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청송사과축제 오는 30일부터 5일간

고대 그리스의 우화 속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황금사과를 낳는 청송군이 있다.청송사과는 오래전부터 청송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자리를 잡았다. 올해까지 7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받으며 이를 증명하고 있다.전국 최고의 청송사과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올해도 청송사과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제15회 청송사과축제는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청송읍 용전천변 현비암 일원에서 개최된다. 지난해까지 4일간 열리던 축제가 올해는 하루 늘어 5일간 열린다.올해 청송사과축제 주제는 ‘산소카페 청송군! 황금사과의 유혹’이다.주제가 담고 있는 뜻은 청송의 맑고 깨끗한 공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청정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황금사과라는 이미지를 더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다.동시에 타지역의 사과축제는 시각적인 고려 없이 빨간색을 표현하고 있다면 청송사과는 사과 중의 으뜸이라는 의미의 황금색으로 시각적 차별화의 의미도 담았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올해 사과축제는 청송사과의 브랜드 가치와 명성을 한 단계 드높이고 청송 황금사과를 전국 최고의 브랜드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청송사과 명성에 걸맞은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써 역대 최고의 축제가 되도록 다양하고 수준 높은 체험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또 “벌써 내년도 사과축제가 더욱 기대된다”며 “내년 초부터 발행되는 청송사랑화폐가 사과축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사과축제를 통한 지역 홍보와 소득증대청송군은 청송사과를 소재로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전시, 판매, 관람 위주의 축제가 아닌 모든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참여형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다른 지역 사과축제와는 확연한 차별성을 추구한다.청송사과축제는 청송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전천변의 현비암 일대 친수공원에서 주민참여형 축제로 열린다. 축제 이후에도 군민들의 여가선용 공간으로 활용되고 지역의 야간 대표 경관지가 될 수 있도록 축제장을 조성한다.이와 연계해 체류형 관광 유도로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을 늘려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방침이다.특히 청송의 역사와 문화를 축제를 통해 알리고 대한민국 대표 사과를 생산하는 청송의 청정자연과 재배환경 등도 홍보하는 등 생산자와 소비자 간 공감의 장도 만든다.청송군은 이번 사과축제를 통해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청송사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아울러 산소카페 청송군 및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주왕산국립공원 등 최고의 청정 관광도시임을 더욱 부각시킨다는 계획이다.◆주민과 관광객 체험·참여 프로그램 확대올해 청송사과축제는 기간도 늘리고 주민과 관광객 참여 체험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한편 도시경관 사업과 연계해 축제장 주변 경관에 빛을 더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밤이 있는 축제장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축제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과나무 4그루를 비롯해 역사를 바꾼 사과이야기 테마 조형물, 학사모·하트·마차·백설공주 등 사과조형물을 설치해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또 사과거리(apple street)를 조성하고, 청송교와 강변도로 테크길 경관 조명 설치, 축제장 주변 건물 조명, 용전천 유등 설치 등으로 화려하고 오색찬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주민주도형 프로그램인 ‘청송사과 꽃 줄 엮기 경연대회’를 비롯해 만류인력-황금사과를 찾아라, 꿀 잼 사과난타, 도전 사과선별 로또, 나만의 사과 컵 만들기, 사과잼 만들기 체험 등 다양한 체험행사도 마련한다.전시행사도 풍성하다. 청송사과 홍보관과 청송사과와 특산물 판매장이 운영된다. 사과요리 전시 체험, 사과올림픽 3종, 사과 깜짝 경매, 사과로 만든 화장품 판매, 푸드트럭, 청송사과 한우 시식과 판매장 등도 마련된다.문화가 있는 7080콘서트, 축하공연 등 각종 공연행사에는 인기가수들이 대거 참가한다.2019 황금사과배 전국 여자프로씨름대회를 비롯해 청송사과와 함께하는 어르신 가요제, 낙동정맥 등반대회, 힐링콘서트 오락가락 가요제, 2019 소믈리에와 경북 전통주의 만남, 어울림 캠핑축제 등 사과축제와 연계한 행사도 다양하게 열린다.◆청송황금사과 ‘황금진’ 브랜드로 재탄생청송군은 최근 사과축제를 앞두고 청송황금사과(시나노골드) 브랜드인 ‘황금진’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개발했다.황금색 품종인 시나노골드의 브랜드를 선점하기 위한 청송군의 야심 찬 계획이다.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청송사과의 명예를 이어갈 황금사과의 출시를 상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청송사과만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황금사과 시장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간다는 전략이다.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특산품이 되기까지는 가장 먼저 최고의 품질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탁월한 자연조건을 갖춰야 한다.청송군은 해발 250m 이상의 산간지형이자 고지형 분지다. 생육기간 중 일교차가 13.4℃로 커 사과재배의 최적지인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하는 날씨여건이 맛있는 사과를 탄생시키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이와 함께 청송은 타지역에 비해 고목의 사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을 뿐만 아니라 현시대에 맞는 품종을 계속적으로 갱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또 관수와 지주시설 등에 대한 투자도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품질 좋은 퇴비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사과재배 기술까지 월등히 향상돼 명품 청송사과라는 최고의 과일을 만들어 내고 있다.윤경희 군수는 “지금까지 축적해 놓은 사과재배 기술을 남북농업교류협력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이전해 청송사과원을 조성할 계획이다”며 “그렇게 되면 ‘통일사과’, ‘평화사과’라는 이미지로 자연히 브랜드 가치의 상승과 함께 소비확대에 따른 소득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임경성 기자 ds5ykc@idaegu.com

삼국유사 기행(33) 원성대왕 (1) 즉위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이다. 그는 내물왕 12대손으로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6대 혜공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김양상을 선덕왕에 즉위하게 하고 김경신은 스스로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잡고는 본격적인 권력의 구도를 재편하기 시작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어디에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혜공왕을 살해하고, 김양상을 또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경신의 왕권에 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결국 원성왕 즉위 이후 신라는 왕좌를 두고 죽이고 죽는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천 년 사직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삼국유사: 원성대왕이찬 김주완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때 원성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자리에 있었다. 왕이 하루는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깨어나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다. “두건을 벗은 것은 직위를 잃는 조짐이고, 십이현금을 낀 것은 형틀을 차는 징조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히는 징조이고요.”왕은 이를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이 은밀히 왕을 뵙고자 하였으나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다시 통지가 오기를 “한 번만 뵙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응낙하였다.“공께서는 무슨 일로 그다지 꺼리십니까?”왕은 꿈을 점친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고 “이는 곧 매우 좋은 꿈입니다. 만약 공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께 맞는 해몽을 해 드리지요.”이에 왕은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 오지 못하게 한 다음 해몽을 부탁했다.“두건을 벗은 것은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 위에 없음이요,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십이현금을 낀 것은 열두 손대까지 이어질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움입니다.”“위로 주원이 있는데 어찌 윗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 하자 “청컨대 은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지내면 됩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랐다.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죽었다. 사람들이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와 즉위하였다. 주원의 부하들이 모두 복종을 하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바로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고 김씨인데 대개 좋은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주원은 명주로 물러가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어 그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내려 주었다. 왕의 후손이 다섯인데 혜충태자, 헌평태자, 예영잡간, 대룡부인, 소룡부인 등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경신의 조용한 쿠데타김경신은 전략가이면서 행동가이지만 직접 행하는 것보다 심복이나 주변 인물을 시켜서 뜻을 이루어가는 지시형 스타일이다.김지정의 난을 유발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도 김경신의 전략에 의한 작품이다. 이 또한 김경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철저한 계획에 따른 절차였다.김양상이 선덕왕에 즉위하면서 상대등의 자리를 꿰어찬 김경신은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경신은 선덕왕과 대신들이 자신보다 위의 상재로 있는 김주원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있을 때도 노골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장기적인 충실한 계획이 있었고 그는 또 그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김경신은 상대등으로써 입지를 굳혀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인사와 재정, 공부와 형부, 예부까지 대신들을 모두 자신의 수족으로 채웠다. 그 시간이 5년이나 걸렸지만 김경신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선덕왕 재위 6년에 이른 어느 여름 태풍이 동해안을 휩쓸고 서라벌에 상륙할 때였다. 김경신은 조용하게 병부의 대신을 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태풍이 서라벌을 지나갈 무렵 알천이 범람하는 때가 거사일이요. 만약에 대비해 병사들을 배치하고, 대신들에는 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함구하시오”라고 조용히 밀지를 내렸다.김경신은 전략가답게 김주원의 집이 알천을 건너 북쪽에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권을 손에 넣는 방법을 선택했다. 알천이 범람하면 북쪽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길은 차단된다. 토함산 고개를 넘어 명활산성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지만 지세가 험하고, 우기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목 때문에 군사들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알천은 매년 여름 적어도 두세 번은 범람했다.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면 궁궐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북쪽의 집을 고집했던 데는 뚜렷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선조들의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것과 복잡한 업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김경신은 그 두 가지를 아주 적절하고도 교묘하게 이용했다. 상재의 위치에 있는 김주원에게 잡다한 민원성 업무는 모조리 넘겼다. 골치 아프게 내전에서 일하도록 주원을 묶어두고, 대내외적인 행사는 상대등인 김경신 자신이 처리하면서 실권을 휘둘렀다. “백성의 아픔을 헤아리는 중요한 일은 상재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원을 인정해주는 척하며 철저하게 내전에 고립시켜 각 부서의 실권자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다.내성적인 김주원의 성격을 파악한 김경신의 약삭빠른 처세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주도면밀해 김주원도 무어라 항변할 길도 없었다.선덕왕 6년 785년 음력 칠월 그믐께 긴 장마가 기승을 부리며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돌변해 알천이 크게 범람한 깊은 밤. 비수를 품은 김경신이 왕을 치료하는 의사를 대동하고 왕의 침소를 찾았다. 내실 주변에는 살수의 눈을 번뜩이는 김경신의 병사들이 곳곳에 몸을 숨기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불편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만 겨우 일으켜 앉은 선덕왕은 주치의가 들고 온 약사발을 청하여 받아들었다. 왕은 김경신을 지긋이 바라보며 “내가 진작 대업을 경에게 넘겨야 하는데 눈 어두운 대신들의 중언부언에 밀려 늦었소. 백성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라오”라며 부탁하고는 천천히 약사발을 기울였다. 선덕왕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과 김경신이 추진하는 전략을 인지하고, 그의 뜻을 암묵적으로 따르기로 벌써 작정하고 있었다. 선덕왕은 이제나저제나 하던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왕표를 받아든 김경신은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오. 아무도 피 흘리지 않고, 백성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겠소”라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선왕을 반듯하게 누이고는 천천히 돌아서 성큼성큼 왕좌에 올랐다. 그가 신라 제38대 원성왕으로 52대 효공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본격적인 신라 멸망으로 가는 피의 시대 개막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미래 주거문화의 트렌드 ‘타운하우스’…아파트+단독주택 두가지 장점을 하나로 새로운 주거공간 탄생

즐거운 곳에서 아무리 와보라 손짓한 들 결국엔 내 집이 최고다. ‘회귀의 본능’일까. 어찌됐건 그 이면엔 ‘하우스 푸어’의 극단적 서글픔이 도사린다지만, 그 역시도 내가 머물고 생활하며 은밀(?)해 마지않은 나만의 ‘사적 공간’을 충족하는데 집이란 그저 꿈같지만 반드시 이루고픈 목표라는 방증이다.‘초가삼간’이라도 몸 뉘일 내 집이라면 ‘안빈낙도’ 부럽지 않다지만, 기왕이면 다홍색 치마가 예뻐 보이듯 ‘3대 본능’으로의 주거를 넘어, 여흥, 문화 등의 엔터테이먼트적 명분에다 보안, 인공지능(AI), 네트워트 시스템 등의 실리를 한층 더한 이른바 ‘스마트 하우스’가 대세다.1970~1980년대 ‘새마을 축조를 위한 경제 개발’이 국가의 원년 목표였던 그 때. 일률적으로 발발하는 ‘도시화 작업’의 붐이 불어 닥치며 소위 ‘강남권’이라는 서민들에겐 시리기 만한 그들만의 범주가 제정(?)됐다. 이와 맞물려 ‘닭장’이라는 시쳇말로 치부됐던 당시의 ‘아파트’가 불과 몇 년 새 주거문화의 확실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아파트의 속성은 모호하다. 공·사가 상존한다는 것인데, ‘사생활 보호’를 주거선택의 첫째 사양으로 꼽는 이들이 아이러니하게 수십, 수백, 더 나아가 수천 세대가 한 건물에 밀집해 있는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좋게 표현하면 ‘신박’할 노릇이다.하지만 되돌려 생각해보면 (아파트를 선택하는 인구 중) 사생활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보안’과 각종 ‘관리’의 영역이 마치 ‘아픈 손가락’ 인양 눈에 밟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 아파트란 ‘최선’이 아닌 ‘차선’의 고집일 듯.단독주택의 주요 맹점이 바로 저 두 사양의 부족분인데, 이를 일정 부분 타개하고자 대두되는 주거형태가 바로 ‘타운하우스’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미국 내 부촌으로 일컬어지는 ‘베버리 힐즈’와 유사한 툴이라 보는 것이 이해하기 좋을 듯하다.타운하우스의 정의는 여러 단독주택을 하나의 단지화로 조성한 주거지다. 총체적으로는 ‘공동주택’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기존 아파트와 달리 층고가 높지 않고(통상 2~3층) 가구 수도 많지 않아(통상 10~50가구) 사생활 보호와 아울러 어찌됐건 단지로 구성, 아파트와 같은 관리와 보안의 영역까지 일정 수준의 커버가 가능하다.타운하우스는 비싸다. 그도 그럴 것이 단독주택과 아파트 개별의 장점을 비록 완벽할 순 없겠으나 고루 섭렵해야 하다 보니 일반 아파트나 단독주택 대비 높은 시세를 형성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이번 연재의 목표는 서울 및 수도권에 비해 생소해마지않는 타운하우스라는 개념이 우리 고장에서도 개별의 정립을 시도함과 동시, 각기의 방식으로 또 다른 용틀임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에 있다.이와 더불어 지역 주거문화의 트렌드 개척과 실사례를 발굴, 시민의 입장으로 주거의 취사선택 간, 운신의 폭을 조금 더 넓히기 위한 일련의 작업임을 밝혀본다. ◆타운하우스 역사는 영국타운하우스의 시작은 ‘영국’이다. 오늘날 타운하우스가 ‘럭셔리 하우스’로 오해(?)받는 것도 영국 타운하우스의 처음과 맥을 같이한다. 19세기 말 영국의 일부 정치인들과 거부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광활한 영토를 도심으로 옮겨가길 원했다.실제 시골에 있는 자신들의 땅을 도시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할 터다. 다만 이들은 영국의 시골마을인 ‘롱본’보단 ‘템스강’이 유유히 흐르는 런던에서 살길 원했고, 이로 말미암아 시골 부지를 (일정부분) 처분한 뒤 런던 등지에 집을 짓고 생활했다.하지만 시가지는 낮고, 템스강이 수시로 하도를 변경하며 지반마저 약해 넓은 주택 건설이 용이치 않은 런던의 지형에 기인, 이 같은 연유로 제한된 공간에 이들의 명성(?)과는 다소 이질적인 높고 협소한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물론 이곳이 아무리 협소할지 언 정 런던에 집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유력인사라는 일종의 시그니처를 남긴다. 어찌됐건 나름 있는(?) 사람들이 모여 집을 짓고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해가던 에어리어가 ‘타운하우스’로 불렸다는 것이 유력한 정설이다. 말 그대로 유력한 사람들이 유력을 한껏 과시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했다는 것이다.이 같은 그들만의 하우스가 ‘단지’의 개념으로 변화를 꾀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미국으로부터 비롯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은 국제 경제에서의 주축을 담당하는 이른바 ‘국제주의’를 표방하며 ‘세계의 경찰’ 임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호황기와 맞물려 미국 내 소득 불평등은 해소되고 여기에 발맞춰 중산 계층이 물밀 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이 시기 영국의 타운하우스 개념이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최소한 미국 내에서 만큼은 럭셔리 하우스가 아닌 중산층이 개별의 집을 지어 공공의 단지를 이룬 형태의, 다시 말해 오늘날 개인 주택이긴 하나 공공의 커뮤니티를 공유하는 ‘단지형 타운하우스’로 정립되기 시작한다.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타운하우스는 과연 어디일까. 대한민국 수도에 위치한 ‘G 빌라’가 바로 그것인데, 1983년 건립된 이 빌라는 ‘조적조’의 건축형태를 띄며, 지금까지도 타운하우스의 고전 교과서로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조적조란 건축 양식 중 하나를 일컫는 말로, 돌, 벽돌,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전통적 건축 구조를 의미한다. ◆대구의 타운하우스는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부로 국한됐던 타운하우스가 지역 내에서도 개별의 방식으로 군웅할거를 준비 중에 있다. 아파트의 편의성과 보안, 각종 관리에다 단독주택의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 개별의 니즈 충족 기능, 여기에 자연과 도심을 일거에 취할 수 있는 신개념의 타운하우스가 지역에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물론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그 시세가 일반아파트의 몇 배가량을 상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의 요건에서 ‘주거의 안정화’가 최일선에 자리 잡은 이들에겐 분명 사치가 아닌 가치로 인식될 법도 하다.지난 5월 대구 수성구에 분양을 마친 타운하우스 ‘로제티움’은 ‘도심형 단독주택’으로의 캐치 프레이즈를 십분 살렸다는 평을 얻고 있다. 현재 지역 내 최상위 수준의 매매가를 기록 중인 이 타운하우스는 지하 2층~지상 3층 규모의 18세대 단지로 구성, 인공지능 보안시스템을 도입함에 따라 단독주택의 맹점으로 지적되던 보안의 영역을 일정 부분 희석시켰다는 것이 주요 장점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도심형과 숲 세권을 동시에 잡고자 하는 입지요건도 꽤나 고무적이다. 전통적 명문인 ‘수성 학군’ 내 속해 있는 동시, IC와 상업시설, 문화 공간 등이 인접해 있어 생활 전반으로의 불편함을 최소화했다.여기에 이곳 타운하우스의 입지 자체가 언덕, 다시 말해 산을 끼고 있는 지형인 터라 비록 시끄럽지만 편한 도심 속에 조금은 불편하지만 공기 좋은 자연의 장점들만이 오버랩됐다는 나름의 호평 또한 받고 있다. (타운하우스로는) 이례적인 3층 이상의 높이와 동·남향으로 위치한 하우스, 지역에선 쉬 나오기 힘들 이른바 ‘최적에 가까운 입지요소’는 덤이다. ◆더 저렴하고 아늑하게타운하우스에 투영된 각자의 기대가 있을 터. 비록 비싼 매매가이긴 하나, 아파트 대비 실제 사용가능한 전용면적이 넓어 그에 따른 가치 또한 시나브로 상승 중이다. 전용면적이란 집 내부의 방이나 거실, 주방, 화장실 등을 모두 포함시킨 넓이로, 엘리베이터나 주차장 등의 공용면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바닥의 면적을 뜻한다.또 아파트계(?)의 클라이맥스로 일컬어지던 ‘주상복합’이 시들해지고, 각종 관리 및 사후 비용에 부담을 느낀 중년층 소비자들이 타운하우스라는 (주상복합 대비)조금 더 저렴하고, 조금은 더 아늑한 메리트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라는 시각이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넓으며 높다.이와 더불어 각종 편의기능이 응축된 아파트를 쉬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또 일반 단독주택의 맹점이 눈에 아른거려 섣부른 변화를 꾀하지 못하는 소비자들로 해금 공공의 효율과 편의는 제반에 두되, 단독이라는 개인적 요소를 충족시킬 대안으로 타운하우스는 그 위용을 한껏 뽐내가고 있다.‘혁신’의 처음은 ‘우려’, 혹은 ‘무모함’으로 출발한다. 어느 정도 수요가 보장된 대단지 아파트를 차치하고 타운하우스를 선택, 그것도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의 타운하우스 사업이란, 굳이 험로를 찾아다니는 개척자의 마인드가 아니라면 쉬 시도조차도 여의치 않을 터다.하지만 그 같은 우려와 무모함이 켜켜이 쌓여 긍정의 방향으로 틔울 수 있다면 혁신의 마지막은 ‘기대’에 기댄 ‘또 다른 희망’으로 갈무리됨을 믿어본다. 헐은 저녁 한 끼에 감사할 수 있는 가을 초입이다. 열정을 쏟아 일하는 당신, 오늘도 수고 많았으며 이제 즐거운 우리 모두의 집으로 함께 돌아가리라.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원형탈모 환자 60%, 20세 이전에 증상 나타나

원형탈모증의 평생 발병률은 1.7% 정도로 건선의 발생률과 비슷하다.환자의 60%는 보통 20세 이전에 첫 증상이 나타난다. 20%는 40세 이후에 12%는 50세가 지나서 생긴다.질병의 범위나 탈모형태에 근거해 원형탈모증을 분류할 수 있다. 원형탈모증은 보통 숱이 적거나 모발이 없는 넓은 부위로 변화하는 국소적 부분 탈모를 총칭한다. 이런 종류의 탈모는 보통 두피에서 발생하지만 털이 있는 어떤 부위도 영향 받을 수 있다.전두탈모증에서는 두피에 있는 모든 모발이 빠지며 두피표면에 전체적으로 윤이 나게 된다.전신탈모증은 속눈썹, 눈썹, 겨드랑이 털, 음모를 포함한 머리와 몸의 모든 털이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전신탈모증의 실질적 문제는 △눈썹이 없어 눈에 땀이 들어간다 △속눈썹이 없어 먼지와 섬광으로부터 거의 보호가 안 된다 △코털이 없어 콧구멍이나 부비동으로 대기 중의 이 물질이 들어가는 것 등이다.원형탈모증은 탈모의 형태에 의해 제한형과 망상형 등으로 분류한다.먼저 제한형은 국소 탈모만을 의미한다. 망상형은 모발이 있는 부위에 모발이 없는 불규칙적 부위가 산재된 그물 형태의 탈모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또 사행성두부탈모증과 범형원형탈모증도 있다.사행성두부탈모증은 뱀이라는 그리스 어원에서 유래됐다. 두피의 단면에 걸쳐 이슬람모자모양의 터번을 형성하는 뱀처럼 두피 말단을 덮고 있는 탈모유형이다. 이 탈모 유형은 좀 더 치료가 어려우며 이 두피 부위는 치료가 더 느리다.범형원형탈모증은 명확한 부위 없이 전체 두피에 영향을 주는 불완전한 탈모의 형태를 뜻한다. 이 유형은 진단하기 어려우며 조직검사가 필요할 수 있다. 모든 원형탈모증의 진단에 도움이 되기 위해 전문의는 두피 쪽으로 점점 가늘어지는(좁아지는) 끊어진 짧은 모발, 즉 감탄부호모발을 찾는다.원형탈모증이 있는 대부분 사람은 어떠한 의학적 증상도 나타나지 않지만 간혹 소수에게는 나타나기도 한다.이러한 다른 의학적 증상과의 관련성에 대한 정확한 본질은 명백하지 않지만 관련성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로 고려돼야 한다.원형탈모증과 다른 질병 간에 연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특정 질병이 다른 질병을 유발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도움말=민복기 올포스킨피부과 대표원장(대구시의사회부회장, 대구·경북피부과의사회장)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사마귀…‘티눈’과 헷갈릴 수도…손발 뿐 아니라 성기에도 발생 가능

-대구아름다운피부과 박영도 원장 “원장님. 아들 발에 티눈이 생겼어요!”자세히 들여다보니 티눈이 아니라 사마귀 병변이다.사마귀는 사람 유두종 바이러스(HPV) 감염으로 피부 및 점막에 양성증식이 발생하는 질환이다.사마귀는 노출부위인 손과 발, 다리와 얼굴에 주로 발생하며 성접촉을 통해 성기에도 발생할 수 있다.사마귀는 임상양상과 발생 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첫 번째로 보통사마귀는 사마귀중 가장 흔한 것으로 표면이 거칠고 융기돼 있으며, 다양한 크기의 구진이 손등이나 손톱 주위뿐만 아니라 얼굴, 입술, 혀, 귀, 코, 후두에도 생긴다.주로 5세에서 20세 사이에 잘생기고 15% 정도의 환자는 35세 이후에 발생한다. 성인이 되면 발생 빈도도 낮아지고 병변의 수도 2~3개 정도로 줄어든다.두 번째 편평사마귀는 표면이 일정하게 편평하고 정상피부보다 조금 융기돼 있으며 직경은 2~4㎜ 정도 된다. 각각의 병변 모양은 대체로 둥글지만 서로 융합해 불규칙하게 합쳐지는 경우가 많다.편평사마귀는 주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잘 발생한다. 이마와 턱, 코, 입 주위와 손등에 잘 발생하며 긁은 자국을 따라 자가 접종돼 일직선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종류의 HPV 감염 중에서 자연 치유되는 빈도가 가장 높다.세 번째로 손발바닥 사마귀는 주로 HPV 1형에 의해서 발생한다. 특히 발바닥 사마귀는 체중에 의해 눌려서 피부 속으로 깊게 파고 들게 되고 걸을 때마다 통증이 심해서 환자들이 티눈으로 잘못 알고 있을 때가 많다.중요한 감별 포인트는 사마귀는 병변을 누를 때에 비해 잡을 때에 통증을 더 심하게 호소하고 표면의 각질층을 깎아내면 중심부에 혈전증이 있는 모세혈관계가 검은 점처럼 보인다는 점이 특징이다.또 신발이 닿는 부위나 체중이 실리는 부위와는 상관없이 생길 때가 있으며 여러 병변이 모여 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들을 잘 알고 살펴보면 비교적 쉽게 진단할 수 있다.네 번째로 성기사마귀는 가장 흔한 성인성 피부질환이다.남자의 음경포피로 덮여 있는 고랑과 요도구 및 항문주위부와 여자의 외음부, 자궁경부, 회음부 및 항문 등과 같이 불완전하게 각화된 부위에는 산딸기나 닭벼슬 모양의 뾰족콘딜로마가 발생한다.전염력이 강해 한 번의 성접촉으로 약 50%가 감염될 수 있으며 대개 성교 2~3개월 후에 피부병변이 나타난다.음경간과 같이 정상 각화를 하는 부위에는 표면이 편평한 구진상 성기사마귀가 주로 발생한다.이중 상피내암의 조직소견을 보이는 것을 보웬모양구진증이라고 한다.음문에 보웬모양구진증을 갖고 있는 여성이나 보웬모양구진증을 갖고 있는 남자의 여성 배우자는 자궁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철저한 검사 및 치료가 필요하다.눈으로 확인된 성기사마귀를 없앤 후에도 전염성이 없어졌다거나 HPV DNA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으므로 주의 깊게 경과 관찰해야 한다.사마귀는 미용상의 이유뿐만 아니라 발병 신체부위에 따라 걸을 때나 물건을 잡을 때 그리고 성생활에도 불편을 주기 때문에 제거하는 것이 좋다. 또한 사마귀는 자가 접종에 의해 병변이 퍼질 수 있고, 성기 사마귀의 경우 상처를 받아 출혈할 때 인체면역 결핍 바이러스가 전파될 수 있고 자궁경부에 HPV 감염 시 악성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사마귀의 치료 결과는 정상조직의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마귀 병변을 파괴하는가에 달려있다. 현재 사용되는 대부분의 사마귀 치료법은 완치율이 약 50% 정도이며 재발률은 평균 25~50%이다.사마귀가 의심되는 병변을 발견한다면 가까운 피부과를 내원해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5·끝)중부

경주 관광의 알짜배기는 대부분 중부지역에 몰려 있다. 위치적으로도 중부는 경주지역의 가운데로 읍·면 지역에 둘러싸인 동 지역이다. 중부, 황오, 성건, 황남, 월성, 용강, 황성, 동천동 등이다.경주를 다른 지역과 특징하는 산과 같은 고분군이 있다. 첨성대·계림·동궁과 월지·천 년 왕궁이 있던 월성, 황룡사와 분황사, 월정교 등의 신라 핵심 유적과 경주읍성, 교촌마을 등의 역사문화유적이 누적된 곳이다.[{IMG02}]또 황성공원을 비롯한 경주시민과 관광객들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문화유적과 체험행사를 365일 즐길 수 있는 역사문화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특별한 체험문화관광자원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있고, 경주문화원, 황리단길과 황룡사문화역사관 등의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1. 대릉원(사적 제512호)경주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 30여 기가 집중돼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천마도가 출토된 천마총, 황남동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 검이 발굴된 검총, 미추왕릉 등의 특별한 고분이 군락을 이루며 공원으로 조성돼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2. 첨성대천문관측과 관련한 건축물로 2중 기단 위에 30㎝ 높이의 돌 27단을 쌓아 올렸고, 꼭대기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사각형 돌을 짜 올렸다. 구조와 구성은 물론 돌 하나에도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인 점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이면서도 신비함이 가득하다. 첨성대 일대가 동부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사계절 꽃단지로 조성돼 경주의 관광 1번지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3. 계림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곳. 이 숲에서 닭 울음소리가 나서 가보니 나무에 황금 궤가 걸려 있었고,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신라건축 초기부터 있던 숲으로 2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숲이다. 오래된 고목들이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찬기파랑가 향가비가 세워져 있다.4. 월성과 월정교(사적 제16호)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으로 신라 천 년간 왕궁의 터전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 신월성이라고도 불린다.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얼음을 저장했던 석빙고가 남아 있고 한창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남천을 건너 남산으로 가는 다리, 경덕왕이 지었다는 월정교가 복원돼 야경이 특히 아름다워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5. 경주읍성신라시대 종말을 고하면서 왕건이 의도적으로 월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도시를 축조하면서 고려시대에 돌로 쌓아올린 성이다. 신라 천 년의 유적이 경주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고려시대 유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특별한 구역이다.최근 동쪽 성벽과 동쪽의 문루 향일문을 복원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경주시는 또 북쪽 성벽을 복원해 고려시대 문화유적으로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조선시대 흔적이 같이 혼재해 경주읍성 투어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어 인기다.6.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영토가 넓어지고, 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궁궐을 확장하는 개념으로 궁궐과 인위적인 연못을 조성했다.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나라의 경사를 맞아 축하연을 벌이거나 대신들의 중요회의,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공간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발굴에서 3만여 점의 유물이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에 단독 전시공간으로 월지관이 설립되었다.7. 교촌한옥마을교촌마을은 요석궁이 위치했던 곳으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교동최씨고택과 경주향교, 경주교동법주가 자리해 있는 교촌마을은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 부자 고택이 중심이 되는 마을로 각종 전통문화 체험이 운영되고, 다양한 민속문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8. 황룡사와 분황사황룡사는 신라 삼보 중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이 있었던 중요사찰이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오랜 발굴조사를 통해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입증됐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에는 발굴 유물과 함께 황룡사 9층 목탑 축소모형이 전시되어 있다.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에 창건돼 고승 원효와 자장이 주석했던 사찰로 경내에는 모전석탑과 호국용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을 담고 있는 석정 등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9. 봉황대와 황리단길봉황대는 경주 노동리 고분군에 속한다. 경주 평지에 산재하는 단독 원분 중 제일 거대한 무덤으로 분구의 높이는 22m, 지름이 82m이다. 발굴이 되지 않아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매주 금요일 뮤직스퀘어와 프리마켓 운영으로 명소가 되고 있다.봉황대에서 대릉원 돌담길을 지나 황남파출소로 이어지는 700여m 구간에 서울 경리단길을 본 따 이름 붙여진 핫플레이스로 경주여행의 일번지로 각광받고 있다. 커피숍, 레스토랑, 사진관, 기념품점, 벽화, 포토존 등 이색적인 볼거리, 즐길 거리가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10. 황성공원경주시 북쪽에 있는 공원으로 신라시대에는 사냥터 또는 화랑의 훈련장으로 추정된다. 공원 안에는 공설운동장, 충혼탑, 박목월 시비, 궁도장 호림정, 김유신 장군 동상 등의 다양한 시설과 운동시설, 산책로가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백일장, 시민체육대회, 궁도대회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경주시민들의 허브공간이다. *경주 중부: 중부, 황오, 성건, 황남, 월성, 용강, 황성, 동천동-중부동: 동부, 서부, 북부, 노동, 노서동-황오동: 성동, 황오동-성건동: 성건, 석장동-황남동: 황남, 사정, 탑동, 배동, 율동-월성동: 인왕, 교동, 동방, 도지, 남산, 구황, 보문, 배반동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 9층 목탑 축소 모형.*경주 동부사적지 메타쉐콰이아 야경 *경주 교촌마을 경주향교 체험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혜공왕…정사 외면하고 백성을 등진 임금 분노의 파바람 천지가 진동하네

신라 제36대 혜공왕은 경덕왕이 하늘에 빌어 늦게 낳은 아들이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각간의 난을 비롯 많은 반란이 있었다.혜공왕 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났던 것은 측근과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정치적인 목적에서의 싸움과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오락에 빠져 이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반란이 주를 이루었다.혜공왕은 결국 김지정의 난이 발생해 김양상과 김경신이 진압하는 과정에 살해되는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혜공왕 때 처음으로 5묘를 지정해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5묘는 김씨의 시조 미추왕,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문무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이다.혜공왕은 경덕왕에 이어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었는데 1460년 영묘사로 옮겼다가 홍수로 떠내려가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관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을 새로 지어 지금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삼국유사: 혜공왕대력 초년(766)이었다. 강주의 관청 건물 본관의 동쪽 땅이 점점 함몰하더니 연못이 되었다.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인데 어디선가 잉어 대여섯 마리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연못 또한 따라서 커졌다.정미년(767)에 이르러 천구성이 동쪽 누각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꼬리는 3척쯤 되며 색깔은 타는 불 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또 이해 김포현에서는 논 5경 가운데 모든 쌀알이 이삭이 되었다. 이해 7월 북궁의 뜨락에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하나가 떨어졌는데 세별이 모두 땅속에 파묻혔다.이보다 앞서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가닥 연꽃이 피어났고, 또 봉성사 밭 가운데서 연꽃이 피었다.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공작새가 수없이 모여들었다.안국병법의 하권에 따르자면 천하에 군사가 큰 난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때 대사면을 내리고 살펴보며 조심하였다.7월3일 대공 각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왕도와 5도의 주군 모두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워 큰 난이 일었다. 대공 각간의 집은 없어지고, 그 집의 보물과 비단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신성과 장창에 불이 나 타버렸다. 역모를 저지른 무리의 보물과 곡식은 사량과 모량 등 마을 가운데 있었는데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난은 석 달 남짓 되어 그쳤다. 상급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고, 죽임을 당한 자도 무수히 많았다. 표훈대사의 말에 나라가 위태롭다 함이 이것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왕의 죽음혜공왕은 어려서부터 후궁과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심성 또한 점점 여성스러움에 길들여졌다. 왕위에 올라 있었지만 어머니의 섭정으로 정사가 진행되자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경향을 보였다. 혜공왕이 성인기에 접어들었어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 등의 대신들이 정치를 주물렀다.김양상 등의 대신들이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그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실세에서 밀려난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 김사인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기를 들면서 대신들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혜공왕 초기에는 김사공과 김사인 등의 대신들이 상대등과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양상이 상대등에 오르는 등으로 세력의 균형이 바뀌면서 대립의 강도가 커졌다.김사인 계열의 김대공과 대렴 형제가 각간들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공 형제는 지방의 귀족까지 상당히 많은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궁궐 내부까지 진입하지는 못했다. 중앙세력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96명의 각간들이 서로 패가름을 하여 전쟁을 치른 결과 대공 형제는 실패해 죽음을 맞았다.대신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혜공왕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혜공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음색에 빠져들며 정사에는 소홀하고, 대를 이을 후계자 또한 마땅치 않았다. 이러한 정황들은 무열왕의 12대손인 김경신이 최고 권력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특히 혜공왕이 여색을 가까이하는 한편 대신들의 자제 가운데 인물이 뛰어난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밤을 보내는 등으로 대신들의 공적으로 떠올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과 대신들의 이합집산은 김경신이 자신의 자리를 굳혀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김경신은 내물왕의 직계인 김양상이 상대등의 자리에 앉자 적극 동조자가 되어 김주원과 함께 내물왕계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했다. 경신은 김양상을 앞세워 병권을 거머쥐고, 인사·재정·공부에 이어 형부까지 전권을 수중에 집어넣었다.김경신은 반골기질이 뚜렷한 김지정을 희생의 제물로 점지했다. 그의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혜공왕의 여자 아닌 남자로 만들었다. 이어 속이 달아오른 김지정을 벽지 고을로 보낸다는 소문을 흘려 감정의 꼭짓점을 한껏 자극했다.김지정이 김경신의 그물망에 뛰어들었다. 김지정은 지방의 귀족세력까지 두텁게 포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각간의 난을 교훈 삼아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지방의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궁궐 내부 깊숙이 동조세력을 심었다.혜공왕이 24세의 생일을 자축하는 잔치를 1주일에 걸쳐 벌이는 기간이 김지정이 잡은 반란 D-Day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김양상과 김경신의 무리도 왕의 잔치에 적당히 취해 자리를 피하고, 자신의 세계로 빠져드는 혜공왕의 침소까지 김지정은 쉽게 접수했다.김지정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개로 삼은 혜공왕을 단칼에 죽였다. 그러나 나라의 왕좌에 오를 주인공을 정하지 못했다. 김지정의 무리가 왕좌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궁궐 내외부의 분위기는 더욱 어지러워졌다.김경신이 깔아둔 덫이었다. 김지정을 지원하고 나섰던 궁궐 내부의 조력자 대부분이 김경신의 사주를 받은 첩자들이었다. 혜공왕의 죽음을 묻어두고 자신들의 공을 서로 추켜세우기도 하며 어수선한 분위기에 빠져 지방의 동조세력 우두머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이던 어느 날. 술을 마신 김지정의 무리는 모두 약물에 마취되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다음날 아침 포승줄에 묶여 올가미를 쓴 채 무릎을 꿇었다. 김지정의 일족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김경신은 무열왕의 10대손 상대등 김양상을 왕위에 올렸다. 김경신의 잔꾀로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이다. 이어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어 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김양상의 조카 김주원이 서열상 자신의 윗자리에 있어 다음 전략을 추진해야 했다.김양상은 천성이 곱고 선이 굵지 않았으며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김경신이 주장하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왕관을 쓰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지 6년에 접어드는 시기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혜공왕과 선덕왕의 죽음은 김경신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작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사물인터넷, 전자기기의 밑바탕이 되다…전자제품 혼자 알아서 척척 우리 집이 ‘스마트’해졌어요

‘신혼의 재미’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자.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라는 게 말처럼 쉽진 않겠으나 큰 행복 대신 소소한 신혼의 행복을 ‘하나씩 늘려가는 세간’ 정도로 우선 만족한다. 작은 집에 꽤나 오랜 시간을 두고 꾸깃꾸깃 채워가는 살림용품들이야 말로 어제는 비록 힘들었으나 오늘은 기쁨이며 내일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다.이 같이 소박해 마지않던 행복도 점차 진화하고 있다. 바로 사물인터넷(IoT)의 기술력이 투영된 ‘스마트홈’의 이름으로 눈높이를 한껏 높여간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스위치, 조명, 전자기기들이 원스톱으로 연결된 이른바 ‘토털 제어’가 가능해짐은 물론, ‘가전제품의 인공지능(AI)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파생된 스마트 가전은 고급형 부가 기능이 아닌 통상적 기본 사양으로 대두되는 시점이다.와이파이 기술을 통해 가정 내 비치된 전 가전제품을 콘트롤 해간다. 빅데이터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수집된 가전 정보를 능동적으로 발현, 이를 통해 최적의 편의를 제공하는 ‘네트워크 플랫폼’이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스마트 냉장고음식 보관을 위함이었다. ‘냉매’를 이용한 적정 온도를 유지함으로써 식품의 신선도 제고와 디자인적 측면만을 십분 강조한, 여기에 덧붙이자면 집안 내 가전제품 중 가장 덩치가 큰 세간 정도가 이제껏 각인된 냉장고의 이미지였다.하지만 냉장고도 똑똑해진다. ‘스마트 냉장고’의 이름으로 개명 뒤 과거의 구태를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앞서 일률적 유지에만 국한됐던 ‘온도제어기능’이 식료품의 성질에 따른 적정보관온도를 알아서 검색, 냉장고 외부 모퉁이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제시한다.실제 ‘마요네즈’의 경우 고온에선 분리가 되고 저온에서는 얼어버리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 냉장고 적정 온도인 5℃ 이하에서 마요네즈를 보관 시 세균 번식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진다.이 밖에도 방울토마토, 알약 등 식품들도 냉장보관은 금하고 상온(10℃ 이상)보관을 권장한다.김치 냉장고에도 IoT의 기술력이 깃들어있다.기본 냉장고의 사이드 가전, 혹은 김치 등 특수 식료품의 조금은 더 특별한 관리 및 유지를 위한 김치 냉장고에 IoT를 접목했다.도어에 장치된 터치스크린을 통해 더욱 전문적인 보관과 숙성 기능을 소비자에게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그날의 기상정보와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은 덤.특별한 이들의 특이해 마지 않은 전유물 정도로 인식되던 ‘차량용 냉장고’도 최근 캠핑 인구와 여흥을 즐기려는 이른바 ‘워라벨족’의 급증과 맞물려 큰 호응을 얻고 있다.운전자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차량용 냉장고를 IoT에 연결해 그간 입력해 둔 운전자의 쇼핑목록을 빅데이터화의 과정을 거친 후 분석해내는 기능이 최근 선을 보였다.설혹 데이터가 없는 경우라도 차량 내 부착된 각종 센서들이 운전자의 소비패턴과 그간의 동선 등을 파악, 그 자체로의 식재료 구입 시뮬레이션 등을 그려낸 후 운전자의 식품구매 니즈를 실시간으로 감지해낸다.식품 운송 간에도 스마트 냉장의 똑똑한 관리는 계속된다. 식품 배송의 관건은 바로 ‘식품의 변질 여부’다. 외부 날씨 및 습도의 영향도 있겠지만 차량 내부에서 발생하는 각종 열기로 말미암아 식료품이 부패 하는 경우 역시도 왕왕 발생한다.실제 무더위 아래 1시간 이상 주차된 차량의 내부 온도는 50~70℃에 육박하다. 만약 운행 중이라면 각종 실린더의 운동과 동력에 의해 발생된 열과 합쳐져 차량의 온도는 약 100℃에 까지 이른다.참고로 식품 개별의 성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 25℃ 이상의 상온에 노출된 식품은 부패 또는 변질이 빠르게 진행된다.이 같은 폐해를 일정 부분 상쇄시키기 위해 식료품 적재 시부터 도착지 운송 시점까지 소요되는 예정 거리 및 (도착)예상시간을 알려주는 네트워크 시스템이 도입을 앞두고 있다.운전자는 도착시간을 사전에 득함으로써 운행 간 식료품의 신선도 유지를 위한 최적의 온도 및 습도 등의 제반사항을 미리 체크·제어한다.일일이 손으로 ON/OFF를 콘트롤할 필요성도 사라진다. 차량 운행이 없을 시엔 제어 기능 역시 동시 종료된다. 이 냉장고는 차량 내부가 아닌 트렁크에 설치됨으로써 공간의 제약도 덜 받는다. ◆스마트 세탁기대한민국 세탁기의 시발은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인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G사의 마크를 달고 대중에 선보인 세탁기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 IoT, 빅데이터와의 콜라보를 통한 ‘스마트 세탁기’로 군웅할거 하고 있다.세탁기는 크게 드럼형과 일반형으로 나뉘는데 이는 세탁기 입구 위치에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기 소모가 상대적으로 덜한 와류식 세탁기가 조금 더 각광을 받는다. 와류란 세탁판이 회전하며 만들어지는 (세탁)물줄기로 와류식 세탁은 세탁조 내 회전판에서 생기는 물살로 빨래를 비벼 빠는 방식이다.세탁기는 다른 가전에 비해 개별의 살림 사정에 따라 그 니즈가 판이하다. 1인 가구의 경우에는 소형을 선호할 것이고 면역력이 약한 유아를 키우는 가정에선 ‘삶는 기능’이 추가된 세탁기가 선택의 주요 사양이 된다.스마트폰으로 집안 내 가전을 제어한다는 것이 신변잡기적 일상이 돼버린 요즘, 세탁기 역시 스마트폰에서 다운받은 앱을 통해 세탁 과정의 실시간 확인이 가능해짐은 물론, 인근 빨래방과의 네트워크 연계를 시도함으로써 ‘원스톱 예약’ 기능이 현실화됐다.이와 더불어 수만 개에 이르는 축적 데이터를 품은 빅데이터가 세탁물에 따른 최저의 물 온도와 (세탁)코스를 수작업이 아닌, 세탁기 내부 장착된 센서를 활용한 ‘능동적 세탁 컨트롤’에 한발 더 다가서려는 모양이다.이 밖에도 세탁물 상태확인 센서, 진단 등의 기능이 추가, 세탁기 오작동 시 연결된 스마트폰 앱을 통해 상시 확인이 가능해짐을 물론, 옷의 재질 등을 알아서 취합 후 그에 맞는 세탁 프로세스가 발현되는 등, 사람의 단순 조작을 넘어 세탁기 차원으로 구별해 내는 기술이 상용화를 위한 마지막 담금질에 매진하고 있다. ◆스마트 에어컨·TV·침대스마트의 캐치 프레이즈는 ‘스스로 학습’이다. ‘스마트 에어컨’은 소비자의 패턴과 환경, 집안 내 습도, 온도, 미세먼지 등의 사항을 일일이 체크·파악한 뒤, 이에 맞는 최적의 온도를 집 내부 곳곳에 공급한다.‘스마트 TV’의 본질은 다기능에 있다. 기본적으로 TV와 PC의 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매개가 연계점 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단순 방송청취를 넘어 TV에 인터넷 기능을 결합, TV를 통해 인터넷 검색을 하고 SNS를 활용하며 각종 VOD를 시청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스마트 TV가 지닌 모멘텀이다.‘침대는 과학이다’라는 고전의 멘트가 이제는 현실이 됐다. 침대에 장착된 스마트 시스템이 수면자의 취침 패턴을 넘어, 수면 중 체온과 혈압, 심지어 맥박까지 체크해냄으로써 최적의 잠자리를 제공한다.이외에도 침대 위에서 웬만한 여가활동이 가능하게끔 스크린과 스피커가 부착된 ‘엔터테이너 침대’가 단일상품으로 출시되는가 하면, 각종 알람기능과 수면자의 체형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안락한 수면을 유도하는 ‘인공지능 침대’가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안전한 스마트 가전 활용 팁일장일단이라고 했듯이 스마트의 편의 뒤에는 정보유출이라는 리스크가 항시 도사린다. 편의성이 담긴 스마트 가전에 안전성을 가한다면 더욱 안정감 있는 인공지능을 접할 수 있을 터다.우선 스마트 가전 개별로 설정된 비밀번호는 상시 교체해주는 것이 좋다.또 해킹 프로그램이 잠식돼 있는 프로그램은 곧바로 삭제해두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특히 수·발신자가 명확한 ‘이메일’ 등에서 해킹 프로그램이 곧잘 전해지곤 하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메일은 열어보지 말고 지우는 것이 안전하다.‘휴먼테크날리지’가 미래 사회의 공상이 아닌 현실사회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오늘이다.인간으로 말미암아 발현되던 AI의 기술력이 그 자체로의 서버를 구축, 스스로 제어, 스스로 통제, 스스로 업데이트 되는 이른바 ‘자율의 극점’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과거 세탁기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의 처녀 출현에 우리는 편의를 맛본 반면 기계 문명에 종속될 ‘파괴적 속성’이라며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하지만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오늘날의 ‘스마트 기술’은 어머니의 고충을 일거에 해소시킬 ‘가사노동의 자동화’를 꾀한다. 이는 파괴에 ‘혁신’을 얹힌 ‘파괴적 혁신’이라 지칭하기에 결코 과하지 않다. 글·사진 군월드 IT 사업팀

청송 대전사…부처님 현신 같은 기암단애 큰 법전의 진리 퍼트려 하늘 떠받치네

청송 대전사 기와지붕 뒤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일곱 개의 돌기둥 단애가 펼쳐진다. 경이롭고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감탄스럽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으니 매표소를 지나자 바로 사찰 공간으로 들어선다. 먼저 ‘뫼산(山)자’의 형상을 한 기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은산 철벽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마치 선가에서 화두를 들 때 극단의 경계 앞에 마주 섰다고 하는 그 장소이다. 거대한 암벽이 앞으로 확 넘어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들이 절집 마당 구석구석까지 뻗치는 듯하다.주왕산(周王山)은 청송의 대표적인 산이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산의 입구에 서면 기묘한 자태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암봉이 보인다. ‘기암단애(旗岩斷崖)’ 즉 신기한 깃발바위로 불리는 기암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 즉 ‘주왕’이라 칭하고 진나라의 재건에 나섰으나 실패, 그 후 주왕산으로 숨어들었다. 당나라가 신라에게 주왕을 제거해 달라 요청했고 신라 조정은 마일성 장군을 보냈다. 이곳에 은거하던 주왕이 마장군과 싸울 때 거대한 암벽에 볏짚을 둘러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해 신라 군사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마장군은 굴에 숨어 있던 주왕을 찾아냈다. 주왕산의 첫 봉우리에 대장기를 세웠다고 하여 ‘깃발바위’ 즉 ‘기암’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창건신라 문무왕 12년(서기 672년) 의상대사는 기암이 올려다보이는 넓은 남쪽 공간에 청송 대전사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로 사찰에 관련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연혁은 전하지 않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로 기록돼 있다. 대전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된 후 조선 현종 13년(1672년)에 중건됐다. 1751년에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지인 ‘택리지’에 이 절은 신선과 스님이 살기 좋은 곳이라 언급되어 있다.청송군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고 있다. 세계지질공원 홈페이지에는 기암단애의 생성을 설명하고 있다. 화산재가 완벽하게 굳어져서 ‘주왕산 응회암’이라 이름 붙었다. 오랜 시간 동안 비바람에 의해 깎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과학적 설명으로 백악기 주왕산 일대에서는 아홉 번 이상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 뜨거운 화산재가 쌓이고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으면서 굳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암석이 바로 뜨거운 용결응회암인데 급격히 식을 때 수축이 일어나면서 세로로 틈이 생겼다. 이 틈을 따라 침식이 일어나 지금과 같은 단애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땅속에서 우뚝 솟아난 듯한 이 암봉 자체가 사천왕이고 금강역사의 형국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큰 절이 들어서기에 훌륭한 입지다. 들어선 절 이름도 대전사(大典寺)이니 큰 법전의 절인 데 여기서 큰 법전은 ‘화엄경’이다. 보광전은 이 경전의 진리가 깃든 주 법당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찰의 전각 중에 보광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이 주존으로 되어야 하나 조선조 화엄종의 퇴조와 함께 석가여래불 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명칭만 다를 뿐 대적광전, 대웅전과 같은 성격의 전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한다. ◆보광전보광전은 1985년 10월15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었다가 불교 문화재적 가치를 높게 인정받아 2008년 7월28일 보물 제1570호로 승격됐다. 지정될 당시에 문화재청은 ‘대전사 보광전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목조건축물로 건축연대가 명확하다. 양호한 보존 상태로 회화성이 돋보이는 내부단청과 벽화는 조선 중기 불교 미술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인정된다’며 보물지정 사유를 밝혔다. 1976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그 건축 연대가 밝혀졌었다. 임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부분 중수 및 단청을 했을 뿐 보광전의 뼈대는 상량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대로다. 과거 대전사가 쇠락해가는 가운데서도 이 건물은 약 350년을 그 자리에 있다. 보광전의 외형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판 외에는 고풍스런 큰 특징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조선 중기 다포양식의 목조건물로 세워졌다. 내부로 들어가면 넓고 넓은 빛이라는 보광(普光)의 의미처럼 찬란한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내부는 건축의 뼈대와 회화, 단청이 어우러진 미의 세계이며 적멸이 흐르는 선(禪)의 공간으로 장엄되어 있다. 법당 좌우벽면에 관음, 문수, 보현보살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창 당시의 것으로 짐작되는 내부의 단청은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보광전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356호 석조여래삼존상이 봉안돼 있다. 본존불은 석가모니, 좌우 협시불은 각각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다. 삼존상은 복장조상기문이 나와 숙종 11년인 1685년에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본존불인 석가모니상은 세 마리의 사자상이 떠받치고 있는 특이한 대좌에 앉아 있다. 불상에 있어서 대좌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한반도에는 없는 사자가 그리스와 인도를 거쳐 중국을 통해 들어와 왕릉이나 석탑 주위에 새겨지게 됐다. 이곳처럼 불상대좌 아래에서도 귀여운 사자가 되어 부처님을 지키고 있다. 약 30㎝ 정도의 앙증스런 크기의 작은 사자들이 앞발을 위로 치켜들어 대좌를 힘차게 들어 올리고 있다. 축생의 몸을 타고난 사자들이 긴 세월 업장 소멸하는 장엄한 순간을 보는 듯하다.◆명부전보광전 바로 옆에는 또 다른 당우인 명부전이 있다. 이 건물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을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난 9월 이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十王像 一括)이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일괄 안에는 판관상 2구, 사자, 금강역사상 2구 등 도합 18구로 구성돼 있다. 최근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년) 조각승인 수연이 조성해 대전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는 연대가 확실한 조선 후기 명부세계의 대표적인 불상이므로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서 학술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이번에 명부전 불상들과 함께 유형문화재로 새로이 지정된 불화도 있다. 대전사 신중도는 다섯 폭의 비단을 잇대어 하나의 화폭을 이루는 채색 탱화이다. 이 불화의 아랫부분에는 무장한 호법신들이 서로 마주 보듯 배치되어 있으며 화면의 윗부분에는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이 그려져 있다. 그 사이에 사천왕을 비롯한 수호신들이 상반신만 모습을 드러낸 채 서로 마주 보듯 시선을 맞춰 도열해 있다. 이 문화재는 도난사건에 관련됐던 사연이 있다. 보광전에 있던 이 불화는 2000년 9월4일 모두 도난을 당했다. 그 후 어느 사립박물관장이 숨기고 있다가 2014년 고미술품경매시장에 나왔다. 도난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문화재청 단속반과 경찰에 의해 환수하게 되었다. 지금은 교구 본사인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존 중이다. 현재의 대전사 보광전에는 도난 이후 그린 신중도 탱화 모사본이 봉안되어 있다.대전사의 부속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 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다. 보광전 앞마당에는 과거 유적 발굴 당시 경내에 흩어져 있던 잔해들을 모아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의 처음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석재와 천 년 전의 탑신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석탑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청송 주왕산은 입구에서 보면 거대한 바위인 기암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기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사시사철 변하고 있다. 하늘의 구름도 단 한 순간도 머무는 바가 없다. 대전사를 떠나면서 한 번 더 뒤돌아본 거대한 기암단애는 은산 철벽이 아니라 부처님 형상의 큰 바위 얼굴이었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건선,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자

얼마 전까지 무더운 날씨에도 긴 팔, 긴 바지로 무장한 채 진료실을 찾는 건선 환자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중증건선환자들은 피부에 나타나는 붉은 발진과 두꺼운 각질 증상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위를 피하는 것보다 피부를 가리는 것을 선택하곤 한다.건선은 몸 속 면역 시스템의 이상으로 인해 홍반, 염증성 판상, 은백색의 인설 등이 나타나는 만성 면역 매개성 질환이다. 특히 무릎과 팔꿈치와 같은 돌출 부위에서 잘 발생하며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눈에 띄는 병변에 고통이 심하지만 전염되지 않는 질환이다.하지만 질환에 대한 사회의 이해도가 낮고 편견이 많아 환자들은 증상을 감추거나 아토피 등 다른 피부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다행히 최근 건선 질환과 치료법에 대해 연구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중증 건선 환자들에게는 몸 속 면역체계에서 인터루킨-17A와 같은 건선 유발인자를 직접 차단하는 생물학적 제제를 처방해 효과를 빨리 나타낼 뿐만 아니라 완치에 가까운 호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부위는 작지만 환자 삶에 끼치는 영향이 높고 치료가 힘들었던 두피나 손발톱, 손발바닥 건선 증상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치료환경이 발전하면서 건선 관절염과 같은 동반 질환을 미리 살피는 치료도 가능해졌다. 건선 환자 3명 중 1명에서 나타나는 건선 관절염은 손가락, 발가락 관절과 같이 작은 관절에서 시작되며 초기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절 변형을 불러온다. 건선을 치료하는 피부과 전문의들은 건선 관절염을 늘 염두에 두며 환자를 살피고 있다.제도적인 변화도 있었다.2년 전부터는 중증의 판상 건선이 산정특례 질환에 포함됐다.오랜 기간 치료와 관리를 해야 하는 건선 환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치료비 부담을 낮춘 것이다.전신치료와 광선치료 모두 각각 3개월 동안 받았지만 체표면적의 10% 이상에 증상이 나타나는 등 세부 산정특례 기준에 부합하는 환자는 치료비에 대한 본인 부담금이 10%로 줄어든다.이처럼 건선의 치료 환경은 최근 몇 년 사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그럼에도 과거의 치료 실패 경험으로 인해 치료를 포기하고 숨어 있는 건선 환자들이 아직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지난해 전 세계 31개국에서 중등도에서 중증의 건선 환자 8천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설문 조사 결과 건선 환자들이 깨끗한 피부를 갖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해변에서의 일광욕’이 꼽혔다.수영하기, 포옹하기, 악수하기 등이 높은 빈도로 꼽혀 뒤를 이었다.보통의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누릴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다.이제 건선 환자들도 제대로 치료 받으면 얼마든지 깨끗한 피부를 되찾고 당당한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건선을 감추거나 숨기지 말고 병원을 찾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도움말=계명대 동산병원 피부과 김성애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담석증 수술, 언제·어떻게?…작은 돌이 더 위험…담낭관 틀어막을 수 있어

-대구 마크원외과 김기둥 원장(대구시의사회 정보통신이사) 담석증 수술을 언제 받아야 할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우리가 먹는 지방을 분해해서 흡수할 수 있게 만드는 소화효소가 담즙이다.담즙은 간에서 만들어져 간 내부 담도를 통해 총담관으로 모여 십이지장으로 분비된다. 장으로 분비돼 임무를 마친 담즙 중 대부분은 대변으로 배출되지 않고 소장 맨 끝에서 재 흡수돼 다시 간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되돌아온 담즙은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을 담즙 순환이라고 한다.담석증에는 간 내·외부에 걸쳐 존재하는 담도·담관에서 발견되는 담관결석과 담관과 연결돼 간 밑에 붙어 있는 담낭에 돌이 생기는 담낭결석이 있다.흐르는 냇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듯 담즙이 흘러가는 통로인 담관에서 자체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의 담관결석은 담낭의 담석이 담관으로 빠져나온 결과물이다.흔히 담낭결석의 크기가 작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아무런 증상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지름이 3㎝ 정도로 크다면 담낭 내벽에 손상을 주면서 향후 담낭암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수술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작 수술하는 외과 의사들은 5㎜ 내외의 작은 돌을 더 걱정한다.작은 결석이 담낭관을 완전히 틀어막아 급성담낭염을 유발하기 더 쉽고 최악의 경우 담낭을 빠져나와 담관결석이 돼 급성담관염이라는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상당히 위험해진 상태에서 응급 수술을 받아야하거나 수술 전에 담관결석 제거를 위한 응급담도내시경을 시행해야 하므로 외과 의사 입장에서는 조그만 담석이 더 미울 수밖에 없다. 담석증에 관한 위험한 오해 중 또 한 가지는 담석이 있어도 ‘안 아프면 괜찮다’이다.담석이 통증을 일으키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지방을 섭취하면 이에 반응하여 간 내부와 총담관의 담즙이 십이지장으로 분비되고 동시에 담낭도 수축해서 저장한 담즙을 배출한다.이때 담석이 담낭의 배출구를 막으면 오른쪽 갈비뼈 아래, 오른쪽 등과 어깨 등에 자지러지는 경련성 통증이 발생한다.환자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통증이라서 수술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그런데 담즙배출구의 일부만 막힌다면 상황은 달라진다.이럴 땐 더디지만 담즙이 빠져나갈 수는 있으므로 급격한 통증 없이 소화불량과 함께 담낭 벽에 반복적인 부종과 흉터현상에 의한 만성 염증이 발생한다.‘만성담낭염’은 담낭암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흔히들 담낭용종은 혹시 암이 되는 건 아닌지 알아서 걱정들을 많이 하시지만 담석증과 담낭암의 연관성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꼭 기억하는 게 좋겠다.이쯤 되면 담낭결석이 있으면 무조건 담낭을 떼어내야 하나 고민할 수 있다.복통, 소화불량 등 연관 증상이 전혀 없고 위에 언급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담낭결석의 경우 5년 안에 증상이나 담낭 변화를 일으킬 확률은 10%, 10년 안에 15%, 15년 안은 18% 등, 거의 5년마다 5%씩 증가한다.따라서 50대 이후에 증상이 전혀 없고 담낭 벽의 변화 없이 우연히 발견된 담낭결석은 증상 없이 여생을 지낼 확률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수술 받을 일은 아니다.이런 복잡한 원리를 따져가며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담석증을 진단 받았다면 경험 많은 외과 전문의와의 상담이 꼭 필요하지만 수술에 대한 두려움은 외과 진료를 꺼리게 만든다.물론 과거 담낭수술은 우측 갈빗대 아래쪽에 10㎝ 이상의 절개를 했기 때문에 환자에게 매우 힘든 수술이었다.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복벽에 직경 1~2㎝ 내외의 구멍 서너 개 뚫어서 시행하는 복강경 담낭절제술이 보편화됐다.최근에는 배꼽 안에 1.5㎝의 피부 절개만으로 시행 가능한 ‘단일통로 복강경 담낭절제술’ 덕분에 수술 후 뛰어난 미용효과 뿐만 아니라 보다 빠른 회복과 일상복귀가 가능해졌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냥 외과 진료를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4)북부

경주 북부지역의 문화관광 형태는 다른 지역과 판이하다. 다른 지역은 신라시대 역사적 문화자원이 풍부한 데 비해 북부지역은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비롯 대부분이 조선시대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특징이다.경주 북부지역은 경주시가지와 형산강을 경계로 구분되는 현곡면과 안강읍, 그리고 포항과 연결되는 강동면, 보문단지와 연접한 천북면 등 4개 읍·면 지역으로 나뉜다.안강읍의 옥산서원, 강동면의 양동마을, 천북면의 운곡서원, 현곡면의 용담정 등이 대표적인 문화관광자원으로 소개되고 있다. 모두 조선시대 문화유적이다. 1.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최근 등록됐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1572)에 경주 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다. 다음해에 임금이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전통적인 향교 형식이다. 옥산서원 유물관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국보 제322-1호) 50권 9책 완결본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옥산서원은 훼철되지 않았다.2. 독락당(보물 제413호)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건물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어졌다.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으로 최근 건축법에도 종종 이용되고 있다. 독락당 동쪽에 자계천에 접해 지은 계정과 함께 자연 속의 하나로 사계절 운치가 그만이다.3.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이 거대한 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 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구조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4. 양동마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월성손씨와 여강이씨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360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고색창연함을 자랑하고,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2010년 7월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록됐다. 국보, 보물, 중요민속자료, 유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향토 문화재 등 문화재가 밀집해 있다.5. 관가정청백리로서 조선 성종~중종 때 우재 손중돈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해 살던 양동마을 월성손씨 종갓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6. 운곡서원안동권씨 시조인 고려 공신 태사 권행과 조선시대 참판 권산해, 군수 권덕린을 배향하기 위해 1784년(정조 8)에 건립했다. 고종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1976년 신라 밀곡사 터로 추정되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청수골에 복원했다. 절경을 이루는 600년 된 은행나무 옆에서 매년 가을음악회가 열려 전국에서 전문 작가들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7. 종오정종오정 일원은 조선시대 영조 때 학자인 최치덕의 유적지이다. 최치덕이 영조 21년(1745)에 돌아가신 부모를 제사지내려고 일성재를 짓고 머무르자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따라온 제자들이 종오정과 귀산서사를 지었다. 종오정에는 연꽃이 가득하고, 주변에는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아름답게 우거져 있어 우리나라 정원유적의 표본이 된다.8. 소리지와 왕신예술촌경주시 천북면 성지리 552에 있는 저수지다. 소리못, 성지지(성지저수지)라고도 불린다. 마을이름도 성지리이지만 소오리, 소리라고도 부른다. 못 둑에 카페가 문을 열어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주변에는 화산 불고기단지, 왕신예술촌 등이 자리해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들과 식도락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9. 용담정용담정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포교활동을 벌이며 인간 절대평등의 가르침을 담은 용담유사를 저술한 곳이다. 최제우는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동학을 창시해 가난한 민중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근대사의 사상가이자 동학교주로 추앙받았다. 국립공원지역으로 최제우 생가복원사업을 비롯해 성역화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용담정 일대가 공원으로 사계절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10. 나원리오층석탑탑의 색이 사계절 흰색을 띠고 있어 ‘백탑’으로도 불린다. 이 때문에 신라 8괴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신라석탑으로는 장항리 사지석탑과 함께 유일하게 5층 구조다. 규모 또한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 삼층석탑 다음으로 크다. 1996년 탑에서 금동사리함이 출토됐다. 사리함에는 정교한 3층 금동탑, 9층 금동탑, 불상 1구와 부식된 나무탑 등이 나왔다. *경주 북부: 안강읍, 현곡면, 강동면, 천북면-안강읍: 안강, 양월, 육통, 노당, 산대, 옥산, 하곡, 강교, 두류, 근계, 감산, 대동, 검단, 사방, 청령리-현곡면: 금장, 상구, 하구, 가정, 남사, 내태, 무과, 소현, 오류, 나원리-강동면: 모서, 호명, 오금, 왕신, 국당, 유금, 인동, 양동, 안계, 다산, 단구리-천북면: 동산, 덕산, 신당, 모아, 오야, 물천, 갈곡, 성지, 화산리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덕왕과 표훈대덕…하늘의 경고에도 ‘딸보다 아들’ 욕심에 대가를 치르다

경덕왕이 통일신라 불교문화를 최고의 극치에 이르는 정점으로 끌어올린 시대의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덕왕의 큰아들이 왕비의 폐비에 이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둘째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 정치에 휘둘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경덕왕은 귀족세력이 오랜 기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왕위까지 능히 간섭하는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여러 각도로 추진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도 곳곳에서 나타난다.당시 불교적 사상이 통치이념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진표, 법해와 대현, 원표스님과 월명사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스님과 교류를 맺었던 기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안민가를 지어 바친 충담,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에 관여한 표훈과의 교류는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를 뚜렷하게 조명한다.삼국유사가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행사했던 스님으로 분류하고 있는 충담과의 관계에 이어 표훈과의 관계를 살펴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표훈대덕왕은 옥경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왕비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폐위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는 만월부인이다.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김의충 각간의 딸이다.왕이 하루는 표훈대사를 불러 명을 내렸다. “짐이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사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었으면 하오.”표훈이 상제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상제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고 답했다.“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오.”표훈이 다시 상제께 이를 청하자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씀을 전하자 왕이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라고 말했다.곧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섭정했지만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어린 왕은 여자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표훈대사 다음으로 신라에는 성인이 나지 않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고민과 표훈대덕성덕왕이 이뤄 놓은 왕권의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려 버렸다. 김순원과 김순정, 김의충 등이 성덕왕에 이어 효성왕, 경덕왕까지 자신들의 딸을 왕비로 추천하면서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 전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권, 인사, 재정, 형부, 공부, 예부 등 여섯 부문의 주요 관직을 꿰차고는 끝없는 힘겨루기로 권력구도를 재편하며 나라 살림이 기우는 것도 몰랐다.경덕왕은 즉위 1년 만에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비를 내쫓고 새로운 왕비를 맞도록 하는 등 왕실 내부까지 귀족세력의 힘이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자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하게 관제를 개혁했다.국학을 장려하기 위해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고 관직의 명칭을 크게 바꾸었다. 또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는 정찰을 임명해 권한을 주어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다. 지방관리들에게 월급 대신 녹읍을 주어 부정부패를 없애려 했다.경덕왕은 대신들이 왕비와 후궁을 선택해 궁궐로 들여보내 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계 구도를 잇기 위해 태자가 태어나지 못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했다. 이어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왕비를 폐비하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간청했다.경덕왕은 스스로 왕비를 지키지 못하는 지아비는 백성의 아비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대신들의 세력으로 폐비 절차를 밟는 일은 없애겠다고 다짐해 처음 이후 그를 지켰다.백성의 정신적인 평안을 위해 불교를 장려해 굴불사와 불국사를 건립하고, 석굴암을 축조했다. 내적으로는 관제 개혁에 이어 태자 살리기 전략을 구상했다. 대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후궁세력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무인들을 암암리에 배치하고 운영하는 조직을 가동했다.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거대한 용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데 옷자락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정도로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초청해 국사를 맡겼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점잖게 사양하면서 “제게서 공부한 제자 표훈이 있사온데 옆에 두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자를 천거했다.경덕왕이 그의 말을 듣고 의상의 제자 표훈을 황룡사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들었다. 그때 저녁 공양 이후에는 표훈이 어김없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훈이 탑돌이를 할 때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는데 발자국을 뗄 때마다 공중을 마치 평지처럼 내달으며 9층 목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탑 외부를 공중부양한 채 목탁을 치며 낭낭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표훈은 이미 경덕왕이 자신의 도력을 시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왕이 보는 앞에서 공중을 부양하며 탑돌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왕은 표훈의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주변을 지키며 후궁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이어 경덕왕은 누구든지 왕비와 후궁들이 아이를 낳는데 방해를 하거나 위해를 끼치면 역적과 같이 간주하고, 3대를 멸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어 여섯 명의 후궁들이 아이를 편안하게 낳을 수 있도록 각자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왕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다.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어가도록 왕비와 후궁 누구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비는 물론 여섯 명의 후궁들까지 아무도 임신조차 못했다.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태자에 대한 욕심이 깊어졌다. 또 대신들의 끝 모를 정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태자의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왕은 대신들에게 천명했다. 왕비는 물론 후궁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을 낳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했다. 이어 태어나는 태자의 안전을 위해 왕실과 같은 수준의 호위를 받게 해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 이후 3년이 지나 기적같이 왕비가 아들을 낳았고, 표훈이 동궁 주변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결계를 치고, 태자의 신변을 지켰다.경덕왕은 태자가 8살 되던 해에 죽음을 맞으며 태자가 왕위를 잇고, 왕후가 섭정하며 대신들이 모두 협조하도록 유언했다. 대신들의 세력 다툼은 경덕왕이 죽은 이후 더욱 기승을 부려 아들 혜공왕은 끝내 반란군의 칼에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인류의 진화 ‘삶과 죽음’…인류의 조상은 원숭이?…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잣대부터 오염됐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나뉨은 ‘실리’보단 ‘명분’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말해 믿음에 따른 ‘주체적 괴리’일 뿐 설왕설래의 논쟁이란 ‘턱없는 궤변’이다. 인류의 시초를 진화냐, 창조이냐 구분 지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방증이다.이번 연재는 인류를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약육강식. 생물은 ‘적응의 동물’로 우선 정의 내린다. 배경과 환경에 의거, 순종하고, 점층적으로 ‘심플’에서 ‘심도’있게 발전한다. 생존을 위한 하릴없는 경쟁을 수행하며 수위에 따른 생·몰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터다.본격적으로 진화론을 언급하기 전 창조론의 정체성 역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창조론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기원을 신의 영역인 조물주에 의해 조성됐다는 관점인데, 이는 서서히 그 형태와 발전을 거듭해가는 진화론과 달리 지금의 인류는 완벽한 무에서 유의 과정을 거쳐 왔음을 믿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원시인’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인류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칭하는데 쉽게 말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그래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별칭을 ‘남쪽의 원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탄생 시기는 약 600만 년 전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처녀 발견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해부학 교수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만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근거지는 ‘동아프리카’ 등지로 추정한다.기원전 600만 년 전 인류의 시초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탄생했고 400만 년부터 본격적인 진화를 거듭했다. 이후 200만 년이 지난 시점에서 멸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의 생활습관·반경과 일맥상통하다. 소규모 무리를 이뤄 ‘작은 집단’의 생활을 영위했고 조금 더 진화된 시점에서는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진다.아프리카에서 비롯된 이 어설픈 도구 역시 점층적 발전을 거듭하며, 향후 아프리카를 넘어 유럽, 아시아에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또 다른 정체성은 최초의 ‘직립보행’이다. 직립보행이 가능해지니 이들은 손이 자유로워졌고 자유로운 손을 통해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하며 음식을 지어먹는 등 나름의 ‘생존법’을 굳혀간다.이처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처음’이라는 함의를 품고 인류 역사의 작은 공을 쏘아 올렸다. 아직 불을 사용하지 못했고, 초보적인 수준의 석기기술이었으나, 큰 턱뼈를 지닌 채 처음으로 두 발을 내딛었고 도구 발전의 시발이었다는 것, 꽤나 고무적이다. ◆호모하빌리스호모하빌리스의 출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멸망 이후인 약 15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적세에서 군집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홍적세란 지질시대의 한 시점으로, 정확히 말하면 신생대 중 제4기, 그중에서도 초기에 속한다. 참고로 신생대는 총 5대로 구분한다. 호모하빌리스의 화석 역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등지에서만 발견되고 있다.호모하빌리스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한 인류학자로부터 발견된다. 당시 이들은 호모하빌리스를 명명하는 것으로 ‘손재주가 뛰어난 능력자’라고 표현했다. 1m30cm 정도의 신장을 가진 호모하빌리스를 두고 ‘역기를 만든 최초의 인류’라는 또 다른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여기서 의미하는 역기란 자연석의 한쪽에 날을 붙인 석기를 뜻한다.이로써 호모하빌리스는 ‘최초의 석기 이용 인류’로 통칭됐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비해 턱이 좁고, 비록 가설이지만, 생성된 석기의 운반과 저장에도 일정 부분 기술력을 투영했을 것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영국의 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는 호모하빌리스를 일컬어 ‘인간과 포유동물의 사이의 고유한 연결고리’ 임을 주창했다. 이는 호모하빌리스가 원숭이에 가까웠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제대로 된 직립원시인의 시초인 ‘호모에렉투스’ 사이에 출현한 것에 기인한다. ◆호모에렉투스앞서 언급했듯 호모에렉투스의 상징은 직립, 다시 말해 ‘완벽히 두발로 선 인류’로 볼 수 있다. 호모에렉투스는 제4기 신생대에서 생활한 인류로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범주를 벗어난 지금의 유럽등지에서 군락생활을 펼쳤으며, 불을 사용한 최초의 인류로 설명된다.호모에렉투스는 완전한 직립 원시인인 만큼 평균 신장이 160cm 수준으로 알려진다. 등이 굽어있는 호모하빌리스보다 30cm가량 크다. 현재 일반 여성의 신장과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호모에렉투스란 이름은 ‘자바원인’ 이후에서나 명시된다. 자바원인은 호모에렉투스의 한 종으로, 약 70만 년 전 트리닐의 갱신세 중기층에서 발견된 화석인류를 의미한다. 트리닐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솔로강 유역에 있는 지역을 뜻하며, 갱신세는 홍적세와 같은 의미로 지질시대 중 하나를 의미한다. 참고로 호모에렉투스는 ‘라틴어’다.호모에렉투스는 단순한 언어사용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근거는 호모에렉투스가 직립이 가능했다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호모에렉투스가 현 인류와 마찬가지로 서서 이동이 가능한 ‘동일 신체구조’임에 착안, 이로 말미암아 발성 구조 역시 지금의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추정에서 비롯된다. ◆네안데르탈인네안데르탈인의 발견은 독일에서 이뤄졌다. 1800년대 중반, 독일 프로이센의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된 것으로 말미암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명시하기에 이른다. 35만 년 전 첫 출현을 시발로 해 3만 년까지 ‘구세계’ 전역에 분포됐던 인류로 추정된다. 구세계는 ‘구대륙’이라고도 불리는데, 15세기까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알려진 지역 또는 지점 등을 뜻한다.네안데르탈인의 특이점은 추위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약 40만 년 전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네안데르탈인의 체내 형성된 ‘면역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최근 현대 인류에 존재하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중 150여 개가 오늘날 A·C형 간염바이러스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등과 상호호환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참고로 유라시아란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네안데르탈인은 과거 ‘무스테리안 문화’를 이끌던 ‘문화적 선봉장’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무스테리안은 중기구석기 시대 발발한 문화형태를 의미하는데, 수많은 석기와 추상적인 벽화가 무스테리안 문화의 아이덴티티로 알려지고 있다. ◆호모사피엔스여기서부터 진정한 ‘사람’의 영역이다. 다름 아닌 ‘이성의 유무’에 따른 기준이다. 그렇기에 호모사피엔스를 두고 예전 가요에서 들어 봄직한 ‘신인류’라 부르기도 한다. 호모사피엔스의 주 활동시기는 빙하기의 끝 무렵이다. 빙하기는 전 세계적으로 기후가 한랭하게 됨에 따라, 고위도 지방 또는 산악지대에 빙하가 발달했던 시기를 의미한다.어찌 됐든 이때부터 인류는 생각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집단의 규칙을 설정함은 물론, 목축과 농경 등, 약간의 과장을 보태 ‘1차 산업’을 영위했다는 사실.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 그대로 ‘슬기로운 인류 생활’이 펼쳐진 셈이다.호모사피엔스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메소포타미아를 중점으로 이뤄진 신석기로의 변혁은 호모사피엔스 인류의 출현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문자를 발명한, 말 그대로 ‘인류의 지혜를 품은 첫 산물’로 대변된다.하지만 호모사피엔스를 ‘완벽한 인류’로 칭하기엔 약간의 무리는 따른다. 그 이유는 호모사피엔스의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기존의 호모 사피엔스에는 현생인류를 포함했으나, 미국의 물리화학자 마이어에 의해 밝혀진 ‘유인원과 흡사한 네안데르탈인도 호모사피엔스 포함시킨 학설’에 기인, 현 인류와 호모사피엔스 간 시쳇말로 ‘교통정리’가 필요했던 것이다.그래서 현생의 인류는 구석기의 마지막을 보내온 호모사피엔스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현생인류를 사피엔스를 하나 더 추가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명시하기에 이른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우리동네 자랑 경주(3)남부

경주 남부지역은 외동읍과 내남면 지역으로 동쪽은 바다, 남쪽은 울산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여기에 역사유적지구 남산과 낭산이 포함되면서 경주지역의 전반적인 특성과 같이 역사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내남은 남산지역이고, 외동읍은 울산과 연접해 공단이 발달하고 있지만 원성왕릉을 비롯한 역사문화유적과 바다를 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특히 남산은 국립공원이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역사유적지구로 국보, 보물 등의 지정문화재를 포함해 비지정문화재까지 700여 점이 넘는 문화유적이 널려있다. 낭산 또한 해발 100여m 구릉처럼 낮은 산이지만 황복사지삼층석탑,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의 국보와 보물 등 문화유적이 즐비해 탐방객들이 줄을 잇는다.1. 선덕여왕릉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으로 646년경에 낭산자락에 조성됐다. 1969년 사적 제182호로 지정됐다. 사천왕사지 위의 낭산 정상에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봉토 밑에 둘레 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이다. 둘레 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밖으로 드문드문 둘레 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그 외에는 다른 석물은 없고 다만 전면에 상석이 있으나 이것은 후세에 설치된 것이다. 진입로가 소나무 숲과 다양한 초목이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2. 신문왕릉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사천왕사지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왕릉으로 비정되어, 1969년에 사적 제181호로 지정된 둥근 모양의 봉토분이다.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납작한 갑석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삼각형으로 다듬은 44개의 받침돌로 일정한 간격으로 둘레 돌을 받쳐 봉분을 지지하고 있다.성덕왕릉과는 달리 받침돌 사이의 12지상은 없으며, 무인석과 문인석, 석수 등도 없다. 정남향에 있는 삼각형 받침돌에 한자로 ‘문(門)’ 자가 새겨져 있고, 동쪽에는 크고 긴 돌을 쌓아서 만든 상석이 있다.3. 진평왕릉낭산의 동쪽 보문동에 숲이 우거져 공원으로 조성된 사적 제180호 진평왕릉은 시민과 관광객들의 편안한 힐링의 터전이 되고 있다. 동쪽에 명활산, 남쪽에 보문사 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낭산이 있다.특별한 석물 없이 밑 둘레 지름 약 10m, 높이 약 7m의 원형 토분으로 주위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특별하게 생긴 고목들이 서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장소로 인기다.4. 황복사지삼층석탑 국보 제37호구황동 낭산의 황복사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황복사는 652년(진덕여왕 6) 의상이 출가한 사찰로 알려졌을 뿐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은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석탑을 해체해 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사리함 뚜껑의 안쪽 면에 새겨진 명문에 신라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692년에 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전한다.5. 성덕왕릉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나라와 적극적인 교류를 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 둘레 46m 높이 5m이다.신라왕릉 중에서 호석과 함께 회랑을 갖추고 12지신상, 사자상, 석인상 등의 석물이 최초로 등장한 왕릉이다. 왕릉 앞에 비석과 이수가 사라진 대형 귀부가 있다.6. 용산서원정무공 최진립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 경주 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한 경북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서원의 입구에 3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낙엽이 절경을 연출해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사액서원이었지만 고종 때 훼철되었다가 다시 중건됐다. 최진립 장군은 경주 최 부자의 전설을 남기고 있는 원조다.7. 포석정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전복의 형태를 띠고 있어 포석정으로 이름이 붙은 문화재로 제1호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뿐이다. 경애왕이 이곳에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신라가 멸망에 이르게 됐다.8. 남산탑곡마애불상군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40여 점의 불상과 승려, 비천상 등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북면에는 좌우로 목탑형태의 9층과 7층 탑 2기가 있다. 기반부터 상륜부까지 완비되어 신라 목탑 양식 고찰에 중요자료로 연구되고 있다.남쪽 바위 면에는 삼존불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 면에는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을 표현해 놓았다.9. 용장사지남산에서 가장 큰 절터이다. 특히 둥근 형태의 특이한 3층 대좌 위에 몸체만 남아 있는 용장사지 석불좌상은 신라 고승 대현 스님이 염불을 하며 불상 주위를 돌면 불상도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고 하는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마애석불좌상과 삼층석탑 등 보물 3기가 한곳에 있다.학술적 가치 또한 높으면서 경치가 특히 아름다워 등산길이 험해도 탐방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10. 원원사지 삼층석탑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바다를 통해 침략해오는 왜를 방어하기 위한 호국사찰로 울산과 경주 경계지역에 건립했다. 사찰의 동서쪽에 쌍탑을 세웠는데 탑의 기단에 12지신상을 새기고 1층 탑신에 사천왕상을 새긴 독특한 양식이다.부조로 새긴 사천왕상은 조각수법이 뛰어나 지금도 예술인들의 공부가 되고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두텁게 입체적으로 새겨 예술적 가치도 높게 평가된다.*경주 남부: 외동읍, 내남면, 낭산, 남산-외동읍: 입실, 구어, 모화, 문산, 석계, 녹동, 냉천, 제내, 북토, 방어, 신계, 괘능, 활성, 말방, 죽동, 개곡, 연안리-내남면: 용장, 노곡, 명계, 월산, 이조, 부지 덕천 안심, 상신, 박달 비지, 화곡, 망성리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