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네 덕입니다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어떤 부정적인 현상이 생긴 까닭이나 원인을 이야기할 때 ‘탓’이라는 말을 쓴다. 구실이나 핑계로 삼아 원망하거나 나무라는 일에 쓰는 말이다. 반대되는 뜻의 ‘덕’은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이야기한다. 탓은 좋지 않은 일, 부정적인 일에 쓰이고 덕은 결과가 좋은 일, 긍정적인 사안에 쓰이는 말이다.요즘 우리사회에선 솔직하게 ‘내 탓’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네 탓’이라고 떠넘기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중에서도 정치판에서 네 탓 공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현안마다 드러나는 현상이라 이젠 그러려니 하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특히 고위층에게서 이런 장면들이 너무 자주 나타나는 바람에 걱정이 더 되기도 한다.최근의 부동산값 폭등, 특히 집값의 폭등을 두고 정부와 여당 인사들이 하고 있는 네 탓, 남 탓은 같은 당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일 정도로 지나친 듯하다. 현안마다 나오는 ‘전(前) 정부 탓’은 이제 식상해졌음에도 단골메뉴로 활용하고 있어서다.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그랬다. “부동산 폭등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간 누적된 부동산 부양정책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김두관 의원도 “수도권 집값은 박근혜 정부 후반기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그 원인은 2014년 말 새누리당이 주도해서 통과시킨 부동산3법”이라고 주장했다.‘전 정부 탓’에는 장관들도 가세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2014년 규제를 완화해 부동산 시장 상승기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2014년은 박근혜 정부 시절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 이래로 부패 권력과 재벌이 유착해 땅장사를 하고 금융권을 끌어들였다”면서, 부동산 문제는 “문재인 정부 국토부가 만든 게 아니다”라고 했다.집값 폭등의 원인이 분명 현 정부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전 정부 탓이라는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집권 3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전 정부 탓만 하는 건 책임회피 아닌가.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면피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청와대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의 연속되는 ‘아내 탓’을 보고 있으려니 씁쓸하다. 민정수석이 시세보다 수억 원 비싸게 집을 매물로 내놓은 이유를 묻자 청와대는 “부동산 거래를 할 때 얼마에 팔아 달라는 걸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해명했다. 그 전의 민정수석은 사모펀드 투자 논란에 “재산 관리는 아내가 전담한다”고 했다. 전 청와대 대변인은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해 “건물 매입은 아내가 한 일”이라고 했다가 여론이 나빠지자 사퇴하기도 했다.수십억 원대의 아파트를 부동산 시장에 내놓거나 거액의 펀드 투자, 수십억 원 대의 건물을 매입하는 일에 부부가 상의조차 없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어떤 식으로라도 책임을 지려는 모습보다 곤란한 현 상황만 모면해보자는 것으로 보여 씁쓸하다.며칠 전 온 나라가 오랜 장마로 물난리를 겪고 있을 때다. 이어진 장맛비와 북한의 댐 방류로 임진강의 수위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할 정도로 높아졌을 때이기도 하다. 경기도의 한 언론이 파주지역의 침수피해 주민을 인터뷰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이 주민의 콩밭 7천 평은 수확을 앞두고 모두 물에 잠겼고, 논 5천 평 중 3분의 2가량이 물에 잠겼다. 그런데도 정부를 탓하거나 지자체의 장마 대응 태세를 탓하지 않았다. “마음이 쓰라리지만 그저 하늘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으니 내 탓이려니 하고 있어야죠.”통보조차 하지 않고 댐의 수문을 연 북한을 탓하지도, 그런 상황을 보고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정부를 탓하지도 않았다. 하늘이 만든 상황조차 “내 탓이려니” 한다. 타들어가는 속이야 말할 수 없을 정도이겠지만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네 탓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는 정치인들보다 더 믿음직하다.불현 듯 1990년대 초 승용차 뒷유리창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내 탓이오’ 스티커가 그리워진다. 3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스티커를 만들어 승용차 뒷유리창에 붙이고 싶다. ‘내 탓이오,

시급한 디지털 정보격차 해소

김상진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IT(정보기술) 강국’이란 미명에 사로잡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취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마스크를 사려던 50대 이상 장·노년층이 집밖에도 나오지 못한 채 자녀들의 도움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디지털 대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가속화하는 바람에 아날로그세대인 장·노년층의 부족한 디지털기기 활용능력이 ‘디지털 정보격차’(Digital Divide)로 노출된 것이다. 미국 시장조사기관인 퓨 리서치(Pew Research)가 지난해 세계 27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우리나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100%로 조사됐고 이 가운데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95%를 차지해 조사 대상 국가들 중에서 스마트폰 보급률이 가장 높았다. 27개 국가의 평균치보다 20% 포인트 이상 차이가 날 정도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2018년 실시한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노년층의 디지털 접근성과 활용능력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디지털기기 보유실태와 인터넷 접속여부 등 디지털 접근성에서 살펴보면 일반 국민의 접근성을 100으로 볼 때 장·노년층의 접근 수준은 90.1로 꽤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 역량을 평가해 보면 장·노년층의 활용능력은 50.0에 머물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스마트폰으로 무선네트워크를 설정할 수 있는 장·노년층은 51%에 그쳤다. 필요한 스마트폰 앱을 설치한 뒤 이용할 수 있는 장·노년층은 39.7%, 컴퓨터로 문서나 자료를 작성할 수 있는 장·노년층은 19.5%에 불과했다. 인터넷쇼핑과 인터넷뱅킹에서는 장·노년층의 활용능력이 더욱 떨어진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지난해 발표한 ‘모바일인터넷 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60대의 인터넷쇼핑 이용률은 17.5%에 불과했다. 70대 이상은 11.2%만 인터넷쇼핑을 이용했다. 반면 전체 국민의 이용률은 62.0%였다. 인터넷뱅킹 이용률은 세대 간에 더 차이가 났다. 30대는 93.3%가 인터넷뱅킹을 이용하지만, 60대의 이용률은 22.9%였다. 70대는 5.4%만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디지털기기 활용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을 전자상거래 이용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인터넷쇼핑이나 인터넷뱅킹을 포함하는 전자상거래는 인터넷에 접속하고, 본인이 원하는 상품을 검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래를 할 수 있는 계정을 만들고, 결제방식을 이해하고,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인증절차를 거친 뒤 결제까지 마쳐야 전자상거래가 완성된다.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집에 앉아서 전자상거래를 할 수 있어야지 디지털기기를 제대로 활용하는 셈이다. 정리하자면 장·노년층이 디지털기기를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장·노년층 대부분은 스마트폰과 PC로 인터넷 검색을 할 줄 알고,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유튜브로 동영상도 즐겨 본다. 디지털기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데 그친 것이다. 하지만 전자상거래를 비롯한 디지털 플랫폼 활용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대목이다. 더욱이 디지털 플랫폼 활용능력은 코로나19 사태로 조성된 언택트(비대면) 환경 속에서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역량인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의 정보격차 해소책은 ‘정보화교육’이란 이름으로 저소득층과 노년층 등 취약계층을 한 자리에 모아 디지털기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집합교육에 집중됐다. 디지털기기로 정보를 얻는 수준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기기가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금은 접근성만으로 정보격차를 해소했다고 할 수 없다. 이제는 디지털기기로 의사결정을 하고, 경제활동의 영역을 넓히고,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젠 디지털기기 활용능력이 정보 취약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대두됐다. 디지털 정보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사회·경제적으로 양극화가 더욱 심하게 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 때문에 정부가 최근 전 국민의 디지털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발 벗고 나선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서둘러야 할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교육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그’들은 누구인가

김시욱에녹 원장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린다. 하얀 눈발을 헤치며 시골마을 종착역을 향해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깃발을 올려 정지신호를 보낸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으로 뒤덮인 간이역엔 오늘도 철도원인 ‘그’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뒤늦게 얻은 딸이 급성 열병으로 아내의 품에 안겨 싸늘하게 돌아온 날에도, 아내가 깊은 중병을 얻어 큰 도시의 병원으로 떠나던 날에도 ‘그’는 그 자리에서 열차를 맞이하고 보내야 했다. 자신은 ‘철도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철도원이므로... 소중한 가족인 딸과 아내를 먼 하늘로 떠나보낸 시골 역에서 ‘그’는 정년을 맞이하고 열차노선의 폐지를 통보받게 된다. 쌓인 눈 위로 끝없는 눈발이 날리던 날, ‘그’는 딸과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 속에서 눈을 감는다.서른을 갓 넘긴 시절에 필자가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을 나열하면서 그 날의 기억이 새삼 가슴을 아리게 한다. 첫 딸을 낳고 내 욕망인 꿈을 위해 신림동에 머물러야 했던 상황이 영화 속 ‘그’와 감정이입이 일어난 탓인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그 때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기연민인 줄로 알았다. 지독하리만치 자신의 직업과 역할에 충실한 ‘그’에게서 나는 혹여 내 자신의 면죄부를 찾고 있지 않았는지 지금에서야 의문이 든다.‘가장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문 속에서 경제적 부양을 최우선으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5~6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 가장의 역할은 가족들의 의식주 해결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잔업을 해서라도 평소보다 많은 월급봉투를 가져오길 원했다.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나 기업의 발전이 곧 자신의 발전을 의미했고 가족의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장인정신으로 직업을 전문화하고자 하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 여유와 욕망을 억누른 자기희생이라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결과가 전문가인지도 모른다. 흔히 ‘꼰대’와 ‘틀딱’이라 불리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들이다. 묵묵히 자신의 일이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온 ‘그’들이기에 급변하는 시대 앞에 두려움도 있었으리라. ‘자유와 민주’ 그리고 ‘노동해방과 혁명’으로 들끓던 80년대엔 가치관의 혼동과 정체성에 대한 회의도 있었으리라. 가족만을 위한 그들의 희생이 가족을 등진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비난받을 때 분명 그들은 슬픔이 앞섰음이 분명하다. 깃발 하나와 호루라기로 열차를 세우고 떠나보내던 철도원인 ‘그’가 가진 슬픔처럼.OECD국가로서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지 오래다. 6.25전쟁 이후 반세기만에 이룬 성과로서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폐허 속 국제사회로부터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조차하다. 이렇듯 단기간에 고도의 성장을 이룬 나라는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평가도 있다. 성장의 결과로 여유로운 삶이 보장되었으며 서구식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적인 가족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져 왔다.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장의 기반이 된 ‘그’들에 대한 찬사와 영광은 없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애써 지워 나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세대간 갈등 속에서 ‘그’들은 어느새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무지한 세뇌교육의 대상자로 낙인을 받고 있다. 편법보다는 우직하게 조직에 몸 담아온 ‘그’들임에도 그 조직을 깨지 못한 무능한 조력자로 치부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진정 무지하고 가정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흔히 우리는 법보다 도덕과 양심이 앞선다고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법과 양심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양심이 이데올로기적일 때 다른 양심의 인간에 대해 잔인하다’란 말이 있다. 이는 결코 양심이란 것이 절대선의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누군가를 재단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것을 지키려는 ‘그’들의 시대적 양심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금의 자유와 민주가 어느 한 집단이 만들어 온 전유물이 아니듯 ‘그’들이 만들어 온 공적도 인정해야만 한다.선로 위 열차가 서야 할 시간과 떠나야 할 시간, 그것은 약속이며 질서이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이끌어 온 ‘그’들의 노력이며 슬픔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물(水)의 가르침 간과하지 말라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사람을 하찮게 보거나 쉽게 생각할 때 ‘물로 보다’는 말로 표현한다. 낮은 데로 순응하며 흐르는 물의 부드러움만 보고 관용구로 쓰는 말이다. ‘물 건너가다’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이뤄지기 어렵게 된 상황을 말한다.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는 상태다. 돈 혹은 물건을 함부로 쓰고 낭비하는 것은 ‘물 쓰듯 하다’로 표현한다. 요즘 정치권에서 매일 쏟아져 나오는 ‘물타기’는 본질을 외면하고 논점을 흐리는 행위를 말한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특종을 놓쳤을 때 ‘물먹었다’고 한다. 태도가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음을 비꼬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이라는 말도 있다.이처럼 물과 관련된 부정적인 관용구가 너무 많다. 1980년대 말에는 나약한 지도자라는 뜻으로 대통령에게까지 ‘물○○’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아마 사람들이 물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인 듯하다. 아니면 역행하지 않고 늘 낮은 곳으로 흐르는 조용한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예로부터 물과 관련된 가르침을 설파한 경우가 많았다. 노자(老子)가 대표적이다. 노자는 도(道)의 세계를 물에서 찾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중국의 성인으로 불리는 노자가 쓴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중 하나가 물처럼 사는 것이라는 말일 게다.그러면서 물이 가진 7가지 덕목을 이야기한다. 먼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의 덕과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의 덕이다. 혼탁한 물마저 받아주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바위마저 뚫는 ‘인내’, 폭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유유히 흘러 끝내 바다를 이루는 ‘대의’가 나머지의 덕이다.물처럼 유연하게 사람들을 포용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 용기있게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큰 뜻을 거스르지 않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라는 뜻이다.그렇지만 물이 부드러움의 상징이라고 해서 절대로 허투루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아마 물처럼 무섭고, 물처럼 대단한 건 없을 듯하다. 아니다. 물은 늘 숨죽이고 흐르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한순간 깨어나 휘몰아치는 게 물이기도 하다.그래선지 물에서 삶의 지혜를 깨우치는 말이 많다. 교수신문이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비유가 그 중 하나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말이다. 배는 물의 힘으로 떠있다. 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물이지만 물은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순자(荀子)에 나오는 글귀다.음미해보면 이보다 무서운 말은 없을 듯하다. 배가 방향을 제대로 잡고 순항하면 물은 순응하며 그 배를 떠받든다. 하지만 배가 방향과 길을 잃으면 배를 전복시키는 것 또한 물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정권에서 이를 경험한 바 있다. 올바른 정치에선 잘 따르던 국민들도 잘못하는 정치엔 반드시 저항을 해 정권마저 바꾼다는 얘기다.잠시 눈을 현실로 돌려보자. 과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물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는가.먼저, 지금 정치권은 온통 물타기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다. 옳은 일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위험한 여론몰이만 있을 뿐이다. 오직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논점을 흩트려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다. 이런 싸움은 국민들을 물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한심하게 말장난만 하고 있는지.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한 화합은 물 건너가고 국민들을 위한 정책 또한 떠내려가기 마련이다.정치권만 그런 게 아니다. 현재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노자의 도덕경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물처럼 낮은 자리보다는 좀 더 높은 자리를, 돌아가기 보다는 질러가기를, 상대를 포용하기보다 배척을, 부드러움보다 강함만을 추구하고 있다.그래선지 요즘 더욱 ‘상선약수’의 구체적 내용인 ‘물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다만 순리에 따라 흐르는 물길을 막는다면 언젠가는 둑은 터지게 마련이다. 물을 ‘물로 보지 말라’는 노자와 순자의 가르침이다.

반디의 책 ‘고발’

박헌경변호사수원지방법원에 재판이 있어 재판시간에 맞추느라 오랜만에 무궁화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떠났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서 한 의자에는 되도록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도록 코레일에서 좌석배치를 해주었다. 승객들은 답답하지만 모두 마스크를 벗지 않고 긴 시간 기차 속에 앉아 행선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래된 무궁화열차라 그런지 기차가 자주 흔들리고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그래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장마철의 시골풍경과 푸른 산빛으로 인해 눈은 시원했다.기차를 타고 가면서 조금 눈을 붙여 휴식을 취했다가 가지고 간 북한의 얼굴없는 작가 반디가 쓴 단편소설집 ‘고발’을 읽었다. 김일성·김정일 공산독재 치하의 암울한 북한에 살면서 자유를 갈망하며 북한의 비참한 상황을 고발해 쓴 책이다. 주인공을 달리하며 7편의 단편을 엮어 놓은 소설집이다. 계급없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공산주의 개혁을 했다면서 북한은 전 근대적인 신분사회다. 신적인 존재인 어버이 수령이 군림하고 공산주의 귀족들이 신분을 세습하며 북한 상층부를 장악하고 나머지 일반 인민들은 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자유를 잃고 농노 또는 노예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신분은 조선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자식, 손자로 이어지고 신분에서 벗어날 희망이 거의 없다.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는 북한은 감시사회고 병영사회이며 정권에 길들여진 노예사회다. 북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불만 섞인 소리를 했다가는 가족 전체가 한 밤중에 어디론가 모르게 끌려가야 한다. 북한에는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서 짐승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 아무리 똑똑하고 개인적으로 능력이 있어도 동요계층, 적대계층은 출세할 수 없는 사회다. ‘고발’에는 김일성이 가는 곳은 1호 행사로 불려 인민들은 부모가 죽어도 통행증이 없이는 고향에 갈 수가 없다. 반디가 쓴 또 한권의 책 ‘붉은 세월’이라는 시집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쓰여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자유의 공기는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북한 주민들에게는 그 자유가 빵보다도 더 귀하고 어쩌면 목숨보다 더 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 주민들에게는 그 빵도 제대로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버이 수령 한 사람만이 완전한 자유와 신과 같은 절대적 권력, 온갖 사치를 누리고 사는 사회! 쌀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게 해주겠다고 어버이 수령께서 그렇게 약속했지만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배고픔과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 사이에 전쟁과 대립없는 평화의 공존도 중요하겠지만 노예상태에서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는 노력도 필요한 것 같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집들 그리고 자유가 너무도 소중해 보인다. 내부적으로 문제도 많고 상처도 많은 나라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이 선진화되고 민주화된 대한민국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문재인 대통령도 남과 북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침략을 맞아 총칼로 맞서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낸 이름없는 수많은 장병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보낸다. 그들의 피흘림이 없었다면 남쪽의 5천만 국민들도 김씨 세습독재 치하에서 자유를 잃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대한민국을 70년만에 G11에 들만큼 선진국화되고 민주화된 나라로 만들어놓은 지도자들과 산업역군들 그리고 민주화에 힘쓴 분들에게 감사한다. 근대화에 힘쓴 분들과 민주화에 힘쓴 분들은 다같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두 주역이다. 앞으로도 두 주역은 서로 대립을 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같이 경쟁하면서 나라다운 멋진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는데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상생하는 길이며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길이 지켜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는 길일 것이다.

지금 당장 멈출 때다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는 ‘2분 증오’라는 시간이 있다. 매일 반복되는 2분간의 이 시간이 되면 신기술의 하나인 텔레스크린에 나타나는 적(반혁명분자)을 향해 온갖 증오를 퍼붓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괴성을 지르는가 하면 욕설을 하는 등 아주 격렬한 증오감을 표출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물론 2분 증오의 시간에 이런 성의조차 보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상경찰에 끌려간다.소설 속의 ‘2분 증오’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좌우 진영으로 너무나 확연하게 나뉜 현재 대한민국에선 서로에게 증오를 표출한다. 여기엔 2분이라는 시간 제한조차 없다. 사사건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사안에 대해 빠짐없이 상대 진영을 향해 온갖 분노를 쏟아낸다. 내편이냐 아니냐 하나만 중요하다. 내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는 무조건 악이다. 왼쪽과 오른쪽만 있지 중간이 없다. 나아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줄서기를 강요한다. 중간을 선택하면 여지없이 회색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워 비난을 퍼붓는다. 좌우, 흑백의 극단적 대립을 완화시켜줄 중간 영역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완충지대가 사라졌으니 극렬한 대립만 있을 뿐이다.이런 대립엔 브레이크가 없다. 이제 그만둘 수조차도 없는 심각한 상태다. 상대를 향한 극심한 분노와 증오만 남기는 대립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2분 증오’ 시간을 통해 내부불만을 적에 대한 증오로 분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은연 중에 우리는 소설 ‘1984’에서처럼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이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몇몇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바쁘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한 몇몇의 욕심으로 나라가 혼란해지고 있다.그러나 사실 멈춰야 할 때와 멈춰야 할 곳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멈춤은 예전부터 처신을 가다듬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노자 도덕경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칠 줄을 안다는 것은 멈출 곳, 멈출 때를 아는 것이다.고려시대 문인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지지헌(止止軒)’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고선 다음과 같이 뜻풀이를 했다. ‘대저 이른바 지지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게 되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夫所謂止止者, 能知其所止而止者也. 非其所止而止, 其止也非止止也)’이를 두고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는 ‘죽비소리(2005)’에서 지지란 그칠 데 그치고 멈출 데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칠 수 있을 때 그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다. 또 그쳐서는 안될 곳에 그쳐서도 되지 않으니 설자리 앉을자리를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머물러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분별하는 것이기도 하다.우리는 적절한 때에 욕심을 그치지 못해서, 멈추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걸 수없이 봐왔다. 현재도 많이 보고 있기도 하다. ‘이때까지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괜찮겠지’라는 함정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말장난 같기도 한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지지지지(知止止止)’. 멈춰야 할 때를 알고 멈춰야 할 때 멈추라는 뜻이다. 단순한 글자에 불과한 ‘止(그칠지)’자를 나열해 깨달음을 전해준다. 정민 교수는 그의 책 ‘일침(一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자리를 잘 가려야 한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지지(止止)다. 떠나야 할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으면 결국 추하게 쫓겨난다.”문제는 몇백 년 이어온 이런 통찰의 경지를 망각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고, 물러나야 할 때 오히려 (제자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욕심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이 자리는 내 자리인가? 멈출 때를 놓친 것은 아닌가? 지금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인데, 혹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건 아닌가?

독립운동의 성지, 대구

김상진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지난 25일 오후 6시 달서문화재단 웃는얼굴아트센터 청룡홀.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인 애산 이인 선생(1896~1979)을 기리는 창작뮤지컬 ‘애산’의 2회 공연 중 마지막 공연이 열린 무대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관람객이 드문드문하게 앉아 있었지만 티켓 파워는 대단했다. 오픈하자마자 4시간 만에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을 기반으로 출연진의 열연 덕분에 작품성도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제작진이 땀 흘려 마련한 뜻깊은 공연이 2회에 그친다는 점과 함께 애산 선생이 대구 출신이란 점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애산 선생은 대구시 중구 사일동에서 태어난 항일 인권변호사이자 조선어학회 33인 중 한 명인 한글운동가다. 일제강점기에 의열단 사건과 6·10만세운동 사건 등으로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해방된 뒤에는 초대 법무부장관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유언을 통해 모든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함으로써 한글회관 건립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 이같은 애산 선생의 얼을 기리기 위해 대구변호사회는 2016년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옹호에 현저한 공로가 있는 시민이나 단체를 포상하는 ‘애산 인권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올해는 무장독립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승전보를 울렸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100년 되는 해지만, 독립운동을 기리는 분위기가 지난해 독립만세운동 및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비해 크게 위축된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해 연말부터 국내에서 감염자가 나타난 코로나19 사태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최근 들어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대구와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책이 잇따라 출간되는 한편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시민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 20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 시민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날 추진위원회는 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였으나 이 사실을 모르는 시민이 많으므로,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해 애국지사를 기리고 역사교육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은 1910년대 최고의 무장항일결사체인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지사의 장남 우대현 선생이 대구 동구 용수동 팔공산 기슭의 사유지 4만7천여㎡를 독립운동기념관 부지로 기부하면서 가시화되고 있다. 이날 참석자 중 일부는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이두산 선생이 작사·작곡한 ‘광복군 행진곡’이 연주되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대구는 항일의병운동사와 독립운동사에서 거점 역할을 한 도시다. 통계만 살펴봐도 그렇다. 2020년 현재 국가보훈처가 인정하는 독립운동유공자 수를 1925년 당시 인구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대구(159명)는 시민 481명에 1명, 서울(427명)은 802명에 1명, 부산(73명)은 1천461명에 1명, 인천(22명)은 2천556명에 1명꼴로 서훈을 받았다. 실제 대구는 을미사변 이후 최초의 항일의병장 문석봉 선생을 배출했으며, 광문사를 중심으로 김광제 선생과 서상돈 선생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이다. 또한 1910년대 대표적인 국내 무장항일단체인 대한광복회가 달성토성에서 결성됐으며, 1920년대 무장투쟁을 선도한 의열단 창단 자금을 제공한 부단장 이종암 선생 등 무수한 독립지사를 배출한 도시다. 대구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버금가는 형무소가 존재했다는 점에서도 독립운동의 ‘성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최근 매일신문 정인열 논설위원이 쓰고,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선생 기념사업회가 펴낸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에 따르면 대구형무소에서 독립지사 180명이 순국했다. 이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지사가 175명보다 많은 수다. 당시 사법제도에 따라 대구는 경상도와 전라도, 제주도, 충청도, 강원도 일부지역의 독립지사들의 순국터가 된 것이다. 하지만 대구형무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중소도시에도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이 대구에는 아직까지 없을 정도로 독립운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구 출신 저항시인 이상화의 맏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이 1931년 ‘혜성’ 10~11월호에 발표한 ‘남북만 일만리 답사기’를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전 국립국어원장)가 쉽게 풀어 쓴 ‘국민혁명군 이상정의 북만주 기행’이 최근 출간됐다. 이상정 장군은 일제강점기 충칭육군 참모학교 교관, 신한민주혁명당 중앙위원, 군사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부인 권기옥 여사는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국내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사실의 저 편에 숨어있는 진실

김시욱에녹원장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요즘이다. 누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지에 판단이 서지 않는다. 구태의연하게 진리와 진실을 구별하지 않더라도 진실이란 단어가 남용되는 현실이다. 어쩌면 테러 수준의 남발이 이루어지는 듯하다.흔히 진실을 대신해 사실(fact)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구별하기 쉽지 않은 단어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히 두 단어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교차적인 부분 외에 구분되는 한계선이 존재한다. 단순 개념적 문제를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어떤 사람은 반대적 개념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진실’의 반대되는 ‘거짓’과 ‘사실’에 대립되는 ‘사실이 아닌 것’은 엄격히 다른 개념이라는 입장이다. ‘사실이 아닌 것’들의 예로 의견, 주장, 추측 등을 들고 있다.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 중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그 적용은 진실과 사실의 구별에 있어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공방은 진실이 아니라 단편적 사실을 근거로 하는 주장이다. 부분적으로는 진실에 가깝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의견일 수 있다. 지난 시절 ‘실체적 진실발견’이란 미명하에 인권이 유린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사실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사건 당사자인 피고의 유일한 자백의 경우 보강증거 없이 유죄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법정은 사건과 관련된 증거와 사실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보다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쪽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언론의 기사들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적 근거나 계량 가능한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순히 기자나 언론의 의견이나 언론보도 방향일 뿐 사실이 될 수 없으며 진실은 더더욱 아니다. 최근 방송사나 신문사들의 ‘팩트 체크’라는 코너가 생기는 이유도 사실을 근거로 하는 진실 보도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싶다.최근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경기도지사 대법원 판결, 그리고 검·언유착 조사 등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더불어 진영논리의 공방 속에서 개별 사안마다 근거 없는 확신으로 사실(fact)과 진실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오피니언들이 토론과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SNS를 통해 양분된 지지자들의 지원 댓글은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토론자의 의견이나 주장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님에도 전문가라는 프레임 속에서 공감을 얻게 되고 단편적인 사실에 의한 침소봉대는 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비전문가인 경우 사실적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기 의견이 진실에 가깝다며 강변하기도 한다. 진리, 정의, 공정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결국, 실제적 사건인 사실을 어느 집단이나 특정 개인이 옹호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진실을 더 깊이 은폐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풍토가 조성됨으로써 ‘거짓된 진실’만이 현실을 지배한다.우리가 ‘알권리’로 요구하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인 진실이다. 단편적인 사실도 사실 아닌 것들인 주장이나 의견도 아니다. 분명코 존재하는 사건의 실체가 국민이 요구하는 진실인 것이다.우스갯소리로 ‘돈과 힘이 진실’이란 말이 있다. 이는 곧 권력과 금력에 의해 왜곡된 진실이 현실을 지배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과 다름없다. 정치와 돈이라는 극단적 밀월관계는 늘 집권 세력이 되는 순간 언론통제와 언론개혁을 단행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최종심인 대법원의 결정, 검언유착의 녹취록, 그리고 성추행에 대한 기자회견과 정당 및 사회지도층의 반응을 보면서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되묻고 싶다. 혹여 우리 사회에 진실이란 이름으로 거짓된 사실들이 자리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조차 하다.‘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있다.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검사의 사실들이 합리적으로 의심할만한 정도의 증명이 없으면 무죄를 선고하는 ‘무죄추정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거짓 없는 사실’인 진실을 보증하는 것임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진실과 정의의 승리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거짓된 사실들의 저 편에 진실이 숨겨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우리 교육 이대로는 안 된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코로나19로 학생들이 자가 학습을 할 때 자주 상담 전화를 받았다. 어느 어머니가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다. “코로나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자율학습도 없으니 너무너무 좋습니다.” 나는 그 말의 저의가 궁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코로나19가 없었다면 학교에 계속 나가야 했겠지요. 어차피 우리 아이를 비롯한 최상위권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통해 필요한 것은 이미 배웠으니 수업 시간에는 눈치껏 자지 않았습니까? 수업 시간에 불안한 마음과 불편한 자세로 자는 것보다는 집에서 편안히 실컷 자는 게 더 낫다는 것이지요. 우리 아이와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은 학교 안 가는 게 더 좋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한테도 한번 물어보세요. 나와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학교는 수시를 위한 학생부 관리와 대학 진학에 필요한 졸업장을 받기 위해 가는 것 아닌가요?”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며칠 후 아는 어머니와 통화했다. “선생님, 요즘 우리 아이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까? 아시면 기절하실 거예요.” 너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새벽 2시쯤 자서, 아침 11시 전후에 일어납니까?” 어머니는 깔깔 웃으며 “점심 먹을 시간에라도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는 새벽 4시에 자서 오후 4시에 일어납니다. 밤낮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아무리 말해도 안 되니 이제 아빠도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코로나로 학생들이 자가 학습을 하던 지난 5월 초 한 학부모와 주고받은 통화 내용이다. 나는 이 통화 사실을 토대로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19는 학력 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집안 형편이 좋고, 공부할 의지가 있는 학생은 자가 학습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도움과 철저한 관리로 자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 학교에 나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기본을 유지할 수 있는 중위권 학생 상당수는 교사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아예 책을 놓아버리기 때문에 하위권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이런 우려를 뒷받침해주는 조사가 나왔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가 중간고사 결과를 보며 ‘중간에 있던 애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찔하다’며 충격을 받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됐다. 학급의 점수 분포가 상 하위권만 있고 모래시계처럼 중위권은 잘록하게 줄었다고 했다. 이 교사는 코로나19를 고려하여 문제도 쉽게 냈다고 했다. 고교 교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응답자 80% 이상이 ‘격차가 심각하다’고 진단했으며, 그중 20%는 ‘매우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중간층이 없으면 교실 붕괴는 가속화된다. 교사는 일반적으로 중위권을 바라보며 수업을 진행하면서 상위권에는 심화한 질문을, 중하위권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확인 질문을 한다. 그렇게 해야 상위권은 수업 내용을 이미 알고 있어도 기본 개념을 다지기 위해 수업에 참여하고, 중하위권은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수업에 관심을 가진다. 상하만 있고 중위권이 없는 교실은 정말 수업 진행이 어렵다. 상위권에 초점을 맞추면 하위권은 완전히 포기할 것이고, 하위권에 맞춰 수업하면 상위권은 너무 쉽다고 아예 칠판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정확한 학력 진단이 필요하다. 성적 경쟁을 부추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학생 수준에 맞는 수업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학력 양극화와 함께 특정 과목에 대한 기피와 쏠림 현상도 심각하다. 수학 포기 학생이 늘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해가 어렵거나 학습량이 많은 물리, 화학, 경제, 세계사 같은 과목은 소수의 학생만 선택한다. 물리를 선택하지 않은 공대생, 경제를 선택하지 않은 경제학과 신입생이 많다는 말이다. 현재와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국가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초 학력에 문제가 있는 학생들의 학습 의욕 고취를 위한 특단의 대책과 함께 가정 형편이나 코로나19 같은 요인 때문에 발생하는 학력 격차를 해소할 방안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한다. 국가 백년대계와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현 상황을 바라보는 안목이 절실한 시점이다.

화이트불편러가 세상을 바꾼다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미닝아웃(meaning out)’이라고 한다. 신념을 의미하는 ‘미닝(meaning)’과 ‘커밍아웃(coming out)’을 결합한 신조어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특정상품을 구입하거나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지난 6월 말 '미닝 아웃' 대신 쉬운 우리말인 ‘소신 소비’를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이들은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원료를 사용하는 제품을 통해 인권문제를 고민하고, 비건 상품을 통해 동물복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착한 소비자이자 가치 소비자다. 때로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SNS 속 해시태그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기도 한다. 세월호를 추모하는 #remember0416, 일본 불매운동인 #nojapan, 최근의 코로나19 의료진에 대한 감사메시지인 #덕분에챌린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소신 소비의 중심은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세대이다. 이들은 관행으로 굳어져 과거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것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가끔 지나치게 예민한 모습으로 비춰지더라도 정의롭게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은 ‘화이트 불편러’(white+불편+~er)이기도 하다. 화이트 불편러는 원래 ‘프로 불편러’에서 나온 말이다. ‘프로 불편러’는 유난스럽게 불편한 사람이다. 별것 아닌 아주 사소한 사안임에도 트집을 잡아 논쟁을 부추기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사회 통념상 합리적이며, 문제될 게 없어 허용되는 현상을 두고 억지로 과대해석하거나 소모적인 논쟁을 부추긴다. 이 불편러에 좋은 것, 옳은 것, 선한 것이라는 의미를 덧붙인 게 화이트 불편러이다. 이들은 사회의 부조리를 보면 침묵하지 않는다. 먼저 나서서 정의로운 주장을 내세우며 공감을 이끌어내고 여론을 형성해나간다. 불합리한 관례 혹은 악습에 대해 아주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이다. 화이트 불편러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거나 갑질논란이 일었던 기업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에도 나선다. 이들은 누군가가 불편해하는 걸 보면 공감해주며 불의나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자신부터 행동에 나서며 실천해 나간다. 합리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선 제대로 비판할 줄도 안다. 요즘은 화이트 불편러를 빙자한 프로 불편러가 늘어나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다. 화이트 불편러가 ‘정의로운 예민함’으로 불편을 이야기한다면 프로 불편러는 ‘개인적인 예민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서다. 일부에서는 다 똑같은 불편러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프로 불편러로 매도하는 경우다. 문제는 잘못된 관행이나 관습 때문에 불거지는 현상에 의외로 둔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명백히 드러나는 문제에 ‘정의로운 예민함’으로 지적을 해도 “관행이었다”는 한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 나아가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느냐”며 오히려 “너 프로불편러 아니냐?”며 매도해버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는 없다. 화이트 불편러가 많아야 세상이 바뀌는 법이다. 개인적인 불합리보다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라면 더욱 그렇다. 문제가 보이면 공감해주고 같이 캠페인을 벌이며 문제해결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여론을 형성해 나가야 할 일이다. 더군다나 나의 작은 움직임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세상 일에 침묵하며 단지 투덜거리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사회의 부조리에 내 일이 아니라며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투덜이입니까? 화이트 불편러입니까?

향토자료 예찬

김상진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그 때 그 시절’코로나19 사태로 문을 닫은 채 대출서비스와 온라인 프로그램을 제공했던 용학도서관이 지난달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준수한 채 부분적으로 도서관을 개방하면서 로비에서 이용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향토자료 전시회의 명칭이다. 이용자들이 도서관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접하는 공간에 향토자료를 전시한 이유는 코로나19로 불안해진 지역주민들이 심리적 안정을 찾았으면 해서다. 이와 함께 향토자료가 갖는 특성이 지역공동체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개인적인 감회를 소개하자면 2018년 말 마련한 향토자료 전시회에서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그 해 향토자료 수집사업의 성과물인 사진과 구술채록집 등으로 ‘도서관, 우리 마을의 기억을 담다’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본인이 간직하고 있던 1960년대 초반 흑백사진 여러 장을 제공하고, 수성못과 주변 마을의 기억을 더듬어 구술채록에도 참여한 김수자씨가 옛 친구 손정미씨와 함께 어느 날 도서관을 찾았다.두 분은 김씨가 향토자료로 제공한 빛바랜 흑백사진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날 두 분은 여중생 시절 수성못에 소풍을 갔다가 교복 차림으로 다정하게 찍은 흑백사진을 배경 삼아 60여년 만에 기념사진을 다시 촬영했다.용학도서관이 수성못 관련 향토자료로 수집한 흑백사진은 1967년 앞산으로 이전하기 전 수성못 주변에 있던 충혼탑과 함께 1960년 총공사비 1억2천800만 원을 들여 건립한 수성관광호텔의 옛 모습 등이 있다. 또한 눈 내린 수성못의 고즈넉한 풍경과 눈사람을 만들어 호들갑을 떠는 여고생들의 모습, 1960년대 중반 꽁꽁 언 수성못에서 빙상대회가 열리고 있는 장면도 있다. 빙상대회와 관련해 구술해준 신동균씨는 “광복이 되고나서 수성못에서 스케이트 대회도 열렸다. 시내 영선못의 얼음이 시원찮으면, 수성못으로 와서 스케이트 대회를 열고 그랬다”고 회상했다. 일제강점기 ㄱ자 건물로 건축됐던 ‘녹수장’이 대구의 명소 ‘호반레스토랑’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향토자료에 등장한다. 녹수장이 친구집이어서 아름다운 정원에서 숨바꼭질하던 김수자씨의 구술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향토자료는 말 그대로 향토(鄕土)와 관련된 각종 정보자료를 뜻한다. 주제는 해당 지역의 역사·문화·사회·경제·인물 등 망라적이며, 형태별로는 책·사진·영상 등 아날로그와 디지털매체를 아우른다. 향토는 자신이 태어난 곳, 조상들이 생활한 곳, 소년시절을 보낸 곳 등 생활공동체로서의 의식을 갖는 지역사회다. 그 지역적 범위는 반드시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이나 읍·면·동 단위가 될 수도 있고, 기초자치단체 또는 광역자치단체 등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향토가 사람들의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국민교육의 기반으로 향토에 입각한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결론적으로 향토자료는 지역정체성을 정립하는 기초자료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강화하는데 필수적인 지적문화 정보자료다. 지역주민으로서는 향토자료를 통해 지역문화를 향유하고, 자긍심을 고취하며, 애향심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공도서관은 향토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보존하고, 공유하고, 활용하는데 애쓰고 있다. 하루하루 사라져 가는 향토의 각종 정보자료를 수집해 기록함으로써 지역의 지적문화유산을 계승하자는 것이다.향토자료를 전담하는 기관도 적지 않다. 충북의 옥산향토자료전시관과 증평향토자료전시관, 경남의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경기의 부천향토문화관, 부천향토역사관, 용인향토사료관 등이 운영되고 있다. 민속자료까지 덧붙여 챙기는 곳도 있다. 충북의 보은향토민속자료전시관, 진천향토민속자료전시관,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음성향토민속자료전시관, 괴산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이 그 곳이다. 이같은 현상은 지방자치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향토문화를 지방자치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시각이 확산된 것으로 풀이된다.향토자료를 활용해 지역 콘텐츠로 만들어 아날로그 기록물인 책을 발간하고, 이를 디지털 아카이빙(archiving)하는 것이 추세다. 수성문화원은 향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대구의 뿌리, 수성’이란 제목의 단행본을 펴낸 것을 비롯해 향토사료집을 잇따라 펴내고 있다. 달성문화재단도 수년째 ‘대구의 뿌리, 달성 산책’이란 제목으로 기획시리즈 20여 권을 간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울시 중구문화원이 향토사자료집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밝힌 취지를 소개한다.“향토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고, 향토 출신 인물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서 지역주민의 참다운 일체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통기한 대신 소비기한 도입할 때다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외식업자들에게 식품의 유통기한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다. 유통기한 위반은 강력한 행정처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도에 상관없이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바로 폐기한다. 가끔씩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를 직원들과 나눠 마시기도 하지만 그렇게 썩 내켜하지는 않는 눈치다. 실제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유통기한·소비기한 병행표시에 따른 영향분석’ 보고서(2013)를 보면 이해가 된다. 성인남녀 2038명을 대상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먹지 않고 폐기해야 한다’는 설문을 진행했다. 결과는 56.4%(1천150명)가 ‘그렇다’고 답했다. 대부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꺼내두고 먹어도 될지, 아니면 버려야할지 고민한다. 아마 대부분은 식품에 표시돼 있는 유통기한이 지나면 버려야 한다는 인식을 하는 같다. 하지만 이는 유통기한에 대한 오해일 뿐이다.유통기한은 유통업체가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다.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된 기한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식품업계는 실제 제품의 품질이 유지되는 기간의 70~80% 선에서 유통기한을 정한다. 품질유지기한에 안전 계수(0.7~0.8)를 곱해 유통기한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식품의 변질가능성과 소비자분쟁에 대비해서다. 이는 정상적으로 보관했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유통기한을 넘겨 섭취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절반이 넘는 소비자들은 식품의 유통기한을 폐기해야 하는 시점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정상 제품임에도 버려지는 음식이 너무 많다. 환경부에 따르면 2012년 기준 국내 한해 음식물쓰레기 발생량은 1만3천여t이다. 유통기한 경과로 인한 가공식품의 폐기비용만 해도 한해 1조3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소비기한 도입이 필요한 이유다. 소비기한은 표시된 보관조건에서 소비해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뜻한다. 그래서 보통 유통기한보다 소비기한이 더 길다. 유통기한이 지났더라도 소비기한까지는 소비자가 먹을 수 있는 기간이다. 소비기한이 도입되면 불필요한 경제적 손실은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적으로도 소비기한을 도입하는 추세다. 2018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는 유통기한을 식품 표시규정에서 삭제했다. 소비자에게 오인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소비기한 표시를 권고하고 나섰다. 실제 호주, 캐나다, EU 등 많은 선진국에서도 소비기한을 채택했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섭취기한과 판매기한, 포장일자, 품질유지기한 등으로 복수표기하고 있는 미국도 변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FDA(식품의약국)가 식품 섭취기한과 관련된 표기를 품질유지기한(Best If Used By)으로 표준화해 통일할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일본은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는 기간인 상미기한과 소비기한 두 가지 표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로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쿠라다시(KURADASHI)’라는 플랫폼이다. 상미기한이 임박했거나 상미기한을 넘겼지만 소비기한은 남아있는 제품을 소비자가격에서 60~90% 할인해서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이다. 이미 냉동식품 대기업을 포함 약 580여 개 회사가 참여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다. 우리나라에서도 소비기한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때마침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일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바꾸는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단 소비기한의 도입 취지는 공감하지만 선결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하다는 우려도 있는 것 같다. 보관여건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위생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소비기한을 도입할 경우 오히려 소비자들의 불만이 늘어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소비자들의 인식도 문제다. 품질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유통기한 임박 식품은 푸드뱅크에서도 받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유통기한이라는 단일표기로 연간 7천억 원 상당의 식품이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소비기한 표시가 늦어지고 있다. 혹시라도 제조와 유통환경을 관리하는 업무편의성 때문에 정부에서 소비기한 도입을 미룬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축제 취소가 능사냐

오용수한일문화관광연구소 대표코로나19로 인해 대다수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광산업이 가장 심각하다. 항공, 전시·컨벤션 등 연관 산업도 기진맥진한 상태다. 정부에서 맨 먼저 여행업과 공연업에 고용지원금을 제공했지만 역부족이다. 지난 5월의 해외여행은 98%나 감소했지만, 제주, 강원을 위시한 국내여행은 점차 회복되고 있다. 그렇지만 전국 각지의 축제는 연기, 취소를 거듭하고 있다.축제는 원래 종교적 의식과 추수 감사의 의미에서 시작됐으나 점차 주민 단합과 지역경제에 기여하게 됐다. 영국의 에든버러 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음악을 통해 희망을 주고, 다시 일어나자는 취지에서 1947년부터 매년 8월에 열린다. 3천 회를 넘는 공연과 3만 명 이상의 음악인과 관객들이 몰리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4월 초에 취소를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스펜 음악축제는 2주를 연기해 진행하고 있고, 올해 100주년이 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축소돼 열린다.일본의 하카타 기온 마쓰리는 800년 전 전염병이 돌자 곳곳에 물을 뿌려 병을 막았고, 이를 기념해 매년 7월15일 후쿠오카 시내를 남자들이 샅바차림으로 초대형 인형을 메고 달리는 축제다. 올해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7월부터 하카타역 광장 등에 인형을 전시하며 축제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우리도 1995년부터 정부 주도의 문화관광축제를 통해 지역 특산품과 고유문화를 활용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축제가 전국에 100개도 되지 않았으나, 그해 지방자치제 시행과 함께 늘어나 지금은 1천개 가까이 된다. 그런데 코로나가 확산되자 방역을 위해 봄축제들이 연기를 거듭하다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통영 한산대첩축제, 전남 명량대첩축제 등 대부분의 여름축제와 평창 효석문화제 등 가을축제도 취소됐고, 부산영화제, 진주 유등축제는 아직 개최가 불투명한 상태다.한편 일부 축제·이벤트는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다. 대구 관악축제는 7월11일 콘서트하우스에서 열렸고, 한차례 연기했던 교향악축제를 7월말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진주, 밀양에서는 공연·예술축제가 7, 8월에 예정대로 열리게 된다. 또 대구와 서울에서 건축박람회가, 실내에서 열렸다. 이밖에 경북 봉화은어축제는 일주일 연기해 8월 초에 개최되고, 청송 사과축제, 포항 별빛축제도 10월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축제 개최 여부는 각기 숙고와 회의를 거쳐 결정된 것이라 한마디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같은 음악축제도 어떤 곳은 실내인데도 열고, 다른 곳은 야외라도 취소한다면 얼른 납득이 되질 않는다. 좀 더 고민하면 개최할 수도 있다. 야외 축제는 1~2m 원, 선을 그어 밀접을 피하고, QR코드로 신분을 확인하고, 열 체크 등 방역에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실내 공연은 예약자 위주로 한 자리씩 띄어 앉으면 된다. 농산물 축제는 온라인으로 바꾸어 저렴하게 팔고, 요리 방법, 과실주 담그기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면 된다. 보령 머드축제도 온라인으로 머드를 집에서 바르고 햇볕에 쬐는 차선책도 강구하고 있다.대구의 대표적 축제인 치맥축제 취소는 아쉽다. 접촉을 줄이기 위해 일부 음식점에서 하듯이 테이블을 띄우면 된다. 공연은 TV, 유튜브 등으로 전국에 방영되고, 전국 체인점에서 치맥축제를 벌여 집에서 즐기도록 하자. 오히려 치맥축제의 전국화, 세계화도 가능해지는 셈이다. 올해 못 온 이들은 영상을 보며 내년을 기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구에서 치맥축제가 열리지 않는다면 8, 9월 서울, 부산의 맥주축제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국경일 경축일 기념행사는 물론 시·도의 정기 회의도 반드시 열린다. 모여서 하기 힘들면 온라인이라도 한다. 시·도 행사는 꼭 하고, 축제는 안 해도 된다는 걸까.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축제라면 연기, 축소를 하더라도 거르지 말고 방역에 주의를 기울이며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 감정법이 우선인 국가, 과연 바람직한가?

김시욱에녹원장일상이 지치기 일쑤다. 계속되는 코로나 확산과 인천국제 공항 정규직화 문제,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 그 어느 하나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 언론에서는 연일 부동산 문제와 청와대 참모 및 정치권 인사들의 다주택 소유를 조명하고 있다. 30℃를 웃도는 무더위 속, 숨 막히는 마스크를 쓴 국민들의 모습이 지쳐가는 현실의 대한민국이 아닐까 싶다. 그 어느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게 없는 듯하다.‘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문이 일어난다. 대학시절 정치학 개론서의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정치로 구분하는 화석화된 지식이 아니다.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목표로 한 상호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활동이라는 말도 너무 추상적이다. 국가라는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은 필연적 산물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에서 나타나듯 인간은 ‘자연 상태’ 속에서 생존하려는 ‘자기보존욕구’만 남게 된다. 전쟁을 자연 상태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으로 본 홉스의 관점에서 인간은 현실이라는 밀림 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명제 속에서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 상호간의 계약에 의해 절대적인 주권을 갖는 리바이어던(국가)이 성립한 것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세계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평등을 기초로 한 이해관계를 도모하고자 국가에게 주권을 위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정치라는 행위를 통해 실현돼야 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힘센 강자를 위한 것이 아닌 약자의 보호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보호막이 국가이어야 함은 마땅하다.최근 일련의 시사적 문제에 접할 때면 국가라는 의미가 어느새 사라진 듯하다. 정치는 오직 정권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여야와 당리당략적 접근만이 난무하다. ‘국민의 뜻’임을 내세우지만 실상 그 국민은 가상의 국민이자 팬덤화 된 극단적 지지층일 뿐이다. 국가의 존재와 의미를 부정하는 소수 지지계층의 계급화 된 정치체제로의 전환처럼 보인다. 각자의 생각이 우선되며 기존의 법제도나 정치제도를 부정하는 ‘국민 감정법’이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총 인구 5천만 명을 넘어선 현재, 수 천 명에도 이르지 못하는 설문 대상자를 기준으로 매주 발표되는 여론조사는 국가 중요정책 및 당대표, 그리고 대통령 후보자마저 쥐락펴락하는 것 같다. 청와대 국민 청원게시판의 현주소 역시 다르지 않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라는 슬로건아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미국식 청원 시스템 도입으로 시작된 처음의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간다는 취지도 좋았다. 하지만 최근 국민과의 소통 전략은 오히려 제왕적 대통령제 혹은 행정부의 우위적 권력 집중을 도모하는 고도의 전략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사소한 개인적 사건으로부터 사법부의 재판결과 그리고 독립적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처벌까지도 청원에 올라오고 있다. 한 달 동안 20만 명 이상의 동의가 있을 경우 정부관계장의 답변이 있다는 조건을 두고 있지만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의 장’이란 거창한 명분은 어느새 진영논리와 삼권분립의 기본적 틀을 깬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치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 청와대와 행정부에게 모든 판단을 요구하는 현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분명 무엇이 잘못인가 돌이켜 보아야 할 시점임이 분명하다. 국가란 단순히 행정부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삼권분립은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국가에 대한 명령이자 국민을 위한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제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입법부인 국회 무용론이 대세처럼 흘러가고 있다. 개별 사건마다 판사의 개인 정보가 노출되고 비난의 여론몰이가 반복된다. 적폐청산의 일환으로 들고 있는 검찰 개혁과 사법부 개혁이 오히려 법치주의 자체의 존립과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이 ‘국민 감정법’으로 왜곡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홉스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혼란과 혁명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강자의 위선과 조작이 판치는 정글과 같은 곳이었고 도덕 윤리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는 욕구가 그에게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한 것이리라. 현실의 불확실성 속에서 분노와 사회적 박탈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은 국가의 중요성과 준법정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미안한 마음에 옛날을 돌아본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학년이 바뀌면 담임선생님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생 실태조사’였다. 질문과 손들기가 20번 이상 반복됐다. 편부, 편모, 조부모, 형제자매 등 가족 관계 조사를 먼저 했다. 그 다음에는 부모님의 재산, 교육 정도, 직업 등을 조사했다. 재산은 자가, 전세, 사글세, 월세 조사에 이어 라디오, 카메라, 재봉틀, TV, 오르간, 피아노, 자가용까지 점차 단계가 높아졌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 절반 이상의 집에 라디오가 없었다. 마을마다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만 달아주고 각 방송국의 뉴스와 인기 연속극 등을 듣게 해주는 사업자가 있었다. 우리는 그 집을 방송국이라고 불렀다. 봄에는 보리 한말, 가을에는 나락 한말을 시청료로 냈다. 방송 프로그램을 바꿀 때마다 안내해주는 아가씨도 있었다. 손들기의 압권은 오르간과 피아노였다. 그런 악기가 있다고 손을 드는 아이에게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초등 3학년 정도만 되면 그 친구의 아버지가 육성회 이사가 되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수원, 방앗간, 술도가 등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역 유지 노릇을 했다. 주민 대다수의 직업은 농업이었고, 공무원도 드물게 있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유난히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가 “아버지는 일이 있을 때는 나가시고 없을 때는 집에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 직업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망설이지 않고 ‘그건 막노동이야’라고 답했다. 순간 일그러지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많은 선생님들이 학급의 크고 작은 일들을 지역 유지 자녀에게 맡겼다. 상식 밖의 특혜를 누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나는 부모 학력 조사 때는 늘 마지막에 묻는 ‘무학’에 손을 들어야 했다. 후에 ‘한학’이란 항목이 생겼을 때 엄청 기뻐했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까지 공부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를 훈계할 때 자주 공자나 맹자, 명심보감 등을 인용했던 것만 기억한다. 가난한 수재들은 부모의 재산과 직업에 따른 차별에 대놓고 불만은 표하지 않았지만, 그런 과정을 지켜보며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를 뼈에 새겼을 것이다. 헐벗고 굶주렸지만 총명한 아이들은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시험 점수만은 부모의 직업이나 재산이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에 대한 확신이 우리 사회를 활력에 넘치게 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공정한 경쟁이 사라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입시에서도 가진 자의 자녀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학생, 학부모가 많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용잡급직으로 떠돌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신음하고 있다. 오죽하면 명문대 출신보다는 결혼할 때 양가집으로부터 집을 물려받거나 전셋집을 지원받는 자가 승자라고 말하겠는가. 그들은 좋은 직장을 구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집 없는 자가 월급을 모아 집 사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며 어깨를 늘어뜨린다.민주화가 진전된 이후에는 각종 시민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직을 이끌던 사람 상당수는 시간과 더불어 권력의 핵심부나 그 주변에 편입되어 권력의 시녀로 전략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기득권에 편입되고 완장을 차게 되면 이들의 사고는 급격하게 경직된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속한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생결단이다. 상부상조하며 동병상련하는 동지가 없으면 홀로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무서운 자는 시류에 편승하여 위선으로 출세하고는 오만과 독선, 적반하장과 후안무치의 갑옷을 입고 정도와 상식을 무시하며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과 박탈감을 안겨주는 사람이다. “가진 것 없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원하는 곳에 취직해 집 사고 처자식 부양하며 부모님도 봉양할 수 있었던 부모님 세대가 한없이 부럽다. 라면과 김밥으로 배는 고프지 않겠지만 흙수저는 영원히 흙에 묻혀 살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의 탄식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