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십대/ 허정분 어린 시절에도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노래가 현실이 된다면 흰 죽사발 가득 고봉으로 얹힌 떡 마른 침을 삼켰다/ 봄꽃이 지고 오래된 농담처럼 입하나 덜겠다던 아버지가 산으로 가셨다/ 지병을 만장처럼 앞세운 불혹의 나이셨다/ 꺼이꺼이 곡소리 장단을 맞추는 오라비와 상여꾼 틈에서 오줌을 갈기는 동생도 미웠다/ 아버지 생전에도 철천지원수와 산다던 어머닌 부뚜막을 헐고 노구솥을 꺼냈다/ 워낭을 매단 소달구지가 낡은 이불과 그릇 몇 개를 허름한 초가 행낭채에 부렸다/ 날품 팔러간 들판 개망초 흰꽃이 옥양목처럼 펄럭였다/ 밤이면 반딧불이 허공을 선회했고 섬광을 그으며 유성별이 떨어져 내렸다/ 산자락 소나무 켜켜이 쌓아가는 흰 눈의 무게에 생살을 찢는 그 겨울 첫 달거리를 했다/ 덧없이 미래에 기댄 까마득한 날이 흘러 흘러갔다- 시집『울음소리가 희망이다』(고요아침, 2014)........................................... 십대 성장기는 삶의 과정에서 가장 보편적인 통과의례이자 가혹한 변화의 시기다. 좋든 싫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성장을 멈추기란 불가능하고, 누구도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어른들은 흔히 십대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말한다. 그 시절엔 생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마냥 좋기만 한 순수의 시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돌이켜 보았을 때 그렇단 얘기지, 그 시기의 그들은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어른들의 말과 달리 십대엔 대개 시험과 입시에 시달리는가 하면 또 더러는 일찌감치 불우한 환경에 맞서야하고 사춘기도 겪는다. 이래저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기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며 그 요동은 통증으로 반응한다. 십대들이 겪는 아픔도 고역도 방황도 실패도 모두 삶의 한 요소이다. 성장통은 지나고 보면 짧은 순식간의 바람처럼 여겨지지만 그 시기에는 조바심과 지루함으로 가득한 순간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거나 추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미래를 위해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거나 견디기 힘든 질곡의 나날이었을 경우 울컥 암울한 고통들이 역류되어 먹먹해지곤 한다. 가족들은 덫이자 굴레일 뿐이었다. 비루하고 신산한 삶들이 불운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천형처럼 몸을 옥죈다. 어서 빨리 질척대는 가난과 고단에서 벗어나 세상 밖 미래로 뛰쳐나가야 했다. 반세기 전의 전태일도 그러했으리라. 추운 날씨에 수능시험을 치루는 수험생도 온몸에 불안을 휘감고 있다.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대학생이 사방천지 널려있는 세상이다. 대학진학률이 80% 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그럼에도 수능시험은 여전히 인생의 전부가 걸려있는 최대 관문이라 여긴다. 적성에 맞는 대학이라는 등 말로는 둘러대지만 출세하고 대접받고 행세부리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안간 힘들이다. 대학 나와도 별 볼일 있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여전히 대학을 나오지 않고는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6~70년대엔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일이 여사였다. 시인의 십대에도 물론이거니와 여자는 더욱 그랬다. 눈물을 삼키고 입술을 깨무는 일이 잦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인은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그 미래가 문학이었던 셈이다.

전태일

전태일/ 맹문재나는 완전에 가까운 그의 결단을/ 지천명처럼 믿네// 그에게는 하루 14시간의 작업이나/ 단수(斷水) 같은 월급이/ 문제가 아니었네// 위장병이나/ 화장실조차 막는 금지도/ 문제가 아니었네// 바늘로 졸음을 찌르며/ 배고파하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일이/ 문제였네// 내게 인정으로 배수진 치는 법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 최후까지 알려줄 것이네- 시집『기룬 어린 양들』(푸른사상, 2013)..................................................... 어제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를 외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의 49주기였다. 그동안 전태일 열사에 대한 많은 평가 작업이 있었고, 열사를 기리는 여러 사업들을 해왔다. 올봄에는 총사업비 180억을 들여 ‘전태일 기념관’을 청계천에 건립하였다. 전태일 열사의 고향 대구에서도 오랜 기간의 침묵과 방관 끝에 몇 년 전부터 시민운동 차원에서 불을 지펴 매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대구 전태일 기념관’ 건립에 대한 의견도 모아졌으나 대구시가 의지를 보이지 않자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함께 추진에 나서 지난 9월 순수한 시민 성금으로 열사가 살았던 옛 집 부지를 매입했다. 시민모금운동을 전개해온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그동안 모은 기금 1억3천여만 원으로 계약을 맺고 다양한 방식의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총 5억 원을 내년 6월까지 추가로 마련해 매입을 완료할 예정이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내년 여름 공사에 착수해 열사의 50주기에 맞추어 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동안 이 사업을 주도해온 김채원 ‘전태일의 친구들’ 상임이사는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열사의 집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짓겠다”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기념관 건립에 동참해 열사의 정신을 대구에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며 시민들의 관심과 후원을 기대했다. ‘대구 전태일 기념관’ 건립은 고향인 대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등을 배출한 지역이라는 자부심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대부 전태일 열사와 그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의 고향이라는 자긍심으로 대체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대구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가설도 성립하리라 믿는다. 그동안 전태일의 고향임에도 생가에는 표지판 하나 없었고 그를 기리는 어떤 사업도 이곳에서는 싹을 틔우지 못해 대구는 전태일 정신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미약하나마 큰 발자국을 내딛었고 50주기를 맞으면서 열사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것이다. 다만 전태일 정신을 단지 노동문제나 자기희생의 정신만 강조되는 수준에 가두어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다시금 전태일 정신을 환기해내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때에 그의 불의에 맞선 용기와 더불어 ‘인정으로 배수진 치는 법’ 등 전태일 정신의 진정한 계승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시인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던 그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훗날 공고를 나와 노동자의 삶을 산 이력을 갖고 있다. ‘전태일 평전’을 끼고 다닌 시인에게 전태일의 삶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황지우 시인은 어느 시에서 “가령 전태일 같은 이는 聖者다”라고 했다. 그렇듯 맹문재 시인에게도 전태일 열사는 신앙에 가까운 위인이었다.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딸을 기다리며-고3 아이에게/ 박철늦은 밤이다/ 이 땅의 모든 어린 것들이 지쳐 있는 밤/ 너만 편히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 우리처럼/ 가난은 곧 불행이다, 라는 공식을 외우며/ 걸식하듯 밤하늘을 쳐다보는 바보들이 있을까/ (중략)/ 딸아 가여운 아이야/ 많은 이들이 옳다면 옳은 것이겠지/ 지지 말고 살아라/ 이민 가며 친구가 남긴 한 마디/ 악하게 살아야 오래 산다는 말도 되살아오는 밤/ 어서 돌아와 잠시라도 깊은 잠 마셔봐라 숨소리 예쁘게-/ 반쪽의 달이 외면하며 구름 뒤에 숨고/ 밤이 어둔 것조차 내 죄인양 송구스런 밤/ 너의 행복을 쌓으며 몇 자 쓴다 아이야- 웹진『시인광장』2009년 겨울호.............................................................숱한 불면의 날과 고통의 시간들을 감내했을 고3수험생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자식들 바라지한다고 애썼을 학부모들, 시험을 치루는 당사자의 마음고생도 그렇지만 그들의 비위 맞추랴 공부한답시고 부리는 짜증 다 받아주랴 그들 못지않게 힘겹고 가슴 조아렸던 지난 시간이었으리라. ‘정시’니 ‘수시’니 ‘수능’이니 ‘학종’이니 말도 탈도 많은 가운데 일생일대 결전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실력을 단 한 번의 평가에 쏟아내야 하는 날이니 수험생과 학부모 모두 초조와 긴장의 낯을 숨길 수 없으리라.해마다 되풀이되는 입시지옥에 단판 승부로 자신의 인생이 결정되는 이 행태는 가혹하고 부조리하기 그지없지만, 그들을 구렁텅이에서 해방시킬 뾰족한 묘책은 없었다. 다양한 선발기준을 마련했다지만 여전히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몇 시간의 결과로 평생 갑의 위치에서 순탄한 생을 살아갈지, 험난한 삶을 예고할지가 판가름 나는 가혹하고도 모순적 상황임에도 속수무책이다. 그런 현실에서 자식들을 안쓰러워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옳다면 옳은 것이겠지’ ‘지지 말고 살아라’며 등을 떼민다. ‘가난은 곧 불행’이라며 모든 가치의 척도로 경제능력을 꼽는 현실이 변하지 않는 한 이 왜곡된 교육의 부담을 벗기란 무망해 보인다.수능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도 적성에 맞는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고, 설령 가난하게 살더라도 자기 일에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면 주위의 편견 없이 얼마든지 결혼해서 잘 살 수 있어야 교육제도 개선도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 가치관의 폭넓은 사회적 수용이 선행되지 않고는 특목고 폐지, 선행학습금지, 심지어 서울대가 없어진다고 해도 대학서열화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입시경쟁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력 간 지나친 신분격차와 임금격차를 해소하지 않고는 사교육이 줄지 않으며 교육비 부담도 경감되지 않을 것이다.당국에서는 해마다 학교교육을 충실히 이수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지금껏 존재케 하고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힘은 경쟁을 통해 앞서는 자가 뒤처지는 자보다 부와 명예, 안락함 등의 아이템을 더 획득할 수 있는 사회구조에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부모나 자녀들이 자신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모든 이가 열망하지만 ‘막상 부자로 사는 이들은 열의 둘’이고, 그들조차 마냥 행복에 겨운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 수능이 각자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방도는 없을까.

철망 앞에서

철망 앞에서/ 김민기내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미움의 골짜기로/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떼 물위로 차오르네/ 냇물은 흐르네 철망을 헤집고/ 싱그런 꿈들을 품에 안고 흘러 굽이쳐 가네// 저 건너 들에 핀 풀꽃들 꽃내음도 향긋해/ 거기 서 있는 그대 숨소리 들리는 듯도 해/ 이렇게 가까이에 이렇게 나뉘어서/ 힘없이 서있는 녹슨 철조망을 쳐다만 보네// 자, 총을 내려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버려요// 저 위를 좀 봐 하늘을 나는 새 철조망 너머로/ 꽁지끝을 따라 무지개 네 마음이 오는길/ 새들은 날으게 냇물도 흐르게/ 풀벌레 오가고 바람은 흐르고 마음도 흐르게/ 녹슨 철망을 거두고 마음껏 흘러서 가게........................................이처럼 명징하게 서정적으로 통일을 염원한 노래가 또 있을까. 노태우 정부 때 만들어졌으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불리어지기로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햇볕정책을 시행하면서부터다. 햇볕정책의 기본 틀은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나가면서 ‘남북연합’이라는 과도적 통일 체제를 거쳐 완전한 통일로 향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도 큰 틀에서 이와 다르지 않으며 문재인 정부도 이를 계승발전 시켜나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문재인 정부 집권 반환점을 돈 이때 그동안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역시 한반도 평화통일의 물꼬를 다시 텄다는데 있다. 보수정권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군사분계선에 있는 군대를 비무장 시키고 끊어진 남북 철길을 잇고 있다. 통일을 바라는 남북 동포들은 이미 새가 되어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그 위를 훨훨 날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유시민의 ‘알릴레오’에 출연한 도올 김용옥은 만약 김정은이 바로 앞에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 유시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간절하게 “문재인 대통령 같은 사람 다시 못 만난다”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다.‘10.4 공동선언’부터 꼭 실천하라는 주문을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정치란 어떤 경우에도 대중보다 한발자국 먼저 나가야하는데, 꼭 그렇게 하시라” 국민의 눈치를 너무 살펴서도 곤란하고, 국민의 의식과 역사를 항상 선도해가라는 당부였다. 이는 과거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도 대통령에게 힘과 믿음을 실어줘야 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김용옥은 “우리 국민의 오판이 현재 남북관계에 진전이 없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과거보다 훨씬 험난한 가운데서 문 대통령이 어렵게 뚫어가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공감 가는 말이었다.지난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되는 날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서냉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베를린 장벽이 독일분단 44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지 28년 만인 1989년 11월 9일 무너진 것이다. 11개월 뒤인 1990년 10월 3일엔 역사적인 통일을 달성한다. 그리고 30주년 기념일, 동독 출신으로 3선 총리인 메르켈은 이날 장벽 인근 예배당에서의 기념행사에서 “베를린 장벽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킨다”면서 “전 세계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도 ‘녹슨 철망을 거두고 마음껏 흘러서 가게’ 두면 반드시 통일은 오리라.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 / 박노해서릿발 허옇게 곤두선/ 어둔 서울을 빠져 북방으로/ 완호로 씌운 군용트럭은 달리고 달려/ 공포에 질린 눈 숨죽인 호흡으로/ 앙상히 드러누운/ 아 3·8교!/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살아 다시 3·8교를 건널 수 있을까/ 호령 소리 군화 발길질에 떨며/ 껍질을 벗기우고 머리털을 깎여/ 유격복과 통일화를 신고/ 얼어붙은 땅바닥을 좌로굴러 우로굴러/ 나는 삼청교육대 2기 5-134번이 된다// (중략)// 푸르게 퍼렇게 시퍼런 원한으로/ 깊이깊이 못 박혀/ 화려한 조명으로/ 똑똑히 밝혀 오는/ 피투성이 폭력의 천지/ 힘없는 자의 철천지 원한/ 되살아나/ 부들부들 치떨리는/ 80년 그 겨울/ 삼청교육대- 시집 『노동의 새벽』 (느린걸음, 2004)........................................ 1980년 8월부터 1981년 1월까지 5공 출범 직전 당시 국보위위원장 전두환에 의해 만들어진 초법적 교정기관이 ‘삼청교육대’다. 영장도 없이 수많은 시민들을 체포해 전국의 각 사단 특수 훈련장으로 끌고 가서 온갖 인권유린과 막장 범죄 행각을 저질렀다. 그해 8월 나는 야간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5시간쯤 붙잡혀있는 동안 삼청교육대로 끌고 갈 사람들을 파출소로 잡아 와서 치도곤 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제보’를 받고 잡아들인 외상술값이 있는 사람, 파출소장의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 등을 망라했다. 명목상의 징집대상자는 깡패와 상습절도 전과자들, 반정부 데모꾼, 불온선동자, 전두환 비방자, 5·18 유언비어 유포자, 윤락녀 등인데 ​실제 끌려간 사람들은 술집에서 싸움을 했거나 술 취해 길바닥에 자빠진 사람도 있었고 학교에서 좀 껄렁거리는 고교생 등도 포함되었다. 어린 학생들은 주로 부모가 항의할 여력이 되지 않는 저소득층 자녀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진짜 조폭들은 사전에 파출소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여 조용해질 때까지 도피 잠적한 사례가 많았다. 할당량을 채우려다보니 노숙자, 부랑자를 비롯한 무연고자도 다수였다.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운동을 한 노동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당시 직장 노조설립에 간여했던 나도 까닥하다간 끌려갈 뻔했다. 윤락가 주변에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붙잡혀갔고 문신 장발도 이유가 되었다. 생활기반이 양동이었던 ‘도장골 시편’의 김신용 시인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었다. 그렇게 연인원 80여만 명의 군경에 의해 국보위 지침상의 검거대상인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이 우려되는 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사범’으로 덮어씌워져 6만 여명이 끌려갔다. 등급심사를 거쳐 실제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은 약 4만 여명이다. 삼청교육대가 피교육생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전두환에게 밉보여서 7개월간 교육을 받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증언 등 여럿 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죽으니까. 내가 오죽하면 구두를 핥으라고 해서 구두를 핥았겠어요.” 1988년 청문회 이후 삼청교육대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속속 폭로되었다. 국방부는 공식집계로 교육과정에서의 사망은 54명이고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397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숫자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이런 놈들은 삼청교육대에 보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돼”라는 말을 가끔 듣고, ‘부들부들 치떨리는 80년 그 겨울’을 미화하며 추억하는 이들이 있다니...

지상의 방 한 칸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시집『밤에 쓰는 편지』(청사, 1987) ................................................................... 뱁새가 깊은 숲속을 자유로이 휘젓고 다녀도 쉴 곳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그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장자는 말했다. 안분과 자족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에겐 말처럼 간단치 않은 일이다. 내 몸 하나 맘 편히 누일 ‘지상의 방 한 칸’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시름에 찬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상천지 솟은 게 아파트고 늘린 게 집이라지만, 주택난은 투기가 기승을 부렸던 80년대만의 사정은 아니다. 이 시가 발표된 게 80년대이고 그보다 먼저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이 나온 것도 80년대이다. 아이가 여럿인 경우 셋방 하나 얻는 것도 여간 까다롭고 힘든 게 아니었다. 생애최대의 과제이자 꿈이 내 집 마련이고 내 집 대문 앞에다 자기 이름을 새긴 문패를 대못으로 쾅쾅 박는 거였다. 남자가 가장 비참한 생각이 들 때가 아이들 먹고 싶은 것을 주머니 사정으로 사주지 못할 때와 주인집 눈치 보느라 제 자식 맘껏 뛰어놀게 하지 못하고 동선을 단속할 때다. 행여 주인집 아이가 심술을 부려 애들끼리 쌈질이라도 하면 눈물을 삼키며 제 자식을 야단 치고 돌아서서 울었다. 지금이야 이런 식의 설움을 겪는 이가 얼마나 될까만 예전엔 그랬다. 이 시는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밖에 없는 시인으로서의 자조적 연민이 가득하다.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 설움을 모른다.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고’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쓰라림 뒤에 집장만의 감격을 알지 못한다. 살면서 누구든 환희의 날이 없진 않겠으나, 전월세로 떠돌다가 집칸을 장만하여 첫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만한 환한 기쁨이 어디 있으랴. 운 좋게도 나는 1987년 목동에 조그만 아파트 하나를 장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른 전세금을 감당 못해 자꾸만 외곽으로 빠지거나 월세로 내몰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나지금이나 내 집 소유의 의미는 크다. 전전긍긍한 삶을 살았던 경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내 몫의 방 한 칸은 곤한 육신을 눕힐 공간인 동시에 자본주의 세상에서 거의 유일한 자구책이며 대항수단이기 때문이다. 소유가 아닌 주거개념으로서의 주택이란 점잖은 말도 있으나 호시탐탐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존재하는 현실에선 무안하기 그지없는 언사다. 80년대처럼 부동산 불패 신화를 굳세게 믿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집값 안정을 말하면서도 내 이익과 관련해서는 다른 생각의 주머니를 찬다. 수도권, 특히 강남 집값은 언제나 심상찮았다. 나는 목동아파트를 1억 몇 천에 처분하고 서울을 떠나는 그 순간 루저가 되었다.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이영춘산다는 것은,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헤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갈등하는 일이다 매일매일 육중한 시간에 눌려 실타래 풀어가듯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이다 수틀에 수(繡)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가는 일이다 가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거기서 내 얼굴 찾아 물기를 닦아 내고 또 가다가 큰 산에 이르면 거기서 한숨 돌려 휘파람 부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일 이것이 인생의 주제다 오늘도 우리는 그 주제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 다음 카페 에서 ................................................. 산다는 게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님에도 마치 그것만이 생의 전부인양 부각되어질 때가 있다. 말하나마나 우리 모두는 세상을 홀로 살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간다. 살다보면 부모형제, 연인, 친구,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을 반드시 겪게 된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헤어져야하는 아픔뿐 아니라, 이승에서 뜻하지 않게 멀어져서 영영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 그 가운데 사랑이 있고 갈등이 있으며 사람이 있다. 불가항력의 헤어짐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나의 소홀이나 부주의로, 본의 아니게 내가 준 상처로, 서로의 오해로 내가 사랑한 사람들과 멀어지는 일은 없을까. 누구의 생엔들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안타깝게 멀어져간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우리는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사람 때문에 울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일로 ‘빈 가슴 털면서 먼 산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조차 귀한 세상이다. ‘먼 산 바라보며, 그 안에 내 얼굴, 내 발자욱, 내 그림자 그려 넣는’ 멜랑콜리는 그리 알아주지 않는 세상인 듯하다. ‘산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고 ‘갈등하는 일’임을 모르지 않는데 피하려고만 한다.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고뇌의 연속이며, 고뇌하므로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부여됨에도 골치 아픈 일이라 여기고 기피하려 든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기 보다는 아예 싹둑 잘라버리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너 아니면 내가 못살 것도 아닌데’라며 쌩 까버린 적도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로 상처주고, 그로 인해 풀리지 않는 상태에서 관계를 변하게 하여 결국은 멀어져버린 경우가 세상에는 다반사다. 하지만 실수를 알고 용기만 낼 수 있다면 엉킨 실타래는 얼마든지 풀 수 있으리라. 그것은 진실이 담긴 마음의 말 한마디면 된다. 진실은 어떤 상대방이든 간파할 수 있고 얼음장 같던 마음의 빗장도 녹일 수 있다. 사실 실수를 흔쾌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보다 더 멋지고 용기 있는 모습도 드물다. ‘그렇게 인생을 풀어가는 일’이어야 마땅하고 ‘수틀에 수를 놓듯 그렇게 인생을 짜 가는 일’이 인생이거늘, 늘 휘청거리기만 했지 나 자신은 그러질 못했다. 그래야만 큰 산에 이르러 ‘한 숨 돌려 휘파람’도 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주춤주춤하면서 그렇게 멀어져서는 절대 안 될 사람들이 있다. 전화 한 통화면 휘파람을 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을.

열애

열애/ 이수익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 시작,2007) .................................................... 평생을 붙박이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래 전 나훈아의 말마따나 인생을 두 번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은 아무따나 연애도 실컷 하면서 살아보고, 또 한 번은 조심조심 신중하게 평생의 반려를 만나 사랑하겠는데 한 번뿐인 생이기에 양수 겹장이 쉽지 않은 것이다. 마주 서서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절로 열매 맺는 은행나무와 같은 사랑이 가능하다면야 통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사랑이 구가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카사노바 식 둘러대기라든지 ‘사랑에서 책임과 의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탕달의 연애론마저 낡아빠져 폐기될 게 뻔하다. 오래전 제인 폰다 주연의 ‘바바렐라’란 공상과학영화가 있었다. 성교의 방식도 진화를 거듭하여 마주보고 두 손바닥을 맞대는 것만으로 정신적, 육체적 합일감에 이르는 미래형 연애이다. 41세기에는 오로지 감정의 일치만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서로 주파수를 맞춘 채 손을 맞대고 덜덜덜 떨면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하고나 가능한 건 아니고 정신적 유대와 사랑의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이 들수록 그처럼 그윽한 사랑이 필요한 건 왜일까. 전통적 방식의 사랑에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도 없지 않겠으나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같은 감정의 호사에 더 목이 말라서가 아닐까. 정말 그저 바라만 보고 손길만 스쳐도 충만한 사랑이 왔으면 좋겠다. 군데군데 은행알이 보도위에서 구린내를 풍기더니만 이젠 은행잎이 완전 짙은 노랑으로 물들어 광채가 눈부시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 직설법 추파처럼 마구 뿌려대고 있다. 연인이 있건 없건 이럴 때 방구석에만 처박혀있는 것은 반칙이고 죄악이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도심에서도 은행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암수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가로수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많다. 사실 고약한 냄새보다는 인도나 도로에 떨어진 열매가 사람 발길과 차량에 짓이겨지고 들러붙어 거리를 지저분하게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다른 수종으로 이식하든가 은행이 안 열리는 수나무로 바꿔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요즘은 수나무로 교체하는 지역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병충해와 공해에 강하고 도시에서 이보다 계절감을 느끼게 해주는 나무도 없기에 아예 수종을 바꾸는 것은 예산낭비이기도 하고 온당치 않아 보인다. 공공근로를 확대해 낙과 전에 수거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남겨진 이 가을날들 어떻게 흔들리며 추슬러야할지 걱정이다. ‘네 눈물’을 어찌 다 거두어야할지 난감하다. 은행나무 좋은 길을 찾아 걸으면서 ‘흘낏 곁눈질도’ 해봐야겠다.

현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현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권순진현리 황톳길 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작은 평상이 놓인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켰다. 몸빼바지에 허리 굽은 할멈 비녀 매무새 하나는 단정했다. 어느 도망자와 어느 추격자가, 때려치운 농사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회로 내빼는 한 이농인이, 귀향하는 한 시무룩한 도시 파산자가 번갈아 입술의 침을 묻혔을 양은 잔에 가득 찰랑이는 막걸리. 술잔보다 더 큰 그릇에 수북이 담긴 정구지 김치가 안주 자격으로 나왔다// (중략)// 지나친 공기노출로 깊고 풍부한 맛이라 둘러대긴 힘들지만 고향의 흙내음 하나는 온전했다. 일회 일획의 정구지로 막걸리 잔을 다 비웠다. 멀리 버스의 기척이 들렸다. 서둘러 셈을 치르고 버스에 올라타자 부릉~ 불량한 가스를 내뿜으며 바퀴가 땅을 크게 핥았다. 황토 먼지가 내 앉았던 자리를 공평하게 도포했다. 버스의 뒤창을 통해본 할머니는 내가 쓴 젓가락으로 사발에 담긴 정구지 뭉텅이를 획 한판 크게 뒤집었다. 굽은 할머니의 등이 밉지 않았다............................................................. 80년 ‘서울의 봄’ 그해 가을이었으니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때만 해도 난 현리가 강원도에 속해있는지 경기도 소재인지 몰랐다. 하여간 그 어디 기도원에 틀어박혀 몇 달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친구 L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 친구의 이름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학교 동창도 고향 친구도 직장 동료도 아니었다. 희뿌연 최루가스가 남대문의 내가 일하는 사무실까지 스멀스멀 흘러들었고 우당탕탕 쫒기고 있는 한 젊은이가 사무실로 느닷없이 난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직원들이 그를 간신히 숨겨주었고 그날 젊은 직원 몇과 어울려 북창동에서 술을 마셨다. 그날 이후 사흘도리로 나를 찾아왔고 그때마다 술을 퍼마시고 떠들어댔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로 그의 말을 듣는 쪽이었고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나는 당시 비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에는 노조가 없었고 불허하였으므로 몇몇 직장 선배가 추진하는 노조 설립 운동에 미약한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때 L은 전태일 열사를 언급했고 나를 정신적으로 북돋우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습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입이 생기는 족족 소비하기에 바빴고 소비의 주요항목은 술이었으며 가끔 을지로나 종로의 조명이 볼그족족한 주점에도 드나들곤 했다. L과 함께 이차로 딱 한번 간 적이 있다. 조명 아래서 그의 표정이 나를 압도했다. 그러고서 몇 달 만나지 못했는데 현리의 한 기도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그 기도원에 연줄이 있어서 좀 쉬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와의 만남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이 ‘시’는 L과는 아무런 감정의 연결고리가 없으며 맥락도 없다. 이번 춘천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그를 잠시 떠올렸고 자연히 이 ‘시’가 생각났다. 찰찰 넘치는 막걸리 한잔이 내가 마신 어떤 술보다도 맛났다. 나는 나중에야 막걸리 한 잔과 정구지 한 올이 그토록 구수했던 이유를 알았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술이든 안주든 내게 가장 필요한 시기의 현안이었을 때,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그 진가와 진면목이 발현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청미천에서

청미천에서/ 윤일균예서 속 깊은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개개비도 떠난 들녘/ 오랜 벗 같은 사람 하나/ 기울어진 농가 앞을 저물도록 서성거린다/ 고봉밥 먹여주던 큰 들 지나서/ 일백육십리 물길 아프게 굽이쳐 흘러 남한강에 이르도록/ 네가 키운 건 돌붕어 모래무지 메기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청춘의 재 너머/ 기약 없이 흔들리는 시대의 물빛으로 너는/ 금모래 언덕 남한강 갈대들을/ 품마다 온종일 끌어안고서 앓다만 감나무처럼 서있다/ (중략)/ 내 아비의 탯줄은 아직도 예서 머물고 있는가/ 먹빛 그림자 어두운 빈자리/ 납작 엎드린 농가에서 달려 나오는 홀아비 삼촌의 해수기침소리/ 그 밤, 다시 뜬소문처럼 찾아들 때/ 흰 가루약으로 하얗게 부서져 흐르는/ 여주 점동면 도리마을 청미천가에서/ 나는 아직껏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시집 『돌모루 구렁이가 우는 날에는』 (b, 2019) ...................................................... 청미천은 용인 문수산에서 발원하여 이천 여주를 거쳐 남한강에 합류하여 팔당호로 흘러들어간다. 예전에는 이름그대로 참 맑고 아름다웠던 강이다. 지금도 수로에서는 씨알 굵은 붕어들이 제법 올라오고 있으나 옛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시인은 그 좋았던 시절의 ‘금모래빛’ 청미천을 오롯이 기억하며, ‘유년의 강가에서 노니는 꿈을 마신다’ 그러나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닮은 가족사가 어른거리고 시인은 그 언저리를 서성인다. ‘아직껏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고 했는데, ‘그 사람’에 포개어진 이가 여럿인 듯하다. 윤일균 시인이 최근 등단 16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지난 시월 마지막 밤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남한산성 검북리의 ‘성문밖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행사장을 가득 메운 축하객들이 함께였다. 넉넉히 음식을 나누었고 기념행사에 이어 독립영화 ‘시인 할매’도 상영하였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오던 길 돌아본다. 남은 건 다양한 모양의 상처뿐이다. 오지게 아문 상처 중에 몇은 나름 시다”면서 “시집 속에 접힌 턱없는 나의 사랑에 단 한 사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러면 되었다”며 자신을 낮추고 무욕을 드러내면서 겸허해했다. 하지만 행사 마지막 순서로 시인 자신이 각혈하듯 ‘청미천에서’를 낭송하는데, 여태껏 그런 에너지와 열정을 다 쏟아 부은 낭송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좌중에서도 함부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얼핏 ‘오버’같기도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시인의 진정성이었다. 진정성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내세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태도나 행동, 말과 글을 종합하여 판단하고 부여한다. 진정성의 담보로 사람과 글의 일치도 느낀다. 가끔은 위선의 도구로도 쓰이지만 대체로 진정성은 무욕과 겸허의 형식을 수반한다. 시인은 건강상의 어떤 계기로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삶의 자세를 갖추면서 뭇 생명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삶을 통째 리모델링하는 수준으로 생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시인은 가치관이 바뀌었고 바뀐 가치관으로 굳건해진 삶을 살아간다. 시가 시인을 닮아가고 있었다. 주제넘게 발문을 썼지만 시집에는 삶의 욕망과 속도에 저항하는 시들로 가득했다. 시와 행간에서 시인의 밀도 높은 진실한 삶을 엿보았다. 장차 더 깊고 풍성해질 시인의 시와 소통할 것이라 믿는다.

지상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지상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김현식이 몸이 죽어가도/ 가슴에 맺힌 사연들은/ 내가 떠난 그 후에도/ 잊히지 않을거야/ 이 내 몸이 병들어도/ 못 다한 말 너무 많아/ 수북수북 쌓인 눈에/ 쌓인 눈에 잊혀질까/ 이 내 몸이 죽어가도/ 가슴에 맺힌 사연들은/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들꽃 한 송이로 피어날 거야- 시집 『지상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살림, 1992)................................................................ 김현식은 29년 전 1990년 11월1일 서른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해마다 그의 기일이면 음악방송에서 그를 추모했다. 올해는 김현식 보다 3년 앞서 1987년 11월 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만 25세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유재하의 32주기이기도 하다. 쏟아지는 신곡들로 인해 히트곡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왠지 가볍게만 느껴지는 가요계 현실에서 그들의 음악은 확실히 달랐다. 특히 김현식은 한국적인 서정을 록과 블루스에 녹여낸 최고의 싱어로 평가받는다. 이 시는 죽는 순간까지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이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누가 내게 애송시가 뭐냐고 물으면 우물우물 즉답이 신통찮을 수 있겠으나, 애창곡을 묻는다면 비교적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사랑 내 곁에’ ‘사랑했어요’ ‘추억 만들기’ 그러고 보니 노래방에 가기만 하면 불렀던 곡들이다. 물론 나훈아와 조용필,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도 레퍼토리에 몇 곡씩은 있지만 술기운이 좀 오를 때면 변변찮은 가창력으로 ‘골목길’과 ‘이별의 종착역’까지 김현식 풍으로 불러재끼는 걸 봐서는 나도 김현식의 팬이라 자처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김현식의 고독과 우울을 반복적으로 노래한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 따랐다. 자칫 듣는 이에겐 노랫말의 상황과 가락의 분위기를 혼자 사는 나의 처지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고음 부분에서 울대를 최대한 팽창시킬 땐 나 자신도 모를 응어리 같은 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걸 토해낸 뒤에 오는 위로는 컸다. 삶과 노래와 시대가 서로 유리되어 겉돌지 않듯이 그의 노래를 좋아하고 따라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아우르는 정서가 있다. 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소리의 섬유질과 무언지 모를 시대의 울분과 ‘가슴에 맺힌 사연들’을 함께 경험하고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단순히 호소력 짙은 가창력 정도가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영혼의 어떤 숭고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한다. 거기엔 어떤 알 수 없는 신비한 마력과 힘, 혼이 느껴지고 충동들이 존재한다. 확실히 김현식의 음악적 문법엔 예술적 광기 같은 게 있다. 그런 광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호한 지경으로 몰고 간다. 아랫배에 복수가 차고 피를 토하는 상황에서도 음악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으로 남긴 메모가 이 시다. 사실 시라기 보다는 노랫말이며, 사후 폭발적인 그의 인기에 편승한 상업적 소산으로 묶인 시집 속의 글이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시인이었으며 뮤지션이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그 자리에 영원토록 피어있을 ‘들꽃 한 송이’이며 살아있는 진행형의 전설이다. 삶과 음악을 반추하는 일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유효하고 심연을 건드리며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던 연예인의 느닷없는 죽음은 그래서 유별난 것이다. 지난 10월27일 5주기를 맞은 신해철도 그렇다. 참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는 찰나여서 허망하다. 그래서 죽음이 더 두려운지도 모른다. 시월의 마지막 날 ‘지상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를 길에서 생각한다.

춘천이니까, 시월이니까

춘천이니까, 시월이니까/ 박제영이 밤이 지나면 해는 짧아지고 어둠은 깊어지겠지/ 기차는 떠나고 청춘의 간이역도 문을 닫겠지// 춘천이 아니면 언제 사랑할 수 있을까/ 시월이 아니면 언제 이별할 수 있을까// 지상의 모든 악기들을 불러내는 거야/ 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다 불러내는 거야// 이곳은 춘천, 원시의 호숫가/ 발가벗은 가수가 노래하고,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하지// 지금은 시월의 마지막 밤, 야생의 시간/ 발가벗은 무희가 춤을 추고, 무희가 아니어도 춤을 추지// 불을 피우고 피를 덥혀야 해/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헤어져야 해// 아침이 오면 안개가 몰려 올 테니/ 마침내 시월을 덮고 춘천을 덮을 것이니// 사랑해야 해 우리, 춘천이니까/ 이별해야 해 우리, 시월이니까- 소통의 월요 시편지 489호 (2016)....................................................기상학자들은 중부지방을 기준으로 가을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9월 중순부터 10월 초순까지를 초가을, 10월 말까지를 진짜배기가을, 10월 말부터 11월 25일경까지를 늦가을로 분류한다. 지금은 말하자면 가을의 최고 절정기다. 단풍도 마찬가지로 위로부터 상한가를 치면서 하강하고 있다. 단풍이 정점을 찍은 뒤에는 낙엽이 바닥에 나뒹굴 일만 남았다. 수종에 따라서는 이미 곳곳에서 바닥을 쳤고 이번 비가 내린 뒤로는 공원에도 뒹구는 낙엽으로 어수선하다. 곧이어 들녘엔 냉기만 가득할 것이다.가을이 참으로 짧다. 하루가, 한 달이 또 한 계절과 한해가 이렇게 바삐 순환하는 줄 미처 몰랐던 건 아니지만, 가을이 퉁소구멍처럼 좁고 텅 빈 속으로 신속히 빠져 나갈 즈음에야 새삼 헛되게 보낸 시간들이 후회스럽다. 결실을 다 나누어준 저 강산이며 뜰은 여전히 장엄한데 세월잃고 쭉정이만 남은 내가 처량하구나. 결실과 감사의 가을을 다 보내고 이만치 겨울 초입의 늦가을에 들어서면 그리움과 아쉬움이 유독 깊어진다. 멀리 떠난 사람이 그립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가을이 저물어 가는 징조를 짙게 느끼게 하는 헤르만 헤세의 시 ‘낙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끈기 있게 가만히 매달려 있거라” 그렇지,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도 지금은 그저 숨죽인 채 끈기 있게 가만 매달려 있을 때. 이 밤이 지나면 해는 더욱 짧아지고 어둠은 깊어질 것이며 기차는 떠나고 청춘의 간이역도 문을 닫겠으나, 춘천이 아니어도 사랑은 이루어지고 이별도 완성되리라. 지금은 쨍그랑 포도주 잔 부딪히며 그윽한 사랑을 나누기보다 숭늉냄새 나는 들꽃 차 한 잔으로 사는 이야기나 나눌 시간.춘천의 시월을 한번 걸어볼까. 걷다가 해 떨어지면 시린 달을 쳐다보며 기울어가는 가을밤의 소피스트가 되는 거다. 시간나면 소양댐을 걷다가 청평사까지 가는 거다. 옛날의 그 청평사 계곡은 배를 타고 갔다가 다시 배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배 시간을 놓치면 꼼짝없이 근방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어야했다. 그래서 역사가 이루어진 청춘도 있었지만, 내가 오늘 떠나는 춘천은 그런 수작도 긴장도 필요치 않다. 의암호를 에돌다 월광이 부서지는 후미진 틈새로 새소리나 듣겠다. 달은 서걱거리는 떡갈나무 가지 사이에 걸리고, 별빛 총총한 하늘아래 ‘야생의 시간’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그곳에서 사랑도 이별도 그 무엇도 꿈꾸지 않으리.

접속

접속/ 황수아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를 피워 올릴 것이다. 필생의 익명을 얻고 싶다. (중략) 오래 전 잃어버린 몽상을 미행하는 일도 너와 스쳐갔던 일순의 일순간을 주소 창에 찍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줄곧 자라나던 내 속눈썹이 데시벨을 휘감을 때쯤 찬바람은 경쾌한 바이러스를 몰고 올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붉은 무덤을 닮은 메신저 안에서 서서히 독살될 것이다. 그 순간 낯선 행성의 언어로 유언할지 모른다. 패스워드가 사라지고 로그아웃을 할 수 없는 자멸의 접속을 바라던 삶이었다고.― 시집 『뢴트겐행 열차』 (시인수첩, 2017)...................................................황수아의 시는 ‘심미적 감각을 살려 재생하고 배열하는 언어적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대뜸 ‘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얼마간의 난독을 예고하고 있으며, 시단의 꽤 안정적인 시류의 형태로 자리 잡은 좀 ‘있어’보이게 하려는 장치 같은 것도 엿보인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탄타로스는 시지포스와 함께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물이다. 흔히 손에 닿지 않는 젊은이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탄타로스의 갈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 영원한 목마름은 형벌 치고도 아주 엿 같은 형벌이다.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연못 물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배가 고파 과일을 따 먹으려고 손을 뻗으면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는 저만큼 들려 올라간다. 탄타로스는 영원한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 고통 받는다. 이 시에서 ‘탄타로스’는 무슨 인터넷게임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게임에 푹 빠져 중독된 시적 화자를 지칭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를 피워 올리는’ 행위는 영락없이 인터넷 게임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폐인’의 모습 그대로다.인터넷 게임의 가학성과 폭력성은 가상공간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은행과 방송사의 전산망 해킹사건 등에서 보듯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사회시스템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다. 2011년 농협전산망 해킹은 파일공유사이트에서 영화를 내려 받다가 악성코드에 감염된 것인데 개인의 경우도 바이러스 감염 사례는 흔한 일이다. 1997년 당시 통신시대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 ‘접속’을 리뷰했다. 온라인에서는 ‘절친’인 두 사람이 정작 실제로 마주쳤을 때는 영 모르는 사람으로 스쳐 지나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다.무한한 정보와 자극,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통신망에 촘촘히 연결 접속된 상태에서 ‘필생의 익명’으로 살아가는 건 과연 해피하기만 할까. 인터넷은 우리의 삶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긍정적이고 혁신적인 역할을 담당해왔고 장차에도 그러겠으나 순기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지만 어질어질한 정보통신의 발전 속도에서 불길한 역기능의 예감도 동시에 어른거리니 그게 문제다. ‘탄타로스’처럼 욕구와 가능성의 상극에서 허우적대며 ‘자멸’하고 ‘서서히 독살’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다.‘오래 전 잃어버린 몽상을 미행하는 일도 너와 스쳐갔던 일순의 일순간을 주소 창에 찍는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의도하지 않아도 검색창에 이름을 넣을 때도 있는 것이다.

주유소

주유소/ 윤성택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시집 『리트머스』 (문학동네,2006) ............................................................. 잠깐 멈춰선 주유소에서 옛 연애를 떠올리는 감수성의 탁월함이라니 놀라워라. 요즘은 그런 일이 잘 없던데 전에는 기름을 넣을 때도 꼬박꼬박 서명을 했었다.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머릿속이 온통 연애로 가득 차있는 사람 같다. 마치 연애지상주의자의 순발력 같다.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다운 서명 하나 간직하려고 얼마나 아까운 공책들의 뒷장들을 낭비했던가. 그때는 지금처럼 카드계산서에 쓰라린 서명으로만 기능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휘발성의 삶, 훨훨 타오를 것 같았던 사랑,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이 그 서명의 언약으로 수렴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가 되고만 것이다. ‘라이터 없이도’ 충분히 불온했으므로 여지없이 폭발할 수 있었던 그 사랑도 그렇게 불발인 채 시간이 흐르면 귀 닳은 편지봉투처럼 시금털털해지기 마련. 돌이켜보나마나 모든 사랑은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실종된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뜨거운 열정도 휘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단풍나무 그늘’같은 추억뿐. 혹은 약간의 수면장애나 가슴통증으로 남겨지리란 것. ‘기다림의 끝’에서 빵빵하게 채워진 연료는 지금이라도 다시 나를 먼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내 사랑의 피가 흐르고 내 사랑이 숨 쉬는 곳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이미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묻고 있는 건 아닐까.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고? 아니다. 아니었다. 난 모른다. 그리운 것들의 우회로를 돌아 보일 듯 잡힐 듯 신기루 같은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하늘의 별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같았으나 결코 걸어서 하늘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았다. 여행길에 나설 때는 출발하기 전에 무얼 챙겨갈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려면 남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곧은 길만이 아니라 샛길도 미리미리 살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웠으므로 믿지 못했다. 사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었다. 지금에야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와서 기진한 내 사랑을 충전해줄 곳은 아무데도 없다. 취약하고 불완전한 나를 스스로 얼싸안고 보듬을 밖에.

엽서, 엽서

엽서, 엽서 / 김경미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중략)/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1989).........................................................사람의 인연이란 더구나 남녀 사이의 그것이란 참 오묘하여 알다가도 모를 우연의 실타래이며 난해한 퍼즐이다. 날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게 될 수도,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할지도, 그녀의 미소가 나를 향한 게 아니듯, 내가 베푼 친절이 그녀에게만 착각일지도. 그리고 그녀는 기억조차 못하는 순간이 내게는 영원일 수도, 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그녀에겐 긴 추억의 끄나풀이 될지도 모르는 일. 당신은 잠시 스쳐 가지만 내겐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그녀는 나를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문자 그대로의 ‘남자사람친구’라 여겨도 내게는 그 이상일 수도, 그녀가 나를 사랑이라 불렀어도 내 심장이 전혀 쿵쾅거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때로 지독히 일방적인 불공정거래이며, 그래서 우리는 더러 착각하고 허우적거리며 이기적이 된다.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초지일관 사랑은 오직 하나라고 믿는 순진한 남자도 있다. 상상과 환상의 영역을 맴돌다가 사라져간 사랑도 있다. 그곳에선 사랑이 생산되지 않으니 유통도 없고 그러니 소비도 없다.그렇다고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이란 자신의 정신적인 성숙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꾸준히 확대해가려는 의지이다. 그 과정에 한 대상이 실제든 가상이든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경우든 깊게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 내게도 늘 용기가 필요했으나 발휘하진 못했다. ‘불쌍한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고 ‘밥을 우물대’거나 어쩌면 이미 세상을 다 살아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사랑은 자주 엇박자여서 온도에도 차이가 있고 시간차도 생기는 법.차라리 온전한 미수에 그쳤던 사랑이 나을 수도 있겠다. ‘상처의 불안도 없이’ 그 사람과 함께 갔던 관광지를 다시 찾아 기념품점에서 우연히 풍경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이 문득 놀라울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 대한 엽서크기만큼의 추억이 살짝 부풀었다가 다시 구겨진다 해도 그리 섭섭지는 않으리. 내게도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이 혹 있을까’ 엽서가 도착할 즈음이면 아주 멀리 있을 거라는 그 마지막 엽서가 대문 안쪽에서 뒹굴던 날, 대굴대굴 낙엽이 굴렀던가. 짙게 단풍이 물들어갔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