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조선시대
경주는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몽고족, 여진족, 왜병 등의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이런 외세 침략으로 경주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경주의 역사적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주력부대가 북상하면서 경주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경주읍성이 함락됐다. 집경전과 동경관이 불타고 불국사도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주지역에서는 의병들이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왜군을 막는데 큰 힘이 되었다. 1627년과 1636년에도 연거푸 여진족의 침략을 당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경주지역 사람들은 호국정신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구한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때 의병항쟁으로 계승됐다.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상륙해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경주로 쳐들어와 경주읍성이 함락되었다. 1592년 6월9일 경상도 인근의 의병들과 관군이 문천에서 대규모 모임을 가지고 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마시면서 의기투합해서 회맹록을 작성했다. 이 모임이 문천회맹으로 경주읍성 탈환의 기폭제가 됐다. 경주읍성 탈환에는 화포 비격진천뢰와 승자총통, 사전총통, 이총통과 삼총통 등의 화기가 동원됐다.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은 영천지역 출신으로 경주사람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폭발할 때 우레와 같은 굉음을 내면서 많은 왜군을 살상하는 위력을 발휘해 경주읍성 탈환을 성공하게 했다. 비격진천뢰는 경주사람 이장손이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정규군은 최신무기를 앞세운 왜군에 밀리며 조직이 무너졌다. 그러나 지역마다 고향을 지키려는 의병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경주지역의 의병도 상당한 활약을 했다. 한 집안에서도 여러 명의 의병장이 배출되기도 했다. 형제나 부자간, 친척들이 함께 거병한 예도 흔했다. 경주 황성공원에는 경주임란의사추모탑이 건립돼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의병들의 거사를 기념하고 있다.◆경주 사람들 경주는 신라시대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불교의 성지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불교는 산으로 내몰렸다. 경주의 유교는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뜻하는 ‘추로지향’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유학이 발달했다. 신라 설총과 최치원의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 경주에 관학인 향교가 세워졌다. 16세기 이후에는 사림을 주축으로 사학인 서원이 설립되면서 성리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탄생했다. 매월당 김시습은 서울 사람으로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지만 21세에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출가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31세 때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거쳐를 마련하고 금오신화와 1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조선후기에는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 전국 각지에 세워졌고 경주에는 남산 용장사지에 영각을 짓고 김시습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매월당 영각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1878년 기림사로 이건됐다. 회재 이언적은 중국 성리학을 두루 섭렵하고 이를 재해석해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이언적의 이론은 퇴계 이황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면서 영남지방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었다.세계사적으로 격변기였던 19세기 경주는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해 천도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초대교주 최제우와 2대교주 최시형은 모두 경주사람이다. 경주시는 최제우 생가를 복원하고 용담정 주변에 성역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사상과 신앙체계를 제시해 단기간에 교세를 확장한 동학은 1894년 반봉건, 반외세를 표방하며 농민항쟁으로 발전해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봉기하는 사태를 빚었다. 경주의 풍부한 농산물과 해산물로 부호들이 생겨났다. 양동마을의 향촌세력과 교촌의 최부자집이 대표적인 명문가로 입지를 다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앙에서 임명되어 온 경주부윤과 같은 관리들도 토착세력인 향리들과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경주 현곡에서 태어나 내남 이조리로 옮겨 살았던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아우 최계종과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녹훈됐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해 부장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절을 보여 조정에서 그의 공덕을 기려 1640년 정려문을 세우고 정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이 용산 아래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용산서원으로 개명돼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조선시대 경주사람들은 동경잡기 등의 역사서를 발간하고 신라시대의 역사와 문물을 승계 발전시켰다. 성덕대왕신종을 이전 설치하고 불국사를 지속적으로 수리하며 관청과 민이 합심해 문화유산을 보전하려는 노력을 했다. 사당을 지어 신라왕들의 위패를 모셨으며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등 위인들의 기념비를 세워 신라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 있다.◆유교와 불교의 흥망성쇠조선시대 성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경주에도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에 대한 제사 이외에도 유교이념의 사회적 보급과 함께 향촌자치의 구실을 했다. 경주에는 16세기 후반부터 서악서원, 옥산서원 등의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조선후기에는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정사, 서사, 사우, 사당, 영당 등의 이름으로 지어진 이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더러는 교육보다는 특정 문중의 인물을 배향하고 받드는 기능이 점차 중시되면서 정치집단의 성격을 띠게 됐다.서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회문제를 야기하자 흥선 대원군은 1868년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을 없애는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경주에는 40여개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사액받은 옥산서원과 서악서원만 존속하고 모두 철폐됐다. 지금 경주지역 곳곳에 남은 서원은 20세기 초에 복구된 것이다. 경주에 남은 서악의 서악서원과 안강읍의 옥산서원과 구강서원, 내남면의 용산서원, 강동면의 동강서원이 대표적인 서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이념을 지방사회에 보급해 지방민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고을마다 관학인 향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교관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사학인 서원에 밀렸다. 경주 교동에 위치한 향교는 통일신라 국학을 설치한 자리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기초 등은 신라시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오래된 흔적을 더듬어 보게 한다. 경주향교는 고려시대 주학을 거쳐 조선시대 1492년 경주 부윤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는 대성전이 불에 타면서 공자의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 1600년에 경주 부윤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해 위패를 모셔왔다. 경주향교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성균관과 같이 앞에 향사를 배치하고 뒤편에 강당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해 맹자 등의 유교 성인 10명을 봉안하고, 동서 양편에 신라의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조선의 이언적 등 18현의 위패를 모셨다. 유생들이 지켜야하는 학칙인 경주학령과 백록동규가 지금도 전한다.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위축됐던 불교계는 임진왜란 때 호국적인 전통을 되살려 왜군에 맞서 대활약을 펼쳤다. 불국사와 기림사, 원원사 등의 승려들이 경주의병들과 공조해 전쟁에 참여했다. 임란이 끝나고 국가로부터 전란 극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불교계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경주에는 조선시대 문화유적들이 서원과 향교, 교촌마을 최부자 고택, 양동마을, 용담정 등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세부적인 역사적 흔적들은 별도의 역사기행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