 볼 수 있다. 혜숙 스님은 화랑 출신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몸으로 깨우침을 줬다. 혜공은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의 근본이 부처로 일반인들이 미처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혜숙과 혜공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신비스런 신라의 인물을 만나본다. ◆혜숙의 기행혜숙 스님은 호세랑의 무리에 섞여 지냈다. 그러다 혜숙이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은거해 20여 년을 보냈다. 마침 국선인 구참공이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게 됐다. 구참공이 가는 길가에 혜숙이 나와 말고삐를 잡으며 “저 또한 따라가고자 합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공이 허락했다. 사냥하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치달으며 옷소매를 걷고 서로 앞서거니 요란스러웠다. 공은 흐뭇했다. 잠시 쉬면서 여러 줄로 앉아 고기를 삶아 다투어 먹고 권하고 했다. 혜숙 또한 더불어 씹어 먹는데 꺼려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다 구참공의 앞에 나아가 “이보다 더 좋고 신선한 것이 있으니 바칠까요”라고 하니 “그래, 좋다”고 했다. 혜숙은 사람들을 물리고 허벅지 살을 베어 쟁반에 올려 바쳤다.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있었다. 공은 깜짝 놀라 “어찌 이다지 지독한 짓을 하는가”라고 물었다. 혜숙은 “처음에 저는 공을 인자한 사람이며 만물과 통할 수 있는 분이라 여겨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 살펴보니 공께서는 죽이는 데에만 온통 푹 빠져 남을 헤쳐 자신만 살찌우려 하니, 어찌 군자가 할 짓입니까”라고 꼬집고는 옷을 털고 가버렸다. 공은 대단히 부끄러워졌다. 혜숙이 먹던 쟁반을 보니 생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조정에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아오도록 했다. 신하가 찾아가니 혜숙은 부녀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었다. 사신이 더럽게 여기고 7~8리 돌아오는 길에서 혜숙을 만났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성 안 우리 신도 집의 칠일제에 갔다가 파하고 오는 길입니다”고 답했고, 말한 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 신도 집에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고을의 동쪽에 묻었다. 마을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마을의 서쪽에서 오다가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다른 지방에 가고자 하네”라고 대답해 서로 절을 하고 헤어졌다. 반리쯤 갔는데 구름을 타고 멀어졌다. 그 사람이 이현의 동쪽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있었던 일을 말했다. 무덤 안을 파보니 오직 가죽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경주 안강의 북쪽에 혜숙이 거처했다고 전하는 혜숙사가 있었고, 혜숙의 것으로 전하는 부도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혜공의 기행혜공 스님은 천진공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의 아들이었다. 어려서의 이름은 우조였다. 천진공이 일찍이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때 우조의 나이 일곱이었다. 우조는 어머니에게 공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라 말하고 공의 침실로 찾아가 저절로 병이 낫게 했다. 우조가 커서 공의 매를 길렀는데 공의 뜻에 꼭 들어맞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공은 우조가 성인임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지극한 성인이 우리 집에 맡겨진 것을 알지 못하고 헛말과 비례로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구나. 그 죄를 어찌 씻겠는가? 이후로는 인도자가 되어 저를 이끌어 주소서.”이 말을 한 후 내려와 절을 했다. 이후 우조의 신령스런 이적이 드러나면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공이라고 지었다. 혜공은 작은 절에 머무르며 미친 듯이 크게 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그래서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거처한 절도 그런 까닭에 부개사라 했다. 이는 삼태기의 신라 말이다. 또 절의 우물 가운데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기도 했다. 나올 때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구쳐 나왔기 때문에 절의 승려들이 이를 보고 나올 것이라는 신호로 알았다. 혜공은 그렇게 우물 속에서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 늘그막에는 항사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때 원효가 여러 경소를 찬술하면서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것을 묻곤 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용변을 봤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라고 외쳤다. 이로 인해 오어사(吾魚寺)라 이름 지었다. 또 하루는 새끼줄을 꼬아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 그리고 남문의 회랑 둘레를 묶었다. 강사에게 이 새끼줄을 3일 뒤에 거둬라 일렀다. 강사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따라 했다. 드디어 3일이 지나 선덕여왕의 가마가 절 안으로 들어오자 지귀가 불을 질러 그 탑을 태우는데 오직 새끼줄로 묶어둔 곳만은 화를 면했다. 혜공의 신령스런 자취가 자못 많았다. 마지막에는 좌선하는 자세 그대로 공중에 떠서 입적을 알렸다. 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혜공 스님이 주석했던 오어사 대웅전에는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전하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다. 주존불인 석가불과 아미타불, 약사불이 협시하고 있다. 석가불 대좌에 1765년 조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98호로 지정돼 있다. ◆혜공의 도력혜공은 부궤화상이라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삼태기를 짊어지고 시장바닥이든 야산이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가 아무 곳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혜공은 이미 아무렇게 행동해도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자연의 힘을 빌려 병을 치료하는 수준에 이르러 가끔 기인의 이적을 일으키곤 했지만 누구도 그 행적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고선사와 기림사에 머물며 대승불교론을 써내려가던 원효대사는 그의 행적과 높은 공부를 이해하고 가끔 선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불교의 진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원효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혜공의 기행을 부러워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깨우침에 적극 나서길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혜공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며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원효가 혜공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에 장난을 부렸다. 혜공이 잠든 틈에 그의 삼태기에 죽은 쥐 여러 마리를 넣어뒀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채소더미로 보였다. 일어난 혜공은 삼태기에 가득한 채소를 보더니 소여물을 삶는 농부의 솥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쥐는 이미 채소로 변한 채 소여물이 됐다. 다음 원효가 항사사로 옮겨가 있는 혜공을 찾아갔다. 이때 혜공이 “먼 길을 와서 배가 고플 텐데 물고기나 잡아먹자”고 권했다. 원효는 먼저 장날 쥐로 장난한 데 대한 복수라 생각하고 흔쾌히 “좋다”고 응했다. 둘은 어린아이들처럼 물가를 첨벙거리며 고기를 잡아 배부르게 구워 먹었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마주보며 물가에서 변을 봤다. 배설되는 것들은 모두 고기가 되어 상류로 힘차게 헤엄쳐갔다. 그중 하나가 오색찬란한 빛을 자랑하며 춤추듯 두 사람을 선회하다가 또한 상류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이를 보고 둘은 서로 “저 녀석은 내 고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여시오어(如是吾魚)’라는 말이다. 이 말로인해 혜공이 머물던 항사사의 이름이 오어사로 바꿔 불리게 됐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