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지전 경남대교수, 고운학 연구소 연구원
15년도 더 전의 일이다. 테니스에 많이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업 후 테니스장으로 바로 가려고 갈아입기 쉽거나 티가 덜 나는 운동복만 줄기차게 입었던 시절이었다. 정신이 온통 테니스에 쏠려 있었고 수업 후엔 늘 테니스장으로 달려가서인지 승진과 직위 변경을 꿈꾸던 나를 위한 맞춤 공고가 났음에도 나는 까맣게 몰랐다. 뼈아픈 아쉬움이 되었다. 그렇게 테니스에 미친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고 그 운동이 내게 씁쓸함만 준 것은 아니었다. 남들이 운동을 관둘 40대 후반에 시작했으니 고수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시간에 운동하는 여회원 모임에는 입회도 어려워서 그저 불규칙하게 구장에 나가 레슨을 받고 나를 끼워줄 게임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마음과 의욕만 가득했지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런데도 눈감고 누우면 천정은 온통 테니스장이 되고 샤라포바가 된 내가 소리를 지르며 발리와 스매싱을 하기도 했다.
방학이면 아침부터 구장에 나가 레슨을 받은 후 잘 오지 않는 게임 차례를 기다리며 벤치에서 본의 아니게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당시 3조2교대를 하던 소방관들과 부근의 직장인들, 방학을 맞은 선생님들, 그리고 은퇴한 교장 선생님이 아침 시간을 함께했다. 테니스의 고수들인 국화부 묵은둥이 여회원들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대접을 해주어서 하루에 두세 번 정도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코치인 구장주도 이전대학에서 근무했던 직원이라 나름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초보와 이방인에 대한 텃세가 심한 테니스장에서 그 정도면 대접인 것이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비슷한 레벨이나 고수를 원하지, 나와 같은 하수를 한편으로 삼아 맥없이 지는 경기는 재미도 신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감수하고 나를 게임에 넣어주는 것은 선심이요, 접대였다. 그것이 고마워서 더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려고 애를 썼다.
게임 후 동네 시장에서 3천 원짜리 보리밥과 사이다를 섞은 차가운 막걸리 한잔은 게임 복기의 열기를 식혀주기에 적당했고, 가끔 구장주의 봉고를 타고 가서 먹었던 미나리 삼겹살이나 스텐 대접 위로 산더미처럼 올라오는 잔치국수도 신천지였다.
테니스 구장 한쪽에서는 요리도 가능해서 ‘사모님’으로 불리는 구장주의 아내가 맛있는 점심도 자주 해주었다. 가끔은 나도 김치만두 전골을 준비했고, 전원주택을 궁금해하는 회원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갈 줄 알았는데 내가 경남으로 직장을 옮기며 한순간에 그 인연이 끝나버렸다.
당시 남편도 테니스 모임을 몇십 년째 하고 있어서 경산으로 이사를 온 뒤에도 월례회 참석을 위해 한 시간 운전을 불사했는데, 내가 테니스를 시작하고부터는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임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같이 여행도 다니고, 매년 부부동반으로 신년회, 여름휴가도 다니던 모임이라 다들 ‘형수님’의 테니스 참여를 환영해 주었다.
거의 코치급 선수들인 멤버들은 “형수님, 요기 네트 앞에 가만히 서 계시면 됩니다.” 하면서 민폐가 될 수 있는 나를 대접하여 번갈아 공을 쳐 주었다. 그렇게 또 10년이 흐르면서 서서히 모임도 늙고 사람도 늙어가더니 드디어는 구장 계약을 포기하고 이제는 저녁만 먹는 모임이 되고 말았다. 테니스에 목숨 걸던 멤버들도 이제 라켓을 손에서 내려놓고 말았다.
남편 후배 부부와 저녁을 먹으며 테니스 시간이 영원히 끝이 났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같이 즐겼던 테니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달콤쌉쌀했던 오랜 테니스 인연이 그렇게 막을 내리니 사라진 인연, 손 놓은 인연에 대한 쓸쓸함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