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픽션과 팩트 사이, SF영화

영화 마션의 한 장면. 영화 패신저스 한 장면. 영화 괴물 포스터.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영화 패신저스 포스터. ‘픽션’은 분명 허구다. 그렇다고 ‘완벽한 허구’라 하기에 썩 개운치 않다. 영화는 ‘어쩌다’가 아닌 ‘어쩌면’을 함의한다. 특히 공상과 과학이 깃든 영화는 응당 현실을 수반한다. 현재를 토대로 미래상을 제시한다는 것인데 바로 ‘공상과학영화’의 아이덴티티다.실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 제작된 SF영화의 주요 소재는 지구 온난화, 핵전쟁, 우주화 시대 등으로 점철됐다. 당시 영화의 시점은 주로 2000년 중·후반으로 설정되곤 했는데 현재에 이르러 돌이켜보면 일맥상통한 부분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영화는 ‘픽션’과 ‘팩트’가 합쳐진 ‘팩션’ 정도로 보는 것이 근접한 정의일 듯.그간 숨 가쁘게 내달려온 연재 일정이었다. 인공지능(AI)과 각종 산업군의 만남을 주선하느라 가일 층 박차를 가해온 날들은 잠시 물린다. 대신 이번 연재는 몇 편의 SF영화를 소개하고 가벼운 소회를 나눌 수 있는 그저 무겁지 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반드시 돌아갈게. ‘마션’우주 세계에서의 ‘생존’을 그린 작품이다. 엔지니어이자 식물학자인 주인공이 화성 탐사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가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어렵사리 화성 착륙에 성공한 일행은 그곳에 숙소를 세우고 화성 탐사의 첫발을 내딛는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된 순간을 맞닥뜨린다. 화성 도착 후 일주일. 모래폭풍이 일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로젝트의 모든 프로세스는 하릴없이 중단을 맞는다.이로 인해 주인공은 일행과 떨어져 원치 않은 고립무원에 직면한다. 동료들은 각기의 몸에 부착된 생체 신호 작동이 중단된 것을 확인한 뒤 주인공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일행은 화성의 먼지로 남을 주인공을 추모하며 그곳을 뒤로한다. 콘트롤 타워였던 나사(NASA) 역시 주인공의 죽음을 공식화하기에 이른다.천운이었을까. 모래폭풍의 여파로 발생한 상처가 되레 공기 유출을 방지, 이로 인해 슈트의 압이 소멸되지 않음에 따라 주인공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생존이다.바로 이 지점부터 삶의 끈을 부여잡으려는 주인공의 사투가 그려진다. 그에게 남은 건 300일간의 식량뿐. 돌아간 일행은 4년 뒤에나 재탐사를 시도할 것인데 말이다. 주인공은 우선 그간 모아둔 인분을 활용, 화성에서 생성된 흙에 인분을 깔아 거름으로 이용한다.이제는 싹을 틔우기 위한 물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로켓연료를 떠올린다. 거기서 하이드라진과 질소를 개별 추출해낸 뒤 바닥을 드러낸 수소와의 연소를 통해 물을 퍼올릴 방도를 찾아낸다.문제는 불을 피우기 위한 도구가 없다는 것. 주인공은 떠난 일행의 짐 꾸러미에서 나무 십자가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곳에 불을 피운다. 비록 폭발은 일어났지만, 우주 헬멧을 착용한 주인공은 또 한 번의 천운을 받아들인다. 물론 연소에도 성공한다.이로 인해 감자밭을 두르고 있던 비닐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 이슬이 흙과 인분에 스며듦에 따라 감자의 싹이 돋아난다.이렇게 삶을 영위해 가던 주인공은 수일이 지난 후 NASA의 정밀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생존소식을 알리게 된다.의지의 산물이었으리라. 충전되고 있어야 할 로버가 어느 순간 이동해 있다는 사실을 NASA가 뒤늦게나마 발견했던 것이다.이때부터 NASA는 주인공의 생존과 생환을 위한 구출 작전에 돌입했고, 중국과의 공조를 통해 새 보급선 제작과 신속한 발사를 위한 프로세스에 착수한다.결국 NASA와 탐사대의 노력으로 주인공은 무사 귀환을 맞이한다.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끈을 놓지 않았다. 삶의 의지와 동료애, 그리고 불세출의 감성 ‘사랑’이라 함은 시·공간을 초월했다. ◆그곳에도 사랑은 있다. ‘인터스텔라’미래세계의 암막을 보는 듯하다. 인터스텔라의 배경은 분명 디스토피아다. 모래먼지로 가득한 노란 세상. 황사로 인해 호흡마저 가쁘고, 유일로 생존을 영위했던 옥수수마저도 병충해의 폐해로 소멸될 위기에 봉착한다.바로 이때 4차원의 문이 가시화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4차원이라기보다는 ‘모세의 기적’인양 유토피아로 가는 틈새가 열리는 셈이다. ‘희망의 로드’쯤으로 여겨보자. 주인공은 당위성이 있다. 바로 ‘인류 구원’의 차원이다. 이를 위해 그는 그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우주로의 개척을 떠난다. ‘제2의 지구’라는 시발을 위해 떠날 고독한 여정.이 영화의 백미는 ‘영상미’에 있다. 수십 광년을 아우르는 성간 여행은 SF 영화 특유의 입체미를 선보인다. 별 사이에 발생하는 개별의 성질 탓, 별들은 별도의 시간과 환경을 지닌다. 아름다운 장미 속 날카로운 가시가 상존하듯, 반짝임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나라 여행에는 생사를 걸어야 하는 리스크가 아울러 도사린다.공상과학에도 ‘사랑’은 스며들어 있다. 시기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은 ‘불멸의 상징성’을 내제한다. 수 십·백 광년을 지나야 할 먼 거리임에도 결국엔 내 고향, 그리고 내 사람으로 회귀한다는 것. 아마도 ‘수구초심’의 본능적 감성이 영화 곳곳에 깃들어 있는 듯하다.출발은 디스토피아를 대처하기 위한 대체 세계로의 탐험기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종국엔 미지의 범주로 신비로움을 내포하고 있는 우주에 관한 개척과 순수한 열정, 그리고 의지를 소개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딜런 토머스의 시 한 구절로 영화를 갈음할 수 있을 듯하다. ‘쉬 어두운 밤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패신저스’인터스텔라와 출발지점은 대동소이하다. 인구는 많고, 땅덩어리는 시나브로 줄어든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지구는 좁다. 생존의 위협은 자연스레 ‘탈 지구화’의 시류를 탄다. 이윤을 좇는 기업에선 ‘우주로의 이주 프로세스’ 사업 구축에 벌써부터 여념 없다.영화의 배경은 ‘아발론 호’로 명시되는 우주선이다. 신 행성으로의 탈출을 원하는 승객 5천 여 명을 싣고 광활한 우주 공간을 비행한다. 도착 예정시간은 120년 후. 승객들은 겨울잠을 자는 상태로 캡슐에 안착해 있다.하지만 비행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아발론 호는 불명의 우주 잔재와 충격, 그에 따른 소음과 파장으로 인해 주인공은 본의 아니게 동면에서 깨어난다. 출발 후 30년이 지난 시점. 도착까지는 아직 90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인간 세상에서의 수명으로는 신 행성의 유토피아도 채 맛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다시 잠에 빠지기는 만무하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그만의 시간. 외로웠고 또한 고독했으며 무던히도 추웠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소실점에 다다르기 전, 죽음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을 미리 알아채 버렸다면 그 후의 삶은 삶이 아니다.죽음을 각오하고 죽기 위한 수단을 연구한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 이랬던가. 절망 속 가느다란 삶을 유지해가던 와중 주인공은 ‘오로라’와 맞닥뜨리게 된다. 거기서 과연 희망을 찾았을까. 이 의문의 답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다만 최첨단의 디지털 세상은 결국엔 더불어 가는 것이 아닌 혼자만의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는 양면성을 주지시킨다. ‘편의를 좇는 본능’과 아울러 말이다. ◆가족의 재발견 ‘괴물’한국 SF영화의 심벌이자 불세출의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괴물’을 놓칠 순 없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작품임에도 부정(父情)은 부정(不正)할 수 없다는 원론적 의미를 재확인시켜준 가족 영화다.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주인공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그의 딸. 자식들의 ‘나라’가 되는 그의 이름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인류의 이기로 말미암아 발현된 괴생명체의 출현은 이들의 소박해마지않는 일상을 원치 않는 특별한 그 날로 이끌어 낸다.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사망자 명단에 오른 딸의 이름을 발견한 아버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다. 위험구역으로 통제된 한강 유역으로 잠입한다. 그때부터 딸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그들만의 사투를 벌인다.감독은 말한다. 이 영화는 SF적 기술력을 투영했을 뿐, 단순 공상도 상상력의 산물도 아니다. 괴생명체는 영화를 돋우기 위한 주요 장치, 딱 그 정도다. 괴생명체에 굴복하지 않는 가족애, 그들은 먹먹한 가슴을 묵묵한 걸음으로 대신했으리라. 팍팍한 세상, 헐은 저녁 한 끼에 그저 감사해야 하는 시린 오늘에, 그래도 가족은 말랑했고 풍족하며 따뜻할 것임을 믿는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우리동네자랑 -고령군

고령군지도 고령군은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가야산으로 둘러싸여 6세기까지 대가야의 도읍지로 번성을 누렸다. 대가야(42~562)는 500여 년 간 존속하며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지만,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감추어진 채 신비의 왕국으로 전해지고 있다. 1977년 고령 지산동 44·45호 고분이 발굴되면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가야 문화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군은 최근 대가야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고령군은 8개 읍·면에 인구가 3만4천여 명에 불과하지만, 찬란한 문화와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지역경제가 활력을 되찾는 ‘강소 지자체’로 웅비하고 있다. 1. 지산동고분군대가야읍 지산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 최대의 고분군이다. 대가야읍을 감싸는 주산의 남동쪽 능선 위에 우리 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인 지산동 44호와 45호분 등을 포함 하여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대가야 양식의 토기와 철기, 말갖춤, 금관과 금동관, 장신구 등 최고급의 유물이 출퇴 되었으며, 대체로 5∼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 대가야박물관대가야 및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해 놓았고 또 연간 1∼2회 특정 주제를 설정하여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다. 3. 대가야왕릉전시관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관람객들이 실물 크기로 복원된 44호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4. 우륵박물관악성 우륵의 위업을 기리고 국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관했다. 내부에는 우륵의 생애와 가야금의 기원에 대한 영상․그래픽과 가야금, 아쟁, 해금 등 전통 국악 현악기를 전시해 뒀으며 악기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코너도 마련해 학습과 관광코스로 더없이 좋은 곳 이다. 5.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대가야의 도읍지로 토기와 철기, 가야금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대가야의 역사를 테마로 하여 조성한 관광지이다. 신비한 나라 대가야역사문화체험, 대가야탐방숲길, 대가야 시네마 등의 시설과 통나무로 지은 왕가마을펜션(10동)과 세미나실, 인빈관, 캠핑장 등이 있다. 6. 대가야생활촌올해 4월에 개장한 ‘대가야생활촌’은 VR 등 최신 영상미디어를 통한 대가야인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으며, 주산성, 발굴체험장 등 체험학습과 함께 대가야인의 먹거리촌, 숙박시설 체험, 등 편의시설이 조성돼 있어 가야문화권 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7. 대가야수목원고령 금산재는 ‘낙동강유역 산림녹화비’가 건립되어 있는 등 녹화의 얼이 깃든 장소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산림 녹화의 위대한 위업을 일구어 낸 조상들의 피땀 어린 발자취가 남은 곳에 산림녹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가야수목원’을 조성했다. 대가야수목원, 산림 녹화기념관, 수석․분재관, 물놀이 시설 등이 갖춰져 있어 탐방객들에게 힐링의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8. 미숭산 자연휴양림대가야읍 신리마을 인근의 미숭산자연휴양림은 산림문화 휴양관(1동), 숲속의 집(2동), 황토집(2동)등 친환경적인 자재 를 사용한 숙박시설과 산책로, 등산로 등의 편의시설을 갖 추고 있는 산림문화 휴양시설 이다. 해발 300m 지점에 위치해 주변 경치가 좋고 울창한 숲 속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가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는 공간이다. 9. 강정고령보다산면 곽촌리와 대구 달성을 잇는 전국 최대․최고의 명품 보로 대가야시대의 토기와 가야금을 콘셉트로 설계되어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강정고령보와 우륵문화광장을 필두로 강변의 운치를 한껏 지난 다산체육공원, 좌학은행나무캠핑장을 거쳐 우륵교 에 이르는 국토 종주 고령군 낙동강자전거길은 4대강 자전거길 중 가장 아름다운 곳 20선으로 평가 받고 있다. 10. 가얏고마을대가야국 가실왕의 명을 받은 악성우륵이 가야금을 이곳에서 제작해 연주하니 소리가 정정하게 울려 정정골이라 했으며, 한문으로 표기하여 정정곡(丁丁谷) 또는 가야금의 禁자와 고을 谷자를 따서 금곡(禁谷)이라 전해내 려 왔다. 가얏고 마을은 가야금연주, 미니가야금만들기 등 문화체험 과 함께 딸기따기, 밤줍기, 김치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테마 마을이다. 11. 개실마을조선 중엽 무오시화 때 화를 입은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 점 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세거지 마을 80%가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에는 김종직의 종택, 사당 등 고택과 점필재 김종직과 관련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 어 한국 전통마을의 미를 느낄 수 있다. 12. 현대식 농촌휴양마을 예마을예마을에 들어서면 조형미가 느껴지는 예마을 건축의 아름 다움이 가장 먼저 우리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고급 유럽풍의 아늑한 건물과 넓은 잔디광장이 어우러져 다양한 시설에 설레면서도 동시에 아늑함이 느낄 수 있으며 2개의 센터건물과 숙박시설, 야외물놀이장, 잔디광장, 카라반, 오토캠핑장, 체험장, 마방 등을 고루 갖춘 가족형 리조트다. 김재호 기자 kjh35711@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15>-경산 경흥사

경흥사 입구에 서면 두 그루 은행나무 사이로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이 절의 유일한 보물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있는 곳이다. 가마솥더위가 이어지는 여름날 아침, 절집 기행에 나선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의 동학산(動鶴山)은 학의 형상이다. 그 이름도 학이 울며 날아와 앉았다하여 부쳐진 것이라 한다. 659년 신라의 승려 혜공이 한눈에 명당임을 알아보고 산 동쪽 자락 즉,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경흥사(慶興寺)를 창건했다. 절 터 좌우에는 학의 날개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다시 하나씩 있고, 건너편 계곡 앞쪽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이 계류는 금호강의 지류인 남천으로 흘러든다.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신라시대에 이미 창건됐고, 고려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4~5개의 부속 암자도 있었으며 가람 동쪽에 수십 명의 학승이 상주하던 큰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외부와 차단된 지형적 특성을 지닌 때문인지 절집을 찾아갈 때도 내비게이션이 잠시 혼란스럽게 했지만, 입구까지 잘 데려다 준다. 돌계단이 나타난다. 막돌로 쌓은 석축 사이로 파르스름한 이끼가 잔뜩 붙어있다. 사람들이 자주 밟지 않은 계단인 것 같다. 절 마당까지 승용차가 바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니 두 그루 은행나무 사이로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좌우 대칭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 사이로 대웅전이 좌정해 있다. 이 절의 유일한 금빛 보물이 있는 곳이다. 배롱나무 두 그루도 붉게 빛나고 있다. 보물 제1750호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가 돋보이고 작은 이목구비가 온화함을 느끼게 하는 이 목조불상은 약 380년 전에 만들어졌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른 아침시간이라 법당 안은 조용하다. 누군가 한사람이 부처를 향해 계속 절을 올리고 있다.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 경북 유형문화재였다가 2012년 2월22일 보물 제1750호로 승격됐다.원래는 지금의 명부전에 있었는데 1993년 대웅전을 완공하면서 이전·봉안했다. 1970년대 파손부위를 수리할 때, 본존불의 복장에서 1644년(인조22)에 작성된 복장기가 나왔다. 이로써 사찰의 창건연기는 물론 정확한 불상의 조성시기와 명확한 조성주체, 불상 제작자 등을 알 수 있었다.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35년부터 선승들이 동학산 남쪽 기슭에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고자 도모하였고, 수화원 청허(靑虛)를 비롯한 조각승들이 목조불상을 조성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17세기 전국에 걸쳐 크게 활약한 조각승인 청허의 조각세계를 연대적으로 이해하게하는 자료이다. 조각의 경향에서도 양감이 절제되고 고요한 상호,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가 돋보인다. 강직한 직선위주의 선묘, 주름표현 등에서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어 당시의 불상연구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불상의 재료는 은행나무인데 옛날에는 절을 창건할 때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훗날 불상을 조각할 때 그 은행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두 손가락을 약간 구부린 채 엄지와 중지를 붙인 사실적이고 우아한 손의 묘사가 돋보인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은 우선 크기에 있어서 높이가 1.58m이어서 위엄이 넘친다.등신대 크기의 황금빛 불상이 대좌 위에 앉아있으니 시선은 저절로 위로 우러러 보게 된다. 위엄을 갖춘 얼굴이지만 작은 이목구비가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손의 형태로 불교의 의미를 표현하는 수인은 깨달음의 순간을 알리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통견 법의와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지른 주름이 잘 드러나 있다. 1.2m 높이의 좌우 협시불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모두 화려한 보관을 썼다. 머리카락이 두 귀를 감싸면서 어깨 뒤로 내려 왔으며, 특별한 다른 장식은 없으나 우아한 모습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5호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의미로 수미단이라 부르는 데 지금은 한 단만 남아 있다. ◆수미단 부재이 절에는 또 하나의 문화재인 수미단이 알려져 있다. 불상을 모셔놓은 단을 불단 또는 수미단이라 한다. 이 명칭은 수미산(須彌山)에서 유래했다.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등록된 이 문화재의 명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5호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 . 상상의 동물이 달려 나가는 느낌을 내기 위해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를 표현한 수미단의 부분. 1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수미단은 현재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잔존 부재가 명부전 수미단의 일부로 삽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반적인 수미단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지금 남아있는 부재는 원래 수미단의 1/5 혹은 그 이하의 양으로 추정된다. 조각기법 그리고 조각 면의 구성과 배치, 채색이 뛰어나 당시 불교 목조 공예품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목조삼존불을 안치할 때 지금의 명부전인 대웅전을 짓고 수미단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부재에 조각된 소재 중에 황룡의 색감도 근래에 와서 덧칠한 흔적이 없어 고색이 완연하다. 이 수미단은 한 단만 남아 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부재에 조각된 소재는 게·물고기·개구리 등의 동물, 연꽃·모란 등의 식물, 용·기린 등의 짐승들이다. 상상의 동물로 표현된 기린의 꼬리 부분은 비스듬히 하늘로 향했는데 붉은 색으로 외곽선을 칠하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도 달려 나가는 생동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색감도 근래에 덧칠한 흔적이 없어 고색이 완연하다. 풀꽃 무늬 사이에는 검은색 게도 새겨져 있는데 앞면과 뒷면이 서로 뚫린 이중투각기법을 사용했다. 정면 왼쪽 끝에는 검은색 게가 풀꽃 무늬 사이에 새겨져 있다. 앞면과 뒷면이 서로 뚫린 이중투각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입체감이 더욱 돋보인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목공이 혼신의 힘으로 칼질을 했을 것으로 느껴진다. 명부전을 나와 대웅전 뒤편 언덕을 오른다. 독성각,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래된 몇 기의 부도가 한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 앉아있다. 경흥사의 부도들은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많이 사라졌다. 지금 남아있는 부도는 광복 이후 신도들이 수습해 보존될 수 있었다. 부도는 수행자의 마지막 흔적이며 뒤를 잇는 사람들에게 정진을 당부하는 무언의 상징이다. 부도에는 수행 승려의 사리가 모셔져있다. 부도에 피어난 거무죽죽한 이끼의 흔적과 한여름 동학산의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다. ◆승병의 훈련공간 경흥사는 임란 당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승병의 훈련공간이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승병들이 호국의 군사력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사명대사도 이곳에 머물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승병의 근거지인 밀양 표충사가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구릉지에 모셔져 있던 많은 부도들은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지금 남아있는 부도는 광복 이후 신도들이 수습해 보존될 수 있었다. 부도에는 각각 ‘해운당 치흠’, ‘금구당 선각’, ‘지월당 혜휘’ 같은 명문이 남아있어 주인을 알 수 있다. 거의가 별다른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종형 부도이다. 그래도 이 부도들은 그렇게 경흥사를 지키고 있다. 타고르의 신께 바치는 시, 키탄잘리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공간이다.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 당신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의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신라의 승려 혜공이 창건한 경흥사 전각들. 왼쪽부터 요사체, 문화재 수미단이 있는 명부전, 종무소가 보인다. 절을 떠나기 전에 보물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을 한 번 더 보려고 대웅전을 옆문을 열었다. 끊임없이 절을 올리던 사람도 없고 법당은 텅 비어 고요하다. 황금빛 불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누군가에게 절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절은 역사이고 문화이며 정신이니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천천히 불상을 바라보았다. 약간 살이 오른 얼굴 형상에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이다. 양쪽 입술은 살짝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문득 의심 한 덩어리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나무를 재료로 만든 것으로 이토록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나무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가. 부처는 제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참 모습이 왜곡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진리를 등불삼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했던 가르침은 바로 형상 그 너머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아차리라고 한 것이다. 다시 절집을 나와 이끼 낀 돌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간다. 잘 자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배웅해 준다. 목조불상의 세계를 보고나서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숨을 쉰다는 것을 알았다. 매미들의 긴 하모니도 들려온다. 여름이 깊어 간다. 박순국 언론인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경북, 청년이 온다<5>-울진 ‘마드레마르’ 최도연 대표

‘마드레마르 울진 해양치유’ 최도연 대표 ‘마드레마르’ 최도연(36) 대표는 프랑스에서 전문분야 공부를 하고 울진에서 ‘해양치유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당찬 청년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인 최 대표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회사에 취업해 회사원과 프리랜스 기업교육 강사로 활동한 앞길이 창창한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최 대표는 회사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왔다. 경북도에서 시행하는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로 울진에서 ‘마드레마르’ 라는 해양치유업체를 창업했다. ‘마드레마르’는 스페인어로 ‘엄마’를 뜻하는 ‘마드레’와 ‘바다’를 뜻하는 ‘마르’의 합성어다. ‘엄마의 마음을 품은 바다’ 라는 뜻이다. “회사 생활을 할수록 ‘내가 생각한 생활이 아니다’ 라는 강한 메시지가 송곳처럼 내 숨을 콕콕 찔러왔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디자인실 풍경, 내가 추구하는 디자이너의 삶이 아니었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출근길이 지옥 같았습니다.” 최 대표는 도시생활 내내 “뭔가를 이루고 해내는 보람과 행복감은 느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큰 맘먹고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비행기조종사 출신인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해양지역 울진을 택했다. 어촌으로 내려온 지금은 당당하게 ‘마드레마르’ 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울진 매력에 풍덩 빠졌어요도시생활에 식상함을 느끼고, 회사생활에 지쳐 나만의 힐링이 절실히 필요했을 그 시점에, 아버지가 울진으로 발령받으면서 가끔씩 울진 나들이를 했다. 처음에는 주말에 아버지를 뵈러 울진을 방문(?) 했었지만, 울진 나들이가 잦아지면서 울진이란 곳에 호기심이 생기고, 점차 정겹게 느껴지면서 맑은 숲과 청정한 바다 등 울진의 자연환경이 주는 ‘치유의 선물’이 느껴져 ‘울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울진의 매력에 빠져 들면서 피로했던 심신이 치유됨을 느끼게 된것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울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커져 경북도에서 진행하는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로 울진군을 지원했다. 청년창업으로 ‘해양치유 힐링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서비스하는 일을 하기 위해 울진에 내려와 ‘마드레마르 울진 해양치유’ 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최도연씨는 아버지 최형호(61)씨 어머니 고순미(61)씨의 외동딸이다. 아직은 생소한 ‘해양치유’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면서 부모님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 ◆창·농 위해 직장생활 접고 해외견학‘해양치유’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이 분야 전문가의 벤치마킹과 견학을 위한 목적이었다. 최 대표는 “프랑스어 딸라소테라피(Thalassotherapy)는 바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딸라사(thalassa)’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가 합쳐진 말로써 ‘해양치유’”라고 설명한다. 즉 ‘해양치유’는해수나 해양기후, 모래, 해니(머드), 해산물 등과 같은 해양자원을 이용하여 인체의 건강이나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딸라소테라피 스파를 이용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스파, 딸라소테라피는 지중해 바다로 해수온천 프로그램을 이용하며 힐링하는 것을 말한다. 최 대표는 “프랑스의 ‘생말로 스파’는 매년 3만 명 정도가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며, 그곳 생말로에서 사람들은 수중체험을 하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해초로 바디를 트리트먼트를 하고 해수를 이용해 전신 마사지를 하는 아쿠아토닉이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한다. ‘마드레마르 울진 해양치유 힐링캠프’의 계절 프로그램 중 하나인 승마체험을 한 후 체험단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지난 4월에는 서울지역 대학생과 직장인 등 약 30여 명의 체험단원들이 울진을 방문하여 해양치유의 매력을 체험하며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해양치유 체험 및 계절 프로그램 최도연 대표는 ‘해양기후치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해양 기후를 이용한 치유는 청정 해안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해양에어로졸(공기 입자), 태양광, 염지하수 등 해양기후자원을 이용해 심신)의 휴식을 취하며 치유하는 건강증진 활동”이라며 “청정해역 울진이 전국에서 최고”라고 설명한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도 해풍을 맞으며 운동을 하면 젖산농도의 수치가 낮게 나타나며, 해풍 속에 포함된 에어로졸의 작용으로 기관지 건강에도 매우 좋다”고 추천한다. 최 대표가 추천하는 울진에서의 해양치유는 △해변 모닝 필라테스 △금강소나무 숲 트래킹 △온천 & 해수족 △면역UP 스트레칭 등 다른곳에서는 정말 체험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코스가 매력적이다. 특히 “바닷가 앞에서 하는 해변 필라테스는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며, 유연성 향상과 기혈 순환을 도와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며 “울진의 자랑인 금강소나무 숲은 숲 길을 걷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 치유의 힘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한다. 해양치유 체험참가자들이 계절 프로그램 중 하나인 ‘해변 모닝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해양치유’의 미래“일상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고 있는 도시인들은 특별한 힐링이 필요합니다. 특히 백세시대를 맞아 공부와 회사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은 ‘쉼’이 곧 ‘생명 연장’과 관련된 ‘삶의 질 향상’과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필수 요건이지요.” 최 대표는 실제로 건강·휴양 관련 세계 관광시장의 규모가 전체 관광시장 매출액의 14%인 4천400억 달러(약 498조 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해양치유산업이 미래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직은 생소하지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치유와 힐링을 목적으로 꼭 해야 할 ‘해양 치유지역’으로는 청정지역인 울진군이 국내 최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군은 국내 유일의 금강송 휴양시설인 금강송에코리움을 개관하고 금강송 숲길따라 '힐링'을 추구하고 있다. 최도연 대표는 “울진의 보물인 금강 소나무 숲과 더불어 삼림욕, 덕구온천·백암온천의 온천욕, 경북의 바다 울진의 바다에서의 해수욕 등 3가지의 완벽한 콜라보로 울진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신의 치유를 선사하고, 더불어 울진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마드레마르 울진 해양치유 바다힐링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마음의 치유가 많이 된 듯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최도연 대표와 강윤석 덕구온천 대표가 마드리드 해양치유& 덕구온천리조트 업무계약 MOU 체결을 하고 있다. 강인철 기자 kic@idaegu.com

◆삼국유사 기행<24>- 문무왕 법민(상)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왜나라의 침략을 걱정해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해 바다 가운데 대왕암에 장사 지냈다. 경주 양북 앞바다 가운데 대왕암은 지금도 파도를 맞으며 굳건히 서 있다.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신라 제30대 왕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였다.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된 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에게는 부왕이 미처 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668년 당나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의 군사들은 철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왕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경주 남산 통일전에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 문무왕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다.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터를 누볐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후에 무기를 묻었다. 이어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노라며 바다에 묻혔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진정한 성군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경주 남산 통일전 정원에 신라 삼국통일 주역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 3분의 사적비를 건립했다. 가운데가 문무왕의 사적비다.◆삼국유사: 문무왕 법민(1)총장 무진(668년)에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0년 2월에 당은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치게 했다.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하자,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당 고종이 문무왕의 동생인 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귀국하여 왕에게 알렸다. 문무왕이 당나라군사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호국사찰 사천왕사지. 동서 목탑지와 금당지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김천존의 추천으로 명랑법사에게 비법을 물었다. 명랑법사는 남산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개설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벌써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절 집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이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법을 썼다. 이에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다. 671에 당나라가 다시 5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나, 다시 문두루 비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사천왕사지 입구에 서 있는 당간지주.당시에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을 따라 감옥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랫동안 법석을 열었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 즉시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이라 하며 본국에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새 절에서 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이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그 절을 망덕사라 했다.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하여 당나라 황제가 인문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고 강수를 통해 인문을 석방해달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황제가 감명을 받고 인문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경주 낭산에 문무왕을 화장한 곳으로 전해지는 탑지.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해인 6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보위하겠노라” 하니, 법사가 “용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찌 용이 되려 하십니까?”라 했다. 왕이 답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약에 추한 인연에 따라 축생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라던 바와 꼭 맞는 것이오”라 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문무왕의 비편이 경주지역에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두루비법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되 천 년이 지나도 그 양은 변하지 않는다. 태양열에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얼음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니 모습은 바뀌어도 전체 질량은 그대로 인 것이다. 단지 겉모습이 변하여 사람들이 종종 오인하는 일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모든 무기를 모아 산 아래 묻었다. 그리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전쟁은 없으니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지어다.”군사들은 토함산 북쪽 계곡에 무기를 묻고 무장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쟁은 그렇게 문무왕의 마음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 고종이 설인귀를 앞세워 50만의 군사로 신라를 공격하러 배를 띄웠다. 마침 당나라에 수도 중이던 의상대사가 옥중에 갇힌 왕의 동생 김인문을 면회하러 갔다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 신라의 궁궐에 위급한 정황을 알렸다. 사천왕사지 남쪽에 비석은 간데 없고 두 구의 귀부만 남아 있다. 문무대왕의 비편이 발견되어 두 귀부 중 하나는 문무왕비석의 귀부로 짐작된다. 서쪽의 귀부. 문무왕의 고민을 풀어줄 해법은 딱 하나였다. 세상에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은 하나씩만 존재한다. 급하여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움직이다 보면 예상 밖의 평지풍파를 맞게 된다. 용궁에서 도를 닦은 명랑대사가 사천왕사를 지어 불법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지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불법으로 백성들의 안녕을 지키고자 했다. 사천왕사지 남쪽에 비석은 간데 없고 두 구의 귀부만 남아 있다. 문무대왕의 비편이 발견되어 두 귀부 중 하나는 문무왕비석의 귀부로 짐작된다. 동쪽의 귀부.나라를 지킬 도량을 짓는 일은 신승 양지가 맡았다. 그러나 양지가 미처 서까래도 올리기 전에 적군들의 배가 신라의 경계를 넘어섰다. 명랑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가명승들에게 위급을 알리는 전서구를 날렸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열흘이면 모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명랑과 해괴망측한 모습을 한 승려들이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12방향에 세웠다. 명랑은 왕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열흘간 비단으로 지은 도량 근처에 사람이 드나들게 해서는 아니되옵니다”라며 유가명승들이 술법을 펼치는 곳의 경계를 당부했다. 왕은 특별히 김유신으로부터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무예를 익히고 있었다. 왕 또한 비술을 네 명의 제자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왕은 그 네 명의 비밀스런 검사들에게 비법이 진행되는 도량의 동서남북을 방위하게 했다. 명랑을 비롯한 12명의 고승들은 12방향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도 밥을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가끔 진언을 외우는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비단으로 지은 절은 안개에 휩싸여 누구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됐다. 싸우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때 동해안에는 난리가 났다. 먼 바다에서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났다가 뒤집어지고 하면서 당나라군사들의 배가 서로 부딪치고, 좌우 앞뒤로 흔들리면서 파손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배 위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당나라의 35만 병사 중에 살아 돌아간 이들은 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가 미리 낌새를 알아채고 재빨리 후퇴를 지시하면서 재빠르게 배를 돌린 병사들이다. 그 이후 설인귀는 스스로 북방장군으로 임명해줄 것을 촉탁해 신라 쪽으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오래 살아남은 신책이었다. 사천왕사지를 발굴하면서 탑지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 발굴 100년 만에 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협력해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3구의 신장들이 탑 기단부에 돌아가면서 1면에 6구씩, 두 탑에 모두 48구의 신상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은 사천왕사를 완공하고 명랑법사를 주지로 임명해 백성을 위한 불법을 이어가도록 명했다. 김유신은 명랑법사가 시전하는 문두루비법을 눈여겨보았다. 나라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왕에게 건의하여 신라로 들어오는 관문에 호국사찰 원원사를 건축했다. 사천왕사와 원원사를 건축하고 당나라군사는 물론 왜국에서도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 사천왕사지를 발굴하면서 탑지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 발굴 100년 만에 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협력해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3구의 신장들이 탑 기단부에 돌아가면서 1면에 6구씩, 두 탑에 모두 48구의 신상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31>인공지능, 예술 분야에 도전하다

AI가 음악 생성도 해내는 시대다. 인간은 음악을 감지하는데 주관적 감정을 싣는 반면 AI는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진동과 진폭, 음역 등을 데이터화 한 후 이를 배열해 음악을 창작해낸다.음악에도 AI와의 적절한 콜라보가 눈길을 끌고 있다. 국내 유수의 기획사와 스타트업이 최근 의기투합해 다소 독특한 주제의 음악을 대중에게 선보였다.AI와 블록체인의 융합도 이채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술품 블록체인’의 이름으로 개설된 이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 공동구매 방식이다.최근 뉴욕 경매장에 한화가치로 5억 원 상당에 이르는 그림이 판매됐다. 그림은 AI의 기술력으로 탄생한 작품이다.메인‘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사후 재평가’라는 씁쓸함이 유독 예술인들 사이에서만 가혹히 투영된 듯하다. 자신의 귀를 잘라낸 ‘고흐’가 그러했고, 은박지에 시를 써내려간 ‘이상’ 역시도 ‘비운의 천재’라는 유쾌하지 않은 타이틀로 현재에 이르러서야 각광받고 있다.사실 이번 연재는 유독 조심스러웠다. 인공지능(AI) 시대, 소위 ‘언터처블’로 부각되던 예술의 영역에 AI를 접목함이 혹 어불성설로 비춰지지 않을까라는 우려에서다. 신산업 창출과 잉여인간 양산이라는 AI 특유의 이항대립 속, 감성을 표출하는 예술의 영역이라 함은 성직자와 더불어 ‘불멸의 직업군’으로 분류된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직업적 자존감’이 선명했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간의 영역’은 확고하다. 10만 내·외의 인공신경망과 수천억에 이를 인간의 뉴런은 사실상의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다. 측은지심과 더불어 상생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영역임은 그 어떤 혁명적 산업군이 휘몰아친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일 것임이 자명하다.단지 예술과 AI의 접목을 통해 분업화 전략을 꾀하자는 것이다. 감성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되, AI의 섬세함이 감정에 깃듦에 따라 또 다른 예술적 가치 창출에 의의를 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번 연재의 방점일 것으로 보인다.물론 평가는 여러분의 몫이다. ◆머신러닝 기술로 학습을 하자쉽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과 AI라 함은 개별의 특성을 넘어 워낙 특출한 범주인지라 욱여넣는다고 쉬 접목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우선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영역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머신러닝’의 기술력이 투영돼 있다. 머신러닝은 AI 분야 중 하나로 인공신경망 기반의 ‘기계학습’으로 통칭된다. 특히 이미지 인식 분야를 훑어보면 단순 이미지 종류를 캐치해냄을 넘어, 이미지의 전반적 분위기와 이에 따른 문장 생성의 수준에까지 현재 이르렀다.이 같은 기술력의 발전으로 렌더링 시간은 절감됨과 동시, 다각화된 장면은 머신러닝의 기술로 신속하되 한층 더 ‘리얼리티’한 구현이 가능해졌다. 과거 인간의 손을 빌려야 했던 요소들이 머신러닝과의 분업을 통해 정교함은 제고됨과 동시, 아티스트는 창의력에 집중하다보니 표현의 범주는 한 걸음 더 넓어지며, 아울러 깊어졌다는 해석이다.다시 말해 예술과 AI의 조합을 아티스트와 컴퓨터 전문가의 상호 조력 정도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AI가 그린 그림이 5억 원?최근 뉴욕 경매장에 한화가치로 5억 원 상당에 이르는 초상화가 판매됐다. 유명 작품들이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곳 경매장에서 5억 원이 대수일까 싶지만, 되짚어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초상화는 다름 아닌 AI의 기술력으로 탄생한 작품이다.작품의 출처는 파리의 한 예술단체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분리 신경망으로 구성된 ‘GNA 알고리즘’의 기술력이 깃들어 있다. 원리를 살펴보면 두 개의 신경망 중 하나는 이미지 생산의 역할을 하고, 또 하나는 생산된 이미지를 대상으로 식별해내는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이 모든 것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두는데, 생산자가 이미지를 생성해내면 식별 프로그램은 기존 그림과 생성 이미지의 싱크로율을 면밀히 분석, 최대치의 근사값을 도출 후, 이를 확인해 낸다.이와 유사한 궤적으로 중세시대 풍의 초상화를 실시간 재현해내는 AI 기술력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선 재현을 원하는 이용자가 관련 이미지를 올려두면 알고리즘이 이미지 개별의 화풍 및 질감 등을 분석해 낸다.이렇게 분석된 데이터를 토대로 화풍에 맞는 물감과 잉크 등을 취사 선택, 이후 올려진 이미지에 걸맞게 AI가 모방해 내는 기술력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AI 초상화를 모방이 아닌 ‘재창조’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원본 이미지는 최대한 훼손치 않되, 작업 과정은 확연한 개별성이 있음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원 그림을 재해석한 ‘새로운 이미지 창출’이라는 풀이로 보면 된다.얼마 전 개봉한 10분가량의 공상과학 영화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우주정거장을 배경으로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이른바 ‘삼각관계’를 그린 영화였는데 평범한 스토리였음에도 사람들의 평가는 극명했다. 다름 아닌 이 영화의 모티브가 AI 기술력으로 탄생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사실상 인간 특유의 섬세함은 부족했을 터, 스토리상 연계성 부족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 이면, 어찌됐건 인공지능 역시도 ‘창의’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일장일단의 고무적 성과에 주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음악에도 AI와의 적절한 콜라보가 눈길을 끌고 있다. 대한민국 유수의 기획사와 스타트업이 의기투합, 다소 독특한 주제의 음악이 최근 대중에게 선보였다.여기에는 ‘반대개념’이 적용된다.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그 배경을 꾸미고 분위기를 설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배경 자체서 나오는 자연의 음향으로 공간을 채우는 작업. 다시 말해 바람 소리, 물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등을 마이크에 담아, ‘백그라운드 뮤직’이 아닌, ‘환경으로부터의 음향·음악’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위기 증강을 위한 ‘AR’의 기술력이 더불어 가미된다.AI 개별로의 음악 생성도 가능해진 시대다. 물론 여기에는 인공지능 개발자와 아티스트의 콜라보가 전제돼야 한다. 인간은 음악을 감지하는데 주관적 감정을 싣는다. 반면 AI는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진동과 진폭, 음역 등을 데이터화한 후 이를 배열해 음악을 창작해낸다.AI와 블록체인의 융합도 이채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술품 블록체인’의 이름으로 개설된 이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 공동구매의 형식을 띤 투자 플랫폼이다. 여기서 AI는 예술품에 관한 다각적인 정보를 분석, 이를 빅데이터화 한 후 회원들로 하여금 각종 트렌드 등을 공유한다. ◆예술은 영원하다장르부터 생소한 ‘개념미술’. 개념미술은 기존 예술에 투영된 관념을 배제한 채, 완성작보다는 완성을 위한 아이디어의 과정을 또 하나의 예술로 정의 내리는, 다시 말해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 도출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진정한 작품이라 여기는 다소 신개념의 아트 형식이다.개념미술의 상징적 인물로 대변되는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 처음 전시됐을 때 작가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갖은 힐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여기서 샘이란 소변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뒤샹은 소변기를 떼어다가 그대로 전시장에 내놓았던 것이다.뒤샹에 따르면 예술은 작품이 아닌, 예술가 본연의 ‘생각과 가치’를 의미한다. 관람객의 니즈에 따라 예술적 벨류가 매겨짐은 어불성설, 예술가의 기술적 능력에 앞선 관념, 또한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야말로 예술을 평가하는 가늠자라는 것이다.딥 러닝을 활용해 그려낸 ‘다빈치’의 그림. 이 그림은 AI가 다빈치의 화풍과 질감들을 면밀히 분석, 이를 빅데이터화 한 후 이에 따른 패턴으로 그림을 재조합, 또는 재창조해내는 기술력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따져 창조의 영역이라고는 볼 수 없다.하지만 과연 인간이라고 ‘순수창작’의 범주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 역시도 설왕설래를 거듭해야 할 넌센스 중 하나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다소 원론적 관용구는 차치하고라도 아티스트 역시 여타 예술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 습작해본 후에야 자신만의 화풍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다시 말해 인간 본연의 개성과 성질을 표출해가는 이른바 ‘모방의 과정’과 AI가 빅데이터를 통해 정규화된 패턴을 취득, 이를 토대로 적용 또는 재조합하는 방식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뫼비우스의 띠’처럼 접점 모색에 다다르기는 힘들지언정, 최소한 비슷한 궤의 수평은 이룬다는 점이다.예술은 영원하다고 했다. 다만 AI와 예술의 조합을 단순 선명성 짙은 직업군에 대한 반발 정도로 여길 것만이 아닌, 조심스럽지만 또 하나의 예술적 장르로 이해해보면 어떨까. 수차례 강조해보지만 어차피 인간을 위함이자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다. 글·사진 군월드 IT 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경북, 청년이 온다<4>-성주 머시무라 버섯농장, 카지노 딜러출신 청년농부

성주 머시무라 버섯 농장을 운영하는 주우철 대표가 표고버섯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아직 수익 구조는 감이 안 잡히긴 하지만, ‘땅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땀 흘린 대가는 반드시 땅에서 돌려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한적한 농촌인 성주군 수륜면 계정리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청년 농부 주우철(37)씨. 그는 버섯마을을 꿈꾸며 표고버섯 전문 ‘머시 무라’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 눈에 봐도 ‘초보농부’ 냄새가 물신 풍긴다. 일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온 귀농인으로서 흙에서 성공하겠다는 남다른 각오가 엿보인다. 머시무라 버섯농장의 한우철 대표. 카지노 딜러에서 귀농해 버섯마을을 꿈꾸는 청년농부다. ◆카지노 딜러출신 초보 청년농부‘머시무라 버섯농장’ 주우철(37) 대표는 농사일을 주업으로 전환한 지 겨우 1년차에 불과한 새내기 농부다. ‘머시무라 버섯농장’ 이란 농장 상호가 이색적이다. 영어와 일본어 합성어로 ‘버섯 마을’을 형성해 보자는 의욕에 찬 꿈을 그리며 지은 이름이다. 카지노 딜러 출신다운 획기적인 발상이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자란 주 대표는 대학에서 카지노 경영학을 공부하고, 10여 년간 국내에서 카지노 딜러로 근무했다. 그는 “화려한 조명,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의 손님들 사이에서 게임을 진행하는 카지노 딜러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한 판에 적게는 천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이 왔다 갔다 하는 카지노에서는 딜러들이 감정의 흔들림 없이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며 “온종일 정신을 바짝차리고 있지 않으면 실수하게 되므로 하루종일 초긴장 상태로 근무해야 한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하루 8시간씩 3교대 근무지만,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근무하는 육체적 노동이 만만치 않았다. 정신적 고통에다 육체적 노동이 합쳐 피로는 두 배로 쌓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일상이 10년째 계속되면서 어느날 딜러생활에 싫증이 났다. 결국 카지노를 탈출,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카지노 영업도 해보고 개인 에이전트 회사 운영 등 이것저것 손대봤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와 홀로서기의 삶을 배우기에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하던 중, 어느날 갑자기 집안에 큰 일이 닥친 것이 ‘인생 전환’의 계기가 됐다. 세상에서 잘나가던 형님이 갑자기 들이닥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가족이라야 부모님과 두 형제 등 4명 뿐이었다. 하루아침에 장남을 잃어 버린 부모님과 하나뿐인 형님이 없다는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자 온 가족이 큰 실의에 빠져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정신을 추스렸다. 부모님과 함께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권유로 ‘버섯농사’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음식점과 집을 모두 정리해 성주 수륜면으로 들어 왔다. 성주 머시무라 버섯 농장을 운영하면서 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우철 대표와 어머니 신영미 여사 ◆온 가족 귀농, 버섯농사에 올인 성주에 정착한 후 본격적으로 귀농교육을 받으며 영농 자금을 마련하고 집과 버섯하우스를 마련하는 등 농촌 생활을 할 준비를 착착 해나갔다. 특히 생소한 버섯재배에 대해 특별 과외 교육을 받았다. 멘토는 성주에서 노루궁뎅이 버섯으로 성공한 ‘23살 농부 버섯농장’ 전병목 대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전 대표 밑에서 1년 간 혹독한 실습과 이론 교육을 받았다. 전 대표가 강의하는 대학에서 수강하면서 착실하게 ‘버섯 공부’를 했다. 노루궁뎅이 버섯농사로 연간 수십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전 대표는 새내기 농부 주 대표에게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판매를 못하면 안된다”며 “한번 맺은 고객은 절대 놓치지 말고 내 가족같이 대하라”고 판매의 중요함을 각인 시켰다. 머시무라 버섯농장 주 대표의 어머니 신영미 여사가 수확한 표고버섯을 포장하기 위해 분류하고 있다. 주 대표의 어머니 신영미 여사도 영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귀농귀촌 6개월 과정을 이수하며 아들과 함께 귀농 준비를 착실히 진행해 왔다. 역할 분담을 했다. 주 대표는 생산을 담당하고, 부모님은 버섯 선별과 포장, 판매 등에 주력하고 있다. 주 대표는 표고버섯을 주 생산 품목으로 정하고 영지녹각 버섯, 노루궁뎅이 버섯 등 양용버섯 재배로 틈새시장을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표고버섯 생산하기 농장 면적 2천300여㎡에 거주할 집과 공장동(배기 만드는 작업실) 1동, 배양실 2동, 생육실 3동 등 하우스 6동을 짓고, 배지농법으로 표고버섯 재배를 시작했다. 주 대표는 표고버섯을 주 생산 품목으로 정하고 앞으로 영지녹각 버섯, 노루궁뎅이 버섯 등 양용버섯 재배로 틈새시장 공략에 힘 쓸 생각이다. 주 대표는 “순수 국산 참나무 톱밥과 미강을 혼합한 배지 재배, 표고버섯은 향도 좋고 식감과 질감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배지농법이란 참나무를 갈아서 만든 톱밥에 미강을 섞어 압축시켜 버섯종균과 영양분을 넣어 만든 버섯 틀이다.배지는 하우스 규모가 작더라도 다량생산이 가능한 농법이다. 이 과정에 영양제 등도 함께 넣어 버섯생육이 활성화되도록 하거나 병해충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참나무 톱밥을 섞은 다음에는 봉지나 병 등에 넣어 배지를 제조하게 된다. 표고버섯 배지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는 주 대표와 직원들 배지를 넣는 방식에 따라 봉지에 배지를 넣으면 봉지재배, 유리나 플라스틱 병에 배지를 넣어 재배하면 병재배 방식이다. 또 재배실에 놓는 방식에 따라, 상면재배와 균상재배가 있다. 상면재배는 재배실 바닥에 쭉 펼쳐서 재배하는 방식이고, 균상재배는 선반을 이용하여 다단으로 배지들을 층을 이루어 재배한다. 주 대표는 균상재배를 선택했다. 순수한 국산 참나무 톱밥과 미강을 압축시켜 버섯종균과 영양분을 넣어 만든 표고버섯이 쑷쑥 자라나고 있다. 배지 재배는 종균을 넣어 120일 정도 배양 후 생육실로 이동한다. 하우스의 온도를 낮게 설정하면 성장은 늦더라도 육질이 단단하고 맛과 향이 월등히 높다고 한다. 배지에 물을 주입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버섯이 나온다. 10일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다. 더디게 키운 버섯은 그만큼 높은 가격을 받게 된다. 배지의 수명은 일반적으로 6~8개월이다. 배지는 사용 전에 주사기식 주입방법으로 물 공급을 하는데 하우스 한 동당 5천 개로 총 1만5천 개의 배지를 주기적으로 침봉 작업을 해야 한다. 배지 농법은 침봉 작업이 가장 힘든 일이다. 성주 머시무라 버섯농장 생육실에서 자라고 있는 버섯들. ◆농촌에서 미래를 꿈꾼다종균접종 모습. 주 대표는 “귀농을 결정하고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고 고백한다.그렇지만 처음 귀농을 준비할 때 “농사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라며 말리던 친구들도 지금은 부러워한다. 버섯을 수확하는 일은 막노동이나 다름없다. 층층이 쌓여있는 균상의 버섯을 일일이 따려면 구부리고 쪼그리고 쉼 없는 반복이다. 그렇게 수확한 버섯의 판로도 직접 해결해 나가야한다. 주 대표는 지난 5월 첫 수확을 했다. 첫 산물은 지인들과 친인척들에게 일부 판매했다. 그리고 장기적인 판로 확보를 위해 처음 귀농해 버섯교육 받을 때 전국에서 교육 받으러 온 9명의 귀농인과 함께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앞으로 이들과 함께 공동 브랜드 작업과 공동 판매 등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했다. 주 대표는 “버섯을 생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판로를 개척해 안정적으로 정착되면 한결 편하게 버섯농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주 대표가 종균을 접종한 후 배양실에 가기 전 철저히 소독하는 모습. ◆청년의 꿈이제 농촌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하고 만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버섯농사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으면서 희망과 미래도 보이 는 것 같다. 그는 앞으로 여건이 갖춰지면 건강한 농산물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식자재 회사를 운영하는 꿈도 꾸고 있다. 인터뷰 내내 자리를 뜨지 않고 아들의 모습을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던 어머니 신여사도“갑작스럽게 형을 앞서 보내고 상심이 무척 컸지만, 이젠 귀농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보고 느낀다”며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해 빨리 가정을 이뤘으면 더할나위 없다”고 말한다. 머시무라 농장에서 생산한 표고버섯을 선물상자에 포장해 전국적으로 배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주 대표에게 화려한 카지노 딜러에서 귀농해서 버섯농사를 하는 일에 대한 심경을 묻자,“귀농 초기에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라면서 스스로에게 반문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며 “하지만 이젠 버섯농사 일로 바쁘게 살다보니 한가하게 그런 생각할 기회조차 없다”고 답변한다. 그는 “지금까지는 초기자금이 계속 들어가고 있어 사실 많이 힘든 상태”라며 “그러나 땅은 거짓말 시키지 않는다는 진리는 농사를 지어 본 사람들은 금방 다 알 수 있다. 열심히 노력하여 흙에서 땀흘린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낼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인다. 생육실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표고버섯 모습. 김재호 기자 kjh35711@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23 >-태종 춘추공(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문무왕 등 신라 삼국통일 주역을 모신 통일전 앞에 화랑들의 정신을 추념하기 위한 화랑지에 화랑정을 지었다. 화랑지에는 연꽃이 피고, 잉어들이 떼지어 다니는 모습이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여 장관이다. 태종 무열왕은 신라에서 여러 가지 기록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최초의 신라왕이 되었다. 죽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왕릉 중에서 귀부가 있는 비석이 최초로 나타난 왕릉이기도 하다. 비석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은 귀부와 이수는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자랑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얻어 결국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18년 만에 그의 딸과 사위에 대한 원한을 갚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는 누구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사리가 깊었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눈도 밝아 전쟁에 대한 전술전략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김춘추는 51세에 왕위에 올라 백제 의자왕의 무릎을 꿇리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김유신과의 이중적 혈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를 방문해 군사를 빌려줄 것을 간청하며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그중 당나라 복식을 신라조정에 도입할 것을 약속하고 입은 당시의 모습. 당나라와의 협력관계 유지를 위해 둘째 아들 인문을 당나라 황실 내부 깊숙하게 심어두었다. 김인문은 당의 정보를 신라에 전달하는 한편, 당나라가 신라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도록 상당한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는 태종 춘추공에 대한 기록을 길게 늘여 소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단락을 나누어 간략하게 줄여 소개한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3)당나라 고종은 백제가 멸망 이후에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일삼자 문무왕 5년 665년에 장군 유인원을 보내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형제의 의를 맺어 화친하고, 영원히 당나라에 복종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668년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신라에 군수물자를 요청했다. 문무왕이 적군 진영 깊숙이 있는 당나라 군사에게 누가 수송의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김유신 장군이 나서 군량 2만 섬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박물관 전경.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고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강물이 있다.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최후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을 할 지언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지는 않겠다”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백화정 정자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의 풍경.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쳐서 평정하고 또 신라를 칠 계획으로 머물고 있었다. 유신이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에게 짐이라는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여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가 있다.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한 곳에 위치해 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백제의 남은 적을 추격하여 잡게 했다. 군사가 주둔한 한산성에 고구려와 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해서 마주 싸웠으나 포위를 풀지 못하더니 5월11일부터 6월22일 사이에 신라군사들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묻기를 “어떻게 할 계책이 없을까?” 하고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형세가 급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신의 술법으로만 구할 수가 있습니다”라 했다. 이에 성부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빌었더니, 갑자기 큰 항아리 만한 불빛이 번쩍거리며 제단 위로 나와 즉시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백제가 무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위기에 처하자 삼천궁녀들이 스스로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죽음을 택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정자 백화정.적들이 공격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번쩍번쩍하는 불빛이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포 30여 곳을 때려 부수었다. 적군의 활과 화살 그리고 창칼들은 주판알이 흩어지듯 산산이 부서지고 병사들은 모두 땅에 쓰러졌다. 태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니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나 되는 멧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해석하는 사람이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 할 좋은 징조입니다”라 했다. 태종 무열왕 때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과 아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지고 와서 전한 것이다. 백마강이 흐르는 언덕에 삼천궁녀들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뛰어 내렸다 하여 ‘낙화암’이라 바위이름을 짓고, 정자 이름을 ‘백화정’이라 부른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천하를 통일하셨다. 그래서 태종 황제로 하였는 데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하여 천자의 이름을 범한 것은 불충하니 빨리 호칭을 고칠 것이다”라 했다.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당나라로 들어가 고종황제에게 군사를 빌려 앞장군이 되어 백제를 치는데 성공했다. 그는 끝내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후에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시신을 가져와 장례를 치렀다. 김인문의 비석 일부가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신라왕이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거룩한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으로 한 것이오”라 했다. 당나라 황제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33천의 한 분이 신라에 내려와 유신이 되었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다 보고 놀랍고 두려워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권력 이양김춘추는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왕권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진해지면서 서서히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해 치밀한 작전을 빠르게 세우기 시작했다.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결혼으로 두터운 관계를 형성하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죽어서도 가까운 거리에 무덤을 두고 있다. 김유신을 앞세워 대신들을 지지 세력으로 우회시켰다. 김유신 옆에는 자신의 큰 아들 법민을 밀착시켜 감시하면서 친위세력으로 항상 가까이 두었다. 반면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구도를 짜 맞추었다. 삼진덕여왕 당시 상대등이자 완력으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알평을 고립시키고, 김유신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지지층을 두텁게 만들어 진골 출신이지만 왕위에 오르는 일을 착착 순조롭게 진행했다.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지만 두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첫 번째가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는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의 힘을 업고 백제 의자왕을 무릎 꿇게 하고, 윤충의 목을 베어 복수를 이룬 춘추는 하늘을 보며 다시 한 번 포효했다. 경주 남산자락 통일전 앞의 화랑지.두 번째는 절대적인 우방이자 절친인 최고의 무신 김유신을 왕좌에 대한 욕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한편,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두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미리 간택하고, 처남인 김유신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이중적인 혈연관계로 두텁게 옭아맸다. 김춘추의 머리는 촘촘한 전략으로 짜여진 그물 같다. 그는 김유신이 처음 백제와의 전투에서 돌아와 좌절에 울부짖으며 단석산으로 들어가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이어 김유신이 보검을 차고, 한층 깊어진 눈으로 돌아왔을 때 절대 그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는 김유신의 경지가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짐작했다. 이어 유신과의 친분을 두텁게 쌓으면서 서둘러 그의 누이와 결혼해 확실한 우방으로의 관계를 맺었다. 춘추는 집요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아내와 아들을 수시로 유신의 집으로 보내 교류를 두텁게 쌓았다. 특히 아들이 걸음걸이가 자유로워질 무렵부터 유신에게 사정하여 사제지간의 정을 맺도록 했다. 춘추의 아들 법민은 외삼촌 김유신으로부터 검술과 전쟁의 기술을 오롯이 물려받은 장수로 성장했다. 김유신 또한 전쟁터에서 적군 깊숙이 들어가 적진을 혼란스럽게 휘저을 때는 뒤를 받쳐줄 실력 있는 우군이 필요했다. 법민은 빠르게 무술을 배워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전쟁터에 나섰다. 법민은 뛰어난 자질을 가진데다 유신의 신적인 기술의 지도와 실전에서 익히는 검법으로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고구려와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법민이 앞장을 서고, 유신이 뒤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법민은 전쟁을 끝내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문무왕 법민은 칠순에 이른 외삼촌이자 무술의 스승인 김유신을 전쟁의 선봉에 세울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경주 서악동에 위치한 무열왕릉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김춘추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김유신의 신력을 가진 태산 같은 마음도 아들 같은 애제자이자 조카 법민, 즉 문무왕을 꺾고 왕위에 올라야겠다는 욕심은 애초부터 티끌만큼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등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김유신과 아들 법민의 손을 꽉 잡고 신라를 부탁하면서 이순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김유신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턱이 떨리지 않게 어금니를 깨물면서 법민을 도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겠노라 다짐하며 무열왕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30>인간의 소통 욕구, ‘통신의 발전’

휴대전화의 정체성은 ‘본능’으로 출발해야 함이 옳을 듯하다. 소통에 있어 시·공간의 제약을 타파하고자 하는 욕구가 전화기를 낳았고 이를 기반으로 통신이 발전했다.스마트폰의 탄생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태블릿PC와 스마트워치(시계) 등 여러 관련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5G(5세대)가 상용화되는 시점에서 업계는 6세대 이동통신을 바라보고 있다. 6세대는 현재 5세대 보다 약 5배 이상 빠른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온라인 결제가 간편해졌을 뿐만 아니라 전자투표, 가상 장례문화, 해양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수화기 너머의 세상은 또 다르다. 대면으로는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들을 음성을 통해, 그리고 메시지를 이용해 간절히 전달해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몇 년 새 급증세를 보이는 ‘보이스 피싱’ 관련 범죄를 통해 휴대전화의 민낯을 마주하기도 한다.한 가지 확실한 건 휴대전화의 정체성은 ‘본능’으로 출발해야 함이 옳을 듯하다. ‘소통’에 있어 시·공간의 제약을 타파하고자 하는 욕구로 전화기를 낳았고 글만으로는 도저히 형언하지 못할 메시지 위에 ‘이모티콘’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갓난아이들이 새로운 물건을 보면 물고 만지려 드는 습성으로 말미암아 ‘터치스크린’을 개발했다는 것, 업계의 암묵적 정설이다.이처럼 휴대전화는 몇 차례의 산업혁명과 그 시류를 함께 해왔다. 인공지능(AI)의 모토가 ‘인간을 위함’으로 대변되듯 휴대전화 역시도 단순 음성통화를 넘어, 메시지 전송, 음악·동영상 감상, 인터넷 이용 등 한 손으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원스톱’의 욕구가 켜켜이 쌓여 이곳까지 왔다.휴대전화의 가입자 수가 대한민국 전체 인구를 훌쩍 넘어가는 시점이다. 휴대전화는 이제 ‘선택 사양’이 아닌 ‘공공재’의 역할로 바라봐야 할 때다. 다시 말해 휴대전화의 이용을 두고 단순 ‘소통’의 관점을 넘어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찰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30년 전 400만 원짜리 휴대전화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휴대전화는 0.1%만을 위한 전유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웬만한 중형차 가격이 500만 원 하던 시절, 휴대전화는 400만 원을 육박했다. 그 크기만 해도 벽돌에 버금가다 보니, ‘휴대’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이래저래 겸연쩍은 수준이었다.휴대전화의 가격 대중화를 꾀한 시점은 199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부터 이른바 ‘X세대’의 필수품으로 여겨졌던 무선 호출기는 점차 뒤안길로 사라지고, 휴대전화는 이동통신의 정점으로 부각됐다.이때부터 개별의 통신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기의 방식으로 서비스 공략을 제시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무선 호출기와 함께 ‘실과 바늘’로 인식되던 공중전화 역시도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게 됐다.게임과 인터넷 등 통신 외 부가기능 서비스가 시작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요금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SF영화 속에서나 지켜볼 수 있던 ‘영상통화’ 역시도 밀레니엄을 보낸 이 시기부터 가능해졌다.똑똑한 휴대전화, ‘스마트폰’의 탄생을 지켜보려면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때부터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의 ‘S’ 시리즈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스마트폰은 굳건히 지켜오던 피처폰의 아성을 단박에 무너뜨리기 시작했다.바로 이 시기부터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대별 통신기술’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1·2세대 피처폰을 넘어 스마트폰 시대의 개막에 따라 ‘3세대 이동통신’이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3세대 이동통신은 쉽게 말해 통신기술의 3세대를 의미한다. 흔히들 ‘3G’라고도 말한다. 3세대부터 음성과 비 음성의 구별 없이 모든 통신 전송이 가능해졌다. 이때부터는 기지국의 역할이 중요해 졌는데, 각 통신사들은 시쳇말로 ‘전화기가 얼마나 잘 터지나’의 경쟁을 위한 촘촘한 기지국 설치를 기업의 캐치 프레이즈로 내세웠다.‘4세대 이동통신’은 ‘LTE’의 이름으로 3세대 대비, 조금 더 총체적이고 안정화 된 솔루션 제공에 역점을 뒀다. 정확히 말하면 4세대는 0.1이 모자란 ‘3.9G’의 기술력인데, 여기에는 광대역을 초과한 초광대역, 원활한 ‘와이 파이’기능, 각종 스트리밍 멀티미디어 제공을 통해 3세대 대비, 덜 끊기되 더 빨라진 환경 구축을 최우선 시 하기에 이르렀다.앞서 연재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5세대 이동통신’은 ‘초고속’, ‘초저지연’의 기술력으로 욕구 잠입을 시도했다. 완벽한 상용화에는 아직 설왕설래를 거듭하고 있지만, 4G 대비 20배 이상 빨라진 5G의 통신 속도를 통해, 스마트폰의 궁극적 목적인 ‘토탈 솔루션’에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모양새다. ◆무궁무진한 스마트폰 활용‘투표’는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선한 삶의 갈구와 유지를 위한 일종의 ‘정치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팍팍한 일상에 본의 아니게 투표를 치를 수 없다거나, 마음을 먹고 투표장에 들어선다손 치더라도 이른바 ‘피크타임’에 걸려버리면 하릴없이 수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하지만 이 같은 맹점은 스마트폰의 활용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한 문제다. 바로 ‘전자투표’를 의미하는데 스마트폰을 통한 전자투표가 상용화된다면 투표 시 시·공간의 제약을 없앨 뿐 아니라,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 절감 차원에서도 탁월하다. 통신을 통한 투표 집계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다면 결과 또한 신속히 접할 수 있다는 장점마저 발생한다.장례문화에도 변화의 조짐은 선명하다. 이 역시도 스마트폰이 적용된 ‘가상 장례문화’의 일환으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에는 VR, AR 등의 증강현실과 홀로그램의 기술력이 내포돼 있다. 다시 말해 ‘허구의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는 증명이다.가상 장례문화는 크게 가상 조문과 추모, 장례지원으로 구별된다. 가상 조문은 말 그대로 장례 입장 후 절차인 분향, 헌화, 인사 등을 가상의 공간에서 치르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투영된 홀로그램 등의 기술력이 장례식장을 방문하지 않았으나,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곳 환경을 인식·재현해 낸다.장례절차에도 스마트폰의 역할이 주효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폰에 투영된 ‘QR코드’를 활용, 이를 통해 각종 장례 정보와 용품, 구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온·오프라인을 망라해 공유하는 형식이다. 실제 특허청 통계에 따르면 이처럼 스마트폰이 접목된 장례 서비스 특허출원이 2016년까지 10여 건에 그치던 것이, 2017년부터는 25건 가까이 늘어났다.1차 산업혁명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농업 분야’에서도 스마트폰의 기세는 무섭다. 농업인 개별로 스마트폰은 이용, 유튜브나 블로그 등의 매체를 활용함에 따라 자신의 농작물을 별도의 자금 없이 개별로 홍보할 수 있는 역량 제고에 제격이라는 평가다.이제는 해양연구에도 스마트폰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심해탐구 간 스마트폰의 적용에 따라, 파생 가능한 리스크를 일정 부분 줄일 수 있다는 데 주안점을 둔다. 여기에는 휴대전화에 연동된 ‘애플리케이션’의 기술력이 투영된다.설치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해역의 수온, 생물 등의 각종 환경을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하다. 모 지자체의 해양수산과학원에 따르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해양 정보 뿐 아니라, 기상청 등각 기관에서 관측하는 고급 자료도 손쉽게 공유할 수 있다.이처럼 스마트폰은 특정 전유물이 아닌 신변잡기적 일상이 돼버렸다. 무료한 시간을 더불어 보내줄 벗이 되기도, 활용도에 따라 편의성과 각종 위험을 사전에 차단해주는 ‘지킴이’ 역할에도 소홀함이 없다. 다만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지성인으로서의 분명한 고찰 역시도 요구된다. 흔히들 ‘중독’이라 불리는 스마트폰의 맹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지나친 이용에 따라 파생 가능한 각종 신경계 질환과 정신적 피폐가 결집 된다면 자칫 ‘사회성 결여’라는 이단적 현상마저 초래할 수도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6세대 통신을 준비하다이제는 ‘6세대 이동통신’을 바라봐야 한다. 5세대의 상용화 시점도 채 잡지 못한 이때, 과한 미래지향일 수는 있으나 격변하는 시류에 철저한 대비는 응당 치러야 할 덕목이다.실제 세계 최강국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은 벌써부터 6세대 이동통신의 선구자적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업계에서는 향후 10년을 기점으로 발발할 6세대 이동통신은 현재 5세대보다 약 5배 이상 빠른 속도로 범람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이 같은 상황에 기인, 국내 유수의 대학과 통신업체는 최근 6세대 이동통신 관련 연구센터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발로 대역 주파수를 적용한 ‘초고속 무선 백홀 시스템 개발’에 들어갔다.6세대의 가장 큰 차별성은 ‘수중 통신’에 있다. 이를 두고 중국은 6세대의 상용화 기점을 3년 앞당긴 2027년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론적으로 6세대의 다운로드 속도는 초당 ‘1TB(테라바이트)’에 달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정보통신의 종착역인 ‘만물인터넷(IoE)’ 시대로의 도래를 기대해볼 수 있다는 증명이다.‘혁신’은 언제나 그래 왔듯 이채롭되 위험했다. 하지만 우리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우매함 대신 언제나처럼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고 실현해왔다. 반드시 성찰하되 아울러 대비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말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14>죽변등대

등대는 외롭다. 외딴 곳에, 혼자, 서 있어서, 등대는 외롭다. 죽변등대 등대가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소리로 안개 속에 길을 내어 항구를 알리는 것은 외딴 곳에 혼자 서 있는 등대의 외로움, 외로움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해보자면 항구를 알리는 등대의 빛과 소리는 외로움의 꿈, 외로움의 육체이다. 등대의 외로움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아무리 망망대해 난바다라 하더라도 돌아갈 항구가 저기 저 깜박이는 등대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안심되고 푸근하겠는가. 요컨대 거친 바다로 출항한 어부들이 만선의 꿈을 싣고 무사안전하게 귀항할 수 있는 것은 등대의 외로움, 외로움의 힘이 등촉을 밝힌 빛과 소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낱 감상이나 감정의 소모적인 부산물이기 십상인 ‘외로움’이 어떻게 어부들의 무사귀환과 단란한 식탁의 평화를 담보하는 빛과 소리, 그 생성과 숭고의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지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과 같은 노랫말에서 보듯, 그것은 한 겨울의 거센 파도를 잠재워 작은 섬을 지키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가진 등대지기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등대지기의 부재, 혹은 작은 섬을 지키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소실된 상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 때 등대의 외로움은 평화의 담보가 아닌 고립무원의 표상으로, 등대의 빛과 소리는 구조를 요청하는 조난신호로 그 빛깔이 변한다. 작은 섬을 내 나라로, 등대지기를 나라의 책임자로 바꾸어 놓고 보라. 등대의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처한 내 나라의 외로움이고, 등대가 쏘아 올리는 빛과 소리는 위기에 처한 내 나라, 대한민국의 딱한 처지를 알리는 외마디 절규가 된다. ◆경북도 기념물 제154호 지정죽변등대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등대길 52(37&deg; 03.5&prime;N, 129&deg; 25.8&prime;E), 용의 고리처럼 생겼다는 용추곶에 외롭게 서 있었다. 갈매기만 저만치 멀어진 갯바위를 떠돌 뿐 주차장은 텅 비었고, 사무실 출입문에는 ‘출장중입니다’ 라는 안내 글이 붙어 있었다. 물론 등대는 자동시스템의 작동으로 제 일을 하겠지만, 사무실을 잠근 ‘출장중입니다.’ 안내 표지는 등대지기의 부재를 알리는 것처럼 곤혹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죽변등대를 찾은 날은 마침 7월24일, 독도 상공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공군기가 뒤얽혀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벌어진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죽변등대 앞, 울릉도·독도 내륙최단거리 표지판. 죽변등대는 높이 16m의 백색 8각형 콘크리트구조이다. 윗부분으로 갈수록 몸체가 작아져서 안정감과 수직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민흘림기둥에 둥근 머리를 얹고, 통풍이 잘 되도록 창문의 위치를 각 층마다 다르게 설치했다. 내부 계단은 철재 주물, 등대 안에는 1911년 일본의 수로부에서 설치한 대리석으로 된 수로측량 원표가 보존되어 있다. 천정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등대 윗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보수공사로 건축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건축적 가치도 가치이지만, 등대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깊어 경북도는 2005년 9월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했다. 1910년 11월24일 최초로 불을 밝힌 이래 동해항로의 중간 지점,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곳(128km)에 서서 20초마다 1섬광(빛이 닿는 거리 20마일), 50초마다 1회(소리가 닿는 거리 3마일)씩 빛과 소리를 보내는 광파와 음파 표지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죽변등대는 1907년 일본사람들이 세웠다. 등대가 서 있는 육지 끝 용추곶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해상을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했던 자리였다. 또한 이곳은 왜구의 침범과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해 신라시대 진흥왕 10년 보루성을 구축하고 화랑을 상주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왜구를 막기 위해 봉화를 올리던 그 자리에, 일본군이 망루를 설치하고 등대를 세우다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변을 들락거리는 파도처럼 아침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독도 상공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공군기 30여 대가 뒤얽혔다. 3시간 동안이나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영토에서 열강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이다 청일, 러일 전쟁이 터졌던 구한말 때와 안팎 사정이 판박이이다. 등장하는 국가까지 똑같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우리 주권이 군사 · 외교적으로 위협받은 사태를 청와대와 여당은 먼 산 불구경하듯 한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선 ‘일본 경제침략대책특위’까지 구성하더니 중 · 러가 영공을 침략해 오자 ‘기기 오작동이라더라’며 대신 변명해주기 바쁘다.” 제 정신 가진 등대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에 의하면, 죽변곶 봉우리 일대에는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화살의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보호했다고 한다. 죽변(竹邊)은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등대에서 바라본 인근 대나무 숲. 등대 주변에는 키 작은 대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대나무 군락 사이로 난 산책로가 용소(龍沼) 해안까지 닿아 있었다. 두 눈 부릅뜨고 왜군의 침략을 지키던 화랑들의 그 길을 천천히 걷는다. 바닷바람에 이따금 대숲이 일렁인다. 용이 승천하였던 곳이라 전해 내려오는 용소가 출렁거린다. 조선조적 용소는 베옷 입고 머리 풀어 기우제를 올리던 곳이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풍어제를 올리는 곳,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다지는 이 지역의 성소이다. 승천하는 용의 푸른 기상은 어디로 갔는가. 등대가 외로움의 까치발을 하고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대 옆 드라마 ‘폭풍속으로’ 세트장과 뒤로 보이는 하트해변. ◆초인이 그리운 시대7월25일, 북한은 원산에서 동해로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등대지기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미연합사는 “북 미사일이 대한민국이나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다”고 했다. 남한 전역을 때릴 수 있는 미사일을 우리 군이 추적도 못 했는데 이것이 위협이 아니면 무엇이 위협인가.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날 26일 기자들이 북의 미사일 위협에 대해 아홉 번이나 묻는데도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600km를 날아가는 탄도 미사일 발사가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한 것이어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니! 남쪽으로 쏘았다면 그건 위협이 아니라 폭격 아닌가. ‘용의 꿈길’이라 부르는 등대 주변 구불구불 이어진 대숲 길을 걷노라니 자책과 반성의 대나무 화살촉이 아프게 날아든다. 죽창가를 부른다고 의병이 봉기하겠는가. 의병이 봉기한들 일본과 벌이고 있는, 무역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죽변항. 승천하는 용의 푸른 기상은 웰빙문화가 좀 먹은 지 이미 오래이고, 나라를 지키려는 생성과 숭고의 의로운 공동체의식은 무상복지의 달콤함에 함몰되고 없는 터에 의병봉기를 기대하다니, 망상에 가까운 착각이고 환상이다. 더더구나 믿고 따를 등대지기마저 보이지 않는 터에 죽창가를 외치다니, 정치인은 없고 정치꾼만 우글거리는 세태에 금 모으기 운동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잠꼬대란 말인가. 죽변등대가 흰옷 입은 민초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분노를 넘어 고뇌가 필요한 시대이다. 분노는 감정이어서 눈 앞을 흐리고, 고뇌는 지성이어서 선 자리를 헤아려 갈 길을 밝힌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윌리엄 맥닐의 명제에 밑줄을 그어보라. 감정의 돌팔매질, 선동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전쟁에 이기려면 줄을 맞추어 걷는 군사들의 대오, 전략이 필요하다. 평화로 평화를 지킨다는 발상은 얼마나 현실에 맹목인 낭만적 허상인가. 국제관계란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이다. 정글은 힘없는 아이를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켜주지 않는다. 초인이 그리운 시대이다. 해가 지면 죽변등대는 등명기를 밝히고 안개 짙은 날에는 사이렌을 울릴 것이다. 그것은 등대지기를 부르는 외로운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애타는 파수꾼의 몸짓일 것이다.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초인은 어떻게 오는가. 거북선 횟집에서 천 년을 기다려도 죽은 이순신은 살아오지 않는다. 초인의 출현은 로또복권처럼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초인은 민족과 역사의 푸른 기상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고뇌의 산물이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경북, 청년이 온다<3>- 영천 청년농부 박덕수

‘영천 청년농부청년농부 박덕수(38) ‘과일판다’ 대표가 ‘키 큰 방추형 수형’ 사과농장을 관리하는 모습.올해 첫 수확의 기대에 부풀어 있다. 영천시 고경면에서 사과농장을 운영하는 청년 농부 박덕수(38)씨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금융회사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한 회사원 이었다. 하지만 박 씨는 5년 만에 회사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온·오프라인 쇼핑몰 ‘과일판다’ 의 대표다. 그는 올해 유난히 극심한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첫 수확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 청년농부의 꿈은 무엇일까? 청년농부 박덕수 대표가 한국농수산대학 과수학과에서 연구한 키 큰 방추형 수형으로 재배하는 사과농장 전경.◆귀농하기까지의 고심박 대표의 고향은 영천시 화산면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금융회사에 취업, 5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2017년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고경면에서 사과 농장을 한다. 청년 귀농이다. 9월쯤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릴 것으로 기대돼 요즘 꿈에 부풀어 있다. 사과농장 규모는 약 1.5ha이지만, 재배면적은 약 1ha(1만㎡)이며, 후지(부사), 홍로(추석 사과), 시나노골드(황금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박 대표는 “부모님이 고향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셨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새벽에 들판에 나가시는 부모님을 따라 논밭일을 돕는 등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가 됐다. 그때 느낀 것은 ‘농사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 그냥 힘든 일’ 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농사일은 절대로 하지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박 대표는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도시에서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자 직장인이 됐다. 대구 굴지의 금융회사에 취업해 금융과 마케팅관련 부서에서 수년간 사회 경력을 쌓으면서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봉급생활자의 애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박 대표는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종종 내가 가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열심히 한 만큼 평가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졌다”며 “ 어릴 적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농민의 아들로서 부모님을 따라다닌 들판의 경험(?)이 있어 열심히 성실히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농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농업에 대학을 다니며 쌓은 여러 가지 자질에다 회사원으로서의 사무적인 역량, 디자인적인 감각, 경영과 마케팅과 관련된 지식을 농업에 융합한다면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농사도 하나의 경영체라는 생각으로 내가 경영주로서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고, 그 결과를 온전히 보상받을 수 있다면 농사도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해 창·농을 결심했습니다.” 청년농부 박덕수 ‘과일판다’ 대표가 온라인 주문을 받고 포장한 상품을 옮기고 있는 모습. ◆창·농 위해 직장생활 접고 농대에 입학박 대표는 2008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졸업 후 5년여 직장생활을 하다가 창·농을 결심하고 2014년에 또다시 한국농수산대학 과수학과에 입학해 사과를 주 작목으로 삼고 창·농의 꿈을 키웠다. 한국농수산대학 생활 중 1년 동안 사과 마이스터의 현장에서 실습과 실제 영농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박덕수(오른쪽 두번째) 과일판다 대표가 2017년 청년 정책제안 공모대회에서 대상인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특히 농대에 재학 중 현장 실습으로 경험을 쌓으면서 학과친구들과 함께 농산물을 판매하는 쇼핑몰 사업인 ‘과일판다’라는 브랜드로 창업, 여러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국회의장상,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원예학회장 표창 등 10회 이상 수상해 창·농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와 더불어 박 대표는 농대 졸업 후 1차 생산에 집중하면서 다양한 창·농과 특히 농산물 유통에 관심을 두고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런 경험들이 좋은 기회로 작용해 현재는 창·농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과 경북지역 청년창업농을 대상으로 마케팅과 관련한 강의도 하고 있다.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박 대표는 또 부농의 꿈을 실현하고자 현재 마이스터대학 ‘사과’ 과정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처럼 박 대표의 ‘성공 농사’에 대한 꿈을 위해 끝없이 공부하는 노력파다. 과일판다 박덕수 대표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 받은 사과를 준비하는 모습.. ◆농사도 계속 공부하고 변화해야…유통 관심 필요박 대표는 한농대 시절 지도교수의 자문을 얻어 시험 포장을 만들고 과수농사에 대해 국외의 다양한 선진 수형을 시험재배하고 있다. 보통 사과재배에는 나무의 모양을 말하는 ‘수형’을 중요시하는데, 박 대표는 ‘키 큰 방추형 수형’으로 사과를 재배하고 있다. 요즘 사과농가에서 유행하는 ‘키작은 사과나무’ 재배방법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박 대표는 “키 큰 방추형 수형 사과 재배는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이 아는 사과나무 모양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며 “이 재배 방법은 왜화도가 높은 묘목을 좁게 심어서 나무에 햇빛이 잘 들고 착과 면적이 넓어 사과의 품질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재배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또 그는 “더 안전하고 좋은 농산물을 더 많이 생산하려면 농부들도 계속 공부하고 변화해야 한다”며 “앞으로 농부로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기술을 도입하는데 앞장서서 주변의 젊은 농부들과 좋은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위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과일판다’ 박덕수 대표가 2015년 한국농수산대학 재학 중 학과친구들과 쇼핑몰 운영에 대한 회의를 하는 모습. 특히 박 대표는 지역에서 젊은 농부들과 함께 농산물을 공동 브랜드화 해 판매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7년에는 네이버에서 우수 쇼핑몰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지난해에는 영천시에서 젊은 농부들과 함께 농산물 유통과 관련한 사업으로 공모전에 출전해 ‘농정원장 상’을 받기도 했다. 사업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앞으로 법인을 만들어 수출도 할 수 있는 큰 꿈을 갖고 무역 영어와 농산물 유통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주경야독’ 하면서 준비하고 있다. 박 대표는 “앞으로 사과농장과 유통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지역의 좋은 농산물을 수집 판매하는 역할을 온 정성을 쏟아 지역 농가소득 증대와 ‘농부가 농부를 잘살게 하는 상생의 농촌, 잘 사는 농촌’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 그는 “앞으로 청년농업인들을 더 안정적으로 농촌으로 불러 들이려면 정책을 실행하는 기관에서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체계적이고 현실지향적인 정책구성과 실행을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청년농부 박덕수 과일대표가 운영중인 네이버 쇼핑몰 블로그.박웅호 기자 park8779@idaegu.com

우리 동네 자랑 - 봉화군

봉화군 행정지도 봉화군은 산세가 수려하고 선비의 정신이 깃든 예절의 고장이다. 인구 3만 3천여 명의 1읍 9개 면으로 전체 면적의 83%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연경관이 매우 빼어나고 특산물이 많다. 특히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을 위시한 명산과 국보 및 보물들이 산재해 있다. 경북의 최북단에 있고 동쪽으로는 울진, 영양군과 남쪽으로는 안동시, 서쪽으로는 영주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강원도의 영월군, 태백시와 경계한다. 봉화군의 면적은 1천201㎢로 서울시 면적의 2배이며, 산이 많아 평지가 적고 황지에서 매토천이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1.청암정충재 권벌이 세운 청암정 청암정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충재 권벌이 세운 정자이다.유곡마을은 1380년 충재(沖齋) 권벌의 선조가 처음 정착한 곳이다. 유곡마을 앞에는 서쪽으로 흐르는 석천계곡이 있고 그 계곡에 석천정(石泉亭)이라는 정자가 있다.또 너럭바위 위에 세운 청암정은 신탄 상류 약 500m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올려 연못을 파놓은 데다 거북 모양의 바위와 조촐한 돌다리가 놓여 있어 옛 풍취를 한층 느끼게 한다.청암정은 1526년 봄 권벌이 지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3칸 건물이 충재의 서재이고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바람을 쐬일 양으로 지은 휴식공간으로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지었다.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이 있고 돌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운치가 있다.주위에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단풍, 철쭉, 개나리꽃 등이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2. 오전약수 관광지물야 오전 약수터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소재한 오전 약수터는 혀끝을 쏘는 듯한 청량감이 있는 탄산수로 조선 성종 때 어떤 보부상이 발견했다.이 약수는 혀끝을 쏘는 듯한 청량감이 있는 탄산수이다. 전국 약수대회인 초정대회(椒井大會)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판정받은 바 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전해진다.조선 중종 때에는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이 이 약수를 마시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라고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연중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 약수로 꼬아 만든 닭백숙을 즐기고 있다. 1985년 관광지로 지정됐다. 3. 봉성돼지숯불구이전통 봉성돼지숯불구이 봉화군 봉성면에 들어서면 구수한 고기 굽는 냄새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봉성면에 소재한 돼지숯불구이 전문 식당들은 봉화군 토속음식단지로 지정돼 있다.봉성에도 고려 현종 때부터 들어선 유서 깊은 봉성장이 있었다. 특히 우시장이 컸다.봉성돼지숯불구이의 역사는 바로 봉성장에서 시작된다. 봉성장터를 드나드는 각지의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로 혹은 술안주로 내던 것이 바로 돼지숯불구이다.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봉성돼지숯불구이는 양념과 생고기가 있으며 주인이 소나무 숯에 직접 구워서 손님상에 내는 것이 특징이다.다른 지역과 달리 고기 굽는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며 돼지고기는 기름이 빠져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4. 찰토마토법전 찰토마토법전 찰토마토는 5월에 정식해 9월까지 수확하는 이 지역 대표 농·특산물이다.법전 찰토마토를 생산하는 농가는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점질토에서 완숙 토마토인 토태랑를 단일 품목으로 선정해 품질 향상 및 균일화를 실현해 왔다.따라서 법전 찰토마토는 친환경재배 및 고품질 출하로 10억 정도 농가수익을 창출하는 효자품목으로 자리 잡았다.특히 생산자는 정밀 토양 시비처방으로 기능성 녹비작물을 활용한 토양 관리, 당도 향상을 위한 건조 농법, 액비처리, 미생물 등을 다양하게 투입해 양질의 토마토를 생산한다. 5.국립백두대간수목원국립백두대간 수목원 ‘호랑이 숲’에서 노니는 백두산 호랑이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일대에 조성된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은 기후변화 대응, 백두대간 산림생태계의 현지외보전, 연구와 휴양 관광 산업 등을 연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수목원이다.총 관리면적 5천179ha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생태탐방지구(4천973ha)와 중점조성지구(206ha)로 조성된 대규모 자연친화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조성된 30개의 다양한 전시원을 통해 2천764종의 식물을 볼 수 있다.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백두대간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자생식물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원과 더불어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대표하는 두 가지 시설이 있다. 바로 ‘호랑이 숲’과 ‘시드볼트’이다.‘호랑이 숲’에는 현재 5마리의 백두산 호랑이가 ‘호랑이 숲’을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 호랑이를 추가로 도입해 백두산 호랑이의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두 번째 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는 세계 최초의 야생식물 종자 영구 보존시설이다.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야생식물 종자를 확보하고 보존하고자 건설된 특별한 시설로써 지하 46m, 길이 130m의 지하터널에 설치된 종자저장 시설은 영하 20도에서 최대 200만 점까지 저장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6. 산타마을한국 관광의 별에 선정된 분천 산타마을봉화군 소천면의 분천 산타마을은 지난 2014년 12월 20일 개장했다.이 산타마을은 2016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한국관광공사)된데 이어 2015년~2016년 겨울여행지 선호도 조사 2위(한국지역진흥재단),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지 선정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산타마을 개장 전에는 하루 10여 명도 찾지 않던 이 마을에 일 평균 1천여 명 현재까지 약 64만 명이 방문하는 봉화군의 대표 관광명소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7. 백천계곡열목어 서식지인 석포 백천계곡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있는 백천계곡은 세계적인 희귀어인 천연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된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태백산에서 발원한 옥계수가 해발 650m 이상의 높은 고원을 16km에 걸쳐 흐르면서 만들어 낸 계곡이다.또한 발원 태백산을 비롯해 현화봉(1천52m), 청옥산(1천276m), 조록바위봉(1천87m) 등의 높은 산에 감싸져 있어 계곡의 물이 맑고 수온이 낮다. 계곡 주변의 산들과 기암괴석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8.재산수박저장성과 당도가 뛰어난 재산수박봉화 재산수박은 해발 400㎡ 안팎의 준고랭지에서 재배하며 일교차가 큰 기후 덕분에 과육이 단단할 뿐 아니라 저장성이 뛰어나고 당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2018년 기준 봉화 수박의 전체 재배 면적은 437ha, 재산수박은 278ha로 전체 면적의 약 60%에 해당하는 면적이며 약 1만t을 생산해 97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9. 청량산도립공원과 하늘다리 청량산 운해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걸쳐 있는 청량산은 예로부터 ‘소금강’ 이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의 발길을 재촉케 했다.청량산은 해발 870m에 달하지만 둘레는 100여 리에 불과하다. 겉으로 보기에 청량산은 작고 아담한 산에 가깝다.그러나 직접 산에 올라 보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외적 규모보다 험준한 골짜기가 즐비한 청량산은 등산하기에 녹녹치 않은 산이다.주변의 낙동강과 산 곳곳에 산재한 기암괴석, 열두 봉우리가 장관을 연출하는 청량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청량산의 열두 봉우리 중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는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 청량산 하늘다리10.야옹정상운면 야옹정. 현판은 퇴계이황의 친필이다.상운면 야옹정은 야옹 전응방(1491∼1554)이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세운 정자로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고 토론하던 곳이다.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단종 때 왕위찬탈의 추함을 몸소 겪은 할아버지 후계 전희철의 유언을 받들어 관직에 뜻을 버리고 산수 좋은 이곳에 야옹정을 세워 도덕과 학문을 수련했다.퇴계 이황과 자주 만나 도학을 강론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쓴 것이다. 지난 2013년 4월8일 시도민속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됐다. 퇴계 이황이 쓴 친필박완훈 기자 pwh0413@idaegu.com

대구 통합신공항 이전은 최적지 군위 우보로 선정돼야 한다.

김영만 군위군수가 통합대구공항 이전의 필요성과 대상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 통합신공항 이전 최적지는 군위군 우보지역 입니다.” 지난 2월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초청 오찬 간담회장에서 김영만 군위군수가 대통령께 건의한 말이다. 김영만 군수는 “군위군은 언제 소멸될 지 모르는 아주 취약한 농촌지역”이라며 지방소멸위험을 강조하고,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대응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방법은 대구공항 이전 뿐”이라며 문재인 대통령께 정부차원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3월22일 문재인 대통령이 대구지역 경제인들과 가진 오찬자리에서 통합신공항 이전사업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사업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살펴 나가겠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행정안전부에서 대구통합공항 이전 건의를 수용한다는 국방부의 검토사항이 담긴 공식 문서를 보내왔다.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사업은 지난해 3월 국방부가 이전 후보지 2곳을 선정한 이후 국방부와 대구시가 이전 사업비 산정 문제 등의 견해차로 1년 간 교착 상태를 면치 못해왔다. 하지만, 지난 4월2일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한 보도 자료에 따르면 대구공항 통합이전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면서 대구공항 이전 최종부지를 연내 결정할 것을 약속하고, 군 공항 이전 부지가 최종 선정되면 민간공항 이전사업도 본격적으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서주석 국방부차관 일행이 군위군을 방문, 군위 공항이전 대상지역을 둘러보고 정부입장을 전달했다. ◆최종 이전 지 군위군이 결정현재 대구공항 통합이전은 이전주변지역 지원계획수립 단계에서 와 있다. 2017년 12월에 있었던 선정위원회에서 이해 당사자인 경북도, 대구시, 군위군, 의성군이 후보지를 한 곳으로 정해오면 선정위원회에서 받아들이는 방식이 채택됐다. 이에 4개 지자체장을 비롯한 실무진들이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으나, 각 지자체의 엇갈린 입장으로 결국은 후보지를 한 곳으로 압축하지 못했다. 우여곡절끝에 4개 지자체장들은 합의문 형식을 통해 2개의 예비이전후보지(단독후보지 군위군 우보, 공동후보지 군위 소보-의성 비안) 모두를 후보지로 지정해 줄 것과 2018년 10월 말까지는 최종이전 지를 결정해 줄 것을 국방부에 건의했다. 이러한 합의를 전제로 2018년 3월 이전후보지로 2곳 모두가 선정됐다. 군위군의 입장으로 볼 때, 후보지를 한 곳으로 압축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군 공항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최종이전지 선정에서 공동후보지의 경우 군위, 의성 모두 유치신청을 해야만 이전 지 선정심사에 포함될 수 있어 사실상 공항 이전 지를 군위군의 선택에 따라 결정하는 실리를 챙겼다. 군위군청사에 통합신공항의 군위군 이전을 염원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이전지 지원사업계획 가속화지난 5월30일 국방부와 대구시가 밝힌 종전 부지 가치는 대구시가 산출해 국방부 협의 과정을 거친 이후, 대구시와 국방부가 공동으로 선정한 감정평가사 등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아 최종 확정했다. 국방부와 대구시에 따르면, 최종 종전부지 가치는 9조2천700억 원으로 군위 우보(9조1천400억 원), 군위소보-의성비안(8조8천800억 원) 등 통합신공항 후보지 이전사업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전사업비가 산정되면 다음 단계는 이전지 지원 사업에 관한 절차다. 이전사업비가 정확히 산출돼야 이전지 주변지역 지원계획 수립 절차를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만 군수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통합신공항 군위유치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방부와 대구시는 이전후보지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회, 공청회 등을 개최해 이전주변지역 지원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미 대구시가 어떠한 경우에도 3천억 이상의 지원 사업비를 약속했고, 향후 설계를 통해 사업비가 가시화 될 때 추가 금액을 정한다는 전제로 군위군이 동의했으므로 이 부분은 속도 있게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수립한 지원계획은 군공항 이전사업 지원위원회에서 논의하게 되며, 지원위는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위원장으로 각 부처 차관, 이전지 지자체장, 민간위원 등으로 구성 된다. 지원사업이 결정되면 선정위원회에서 지원사업 계획, 부지선정을 위한 기준 등을 공고하게 되고 주민투표에 들어가게 된다. 군위군은 최종부지 선정에 앞서 지원계획수립 시, 군위군 실정이 반영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지원위원회는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 부처차관, 이전 지 지자체장, 민간위원 등으로 구성된다. 이미 구성에 대한 실무검토는 끝나고, 조만간 위원회가 개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위원회에서는 지원과 관련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논의하고, 대구시와 국방부가 수립하는 지원계획을 최종심의하게 된다. 이렇게 수립된 지원계획을 공고하고 주민투표를 거쳐 유치신청을 하고 선정위원회에서 이전지를 최종결정하게 된다. 군위군 효령면민들이 통합신공항 군위군 이전을 희망하는 군민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통합신공항 왜 군위 우보인가?통합신공항 이전후보지로 군위우보단독 후보지와 군위 소보 - 의성 비안 공동후보지가 있다. 어느 곳이든 군위군이지만, 군위군은 처음부터 군위우보 단독후보지를 유치표명하고 유치활동을 하고 있다. 군위군은 왜 단독후보지 우보를 희망하는 것일까? 군위군은 대구와의 접근성을 이유로 대구공항은 반드시 우보지역으로 와야 한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다. 현재 대구공항에서 우보 지역과 대구공항에서 군위소보-의성비안지역까지의 거리는 약 2배정도 차이가 난다. 대구공항의 현재 이용객이 80% 이상이 대구 시민임을 감안할 때, 대구시에서 공항까지의 거리가 향후 민항의 활성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점에서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접근성이 불리해 공항이 활성화되지 못한 사례를 가까운 예천공항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천공항은 민항이 취항됐으나 이용객이 없어 2004년 민항이 폐쇄됐고, 현재 군공항만 남아있다. 이러한 산증거가 대구공항과 예천공항 중간지점에 있는 군위 소보-의성 비안 공동후보지 보다는 군위우보 후보지가 대구공항 통합이전을 통해 대구·경북의 상생을 도모하자는 취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특히 김해공항이 확장되고 각종 인프라 구축을 통해 대구․경북의 이용객을 흡수하려는 지금, 접근성을 이유로 우보지역으로 이전해야한다는 군위군의 입장은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대구공항 통합이전 주민협의회 간담회에서 김영만 군위군수가 군위군 유치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서 30분 내 접근성 갖춘 우보 민항성공의 열쇠대구시청에서 직선거리로 우보 단독후보지는 30㎞, 소보/비안 공동후보지는 48㎞이며, 우보후보지를 중심으로 반경 50㎞ 이내에 분포된 인구는 353만 명이고, 소보/비안 공동후보지는 169만 명으로 우보단독 후보지의 절반 수준이다. 통합신공항 군위군 우보후보지는 지난해 개통된 팔공산 터널을 통과하면 대구시청에서 30분 내 도착 가능해 대구에서의 접근성이 현저히 향상됐다. 또한 2020년 대구4차선 순환도로가 개통되면 대구 수성구에서도 30분이면 접근할 수 있는 위치다.이와 함께 칠곡 동명~대구 북구 조야동을 연결하는 도로가 조만간 개설되면 경산, 영천, 칠곡, 청도와 함께 군위가 대구권으로 진입한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중앙선복선전철도 접근성 향상에 한 몫을 한다. 사업이 완료되면 서울 청량리역에서 2시간여 만에 군위역에 도착하게 되고, 의흥면 연계리에 건설되는 군위역과 우보까지는 차량으로 5분여 거리다. 민항 주요 수요지인 대구, 안동, 구미, 경주, 포항 등 경북내 주요도시에서 1시간 이내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분석되면서 안정적인 항공수요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뛰어난 접근성을 가지고 있는 군위우보 단독후보지를 두고 군위군이 타 지자체와 함께해야 하고 공항의 성패를 좌우하는 민항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현재 대구공항과 거리가 더 먼 공동후보지를 배제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만 군위군수는 “통합신공항의 유치는 우리 군이 지방소멸의 위기를 벗어나 국제적인 공항도시로 변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국방부, 경북도, 대구시와 긴밀히 협력하여 금년 내 이전부지 확정이라는 목표가 차질 없이 진행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공항유치 신청은 주민투표를 통한 군민들의 결정과 선택에 따를 것”이라며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현명한 선택을 당부했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22>- 태종 춘추공(중)

통일전 흥무문 앞에 서면 동쪽으로 통일대로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 전국에서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일등공신 중의 일인이라는 데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 삼국통일의 방법 등을 두고 무열왕의 평가는 두 가지로 엇갈리기도 한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학자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른 것과 두만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넘겨준다는 밀약은 박수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당나라의 힘을 빌려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외세를 몰아내고 한민족의 뿌리를 하나로 결집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 했다는 긍정적인 해석도 있다. 또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거대한 힘의 중국에 잡아먹혀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라며 다행스럽다는 해석도 있다. 이번 호에서는 왕위에 오른 김춘추가 백제의 내환을 기회 삼아 당의 힘을 이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고구려 정벌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전쟁에 직접 나선 이야기를 풀어본다. 경주 남산 동쪽자락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념하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전을 건립했다. 통일전에는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사적비와 삼국통일기념비, 순국무명용사비 등을 세웠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2)현경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희사에 있는 크고 붉은 말이 밤낮으로 6시간 동안 절을 도는 공덕을 닦았다. 2월에는 여러 마리의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한 마리의 흰 여우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수 물가에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느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다. 밤에는 대궐 남쪽 길 위에서 귀신이 울었다. 신라 태종이 백제의 나라 안에 괴변이 많다는 것을 듣고 현경 6년 경신(660)에 인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당의 고종은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13만을 이끌고 가서 치게 했다.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과 전쟁에 직접 나서 정예병사 5만을 거느리고 덕물도 쪽으로 진군했다. 의자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워서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 흥수와 성충 등의 신하들이 서로 비방하며 대책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간신배의 말에 따라 전략을 세워 전쟁에 패했다. 흥국문과 서원문 사이 광장의 북쪽에 건립된 삼국통일순국무명용사비.당나라 소정방은 강 왼편 기슭으로 나와 산 밑에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밀물을 타고 병선들이 꼬리를 물면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쳐들어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 성 30리 밖까지 와서 머물렀다. 성안의 백제 군사들이 대항했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의자왕이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하노라!” 하고는 태자 융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지만 포로가 되었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황제를 뵈니 황제가 포로들을 책망만 하고는 용서해 주었다. 왕이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 벼슬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에게 장사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소정방과 신라군은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군영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그만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통일전에 모신 태종 무열왕의 영정.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복수김춘추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선덕여왕 11년(642년) 김춘추의 나이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사위와 딸인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했다. 백제 의자왕이 집권 초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외부적으로 신라를 침략해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던 것이다. 흥국문과 서원문 사이 광장 남쪽에 건립된 삼국통일기념비.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삼일간이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오”라고 울부짖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김춘추의 비운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픔과 고통이 춘추로 하여금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게 했다. 특히 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힘을 받기 위해서 제3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략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김유신의 가야세력과 연합도 정략적인 결혼 등으로 두텁게 이루어졌다. 춘추는 선덕왕 16년(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김유신과 협력해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춘추로서는 매우 뜻깊은 승리였다. [{IMG06}]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와 김유신으로서는 차제에 왕위까지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덕여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더욱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든든한 배경을 마련한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했다. 춘추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진덕여왕 2년(648년)에 직접 그곳을 찾아 친당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탄력을 받은 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했다. 당나라의 예복을 입는 중조의관제의 채택(649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651년), 집사부 개편 등이 그것이다. 다분히 중국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신라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아주어야겠다. 자신의 왕정시대를 대비한 것이었다는 추측이다. 통일전 광장에 세워진 태종 무열왕 사적비.김춘추는 654년 51세가 되는 해에 김유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춘추로서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왕위계승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의 확보, 율령정치 강화 등의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면서 즉위한 다음 해 바로 아들 법민을 태자에 책봉했다. 무열왕 춘추는 660년 일등공신 김유신을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이어 백제에 대한 복수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 태종 때 다짐받았던 군사지원 약속을 고종 즉위에 따라 무열왕은 아들 인문을 보내 다시 촉구했다. 김인문은 아버지 무열왕의 계략을 받아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가 고종의 황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틈을 노려 군사지원 약속을 얻어냈다. 무열왕 남천정 출전도. 660년 6월18일 무열왕이 김유신을 비롯한 진주, 천존 장군들의 장병을 거느리고 지금의 이천인 남천정에 이르러 백제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 지도자와 용장, 양졸이 한 몸 한 뜻이 되어 통일의 전역에 임한 모습이다. 통일전 회랑에 전시되어 있다. 신라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김인문을 앞장군으로 삼아 13만 명의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자, 무열왕은 복수의 칼을 들고 직접 김유신 장군과 태자 법민 등 장군들을 대동해 5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압박했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침내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의 비원이 18년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통일전 정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높게 바라보이는 계단과 흥국문.무열왕 김춘추는 꿇어앉은 백제의 의자왕과 딸을 베었던 윤충을 죽일 듯 쏘아보면서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피를 토해내듯 울부짖었다. “네놈들이 우리 신라의 충신들을 무참히 짓밟고 그들의 피를 함부로 땅바닥에 뿌렸겠다.” 의자왕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지만, 윤충은 빳빳이 목을 쳐들고는 크게 웃어대며 응수했다. “그래 네놈의 여식과 사위의 목은 내가 아주 단칼에 베었다. 집단보다 가볍게 베어지는 칼맛이 아주 괜찮더구만. 음하하하….” [{IMG06}] 무열왕은 소정방이 있는 곳이라 의자왕은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큰 칼을 휘둘러 윤충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 신라는 충신들의 피를 대신해 선조들이 확보했던 고구려의 땅까지 회복해 삼국을 통일하고 원혼들을 위로하겠다”며 하늘 높이 팔을 흔들었다. 통일전 회랑에 50여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는 김유신 장군 출전도.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이어 의자왕은 태자와 왕자, 대신과 장병,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으며 망국의 주범이 되었고, 700년 역사의 백제는 무너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29>4차 산업혁명의 총아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크게 프로그램 구동을 위한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이용자 개별로의 니즈에 따른 응용프로그램으로 나뉜다.국내 기업들은 오픈소스의 경제적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IoT 사업 간 오픈소스의 활용에 고무적 행보를 보인다.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 구입 시 무료로 제공하는 ‘덤’이었다. 이후 사회 전반에서 솔루션 역할로 혁혁한 가치를 뽐내고 있다.세계 정보통신 업체에서 근무 중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평균 연봉은 15만 달러로 한화 가치는 약 1억8천만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3D프린팅, 5G, 블록체인, 스마트공장, 스마트팜, 지능형 로봇, 스마트시티, 핀테크,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복합현실(MR), 신재생 에너지, 드론.열거된 산업군은 분명 개별로의 줄기를 두고 있다. 하지만 뿌리는 하나다. 4차 산업의 총아라 불리는 ‘소프트웨어(SW)’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소프트웨어를 차지하고 4차 산업을 혁명이라 일컫는 데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소프트웨어의 발전이야말로 4차 산업의 성패를 취할 결정적 가늠자인 셈이다.소프트웨어가 4차 산업의 이른바 ‘빅 대디’로 통칭됨에 따라 소프트웨어 기술자의 처우도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실제 세계 유수의 정보통신 업체서 근무 중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평균 연봉은 15만 달러, 한화가치로 약 1억8천만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W는 무엇인가소프트웨어(SW)는 곧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총체적 의미일 뿐, 더 정확히 말하면 프로그램 구동 간 프로세스와 색인, 각종 규정 등의 총망라야말로 소프트웨어라 칭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소프트웨어는 크게 프로그램 구동을 위한 시스템과 이용자 개별로의 니즈에 따른 응용프로그램으로 나뉜다.4차 산업의 주체로 일컬어지는 AI가 산업군 전반에 스며듦에 따라, 유수의 관련 전문가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동시다발적 커리큘럼(교육과정)이 선행돼야 함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과거 스마트폰이 시발로 대두되던 시점을 회상해 보자.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애플의 IOS가 양대 산맥으로 급부상했음과 대동소이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는 곧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융합이라 함은 불가피한 어울림이라는 방증이다.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접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자율주행차’다. 자율주행의 선행 기술력이라 함은 ‘지구위치측정체계(GPS) 위성’이다. GPS를 통해 자동차의 위치, 그에 따른 지형 등을 인지하게 된다.이후 GPS가 자율주행차의 궤적을 인식, 레이저 스캐너가 거리조절과 장애물 등의 각종 돌발요소를 파악해 안전운행을 도모한다. 여기에 하나 더, 사각지대 절감을 위해 레이저 스캐너를 활용, 사방에서 비춰오는 빛을 이용한 라이다가 다시 한번 체크함에 따라 안전성 제고의 극대화를 꾀한다.4차 산업의 범람을 두고 파생된 극심한 이항대립. 이에 대한 고찰은 결코 개인의 몫이 아니다. 응당 지성인으로서 거쳐야 할 집단적 성격의 어젠더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AI 분야에서 개별로의 산업군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때다. 이제는 소프트웨어이자 그에 수반된 하드웨어다. 마치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말이다. ◆솔루션 역할에 혁혁한 가치 뽐내오픈소스(OSS).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의 CAD와 일맥상통하는 소스코드를 각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유, 명칭 그대로 불특정 다수 누구나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 및 재배치가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의미한다.소프트웨어의 설계자 역할을 하는 오픈소스의 특성에 걸맞게,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들은 오픈소스의 경제적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IoT 사업 간 오픈소스의 활용도가 고무적 행보를 보인다.이는 여타 AI 관련 산업군 가운데,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 연계 프로세스가 4차 산업의 핵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심리의 발로쯤이 아닐까. 다시 말해 소비자들은 업체 개별로의 상품뿐 아니라, 이와 연장선상의 여타 통신기기와의 동시 활용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이를 비춰볼 때 기업 생태계의 불가피한 변혁이라 함은 필수 불가결한 상황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불과 10년 전만하더라도 연계점에 있는 통신기술에 국한, 그들만의 MOU에만 매진해 오던 것이 당시 업계의 정설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자신들만의 리그에 피로감을 느낀 기업들이 자사의 기술력을 품은 오픈소스를 개발, 가일 층 박차를 기함으로써 불필요한 인력 낭비와 시간 소요, 중간유통 과정을 생략한다는 의지로 해석된다.딥러닝의 재발견이 가열찬 성과를 보이고 있다. 최근 세계적 카메라 관련 기업서 출시한 딥러닝 촬영기기는 최고 수준의 CT 기술이 투영, 이를 통해 딥러닝이 접목된 초고해상도의 화질을 구현해낸다.상업용 촬영기기를 넘어 AI가 융합된 ‘의료 소프트웨어’가 아울러 각광 받고 있다. 이는 기존 환자의 의료영상 촬영 후 분석, 이를 통해 질병 유·무와 성질, 종류를 감지해 내던 CT 소프트웨어 방식에 딥러닝을 적용함에 따라 한층 더 세련된 고화질의 의료 CT 재현이 가능해졌다.이같이 높은 수준의 해상도 구축을 가능케 한 것은 딥러닝의 기술력 중 하나인 ‘심층신경망’ 이다. 수치상으로 볼 때 기존 CT 해상도 대비, 속도는 4배 이상 빨라지고, 선량은 20% 가까이 낮아진 셈이다.IBM의 왓슨을 오마주한 이른바 ‘한국형 왓슨’이 닻을 올렸다. 왓슨은 인간 개별의 언어를 프로그램 자체로 분석, 이를 파악 후 프로세스에 맞는 결과도출이 가능한 슈퍼컴퓨터를 의미한다. 정부 차원으로 한 대학병원과 스타트업(초기창업기업)의 기치를 부각한 이 프로그램의 기반 역시 AI 시스템, 그 위에 있는 소프트웨어의 기술력이다.이 같은 불세출의 AI 프로그램이야 말로 각종 의료영상과 진단 시 개인정보, 환자 개별의 유전 정보 취합을 통한 환자로 하여금 양질의 생활패턴을 제공, 다채로운 정보와 후 사례를 축적해 빅데이터화 한 후 종국에는 환자 특성에 맞는 예측, 진단, 치료, 지원에 이르는 AI 기반 ‘원 패스 의료 프로세스’를 목표로 둔다.현재 국내 30여 곳의 병원과 25곳에 이르는 관련 기업들이 각기의 사안으로 협약 체결에 나서고 있다. 이를 통해 향후 일반 질병을 넘어 소아 희귀유전병 등의 난치병 진단과 예방을 영위할 의료 소프트웨어 상용화를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 구입 시 무료로 제공하는 시쳇말로 ‘덤’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전과 프로그램 고도화 과정을 거치며, 소프트웨어는 업무 자동화와 단순 연산 기능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의 솔루션 역할에 혁혁한 가치를 뽐내고 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재에 이르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졌다. 금액 산정에 있어 하드웨어의 가치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이제는 시스템 교체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생산성과 후 보수 등의 과정이 컴퓨터 결정 간 주요 사양으로 자리 잡았다. ◆AI에는 SW가 필요하다학창시절 발목을 잡아왔던 수학과 과학 등 주요 섹션들이 사실상 신변잡기적 일상에서 만큼은 그다지 유용해 보이진 않았다. 평생을 지내오며 미분이나 역학 에너지 등의 학문을 두고 생활인으로의 활용 가치에 의구심을 품는다면 ‘뫼비우스의 띠’인 것 마냥 접점을 찾기 어려울 듯 했다.하지만 이 같은 학문적 가치는 실생활 저변으로 응당 스며들어 있다. 바로 ‘논리’의 차원에서다. 곡선상 점 주위를 확대, 또 다른 차원을 접하는 미분의 정체성이라 함은 더욱 심도 깊은 사회적 솔루션을 목표로 둔 ‘논리를 찾아가는 여정’, 다시 말해 ‘노력’인 셈이다.소프트웨어 역시 일맥상통한 궤적을 띄고 있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어젠더 아래, AI 시대의 능동적 이해와 자연스러운 수용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바로 소프트웨어라는 것이다.여기에서 가장 주효한 기술력이 바로 ‘코딩’이다. 샘플 코드가 무한대로 제공되는 시대임에 주안점을 둘 필요성이 있다. 원활한 코딩 능력 하나로 정보통신 산업 간, 일정 부분에 이르는 해결책 제시가 가능해진 것으로 해석된다.과거 공룡 기업들의 독식, 또는 그들만의 RND 구축은 시나브로 뒤안길에 접어드는 추세다. 대신 역량 있는 스타트업으로 하여금 적극 투자를 권장, 이를 통해 개별로의 가치 제고에 나서고 있음이 이 같은 시류를 대변한다.코딩은 더 이상 내세울 만한 장점이 아니다. 최소한 미래 산업의 시류에서 만큼은 베이스일 뿐이다. 이제는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할 당위가 있다. 프로그램 언어 습득을 넘어 개별의 언어를 유기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유연하되 촘촘한 사고’가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