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화폐 논란

오철환객원논설위원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하 조세연)은 ‘지역화폐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역화폐 발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단기적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으나 장기적으론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는 사라지고 고용확대 효과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산낭비 등 부작용을 지적했다.이에 대해 경기도지사는 조세연을 “얼빠진 국책연구기관”이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모자라 “청산해야 할 적폐”라는 막말을 토해냈다. 엄정히 조사해 문책해야 한다고 하니 앞으로 학문연구도 권력자 눈치를 봐야 할 판이다. 모골이 송연하다. 지역화폐가 역내 자금의 유출을 차단하는 효과는 확실히 존재한다. 지역 소비자가 역내의 지역 업체에서만 사용하는 옵션에 걸려 있기 때문에 누구도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를 부인할 수 없다. 대형유통업체나 전국적 체인점의 매출이 줄어들고 지역의 소매점이나 자영업자의 매출이 올라가는 효과는 불문가지다. 이 정도는 통계치가 없어도 누구나 예측 가능하다. 허나 그것을 최종결론이라고 말하긴 단순하고 성급하다. 지역 내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경쟁력 있는 업체로 소비가 몰리기 때문에 당초의 약자 지원의도가 무색해진다. 설상가상 지역경제가 독립경제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원재료 비용으로 역외로 누출된다. 소규모 식당만 하더라도 상당부분 식자재를 대형 몰에서 구매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비자가 일종의 내부 재정거래를 통해 새로운 상황에 매우 현명하게 대처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모든 소득이 지역화폐로 구성되지 않는 한, 소비자가 소비처를 경제적으로 조정하게 된다. 지역화폐는 지역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 구입에 사용하고 다른 돈은 싸고 품질 좋은 대형유통기관에서 사용한다. 이렇게 소비가 조정되면 애초의 지역경제 활성화나 소득재분배는 제한적이 된다. 지역경제를 살리고 영세업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지자체가 지역화폐를 경쟁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지역화폐 발행이 유권자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지역화폐의 존재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오히려 지역경제가 상호 고립돼 경제 총량이 쪼그라들 수 있다. 지역화폐 확대 주장은 국가 간 수출입의 문을 닫고 내국인들끼리 살겠다는 것과 유사하다. 각 지역이 문을 닫고 독립적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지역화폐는 뜻하지 않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그렇다고 지역화폐가 무용한 것만은 아니다. 잘 사용하면 어느 정도 정책의도를 살릴 수 있다. 일반적 상시적으로 지역화폐를 사용한다면 현명한 소비자가 소비구조를 최적화함으로써 정책목적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부정기적 변칙적인 방식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다면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비상시 전 국민에게 일시적으로 발행한다든가, 특별한 경우 공직자 소득에 대해 일정 비율을 단발적으로 발행한다든가, 복지비를 지급하는 수단으로 가끔 발행한다든가. 지역경제 활성화의 불쏘시게 정도로 지역화폐를 보조적 임시적으로 활용할 순 있다.경제는 일차원적인 일방적 행위로 끝나진 않는다. 경제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일종의 게임 판이다. 그것도 다른 게임과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다자 게임이다. 게임 판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기 때문에 한 사람이 쉽게 게임 판을 조정하기 힘들다. 게임은 상호의존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그 결과가 좌우된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 참가자의 선택에 의해서도 그 결과가 결정되는 시스템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이익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장은 개개인의 선호와 선택을 반영하고 개인은 시장의 신호를 보고 선호와 선택을 조정한다. 섣불리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생각은 자만이다. 사회과학에선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 지역화폐 연구도 마찬가지다. 어떤 연구든 전제조건이나 가정에 따라 그 이론 전개와 결론이 달라진다. 상황이론이 힘을 얻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이유다. 그 전제조건이나 가정을 잘 이해해야 그 이론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지역화폐 연구도 그 전제조건이나 가정 안에서만 그 결론이 정당화된다. 결론만 보고 오해해선 안 된다. 설사 지역화폐 연구에 허점이 있다하더라도 그 연구자를 문책하겠다는 발상은 극히 위험하다. ‘얼빠진’, ‘적폐’란 극언은 학문의 자유를 부정하는 막말이다. 형수에게 한 욕설은 가족 간의 불화에 그치지만 학문의 자유를 부정한 막말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영웅시대(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다)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남천 잎이 발그레 물들어 길을 장식한다. 노랗게 변해가는 은행나무 잎사귀 아래 빨갛게 피어나 융단처럼 깔린 꽃의 무리가 길손의 발걸음을 자꾸 멈추게 한다. 가을이 저만치서 평화로운 풍경으로 익어간다.‘가을은 멀쩡한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지는 낙엽이 그러하고 부는 바람이 그러하고 나이가 들수록 가을이 주는 상념은 더욱 그러하리라.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고 바라만 봐도 사색이 많아지는 계절’이라고 이채 시인은 읊지 않던가.가을에 피어난 꽃들을 보면서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으리라. 끝이 모르게 이어지는 거리 두기와 잘 알지 못하는 질병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사람들은 온라인 세상에서 위로를 얻는 것 같다. 대면하지 않아도 클릭만 하면 보이는 화면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보고 듣고 싶은 목소리를 듣고 비슷한 취미의 사람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소통의 장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다.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영웅시대 카페에 들어갔다. 트로트 가수 임영웅을 너무나 좋아하는 그가 이해가 잘 안 됐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노래를 듣게 하고 위로를 받게 하고 싶다는 그 사람의 선의를 받아들여 영웅의 노래를 들었다. 영상으로 만났더니 과연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혼이 담긴 노래였다. 온 힘을 다해 노래 부르는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부르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전율이 일었다. 그의 노래 속엔 평안과 고요가 있었다. 그의 노래 속에는 어떤 욕심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욕심내지 않고 노래를 부르니, 듣는 이도 편해지는 것 같다. 자신은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과욕이 없다는 것은 정말 무아의 경지에서 노래한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의 노래는 우리의 외로움과 사회적 소외를 채워주고 위로해 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한없이 포근해지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어머니가 아기를 보듬는 정감마저 느껴진다. 영웅이 탄생했다면서 환호성을 울려대어도 무덤덤했었는데 이제야 그의 진가를 알아봤다. 혼을 담아 부르는 그의 성실한 자세와 그가 어렵게 살아온 날들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고생담이 어우러져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어둠 속의 등불처럼 감동이 일게 한다. 코로나로 지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노래를 찾아서 들어보고 영웅에게서 잠시나마 기쁨을 얻었으면 좋으리라 싶다.세상을 살다 보면 분명 고통스럽고 불안한 날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삶 속에는 기쁘고 행복한 일, 가슴 벅찬 일들도 찾아보면 많지 않겠는가.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살면서 고생도 해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어야 그것을 얻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통 후에 이루게 된 결과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할 터이고. 사람들은 비교적 그런 고통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상대적으로 남이 잘되면 그들은 고통 없이 쉽게 된 것으로 보이고 자신의 고통은 더 커 보이는 경우조차도 많을 것 같은데 세상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쉽게 원하는 결과를 얻기도 어렵지 않던가. 때로는 운이 따라서 쉽게 성공을 하는 것 같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도 있지만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운도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미스터트로트의 최고, 영웅은 인생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이는 많이 먹지 않았지만, 정말 혼이 담긴 사랑의 노래로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의 노래는 분명 창조적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 그의 무대가 순간순간 떠오른다. 노래가 끝났을 때,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덤덤했다. 얼굴엔 평화가 느껴졌다. 마치 외롭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경청해 준 것처럼, 그의 표정은 오히려 쑥스러워하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과 감동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 가나 보다. 온통 영웅시대 이야기가 회자한다. 임영웅은 우리들의 불안과 고통에 대한 맞춤형 위로 곡을 우리에게 선물한 것 같다. 참 오랜만에 우리는 노래를 부른 사람 영웅과 함께 하나가 돼 세상을 살아나갈 큰 용기를 얻을 것 같다. 그의 출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가수의 출현이라고 한다. 영웅이란 이름 표현이 아깝지 않은 그야말로 영웅이다.난세에 영웅은 불쑥 솟아나 늘 빛을 밝히지 않던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이 시기에 빛을 던지는 영웅들을 찾아 날마다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세태 단상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코로나19로 청승맞게 자주 과거를 떠올린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는 부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길에서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끼니때마다 인사가 달랐다. 아침에는 “아침 잡수셨습니까?”라고 인사했다. ‘조반석죽(아침에 밥 먹고 저녁에 죽)’이면 그런대로 괜찮게 사는 집이라고 했다. 모두가 서로의 형편을 잘 알다 보니 이웃 사람들은 굶는 집이 없는지를 눈여겨 살폈다. 저녁때인데도 옆집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면 이웃 아낙은 “철수야 왜 밥 안 하나 양식 떨어졌나?”라고 물으며 쌀 반 양푼을 담 너머로 넘겨주곤 했다. 동네 어른들은 남의 집 제삿날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집과 담을 같이 하고 있으면 자정이 넘어도 자지 않고 기다렸다. 밥과 나물, 생선, 떡 등의 음식이 넘어오기 때문이다. 파젯날 아침에는 동네 어른 모두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에는 꼬마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이 많았다. 연필과 지우개 같은 문구류, 멍게와 해삼, 스크루가 돌면서 분수처럼 흩어지는 유해 색소가 든 오렌지 주스, 엿과 사탕 등 종류가 다양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세 녀석이 계란만 한 눈깔사탕을 한 개 샀다. 돌아가면서 입에 넣고 양볼 좌우로 열 번씩 왔다 갔다 하며 빨고는 사탕을 꺼내 다른 친구에게 넘겼다. 세 명이 돌아가며 그렇게 빨아먹었다. 어떤 녀석은 논두렁 옆 수로에 사탕을 헹구고 입에 넣기도 했다. 크기가 아주 작아졌을 때 어느 녀석이 남은 사탕을 씹어 먹어버리면 나머지 둘은 그 녀석의 등짝을 때리며 깨 먹은 것을 원망했다.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이해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 시절에는 ‘콩 하나도 열 조각으로 나눠 먹는’ 것이 미덕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그 말을 실천하며 살았다.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새벽에 일하러 나가시는 아버지는 보리쌀이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그래도 밥을 드시고, 자신은 죽을 먹고 학교에 온다고 했다. 아버지가 밥 드시는 모습을 이불속에서 눈을 반쯤 뜨고 바라보면 너무 부럽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에게 친구 이야기를 했을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게 다 좋은 일만은 아니다. 때론 똑같이 나누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여기에 두부 한 모가 있는데 친구 네 명이 4분의1 씩 나눠 먹는다고 가정해 봐라.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은 잠시 기분이 좋겠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다. 그러나 4명 가운데 가장 힘이 센 한 친구에게 한 모를 다 먹인 후, 지게를 지고 산으로 보낸다고 생각해 봐라. 그 친구가 갈비(떨어진 마른 솔잎)를 한 짐 해서 시장에 내다 팔면 두부 여덟 모는 사 올 수 있다. 한나절 배고픈 것 참고 저녁에 두 모씩 나눠 가지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아버지가 밥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겠느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아이들은 죽을 먹는데 자신은 밥을 먹으니 얼마나 괴롭겠느냐. 밥맛이 제대로 나겠느냐. 그 아비는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일해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초등학생이었지만 아버지의 설명은 분명하게 이해가 됐다. 경제 이론에 문외한인 나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문제가 쟁점이 될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만 13세 이상 전 국민에게 통신비 2만 원씩 지급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크다. 한 여론 조사 기관은 국민의 6할 정도가 이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고 발표했다. 국민의힘 원내 대표는 “국가 채무가 한 해에만 106조 원 급등한 상황에서 4차 추경 7조8천억 원 중 1조 원에 가까운 돈을 통신비 2만 원 보조에 쓴다는 게,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정의당 원내 대표조차도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통신비 2만 원 지급이야말로 별 효과도 없는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지 않는가. 여야 정치권과 정부는 힘을 모아 정말 생계가 어려운 국민을 찾아내어 그들이 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지원하라. 여야는 당리당략을 떠나 좀 멀리 바라보고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갈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집중적으로 지원해주는 대책도 동시에 마련하라.

전세는 무죄다

오철환객원논설위원서울 집값이 오르자 느닷없이 전세가 유탄을 맞았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이른바 ‘갭 투자’ 때문이다. 갭 투자 시 전세보증금이 통제 불가능한 담보대출로 작용해 주택가수요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전세 자체를 죄인으로 몰아 없애자는 것은 빈대 잡으러 초가삼간을 태우는 어리석음이다. 집값이 오르면 주택공급을 늘릴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정도다. 주택수요를 억누르려는 정책은 자연스런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정책이 성공하기도 어렵다.정부는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 투기세력을 강압적으로 때려잡아 주택수요를 억제해보려고 기를 쓴다. 투기꾼의 탐욕과 이기심이 밉고, 집 없는 사람의 발끈 달아오르는 조급한 성미가 천박하게 비칠 법하다. 그래서 천박하고 미운 사람들의 팔다리를 묶어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게 손쉽고 돈도 들지 않는데다 권력의 힘을 과시하기 딱 좋다. 무소불위의 칼자루를 휘두르는 맛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토지거래제한구역을 지정하고 투기과열지구를 발표한다. 금융권의 각종 대출을 옥죄고 자금을 추적한다.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관련 세금을 감정적으로 비칠 만큼 대폭 인상한다. 불평불만이 비등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말을 듣지 않고 과욕을 부리는 사람들의 자승자박이고 인과응보라고 눈을 흘긴다.지금 높은 자리를 차지한 분들은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착한 사람들이니 본능에 충실한 찌질이들의 심정을 알 리 없다. 고시에 합격한 보상으로 명문가와 혼인해 신혼부터 넉넉하게 출발한 엘리트들도 서민의 삶을 알기 힘들 것이다. 월세와 전세의 차이를 경험 속에서 실감할 기회가 없었을 터다. 월세가 전세보다 낫다거나 전세는 없어져야 할 관습이라는 생각은 꿈속의 뽀얀 민낯을 잘 보여준다. 공중에 붕 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봐야 탁상공론만 있을 뿐 제대로 맥을 짚은 정책이 나올 수 없다.전세는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가 윈·윈 하는 제도다. 집주인은 집을 처분하지 않고 세입자에게 안심하고 관리를 맡긴다. 금융권 대출을 얻지 않고 이자 부담 없이 절반 정도의 자금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착한 제도다. 무이자 민간자금을 활용해 레버리지를 기대하는 이점도 있다. 지금은 갭 투자가 사회적으로 눈총 받는 진상이지만 집값 하락기에는 착한 브레이크 역할도 한다. 갭 투자는 소수의 위험감수형 투자에 해당할 뿐 비난대상인 것은 아니다. 소비자 중에도 ‘어얼리 버드’가 있듯이 투자자 중에도 공격적인 투자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세입자도 월세보다 전세를 선호한다. 매월 집세를 납부해야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으로 전세환산가치와 비교해 저렴하다하더라도 월세는 간당간당하다. 월세를 내지 못하면 당장 거리로 쫓겨날 수 있다는 심리적 부담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밖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더라도 집에 오면 아늑하고 편안해야 하는 법이다. 월세는 그런 안락함이 부족하다. 전세는 월세를 내지 않는 대신 목돈을 맡겨두고 집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다. 설혹 집주인이 나가라고 해도 전세금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에 다소 느긋하다. 전세금은 큰 목돈이기 때문에 그 돈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지 않는 한, 중심을 잡아주는 안전장치로 작용한다. 집을 임차하는 대가로 집주인에게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관계이기 때문에 세입자는 전주의 지위를 아울러 갖는 측면도 있다. 절대적 을은 아닌 셈이다. 전세자금 대출까지 저리로 이용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전세는 세입자에게 나쁘지 않다. 집을 살 돈을 비축하는 중간단계로 유용하다.전세가 투기에 악용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관습’이나 ‘없애야 할 제도’라는 시각은 편견이다.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투자하려는 사람들은 대출규제로 막을 수 있지만 전세를 안고 집을 사려는 사람은 통제할 방안이 없다. 통제권을 벗어나 있다는 점이 전세의 죄 아닌 죄다. 그 때문에 미운털이 박히고 급기야 전세를 없애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전세의 역기능만 볼 게 아니라 그 순기능을 잘 이해해야만 좀 더 현명한 정책방향을 잡는다. 전세의 특성은 시장의 힘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영역을 지켜준다. 월세에 살면서 돈을 모아 전세로 갈아타고, 좀 더 돈을 모아 집을 사는 것이 평범한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사다리다. 공연히 남의 사다리를 걷어차선 안 된다. 월세든지 전세든지, 누구나 자신의 형편에 맞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정부의 역할은 그에 합당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전세는 죄가 없다.

보조개 사과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분홍 코스모스가 파란 하늘 아래 정겹게 하늘거린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기다. 가을이 피부로 느껴진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도 이 가을 정취를 실감할까. 어찌 지낼까. 지난 일을 떠올리며 시골로 향했다. 텃밭에 심어뒀던 채소도 과일도 거두지를 못했다. 예쁜 꽃이 펴 알알이 달렸을 사과나무도 코로나로 인해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사과나무로 달려가니 보조개가 가득하다. 군데군데 패이고 들어간 흠이 보인다. 옴폭옴폭 찍혀있는 사과의 뺨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홀로 견디며 힘들었을 과실들이 살갑게 다가온다.언젠가 경북에 엄청난 우박이 쏟아진 적이 있다. 한창 수확할 시기에 주먹 덩이만 한 우박이 내렸으니 많은 사과가 상처를 입었다. 맛과는 별도로 상품 가치가 떨어져 버렸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고생했던 농민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우박에 맞아 푹 파인 사과가 마치 웃는 것 같아요.” 푹 들어간 부분이 웃는 보조개처럼 보였다. 농민들은 희망을 품고 이름을 붙였다. ‘하늘이 만든 보조개 사과’라고. 보조개 사과는 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얻었다. 그래 나의 사과도 힘든 고비를 기억하며 웃고 있다. 보조개를 머금고. 잠시 보조개 사과에 눈을 주는데 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보호자의 민원이라고 한다.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보호자로 온 아빠는 격리돼 생활해야 하는 상황을 참는 데 한계치에 도달한 모양이다. 얼른 옷을 입고 회진하러 들어서니 아빠가 나를 보자 갑자기 두려움을 호소한다. 확진자와 함께 있는 좁은 공간에 있으니 곧 병이 옮아 올 것 같단다. 식사 때 마스크를 벗어야 하고 또 가까이서 24시간 간호를 해야 하니 너무 겁이 난다는 것이다. 잠잘 때만이라도 독립된 방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환자들로 가득한 병동이라서 가능하지 않다고 하자 이젠 목소리를 높인다. 흥분된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아빠의 코로나 공포감이 너무 커서 일단은 분리가 필요했다. 병에 걸릴까 봐 걱정인 데다가 확진돼 또 일을 못 하게 되면 먹고사는 것이 문제라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변을 토한다. 어쩌면 좋을까.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빠가 힘들어하니 자기 혼자서 병실에 있을 수 있다고 얼른 대답한다. 이전에도 전화 통화해가면서 혼자 있은 적도 있다며 자신 있는 표정이다. 할 수 없이 아빠를 집으로 보내 자가 격리하도록 하고 아이는 혼자 입원 생활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하지 않으랴. 코로나가 오래 가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그로 인한 마음 상함이 불쑥불쑥 드러난다. 아이 대신 아파지고 싶다며 울던 엄마의 마음도, 내가 건강해야 우리집을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던 아빠의 마음도 다 이해가 된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이 모든 것이 코로나라는 요망스러운 바이러스가 일으킨 것인걸. 가을이 되자 다행인 것은 선선한 바람결에 혼사 소식이 날아든다. 봄의 결혼식을 가을로 미뤄 두지 않았겠는가. 주말이면 연이은 결혼식 스케줄로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지만, 코로나로 힘들었을 이들, 그래도 결혼식을 올릴 수는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발 이 코로나가 잦아들어 앞으로 신혼 생활에 핑크빛 행복만 가득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코로나19 치료에 투입돼 병동에서 봄과 여름을 보내었던 동료 과장이 둘이나 노총각 딱지를 떼게 됐다. 언제 국수 먹여줄 것이냐고, 봉투 준비해뒀는데 그 봉투가 낡아서 이젠 없어질 것 같다는 농담도 주고받기도 했는데 드디어 축의금 봉투를 쓸 수 있고 한껏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흐뭇하다. 새 출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라도 행복으로 바꾸어 생각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별별 사건 때문에 눈물지을 때가 많지 않던가. 순간순간 서글픈 마음이 들 때도 밝은 면, 좋은 면, 행복을 미리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긍정의 순간을 기대해야 하리라.이번 가을에는 어떤 경우에도 꼭 다르게 생각해보자. 우박에 맞아 아예 상품 가치가 없었던 그 사과가, ‘보조개 사과’로 바뀌면서 인기가 좋았던 것처럼. 사람들과 만나지 못해 어렵더라도 양 볼에 보조개를 지어가며 ‘인생이 별것이야, 까짓 거’ 하는 심정으로 좀 더 가볍고 향기 나게 하루를 맞으면 좋겠다. 가을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구름 위에 빛나는 태양이 있음을 기억하며 씩씩한 걸음을 내딛기를 소망한다.

차별과 차이에 대한 단상

오철환객원논설위원차별과 차이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쓰이는 말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둬서 구별함’이라고 풀이돼 있고 차이는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라고 설명돼 있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긴 어렵다. 그 용례를 살펴보면 그 이해가 빠를 수 있다. 차별은 성차별, 인종차별, 적서차별 등으로 쓰이고, 차이는 학력차이, 빈부차이, 세대차이 등으로 활용된다.차별은 다른 것을 구별해 다르게 대하는 것으로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개재된 뉘앙스를 지닌다. 반면 차이는 내재적 성질이나 피상적 특성을 다르게 인식하는 정도나 상태로 가치판단이 배제된 사실판단에 근접한 편이다. 차별은 전근대적인 역사적 유산으로 청산해야할 대상이고 차이는 관찰의 산물이거나 인식의 결과물로 합리적으로 활용해야 할 현상이거나 개념이다. 그 구별 기준과의 연관성이 없고 부당한 대우와 긴밀히 연결된 차별은 피해 당사자의 반발을 불러오지만 그 격차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차이는 정당한 인센티브다. 이렇게 보면 차별과 차이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상황에 접하면 헷갈리기 십상이다.부자와 빈자는 재산의 다과로 분류되는 구분이다. 부자와 빈자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대우를 달리 한다면 차별이다. 그렇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는 조건에서 돈을 남보다 더 벌었다고 해서 그게 부당한 건 아니다. 단순한 차이다. 대가를 치르고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는 시스템에서 그에 상응하는 재화를 희생하고 좋은 물건을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는 일은 정당하다. 부자가 큰집에서 비싼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는 것을 부당하다고 비난할 순 없다. 배가 아플 수 있겠지만 그걸 차별이라고 항의할 순 없다.그렇다면 정당하게 재화를 축적한 부자가 편리하고 살기 좋은 곳에 땅을 사고 집을 사는 것이 비난받을 패악질이고 적폐일까. 이와 반대로 자유시장질서 하에서 돈 버는 재주가 부족해 불편하고 조악한 곳에 보금자리를 갖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일까. 양자 모두 최선을 다한 결과라면 비난받거나 부끄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남보다 더 노력한 사람이 위치 좋고 살기 좋은 집을 선점하는 시스템은 모두가 합의한 체제다. 자유시장경제체제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합리적인 제도로 알려져 있다. 더 나은 체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최선이라 할 수밖에 없다.부자가 많은 돈을 치르고 편리하고 살기 좋은 땅을 선점하다보면 특정지역에 부자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이 다시 부유층을 모여들게 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빈자는 아무래도 자금력이 부족하다보니 불편함을 감수하고 싼 집을 선호한다. 그래도 자기 조건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 결과 빈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비슷한 지역에 모여든다. 주거이전의 자유와 계약의 자유가 보편적으로 보장된 사회에서 누구나 자기 형편에 맞는 곳을 용케 찾아낸다. 또 유유상종이 대개 살기 편하다. 이렇게 부촌과 빈촌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고 어디에서든지 거의 비슷하다.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고 이에 부당한 자격을 부여한 건 아니다. 차별이라기 보단 사회적 현상이다.한때 부자와 빈자의 위화감을 완화시키고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취지로 아파트단지에 큰 평수와 작은 평수를 섞어 시공하도록 강제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하고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큰 평수에 사는 사람과 작은 평수에 사는 사람 간의 위화감이 오히려 악화된 것이다. 주말이면 골프를 치러가는 사람과 방콕하는 사람이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것은 서로를 불편하게 할 뿐이다. 이러한 부작용은 어린이들의 민감한 감성을 자극하고 교우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른바 섞어찌개 규정은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하지만 아직도 그러한 잔재가 공공주택 건설이나 재개발 허가 조건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재개발 임대비율 30% 상향조정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합리적인 규제인지 의문이다. 부자와 빈자 양자 모두 싫어하고 불편해 하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다. 주거의 선택은 개인의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맞다. 굳이 부추길 필요는 없지만,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부촌과 빈촌이 생긴다면 그게 차별의 징표이거나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다. 형편이 좋아지면 누구나 언제든지 말을 바꿔 탈 수 있다.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마음이 조마조마한 날이다. 태풍과 강풍 피해 장면들을 볼 때면 분지에 사는 덕분에 그나마 큰 피해 없음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늘도 아무 피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의료계의 긴박한 상황들이 일단 진정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하지만 집단행동을 주도했던 비상대책위원회는 의협과 정부·여당 합의안에 대해 절차상 문제를 제기했다. 최종합의안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집단행동에 나섰던 그들이 전혀 내용을 듣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전임의 협의회, 대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와 젊은 의사 비대위를 꾸려서 연대하고 있다. 아무리 의사협회장이 전권을 위임받아 협상을 진행한다고 해도 최종협상안은 그들의 앞날에 대한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에 내용을 알리고 그 상황에 대해 상의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것을 패스했다고 하니 전공의들을 대신해 병원 일에 골몰하고 있던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과정은 언제나 공정해야 하지 않던가. 절차는 또 정당해야 하지 않은가. 최종 합의안의 내용도 의료계 전체가 바라던 ‘철회’가 들어 있지 않고 아무리 그 뜻이 ‘원점 재논의’와 같다고 한들 젊은 의사들이 분개해 주장해 온 명분에 미치지 못한다. 의협과 복지부의 합의안에 단체행동 중단이 적시된 데에도 전공의 단체는 반발하고 있다. 젊은 의사들의 단체가 의협 산하 단체이기는 하지만 단체행동은 그들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대한전공의협의회도 이제껏 해오던 단체행동을 어떻게 할지 논의 중이라고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코로나19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수련해야 하는 전공의들의 허탈한 마음과 국가고시를 앞둔 의과대학생들의 코앞에 다가온 미래를 결정짓는 시험에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의료계의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에 가슴이 답답하다. 특히나 정부 여당과 의협의 협상 과정에서 대한전공의협의회가 배제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허탈감은 어떠했겠는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기대했지만, 의사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 진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렇게 지루하게 이어지는 코로나로 인해 참 울적하다.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진정어린 사과와 수습을 해야 하는데, 의료계 선배로서 최종 협상안으로 타협하는 과정에 문제는 없다는 식이면 고생하며 투쟁했던 어린 의사들, 상대방인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공자님도 이르지 않던가.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이것을 잘못이라고 한다고. 사람은 잘못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허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허물을 고치는 데 꺼리지 말라’고 말한 것인데, 잘못이 없다는 의료계의 수장. 잘못이 있는데 고치기를 주저하면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위험이 있고 잘못은 또 다른 잘못을 낳을 수 있으므로 잘못을 고치는 데 꺼리지 말고 즉시 고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전공의들이 떠난 자리를 메우며 날마다 발생하는 신종 감염병 환자 진료하는 이들, 불안한 마음과 허탈한 마음이 교차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좋은 해결책으로 환자 진료하는 손길에 힘이 나면 얼마나 좋으랴.9월, 입원하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 검사에서 바이러스의 활성도를 나타내는 수치도 엄청나다. 그 수치를 보고 있으면 이 아이가 언제 열이 내리고 설사가 그치고 식사를 제대로 할까? 걱정스럽다.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으로 나온 어머니가 확진자 아이를 데리고 입원했다. 아이는 감염력 지수를 나타내는 수치가 아주 강했다. 도대체 이 신종바이러스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감염돼 증상을 일으키게 하는가? 확진자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는 회진 때 보면 아이를 품에 꼭 껴안고 있곤 했다. 그때마다 강조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더라도 너무 가까이 붙어 있지 말라고. 마스크도 꼭 쓰고 손 위생을 철저히 하라고. 그때마다 알았다고 하던 아이의 모친이 고열이 시작됐다. 코로나 검사를 해보니 양성, 확진이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어쩌겠는가. 아이가 아픈 것을 건강한 몸으로 바라보는 자신이 미안했을까. 품에 아이를 안고 토닥거리니, 차라리 함께 아픈 것이 더 마음 편했을까. 열로 벌벌 떠는 어머니의 얼굴에, 불안한 모습보다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자식 아픈 것보다 함께 그 병을 나눌 수 있어 더 마음이라도 편할까. 앞을 알 수 없는 신종 감염병의 예후라서 이제는 아이의 상태보다 어머니의 상태에 더 마음이 쓰인다.아무쪼록 아이와 엄마, 젊은 의사들과 의사협회의 상황이 잘 마무리돼 안정되길, 다가온 가을을 우리 모두 편히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의·정, 모든 논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문화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휩쓸고 있을 때 이성적 판단이나 합리적 반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왕년의 자본가와 지주만이 반혁명 분자로 몰려 홍위병(紅衛兵)에게 조리돌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도 마오쩌둥에게 무조건 충성하지 않으면 모조리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집단 구타를 당하고는 목에 죄인 명패를 달고 동네를 여러 바퀴씩 돌아야 했다. 그러다가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다. 살아남은 지식인들도 정신 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하방(下放)돼 강제 노동에 투입됐다. 천하의 덩샤오핑도 하방됐다. 병원에서도 난리가 났다. 의사 대부분이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진료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급한 수술 환자가 있을 경우 문제가 심각했다. 그런데도 홍위병들은 이렇게 외쳤다. “모든 것은 정신이 좌우한다. 정신이 곧 홍(紅)이다. 전문지식, 뭐 전(專)? 그까짓 얄팍한 지식과 기술쯤이야 공산당 사상에 투철하면 누구나 습득할 수 있다. 보라,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저 붉은 태양 동방홍(東方紅), 우리 마오 동지! 그의 어록을 밤낮으로 가슴에 품고 달달 외고 철저히 이해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안 그런가, 동무들! 우리는 홍위병, 마르크스·레닌 공산주의와 마오 사상(紅)을 지키는(衛) 혁명 전사(兵)!” “옳소, 옳소! 중국공산당 만세, 마오 주석 만세! 우리는 홍위병!” 수술 환자를 두고 홍위병은 소리쳤다. “왕(王) 간호사, 반혁명분자 조(助) 의사가 수술하는 것 봤지?” “네...” “당장 수술해!” “저...” “아직 정신 무장이 안 됐구먼, 자아비판부터 해 볼까?”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간호사가 데굴데굴 구르는 환자의 배를 북 갈랐다. 피가 쏟아지고 내장이 와르르 흘러나왔다. 그다음부터 간호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포에 질려서 울기만 했다. 환자는 바로 죽었고, 얼마 후 죄 없는 간호사도 반혁명분자로 몰려 맞아 죽었다. 중국통 친구가 들려준 문화혁명 때 있었다는 이야기다.“배우기만 하고 생각해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만 하고 보편적인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태로워지기 쉽다(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설익은 지식으로 나서서 떠들면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객관적 안목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아 독선에 빠져 독단을 일삼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다. 전문 지식과 누적된 경험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사회적 이슈에 비전문가의 개입이 도를 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들(특히 생각이 짧지만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의 주장이 터무니없고 함성이 너무 위압적이다 보니 전문가 집단은 말도 안 되는 논란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대부분의 경우 침묵한다. 그러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면 단호한 태도로 사생결단의 저항을 하게 된다. 모든 직종에는 물을 흐리는 사람이 있다. 소수의 행위나 처신을 문제 삼아 다수의 선량한 사람까지 공격할 때 그 직종 종사자의 사기는 떨어지고 발전은 지체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상대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생산적인 토론이나 상호 존중에 입각한 양보, 배려, 합의는 설 자리가 없다. 건강한 식견과 상식을 존중하는 다수의 국민들은 지금 ‘공공 의대’ 설립 등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극단적인 의·정 대치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퇴치에 앞장선 의사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코로나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들을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이기주의자로 몰아붙여서는 안 되며 국민도 편향된 시각으로 그들을 폄훼하며 함부로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 의사들도 어떻게 해야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국민 건강 증진과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의·정은 모든 논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정부 당국은 그 과정에서 나오는 쌍방의 주장을 소상히 공개해 모든 국민이 분명히 알게 하라.

의료분쟁을 지켜보면서

오철환객원논설위원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등에 반발하는 의사 관련단체의 실력행사가 민감한 현안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다. 전국의사 총파업, 전공의 총파업, 의사 국가시험 응시 거부 등으로 의료계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에 임해 전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의료인들이 인술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다. 때 아닌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비난하기 전에 전후 사정을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독신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합계출산율마저 2.0 이하로 떨어져 대학입시대상자가 매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예측 가능한 미래에 이러한 부정적 추세가 개선될 여지는 추호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오래 전에 세운 계획에 맞춰 의대 정원을 지속적으로 늘려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구 1천 명 당 OECD 평균 의사 수가 적다는 이유는 설득력이 없다. 젊은 의사 비율과 인구대비 의사증가율은 OECD 평균보다 높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래 추세를 수정해가는 것이 정상이다. 또 의료보험을 비롯한 의료시스템의 국가별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의료의 질도 당연히 따져볼 일이다. 의사 부족과 의대 정원 조정은 그 연후에 도출되는 결과물이 돼야 한다.공공의대 설립 목적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지역별 전공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시도된 것 같다. 하지만 의사 관련 단체들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세게 반발한다면 확정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재검토해보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화를 통해 윈·윈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전향적 자세가 절실히 요청된다. 국민을 위한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한다면 바꾸지 못할 정책이 없다. 급변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 변하지 않는 환경은 없고 영구불변의 진리는 없다.의사 수의 지역별 불균형은 다른 방법으로 조정해야할 과제이다. 예컨대 농어촌 등 무의촌 주민이 인근 거점도시 의료서비스를 신속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인프라를 깔아주는 것이 현실성 있고 경제적인 방법일 수 있다. 의사의 환자 접근성이 현실적으로 구현되기 어렵다면 환자의 의사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성도 크다. 굳이 가지 않으려는 의사 가족을 억지로 벽지로 보내려고 강요하는 것보다 환자가 쉽게 의사를 찾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낫다. 더하기가 안 되면 빼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전공별 불균형은 의료수가 조정이나 지원금 등을 활용하는 방법이 합리적이다. 자본주의와 자유경쟁 하에서 어떤 영역이라도 난이도와 보상에 따라 명암이 갈리기 마련이다. 누구나 위험과 수고에 비해 보상이 더 큰 일을 선호한다. 의사라고 예외일 수 없다. 흉부외과 등이 의대생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는 희생에 비해 소득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시정해야 할 필연성이 정의라면 사회적 합의를 거쳐 시장실패에 정부가 적극 개입할 정당성이 확보된다. 의료보험수가를 조정하거나 정부가 직접 지원금을 주는 방법을 상정할 수 있다. 미곡의 수매량과 수매가를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기존 의대를 활용해 공공의대 설립 목적을 점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도 하나의 선택지다. 남원이나 순천에 새로이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것보다 전북대 의대나 전남대 의대의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이 반발이 적고 더 효과적이다. 지역발전에 더 실속 있고 지속 가능한 방안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생색내기 위해 기획된 조잡한 정책이 아닌지, 특정지역의 지역공약사업에 무리한 모험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지, 그것이 의심스럽다. 실패한 의학전문대학원 모델이라는 점도 께름칙하다.의료인들의 전폭적인 참여가 절실한 때에 그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법안을 꼭 이 시점에 발의한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의료계가 거세게 반발할 거란 사실을 몰랐다면 정말 무능한 것이고, 그걸 알고도 이런 일을 벌였다면 위중한 재난을 틈타 중대한 정책을 슬쩍 도둑질하려 했다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데모 현장에서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의 습성을 지배세력이 된 지금에도 버리지 못하고 적과 싸우듯이 국민을 이기려고 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 클리셰다. 정권에 해악을 미치는 이슈를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 덮으려는, 여론조작을 위한 이이제이적 충격전술이라면 이는 망국적인 최악의 선전선동에 다름 아니다. 이 상황에서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스마이즈 시대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처서가 지나도 더위는 여전한데 어느새 하늘은 가을빛이다. 차창 풍경으로 평온한 가을이 다가옴을 느껴본다. 코로나19가 다시 긴장의 끈을 조이게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격상됐고 이런저런 사태로 나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가늠조차 힘들다.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다시 멈추라고 하니 그 마음이 어떠하랴 싶다.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반년 넘게 고생한 직원들은 이젠 휴가도 좀 가고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을텐데 다시 밀려들기 시작하는 환자를 받아야 한다니. 축소해 운영하던 코로나 병동을 다시 열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인력을 차출해 코로나 병동이 돌아가게 해야 하는 순번을 짜야 한다. 휴일 병동에 올라서니 당직 간호사가 우울한 얼굴이다. 마스크를 한 얼굴에서도 표정은 우울하다. 입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정도로 눈동자에 힘이 없고 광대뼈조차 축 처져 있는 것 같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너무 힘들다고 한다. 인력은 줄고 돌봐야 할 환자들은 늘어 종일 뛰어다녀도 다 쳐내지 못할 일이 밀려든다고 한다. 주말에 만보기 앱으로 당직하는 동안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싶어서 체크해 봤다고 한다. 액팅 당번이라고 부르는 처치 간호사는 1만5천 걸음, 그 다음이 1만2천 걸음이었단다. 하루 만 보 걷기에 도전하는 사람이더라고 매일 만 보 걷기를 하기는 어렵지 않던가. 당직을 서는 동안 잠시도 앉지 못하고 여기저기 환자들의 호소를 해결하려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몸은 녹초가 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한다. 속도 울렁거리고 밥맛도 없고 그러니 아무리 마스크를 쓴 얼굴이라지만 그 표정에 즐거움이 묻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며 눈동자가 젖어 드는 간호사, 그녀의 손을 말없이 잡고 토닥여줄 뿐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음이 안타깝다.코로나19, 정말 언제 잠잠해질 것인가. 지속적으로 통제하면서 일관되게 방역정책을 추진해야 하지만 여름휴가 기간 고삐를 풀어버린 탓에 이제는 정말 언제 다시 줄어들 것인가 실로 걱정이 된다. 일 년의 반이 넘어가는 이 시점까지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나날들, 피로감만 더해간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 나와서 막아주거나 특효약일 개발되기 전까지는 마스크 쓰기를 일상화해야 할 것이다. 쉽사리 물러갈 것 같지 않으니 어쩌면 호모 마스크 쿠스의 시대를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스크가 일상화되다 보니 상대가 웃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거나 상대에게 친절히 대해야 할 때도 표정을 드러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입 꼬리를 올리고 웃는 스마일은 마스크 뒤에서는 보여줄 수가 없으니 빛을 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눈 주위 근육을 눈동자 쪽으로 집중 시켜 광대뼈를 마스크 위로 돌출 시켜 끌어 올려서 눈웃음을 만드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스마이즈’라고 한다. 이것은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입 꼬리 근육은 아무런 감정 없이도 올릴 수 있어 가짜 미소를 만들 수 있지만, 눈 주위의 근육은 행복한 감정이나 친절한 마음 없이는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스마이즈는 미소(smile)와 응시(gaze)를 합성한 신조어로 미국의 유명모델인 티아라 뱅크스가 2009년 모델 선발 TV 쇼에서 주장했다. 함부로 웃어선 안 되는 모델들에게 오직 ‘눈빛’으로 ‘기쁨과 열정을 뿜어내라’고. 미소 짓기를 강조해왔던 고객 만족 교육에서도 마스크가 일상화되다 보니 미소를 보여줄 수 없게 됐다. 스마일이 아니라 스마이즈로 인사하게 되는 시대, 눈으로 인사를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코로나19가 여전하다 보니 여행하는 것도 잠시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주저하게 되었다. 어느 때보다도 가족과 함께 하는 머무는 시간이 많아져서 이젠 달마다 가족의 달. 날마다 가정의 날이라고도 한다. 여행보다는 집에서, 연인이나 친구보다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추억을 쌓고 새로운 곳보다는 익숙한 곳, 옛 추억을 되새김할 수 있는 곳을 택하여야 하리라. 마스크 쓴 채로 미소를 보여주는 스마이즈를 생활 속에서 익혀야 할 것 같다. 스마이즈를 처음으로 주장했던 모델 타이라 뱅크스가 방탄소년단의 열렬한 팬이었던가. 방탄소년단과 댄스 타임이 포착된 영상을 게시하며 “방탄소년단과 만남은 스마이즈(Smize) 보다 더 좋더라”는 메시지도 덧붙일 정도이니. 코로나 감염병 시대,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을 찾아내서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소중한 나날이 되기를 빈다. 가끔 스마이즈 연습해보자, 마스크 벗고 여유 있게 미소 지을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오철환 객원논설위원소강상태를 보이던 코로나19가 다시 기세를 떨치고 있다. 방역전문가들이 경고했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다. 정부와 여당은 감염 확산을 막고자 하는 의지보다 희생양을 만들어 그 책임을 떠넘기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느낌이다. 8·15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기독교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 집회 방식에 동조하진 않았지만 그 지향점을 밉지 않게 보고 있던 통합당을 엮어보려고 억지를 쓰는 듯하다. 통합당은 공짜 점심을 기대했을 수 있지만, 극단적 주장에 대한 역풍을 맞거나 코로나 확산에 대한 독박을 쓸까봐 잔뜩 몸을 사린 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때 맞춰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통합당은 과격한 극우 집회 주최 측과 선을 긋고 코로나 2차 대유행을 정부 여당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폈다. 덫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코로나의 기세에 눌려 수세로 몰린 형국이다.정치권은 코로나 재확산의 책임 떠넘기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 책임소재가 정당지지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규명은 언론과 국민의 몫이고 그 출발점은 팩트 체크다. 지난 1~11일 확진자 수는 20명에서 40명대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0시 기준으로 12일 54(34)명, 13일 56(43)명, 14일 103(79)명, 15일 166(146)명, 16일 279(244)명, 17일 197(160)명, 18일 246(184)명, 19일 297(250)명, 20일 288(220)명, 21일 324(229)명, 22일 332(223)명, 23일 397(265)명, 24일 266(182)명 등의 추이를 보였다. 괄호 안은 서울과 경기도다. 12일 0시에 50명대를 돌파했고, 14일 0시에 전날대비 거의 두 배로 폭증했다. 잠복기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15일 0시 이전에 대유행이 시작된 걸 확인할 수 있다. 잠복기 최소일인 5.2일을 감안하면 15일 0시 이전의 감염 현황은 20일 0시의 확진자 288명이라는 의미다. 확진자 폭증의 원인을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8·15 광화문 집회가 그 원흉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허나 코로나 확산을 부추긴 점까지 부인하긴 힘들다. 대유행 조짐을 보고 집회를 취소했어야 마땅했다.코로나 2차 대유행의 책임소재를 굳이 따지자면 잠복기를 감안해 8월9일 이전의 일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전 국민에게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은 코로나 종식이라는 시그널을 국민에게 주었고, 외식과 여행이 늘어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주말에 외식업체에서 신용카드로 2만원 넘게 5차례 이상 결제하면 1만원의 외식 할인쿠폰을 주었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영화 예약 시 1인당 6천 원, 공연 예약 시 1인당 8천 원, 온라인 숙박 예약에도 3만~4만 원의 할인쿠폰을 제공했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소비를 진작시킴으로써 침체된 경제를 살린다고 내놓은 선의의 정책이었으나 코로나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거에 허물어트렸다. 결과적으로 코로나 2차 대유행을 불러왔다. 코로나 방역대책과 경제 활성화정책은 일반적으로 이율배반적 상충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절충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은 한쪽만 본 우를 범했다. 관련 의학계가 2차 대유행을 계속 경고했지만 정부 여당은 오불관언이었다. 실패와 잘못은 누구나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와 잘못에 대한 뒤처리는 정직하고 깔끔해야 한다. 마냥 남 탓만 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정쟁에 악용하려는 꼼수는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경제정책 실패를 고백한 북한의 김정은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타산의 돌도 쓸모가 있듯 못된 적에게도 배울 건 배울 일이다.광화문 집회를 생화학테러로 비난하는 인사까지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생화학테러라면 고의성과 적극성 그리고 생화학물질 등 기본적 요건을 갖춰야 비로소 성립한다. 계획적인 의도나 적극적인 의사 또는 코로나 바이러스 보균 등 어느 것 하나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량한 국민을 어떻게 테러집단으로 뒤집어 씌우려는지 이해불가다. 막가파의 막말에 다름 아니다. 국민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일이다. 나쁜 일기에도 불구하고 8·15 광화문 집회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집회결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화난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최우선이다.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를 계도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생화학 테러집단으로 몰아 희생양 삼는 일은 하수 중의 하수다.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묻은 때만 나무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거·마·손으로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느낌으로 가을이 조금 묻어 있는 것 같다. 입추가 지났으니 이젠 가을로 접어들 것이라고, 더위가 머지않아 물러갈 것이라고 여기며 희망을 품어본다.뜸하던 코로나가 다시 고개를 쳐들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든다. 7월 말 8월 초, 여느 때 같으면 여름휴가가 한창이지 않았겠는가. 올해엔 코로나19로 조용하게 보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휴가라는 단어가 주는 들뜸에 사람 사이의 접촉이 많았던가 보다. 8월 중순으로 접어든 지금 연일 세 자리 숫자의 새로운 확진자가 더해가고 있다. 날마다 진행하는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을 듣다 보면 늘어나는 숫자에 가슴이 무너진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마스크 없이 만나는 순간이 오지 않으랴 기대했는데. 다시 방호복을 입고 확진자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부터 지끈거린다. 음압 병동에 입원해 있는 환자 수가 줄어 그나마 정말 다행이라고 여겼었는데, 간호사들도 이제는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볼 날도 머지않았다며 서로 위로를 주고 받았었는데, 물거품이 돼버렸다. 지역 유일의 공공병원이다 보니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는 이런 오르내림을 여러 번 반복하지 않으랴 싶어서 우울하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근근이 버텼는데,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나마 코로나19에 대해서 조금은 성질을 알게 돼 불안에 덜 떨게 됐다는 점이리라.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19와 끝나지 않은 전쟁이 계속된다. 질병관리본부장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통 시선이 고정된다. 지휘봉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국민들은 오롯이 그의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 할 것 같다. 코로나19에 대한 특효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백신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2월 말 3월 초의 대구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한 그 순간처럼 우리들은 모두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될 것 같다. 언제 어느 순간 무서운 맹수가 돼 코로나가 사납게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믿을 것은 나, 우리 자신뿐이다. 무엇보다 모임을 자제하고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 두기와 자신을 보호하고 또 타인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마스크를 꼭 쓰고, 손을 잘 씻어야 한다. 이른바 거 마 손 실천이다.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씻기의 실천, 거 마 손 실천만이 코로나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길일 것이다. 우리들에겐 위기를 맞으면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유전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DNA가 우리 핏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이런 위기일수록 반드시 극복할 것이라는 각오로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나아가야 할 것이리라.8·15 광복절을 전후해 확진자가 늘자 정치권에서는 서로 탓해대기 바쁘다. 이런 상황에 너와 나가 어디 있겠는가. 모두 힘을 합쳐서 코로나19와의 싸움에 집중해도 시원찮을 판에 신이 난 듯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코로나19는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불길이 잦아 들었다 싶다가도 잔불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작은 바람결에도 다시 살아나 무섭게 번지기 십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팬데믹(Pandemic)상황이지 않은가. 우리나라만 방역에 성공해 곧 종식될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어 더 불안하다. 이런 때일수록 국가의 국민의식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작은 불편은 감수하고 늘 상대를 배려하는 공동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니.서방에서도 이제는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강조했던 마스크 쓰기의 위력을 이젠 그들도 믿는 것이리라. 미국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이제 70%에 이르고, 손님 감소를 각오하고 ‘No mask, No entry(마스크 안 쓰면 입장 불가)’ 같은 안내문을 붙인 가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결국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작은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변화된 흐름이 아니겠는가.코로나19와의 지루한 싸움이 벌써 일곱 달이다. 답은 없지만 그래도 간절하게 바라면 우리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겠는가.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이르지 않던가.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 하나가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우리가 다시 햇살 아래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보고픈 이들을 만나서 마스크 벗고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선물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 소원을 빌어보자.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씻기의 거 마 손 실천으로 일상의 평화가 어서 돌아오기를.

코로나19와 교육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얘는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밤낮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새벽 3시 넘어야 잡니다. 오후 2시가 지나야 일어나서 밥 먹어요. 잠도 10시간 이상 잡니다. 공부는 완전히 접었습니다. 밥은 안 먹어도 게임은 해야 합니다.”고교 1학년을 데리고 상담하러 온 엄마의 하소연이다. 아들은 엄마가 말할 때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저도 게임을 그만두고 싶지만 끊을 수가 없어요. 공부하고 싶지만, 인터넷 수업은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학원에 가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게임을 하면 다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어요.”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연 아이의 말이다. 이런 문제로 걱정하는 가정이 예상 밖으로 많다.일본에서 오래 생활한 프랑스 기자 에티엔 바랄이 쓴 ‘오타쿠-가상세계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우리 부모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무엇을 좋아하는 정도가 지나쳐서 그것이 만든 가상세계로 현실을 대체해 버리고 스스로 그 안에 갇히는 사람들을 일본어로 ‘오타쿠’라고 한다. 그들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은 뒤로 한 채 만화, 컴퓨터 게임, 아이돌 스타, 인형 모으기, TV 보기 등과 같은 특정 생활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자신만의 가상세계에 몰두한다.저자는 ‘공부하라, 일하라, 소비하라’란 절대명령이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표면적인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경쟁에 직면해야 하는 많은 젊은이가 어른들의 생산사회에 들어가는 대신 가상의 세계나 유년의 놀이문화에 남기를 택한다고 분석한다. 심리적 퇴화 또는 자폐 증상에 가까운 오타쿠는 일본 사회의 모순이 빚어낸 희생자이자 이탈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일본 정신과 억압적인 학교 교육에 학대당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생존방식이라는 것이다.‘현실보다 상상의 세계가 더 좋다. 나를 인정해 주지도 않는 사회의 규약들은 지켜서 무엇 하나’라는 한 오타쿠의 외침은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저자는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야 한다’라는 일본 속담을 상기시키며 ‘튀어나온 못’의 고뇌와 고통은 외면한 채 그냥 돌출부를 두드려 박아 넣으려는 피상적인 조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학교나 학원, 인터넷에서 진행하는 수업을 이해할 수 없는 학생이 갈 곳이 어딘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고교생 어머니에게 컴퓨터 때문에 무조건 화를 내거나, 충분한 설명 없이 컴퓨터를 금지하는 등의 조치는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그들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억압과 맹목적인 강요로 튀어나온 못을 임시방편으로 박아 넣으려고만 한다면 아이들은 더욱 말문을 닫고 자기만의 폐쇄된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경향이 있다. 엄마에게 숨 가쁘게 몰아붙이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학생에게는 게임을 줄이고 교과서와 인터넷 강의를 반복해서 듣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밑줄을 치거나 표시를 해 두고 학교에 가서 알 때까지 질문을 하라고 했다. 학생이 질문하면 이해할 때까지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교사나 학습 멘토가 있어야 한다.“처음에는 인터넷 강의가 별로 와닿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니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교실에서 강의할 때보다 수업 준비를 훨씬 많이 하시고 설명도 더 자상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같은 강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좋습니다. 한 두 과목을 듣기 위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정말 좋습니다. 다만 친구들과 만나 떠들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아쉽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주말에 약속해서 보면 되니까요.”대학교 2학년 학생의 이야기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이렇게 다르다. 코로나로 중위권이 줄어들고 하위권이 늘어나면 중도 탈락자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교육 당국은 다시 악화하고 있는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함과 동시에 자기 관리가 어려운 학생에게 맞춤식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지도대책도 마련해 교육 격차 줄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반일독립운동을 할 건가

오철환객원논설위원최근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터져 나와 여론을 둘로 갈라놓고 있다. 하나는 소위 ‘친일파 파묘법’ 발의이고 다른 하나는 광복회장의 연설문 파문이다. 친일파 파묘법 발의는 말 그대로 국립묘지에서 친일파 인사의 묘를 파내는 법을 만들겠다는 시도다. 광복회장의 연설 내용도 친일파 파묘법의 사고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비록 늦었지만 친일파를 샅샅이 찾아내어 처단하고 그 잔재도 깡그리 쓸어버리자는 말이다. 그럴만한 죄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걸까.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면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책임소재를 밝히고 그에 따라 응분의 죄과를 묻는 것이 맞는다.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매국노를 찾아내어 응징하면 되고, 전쟁에서 졌다면 그 패인을 분석하여 책임 있는 자를 징벌하면 된다. 전쟁의 패인은 다양하고 전문적이기 때문에 치밀한 연구가 뒷받침돼야 뒤탈이 없다. 패전해 나라를 빼앗긴 경우라면 책임질 사람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개연성이 크다. 국제정세와 자기실력도 모른 채 전쟁을 일으킨 사람 탓이고 허약한 국력을 방치한 사람 탓이며 전쟁 중에 적과 내통했거나 이적행위를 한 사람 탓일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과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전의 경우는 아니다. 그 당시 조선은 전쟁을 할 힘도 없는 그로기 상태였다. 한일합병은 나라를 일본에 그냥 내준 부끄러운 사건이다. 나라를 빼앗긴 게 아니라 차라리 망국이었다.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은 책임은 왕과 지배계급에게 있다. 부국강병에 소홀한 무능한 왕들과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한심한 관료들 그리고 당파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던 양반들이 나라를 망친 원흉들이다. 망국을 을사오적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시각은 너무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조선은 그 전에 사실상 망한 나라였다. 희생양을 만들어 면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좀 더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분석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책임질 자가 나온다면 망국의 죄인으로 낙인찍어 역사의 감옥에 가둬둬야 한다. 친일파는 제도 순응적 현실주의자이거나 일상적인 생계형 방관자다. 친일파의 죄는 전쟁도 없이 나라를 넘긴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부작위다. 친일이 결코 자랑일 순 없지만 범죄라 보기엔 지나친 감이 든다. 단순히 친일했다는 이유로 단죄하기엔 명분이 약하다. 보통사람에게 수준 높은 역사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과욕이다. 친일파라 해 뭉뚱그려서 죄인으로 몰아선 안 된다. 일본국적으로 태어난 조선인들에게 그들 자손이 친일 멍에를 씌우고 조리돌림 하는 것은 일종의 폐륜행위다. 친일은 애국심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순한 친일과 반인륜적인 구체적 범죄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설사 독립과 광복을 방해한 자들을 응징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친일파 청산을 무한정 끌고 갈 수도 없고 주권이 미치는 범위 밖으로 확대할 수도 없다. 친일을 나치 전범처럼 범세계적으로 무기한 추적해 응징할 수는 없다. 광복 75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 프레임으로 국민을 갈라 치는 정략은 임란 이후 재조지은을 들먹이며 당파싸움을 벌이던 사대주의자들의 작태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연합국의 힘에 편승해 무임승차했다. 그런 연유로 인해 일제 청산에 대한 주도권조차 미군정이 쥐고 있었고 남과 북의 이념 전쟁으로 인하여 친일부역을 정리할 경황마저 없었다. 미군정 시절 친일부역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되었다면 상황은 다소 나아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일제청산은 단일 사안일 뿐이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포함한 복합적인 상황을 놓고 본다면 어느 것이 최우선순위였는지 단언하기 어렵다. 위안부와 징용에서 친일파 파묘법과 광복절 연설문에 이르기까지 과거사로 국론이 분열돼 갈등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리더십위기와 코로나로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부관참시를 법제화해 역대 대통령과 참모총장의 묘를 파내고 친일파 작품이라는 이유로 애국가를 거부하며 태극기와 무궁화. 대한민국 국호마저 기피하는 움직임은 부질없는 짓이다. 대한민국은 연합국의 힘으로 독립하고 유엔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그 역사가 부끄럽고 성에 차지 않는다고 반일독립운동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순 없다. 지금 정신 차리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다시 망국의 치욕을 경험해야 될지 모른다. 과거는 역사학자에게 맡기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전 방위적 도전에 주눅들 필요 없다

오철환객원논설위원우리는 전례 없는 전 방위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촛불정권이 들어선지 4년 차,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 경쟁과 실험적인 어설픈 정책의 실패로 인해 국민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사사건건 대립하고 그 와중에 경제는 파탄날 지경이다. 설상가상 코로나가 창궐하는 바람에 서민의 삶은 무너지고 기초적 생활터전마저 위협받고 있다. 포퓰리즘 정책과 임기응변적 지원금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자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어진 상황이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역대 급 장마가 나라 곳곳을 유린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우울한 나날이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믿고 살길을 찾아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심판의 날이 떠오르고 막연한 두려움에 소름이 돋는다. 인간의 원초적 죄과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미리 대비하면 환난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재난을 당하는 것이 또 인간이다. 재난은 취약한 부분을 용케 골라서 공략한다. 물난리에 수해를 당한 부분이 취약한 급소라는 말이다. 수해를 당했다고 넋 놓고 있을 게 아니라 자연재해가 적시한 약점을 보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재난이 찾아온다. 노아의 방주를 건조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섬진강이 범람해 그 인근지역에 큰 피해를 준 모양이다.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범람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원시적 재난이다. 따라서 그 원인과 처방도 새롭지 않다. 강을 지속적으로 준설하고 제방을 튼튼하게 쌓는 일이 시급하다. 산에 나무를 많이 심으면 금상첨화다. 이는 치산치수의 기본적 내용이다. 각론에 들어가면 방법론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다. 개별적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응용하는 정도다.4대강 사업은 치수의 구체적 사례일 뿐 특별한 게 없다. 이는 정략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치수사업이다. 강에 보를 쌓아 유속을 떨어뜨리고 퇴적물을 특정 지역에 집중시킴으로써 준설을 용이하게 하고 제방을 튼튼하게 보강한 재난대책에 불과하다. 보에 가둔 강물을 레저시설과 저수지 및 수력발전소 등 다용도로 활용하고 강둑은 공원이나 자전거 전용도로로 이용하는 등 부수적 성과도 결코 작지 않다. 폭우피해와 관련해 치수시설인 4대강 보의 영향과 효과성을 다시 조사·평가한다는 뉴스에 정말 어안이 벙벙해진다. 묵묵히 강물을 담고 있는 보도 지난 정권과 함께 적폐로 몰아 철거돼야 한다는 발상은 이념도 정책도 아니고 밴댕이 소갈머리일 뿐이다. 산사태 경보·주의보가 전국적으로 발령됐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속하는 나라에서 전근대적인 자연재해가 천여 건이나 발생했다. 나무가 많으면 나무뿌리가 흙을 잡아주어서 산사태를 막아준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태양광패널을 설치한 것이 산사태의 한 원인으로 의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으로 여겨진다. 경제성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태양광패널과 산사태의 연관성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태양광발전을 산사태의 주범으로 덮어씌울 수는 없지만 산사태를 유발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게다가 울창한 산림을 훼손하고 수려한 경관을 해치는 태양광발전이 친환경·재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조부모님 산소 뒤편의 산림을 훼손하고 들어선 태양광패널을 보노라면 울화가 치솟아 욕설이 나온다. 어쨌든 태양광과 탈원전을 재고하게 하는 산사태다. 인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다양한 도전이 있어왔다. 자연재해와 전쟁, 역병과 폭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들을 극복하고 꾸준히 번성해왔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를 두고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했다. 홍수와 한발에 치산치수로 맞서서 살아남았고, 역병이 창궐하면 백신을 개발하였다. 부국강병을 통해 힘의 균형을 추구함으로써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켜냈으며 가렴주구와 폭정이 행해지면 정권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정치를 선진화시켰다. 폭정, 역병과 자연재해까지 겹쳐진 작금의 상황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오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듯이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마음을 돈독하게 먹고 대응한다면 이겨내지 못할 바 없다. 외부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했던 민족과 문명은 번성했지만, 그렇지 않은 문명은 사라졌다. 도전이 없는 민족이나 문명도 무사안일에 빠져 사라졌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 방위 도전에 대해 강력한 응전만이 살 길이다. 도전은 살아남은 자의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