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멀쩡하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와 불쌍하신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오,/(…)/우리의 생각이 슬픔의 영역 바깥에 머문다는 것은 감미로운 일이니까요./(…)/하지만 해서 안 좋은 일을 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그대들은 제발 되도록 빨리 나를 나라 밖 어딘가에 숨기든지, 죽이든지, 아니면 바다에 던져버리시오. 그곳이라면 내가 다시는 그대들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자, 가까이 다가와 비참한 이 사람을 붙들어주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 들으시오.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소포클레스 비극 전집」(2008, 숲)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도시 테베의 3대 왕 라이오스의 아들이다. 라이오스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이유로, 이 아들을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키타이론의 산속에 버린다. 아이는 코린토스의 한 목동에게 건네졌고, 목동은 다시 아이를 코린토스의 왕에게 바친다. 왕은 아이를 양자로 삼았는데, 발이 부어 있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Oedipus: 부은 발)'라고 이름 지었다.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라난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피하려 방랑 중 사소한 시비가 붙어 노인을 죽이게 되는데, 이 노인이 바로 친아버지인 라이오스다. 이후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친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낳았다. 이로써 신탁은 완벽히 실현된다. 인용한 장면은 이 모든 걸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속죄의 길을 떠나기 전의 장면이다. 그가 자기 눈을 찌른 건 그의 말처럼 “눈을 통해 보게 되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이지만, 이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눈’을 멀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만천하에 고백하는 행위이기도 하다.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6장에서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라고 말한다, 그 유명한 ‘카타르시스’가 나오는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더 이상 카타르시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의 의견은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나뉜다. 누군가의 까닭 모를 고통에 가슴 아파 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자의 견해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승승장구하거나 행복에 겨운 모습을 조금의 질투심도 없이 바라보던 사람에게 태산이 무너지는듯한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연민과 공포를 느낀다. 이는 운명 앞에 선 인간의 절대적 무력함과 연약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다. 오이디푸스는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노라 절규한다. 위로받기를 거부하는 참혹한 슬픔이다. 신상조(문학평론가)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