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1443년(세종 25) 12월 친히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혹은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글자 28자를 만들었다. 이 훈민정음으로 조선 사람들의 말은 물론 중국어와 한자 그리고 범어, 몽골어, 여진어 등의 정음과 변음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의 모든 말소리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은 ‘천(·), 지(ㅡ), 인(ㅣ)’ 세 가지 변별적 획으로 거의 무한한 음소문자로 조합해서 기록할 수 있는 ‘음양 이원론’에 바탕을 과학적인 문자이다. 이 훈민정음 곧 한글의 음소문자의 획을 벡터(0.1)로 전환한 알고리즘으로 이용하면 디지털 인류의 소통문자로 사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형언어모델(LLM)을 한글의 ‘ㅡ(·)=0, ㅣ=1’ 벡터로 치환한 무한한 데이터를 갈무리할 수 있는 AI시대에 도래한 것이다. 디지털 기반에 이 두 가지 벡터로 조합하여 자연언어처리에 기반으로 삼으면 새로운 기술로 진화시킬 수 있는 ‘한글의 세계화’라는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세종은 훈민정음 28자와 그 구성원리를 창제한 것을 토대로 하여 1446년(세종 28) 9월 집현전 학자 8명과 함께 성리학의 성운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와 그 운용 방법을 해설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냈다.집현전 학사 8분 가운데 대구 달성 하빈 육신사 사당에 모신 박팽년 선생이 안평대군 계열의 신진학자로서 한글 창제와 한글 보급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경북 안동과 상주에서 바로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었고 또 세조대에는 안동 광흥사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월인석보” 등의 보급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 보급도 이루어졌다.또 유성룡의 셋째 아들인 유진(1582~1635)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여 쓴 “임진록”(1612년)은 옥중 체험을 한글로 쓴 일기이다. 안동 여성들 중심으로 한글체 일기와 기행·내방가사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글을 사용하여 남평조씨가 쓴 “병자일기”(1636~1640년)와 박조수의 “남정일기”(1778년) 등의 일기체 글쓰기의 진원지가 바로 안동이다.특히 “난리가”는 1728년 3월 17일부터 4월 19일까지 30일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기록한 하급계급에 속한 이가 쓴 한글일기이다. 영천의 박인로의 ‘누항사’를 비롯한 뛰어난 시조와 가사 작품들을 남겼다. 1607년 상주 정경세(1563~1633)의 역서가 잡책으로 활용된 기록과 1607년 대구부사 시절에 쓴 날씨 기록, 그리고 송준길에게 보낸 다량의 한글 편지 등과 함께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등 영남의 거유들도 한글로 쓴 작품들을 다량으로 남기고 있다.대구와 경북은 특히 여성 글쓰기의 진원지였다. 18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이어진 내방가사와 한글 제문이 가장 활발하게 지어진 지역이다. 아울러 여성 교육을 위한 “여사서”, “여훈”, “규범” 등의 여성교육서들이 이 지역에서 다량 유통됨으로써 한글보급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한글이 관아의 소송문서로도 사용되었는데 경북 울진 해월당 종가에서 발견된 효종 2년(1651)에 쓴 ‘완산 이씨의 유언문’과 효종 7년(1656)에 쓴 ‘소지’가 전해 온다.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글 분재기(대구 둔산동 백불고택)도 한글 확산 과정을 고증하는 매우 귀중한 근거 자료이다.지난 4일 경상북도는 제577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이철우 경상북도지사와 외국인들이 함께 하는 토크행사를 연데 이어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 목록 등재기념으로 영남의 내방가사 작품을 대구경북 한글 서예작가들이 두루마리에 재현하는 전시회도 열었다. 한글고전 전통의 현재적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현대 서예와 접목한 새로운 한글글꼴 개발과 세계에 우리전통 문화와 예술을 홍보할 새로운 K컬쳐의 모형을 선보인 셈이다.한글이 첨단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여 대형언어처리모델(LLM)로 그리고 대형언어정보를 이용한 문화예술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기반을 우리가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미래 산업을 대구경북이 선도해야 할 기회이다.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