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불교문화의 관광자원화…천년세월 우리 삶에 스며든 불교…민족의 맥을 잇는 문화가 되다

한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공공재’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어디 여행이라도 가려면 가장 먼저 그곳에 유명 사찰이 있는지를 알아본다. 물론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에는 볼만한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그밖에 의성 고운사처럼 몇몇 사찰은 평소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사찰 음식을 장만해 대중들에게 공양하기도 한다.또 마을의 어느 할머니나 어머니는 ‘무슨 무슨 보살이네’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만큼 불교는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불교문화의 이해구미의 불교를 연재하면서 중간 중간 불교문화를 소개했다.인도 불교에서 시작된 탑의 유래와 구미에 남아 있는 탑의 형태, 구미 불교의 종단 변화, 불교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용의 의미, 일주문과 천왕문의 의미, 금오산의 사찰 분포 형태, 불상의 구별방법과 보살과의 차이점, 불상마다 다른 손 모양(수인) 등이 그것이다.종교와는 별도로 유교를 유교문화, 이슬람을 이슬람문화라고 부르듯이 불교를 불교문화라고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종교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다.하지만 불교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불교를 신앙해서 될 일만은 아니다. 우린 문화를 어려서부터 생활 속에서 체득하기도 하지만 학교 등에서 배운다.불교문화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불교문화를 이해하려면 역시 배워야 한다.구미의 대표적인 농악인 무을농악이 태어난 곳이 무을 연악산 자락의 수다사란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불교는 1천600여 년 이상 우리의 삶 속에 함께하면서 특유의 어울림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발전시켜왔다.그래서 불교문화를 이해해야만 불교문화와 결합한 우리의 전통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불교문화의 진정한 저력이다.‘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불교문화를 알아두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찰의 전각과 불상 등 문화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불교문화의 관광자원화지난 1일 광주불교사찰순례단 40여 명이 제주를 찾았다.이들은 관음사와 천왕사 등 제주불교 성지순례 길을 탐방한 후 제주불교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체험했다.이들이 도보로 걸었던 길은 제주가 제주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만든 불교 성지순례 길, 일명 ‘절로 가는 길’이다.제주는 2012년 ‘지계의 길’을 시작으로 6개의 불교순례 길을 조성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최근 관광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제주시는 도보순례 길 활성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제주불교순례 길은 마음의 혼돈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무아’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제주시는 이를 위해 보시의 길(대원정사~해륜사, 42.9㎞), 지계의 길(관음정사~관음사, 14.2㎞), 인욕의 길(관음사~존자암, 21㎞), 정진의 길(존자암~남국선원·선덕사, 18.6㎞), 선정의 길(선덕사·쌍계암~광명사, 39.6㎞) 등의 순례코스를 지정했다.제주의 불교성지순례는 최근 일상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걷는 즐거움과 함께 종교를 통한 마음의 안식과 여유를 가져다주는 건강과 치유의 관광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제주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는 불교문화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경기도는 ‘경기방문의 해’ 사업 중에 평택시 수도사 전통사찰 음식 학습체험관, 포천시 자인사와 파주시 보광사 투어, 양평군 용문사의 ‘산사로 떠나는 마음여행’ 등 불교를 테마로 한 사업들을 포함하기도 했다.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해 도지사 선거 당시 호국불교의 숨결이 이어지는 경북의 전통사찰과 불교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전통사찰의 보존과 관리, 불교문화 홍보와 관광자원화를 약속한 바 있다.이 도지사는 “유명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 미술, 불교 문학, 불교유적, 순례길, 그리고 무형적 문화로서 불교 음악과 의례의식, 수행생활 등을 종합해 체계적이며 독창적인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문화관광 테마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구미 불교문화 관광자원화구미는 아도가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한 신라불교초전지다.이후 통일신라 때에는 신라불교의 성지로 지역 곳곳에 융성했던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가탑과도 견줄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륵사 폐탑이 그렇고, 아도가 창건했다는 도리사가 그렇다.구미시는 장세용 시장 취임 이후 최근 문화와 관광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관광진흥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이에 자문할 전문가 자문회의를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하지만 국내 최고 산업도시라는 명성에 밀려 새로운 관광콘텐츠를 찾기란 쉽지 않다.그래서 장 시장이 주륵사 폐탑 복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구미의 불교문화 자원은 어떤가. 충분하다.아도화상이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파했던 구미시 도개면에 신라불교 초전지가 있다.신라불교 초전지는 경북도 3대 문화권(유교·신라·불교권) 조성 전략 사업에 선정돼 국·도비와 시비 등 400억 원을 들여 2017년 10월13일 개관했다.3만6천여㎡(1만1천 평)나 되는 부지에 초전기념관과 전통한옥체험관, 대강당, 불교음식체험관, 단체생활관과 전시가옥 등을 갖췄다.발우공양과 각종 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휴일에는 대관하기 어려울 정도다.이곳에선 기존 사찰 템플스테이와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객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있다.하지만 여기까지다. 지역 곳곳에 산재한 불교문화자원과의 연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도리사가 지척에 있고 주륵사 폐탑지가 바로 곁에 있지만 이와 연계한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도리사와 수다사 인근에는 아름다운 임도가 있다. 이를 이용한 순례길 걷기 등의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불자들은 윤달이 되면 각기 다른 세 곳의 절을 한꺼번에 순례하며 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삼사순례를 행한다. 최근에는 윤달과 관계없이 불자들 사이에서 성행하고 있다.구미시 사암연합회를 통해 삼사순례객을 모으고 다른 지역 불자 단체들과 교류하며 순례행사를 갖다 보면 더 많은 외지 불자들이 신라 때 찬란하게 꽃피웠던 구미의 불교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구미를 찾을 것이다.물론 의성 고운사처럼 사찰도 사찰 나름의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천생산 천생사처럼 가을이면 국화 축제를 연다든지, 도개 문수사의 와인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도 괜찮다.각 사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계해 관광자원화할 수도 있다.◆대혜 스님(금오산 약사암 주지)이 시대 최고의 과제는 경제와 관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고 그 쓰일 곳을 만드는 것은 관광이 큰 몫을 담당한다.그런 면에서 구미는 큰 가치가 있는 곳이다.산업지향적인 구미에서 관광마저 진흥시킨다면 구미의 발전은 약속된 것이라 확신한다.불교와 유교 등 역사적 문화와 천혜의 자연 그리고 현재 산업기지인 구미 국가산업단지를 관광자원화할 수 있다면 구미는 한국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이다.금오산은 어느 도시의 산보다도 특별하다. 이 때문에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감탄한다.최초의 도립공원에 걸맞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할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수많은 산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올라보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금오산 마애여래불뿐만 아니라 곳곳의 등산로와 전망대, 역사적 가치는 전국 세 곳의 금오산 중의 으뜸이다.금오산과 신라 최초의 불교 전래지 모례원, 태조산 도리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금오산 약사암에서 굽어보는 낙동강은 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세계 어느 지역의 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또 구미 국가산단은 생산에 그치지 않고 산업의 역사를 가르치고 그에 따른 전시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산업문화로 만들어 낸다면 국내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이제는 공장만 지어서 윤택한 삶을 사는 시대는 아니다.경제와 문화가 조화를 이룰 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후손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이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천 년을 한결같이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진리 체득한 이, 모두 ‘붓다’ 사찰엔 다양한 부처 있어 손모양으로 제 이름 말하네

사찰에는 많은 부처가 있다.석가모니불 외에 미륵불이니, 아미타불이니, 약사여래불이니, 아미타불이니 그 수를 세고 외우기도 어려울 정도다.왜 이렇게 많은 부처가 존재할까. 불교 학자들은 불교가 ‘진리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래서 유교나 도가, 희랍철학 등과 같이 노력해서 진리를 체득한 이들, 즉 진리와 하나가 된 인간을 ‘성인’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들을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진리가 곧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라는 말로 이 때문에 다양한 부처가 있을 수 있다.◆셀 수 없이 많은 부처현재를 관장하는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다.하지만 인간세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이를 관장하는 부처가 연등불(과거), 미륵불(미래)이다. 시간적 차이를 둔 이들을 합쳐 삼세불이라고 한다.또 위치상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서쪽에는 아미타불이 있는데 이를 삼계불이라고 부른다.공간상 우주에는 지구 외에 다른 많은 세계가 있다. 이곳에도 진리를 체득한 이들이 있으며 이들을 동서남북, 상하 등 방위로 표현해 10방의 부처, 즉 시방불이라고 한다.그러다 보니 사찰엔 많은 부처를 모시고 있다. 통상적으로 법당 가운데 부처를 앉히고 양쪽에 두 보살을 두는 협시가 일반적이다. 일종의 비서 역할이다.대웅전 석가모니불 곁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극락전 아미타불 옆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뜻을 받든다.금오산 약사암처럼 약사여래불 곁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앉힌다.이와는 달리 보살이 주존이 될 경우에는 보살보다 낮은 협시가 함께 모셔진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 곁에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지장전 지장보살 곁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앉아 있다.◆불상은 손으로 말한다불상을 자세히 보면 손 모양이 모두 다르다. 불상의 이름은 이를 통해 구별할 수 있다. 이를 ‘수인’이라고 한다.처음 인도 불교는 인도문화를 중심으로 오른손을 강조해 오른손이 주가 됐지만 불교가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왼손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화했다.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오른손과 왼손이 혼합해 쓰이고 있다.우리나라 각 사찰에 모셔져 있는 불상 중 비로자나불의 경우 인도문화와 중국문화가 혼재된 보습을 보인다.앞서 불상의 이름을 수인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은 구품인, 비로자나불은 지권인 등 특정 수인을 사용한다.항마촉지인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마왕을 항복시킨다는 뜻으로 석굴암의 석가모니불이 이 모양을 하고 있다.약사여래불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상태에서 왼손은 약기인이 된다.(약그릇을 들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손의 방향이 바뀐 불상도 여럿 있다)극락이라는 이상세계를 주관하다는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양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대 동그랗게 만드는 손 모양으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돈 내놓아라’라고 하는 모습이다.마지막으로 비로자나불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든 뒤 왼손의 검지를 세워 말아쥐는 모습이다.◆부처와 보살보통 불상은 의복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모양은 상투의 모습이 종교적으로 변화한 육계(정수리가 두둑하게 솟아오른 모습으로 최고의 지혜를 나타냄)와 나발(머리카락이 소라고둥처럼 틀어 말린 모양)로 특이하다.불상은 약사여래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물건을 손에 쥐지 않는다. 수행자의 무소유를 강조한 것이다.이에 비해 보살상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의 국왕을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보살상에는 왕관(보관)과 영락이라고 하는 다양한 길이의 구슬장식과 장신구를 표현한다.귀고리와 팔찌, 발 찌를 한 보살도 볼 수 있다.보살상은 갖고 있는 물건으로 구별한다. 문수보살은 칼을 쥐고 있고 보현보살은 폐업경(불교경전)을 들고 있거나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관세음보살은 군지라는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대세지보살은 폐업경이나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는다.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은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보살로 이마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달을 상징하는 하얀 원이 묘사된다.잘 알다시피 지장보살은 육환장과 투명한 보주를 들고 있다. 금오산 법성사 마당에 가면 큰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 상을 만날 수 있다.구미에는 규모가 아주 큰 불상 2구가 거대한 암벽에 조각돼 있다.하나는 보물 제1122호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고 또 하나는 보물 제490호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다.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라고 불렸다.하지만 형태 등을 종합해 본 결과 보살의 모습이 아닌 부처의 모습이라고 판단해 문화재청이 2010년 마애여래입상이라고 명칭을 변경했다.이처럼 천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윤곽은 흐릿해지고 일부는 손상돼 당초 만든이의 생각과는 다른 이름이 붙는 경우도 생겨났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인동에서 선산으로 가는 길목 황상동 속칭 돌고개(석현)라는 고갯길 왼쪽, 산과 공장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선 큰 바위가 있다.신라의 영원한 통일을 기원하며 사방정토, 극락세계가 이 땅에 성취하길 위해 만든 석불상으로 보물 제1122호인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돌부처는 높이가 7.2m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바위의 면이 고르지 못하고 곳곳에 균열과 부서짐이 심하지만 보존상태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인근에는 금강선원이라는 절과 석불상 정리 괴장에서 나온 작은 파편들이 있어 예전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마여여래입상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육계가 있고 잘 정제된 듯한 얼굴의 이목구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턱 끝까지 내려온 큰 귀다.대체로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의 이 불상은 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있다. 왼손은 바닥이 안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밖을 향하게 해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인의 모양으로 보아 구품인, 즉 아미타여래에 가깝다.이에 비해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모서리에 조각돼 있다. 여래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다.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도 원만 상으로 처리됐다. 귀는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처첨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이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은 아마도 경주인 듯하다. 신라시대와 통일신라 때 제작된 대부분의 마애불상이 수도인 경주로 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물론 금오산 해발 800m에 있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도 큰 바위 모서리를 활용해 같은 방향을 응시하도록 만들었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에는 구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에서 파견된 한신이라는 장군이 어느 전쟁터에서 백제군에게 포위됐다.그런데 꿈에 보살이 희모시자(중국 항주의 승려회통에 기록, 아미타불을 말함)로 변신하고 나타나 도망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이에 한신 장군은 보살이 알려준 대로 작전을 수행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한신은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지만 생명의 은인이었던 희모시자, 즉 아미타불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 황상동 이곳 암석에 희모시자의 모습을 조각했다고 한다.현재 균열에 따라 보호각을 씌워 둔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더 이상의 균열을 방지하고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정밀안전진단과 데이터 분석연구를 진행하고 있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나, 금오산 마애여래입상과 같은 석불상은 절벽이나 바위의 면을 조각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다.대부분 조성될 때 그 모습, 그 위치에 있어 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의 전파 경로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삼국유사 기행단…‘덕심 장착’ 구석구석 이야기 무대 찾아 발로 뛴다

이노버즈와 대구일보는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는 ‘삼국유사 기행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단은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해 영화, 드라마, 뮤지컬, 인형극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와 접목하는 등 삼국유사를 역사문화산업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삼국유사 기행단은 경주를 비롯해 포항, 영천, 울산, 대구, 부산 등 인근 도시의 역사문화와 문화관광산업에 관심이 있는 인문학자, 역사학자, 기업인, 언론인, 교육계, 작가 등 50여 명으로 구성됐다.이들은 각자 소속된 단체 또는 독자적으로 삼국유사를 공부하고 있다. 매주 삼국유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기행단은 정기적으로 매월 1회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 서너 곳을 방문해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내고, 다시 새로운 시각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대구일보는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를 매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1년에 한 번씩 ‘새로 쓰는 삼국유사’를 책으로 엮어 전국 국·공립도서관에 배부할 계획이다.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의견을 모으고, 정보를 교류하면서 삼국유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터전으로 삼는다. 삼국유사 기행단 운영과 블로그 운영에 대해 소개한다. ◆삼국유사 기행단 구성대구일보는 지난 2월 20여 명으로 삼국유사 기행단을 꾸려 처음 오릉과 숭의전, 나정, 양산재, 창림사지, 표암재, 석탈해왕릉, 명활산성 등에서 삼국유사 기행을 시작했다.대구일보에서 기행단 운영에 대한 총괄 책임을 맡고, 알영로타리 유소희 회장이 부단장, 경주문예대학 이인숙 시인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블로그는 출판사 인공연못의 이원주 시인이 운영자로 다양한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정보를 교류하고 편성하는 책임을 맡았다.문화해설은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과 류정숙 문화해설사가 우선 붙박이 해설사로 초빙됐다. 또 남산 지킴이 오희, 손은조, 하명옥, 이상범, 이희자, 장근희 등의 해설사가 문화해설을 보조해 진행하기로 했다.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과 한순희 경주시의회 전 의원, 이상애 경주시 전 공무원, 언론인 박대호·이은숙 기자 등도 자문역할과 함께 삼국유사 기행을 통한 문화콘텐츠 육성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이령, 지명숙, 우진호, 이상희, 박용, 정임현, 이제이, 정민정 시인 등 경주문인협회와 해동문학, 웹진시인광장 등의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도 삼국유사 기행에 적극 참여하며 창작활동에 의견을 보태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역사문화 산업 현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삼국유사 기행단은 매우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활동한다.매월 1회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삼국유사 기행에는 보통 20~50여 명이 참여한다. 참여자들이 떡, 귤, 감, 사과 등의 간식과 김밥 등을 협찬해 늘 가족 같은 분위기다.-첫 삼국유사 기행: 2월16일 오릉 주차장에 모인 기행단은 류정숙 문화해설사의 해설로 첫 기행을 시작했다. 박차양 도의원이 금방 쪄온 떡을 나누어 주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신라의 나라 구성과 박혁거세 옹립,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로 재구성했다. -두 번째 기행: 3월16일 30여 명이 토함산 정상에 올라 석탈해의 흔적을 더듬고, 삼국유사 기행단 발대식을 가졌다. 기행단의 안전 기원제를 겸했다. 이어 석탈해왕 탄강지, 숭덕전, 김알지의 탄생지인 계림 등을 기행했다.-세 번째 기행: 4월20일 대릉원을 둘러보면서 미추왕릉과 내물왕릉, 벌지지에서 박제상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포항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을 답사했다. 내물왕과 실성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네 번째 기행: 소지왕의 월성 환궁과 내란을 짐작하게 하는 서출지,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을 둘러보며 왕릉 지정 현황과 학자들이 지정하는 왕릉의 위치를 추정해 밝히는 시간도 가졌다. 법흥왕릉을 둘러보며 신라왕릉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도 공부했다.-다섯 번째 기행: 6월22일 사천왕사지에서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살펴봤다. 선덕여왕릉, 황복사지, 진평왕릉에서 도시락을 펼쳐두고 삼국유사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진덕여왕릉까지 둘러보았다.-여섯 번째 기행: 7월27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에도 기행은 계속 이어갔다. 신문왕릉, 효소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을 돌아보고, 추령재를 넘어 감은사지, 이견대, 문무왕릉도 찾았다. 만파식적 설화와 원성왕의 왕위 찬탈 과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일곱 번째 기행: 무더위를 피해 8월31일에 기행을 했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에 모여 호석이 잘 정비된 경덕왕릉, 흥덕왕릉까지 돌아보며 역사의 흔적을 꼼꼼하게 살폈다. 경덕왕릉과 흥덕왕릉은 특히 입구에 조성된 소나무숲이 일품으로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곳이다.-여덟 번째 기행: 가장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던 신무왕의 능과 신라가 기울기 시작했던 52대 효공왕릉, 희강왕과 민애왕의 능을 둘러보며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신라하대 피의 역사를 찬찬히 살폈다. -아홉 번째 기행: 10월26일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기에 신라 멸망의 터 포석정, 시대적으로 맞지 않게 비정되었다는 삼릉, 경애왕릉, 헌강왕릉, 정강왕릉을 둘러보며 천 년 왕조 신라의 붕괴에 대한 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했다.-열 번째 기행: 지난 23일 기행할 답사단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모집했다. 대형버스로 이동하기 위해 35명으로 제한했다. 5분 만에 접수가 끝나버렸다. 삼국유사 기행에 대한 열의를 짐작하게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5시간 동안 신라 마지막 왕 김부대왕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연천까지 기행하며 천 년 신라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마지막 기행은 다음달 21일 신라 세 번째 여왕인 진성여왕의 흔적을 찾아 양산, 용의 설화가 전해지는 처용랑과 망해사로 계획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에서 신화 같은 삼국유사를 그대로 해석해 전해주는 해설을 통해 역사 현실을 추정하고, 이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기행은 계속 이어진다. 기행단으로 움직이는 매월 정기적인 기행 이외에 3~4명이 매주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는 기행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 카페삼국유사 이야기에 대한 풍성한 정보를 나누는 사이버공간을 마련, 운영한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이원주 시인이 경주 남산, 역사기행 경주, 경주 힐링로드 등 책으로 출판된 경주지역의 오래된 역사 이야기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정보의 바다를 운영하고 있다.많은 사람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삼국유사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창작을 이어간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육성하고, 문화관광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카페인 당기는 날…달콤한 당신을 따를까 씁쓸한 그대를 따를까

‘아메리카노 커피의 맛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다소 관용적 표현이 있다. 여기엔 아메리카노의 쓴맛을 쓴맛대로 음미할 줄 알아야 ‘인생의 쓴맛’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는 애매한 메시지만이 담긴 듯하다.사실 ‘커피를 커피답게 제대로 즐긴다’는 의미란 그 경계가 무척 모호하다. 다만 취향과 니즈에 따른 개별의 초이스 정도만 가능하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할 듯. 이번 연재는 초반부터 그 목표를 설정해본다. 다름 아닌 그간 얕게만 인지해 온(우리와 같은 지극히 일반인 기준) 커피 본질적 지식을 부디 ‘(작은) 개념 정립’의 장 정도로 여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디오피아에서 시작된 커피물고기는 나무에서 나지 않지만 커피는 분명 나무에서 자란다. 서기 8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커피나무의 시발은 에티오피아 카파주에서 비롯된다. 카파주는 에디오피아 남부에 위치한 작은 지역으로, 커피나무는 이곳 카파주에서 양을 몰던 양치기로부터 처음 발견된다.이는 양들이 목장 인근에 서 있던 나무 열매를 섭취, 그 뒤 (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각성작용(카페인에 의해)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양치기의 증언에 기인한다. 한편에서는 (커피의 시작이) 에디오피아가 아닌 중앙아시아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두 사안 모두 ‘정설’이라 하기엔 어딘가 미흡한 부분이 있으니 판단은 독자가 믿고 싶은 대로.하지만 정설에 가장 가까운 학설을 바탕으로 대략의 (커피) 연혁을 나열해 보자면, 에디오피아에서 출발한 커피나무는 예멘을 거쳐 9세기 페르시아와 1500년대 터키, 이후 16세기 네덜란드를 경유한 후 1600년대 후반 스리랑카로 유입, 1700년대 프랑스, 남아메리카, 쿠바, 멕시코를 차례로 지나온 뒤 1720년대 후반 브라질에서 정착됐다는 것이 그나마 공신력 있는 흐름도 일 듯하다.그렇다면 대한민국 커피의 시발은 과연 언제일까. 브라질 정착 이후 약 200년에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낼 적에야 비로소 ‘조선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 1800년 후반 당시 조선에서는 커피를 ‘양탕국’이라고 불렀다.양탕국은 궁중용어가 아닌 민간에서 떠돌던 지금의 ‘신조어’와 같은 말로, 여기서 양은 ‘서양’을 의미하며 탕국은 ‘보약’을 뜻한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 넘어온 (보약과 같은)검은 물을 바로 양탕국이라 부른 것이다.이 커피의 진정한 시작을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아관파천’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다름 아닌 이 커피라는 것이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로부터 조선에 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아관파천은 명성황후 시해 후 신변에 중차대한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가 조선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숨겨 보호를 받게 된 사건이다.여담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로부터 공수 받은 커피를 특별한 장소에서만 음미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정관헌’이라는 곳인데 고종의 ‘전용 휴게실’임과 동시에 외교사절단을 응대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몇 해 전 커피와 관련된 조금은 우습지만 신박해 마지않은 소식을 접한 바 있다. 세계 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을 거머쥔 유수의 바리스타가 우리나라의 믹스커피를 맛보고 극찬을 전했다는 실로 믿기 힘든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우리에겐 너무나 친숙하고 간편하기 만한 믹스커피가 외국 바리스타의 입맛에는 적잖이 충격이었나 보다. 믹스커피의 출현은 커피자판기와 맥을 같이한다.1970년대 후반 D식품회사에서 출시한 믹스커피가 선풍적 인기를 끌며 커피자판기의 수요와 공급도 기하급수적인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친구와의 우정을 도모할 적엔 ‘캔 커피’를 함께 나누자. 사실 이 모든 것이 TV광고의 폐해이긴 한데, 어찌됐건 대한민국 최초의 아시안게임이 열린 해인 1986년, 라면을 주식으로 삼던 어느 어린 육상선수와 더불어 캔 커피는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이게 된다.추출 후 음미해야 하는 ‘원두커피’의 초입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터줬다. 당시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가 단행되며 해외여행객들의 추이가 상승, 이처럼 외국 왕래가 잦아짐에 따른 결과로 해외로부터 들여온 원두 도입은 ‘대중화’로 업그레이드 되기에 이른다. ◆많고많은 커피 종류커피에 조예가 깊은 이들에겐 큰 메리트 없겠으나, 최소한 커알못(커피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만큼은 향후 커피 선택의 범주를 높여주는 나름 유용한 정보일 것이라 믿어본다. 그런 의미로 ‘특별’하고, ‘특이함’을 철저히 배제한 채 가장 대중적인 커피 종류들로만 엄선(?), 소개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하나 더, 대중적 커피에도 나름의 사연과 개별의 방식이 있다는 정도의 소소함도 더불어 만끽해 보길 바란다.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커피 세계(?)에선 ‘떡국’과도 같은 시그니처마저 띤다. 떡국을 한번 먹을 때마다 하릴없이 한 살을 더 먹듯이 아메리카노는 진정한 어른의 등용문(?)이랄까.여하튼 가장 대중적이되 쌉쌀한 향취가 일품인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기반에 물을 추가한 후 연하게 만들어 낸 커피다. 조금 더 강한 맛을 원한다면 자신 있게 ‘샷’을 추가해 보자.커피의 아이덴티티를 오롯이 느끼고자 한다면 ‘에스프레소’가 제격이다. 먼지만큼이나 잘게 갈린 원두가루를 고압에 쪄내(통과) 그대로 추출해낸 커피다. 에스프레소는 곧 ‘커피의 베이스’라고 지칭되며, 쓰디쓴 커피 맛의 시쳇말로 ‘본좌’라 일컬어지기에도 별 무리가 없다.흔히들 당이 떨어질 때, 아니면 급격한 스트레스를 하릴없이 만끽해야 할 때, 그때는 ‘카라멜 마키아토’를 선택해보자. 쉽게 단맛이 나는 에스프레소라고 떠올려보면 된다. 에스프레소에 고소한 밀크를 곁들인 후 단맛의 캐러멜 시럽으로 화룡점정을 찍어내는, 말 그대로 고소해마지않은 단맛의 향연이다.소프트함을 원하지만 단맛은 싫다. 그렇다면 ‘카페라떼’로 한번 갈아타보자. 마키아토와는 달리 에스프레소에 오롯이 우유만 믹스해 낸다. 여기다 초콜릿을 얹는다면 바로 ‘카페 모카’로 탈바꿈한다. 흔히들 ‘코코아’ 맛과 대동소이하다고들 하는데, 어찌됐건 에스프레소가 베이스 되다보니 그 참을 수 없는 쌉쌀함, 그렇지만 딱 기분 좋을 정도의 달콤, 쌉싸름한 맛이 콜라보를 이뤄 우리의 미각을 시나브로 사로잡을 것이다.이밖에도 호주에서 들여온 ‘플랫 화이트’와 이탈리아의 심벌 ‘카푸치노’, 푹푹 찌는 아메리카노에 차디찬 휘핑크림을 얹어 그 풍미를 더한 ‘아인슈페너’도 개별의 추출 방식으로 특유의 향취를 자랑하며 개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추출에서 맛 달라진다커피의 맛은 ‘추출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추출 방식은 곧 ‘시간’을 의미하는데 그 시간의 제반도 여러 사항으로 나뉜다. 바로 입자, 물 온도, ‘로스팅’ 정도에 따른 차이다. 로스팅이란 날로 된 콩을 열을 가해 볶는 작업을 의미한다.커피를 내리는 방식은 크게 ‘여과식’과 ‘침출식’으로 나뉜다. 여과식은 쉽게 ‘핸드 드립’과 ‘에스프레소 머신’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침출식은 커피 가루를 물에 잠기게 한 후 추출하는 방식이다.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리 분쇄해 놓은 원두를 프렌치프레스라는 기계에 넣은 뒤,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후 플런저를 푸쉬, 커피 찌꺼기를 따로 빼내고 커피를 추출한다. 여기서 플런저란 압축 등에 이용되는 기계를 말한다.온수가 아닌 특이하게 ‘냉수’로 추출하는 방식도 있다. ‘워터 드립’이 바로 그것인데, 워터 드립의 최대 장점을 꼽으면 커피 향의 기복을 최소화시킨다는 데 있다. 찬물은 뜨거운 물에 비해 ‘산화’가 현저히 낮다는 이유에서다. 산화란 화학 반응 중 산소를 얻는 과정을 뜻한다.사실 추출 방식이나 종류 등에 앞선 ‘진정한 커피’의 아이덴티티는 바로 ‘누구’와의 ‘어떤 마음’으로 함께 즐기는 데 있다. 비록 근사해마지않는 럭셔리한 공간은 아닐지라도, 고양이 대변으로 빚었다는 수십만 원짜리 원두는 차치하고라도, 그저 좋은 사람과 입김 섞으며 호호 불어마실 수만 있다면 자판기 커피라도 그만이다. 그렇게 마주보고 마시는 커피 한잔이 간절한 오늘이다.Good communication is as stimulating as black coffee and just as hard as to sleep after.(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은 블랙커피 만큼 자극적이고 각성제 역할을 제대로 한다.) 앤 린드버그. 글·사진 군월드 IT 사업팀

기미…레이저 치료 강하면 오히려 ‘독’…약하게, 꾸준히 받아요

-대구 예일피부과의원 차영창 원장 “최근에 얼굴에 착색이 많이 생겼어요, 기미가 생긴 건가요?얼굴에 검갈색의 색소침착이 생길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피부 질환이 ‘기미’일 것이다.본인도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그만큼 기미라는 색소질환이 치료가 어렵고 재발이 잦아 환자들이 궁금해 하고 걱정한다는 뜻이다.기미는 주로 햇빛노출부위에 발생하는 후천적인 과색소 침착증을 일컫는 용어다.기미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흔한 원인은 자외선 노출이다.피부가 강한 자외선에 수년에 걸쳐 꾸준히 노출될 경우 표피 내 멜라닌 세포가 자극이 돼 과도한 색소를 피부에 배출하기 때문이다.여성호르몬도 기미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알려졌다.하지만 나이가 들어 폐경이 되면 기미가 자연적으로 호전 되는 것을 관찰 할 수 있다.또 남성도 나이가 들면서 남성호르몬 수치가 줄고 상대적으로 높아진 여성호르몬으로 기미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그 외에도 음주, 흡연, 스트레스, 과도한 다이어트로 인한 영양부족, 약물 (항경련제, 테트라사이클린계 항생제)등도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얼굴에 생기는 색소질환이 모두 기미는 아니다. 검버섯, 일광흑자, 오타양반점 등이 기미와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피부에 나타나기도 하고 기미와 섞여 있기도 한다.따라서 막연히 기미라고 단정 짓는 것 보다는 먼저 피부과 전문의에게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기미는 만성 재발성 질환이 맞지만 다른 색소질환인 검버섯, 일광흑자, 오타양반점 등은 비교적 쉽게 제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기미의 치료와 예방에 대해 알아보자.먼저 기미는 치료가 쉽지 않고 한두 번의 치료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하지만 최근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반복된 치료를 받는다면 큰 호전을 기대할 수 있다.기미 예방의 출발은 자외선 차단제 사용이다.기미 발생과 악화의 주범인 자외선을 차단하는 화장품을 꾸준히 잘 발라주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예방법이다.자외선 차단제는 도포 후 2시간정도 효과가 유지가 되고 이후는 그 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에 2시간에 한 번씩 덧바르는 것이 좋다.또한 백탁현상이 있는 자외선 차단제가 더욱 효과가 좋다.하지만 자외선 차단제도 피부에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야외활동 후 실내에 들어왔을 때 잘 씻어야 한다.도포요법도 유용한 치료법이다.흔히 미백연고라고 알려진 국소도포제(하이드로퀸, 레티노이드 혼합제품)가 판매되고 있다. 적절히 사용하면 분명 기미치료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동양인, 특히 한국인 피부에 연고를 한 번에 많이 여러 번 바르면 쉽게 자극이 오고 붉어지므로 적절한 도포방법을 전문의와 상의한 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이 밖에도 국소치료로 비타민 C를 피부에 침투 시키는 비타민 C 전기영동치료도 도움이 된다.또 다른 치료법은 레이저 치료이다.피부 색소질환 중 검버섯, 잡티, 일광흑자, 오타양모반 등은 강한 강도의 레이저 치료를 적절히 시행하면 빠른 호전을 보인다.문제는 강한 치료가 오히려 기미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기미 레이저 치료의 원칙은 부드럽고 약하게 꾸준히 치료하는 것.색소 레이저 중 가장 대중화된 것이 레이저 토닝 치료이다.레이저 토닝은 Q Switched ND YAG (C6,Revlite)레이저를 꾸준히 얼굴 전반적으로 뿌려 멜라닌 세포가 만들어 낸 피부의 색소 덩어리를 잘게 깨어 부수어 치료하는 방법이다.만약 얼굴에 기미 이외에 홍조와 혈관확장 등의 병변이 동반됐다면 혈관레이저(v-beam, excel V)를 이용하면 효과가 더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기미의 치료는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피부상태에 맞춰 몇 가지 레이저 치료를 꾸준히 받고 동시에 국소치료와 자외선차단제 등의 예방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이명, 극복할 수 있다…적절한 투약·이명 재활치료로 좋아질 수 있어

-이준엽 이준엽이비인후과원장(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 이명은 외부에서의 소리자극 없이 귓속 또는 머릿속에서 소리를 인지하는 현상을 말한다.이는 단어나 문구가 들리는 환청과는 다른 ‘삐’나 ‘웅’처럼 의미가 없는 단순한 소리이다.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산업발전과 함께 소음이 증가하면서 최근 이명환자도 급증하는 추세이며 국내연구에 따르면 성인 중 20%가 이명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이명의 원인과 종류는 다양한데 크게 타각적 이명과 자각적 이명으로 나뉜다.타각적 이명이란 신체의 근육이나 혈관 등의 소리가 실제로 환자 본인의 귀에 들리는 것으로 드물지만 객관적으로 확인도 가능하고 원인을 찾아 교정할 수도 있다.자각적 이명은 달팽이관에서 뇌에 이르는 소리신호전달체계에 이상이 생겨 외부소리자극이 없음에도 환자의 귀에 소리가 들리는 현상이다. 원인은 노화와 과다한 소음 노출, 두부외상, 중이염, 귀지 등 다양하며 이명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이명 환자가 호소하는 불편감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불편부터 귀의 심한 통증, 수면장애 및 이로 인한 불안장애, 우울증까지 다양하며 심한 이명 환자의 경우 자살충동까지 느끼기도 한다.아쉽게도 현대의학에서 이명의 원인을 단번에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문진과 여러 검사를 통해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대부분의 이명은 주관적인 증상으로 환자 외에 타인이 느끼기는 힘들어 환자의 진술에 의존하며 이명환자 진단 및 치료예후 판단에 있어 가장 기본이고 중요한 것은 이비인후과에서 시행하는 진찰과 청력검사이다.이명의 강도는 보통 환자 본인의 청력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즉 작은 소리도 잘 듣는 청력이 정상인 이명환자는 이명의 크기가 작으며 청력이 저하돼 큰 소리로 말해야 대화가 되는 사람은 이명도 상대적으로 크게 들리기 때문에 불편감을 더 느낀다.또 갑작스럽게 이명이 발생한 경우 청력이 정상인 사람은 청력이 저하된 환자에 비해 치료 후 이명이 사라질 확률이 높아 예후 판단에도 청력검사가 중요하다.이외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판단에 따라 청성뇌간반응검사, CT나 MRI등 영상검사, 피검사, 어지럼검사 등을 추가로 시행하기도 한다.진료실에서 이명환자를 마주할 때 환자들이 가장 흔히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왜 자기가 이명이 생겼는지’, ‘이명이 완치가 가능한지’ 등이다.원인은 자세한 문진과 검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환자들이 원하는 이명의 완치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이명의 치료에는 가장 쉬운 약물치료부터 귀내 약물 주사요법, 이명재활치료, 전기요법, 보청기(난청 존재 시) 등이 있다.이중 주위 환경음, 스마트폰앱이나 소리발생기를 통한 이명재활치료가 최근 많이 시행된다.성격 급한 국민성 때문이지 일부 환자는 약물치료나 수술 등으로 한 번에 낫는 치료를 원하기도 한다.이명은 투약뿐 아니라 상담과 재활치료를 통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하면 실망하며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치료를 선택하기도 한다.급성기 이명의 경우 초기치료만 잘 받고 관리만 잘하면 호전되는 경우도 많다.설령 오래된 난치성 이명이어서 비록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적절한 투약과 이명재활치료 등을 통해 이명을 관리한다면 잘 극복할 수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금오산 약사암…기암괴석 험지의 맨 꼭대기, 가장 뛰어난 절경에 내려앉은 ‘천년고찰’

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은 통일신라 이후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기 전까지 수많은 절이 곳곳에 들어서며 불교의 꽃을 피웠다.금오산은 동쪽에서 바라다보면 큰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와불 형태가 도드라져 보인다.평지지형에는 제법 큰 규모의 절이 지어지고, 산록에는 그 지형에 맞게 아담한 절이 들어섰다. 또 깎아지른 절벽 끝이나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자리한 절들도 생겨났다.신령한 영산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1천여m 가까운 산 정상에도 절은 자리했다. 금오산 정상에는 약사전과 보봉사, 동양사가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보봉사와 동양사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신라시대 창건했다는 약사전만 약사암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불교의 성지 금오산시절을 깜빡한 추위가 살을 에이게 하는 날. 금오산(976.5m)에는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평일 때 이른 강추위에도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에는 많은 등산객이 몰려 사진찍기에 바쁘다.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선굴이 있다. 고려 때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곳인데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도선굴 아래에 대혈사라든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일선지에는 ‘대혈사는 금오산 북쪽에 있다. 임진란 후에 중창하였고, 서원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 ‘야은 선생이 항상 대혈사 인근 누각 위에 거치하였고, 금산에서 대나무를 손수 옮겨 여기에 심었다. 고을 사람들이 대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지금도 오히려 짙푸르고 무성한데, 이름을 야은죽이라 한다’고 했다.이와 관련된 야은 길재의 시가 전한다.대나무 빛은 봄가을로 절의를 굳게 하고(竹色春秋堅節義)/ 흐르는 시내물은 밤낮으로 탐욕을 씻어주네(溪流日夜洗貪婪)/ 마음의 근원이 깨끗하여 티끌이 없으니(心源瑩淨無塵滓)/ 이로써 바야흐로 도리의 참맛을 알 수 있다네(從此方知道味甘)오래된 절과 영남 성리학의 문을 연 유학자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다.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멀리서 바라다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산이라는 이야기다.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해 오래 산을 탄 등산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산이다.그래서 일부 구간의 이름은 일명 ‘할딱고개’이기도 하다. 대혜폭포에서 수백m 정도 거리인데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가 급하긴 마찬가지다.또 이를 통과해도 8부 능선에 있는 철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철탑 인근은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안전시설을 설치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다.철탑을 지나면 평지가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다시 개축했다는 금오산성의 내성을 지날 때까지는 평지다.하지만 정상을 500여m 남겨두고 다시 급경사가 이어진다.할딱고개와 철탑까지는 그래도 잠시 쉬면서 뒤돌아서 멀리 구미시내와 낙동강을 조망하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정상을 앞둔 이곳은 주변을 둘러봐도 참나무뿐이다. 눈을 시원하게 하는 그 무엇도 없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면 사고가 날 수 있는 곳이 금오산이다.정상 부근 작은 돌을 쌓아올려 만든 탑이 멀리 보인다. 한 노인이 사연을 담아 탑을 쌓았다는 이곳은 보봉, 백운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보봉사가 있었다고 한다.금오산 정상은 현월봉(976.5m)이다. 초승달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 각오는 했지만 추위가 만만찮다. 산을 오르며 느끼지 못했던 칼바람에 등산객들이 우왕좌왕한다.◆성속의 경계에 있는 약사암현월봉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약사봉이다. 그 아래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약사암이 자리를 하고 있다.정상에서 내려와 동쪽을 향하면 ‘동국제일문’이라고 쓴 약사암 일주문이 나온다.일주문은 앞으로의 공간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상징문이다. 일주문 너머는 부처님의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약사암 일주문을 지나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길 양옆으로 막아선 엄청나게 큰 바위틈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내가 서 있는 쪽은 음지이고, 겨울이고, 어둠이고, 세속적인 데 비해 바위 아래로 드러난 모습은 양지이고, 여름이고, 광명이고 성스럽다.경북 8경으로 꼽히는 금오산에서도 가장 절경인 곳, 그곳에 약사암이 있다.인공으로 만든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서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을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은 전각 뒤로 마치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절벽, 약사봉은 그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인 약사암은 신라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초년에 천하 비경을 찾아 이 바위 아래에서 참선할 때 하늘의 선녀가 하루 한 끼의 주먹밥을 내려주어 하루하루 요기를 했고 약사여래가 내려와 시중을 들어줘 사바와 번뇌에서 벗어나 고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약사암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학자며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의 일선지와 정조 23년(1799년)에 간행된 범우고에도 남아있다.일선지에 ‘약사전은 약사봉 아래에 있다. 돌 벼랑이 높이 솟은 곳에 바위틈을 타고 작은 암자를 지었다. 나무다리를 건너 절벽을 붙잡고 들어가는데 그 아래가 만 길이나 아득히 깊어서 내려 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또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 3리에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의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삼형제 불상 중 하나 이곳에계단을 내려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오른편에 삼성각이, 왼편에 본당인 약사전이 있다. 이는 모두 근세에 조성한 것이다.마당이라고 하지만 그 아래에 종무소 등 다른 건물이 이 마당을 지붕으로 삼고 있다.약사전은 1985년에 중수한 법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약사전에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있다.약사전 옆에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조여래좌상은 약사전에 모신 불상이며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을 두텁게 입혔으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새로 금을 입히기 전인 1960년대 사진을 통해 원만한 얼굴모습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우상학의 약사암 중수기(1935년)에는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구, 삼형제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그 중 1구는 김천 직지사에 다른 1구는 김천 증산면 수도암에 봉안했다고 한다.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수도암 석불좌상은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과 김천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3형제라고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이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또 다른 이야기도 약사전 중수기에 전한다. 석불을 모시게 된 배경과 약사전을 중수하게 된 이유다.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인 박유술이 불상을 만들고 금오산에 와서 석봉대 아래 쉬고 있을 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고 하며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우상학이 중수했다고 한다.약사전 석조여래좌상 옆으로는 일광, 월광보살이 협시돼 있으며 후불탱, 신중탱, 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만길 낭떠러지, 어마어마한 약사봉 절벽을 붙잡고선 약사암약사전을 뒤로하고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과 칠곡이 훤하게 보인다.약사전 바로 아래는 최현이 일선지에서 지적했듯이 천길 아니 만길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 너머로 종각이 있는데 출렁다리에 의지해 건너야 한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안전을 우려해 출렁다리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또 약사전 아래로는 좁은 철 구조물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는 동쪽 암벽에서 용출하는 약수를 받기 위해 만든 다리다. 이 약수가 나온다는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최근에는 이곳의 주지인 대혜스님이 국내 최소 크기의 마애불을 발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대혜스님은 약사암에서 멀지 않은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인근에서 부처님이 좌선하는 모습을 새긴 손바닥만 한 마애불을 발견했다.그는 “지난 추석쯤 우연히 바위 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발견했는데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방법이나 바위에 새겨진 글들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대혜스님은 이 마애불을 보호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약사암 난간 끝에서 내려다보는 공간의 아름다움은 마침내 낙동강과 그 평야를 끌어들여 눈앞에 펼쳐지게 하고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금오산 법성사…금오산 채우는 법성사 개울 물소리…도심 가까운 절에서 잠시 쉬어간다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서 움트기 시작한 신라불교는 낙동강 건너 선산읍으로, 국보 182~184호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된 고아읍으로, 이어 구미의 명산 금오산 등 구미 전역으로 확산했다.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신라불교의 성지로 우뚝 선 것이다.구미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한 금오산은 예부터 지역의 명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 수많은 절터 남아 있어금오산이 불교와 관련 깊다는 것은 옛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원래 대본산이었던 금오산은 한 때 남숭산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중국 황하강 유역에 있는 중국 오악 중의 하나인 숭산과 생김새가 비슷하다해 붙여진 이름이다.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숭산이라 하고 황해도 해주(천태종과 관련이 깊다)에 북숭산을 두었다.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 천태종을 창종한 후 문도들을 이끌고 남숭산(금오산)으로 옮겨와 수도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1편 신라 이후의 구미불교 중 선봉사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다.그가 대각국사 의천으로 호국불교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면서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을 높였다.금오산은 해발 1천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칭한 것은 모두 불교와의 연관성에서다.이렇듯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절이 금오산에 자리를 잡았다.1968년 진행했던 선산지구고적조사 보고서에는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또 다른 조사에서도 유구와 유적, 표석이 남아 있는 금오산 평지와 산록부, 정상부에 입지한 절터 18곳이 확인되기도 했다.이 조사에서 확인한 금오산 평지와 곡저부의 절터는 대혈사, 갈항사, 선봉사, 옥림사 등 7곳이다.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신라의 고찰 갈항사와 대각국사비가 있는 선봉사의 경우 규모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이에 비해 산록에 있던 절은 2단이나 3~4개의 계단식 터를 갖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며 규모도 작았다.물론 정상부에 있었던 절 또한 규모가 상당히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는 현존하는 약사암과 같이 입지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다만 성안의 동남쪽에 있었던 진남사는 터의 규모로 보아 상대적으로 잘 갖추어진 가람배치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금오산 절터, 지형에 맞춰 규모와 가람배치또 금오산에 자리했던 절들은 금오산의 지형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으로 지어졌다.산록배치형인 구미시 수점동 절골의 절터는 남과 북의 단애가 결정되는 지점의 폭포수나 병풍바위 등 수직적 구조를 배경으로 가람을 배치해 성속의 공간 구분이 명확한 도량조건을 갖췄다.또 현존하는 약사암과 같이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봉사와 동양사는 정상의 장점을 살려 가장 먼저 해를 맞거나, 구미지역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금오산 정상 보봉에서 조금 내려선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사터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자기, 옹기파편, 구들장 일부가 발견됐다.특히 약사암이나 보봉사 처럼 해발 8~900m 수준의 봉우리와 정상부에 입지한 절터는 거대한 암석이나 화강암 단애를 배경으로 조형된 것이 지형적 특색이다.금오산에 있던 절에 대한 기록은 최현의 일선지에도 등장해 그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일선지에 ‘금오산의 최상봉이 보봉이다. 봉 아래에 작은 사찰이 있으니 곧 보봉사이다. 남동쪽 수백 리를 두루 바라볼 수 있다’라던가 ‘동양사는 보봉사 동쪽에 있다. 아침 햇빛이 먼저 비치기 때문에 이름으로 하였다. 시선이 미치는 곳은 보봉과 다름이 없고, 산에는 해송이 많다’고 적었다.또 ‘전종사와 보제사는 금오산 서쪽 기슭에 있었다. 임진란에 함께 불탔다’고 기록하고 ‘도선굴은 금오산 북쪽에 있다. 상하로 푸른 절벽이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가운데에 바위 구멍이 있다.(중략) 민간에 전하길, 고려의 신승 도선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고 전한다.◆고려시대 창건했던 옥림사터에 재창건한 법성사이렇듯 남숭산, 즉 금오산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령스러운 산으로 예부터 많은 절이 모여 있었다.이곳에 현재 천 년 고찰 약사암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해운사, 고려말 창건했다가 폐사됐다는 옥림사터에 지어진 법성사 등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법성사는 현대 창건한 절이다.금오산 상가 주차장에서 구미시 형곡동을 잇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형곡동 전망대에 미치지 못해 오른편에 법성사라는 절이 있다.기록에 따르면 법성사 인근에 제법 규모를 갖춘 옥림사가 있었다고 한다. 옥림사는 고려말에 창건해 조선 중기인 정조 때 폐사됐다가 다시 고종 때 중건된 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폐사됐다고 한다.조선말인 고종 때 재건 당시에는 법당 6칸과 방 10칸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법성사는 구미지역에서 도심에 가장 가까운 절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절은 1962년 7월 해운사 주지로 부임한 지우 스님이 현 절터에 토굴을 마련하고 수행했던 곳이다.이후 1991년 4월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해 정면 3칸 규모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2층 누각형식의 종각, 천불전, 요사채, 종무소 등을 갖추고 있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법성사를 바라보면 절 앞으로 키만 늘씬하게 키운 소나무 몇 그루가 종각과 대웅전을 가리고 섰다.종각을 통해 대웅전을 올려다본다. 언제 칠했는지 단청이 가을 단풍마냥 곱다. 종각 아래인 천왕문에 들어서면 양편으로 사천왕이 그 큰 눈을 부라리며 호기롭게 지키고 서 있다.불교에서는 이 사천왕이 수미산(불교의 우주론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상상의 산) 중턱에 살면서 4방위를 관장하며 악으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 역시 부처님의 성역을 악과 사사로움으로부터 지켜내는 상징이라고 한다.대웅전에 다가가기 전에 종각 아래, 즉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누하진입이라고 한다. 종각루 아래를 지난다는 말이다. 이는 절을 찾은 이가 부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절 건축의 숨은 의도이다.종각을 통과하면 조금은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계단 위로 대웅전이 앉아 있다. 초기에는 법당과 요사채를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 왼편에 요사채를 새로 지었다.대웅전 오른편 뒤쪽에 문화재가 한 점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84호인 금오산 법성사 석가여래불상(좌상)이다.이 불상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헌종 6년(1840) 하고미면에 살던 정민기씨의 꿈에 5대조 할아버지가 자신의 소유 전답이 있는 원남동 일명 부처골에 나타났다. 이튿날 아침 그곳에 가보니 부처 형상의 불상이 있어 그 자리에 토담집을 지어 보존 관리해왔다는 것.이후 1965년께 지금의 구미문화예술회관(구미시 송정동)이 있는 곳으로 옮겨와 보관하다가 이 일대가 신시가지로 조성되면서 1970년께 법성사 창건주인 지우 스님과의 인연으로 법성사에 기증했다고 한다.이 석가여래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대좌 위에 나나의 돌로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불두는 마멸이 심한 상태였다.그래서 보존 중 마멸되거나 부서진 곳을 시멘트로 고쳤다가 2009년께 시멘트 등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아직 곳곳에 고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이 불상은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약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있다.대웅전 왼편에는 절에 있는 전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형태의 전각이 하나 있다. 산신각이다.전하는 말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 남겨진 무속인의 건물을 부수려 했으나 중장비 기사가 이를 꺼려 형태를 남겨둔 채 법당으로 꾸민 것이라고 한다.법성사는 그 규모와 맞게 단출하다. 아니 깔끔한 인상이다. 법성사는 왕성한 사회봉사 활동으로도 유명하다.1996년 봉사단체인 자비회를 결성한 법성사는 2002년에는 법운사회복지회를 설립하고 효행장학금과 중·고생 급식비, 학자금, 저소득층 생활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라오스 동북부 생쾅주 반폰통 지역의 교육지원 사업 등에도 적극적이다.법성사 왼편은 금오산 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있다.금오산은 원래 계곡이 깊지 않아 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법성사 옆 개울은 마를 날이 없다.앞서 선산지구고적조사 보고서에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었다. 아마도 이 말은 법성사 개울 물소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문화콘텐츠 육성 세미나…‘천년의 역사서’ 무궁무진한 활용법, 언제 어디서 펼쳐볼까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는 신라 천 년의 많은 흔적이 삼국유사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가진 우리와 직접 연결고리를 가진 떼려야 뗄 수 없는 핏줄과 같은 역사이자 현실이다. 대구일보는 삼국유사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역사문화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산업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삼국유사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지난 15일 경주더케이호텔에서 학계, 문화연구단체, 문화산업단체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세미나가 열렸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삼국유사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실례로 삼국유사에 실린 225개소의 절터 찾기,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등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어 충담재, 월명재 등과 관련된 축제를 소개하면서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테마로 축제를 개발해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경주남산연구소는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코스를 테마별로 개발해 연중 다양한 방법으로 운영한다. 또 문화유산에 대한 학습에 이어 현장 강좌를 개설, 운영하는 한편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한다.설화 또는 역사의 현장 유적지를 정비하고 사적비 또는 표지석, 향가의 연고지 건립 등으로 문화탐방객 유치를 위해 노력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고지마다 문화축제를 열어 뛰어난 인물의 정신을 계승하고 역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역사문화관광객을 유치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 또는 역사적 사실을 오페라, 연극, 음악 등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창작극으로 개발 운영한다. 이어 삼국유사 신화와 전설 등의 문화유산을 지역별로 알려주고 해설을 받을 수 있는 어플을 개발한다.◆경주대학교 임선희 교수 임선희 경주대학교 교수는 ‘김춘추의 평화와 화해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기법을 소개하면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문화유산을 스토리와 장소로 연계해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로 엮어야 한다. 김춘추가 외교전을 벌였던 일본, 중국, 북한의 역사학자와 당시 상황 관련 공동연구 발표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한반도에서 삼국통일 후 평화와 화해가 지속된 점과 삼국의 기술발전으로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점을 이해해야 한다.삼국통일 그 후부터는 한반도가 하나의 세력으로 외세에 대항했던 상황을 그리며 분야별 공간적 요소를 포함한 스토리를 완성해 이야기에 맞는 문화콘텐츠와 접목을 시도해야 한다.◆동국대학교 박종희 교수 박종희 동국대학교 교수는 4차 산업시대에서 삼국유사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도시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매력과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주에서 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삼국유사를 연결, 융합,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어 타지역과 연결하고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경주 역사문화에 과학의 새로운 옷을 입혀 21세기 융합관광의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역사적 현장을 재발굴하고 스토리텔링화 하고,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어야 한다.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연결, 융합, 소통이다. 경주는 삼국유사를 활용한 다양한 인성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관광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웹진시인광장 이령 시인 웹진시인광장 부주간 이령 시인은 삼국유사 내용을 모티브로 사랑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지역의 역사문화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관심을 유발한다는 전략을 소개했다.이령 시인의 삼국유사 사랑서사시의 내용은 크게 10장으로 구성된다. 총 10장에 걸쳐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적과 관련된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각장 5편씩 모두 50편을 싣는다.제1장-백률사(신라의 민심을 통합하려 했던 법흥왕 제위 시 이차돈과 관련된 나라사랑)-백률사는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절이다. 불교공인을 위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고 그의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쳐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자추사라 불렸다. 절의 진입로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풀이면서 나무이며 꽃이 피기까지 약 76년이 걸리고 한 나무의 꽃이 피면 숲 전체가 따라 꽃이 피고 한꺼번에 진다. 이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유사해서 공심의 대표적 유적이라 생각된다.‘누구의 피 울음인가 꽃 비경 덧널처럼 쌓이는 대 숲, 땅속 금강이 일제히 솟구치니 내 귀 천 년의 서루에 올랐다 내린다 소름 돋는 저잣거리 원성을 말아 쥔 북악산 솔이끼며 귀신새 소리마저 이곳에선 하얗게 날이 선다.만파식적 듣고 자란 서라벌 백률송순, 황룡이 승천하듯 굽이굽이 내달린 곳, 자추사 흰 피도 찰나에 지고 찰나에 지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1장 일부.◆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 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은 ‘삼국유사의 무궁무진한 콘텐츠’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역사의 뒤안길 기록, 신화와 설화의 보고, 불교유적의 스토리, 인물과 얽힌 이야기, 향가와 신라어의 본원 등으로 해부했다.삼국유사를 근거로 서사 공간으로써 활용이나 인터넷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접합 등을 도모한다면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은 무궁무진할 것이다.삼국유사의 설화에 깃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존재 양식에 대한 이해와 융화와 조화라는 이상적 지향을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킨다면 원형적 상상력과 구술성은 새로운 상품이 될 것이다.삼국유사에 소개된 향가는 한반도의 노래 행위가 구술행위 중심에서 문자로 넘어오는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고대 신라어를 복원하고 활용한다면 여러 가지 요소의 콘텐츠로 재탄생할 것이다.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마음을 생각하면서 삼국 당시의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이야기로 흡수해 재생산할 때 그 값을 다할 것이다.◆경북도의회 박차양 도의원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은 ‘스토리텔링이 답이다’는 제목으로 삼국유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며 스토리텔링 방법까지 제안했다.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의 중심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이야기다. 신라는 천 년 동안 경주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주를 빼고 삼국유사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경주야말로 삼국유사의 본고장이다.경주에는 많은 역사문화 유적이 산적해 있다. 곳곳에 구슬이 널려 있다. 등록된 문화재만 330개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다.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우리 눈에 보이는 비지정문화재도 수두룩하다.이런 보석들을 사람들이 보고 싶어 달려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스토리텔링해 꾸준히 알리는 방법뿐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연극 등의 대중적인 문화콘텐츠와 접목시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이런 문화콘텐츠로 경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토리텔링으로 옷을 입혀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지역정서에 맞는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경륜 있는 작가들에게 의뢰하거나, 작품공모를 통해 꾸준히 모집해 현실정에 맞는 이야기를 선정해야 한다.◆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문화재 활용을 통한 가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서악마을에서 삼한통일의 주역들과 함께 힐링여행을 기획 운영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를 산업화하는 과정을 소개했다.문화를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하자는 시대정신이 점점 커지면서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화재의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다.창의적 연출을 통한 문화재 활용은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넘어 현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소통을 원활히 하고 국민의 문화수혜를 넓히는 창조적 문화생산이 되고 있다.그뿐 아니라 문화재 활용은 보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문화재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듯 문화재는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큰 부가가치를 지닌 소재여서 21세기 문화국가로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한다.특히 삼국유사의 주 무대인 경주에서는 우리 시대 문화창조의 신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신라문화원에서 삼한일통의 주역들이 잠들어 있는 서악마을을 가꾸고 문화재활용을 통한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카메라로 보는 세상…놓치고 싶지 않은 이 순간…카메라로 담아 영원히 간직할래

사진을 두고 ‘찰나의 예술’이랬다. 일각에선 3차원의 입체를 ‘평면화’시킨 왜곡일 뿐이라 폄훼도 하지만, ‘나’의 모습과 ‘우리’의 추억을 가장 현실감 있게 추억할 수 있는 매개가 바로 사진임은 부정할 수 없다.다만 이번 연재만큼은 ‘스마트’의 이름이 썩 달갑지 않다. 부디 카메라는 카메라일 뿐으로 남길 바라건만, ‘스마트폰’의 전 방위적 범람으로 카메라 못지않은 성능의 ‘스마트폰 카메라’가 속속 등장, 이에 카메라는 하릴없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융합’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지만 시류는 받아들여야 할 터다. 카메라의 역사를 반추해봄과 동시에 스마트폰 역시도 카메라 발전의 혁혁한 밀알 중 하나임을 인정하고 수용해보자.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빛바랜 그 시절의 앨범을 뒤적여본다. 한 가지 이상한 건, 그 사진 속 어디에도 아버지는 없다. ◆카메라의 역사18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소는 프랑스, 당시 한 인쇄업자는 ‘비투멘’을 떠올렸다. 비투멘은 다른 말로 ‘역청’이라고도 하는데 역청은 석유와 석탄의 중간쯤 되는 물질로 보면 된다. 건조 방식은 인위적일 수도, 또는 자연 생성 둘 다 가능하다.어찌됐건 이 인쇄업자는 비투멘이 발린 널빤지를 ‘카메라옵스큐스’의 벽에 세워 세계 최초의 촬영을 시도했다.카메라옵스큐스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카메라의 시조쯤으로 보면 된다.원리는 어두운 공간의 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빛을 투과시키면 반대쪽 벽을 통해 외부의 풍경이 반대로 보이는 현상에 기인한다.대한민국 사진의 시발은 1880년대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는 단 1년 차이로 진정한 의미의 첫 촬영이 갈리는데 그것은 카메라의 도입이냐, 사진관의 첫 출현이냐로 나뉘게 된다.그것은 바로 카메라가 (중국으로부터) 처음 들여온 시기인 1883년과 촬영국, 그러니깐 지금의 사진관이 첫 개설된 1884년인지에 관한 작은 논쟁이다. ◆피사체와 뷰파인더카메라의 원조 격인 ‘핀홀 카메라’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노출시켜 필름과의 접점화 작업을 거친 뒤 사진을 찍어내는 개념이 여기에 투영된다. 여기서 핀홀 이란 ‘바늘구멍’을 말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 렌즈 없이도 사진 촬영이 가능함을 의미한다.카메라의 진정한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피사체’와 ‘뷰파인더’의 개념 정립부터 선행돼야 한다.피사체란 쉽게 말해 ‘사진을 찍는 대상’을 의미하며 뷰파인더는 촬영 시 초점을 콘트롤하거나 피사체의 정확한 (화면상) 위치선정을 가능케 해주는 일종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기본적으로 뷰파인더와 렌즈는 일자로 곧지 않다. 통상 뷰파인더와 렌즈는 개별의 구성요소로 분리돼있지만, 고급 사양의 카메라에선 렌즈와 뷰파인더가 일치된 경우도 종종 있다. 이를 ‘반사식 뷰파인더’라고 부르는데 반사식 뷰파인더는 렌즈 통과 뒤 사이드 미러를 지난 후, 거기서 반사된 빛을 표현하는 뷰파인더 방식을 의미한다.그렇다면 뷰파인더와 렌즈가 일직선에 위치해 있지 않음에도 물체가 찍히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펜타프리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펜타프리즘이란 직경의 측정 부위가 높을 때 사용되는 것으로, 프리즘식 윤척 내부에 속한 프리즘을 뜻한다.프리즘식 윤척은 입목의 상위 직경 측정 시 이용하는 도구를 의미하는데 결국 이 펜타프리즘이 빛을 꺾어버리는 거울을 통과, 뷰파인더에까지 빛을 결집시켜줌으로써 피사체를 찍어내게 된다.이제부터는 ‘셔터’의 구조를 한번 짚어보자. 셔터를 누르게 되면 셔터 앞에 장착된 미러가 자동으로 솟게 된다. 셔터는 촬영 중 빛의 투과를 콘트롤하는 장치를 뜻하는데 셔터의 속도에 맞춰 여·닫힘을 반복, 이 과정에서 발생한 빛이 필름에 맞닿는 것이 셔터의 촬영 원리로 설명된다.셔터는 ‘조리개’와 더불어 카메라 노출 기능을 담당하는데 특히 촬영용 카메라에서의 셔터는 프레임의 연속적 움직임을 위한 ‘빛의 차단 기능’을 지닌다. 조리개는 사진기 홀을 조정함으로써 렌즈를 투과하는 빛의 양을 콘트롤해낼 동그란 형태의 작은 장치를 의미한다.촬영한 사진을 가시화시켜 줄 필름 곳곳에는 ‘브롬화 은’이라는 물질이 곁들어있다. 브롬화 은은 물에 잘 녹지 않는 성질을 띠고 있으며, 빛에 오랜 시간 노출될 시 검게 변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필름뿐만 아니라 ‘인화지’에도 이용된다.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해온 ‘SLR’과 ‘DSLR’의 차이점을 분석해보자. SLR 카메라의 원리는 빛에 노출된 필름을 인화와 현상의 과정을 거쳐 사진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흔히들 ‘수동 카메라’ 또는 ‘일안 반사식 카메라’로 부른다.가장 눈에 띄는 장점으론 렌즈를 통해 유입된 상과 시야에 맺힌 상이 동일하다는 것. 이에 따른 자유로운 촬영에 용이하다. 다만 셔터를 아무리 눌러대도 미러가 솟지 않아 사진 촬영 시 시야가 가려진다는 단점이 상존한다.DSLR은 다른 말로 ‘디지털’로 표현될 수 있다. 기존 필름의 역할은 ‘이미지 센서’가 대신한다. 이는 곧 센서의 용량에 따라 화질 등급이 나뉨을 의미하는데 사실상 이미지 센서의 유·무를 제외하곤 DSLR과 SLR의 원리는 대동소이하다.참고로 이미지 센서란 렌즈를 통해 유입된 빛의 투과상태를 디지털로 변환 후 이미지화시켜주는 일종의 ‘반도체 기술’로 보면 된다. 앞서 연재에서도 다룬 바 있는 자율주행자동차에도 이미지 센서의 역할은 가히 혁혁할 정도다. ◆다양한 종류의 카메라범주가 워낙 방대한 터라 대표적 사례만 들어보고자 한다. 거울이 없는 카메라 ‘미러리스’부터 시작해보자. 미러리스는 디지털 카메라에서 명칭 그대로 미러가 제외된 제품이다. 이 미러는 ‘LCD’가 대체한다. 액정표시장치를 의미하는 LCD는 고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액체도 아닌 유연한 성질을 지닌다.미러리스는 뷰파인더 대신 ‘전자식 뷰파인더’를 적용한다. ‘디지털 화면’이라고도 하는데 참고로 뷰파인더의 종류는 크게 ‘광학식’과 ‘전자식’으로 나뉜다. 여기서 말하는 광학식이란 선명도 면에선 전자식을 압도하지만, 용량 면에선 전자식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별도의 렌즈 교체가 요구되지 않는 ‘일체형 렌즈’가 적용된 컴팩트 카메라. 다른 말로는 ‘소형 카메라’로 불리기도 한다. 앞서 소개된 미러리스, DSLR 카메라와 비교해 월등히 작은 사이즈를 자랑한다. 소형이다 보니 수동보단 자동화 기능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은 센서 탓에 해상도는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 함정.여기서 잠깐. 말로만 들어온 해상도를 글로 풀어보겠다. 해상도의 정의는 이미지상 가로와 세로 점 개수를 뜻한다. 이는 곧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 정밀도를 의미하는데 통상 1인치에 속해있는 픽셀(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의 수치를 해상도로 나타낸다. 여기다 살짝 덧붙여 보자면, 이 컴팩트 카메라 중 현출한 부가성능을 장착한 카메라들을 따로 모아 ‘꼭대기’ 혹은 ‘정상’을 의미하는 ‘하이엔드 카메라’로 분류하기도 한다.카메라인 듯 카메라 같지 않은 ‘스마트 카메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스마트폰’에 장착된 ‘스마트폰 카메라’가 최근 몇 년 새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스마트폰의 보급률과 스마트폰 카메라의 끊임없는 진화가 이를 가능케 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스마트 카메라는 ‘예술적 측면’을 넘어 ‘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명분이 선명해졌다.인공지능(AI)의 범람과 4차 산업의 거센 광풍에 스마트 카메라는 기존 카메라가 지녀온 ‘사유’의 개념에서 ‘공유’ 아이덴티티로의 변혁을 꾀하고 있다. 사진을 바로 찍고 바로 올려 곧바로 공유함으로써 구축될 ‘소통의 프로세스’는 카메라의 기능적 측면을 몇 단계 뛰어넘은 이른바 ‘공공재’적 형태의 카메라를 출현시키기에 이른다.사진을 추억 속 편린, 또는 보존적 매개로 정체시켜두는 것이란 이제 옛말이 돼버렸다. 카메라가 똑똑해질수록 사진의 기억은 또 다른 스토리가 되고, 이로 말미암아 개별의 스토리를 한데 모아 다방면으로 교류해가는 ‘공감의 장’이 펼쳐진다는 사실, 오늘날의 카메라, 그리고 사진이 품은 함의다.다만 일회용 카메라의 ‘드르럭’ 거리던 의성어가 그립고 혹시나 빛에 노출될까 필름 원본을 꽁꽁 싸맨 채 사진관으로 내달리던 그때의 기억, 항상 부족했던 필름 수를 탓하며 사진 한 장에 모든 추억을 담아 조심, 또 조심스레 셔터를 눌러댔던 그 날의 아련함이 문득 생각나는 겨울의 초입이다.4차 산업에도 추억은 있고, 인공지능에도 그리움은 상존한다. 가끔은 똑똑한 스마트 대신 조금 느리지만 정성이 깃든 아날로그가 끌리는 이유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사자암 절벽과 문수사…반은 동굴에 반은 목조건물 ‘반쪽짜리 법당’ 재미난 이름 차 한 잔 건네며 방문객 반겨

우리가 늘 보거나 상상하는 절의 모습은 이렇다.아름드리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넓은 산중에 물로 씻어낸 듯 깔끔한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화강석으로 만든 탑과 석등을 자리에 맞게 배치한 모습이다.또 그 소리는 어떤가. 가끔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에 몸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는 풍경소리, 그리고 간간이 절 옆을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 정도일 것이다.아마도 이런 모습이 일반적인 절,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한 사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청량산 중턱에 이 같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절이 있다.◆납석사의 오랜 흔적 남아이곳에 있는 문수사는 꽃과 음악이 있는 서정적인 절이다. 임진왜란 당시 당진현감인 정방준의 처 초계 변씨의 슬픈 전설이 서린 도개면 신곡리 문암산을 정면으로 보고 구불구불 농로를 따라간 곳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주차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청량산이다. 청량산 중턱에 문수사가 있다. 문수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절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데 현재의 절은 1948년 창건했다고 한다. 절터 곳곳에 널린 석탑 부재 등으로 미뤄 이곳에 오래전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기록에도 이곳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선산부사를 지낸 인재 최현은 일선지 불우편 ‘납석사조’에 ‘납석사는 신곡 문암 북쪽에 있다. 절 뒤에 석굴이 있는데 방 몇 칸이 들어갈 정도이다’라고 적었다.일선지가 지목한 위치와 일치하고 탑신부와 석탑 파편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납석사는 현재의 문수사와 부속 건물인 사자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에 남아 있는 각종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창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의 불교 탄압에 따라 언제 폐사되고 또 몇 차례 중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이후 1865년(고종 2년) 도적(일부에서는 일제가 도굴했다고 한다)의 침입으로 폐사된 것을 1948년 혜봉선사가 재창건했다.절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혜봉선사가 재창건할 당시 꿈에 노승이 말을 타고 내려와 사기를 편람 했다고 한다.이를 해몽하니 노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승마는 사자라고 해서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청량산, 절의 이름을 문수사라 지었다고 한다.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불과 50여 년도 안 됐다.혜향화상이 1972년 다시 절을 중건하고 1993년부터 절에서 서북쪽으로 150m 올라간 곳에 사자암을 짓기 시작해 2000년 완공했다.사자암 건립 이후 ‘반쪽짜리 법당’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유적과 유물산 내 암자 중 사자암은 천연동굴 입구에 목조 건물을 덧댄 구조로 문경 대승사에서 옮겨온 불상과 4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 탱화 중에는 1873년(고종 10년) 제작된 산신탱화가 있는데 국내 남겨진 산신 그림 중 비교적 오래된 유물에 속한다.문수사에는 2006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78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경전은 한국의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문수사에 있는 묘법연화경은 서체와 판식, 도각 등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고산 화엄사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간행연도가 1477년(성종 8년)으로 확실하고 완질본이어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또 문수사 극락보전 옆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 상은 통일신라 때의 석조 불상으로 높이가 82㎝로 작지만 전체적으로 신체 균형이 잘 잡혀 있다.하지만 머리부분이 부서지고 얼굴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윤곽을 알 수 없다.불신과 대좌와 광배가 모두 같은 돌에 조각된 보살상으로 양감 있는 어깨와 허리는 가늘게 표현하고 가슴은 풍만하고 결가부좌한 하반신은 다소 좁게 표현했다.전문가들은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등에서 당대 일급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 균형잡힌 신체의 비례나 섬세한 조각수법 등 여러 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때 통일신라 말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국화 향기와 선율로 가득한 문수사문수사 입구부터 가을의 고즈넉함을 알리는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한 산중을 울린다. 일주문은 없다. 청량산 정상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다.문수사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절이다. 절 식구들의 바지런함이 절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을 낙엽이 산중 곳곳에 쌓여가는데도 절 마당에는 낙엽 하나 찾아볼 수 없다.본전인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은 비탈면인데 각종 조경수와 꽃으로 장엄했다. 계단을 올라 극락보전 앞에 다다르니 가을 국화가 한 가득이다.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동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도록 한 찬불가와 극락보전 앞 국화가 이 절의 성격을 말해준다.꽃향기와 음악의 선율이 어울리는 서정적인 절이다. 극락보전 옆에는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자리를 차지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형상은 그을리고 망가졌지만 자애로움과 당당함은 그대로이다.극락보전 뒤 비탈면에는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숲은 솔바람 길을 따라 사자암까지 이어진다. 극락보전 옆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석탑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설 때 어느 나무인지 모를 소나무에서 솔방울 하나가 떨어져 산사의 적막을 깨는 댕그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온다.잔잔한 찬불가가 내리깔린 솔바람 길에 들어서니 날은 서지 않았지만 제법 찬 바람이 솔숲을 스친다. 찬불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조금씩 계단을 오르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상념이 사라진다.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일을 다음에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산비탈을 따라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자극적이지 않은 솔 향기를 뿜어낸다.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랐을까. 여유롭게 걸은 탓에 그리 힘들지 않다. 아니 찬불가가 주는 편안함에 힘들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계단 옆 수줍게 핀 들국화의 모습에 취해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어느덧 큰 절벽에 몸을 기댄 규모가 꽤 큰 암자가 나온다.문수사의 보물, 사자암이다. 2층으로 된 사자암 옆으로 산신각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사자암이란 암자가 기대선 절벽이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라는 데 어느 모습이 사자의 모습인지 사실 분간하긴 어렵다. 하지만 청량산 중턱 널찍하게 펼쳐진 절벽은 그 자체로 위엄이다.옛 납석사 방 몇 칸이 들어설 정도의 석굴이 있었다는 사자암은 2층 목조건물이다. 사자암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절벽에 몸을 붙이고 있다.1층은 참선방, 2층은 삼존불을 모신 법당이다. 산존불은 바깥으로 드러난 목조 건물의 안쪽인 동굴에 있다. 법당의 절반이 동굴, 나머지 절반은 목조건물이어서 ‘반쪽짜리 법당’이라고 불린다.참선방에는 항상 차가 준비돼 있다. 사자암을 찾는 이면 누구나 들러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절벽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사자암에서 바라보는 전경을 빼놓을 수 없다. 늙어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멀리 도개 신곡리의 누런 황금 들판이 보인다.사자암 바로 아래에는 데크로 만든 무대와 객석이 있다. 매달 보름을 전후해 이곳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가끔 와인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한다.그래서 문수사는 꽃과 차 향기, 선율이 있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절이다. 땡그랭, 땡그랭 풍경소리가 산중에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박자를 맞춘다. 사자암을 둘러보고 차향에 취해 문수사를 내려오는 길, 미련이 나를 붙잡고 자꾸 뒤돌아서게 한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흥덕왕…빼곡했던 천 년의 이야기 피로 물든 뒷 장은 감추고 싶은 듯 군데군데 이름조차 없구나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왕조사를 간단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천 년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소개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37대 선덕왕, 41대 헌덕왕, 희강왕, 민애왕 등은 왕들의 이야기가 집중되는 기이편에서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다.흥덕왕의 이야기도 아주 간단히 기록하면서 앞의 헌덕왕과 소성왕, 애장왕의 사연도 움푹 빠뜨렸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들추고 싶지 않았던 일연 스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원성왕 이후 잇따른 태자의 죽음과 소성왕, 애장왕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특기할만한 일이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고, 17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조들의 얼룩진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본격적인 신라하대를 열었던 형제들의 쿠데타를 픽션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삼국유사: 흥덕왕과 앵무제42대 흥덕대왕 때 보력 2년은 병오년(826)인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으나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암컷이 죽었다. 그러자 혼자 남은 수컷이 슬피 울어 마지않았다.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짝을 찾은 것으로 알고 이내 그 거울을 쪼아대었으나 그것이 그림자인 줄 알자 슬피 울다 죽었다.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IMG03}]◆새로 쓰는 삼국유사: 권력과 사랑-형제들의 쿠데타: 원성왕의 장남으로 태자에 임명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의 아들은 6형제였다. 준옹, 언승, 숭빈, 수종, 충공, 제옹 등이 6형제가 태어난 순서이다.원성왕은 이들을 순서대로 궁중으로 불러들여 나랏일을 익히게 했다. 준옹은 맏손자여서 아들들이 죽자 곧 태자로 임명하고 중책을 맡겨 말년에 병부령에까지 올랐다.이들 6형제는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성향은 각각 달랐다. 태자로 임명된 준옹은 천성이 심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했다. 준옹은 병부령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도 몸이 약해 잠깐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IMG03}]이에 반해 둘째 언승과 넷째부터 막내까지 수종, 충공, 제옹은 활달한 성격으로 나랏일에도 적극 참여해 권력에 대한 야망을 키우면서 자신들만의 세력을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셋째 숭빈은 소극적이고 차분한 편이었다.준옹이 원성왕의 죽음에 이어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소성왕은 왕좌에 오르면서 후계구도를 걱정해야 했다. 자신의 병이 심각해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았다. 아들은 아직 12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여서 스스로 나랏일을 이끌어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소성왕은 즉위 1년 만에 죽으면서 13살 어린 아들 청명에게 왕위를 넘겼다. 소성왕은 아들의 안위를 위해 동생들에게 섭정을 당부하면서도 몰래 비밀호위 무사들을 배치하고, 뛰어난 장수 명호와 정용을 시중으로 발탁해 아들을 엄호하도록 안배했다.소성왕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800년에 즉위했다. 이때부터 왕의 숙부 언승과 수종의 시대가 도래했다. 언승이 섭정하면서 병부령에서 상대등으로 스스로 옮겨 앉아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언승은 자신의 뜻을 잘 따르는 넷째 수종과 다섯째 충공을 병권과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으로 중용하고 실권을 휘둘렀다.그러나 애장왕이 18세가 넘어 성인으로 성장해 조금씩 자신의 의지를 펼치려 하자 삼촌 언승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애장왕이 23세, 재위 10년차에 접어들던 809년 일이 터졌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문제에서 왕과 삼촌 언승의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사신을 누구로 파견할 건지 예물을 무엇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로 마련할 것인지 등의 작은 문제로 시작해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상대등이었던 언승은 병부령과 상부령에 있던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병사들을 궁궐 깊숙이 배치하게 하고, 삼 형제가 칼을 빼들고 직접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애장왕의 비밀호위 무사들도 이미 언승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언승 형제들은 애장왕을 단숨에 베었다. 저항하던 애장왕의 동생 체명까지 처리하고,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애장왕은 23살의 젊은 나이에 이렇다 할 권력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헌덕왕은 특유의 괄괄한 성격으로 왕권을 박탈하는 일에 동생들을 모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없었던 헌덕왕은 자신의 일에 적극 찬동하고 앞장서는 수종을 태자로 삼았다. 이어 충공을 상대등으로 삼고, 막내 제옹을 병부령에 앉혔다.헌덕왕은 즉위 이후에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거문고를 타는 등으로 흥청망청하여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해 백성은 어려움에 처하며 신라하대 패망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흥덕왕의 사랑: 흥덕왕 수종은 애장왕의 여동생, 조카인 장화를 부인으로 맞았다. 당시 형 언승을 도와 병부령에 있으면서 권력을 자랑할 때였다. 수종과 장화부인의 애정은 궁궐을 벗어나 시중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별났다.장화부인은 언승과 수종 형제가 자신의 오빠 애장왕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장화부인이 10살, 어릴 때의 일이었고, 언승이 당나라에 소성왕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한 것처럼 백성에게도 그렇게 숨기고 즉위했기 때문이다.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헌덕왕이 죽고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장화부인은 28살에 왕비의 관을 썼다. 화려한 날들이 시작되던 무렵 장화부인의 귀에 오빠들에 대한 죽음의 진실이 들려왔다.믿어지지 않는 오빠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곰곰이 뒤집어 생각하니 왕이었던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둘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일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장화부인은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흥덕왕 즉위 1년을 맞은 날에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술에 취한 흥덕왕의 입을 통해 비극의 전말을 들었다. 절망하던 장화부인은 끝내 이승의 문턱을 스스로 뛰어넘었다.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쩌면 예고되었던 불운의 사랑인지 모른다. 현실로 닥친 사랑의 상실에 직면한 흥덕왕은 넋을 놓았다.그러나 흥덕왕은 당나라와 일본의 위협,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 흉년에 이어지는 도적떼들의 극성 등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대신들의 추궁으로 사랑의 병을 앓을 틈을 잃었다.흥덕왕은 헌덕왕 때와는 다르게 청해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그는 아들 없이 물러나 본격적인 피의 왕권쟁탈전 시대를 불러왔지만 죽음에 이르러 장화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사랑을 찾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미래 시간여행 가능할까…시간을 거슬러 갈 순 없나요

우리는 그간 많은 종류의 여행을 듣고, 접하기도 하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체험해 왔다. 앞선 연재에서 다룬 ‘우주여행’으로 말미암아 피니쉬를 끊은 줄 알았건만 이젠 하다하다 ‘시간 여행’으로까지 다다랐다.문제는 앞서 떠나온 여행들이야 간략한 개념파악이나 정보 등의 취합 정도로 훌쩍(?) 떠날 수 있다지만, 이 시간 여행이라는 건 고약하게도 3차원과 4차원, ‘상대성이론’을 일정 부분 득한 후에나 시도해 볼 수 있을 터다.그도 그럴 것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말미암아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시간)를 인력으로 되돌리거나 빠르게 감아내기 위해선 거기에 깃든 과학적 요소와 제반 원리를 응당 거슬러 올라가야 할 나름의 책무가 동반된다. ◆3·4차원이 무엇인가3차원은 쉽게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상이다. 여기서 ‘차원’을 이해해보고자 한다면 ‘원점과 ’축‘의 개념부터 되짚어야 한다. 원점 이라함은 모든 축이 맞물리는 이른바 ’만남의 광장‘ 쯤으로 설명될 수 있다.그렇다면 축이란 뭣을 의미할까. 축은 곧 ‘직선’과 동일선상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축 위의 두 개의 점은 원점과 같은 직선 위에 공존한다. 그러니깐 세 개의 점이 동일선상의 직선 위에 있는 전제하에서 그중 하나는 반드시 원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선결조건이 이뤄질 시 마침내 차원으로 넘어오게 된다.여기까지 이해가 된다면 차원의 크기가 곧 축의 개수임을 파악할 수 있다. 축이 하나면 1차원, 두 개면 2차원이 되는 셈이다. 1차원은 뒤가 없다. 다시 말해 곡선이 없다는 의미로 풀이되는데, 예를 들어 직선 중 여분 공간이 하나라도 존재함을 가정한다면 이것이 바로 1차원의 세계다.곡선의 시작은 2차원부터다. 1차원의 축에서 직각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이 바로 2차원이다. 이때부터 트라이앵글이 생성되고 원이 그려지게 된다. 3차원의 이해는 입체성을 지닌 ‘3D’ 기술을 응용하면 되는데, 2차원의 축이 시간에 흐름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든 ‘동적 성질’을 보인다면 이때부터 입체가 생기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다.시간여행을 반드시 가고자 한다면 4차원의 세계에 꾸역꾸역 진입해야 한다. 4차원은 또 다른 말로 3차원을 근간으로 한 ‘상상의 산물’ 정도로 이해해보면 된다. 우선 쉽게 가보자. 4차원은 말 그대로 4가지 차원으로 이뤄진 것을 뜻한다.축의 개수에 따라 차원이 늘어나듯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 공간에 축을 하나 추가한다면 4차원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상이지만은 말이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입체 공(3차원)의 궤적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4차원이라는 의미다.4차원을 학설적으로 종합하면 공간 축 상에서 이동한 거리와 시간 축 상에서 이동한 거리를 동일시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스페이스와 타임을 개별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개념으로 본다는 것인데, 시공간이 맞물릴 그 시점이 도래할 적에야 과거 또는 미래로의 여행을 공상이라도 해볼 명분이 우리 앞에 줘진다. ◆절대적 기준의 배제차원의 이해가 일정 부분 이뤄졌다면 상대성이론에 관한 파악도 덧붙여봐야 한다. 상대성이론의 캐치 프레이즈는 ‘절대적 기준의 배제’라고 우선 보면 된다.상대성이론에서의 힘이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개별로 줘진다는 것을 명시한다. 쉽게 말해 비록 동일한 공간에 처해진 사람들일지언정 각자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결코 동일신 해선 안 된다는 논리다.예를 들어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해있는 사람의 시간보다 반대로 느리게 가는 것이고, 개별의 속도로 빠르게 이동 중인 물체는 질량은 증가하는 대신, 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이 같은 상대성이론에 기댄다면 시간여행 시도 정도는 기대해 볼 법하다. 이는 시간여행 자체가 상대성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인데 빛보다 빠른 속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로렌츠의 변환식’과 시공간은 중력에 의해 그 형태를 좌지우지한다는 상대성이론과 그 맥을 같이한다.결론적으로 3차원의 시점에서 최단시간 내 동선은 2차원 기준, 찰나의 순간을 두고 삽시간에 공간을 이동하는 정도로 가정해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중력으로 인해 얽혀버린 시·공간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거리를 단박에, 다시 말해 ‘순간 이동’이 가능해진 통로를 생성시킨다.이것이 바로 ‘웜홀’이다. ◆시간여행의 필수는 ‘빛의 속도’시간여행의 선결조건은 ‘빛의 속도’다. 빛의 속도는 초속으로 따져 29만9천792.458km인데 여기서 초속이란 사전적 의미로 ‘운동의 시작점에서의 물체 속도’다. 시간 여행 자체가 가상이긴 하지만 이 가상을 한층 더 현실화시키기 위해선 ‘웜홀’이 전제돼야 한다.웜홀이란 블랙홀과 마찬가지로 중력이 무한정 증가한 시공간으로 정의된다. 사실 가시적 요소로 발굴된 것은 아니다. 그저 이론, 거기에 공상을 덧붙인 현재로선 ‘미지의 공간’ 쯤으로 미뤄 짐작해보면 되겠다.웜홀에서의 시간 흐름은 매우 느리다. 그 이유는 중력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시간을 지체시키는 원인이 중력이며, 그 중력 자체가 웜홀에서는 무한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웜홀을 통과하는 시간여행을 한번 가상해보자. 물론 어느 정도의 과학적 원리는 깃들어 있다.우선 타임머신이 필요하겠다. 타임머신을 ‘빛보다 빠른 우주선’이라 설정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웜홀의 입구를 지구에 착륙시킨다. 그리고 타임머신은 웜홀의 출구를 단 채 우주로의 시간여행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이 웜홀은 지구 시간 대비, 약 50배 가까운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 한 마디로 웜홀이 ‘중력장’이 돼준다는 얘기다. 출구를 달고 비행을 떠난 타임머신이 다시 지구로 귀환해 지구에서 대기 중이었던 웜홀의 입구와 맞물리게 한다.이제는 웜홀의 입구와 출구가 모두 지구상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시간과 공간은 이미 얽혀있는 상태다. 공상과 과학적 논리가 일정 부분 맞닿아 있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다.이 지점에서 시간 여행의 비밀이 조금은 해소된다. 2020년에 웜홀을 통과한 타임머신은 우주를 유영하며 나름의 시간여행을 만끽한 후 약 1년이 흐른 뒤 현실로 복귀한다. 그런데 웜홀은 지구 시간과 비교, 50배의 시간 지연을 일으킨다는 것이라 앞서 설명했고, 물리적 시간은 비록 1년의 여행이었지만 지구로의 현실 시점은 출발 후 50년 이 지난 2070년이 된 셈이다.종합해보자. 타임머신의 출발 시점, 다시 말해 웜홀의 입구는 2020년이며 돌아올 출구는 1년의 50배에 해당하는 2070년, 그러니깐 이 여행객은 50년 전인 2020년의 과거로 회귀하는 상상과도 같은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이론과 공상의 접점이다.우리에게 중력은 단순 지구가 우리에게 행하는 ‘끌어당기는 힘’을 의미하겠으나 시간여행자에게 만큼은 중력이란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일 것으로 보인다. 다름 아닌 ‘질량’에 의해 말이다.여기서 하나 더, 시간여행의 필수항목인 ‘뮤온’을 간과해선 안 된다. 우주선 내부에 포함된 고에너지 입자인 뮤온은 수명이 약 100만 분의 2초에 그친다. 이 정도 수명으론 광속으로 떨어진 다 손치더라도 1㎞도 나아가지 못한 채 낙하해버리고 만다. 흔히들 뮤온을 두고 ‘우주 물질’이라고도 부른다.다만 뮤온이라는 것이 빛의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역으로의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흐르게 된다. 이는 곧 뮤온에 적용된 시간의 흐름을 더욱 늦춰 미래로의 여행이 가능해진다는 가설로 풀이된다.흔히들 우리는 이룰 수 있음을 ‘목표’라 하고 이룰 수 없는, 그렇지만 간절해마지 않은 것에 ‘꿈’이라고 지칭한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란 어찌 보면 과거로 회귀하고픈, 또는 현재를 탈피해 더 나은 미래를 앞서 경험하고 싶은, 그러니깐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 말미암아 탄생한 ‘허상의 산물’ 일 수도 있다.다만 4차 산업의 모멘텀이 당시만하더라도 소위 말 같지도 않던 상상력의 산물에 빗대 오늘의 현실과 마주한 만큼, 시간 여행, 타임머신, 웜홀로의 흡수를 ‘가능성 있는 유쾌한 상상’ 정도로 기대해봄이 어떨까.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골다공증, 특별한 자각 증상 없어 예방 중요”

골다공증은 골량의 감소와 함께 골질의 약화로 인해 뼈의 강도가 약해짐에 따라 골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질환을 말한다.골다공증은 특히 여성에게서 유병률이 높은데 이는 여성들이 폐경 후 에스트로겐 분비 변화로 인해 골흡수가 진행되기 때문이다.질병관리본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50세 이상 여성 35%와 남성 8%가 골다공증을 앓고 있으며, 평균수명의 연장과 더불어 유병률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골다공증은 특별한 자각증상이 없어서 많은 환자가 골다공증성 골절이 발생한 이후에 질환을 발견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검진을 통해 조기 진단이 가능하고 예방적으로 골다공증을 치료 하고 골절을 예방할 수 있다. ◆골다공증성 골절골다공증성 골절은 뼈의 약화로 인해 작은 충격에도 뼈가 부러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여러 관절에서 발생할 수 있고 대표적으로 고관절 골절과 척추 골절이 있다. 골다공증성 골절은 대부분 고에너지 손상에 의한 골절이 아니고 단순 낙상 후 발생한다. 다른 골절과 달리 70대 이후의 환자나 기저질환이 많은 환자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에 치료에 어려움이 있다. 고관절 골절은 일단 발생하게 되면 대부분 수술적 치료를 요하고 치료 후에도 환자의 신체 능력 및 보행 능력에 많은 저하가 있다.또 1년 이내 사망률이 10~30%에 달하므로 골절 발생 전 골다공증의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골다공증 진단골다공증을 진단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중에너지 X선 흡수계측장비를 통해 골밀도를 측정하는 것이다.20~30대 동일 성별의 평균 골밀도와 비교해 본인의 수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T 점수가 -2.5 이하인 경우 골다공증으로 진단한다.기저질환이 없는 경우 65세 이상의 여성 및 70세 이상의 남성의 경우 1년에 한 번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추천된다.골다공증의 가족력이 있거나 이전에 골다공증성 골절이 발생한 과거력이 있던 등의 위험성이 높은 환자의 경우 65세 이하의 경우에서도 검사를 시행하는 좋다. ◆골다공증성 골절 예방충분한 영양 섭취 및 운동은 뼈 건강에 기본적인 요소이다. 최근에는 근감소증이 골다공증성 골절과도 많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유산소 운동뿐만 아니라 근력운동과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그러나 이것만으로 골다공증을 치료하고 골절을 예방하기엔 무리가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조기에 골다공증을 진단해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다. 골다공증은 증상이 없어서 많은 환자가 대수롭지 생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문제는 골절이 발생한 후 치료를 하면 시간과 경제적인 소모가 많고 치료 후에도 기능 회복이 더디다는 것.골다공증을 진단받았으면 전문의와 상의해 골절 예방을 위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다양한 골다공증 약제가 시중에 있으며 대부분의 약제가 골흡수 억제제로 활발해진 골흡수를 막아 골량을 증가시키는 약들이다.투약의 용이성을 위해 경구약 뿐만 아니라 1~3개월 및 1년 단위로 맞는 주사제 등이 있다. 그러나 많은 미디어에서 오랜 기간 이런 종류의 약을 투약하는 경우 비전형 골절이나 치과치료 시에 하악 골괴사 등의 합병증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도해 환자들이 많은 걱정을 하고 외래로 찾아온다.하지만 이런 합병증의 발생률은 매우 낮으며 3~5년간 약제 투여 후 골절의 위험성을 평가하여 약제의 중단 및 지속적인 투여를 전문의와 상의해야 한다.최근에는 골다공증약의 꾸준한 발전으로 골흡수를 막는 약 외에도 골생성을 증가시키는 약제가 개발돼 환자의 상황 및 중증도에 따라 치료제의 선택이 필요하다. 비교적 고가의 주사제이고 매일 또는 1주일에 한번 복부에 주사를 맞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효과가 좋아 사용이 증가하는 추세이다.이외에도 칼슘 및 비타민D 보충도 매우 중요하다. 뼈를 생성하려 해도 뼈를 만드는 재료인 칼슘과 비타민D가 없으면 골생성이 더딜 수밖에 없다.식품으로 보충할 수 있지만 고령의 환자에게선 체내 수치가 아주 낮은 경우가 많아 경구약으로 보충하는 것이 좋다.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비타민D 결핍이 50% 이상의 환자에서 있다고 보고되는 만큼 적절한 보충이 필요하다. 도움말=영남대병원 정형외과 박찬호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건선,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기

-계명대 동산병원 피부과 김성애 교수무더운 날씨에도 긴 팔, 긴 바지로 무장한 채 진료실을 찾는 건선 환자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중증 건선 환자들은 피부에 나타나는 붉은 발진과 두꺼운 각질 증상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위를 피하는 것보다 피부를 가리는 것을 선택하곤 한다.건선은 몸 속 면역 시스템의 이상으로 인해 홍반, 염증성 판상, 은백색의 인설 등이 나타나는 만성 면역 매개성 질환이다. 특히 무릎, 팔꿈치와 같은 돌출 부위에서 잘 발생하며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눈에 띄는 병변에 고통이 심하지만 전염되지 않는 질환이다. 그러나 질환에 대한 사회의 이해도가 낮고 편견이 많아 환자들은 증상을 감추거나 아토피 등 다른 피부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다행히 최근 건선 질환과 치료법에 대해 연구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중증 건선 환자들에게 몸 속 면역체계에서 인터루킨-17A와 같은 건선 유발인자를 직접 차단해주는 생물학적 제제를 처방하면 효과를 빨리 나타낼 뿐만 아니라 완치에 가까운 호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부위는 작지만 환자 삶에 끼치는 영향이 높고 치료가 까다로웠던 두피나 손발톱, 손발바닥 건선 증상에도 좋은 효과를 보인다. 치료환경이 발전하면서 건선 관절염과 같은 동반 질환을 미리 살피는 치료도 가능해졌다. 건선 환자 3명 중 1명에서 나타나는 건선 관절염은 손가락, 발가락 관절과 같이 작은 관절에서 시작되며, 초기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절 변형을 불러온다. 건선을 치료하는 피부과 전문의들은 건선 관절염을 늘 염두에 두며 환자를 살피고 있다.제도적인 변화도 있었다. 만 2년 전부터는 중증의 판상 건선이 산정특례 질환에 포함됐다. 오랜 기간 치료와 관리를 이어가야 하는 건선 환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치료비 부담을 낮춘 것이다.전신치료, 광선치료 모두 각각 3개월 동안 받았음에도 체표면적의 10% 이상에 증상이 나타나는 등 세부 산정특례 기준에 부합하는 환자는 치료비에 대한 본인 부담금이 10%로 줄어든다.이처럼 건선의 치료 환경은 최근 몇 년 사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그럼에도 과거의 치료 실패 경험으로 인해 치료를 포기하고 숨어 있는 건선 환자들이 아직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해 전 세계 31개국에서 중등도에서 중증의 건선 환자 약 8천300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설문 조사 결과, 건선 환자들이 깨끗한 피부를 갖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해변에서의 일광욕’이 꼽혔다.또 수영하기, 포옹하기, 악수하기 등이 높은 빈도로 꼽혀 뒤를 이었다. 보통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누릴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이제 건선 환자들도 제대로 치료 받으면 얼마든지 깨끗한 피부를 되찾고 당당한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건선을 감추거나 숨기지 말고 병원을 찾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