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맨발의 청춘’…1960~70년대 극장가 뉴 스타 넘버 원

신성일은 평생을 청춘으로 살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80대에도 청바지를 즐겼다. 그의 불꽃같은 삶은 전설이 됐다. 신성일이 숨지기 한 달 전인 2018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 레드카펫을 밟으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영원한 ‘맨발의 청춘’. 지금도 청춘 대부분은 맨발이다. 1960·1970년대, 그때 청춘들은 더 춥고 배고팠다. 상처투성이 청춘들은 그런 속에서도 사랑을 했다.그들을 대변했던 스타 신성일. 온 국민들이 그를 보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야망의 탄생신성일은 일제강점기 1937년 5월8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 253 외할머니댁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신영.대구농협지점장이던 아버지 강병오는, 어머니 김연주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신영은 차남이었다.아버지 강병오는 이미 결혼, 3남을 두었으나 이혼 후 함께 근무하던 어머니와 다시 결혼한 처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영이 돌도 지나기 전 폐결핵으로 숨졌다.경북여고를 나온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함께 소년 신영을 억척스럽게 키웠다. 잘 생긴 소년은 공부는 물론 운동까지 뛰어났다.신영은 대구 수창국민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다. 4학년 때부터 아버지의 첫 부인이 사는 경북 영덕을 오가며 양 집안의 교류를 텄다.경북중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간 신영은 1학년 때 6·25가 터졌다. 신영은 전쟁 중 기와공장 임시교사에서 공부, 경북고에 입학했다. 동기로는 문희갑 전 대구시장,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있다.당시 그는 친구들과 대구 송죽극장과 자유극장을 드나들며 학생 입장 불가 프랑스 예술영화에 빠져들었다.고교 2학년 1학기 때 그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터졌다. 경북도청 부녀계장이면서 약방과 서점사업을 겸업하던 어머니가 주도하던 계가 깨진 것이다.어머니는 한밤에 달아나 버렸고 빚쟁이들이 몰려와 신영을 다그치며 마구 때렸다. 하룻밤 사이 거지가 된 왕자 같았다.이모 집에서 얹혀살던 신영은 상경, 서울대에 지원했으나 2년 연속 떨어졌다.신영은 청계천 판자촌에서 호떡 장사를 했으나 잘 팔리지 않았다.◆스타의 길목그는 단군 이래 제일 잘 생긴 한국인이란 말을 들었다. 20대의 신성일.1950년대 후반 한국은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불의가 횡횡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눈에 불을 켰으나 살길이 막막했다.우울한 강신영은 서울 충무로를 걷고 있었다. 우연히 고교 동창 손시향과 마주쳤다. 그는 ‘검은 장갑’이란 노래를 히트시킨 유명 가수여서 멋진 옷차림이었다.신영은 너무 반가웠으나 친구는 어깨만 한번 쳐주고 지나갔다. 그는 남루한 자신을 돌아보며 치를 떨었다. 문득 성공을 향한 욕망이 불타올랐다.넋을 놓고 걷던 그에게 ‘한국 배우전문학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신영은 새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최고 강사진을 보유한 학원에서 신영은 6개월 간 연기를 배웠다.1959년 8월 당시 최고 영화사 ‘신필름’이 전속 연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냈다. 22세 청년 강신영은 괜한 자존심 때문에 원서를 넣지 않았다.면접 당일 부슬비가 오는데도 신영은 광화문 뒷골목 오디션 현장을 배회했다.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 신필름 소속 이형표 기술감독이 신영을 발견했다. 이 감독은 원서조차 내지 않은 신영을 신상옥 감독에게 들여보냈다.오디션이 끝난 후 혼자 있던 신 감독은 신영을 보자마자 3년 전속계약을 제안했다. 운명은, 원서조차 내지 않은 그를 영화계로 이끈 것이다.◆한국 영화의 왕별신상옥 감독은 강신영에게 ‘뉴 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지어 줬다. 22세 백수 청년이 하루아침에 최고 월급을 받는 배우로 탈바꿈했다.그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하숙집을 얻고 사람 사귀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작가, 기자, 영화인 누구에게나 다가갔고 허드렛일도 도맡았다.신성일은 1960년 1월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왼 쪽 두 번째가 고교생 역할의 신성일. 오른쪽부터 김승호, 주증녀, 엄앵란,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그리고 맨 왼 쪽에 최은희가 보인다.신 감독은 신성일을 1960년 1월 개봉한 영화 ‘로맨스 빠빠’에 첫 출연시켰다. 영화는 보험회사원 아버지가 실직하자 온 가족이 위로하는 내용의 희극이었다. 주인공 아버지역에 김승호, 조연으로 최은희, 남궁원, 엄앵란 등이 나오고 고교생 막내 아들 역을 신성일이 맡았다.영화는 성공을 거뒀으나 신성일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그저 그런 영화에만 출연하며 시간이 갔다.1962년 여름 두 번째 기회가 왔다. 평소 친했던 동아일보 기자가 영화사 극동흥업에서 기획 중인 영화의 남자 주연으로 신성일을 추천한 것이다.인기 라디오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를 각색한 영화는 6·25 때 부산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전쟁미망인과 피난 온 대학생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여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그러나 극동흥업 영화에 출연하려면 자신을 키워준 신필름을 배신해야 했다. 신성일은 결단을 내렸다. 신필름과 전속계약 기간이 끝난 것을 명분으로 극동흥업과 새로 계약을 체결하고 ‘아낌없이 주련다’의 남자 주연으로 발탁됐다.사실주의 영화 ‘오발탄’으로 주가가 높았던 유현목 감독은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신성일의 연기를 한 단계 도약시켜 주었다.바야흐로 한국 영화계가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성일의 시대도 펼쳐지고 있었다. 신성일 주연으로 1년에 수십 편의 영화가 제작됐다.1964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은 뒷골목 건달 ‘두수’역을 맡아 최고 스타에 올랐다. 상대역은 뒷날 아내가 된 엄앵란.1964년 신성일의 대표작 ‘맨발의 청춘’이 개봉됐다. 김기덕 감독의 이 영화는 불과 18일 만에 제작됐지만 보기 드문 흥행작이 됐다.뒷골목 건달 두수(신성일)와 대사 딸 요안나(엄앵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는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로 시작되는 가수 최희준의 주제가를 배경으로 스포츠머리, 가죽점퍼, 트위스트 춤 등 당시 젊은이들의 유행과 무모함을 잘 담아내 청춘을 열광시켰다.1970년대 전후 그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소위 1세대 트로이카들의 상대역을 독점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등 2세대 트로이카들과 손발을 맞췄다.신성일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타 중 스타, 왕별이 된 것이다.1970년대 들어 흑백 TV가 크게 늘고 박정희 정권의 검열정책이 강화되면서 한국영화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래도 신성일은 1970년대 전반까지 해마다 20~40여 편의 주연을 맡았다. 1975년 이후에는 10편 이내로 줄었다. 이는 동시녹음이 일반화되면서 성우 목소리를 이용하는 속성촬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는 평생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주연이었으며 100여 명의 여주인공과 공연했다.◆아내이자 동지 엄앵란신성일은 1966년 개봉된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겼다. 신성일은 문정숙과 쓸쓸한 사랑을 나눈다. 신성일은 만추 원본이 사라져 다시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1964년 11월14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선 왕국에서나 있을 법한 결혼식이 열렸다. 당시 최고 인기 남녀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이 부부가 되는 날이었다.전 국민의 이목을 끈 결혼식에는 구경꾼까지 수천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인파에 밀려 하객들은 식장에 접근도 못 했다. 화환은 넘어지고 축의금이 털리는 등 엉망이 되자 진행요원들은 몽둥이까지 휘둘렀다.신성일보다 한 살 연상인 엄앵란은 학사 출신 배우로 신성일보다 먼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엄앵란은 결혼 후 영화 일선에서 물러나 신성일의 뒷바라지에만 힘을 쏟았다. 1979년부터 10여 년간 대구에서 ‘나드리예’라는 식당을 경영하며 남편의 정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영원한 자유인1960년대는 한국영화 전성기였다. 신성일은 해마다 수십 편에서 주역을 맡았다. 사진은 1966년작 이만희 감독의 ‘군번 없는 용사’. 오른 쪽 세 번째가 주인공 신성일이고, 왼 쪽 두 사람은 차례로 신영균과 허장강신성일은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다. 특히 거짓말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 지나치게 솔직해서 문제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1969년 부산의 국도극장 개관 쇼에서 역시 자유분방한 가수 조영남이 불손하게 굴자 흠씬 두들겨 준 일도 있다.2011년 발간된 자서전에서는 1970년대 미국행 여객기 일등석에서 애인과 사랑을 나눈 사실을 밝혀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그는 1987년부터 사귄 슬롯머신 사업가 정덕일에게 영화사업을 위해 40억 원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덕일은 후일 김영삼 정부 출범 후 6공 실력자 박철언에게 뇌물을 줬다는 이유로 구속된다.그는 연애했던 상대가 누구인지도 숨김없이 밝혀 오히려 주변이나 언론이 명예훼손 가능성 때문에 얼버무리곤 했다.슬하에 1남 2녀를 둔 신성일 부부는, 1980년대 이후 서로 떨어져 살며 상대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어려울 때면 돕는 모습을 보였다.그들 부부의 사는 모습은 프랑스 소설가 사르트르와 보바르의 계약 결혼에 비견되고 2010년대부터 등장한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의 졸혼 원형으로 불리기도 했다.◆‘맞지 않는 옷’1974년 40만 관객이란 초대박을 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포스터. 신성일과 아역 배우 출신 안인숙이 주연을 맡았다.그는 청소년기 집안의 몰락으로 예상치 않던 배우의 길로 들어섰지만 정상에 올라선 이후 정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러나 정치는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복잡 미묘한 정치계에서 직선적인 성격의 그는 영화계와 달리 실패를 거듭했다.신성일은 40세 때인 1978년 10월 결국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다.본인이 출마한 것이 아니라 그해 12월 10대 총선에서 서울 지역구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를 도운 것이다. 그는 여기서 부패 금권선거의 실상을 보게 된다.그는 이후 1981년 11대 총선과 1996년 15대 총선에서 각각 서울 용산·마포와 고향인 대구 동구 갑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한다.그는 삼수 끝에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에 출마, 금배지를 단다. 63세 때다.그는 국회의원 시절 고향 대구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임기가 끝난 후인 2005년 2월 그는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광고업자에게 정치후원금 1억여 원을 받고 영수증을 써 줬으나 검찰은 대가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그는 실형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2년만인 2007년 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불꽃처럼 살다 가다그는 자유인이었다.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2017년 6월 그가 집을 짓고 살던 경북 영천의 ‘성일가’ 뒷산을 오르다가 쉬고 있는 모습.그는 2008년 경북 영천시 괴연동에 ‘성일가’라는 한옥을 짓고 서울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는 보통 사람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그는, 2017년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투병 생활 중 갑자기 병이 악화돼 전남 화순 전남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 2018년 11월4일 눈을 감았다. 81세였다.그는 평생을 청춘처럼 살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80대에도 청바지를 즐기고 모든 일을 직접 했다. 이제 그의 불꽃같은 삶은 전설이 됐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 연보·1937년 5월8일 대구 인교동 출생·1950년 대구 수창국민학교 졸업·1953년 경북중 졸업·1956년 경북고 졸업·1957년 서울 배우전문학원에서 연기 실습·1959년 8월 신필름 입사·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1962년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1964년 2월 영화 ‘맨발의 청춘’ 개봉·1964년 11월14일 엄앵란과 결혼·1971년 영화 ‘연애교실’로 감독 데뷔·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개봉·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장·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2002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2008년 경북 영천 성일가 건립·2009년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2008~2013년 대구 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2018년 11월4일 별세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산골마을 ‘쇠똥소령’ 가난한 농촌 ‘살고파마을’로 바꾸다

홍영기는 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기 전부터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고향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새마을지도자 DNA를 타고난 인물이었다.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을 선포하기 전부터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고향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운은(雲隱) 홍영기(洪永基)선생은 새마을지도자 DNA를 타고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방음동을 비롯한 운문면 일대는 옛날부터 한지와 삼베, 조선 솥의 명산지로 지역민들은 살림살이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특히 조선 솥은 전국적인 명산지로 이곳 주민들이 넉넉하게 살 수 있는 부의 원천이 됐다.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현대적 제품에 밀려 이들 특산품 생산의 명맥이 끊어지면서 농토가 부족했던 이 지역은 가난에 찌든 황폐한 농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고향 마을의 몰락에 마음 아파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잘사는 마을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품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쇠똥소령’의 이상향 만들기홍영기는 1960년 군에서 소령으로 예편, 귀향하면서 바로 고향마을 이상향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그의 이같은 결심과 노력은 처음 냇가 자갈밭을 개간해 옥토를 만들어 ‘쇠똥소령’이란 별명을 얻었다.그의 성공은 동민들의 본보기가 됐다. 빈곤한 동네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사주고 춘궁기 양식이 떨어진 농민에게 무이자 장리 벼를 분배했다. 동민들의 신뢰를 얻은 그는 자신이 가진 새로운 마을의 청사진을 설명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폭적 협조와 동의를 얻어냈다.그 결과 25평 규모의 현대식 농민회관을 짓고 동네 이발관, 공동 구판장, 공동 목욕탕, 공동 농기구창고, 기계화 도정공장, 양어장, 가마니 공장 등을 짓는 등 많은 결실을 거뒀다. 현금부담은 그 자신이 하고 노력은 동민들이 맡는 조건으로 1960년부터 8년간 이룩한 이같은 성과는 이 마을 농가 소득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다.홍영기는 고향마을을 잘살게 하기 위해선 마을환경을 정비하고 소득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마을의 미래를 위해선 인재를 기르고 시골에서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육영사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이 때문에 구한말 선대의 개화 구국운동으로 1908년 설립했던 이 지역의 문명학교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대하던 이듬해에 이미 이 학교 이사들의 추천으로 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나 이를 중등학교로 만들기 위해 66년 이 학교를 재단법인에서 학교법인으로 변경하고 설립인가를 신청했다.그러나 문교부 설립인가가 나지 않았다. 문교부의 거듭된 거부에 그는 장관 앞에서 비장한 각오로 혈서를 써가며 이를 관철했다. 지역의 어린 인재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했고 나라를 발전시킨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5·16민족상’ 수상과 새마을운동‘쇠똥소령’이 이룬 산골 마을의 기적이 청와대에까지 알려져 1968년, ‘5·16’ 7주년에 ‘5·16민족상’을 수상하게 됐다.이 상은 1969년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정책 명으로 지정하기 전에 시상된 것이고 그 내용이 새마을사업과 정신을 기리는 것임을 볼 때 당시 정부는 새마을운동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를 이미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공인했던 것이다.그러나 1969년 청도군은 각북면의 한 마을을 당시 처음으로 ‘새마을운동’, ‘새마을사업’ 시범부락으로 지정하고 지역의 이동단위농협 조합장들을 모아 참관시킨 후 각자 동리에서도 이를 전개하라고 당부했다.이 마을을 참관하고 돌아가는 그의 마음에는 새마을사업이 자신이 지난 8년간 해온 ‘새마을 만들기 작업’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이미 실행된 사업에서는 다른 마을이 부러워할 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했다.다만 개개인의 이해득실에 얽혀 자신이 ‘농촌운동 청사진’에 담았던 사업 가운데 실현하지 못했던 어린이 놀이터, 골목길 넓히기, 담장 개량, 초가집 없애기, 교량 가설, 하천제방 공사, 농로 개발 등이 빠져있었던 것뿐이었다.◆‘살고파마을’의 성공과 방음동 새마을동산이날 새마을운동 참관을 계기로 그는 다시 분발해 자신의 마을을 5·16민족상 패에 새겨진 ‘살고파마을’로 개명하고 실현치 못한 청사진에 담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동민들의 동의를 받았다.그날 이 마을은 큰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마시며 동민 잔치를 벌여 결의를 다졌다. 이후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넓이 5m의 넓은 마을 안길, 화려한 꽃동네와 같은 슬레이트 지붕 개량, 교량 건설, 전깃불 켜기 사업, 동리 도정공장건설, 견고한 하천제방, 200m의 콘크리트 복개 수로, 판에 박은 듯한 블록 담벼락, 집집마다 설치된 철대문 등 마을과 동네 환경은 천지개벽을 한 것처럼 달라졌다.그 과정에서 벌인 도정공장 건설은 그의 부친이 운영하든 물레방앗간 정미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는 두고두고 부친에 대한 불효라는 생각으로 가슴에 새겨져 그를 괴롭혔다.살고파마을은 성공한 새마을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고 전국에서 견학을 왔다. 1972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이 마을을 시찰했다. 홍영기(중앙 왼쪽 점퍼 차림)가 박정희 전 대통령(중앙)에게 마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살고파마을은 성공한 새마을로 전국에 이름이 퍼졌고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이 줄을 이어 견학을 왔다. 드디어 1972년 3월24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 마을을 시찰하게 됐다.그를 만난 박 대통령은 “쇠똥소령 이야기는 서울에서도 들었다”며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철학, 사업내용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날 박 대통령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을 주변 2만 평의 하천부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당시로써는 거금인 2천500만 원의 자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선물을 했다.이 돈으로 농토가 부족했던 이 마을은 넓은 농토를 가진 부촌이 됐다. 이같은 그의 투철한 새마을 철학과 지도자적 자질은 새마을운동의 전국화 교육을 담당했던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김준 원장과 함께 초기에 새마을운동 강사를 맡는 계기가 됐다.그러나 그가 일생을 바쳤던 운문면 새마을사업의 모든 업적은 1996년 이 지역 일대가 운문댐 준공으로 수몰되면서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말았다.홍영기가 몸을 바쳤던 운문면의 새마을사업은 1996년 운문댐 준공으로 수몰돼 모두 물속에 잠겼다. 그는 운문면 까치산 자락에 자비로 방음동 새마을 동산을 조성했다. 2001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이 곳을 방문했다(맨 왼쪽 삽을 든 이가 홍영기).그는 이곳의 새마을사업을 기억하기 위해 동네 서쪽 까치산 자락에 자비로 방음동새마을 동산을 조성했고 당시의 사업들을 자료와 사진으로 전시했다. 이 동산에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간 기록과 그가 심어 노목이 된 목련 ‘대통령 나무’가 남아있다. 동산이 준공된 2001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시절 이 곳을 방문했다. 지금은 비록 운문면 새마을사업은 사라졌지만, 그 사업의 정신은 널리 퍼져 온 나라에 스며 있다.◆끝없는 고향 사랑그가 태어난 해는 3·1 독립운동 후 4년째 되던 1923년이었고 작고한 해는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OECD 국가 중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국운 융성의 2011년이었다.그의 일생은 국가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서 가장 잘 사는 시기까지 걸쳐 있으나 청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새마을사업에 헌신한 기간 이외에도 고향 사랑의 일은 지속했다.교남학교 시절의 홍영기(뒷줄 왼쪽 세번 째).그는 고향의 사립 문명학교에 입학해 자인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 교남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다음 동경흥아전문학관 문과 1년을 수료하고 만주의 영목조선소에 취업해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하기 위한 방편의 취업이었으나 2년 뒤 일제가 패망하자 고향에 돌아와 건국청년단을 조직하고 해방된 조국 땅 고향에서 무언가 큰일을 하려는 생각으로 당시 친일 앞잡이 색출에 나서기도 했다.칠곡국민학교 교사 시절. 홍영기(앞줄 왼쪽에서 첫째 의자에 앉은 이)는 당시 학생들과 두세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그러던 중 교사 부족으로 교육계에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이서면 칠곡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해 두세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학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칠곡 국교 재임 3년 만에 이서고등공민학교(현 이서 중고등학교 전신) 창설교사로 선임돼 이서 국교 별관 채를 임시 교사로 빌려 첫 입학생을 모집했다. 현 이서 중고교 자리의 부지를 매입해 목조교실 3간을 세우고 이 학교를 정식인가 중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해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6·25 전쟁이 터지자 학생들과 자진 입대했다. 공병 사관생도 시절(앞줄 세 번째)의 홍영기.그는 나이든 학생들과 함께 자진 입대했다. 사병으로 입대한 그는 사회에서 학력과 경력 때문에 장교로 복무하게 됐고 휴전협정 막바지에 격전을 벌였던 동해안 최북단 고성지구 전투에서 지휘장교로 공을 세워 은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휴전과 함께 제대하고 귀향을 결심했지만 공병 장교로서 군 복무 중인데도 부대장의 허락을 얻어 대구-울산 간 도로의 미개통구간인 대천-용성간 도로를 준공하는 애향심을 보이기도 했다.그는 새마을사업을 하던 시기에도 지역의 발전과 복지를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 운문사를 정화사업을 통해 전국적인 대사찰의 명성을 되찾게 했고 5·16민족상 부상으로 받은 100만 원으로 청도군민상을 제정했다.운문의 숨은 비경 삼계리를 명승지로 가꾸었고 면민 축제인 문명제전을 만들어 면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지인 1인당 1만 원씩의 기부를 통해 운은장학회를 설립했다. 이같은 애향 사업이 결실을 맺었지만 호사다마라 했든가 뒤에서 비판하고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했다.그는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 1998년 대한민국국가유공훈장, 2000년에 대통령감사장과 사학육성공로 봉황장을 받았다.그는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정치에 꿈을 가지고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평소 농촌의 교통난을 안타까워했던 나머지 버스 여객사업에 관심을 갖고 1977년에는 삼천리 버스 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80년에는 경산버스주식회사 이사회장을 맡기도 했다. 경산 버스는 오늘날 142대의 시내·외 버스로 경산∼대구·청도·경주·울산·밀양 등을 오가면서 지역민들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다.그가 젊었을 때부터 선대의 유지로 심혈을 기울였던 문명 중 고등학교는 운문댐 수몰 후 경산으로 옮겨 세워졌고 그의 사후 둘째 아들 택정씨가 운영하고 있다. 부인 이을선씨와의 사이에 장남 택권씨 등 2남을 두었다. 그의 묘소는 운문면 방음동 선영에 있다. ‘삼계리 명승고적지’, ‘내 고향 운문을 용궁에 바치고’ 등 저서가 있다.홍종흠(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연보·1923년 10월18일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출생·1936년 자인공립보통학교 졸업·1941년 대구교남학교 졸업·1942년 동경흥아전문학관 문과1년 수료·1945년 건국청년단조직·1946년 청도 칠곡국민학교교사 부임·1949년 청도 이서고등공민학교 창립교사·1950년 육군 공병학교입교 육군소위 임관·1953년 은성화랑무공훈장 수수·1960년 육군 소령 전역·1963년 방음동농업협동조합장 수임·1966년 학교법인 문명교육재단 이사장 취임·1966년 문명중학교설립·1967년 문명고등학교설립·1968년 5.16민족상 수상·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 수수·1971년 방음동 새마을지도자 수임·1973년 제9대 국회의원입후보·1980년 경산버스주식회사이사장취임·2000년 사학육성공로 봉황장·2011년 별세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성공한 여성의 패션 ‘미스 김 테일러’ 뉴욕•파리서 ‘드레스의 여왕’ 찬사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라는 브랜드를 열고 패션디자이너로서 36년간 활동했다. 뉴욕과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100여 차례 컬렉션을 열면서 대구 패션의 발전을 이끌었고 자신의 이름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그의 패션은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시대적 감각을 선도했다. 특히 드레스는 동양의 아름다움과 서양의 세련미를 고루 갖춰, 뉴욕 현지 언론으로부터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2008년 6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김선자를 사랑하고 그녀 옷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열정만으로 시작한 디자이너의 길김선자는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아버지 김형식과 어머니 김순이 사이에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무작정 옷이 좋아 부모 몰래 양재 학원에 다니며 디자인을 배웠을 정도다.여고시절 경북대 교정을 찾은 김선자(왼쪽 2번째).소재가 풍부하지 않았던 60년대 말 아버지의 낡은 포플린 셔츠의 컬러를 떼어내고 변형시켜 새로운 옷을 만들거나, 구제품 시장에서 옷을 구해다가 밤새 디자인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패션에 더 엄격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미스 김테일러’ 매장을 첫 선보인 1971년. 의상실에서 서 있는 이가 김선자.대구시 중구 동문동에 있던 패션 샵에서 일할 무렵 그는 남편 임창곤을 만나 결혼한다. 결혼 후 1년 만인 1971년 중구 동문동 시청 부근에 ‘미스 김테일러’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오픈했다.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은 내심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평소 사근사근하거나 남에게 이런저런 옷을 권할 만큼 사교적이지도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리자마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우아한 여성미를 단순화하고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옷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품질 소량생산 전략도 적중했다.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고집이 고객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옷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입히지 않았다.◆승승장구하다패션쇼 후 모델들과 함께 한 김선자.미스김테일러는 조금씩 번창해 갔다. 1973년 한·미 국제부인회 초청 쇼를 시작으로 1974년 신세계백화점 가을 겨울 컬렉션에 참여했고 1983년에는 그 당시 보기 드물었던 개인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대구에서 패션쇼를 할 만한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경주의 호텔에서 쇼를 가졌다. 대구에서 그녀의 패션쇼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자동차가 행렬을 이뤄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호응이 좋아 1985년 앙코르 쇼를 가지기도 했다.그녀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패션의 흐름을 읽는 직관력이 있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로지 패션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금은 타고난 감각과 운’이 작용한듯하다. 김선자는 기존의 중년층 고객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품위 있는 스타일의 옷을 제작했고, 여기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트렌디한 젊은 감각의 옷을 만들어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하게 했다.세일을 남발하지 않고 오랫동안 고객과 쌓은 신뢰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점 윈도에 한 번도 세일한다고 내건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 최고라는 자존심으로 일을 했다.자신의 패션쇼를 보러온 엄맹란과 이덕화와 함께.1987년 파리국제페스티벌 출품을 계기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고급 기성복)와 뉴욕 프레타 포르테, 중국 청도패션쇼, 미국 애틀랜타 패션쇼 등 국제 행사에 참여했다. 90년대 중반에는 1년에 6회 이상의 패션쇼를 미국과 대구, 서울에서 열며 전성기를 맞는다.◆신사옥을 짓다1973년 동아백화점 앞 동문동으로 가게를 옮긴 그녀는 1983년 동인호텔 뒤편 중구 공평동에 신사옥을 짓는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패션 샵이었다. 크기뿐 아니라 기성복과 맞춤복을 함께하는 복합매장으로 꾸며 고객들을 모았다.그녀의 샵은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여성들로 항상 넘쳐났다. 김선자 패션을 입어야 대구에서 성공한 여성으로 비칠 정도로 ‘그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대구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영과 사교 방법으로 자신의 매장을 고급스러우며 우아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1993년에는 서울 청담동에 가게를 오픈했다. 당시 청담동에 가게를 열자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구가 본점이고 서울은 분점일 뿐이다’고 강조했다.롯데월드 매장에 입점할 때 입점 조건으로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반대했다. 대구에서 30년 정도 대구시민을 위해 패션을 했는데 서울매장에 입점하기 위해 본점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입점을 했지만, 그녀는 늘 당당했고 시골 사람을 쉽게 보는 서울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기 위해 더 열심히 옷을 만들었다.다음 해인 1994년 대봉동으로 사옥을 옮긴다. 그녀는 이곳을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경남 센트로 팰리스가 들어서면서 아파트 부지로 편입돼 2007년 길 건너편으로 다시 사옥을 옮기게 된다.◆대한민국 톱 디자이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국제로타리 초청행사 패션쇼에서 인도출신의 라제드라 배부 국제로타리 회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1995년 그녀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회원이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톱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회원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1996년 스파서울컬렉션에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대구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지방에 있다고 해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결과는 성공이었다. 또 그해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그녀의 옷을 입고 출연하자 ‘황신혜가 입은 옷’이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KBS‘열린 음악회’ 사회자 황수경씨가 그녀의 드레스를 자주 입어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황수경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그녀의 서울패션쇼에 빠짐없이 나타나 축하해주었다. 탤런트 김수미, 강부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수미가 어려울 때 김선자씨를 찾아와 같이 위로를 나누며 자매처럼 우정을 이어갔다.김선자는 섬유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한국패션협회 회원, 세계패션그룹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대한민국 최고라 자부하던 박윤수, 진태옥, 한혜자 , 설윤형, 박항치 등과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한혜자씨는 여행을 할 때면 룸메이트를 할 만큼 친밀했다.이 당시 그녀와 함께 대구 패션을 이끈 박동준씨는 “서로가 경쟁하며 발전했다. 이 시기가 대구 패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대구 최고의 패션을 선보인 이들 둘은 동지였으며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들이 있어 대구 패션은 꽃을 피웠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대학강단에 서다1997년 김선자는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를 두고 말도 많았고 뒷이야기도 무성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신이 있었고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27년간 쌓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섬유 도시의 미래를 이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밝히기도 했다.1등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을 가진 그녀는 강의를 통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한사람이라도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패션행사로 인해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애썼다. 뉴욕에서 패션쇼가 있었던 2001년 9월,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를 탄 덕에 테러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모처럼 가족이 함께 했다. 오른쪽부터 큰 아들 내외. 둘째아들. 김선자 부부. 딸 내외.김선자는 디자이너로 성공했고 2남 1녀 아이들을 잘 키웠다. 큰아들은 삼성의 임원이 됐고 사진을 전공한 둘째 아들은 정교수가 됐다. 그녀는 자기 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디자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았다.자녀들이 외국 유학을 할 때는 봄이면 모든 일을 접고 직접 가서 옷이나 침구를 손수 갈아줄 정도였다. 딸은 미술대학을 나와 파리 에스모드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국내서 패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뒤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딸이 같은 길을 가기를 내심 원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모두가 부러워한 성공을 이뤘던 그녀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7년 2월 패션 세계그룹 한국협회 회장을 맡아 대구 디자이너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으나, 병마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와 행운을 주지 않았다. 2008년 10월. 그녀는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고맙심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 “패션에만 관심…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냈던 사람”남편 임창곤이 말하는 ‘내 아내 김선자’남편 임창곤(82.전 한국패션센터 이사장)씨는 아내 김선자를 ‘패션만 알고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해내는 아주 독특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덧붙였다.제자가 그린 김선자 캐리컬처.해야 할 일이면 혼자서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 이러한 고집과 집념이 대구 패션에 이름 석 자를 남긴 힘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자기 일에는 아주 철저하고 고집스러웠지만 집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의 모난 기질도 잘 참아주었으며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자녀들의 의견을 따랐고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며 생활했다.그녀는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간섭받지 않았다. 패션은 아내가 알아서 하고, 나머지 비즈니스는 남편이 맡는 식이다. 요리할 때도 간섭이 싫어 부엌문을 닫고 혼자서 요리책을 펴놓고 음식을 만들 정도였다.일벌레인 그녀는 TV 볼 시간이 없어 배우 김수미씨가 대구가게에 왔을 때도 그녀의 얼굴을 몰라 ‘김수미씨 계십니꺼’ 라며 찾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김순재 언론인김선자 연보1947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서 출생1971년 ‘미스 김 테일러’ 패션 브랜드 설립1973년 한미 부인회 초청패션쇼. 신세계 대구 오프닝 기념 쇼1983년 중구 공평동 동인호텔 뒤편 사옥 오픈1985년 김선자 개인 컬렉션(신작 발표회)1988년 파리, 뉴욕 프레타포르테 출품1990년 섬유와 예술의 만남 전1993년 강남구 청담동 서울매장 오픈1994년 중구 대봉동 사옥 오픈1994년 중국 청도 패션쇼. 애틀랜타 패션쇼1996년 S.F.A.A 서울 컬렉션 참가1997년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2005년까지)2000년 밀레니엄 여성 경제인 패션 대전 유명디자이너 20인 선정2001년 뉴욕컬렉션 참가2003년 제13회 한국섬유 대상 패션디자인 부문 수상2007년 세계패션그룹 한국협회 회장 취임2007년 중구 대봉동 신사옥 오픈2008년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특임교수2008년 10월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신문지•헌 잡지 쓰던 시절 뽀삐•크리넥스로 우리네 화장실 풍경 바꾸다

이종대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은 우리나라에 화장지 문화를 도입하고 대중화시킨 한국제지산업의 선구자다. 이종대 회장의 생전 모습.지금은 ‘화장실’로 통칭하지만 예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변소, 뒷간, 측간(厠間), 정랑(淨廊), 통시, 절에서는 해우소(解憂所)….지금의 60, 70대 연령층만 해도 어렴풋한 기억 몇 조각쯤 있을 것이다. 뒷간 문 옆 철삿줄에 매달린 헌 잡지나 공책, 네모로 잘린 신문지며 누런 비료 포대 따위…. 특히 시골에선 지푸라기를 손으로 비벼 부들부들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담장 위 박넝쿨 잎 두어장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심지어 새끼줄을 타고 앉아 해결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지만 불과 몇십 년 전 일이다.그런 우리네 생활 풍경을 일거에 바꿔준 사람이 있다. 이 땅에 화장지 문화를 처음 도입해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제지산업의 선구자!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이종대(李鍾大)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이다.◆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 이종대1933년 5월 28일, 경북 금릉군 김천면의 농가에서 부 이규하와 모 이수연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넷의 노산 탓인지 어머니는 막둥이가 첫 돌 지난 지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여섯 자녀를 키우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쉴 틈이 없었다. 누구랄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어린 종대는 학교까지 시오릿길을 운동화가 닳을까 봐 벗어들고 맨발로 뛰어가곤 했다.해방 몇 달 전 김천중학교(6년제)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대학 4학년 때(1954) 학장 추천으로 대구의 청구제지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가난한 제자가 수업 틈틈이 캠퍼스 내 신축공사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교수들이 눈여겨본 것이다.청구제지는 직원 80명의 꽤 규모 있는 회사였다. 대학생 종대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기술을 익히느라 모두가 퇴근한 후에도 혼자 남아 기계를 붙들고 끙끙거렸다. 행운은 일찍 찾아왔다. 이듬해, 대학 졸업 몇 달 후 스물둘 나이로 일약 공장장이 됐다. 기계에 매달려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이 입사 1년 된 신입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청구제지 사장은 자신의 혜안이 훗날 세계적 제지인(製紙人) 이종대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줄 알았을까.신혼시절의 이종대 부부. 청구제지 공장장으로 일하던 1955년 결혼, 공장옆 사택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그해 가을엔 세 살 아래 김경애와 혼인, 공장옆 사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전기사정이 안 좋던 때라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에라도 뛰어갔다. 전기선 잇는 작업을 하다 감전돼 죽을뻔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이탈리아 유학과 제지공장 생활1957년 국비유학생으로 이태리의 제지회사 카르테라 부르고에서 8개월간 선진 제지기술을 배우던 시절의 청년 이종대.누구에게나 평생 세 번의 기회는 온다더니 1957년 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종이 제조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국비장학생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것. 카르테라 부르고(Cartera Burgo) 라는 회사에서 8개월간 제지기술을 배웠다.2001년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화적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지푸라기를 사용하며 자란 그에게 화장지 문화는 생소했다.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질 좋은 화장지를 사용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기술습득에 매진했다.귀국 후 청구제지로 돌아온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1958년엔 대구를 떠나 서울의 대한제지 생산부장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몇 달 후부터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언젠가 자신이 경영자가 되면 월급만큼은 제대로 주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이듬해에는 정부주도로 볏짚 펄프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한국펄프에 스카우트됐지만 볏짚 펄프산업 자체가 백지화되고 말았다.1961년엔 군산의 풍국제지 공장장으로 입사, 1963년에 국내 최초로 ‘주름 잡힌 화장지’를 만들어냈다. 서울업체들이 주름 잡힌 화장지를 전량 가지고 가서 가공․판매했다. 이후 한일제지로 옮겼지만 자금난 탓에 부도를 맞았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일부 부유층만 미군부대 등지에서 화장지를 사다 쓰는 정도였다.자신의 회사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1965년 7월, 화장지 전문회사 ‘일우제지’를 안양에 설립했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안양의 이화제지에 공장장으로 들어갔다.◆화장지 제조기계 직접 만들다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1966년, 그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미국의 대표적 위생제지 기업인 킴벌리 클라크 본사의 관계자가 합작기업 물색과 시장조사차 한국에 왔다. 6년 전 네덜란드의 한 공장에서 만났던 한국인에게서 받은 명함을 갖고 있었다. ‘J.D.Lee', 바로 ‘이종대’였다.그 무렵 그는 여전히 자기 사업의 꿈을 갖고 있었다. 킴벌리 클라크측은 합작대상인 유한양행에 “J.D.Lee가 합작회사의 리더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67년, 이종대는 유한양행 제지부장으로 입사했다. 합작과정에서 이견이 생겼다. 킴벌리 클라크 측은 한국의 화장지 수요량이 많지 않으므로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하자고 했고, 이종대 부장은 반대했다. 나아가 이 부장은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한국에서 직접 만들겠다고 건의했다. 킴벌리 클라크와 유한양행 모두 반대했다.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득에 유한양행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수용해주었다. 미국 측을 설득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해외출장때 눈여겨 봤던 기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어렵게 설계도면도 입수했다. 철공소들을 돌아다니며 모은 부품을 밤새워 뜯고 맞추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그린 도면을 처음으로 미국 본사에 가지고 갔을 때는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류머티스성 열병을 앓기도 했고, 사고로 손가락이 으스러져 6개월이나 깁스를 하기도 했지만 끝내 국산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 1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루 5t의 화장지 원단 생산이 가능했다. 직접 부품을 구해 조립한 기계라 설비비가 5만9천 달러 밖에 안 들었다. 저렴하게 만든 기계에서 화장지가 생산되자 미국 기술자들이 놀라워하며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했다.◆ 유한 킴벌리 설립과 다양한 제품 생산1970년 3월30일, 3년간의 합작추진 끝에 유한킴벌리 회사가 설립됐다. 12월엔 제1공장이 군포에 들어섰다. 창립을 주도한 이종대 부장은 상무이사 공장장으로 취임했다. 크리넥스 미용티슈(1971), 뽀삐 화장지(1974) 등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위생용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기 시작했다.1980년 유한킴벌리 제2공장으로 설립된 김천공장 전경. 화장지․미용티슈․키친타월․부직포 등을 생산하고 있다.1980년 3월엔 제2공장이 김천에 세워졌다. 킴벌리 클라크로부터 도입한 기계설치과정에 문제가 생겼는데 미국인 엔지니어들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모두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 이종대 부사장이 밤새워 문제를 해결해 놓은 것이다.1990년엔 배송센터를 겸한 제3공장이 성남에 들어섰고, 1994년엔 제4공장이 대전에 세워졌다. 화장지, 아기 기저귀, 생리대, 미용티슈, 물티슈, 키친타월, 부직포 등 유한킴벌리 제품들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작업복 차림의 이종대가 작업현장에서 직원과 작업 공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그는 탁월한 기업가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그의 지휘 아래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기계들을 플랜트 수출까지 하게 됐다. 화장지 만드는 회사가 화장지 원단 제조 기계까지 수출한 것이다. 설계부터 제작과 설치, 시운전, 기술지도까지 일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당시엔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했다.1975, 1976년 제지용 건조 기계를 개발, 이란과 태국에 플랜트 수출 뒤 1976, 1977년에는 화장지 가공 기계를 말레이시아에 수출했다. 1977년부터 1993년엔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필리핀, 타이완,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수출했고, 1987, 1988년에는 호주에 부직포 제조기계를 수출했다.◆제지산업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다유한킴벌리의 매출 규모도 급성장했다. 1971년 2억 원에서 대표이사 사장 때인 1993년엔 2천392억 원을 돌파했다. 수출액도 1975년 25만 달러에서 회장직 퇴임 무렵에는 4억 달러에 이르렀다. 포상과 수훈도 잇따랐다. 대통령 표창(1978), 국무총리 표창(1980), 석탑산업훈장(1984), 철탑산업훈장(1994)….국제적 명성도 더해졌다. 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는 뛰어난 실적의 경영자에게 주는 ‘기업인성취 대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킴벌리 클라크사의 125년 역사에서 수상자는 그를 포함해 6명뿐이었다고 한다.1997년 동양인 최초로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 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헌정됐다. 왼쪽 두 번째가 이 회장.다윈 스미스 킴벌리 클라크 회장이 친필 감사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당신은 1억 명 중에 하나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1997년 동양인 최초로 헌정되기도 했다.종이산업이 발달한 미국 위스컨신주의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는 1997년 당시까지 모두 35명이 헌정되었다. 이 회장은 생전에 “47년 제지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치열했던 ‘종이 인생’ 47년청구제지 견습공에서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에까지 오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런 만큼 휴일․휴가를 모르는 워커 홀릭이었다. 남들이 쉬고 놀 때 한 번이라도 더 기계를 살피고 새로운 일을 연구하는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원래 두루마리 화장지의 국제표준 규격은 114mm였지만 좀 줄여도 충분하겠다고 판단했다. 14mm를 줄여 100mm 폭으로 생산했더니 원가절감과 가격 인하, 원자재인 나무를 아끼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여러 국가가 화장지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시작된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도 점차 세계적인 환경보호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입지전적인 그의 삶의 여정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성실함과 부지런함, 부단한 도전정신,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자세, 투철한 주인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노년의 이종대 회장이 맏딸인 이혜정 요리연구가와 함께 미소짓고 있다.그는 가정적으로도 멋진 가장이었다. 1녀 2남의 자녀들이 ‘살아있는 교과서’로 여겨 닮고 싶어했던 롤 모델이었다. 맏딸은 요리연구가이자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빅마마’ 이혜정 키친스토리 대표다.‘최초’라는 기록들을 만들어 내며 한국 제지산업에 뚜렷한 획을 그었던 이종대 회장은 작년 11월27일 향년 85세로 별세, 경기도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반세기에 걸친 그의 ‘종이 인생’은 치열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그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전경옥 언론인연보․1933년 경북 금릉군 김천면 출생․1951년 김천중(6년제) 졸업․1955년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 졸업․1955~1959년 청구제지 공장장․1959~1967년 한국펄프, 풍국제지, 한일제지, 이화제지 공장장․1967~1970년 유한양행 제지기술 부장․1970~1977년 유한킴벌리 상무이사(공장장)․1977~1980년 유한킴벌리 부사장․1978년 대통령 표창․1980~1995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1984년 석탑산업 훈장․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 ‘기업인 성취대상’ 수상․1994년 철탑산업 훈장․1995~1998년 유한킴벌리 회장․1997년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 헌정자로 선정․1995~2004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2018년 11월 27일 85세로 타계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국내 최대 중등사학재단 설립…8·14대 국회 입성 정치활동도

신진욱은 국내 최대의 중등 사학재단을 일궜고 또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지역 교육계와 정치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말년의 신진욱. 신진욱은 5대조(회병 신체인)의 강학 공간이던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의성 봉양에 중건하고 1981년 금산서원(錦山書院)으로 승격시킨다. 금연정사 앞에선 신진욱. 대구시 남구 봉덕동 경일여자고등학교. 진입로 왼쪽에 학교법인 협성교육재단 건물이 있다. 소속된 중학교‧고등학교 등이 12개나 돼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세운 중등학교로 숫자가 가장 많은 교육재단이다.고인이 된 재단 설립자 우봉(友峰) 신진욱(申鎭旭‧1924∼2014)은 중년 이상 대구 시민이면 상당수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대구 교육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간 길을 돌아보았다.재단 사무실은 교실 한 칸이 족히 될 정도로 널찍했다. 그곳에서 협성교육재단 권오수(58) 관리국장과 박준식(50) 관리실장을 만났다. 사무실이 자리는 많은데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박 실장은 두 사람이 교육재단 직원의 전부라고 했다. 신철원(52) 이사장은 행사 참석차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재단의 내력을 들은 뒤 ‘학원장실’ 이름이 붙은 집무실을 둘러봤다. 신진욱 학원장이 생전 근무할 때 그대로 집기와 자료 등을 보존해 두었다. 한쪽에는 1995년 경북예술고 교사가 만든 우봉의 흉상이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는 굵은 글씨로 인쇄된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그가 즐겨 읽었다는 시편 23장이다.◆교육사업에 눈 뜨다우봉은 경북 의성의 유교 집안인 아주 신씨 신종기와 전주 이씨 이소선 여사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기독교였다. 그래서 유교의 효(孝)와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다를 게 없다며 두 가르침을 모두 따랐다.우봉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가면서 교육과 인연을 맺는다. 1944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첫발을 디뎠다. 이어 대구와 의성‧경주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기 광복과 6‧25를 거친다.1953년 우봉은 화재로 소실돼 길거리에 나앉은 경주고아원 전쟁고아 120명을 맞닥뜨린다. 교육사업에 눈을 뜨는 ‘사건’이다. 그는 잿더미 위에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련했지만 해결책이 아니었다.고민을 거듭한 끝에 120명 중 일부는 의성 자혜원으로, 또 일부는 연고를 찾아 돌려보냈다. 그러고도 30여 명이 남았다. 그는 그들을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처음에는 큰 집을 하나 얻어 함께 사글세를 살았다. 이후 남구 대명동 지금의 경북예고 땅을 인수해 원사를 지어 새로 출발한다.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구호물자로 의식주는 해결됐는데 학교 교육이 과제였다. 그 사이 60여 명으로 불어난 원아들은 유아부터 고등학교 들어갈 나이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는 인근 중학교에 입학을 부탁하러 갔다가 무안을 당한다. 그때 우봉은 ‘좋다. 나도 학교를 해야지’ 다짐한다.◆협성상고 설립…신익희와 인연신진욱은 1955년 협성상고 야간부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야간부는 전쟁과 가정 사정으로 진학을 미뤘던 학생과 군인이 주를 이뤘다. 사진은 협성상고 입학식 장면. 신진욱은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에게 교정을 유세장으로 빌려주면서 인연이 돼 평생 야당의 길을 걷는다. 사진은 선조인 오봉사당 앞에서. 앞줄 중앙이 신익희, 오른 쪽이 신진욱. 학교 설립을 추진한 지 1년여 만인 1955년 2월28일 학교법인 자혜학원이 인가를 받는다. 이어 4월에는 드디어 협성상업고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한 학급이다. 이어 전쟁 등으로 진학을 미뤄 온 나이 많은 학생과 군인들이 주축이 된 야간부를 설치했다. 학교 이름은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룬다’는 뜻을 담아 ‘협성(協成)’으로 정했다.이렇게 출발한 협성상고는 1956년 2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후보에게 유세장으로 교정을 빌려주면서 시련을 맞는다. 우봉은 자서전 ‘교육에도 왕도는 있다’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대통령 후보가 장소를 못 구해 유세를 포기할 처지인 걸 알게 됐다. 나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일이라면 폐교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자진해 교정을 빌려주었다.’ 이 결단으로 우봉은 신익희와 인연이 닿아 40여 년 영욕의 정치 생활이 시작된다.한번은 신익희가 경북 북부지역을 다지느라 의성을 방문해 우봉의 집에 묵으며 꿈을 심는 글을 써 주기도 한다. 야당과 가까워지면서 협성교육재단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그때부터 1971년 대구 남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우봉과 재단은 숱한 불이익을 감수한다. 그는 자서전에 ‘학생이 늘어나 학교는 더 필요한데 인문 학교와 대학은 인가하지 않고 남들이 싫어하는 중학교와 실업고만 설립을 허가했다. 그렇게도 바랐던 대학교 설립의 기회도 잃고 말았다’고 술회했다.◆재단 해체 위기서 기사회생그 시기 관(官)은 재단의 학교 경영 전반을 감사하거나 사찰을 계속했다. 학교 경리는 물론 건축, 학사 행정 심지어는 교실에 들어가 학생 수를 세기까지 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투명한 재단 경영을 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그 무렵 재단에 결정적인 위기가 닥쳤다. 검찰이 재단 설립 과정을 정밀 조사하고 나선 것이다. 거기서 재단의 구성 요건 중 기본재산 미확보가 드러났다. 재단 설립 당시 일가친척의 과수원‧논밭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몇 건은 등기 서류를 내지 않아 차후 보완 각서를 제출한 뒤 설립을 인가받은 게 문제였다. 담당 검사는 재단을 문 닫게 할 작정으로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우봉은 눈앞이 캄캄했다.드디어 검찰에 출두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사이 담당 검사가 바뀌어 있었다. 새 검사는 설명을 들은 뒤 “서류 보완 시기가 늦었을 뿐 사기성은 없으니 돌아가 학생이나 열심히 가르치라”고 격려했다. 우봉은 “그 말이 천사의 음성 같았다”고 회고했다. 기사회생이다.◆중·고교 등 12개의 매머드 사학재단 일궈재단의 모체인 협성상고는 1975년 대명동에서 현재의 봉덕동 교사로 이전한다. 재단 건물 남쪽이다. 협성상고는 1985년 다시 일반계인 협성고로 전환한다. 협성고는 이후 명문의 반열에 오른다. 대명동 일대가 부촌(富村)으로 수성구가 떠오르기 전이다. 한동안 협성고는 서울대 합격생 수에서 대구지역 상위를 다투었다. 1980년엔 재단에 마지막으로 경일여고가 세워졌다. 대구의 유일한 자율형 여자 사립고다.협성교육재단은 중‧고교 등 12개 학교가 소속돼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세운 중등학교로 숫자가 가장 많은 교육재단이다. 학생들과 함께 교정을 걷고 있는 신진욱.1955년 재단 설립 이래 지난해 2월까지 유치원 포함 12개 산하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모두 30만3천900여 명. 또 재학생은 6천680여 명에 전체 교직원은 530명쯤이다. 전성기엔 재학생이 2만까지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교육자 우봉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어떨까.지역에서 교장을 지낸 한 인사(81)는 “그를 참교육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으냐”고 지적했다. 오랜 기간 정치에 발을 걸쳤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단 산하 소선여중을 나온 한 졸업생(55)은 “설립자가 어머니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붙이고 어머니 생신날 가족과 함께 학교를 찾아와 전교생이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건 어딘가 씁쓸하다”고 회상했다. 시민들의 평가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정치에도 큰 족적 남겨우봉은 생전에 스스로 “본업은 교육, 정치는 외도”라고 표현했지만 정치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국회 진출 꿈은 집요했다. 그는 5대 총선에 고향 의성에서 36세 나이로 첫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6‧7대는 대구 남구로 출마했다. 다시 연거푸 낙선한다. 3전 4기. 1971년 8대 총선에서 우봉은 마침내 당선증을 거머쥔다. 그것도 이효상 국회의장을 1만3천여 표 차로 이긴 짜릿한 승리였다.신진욱은 평생을 야당생활을 했다. 1971년 대구 남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신진욱과 재단은 숱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진은 민주화 투쟁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모습. 신진욱은1973년 9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국민투표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구속 40일 만에 풀려났다. 출소 후 대구교도소 앞에서 지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국회의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은 1년7개월 만에 끝이 난다. 1973년 그는 다시 9대에 출마하지만 이번에는 국민투표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화원 대구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옥중에서 낙선 소식을 듣는다. 구속 기간은 40일에 불과했지만 그의 정치 활동은 발이 묶였다. 1984년 정치인 해금으로 우봉은 정치를 재개한다. 그리고 14대에 민주당 전국구로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우봉은 사학을 운영하면서 30년을 이렇게 가시밭길인 야당과 더불어 산 풍운아였다.◆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사치와 낭비 몰라신진욱 부부의 단란한 한 때. 부인(장경옥)은 경북예고 교장 등을 지내며 재단을 함께 이끈 동반자였다.그는 어머니의 뜻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한때의 포부였던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구 남산교회의 장로였고 선교에 열심이었다. 또 1975년에는 동심교회를 세웠다. 그가 3남 3녀 자식들에게 자주 말했다는 세상에 산 표적을 남기려면 “첫째, 학교를 지어라. 둘째, 병원을 지어라. 셋째, 교회를 지어라” 중 두 가지를 실현한 것이다. 부인(장경옥)은 경북예고 교장 등을 지내며 재단을 함께 이끈 동반자였다.그는 교회 설립과 함께 5대조(회병 신체인)의 강학 공간이던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의성 봉양에 중건하고 1981년에는 금산서원(錦山書院)으로 승격시킨다. 회병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이상정의 제자였다. 우봉은 그래서 퇴계 선생을 누구보다 흠모했다. 또 과거에 급제한 뒤 승지를 지낸 11대조(오봉 신지제)를 그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었다. 그가 즐겨 쓴 우봉(又峰‧友峰‧愚峰)이란 호(號)의 ‘봉’도 자신이 따르고 싶었던 오봉 선조에서 유래한다. 자신이 경영한 교육재단의 연원(淵源)은 이렇게 금연정사로 이어진다.우봉은 자전 에세이 ‘아직도 할 일이 많다’에 ‘내 돈 씀씀이가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이유를 자수성가한 데다 사치‧낭비를 모르는 생활 철학으로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남에게 만족하게 쓰지 못했다고 술회했다.직원은 학원장이 그런 가운데도 유머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재단 박 실장은 “한번은 학원장이 이사장(신철원)과 길을 가다가 음식점 아주머니의 인사를 받고는 ‘우리 아들인데 다음에 가면 밥 많이 주이소’ 하자 아주머니가 크게 웃더라”고 했다. 스스로 밝힌 좌우명도 ‘얼굴에는 미소가/머리에는 지혜가/가슴에는 사랑이/손에는 일이 있어라’였다.우봉은 2014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유택(幽宅)은 고향 선영에 마련됐다. 유학자 김창회는 묘비에 “(우봉은) 오직 내 갈 길은 내가 개척하라는 좌우명을 실천하고 협성 가족 모두에게 깊이 심었다”고 적었다.우봉은 수많은 이력만큼 평가도 다양하다. 그래도 열정으로 국내 최대 중등 사학재단을 일구고 또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몸을 사리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신진욱 연보‧192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출생‧1931년 의성 봉양초 입학‧1942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졸업‧1944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초등학교 교사‧1950년 경주 문화고등학교 교사‧1952년 사회복지법인 자혜원 설립(경주‧의성)‧1955년 협성상업고등학교 설립‧1968년 한국 YMCA 연맹 이사‧1970년 대구 남산교회 장로‧1971년 제8대 국회의원 당선(신민당, 대구 남구)‧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구속‧1977년 대구 동심교회 설립‧1980년 경일여자고등학교 설립‧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당선(민주당, 전국구), 국회 한일의원연맹 부회장‧2000년 재단법인 협성장학재단 설립‧2014년 타계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한국적 ‘자주인 사상’ 현대사 최전선에서 자율공동체 꿈꾸다

하기락은 한국적 아나키즘을 꿈꿨고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웠다. 사재 대부분을 사회운동에 사용, 평생 가난했지만 멋을 아는 신사였다. 베레모를 쓴 82세의 하기락. 베레모와 조끼, 지팡이, 가방 등은 그의 상징이었다.그는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광복을, 광복 후에는 사회혁명을 위한 전사였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를 생각했다. 한국적 아나키즘 세상, 그가 꿈꾸고 실천한 나라였다. ◆반골의 땅 ‘안의’의 수재 소년1967년 9월 추석날 대구 삼덕동 집에 하기락 교수 가족들이 모였다. 하기락은 부인 최재전과 사이에 8남 1녀를 두었다. 사진에는 외동딸을 제외한 하 교수 부부와 아들 8형제, 손자·손녀들이 모두 담겼다. 부인 최재전은 다음 해 봄 췌장암으로 숨졌고, 하기락은 이후 재혼, 딸 2명을 더 뒀다.하기락은 한일병합 3년째인 1912년 1월26일 경남 함양 안의면 초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경출과 어머니 신거부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태백산맥 줄기 산골 마을 안의는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지역 출신 정희랑이 끼었다는 이유로 백 년 이상 벼슬길이 막힌 곳이었다.안의는 숱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는 이유로 일제가 군에서 면으로 폐 군까지 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성지였다. 그는 뼛속 깊이 반항 기질을 가진 ‘안의’ 출신이다.가난했던 아버지는 하기락 출생 후 놋그릇 공장을 해 재산을 일궜다.그는 눈빛 강렬한 아들을 서당에 보냈다. 5년여 서당 다니던 하기락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 결단으로 땋은 머리를 깎고 안의보통학교에 입학했다.소년 하기락은 6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박영환(후일 아나키스트 시인) 등과 연극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공연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분노한 하기락은 “석유로 경찰서를 불태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박영환이 말려 경찰서 공격은 성사되지 않았다.영특한 하기락은 월반하여 5년 만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수재들이 다니던 경성 제2고보(5년제·현 경복고)에 합격했다. 육촌 형과 하숙하던 그는 촛불 켜고 공부하여 전체 수석을 놓지 않았다.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이 경성까지 번졌다. 3학년인 그는 중동학교 학생 양일동(후일 민주통일당 당수) 등과 시위를 주동하여 퇴학처분을 받았다.그는 이후 경성의 중앙고보 2학년에 편입, 1933년 졸업했다.그는 중앙고보 시절 일본 아나키스트 기관지 흑기(黑旗)를 학생모임에 보급하며 아나키스트 길로 들어선다.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22살 때인 1934년 이웃 산청 출신 처녀 최재전과 선을 보고 결혼했다. 아내는 16세였다.◆일본유학 시절 아나키스트 활동1935년 그는 신혼의 아내를 고향에 두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동경 상지대 예과에 입학한 그는 2년 공부 후 와세다대 철학과로 옮겼다.당시 그는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빠져 있었다. 유학시절 그는 고물장사를 하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유학생들과 아나키즘 선전 활동을 했다.1939년 12월 졸업생 송년회에서 일제 창씨개명 정책을 비판하다 동경 경시청에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국내에 소개된 아나키즘은 민족주의·공산주의와 함께 3대 독립운동 이념의 하나였다.신채호, 이회영, 박열 등 쟁쟁한 인물들이 속해 있던 아나키즘 계열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추진, 일제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6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그는 황해도 재령의 재령상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나키스트 전력이 드러나 쫓겨났다.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분뇨통을 지고 농사지으며 아나키즘 운동의 일환으로 농민조합을 창설, 조합운동을 했다.◆광복과 한국적 아나키즘 시도1945년 광복이 됐다. 조국은 좌우 대립으로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하기락은 그 틈에서 아나키즘을 광복 조국의 이념으로 추진했다.아나키스트들은 우파 민족주의보다 좌파 공산주의와 대립이 더 심했다. 부산 언론계를 건국준비위원회 계열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자 민족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연합을 제의했다.1946년 2월 아나키스트들은 우파 조직을 모체로 부산에서 ‘자유민보’라는 일간지를 창간, 공산 계열과 이념논쟁을 펼쳤다. 편집은 하기락이 맡았다. 하기락은 아나키스트 기관지 ‘자유연합’을 2년간 발행하기도 했다.1946년 4월20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 용추사에서 한국 아나키스트 대표들이 모여 3박 4일 간 조국의 앞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1946년 4월20일부터 4일 간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 용추사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하기락 등 안의 출신 아나키스트들이 주관했다.참석자들은 노동자·농민의 조직된 힘을 새 정부 수립에 반영할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통상의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정부·정당을 부정한다. 그러나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새 국가 건설을 위해 창당을 결정한 것이다.아나키스트들은 대회 결의를 토대로 1946년 7월 서울 필동 역경원에서 독립노농당을 결성했다. 독립노농당은 민주입헌정치 실시, 중소 자산 층 주체 계획경제 시행, 경작자만의 토지 소유권 향유 등 정책을 발표했다.하기락은 당 기관지 독립노동신문 편집을 맡았다. 그러나 독립노농당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를 기점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전쟁을 부른다는 이유로 선거참여를 거부한 것이다.그러나 일부 당원들이 당명을 어기고 출마, 당선되자 당은 선거참여자 전원을 제명하는 등 지나치게 이상주의만 추구했다. 결국, 독립노농당은 5·16 군사쿠데타 후 정당해체 조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교수직은 생업, 사회혁명은 주업부산에서 활동하던 하기락은 1947년 활동무대를 대구로 옮긴다. 옛 대구대(현 영남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그는 당시 교육사업에도 열성이었다. 그는 1946년 고향 안의에서 아나키스트 이진언씨가 안의중학교를 설립할 때 힘을 보탰고, 1951년에는 아예 집안 재산을 모두 들여 안의고교를 설립했다. 두 학교 모두 아나키즘이 설립이념이었다.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하기락은 대구에 머물렀다. 그는 1953년 경북대가 개교하자 경북대 철학과로 자리를 옮긴다. 하기락은 교수직은 생업이지만 사회혁명은 주업으로 생각했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그는 1960년 4·19혁명 때 교수시위를 주도했다.교수로서 하기락은 학문연구에도 뛰어났다. 유학시절 실존주의에 빠졌던 하기락은 광복 후에는 독일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연구에 몰두했다.1964년 2월 하기락 교수는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 연구로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인 최재전 및 자식들과 함께 한 하기락 박사.그는 하르트만 연구로 1964년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63년 지방 철학자 모임인 한국칸트학회 설립을 주도, 후일 서울 기반 한국철학회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대한철학회로 발전시켰다.그는 1968년 경북대 교수직을 사임했다. 장남 영석이 경북대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자 아들과 한 학과에 있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정식 교수로 임용되지 못한 채 어렵게 지내야 했다.1973년 그는 잠시 정치에 참여하는 외도를 한다. 아나키스트 동지 양일동이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자 정책위의장을 맡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제2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자주인 사상1960년 팔공산 계곡에서의 경북대 문리대 교수 야유회 모습. 맨 오른 쪽 옆얼굴만 보이는 이가 하기락 교수. 한 사람 건너 철학과 이효상 교수(후일 공화당 당의장), 왼쪽 두 번째가 영문과 민윤기 교수.하기락은 아나키즘을 ‘자주인 사상’으로 불렀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은 일본 강점기에 잘못된 것이라며 쓰지 않았다.그는 국가·정부 등 권력의 속성이 있는 것들은 부정하지만 최소한 공동체(코뮌)를 이끌 자율기구는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인간들이 국가주의 억압, 자본주의 착취, 생존경쟁에 따른 폭력에서 벗어나 자율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그렸다.그는 모든 혁명이 지배세력만 교체하는 데 그쳤다며 지식층 주도 운동이나 무산자 계급 독재를 비판하고 민중 직접 행동을 주장했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지나치게 이상사회를 그렸을지 모르지만 실존하는 권력과 폭력을 견제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사상이었다.◆한국 아나키즘의 길70년대 독재정권 시절을 어렵게 지내던 하기락은 1980년 10월 계명대 철학과 교수들과 ‘목요철학인문포럼’을 만들어 철학의 대중화에 힘썼다. 매주 목요일 시민들과 철학을 논의하는 이 모임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1988년 10월 하기락은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세미나’라는 이름의 이 대회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서울에서 열려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회 참석자들과 함께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은 하 교수(오른 쪽 4번째).그는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1988년 10월 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었다. 그는 경비 상당 부분을 사재로 충당했다. 세계 1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이 대회는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급진 개혁주의자 모임이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하기락은 이후에도 한국 아나키즘을 해외에 알리는 일을 펼쳤다.한국 아나키즘은 일본강점기에선 테러리즘으로, 광복 후 우익에게는 공산주의 4촌으로, 좌익에게는 사이비 혁명주의로 매도·왜곡됐다.그러나 자유 없는 공산주의가 몰락의 길을 걷고, 불평등한 자본주의가 모순이 심화하고 있는 지금, 아나키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도 있게 됐다.불의에 항거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심리는 정도는 다르지만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이다.한국 사회가 좌우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좌초하지 않는 이유는 진영과 관계없이 잘못된 점을 용서치 않는 아나키스트 성향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사상·행동 일치한 지식인하기락은 영어·일어·독일어·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1980년대 경북대 대학원 과정에 개설된 동양철학 강좌에서 한문 원문으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근사록’ 등을 강의했다.그는 1980년대 후반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 읽기 모임을 만들어 정확한 번역과 해설로 후학들의 이해를 도왔다.그는 80세 때인 1992년 ‘조선철학사’를 발간했다. 서양철학자인 그가 한국역사를 1만년까지 끌어올려 상고시대부터 근세까지 철학을 기(氣)의 관점에서 풀어쓴 것이다.1997년 2월3일 그는 대구 만촌동 집을 나서다 쓰러졌다. 국제평화협회지 ‘평협’을 돌리려 집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그는 경북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그는 언제나 약자 편이었다. 누구에게나 겸손했고, 평생을 청빈했다.2002년 6월 고향 안의면 안의공원에서 동료·후학 130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덕비 제막식이 열렸다. 학덕비에는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라는 제자 김주완 교수(경산대)가 스승 하기락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은 하 교수의 4남 하영선(전 대구대 식품공학과 교수) 부부.광복 후 한국현대사 주요 고비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한국 현대철학 1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였으나 학술원 회원도 되지 못했고 훈장이나 상조차 받은 적이 없다.늘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후학들은 그를 전설처럼 말하고 있다.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연보·1912년 1월26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1922년 안의공립보통학교 입학·1927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입학·1929년 광주학생운동 시위 주동으로 퇴학·1934년 최재전과 결혼·1935년 일본 밀항/일본 동경 상지대 예과 입학·1937년 와세다대 철학과 입학·1939년 12월 창씨개명 비판, 3개월 구류처분·1941년 대학 졸업/황해도 재령상고 교사·1946년 부산 ‘자유민보’ 주필·1946년 4월 고향 안의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 개최·1947~52년 옛 대구대 교수·1951년 안의고교 설립·1952~68년 2월 경북대 철학과 교수·1963년 한국칸트학회 설립 주도·1973년 민주통일당 정책위의장/제9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1987년 제3회 전국아나키스트대회 대회장1988년 10월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 서울 개최1992년 12월 조선철학사 발간1997년 2월3일 별세(85)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전쟁고아·소외이웃 돌보며 지역 문화예술의 초석 다져

포항 수도산 덕수공원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비 전면에 새겨진 옛 포항시민의 노래는 1971년 포항문화원장을 지낸 이명석 선생이 작사하고 아들인 이진우 전 국회 의원이 작곡했다. 재생의 거룩하고 뜻깊은 애린정신은 지난 1998년 2월28일 포항지역 문인들이 중심이 돼 생전에 자주 거닐던 수도산 덕수공원에 세운 재생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비문에서 잘 드러난다. 문화공덕비 앞 잔디밭에서는 해마다 재생의 공덕을 기리는 추모식이 후학과 시민들에 의해 열린다.이에 때맞춰 그의 아호를 본뜬 재생백일장이 함께 열려 지역 문인과 문학을 지망하는 청소년들의 참여가 줄 잇고 있다. 이러한 행사는 어렵고 힘든 시절 지역사회에 홀로 일궈놓은 재생의 삶과 발자취에 대해 깊이 되새겨보는 뜻깊은 시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부도 재생이 포항지역에 끼친 위대한 공로를 인정, ‘인간 상록수 훈장’을 수여했다. 곁에서 내조한 부인 도우술 여사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재생은 지난 1979년 9월 향년 76세를 일기로 미국 시카고 인근 록퍼드에 있는 차남 집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동안 유해가 이국땅 미국에 안치됐다가 31년 만인 지난 2010년 10월2일 경북 포항 덕수공원에 재안장됐다. 재생은 슬하에 진우(작고), 매리(82), 태우(79), 대공(76) 등 3남 1녀를 두었다.◆막내아들이 문화·예술 열정과 이웃사랑 이어그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문화사업에 일절 손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처럼 아들 대공씨는 부친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이웃사랑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대공씨는 사재로 1998년 6월 보건복지부 인가를 받아 애린문화복지재단을 설립, 지금까지 가난한 이웃은 물론 불우한 청소년 장학금 전달 등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특히 포항지역 문화발전에 공이 큰 인물을 선발해 ‘애린문화상’을 수여하고 해마다 재생백일장에는 많은 성금을 내놓는 등 결코 쉽지 않은 봉사를 해오고 있다. ‘애린’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뜻으로 재생이 지었는데 그대로 복지재단의 이름이 됐다. 대공씨는 포스코 홍보실장,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2011년 11월부터 3년간 제7대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오늘날 포항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후학들과 시민들은 재생이 남기고 간 고귀한 뜻을 기억하며 따르려고 노력한다. 재생이 남긴 고귀한 뜻은 지금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도시, 전통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로 포항 시민헌장에 오롯이 담겨 있다.박이득 전 포항예총 회장은 젊은 시절 재생을 따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예술과 문학을 논했다.박 전 회장은 재생의 삶을 “남에게 봉사하는 생활 타자에게 나눔의 생활 문화를 애호하는 정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 투명한 이성을 실천하는 행동,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온 정신 온몸으로 보여주고 가신 어른”이라며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김상조 언론인연보• 1904년 영덕 강구면 삼사리 출생• 1924년 대구 교남학원(현 대륜고) 중•고등과 수료• 1925~1927년 일본 관서미술원• 1928년 도우술과 결혼• 1933년 영덕에서 포항으로 이주• 1939년 포항 기독교 신사참배 행사 무산시킴• 1946년 포항문화협회 조직• 1953년 선린복지재단 정식 인가 등록• 1958년 선린애육원 제4대 법인 이사장• 1961년 포항문인협회 창립• 1963년 한국예총 포항지부장• 1965년 포항문화원 원장• 1966년 ‘포항개항제’ 개최• 1979년 미국에서 76세를 일기로 소천• 1988년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건립

한국 1세대 사진작가… 지역넘어 일본·만주까지 1930~40년대 휩쓸어

1942년 백두산 조사대원이 되어 찍은 백두산 등반 사진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산악인 활동은 그의 사진 세계를 넓혀주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대구에는 조선산악회 대구ㆍ경북지부가 결성돼 있었으며 그는 여기에 참여해 산악등정과 사진 활동을 함께했다.1942년 역사적인 백두산 등정은 최계복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 해방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만큼 일본의 탄압은 극에 이르던 시기였다.1942년 7월 서울에서 출발한 백두산 등반대는 각 분야의 학술조사단을 비롯해 많은 영역의 조사단이 있었으나 그는 수송대 및 사진 기록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다. 최계복은 등정 도중에 음식을 잘못 먹어 급성 이질에 걸렸으나 오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민족의 영산을 카메라에 반드시 담겠다는 신념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훗날 그는 미국 이민 생활 중 교포신문(1983년)에 이 당시 등정기를 연재하면서 애국심과 열정으로 넘쳐나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해방되자 조선산악회는 곧바로 재정비를 끝내고 산악활동을 재개했다. 1946년 대구·경북지부가 결성된 후 첫 번째 큰 행사가 국토 구명 사업인 울릉도·독도 종합답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사진 보도반에 편성된 최계복은 현일영ㆍ임주식ㆍ박종대ㆍ김득조ㆍ고희성 등과 함께 울릉도 독도를 촬영했다. 결과물은 1947년 10월10일부터 열흘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이때의 사진들은 6ㆍ25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지만 그가 간직한 몇 점의 사진은 당시의 독도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찍은 독도 사진은 2009년 9월23일 매일신문에 게재돼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언자의 역할을 해냈다.◆해방과 함께 찾아온 변화들최계복의 사진 활동은 해방을 맞으며 변화를 겪게 된다. 1945년 계철순과 함께 경북사진 문화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하고 첫 사진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최계복은 예술 사진뿐 아니라 신문 사진, 현장 중심의 사진, 광고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국 최초를 시도했다. 그는 한국사진의 새로운 개척자 역할을 자처했고 이러한 노력은 한국사진사에 중요한 업적으로 이어졌다. 그는 사진작가연맹 대표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작품심사와 강의, 후진 양성 등에 힘을 기울였다최계복은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영화에도 상당한 애착을 보였는데 영남일보 1947년 3월5일자에 ‘그가 필름 작업을 통해 천연색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과를 냈다’는 기사가 실릴 만큼 관심이 컸다.1950년 그는 사진기점을 사진관으로 바꾸었다. 1952년 전쟁 통에는 2층 사진관을 개조해 일생의 신념과 꿈인 사진작가로서의 기술과 자세를 가르치는 한국사진예술학원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들 최승언의 기억에 의하면 ‘학원에 있는 책상과 의자는 고급스러웠으며 전국의 쟁쟁한 사진작가들이 강의했다’고 기억했다. 이 당시 강사는 박필호를 비롯하여 서동진ㆍ김원영ㆍ이윤강ㆍ강영호ㆍ김동사ㆍ박병수 등 대한민국 최고로 구성됐다.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수강했으나 점차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서울 등을 다니며 학원을 유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학원 문을 닫고 1958년 서울로 떠나게 된다. 서울로 옮기면서 그는 영화스틸사진 분야 일에 전념했다. 6년 뒤인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사진역사연구소 소장이었던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최인진씨(작고)는 ‘사진학원을 살려보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좌절감이 미국 이민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진 듯하다’고 기록했다.최계복은 평생 사진작가로 살아오며 사진은 값싼 예술이란 인식이 퍼져있던 그 시기에 제대로 대접받는 사진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이유로 후학을 기르고 가르치려는 노력이 무산되자 미련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과 연락이 두절된 채 그는 2002년 미국에서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다시 행적을 찾다최계복에 대한 사진 관련 활동이 마지막으로 언론에 소개된 것은 1965년 3월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후학들이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특히 사진역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작고.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과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은 2006년부터 최계복 선생의 행적을 찾아 대구 중구청 등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권정호 전 부장이 최계복 선생의 생질인 정은규(몬시뇰) 신부를 통해 최 선생의 둘째 아들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소를 입수하게 된다.최계복 선생 탄생 100년을 맞는 2009년 작품전을 열기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다수의 사진작품을 갖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 최계복의 사진은 반세기를 훌쩍 넘어 국내에서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됐다.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지난해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영구 보존의 길을 얻었다. 기증된 작품은 1933년 그가 첫 촬영한 ‘영선못의 봄’을 포함한 원본사진 81점과 원본 필름 169점(원판 네거티브)이었다.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예술기법 연마 300시간 수업미국 이민후에도 사진 ‘열정’아들이 본 아버지 최계복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 최승언은 ‘최계복 사진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는 늘 무뚝뚝했고 고집이 세어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이 없을 만큼 분명하고 정확했다. 식구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으나 바깥에서는 한없이 인자하고 이해심이 넓은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웠고 항상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같이하지는 못했다고 기억했다. 1950년대 후반 서울로 옮긴 후 영화 스틸사진을 찍느라 아버지는 늦게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곤 했다. 특히 겨울철 아버지가 좋아하는 브라운색 털이 있는 가죽점퍼를 입고 촬영 나간다면서 카메라 몇 대를 메고 집을 나서던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1964년 미국으로 옮겨온 아버지는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학 다닐 때 미식축구를 했던 최승언은 아버지가 가끔 관중석에 앉아 280mm 렌즈를 부착한 아사히 펜탁스를 감각 대에 설치하고 큼지막한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무서운 아버지에서 자상한 아버지로 바뀌었던 것이다. 아버지 최계복은 사진 찍기 전에 항상 노출계로 피사체에 가까이 가서 빛을 재며 정확하게 노출을 계산해서 사진을 찍었노라고 했다.미국으로 이민 와서도 최계복은 예술적 사진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300시간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동양의 사진을 서양에 알리려고 애썼다고 아들 최승언은 기록했다. 미국에서도 최계복은 활동 분야가 폭넓고 다양해 사진 단체 활동은 물론 정구도 하고 심지어 로터리 클럽 등 여러 가지 모임에도 참가했다. 뉴욕 한인 테니스협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으로 지냈고, 한인 천주교성당에서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75세 무렵에는 정구를 그만두고 골프만 18년간 하면서 건강을 돌봤다고 아들은 기억했다. 김순재 언론인연보1909년 10월28일 대구에서 출생1925년 일본유학. 교토에서 사진기 필름현상 사진인화 등 연구1933년 귀국. 종로1가에서 최계복 사진기점 개점. ‘영선못의 봄’ 사진 촬영.1934년 대구 아마추어 사우회 결성1937년 오사카 아사히신문 사진 공모전 준 특선1938년 조선일보사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에서 ‘여름교외’로 1등 당선1939년 조선일보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 1등 당선1942년 백두산 천지 촬영1946년 조선산악회 대구지부장. 대구 사우회 결성.1947년 독도 촬영1950년 동문로에서 최계복 사진점 개점1952년 한국사진예술학원 설립1956년 경북사진작가연맹 결성 대표 최고위원 추대1961년 한국사진협회 고문(1970년까지)1964년 미국 이민1965년 미국 시카고 Public Library에서 최계복 사진전 개최1970년 미국 뉴욕 Public Library에서 사진전 개최2002년 3월1일 뉴저지에서 사망

낯선 바다 떠돌던 ‘검은 갈매기’ 남녘 타향 포항에 문학의 씨 뿌려

포항 호미곶 해맞이로에 있는 흑구문학관 전경. 해마다 4월이면 이 일대는 넘실거리는 청보리로 장관을 이룬다. 2009년 5월엔 호미곶에 ’흑구문학관‘도 개관됐다. 전국에서 가장 작은 문학관이다. 한켠에 재현된 서재에는 앉은뱅이 책상, 육필원고, 안경, 다구(茶具), 그리고 태극기가 걸려 있다. ‘덕불고’(德不孤:덕은 외롭지 않다)가 쓰여진 액자에서 그의 외로움이 느껴진다.◆문학적 성과 지역에 머물러 아쉬워안타까운 것은 흑구 한세광이라는 인물과 문학적 성과가 아직 지역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지척의 대구만해도 ‘한흑구’라는 이름조차 생소해 한다. 장호병 이사장도 “한흑구 선생은 작품활동에 비해 너무 안 알려져 있다. 보다 적극적인 재조명 작업이 아쉽다”고 말했다.30년간 뿌리내리고 살면서 제2의 고향이 된 포항.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팔팔한 젊은 시절 떠나온 고향 평양에 대한 그리움이 늘 고여있었다. ‘한흑구 문학선집 Ⅱ’에 실린 수필 ‘모란봉의 봄’은 작고 1년전(1978)에 발표한 작품이다.“~산천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였으니 이제 어디서 내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라며 안타까움을 피력하면서도 한가닥 소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어린애의 손가락 끝같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꽃망울들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고향의 산천을 곱게 물들이고 있을 새로운 봄을 또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보경사 ‘한흑구 문학비’의 앞면에 새겨진 ‘보리’의 마지막 문장은 남녘 타향에 뿌리내린 한흑구 자신의 생명력과 인내를 말해주는듯 하다.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해마다 4월이면 호미곶은 언제나처럼 청보리 바다가 된다. 작은 문학관이 있고 보리들의 향연이 일렁이는 그곳에서 ‘한흑구’의 향기를 만나봄이 어떨는지….전경옥 언론인연보1909년 평양시 하수구리 출생1923년 평양 숭덕보통학교 졸업1928년 평양 숭인상업학교 졸업, 보성전문 상과 입학1929년 미국 시카고 노스파크대학 입학1930년 ‘우라키’에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등 발표1932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신문학과 전학1934년 모친 위독으로 귀향 전영택과 ‘대평양(大平壤)’ 창간1939년 흥사단 사건으로 1년간 투옥1945년 평양에서 서울로 이주1948년 포항으로 이주1958년 포항수산대학 교수1971년 첫 수필집 ‘동해산문’ 발간1974년 두 번째 수필집 ‘인생산문’ 발간 포항수산대학 정년 퇴임1975~1977년 효성여대 출강1979년 11월 7일, 70세로 작고

교육·정치·언론 다방면 명성…나라 곳곳에 발전 토대 쌓아

지난 2월 열린 김성곤 선생 43주기 추도식 모습. 그의 정치 인생과 함께 따라다니는 구설은 남로당과 관련한 ‘신분세탁’과 관련된 문제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는 1950년 6ㆍ25 당시 금성방직 사옥에서 인민군에 납치됐다가 탈출했고, 1951년에는 UN 종군기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8년에는 자유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으로 기재돼 있다.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승부수를 던질 배짱이 있었다는 것이다. ‘통 큰 정치인’, ‘협상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었다.그는 슬하에 3남3녀를 두었고 그의 유해는 두 차례의 이장 후 달성군 구지면에 안장됐다. 홍종흠 본사 객원편집위원

한국전쟁 중 입북해 ‘종전’ 촉구…일평생 “통일이 진정한 광복” 신념지켜

2005년 서울시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 가진 미수(88세) 축하 모임(앞줄 중앙 백발머리를 한 이가 박진목). 2010년 박진목은 경기도 하남시에서 92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부인 이영숙씨와의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다. 그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유택(幽宅) 아래 남한산성 민족정기탑 앞에 묻혔다.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연보1918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생연도미상-의성에서 보통학교 졸업 뒤 대구로 나감1938년 대구 달성군 구지면 오설리에서 양조장 경영, 현풍 곽씨와 결혼1942년 형 박시목을 따라 독립운동 투신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연행, 구속1945년 대구 달성군 건국준비위원회 활동1946년 남로당 달성군 조직책, 경북도당 간부1951년 서울서 북 이승엽과 회합(1월), 평양서 이승엽과 2차 회합(8월)1952년 평양 방문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1953년 만기 출소1954년 독립운동가 모임 원호회 이사, 야권통합운동1961년 5·16 군사혁명 감찰부 조사(무혐의 석방)1967년 영남일보 상임이사1970년 민족정기회 이사1972년 통일촉진회 참여2010년 7월13일 별세

‘86 아시아경기·88 서울올림픽’ 한국 스포츠 감동의 기적 주역

올림픽을 성공으로 이끈 김집은 그해 12월 체육부 장관이 됐다. 김집 장관은 엘리트 체육의 체제는 잡았다고 보고 생활체육 발전에 집중했다.김 장관은 조기 축구, 배드민턴, 등산 등을 생활체육으로 장려했다. 그는 특히 청소년 체육 문제에 몰두했다. 김집은 서울올림픽에서 절감한 3천500억 원의 예산을 국민 체육에 쏟아부었다. 그동안 체육계는 돈이 없어 기업들에 구걸하기 일쑤였다.김집은 시도별로 국민 생활관을 짓고, 체육관ㆍ수영장을 넣도록 했다. 2년마다 교포 1천여 명을 초청, 한민족 체육대회를 개최했다.1990년 3월 체육부 장관을 물러난 김집은 한국 청소년연맹 총재가 됐다.그는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에 주력했고, 특히 효 사상을 최고 이념으로 가르쳤다.재임을 통해 1998년까지 총재를 역임한 김집은 그 해 은퇴했다.은퇴 후 경기도 수원 실버타운에서 아내와 함께 생활하던 그는 2012년 2월4일 86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서울대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연보1926년 2월18일 경북 상주군 함창면 출생1938년 상주 함창보통학교 졸업1944년 경기중학교(현 경기고) 졸업1948년 대구의과대(현 경북대 의대) 졸업1948년 대구동산병원 수련의1949년 11월30일 김인덕과 결혼1950년 자원입대, 군의관 종군1957년 6월 미국 에모리 대 소아과 유학1961년 미국 피츠버그 대 소아과 전문의 획득1961년 일본 요코하마 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1962년 귀국, 동산병원 복직1963~1980년 18년간 경북대 의과대 외래교수1970년 김집 소아과 의원 개원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전국구, 체육계 대표)1985년 제12대 국회의원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선수단장1988년 서울 올림픽 선수단장1988년 12월 ~1990년 3월 체육부 장관1990~1998년 한국청소년연맹 총재2012년 2월4일 별세

파리 한복부티크·뉴욕 한복박물관…한복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다

한복 입은 마이클 잭슨의 모습. 이영희는 부시 전 대통령의 두루마기도 손수 만들었고, 힐러리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의 한복을 보고 감탄해 나중에 인디언 핑크로 따로 마련해 주기도 했다.연예인 중에는 하지원이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물론 외손자 며느리인 전지현의 한복 맵시도 아름답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전지현은 시할머니가 만들어준 한복을 외국 파티나 명절 때 꼭 입고 나타났다.특히 친척 결혼식에 한복을 아름답게 입고 나타나 시할머니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이영희는 전지현이 여러 색깔의 한복 중 오렌지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예술인 중에는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와 바이올린 연주자 정경화 등이 그녀의 옷을 입었다. 정경화는 한복의 인연으로 이영희가 10대 때 배웠던 오래된 바이올린을 수리해주기도 했다.소프라노 황수미는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이영희의 한복을 입고 ‘올림픽 찬가’를 불러 선녀 같다는 찬사를 받았다.세계적인 인물들도 그녀의 한복을 좋아했다. 마이클 잭슨은 이영희 한복을 입은 채 찍은 사진을 그녀에게 직접 보내줄 정도였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도 그녀의 한복을 입고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옷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김정일 한복도 만들었다. 2001년 평양에서 패션쇼를 할 때 체구가 비슷한 사람이 와서 치수를 대신 쟀는데 키가 아주 작았다고 기억했다. 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연보1936년 대구에서 출생1955년 경북여고 졸업1956년 결혼1976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이영희 한국 의상’을 열고 의상실 시작1981년 신라호텔서 첫 개인 한복패션쇼 개최1983년 백악관 초청으로 해외 첫 한복패션쇼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개·폐막 패션쇼 개최1993년 한국디자이너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회원으로 선정1994년 파리 중심가에 한복 부티크 ‘메종 드 이영희’ 오픈1996년 아시아 최고 디자이너로 선정2000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한복 패션쇼 ‘역사의 바람’개최2001년 평양서 이영희 민속의상전 개최2004년 뉴욕 ‘이영희 한국문화박물관’ 오픈2007년 이영희 한복 열두 벌이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특별소장품으로 선정.2008년 구글이 뽑은 ‘세계 60인 아티스트’에 선정2008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수상2009년 옥관문화훈장 수상2010년 한복 최초로 프랑스 파리의 오트 쿠튀르에 참가 2011년 독도의 날에 독도에서 패션쇼 개최2018년 5월17일 별세2018년 10월 15일 금관문화훈장 추서

‘1960년대 대중음악계 선도… ‘열아홉 순정’ 이미자 발굴하고 ‘이정표’ 남일해 스타덤에 올려

김천 직지공원안의 형제 노래비. 고려성 작사 ‘나그네 설움’과 나화랑 작곡 ‘무너진 사랑탑’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나화랑기념사업회(회장 민경탁ㆍ67)는 2014년 신인가수 등용문이자 나화랑의 가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제1회 ‘나화랑 가요제’를 개최했다.한국대중음악학회 회원이기도 한 민경탁 회장은 “그간 여러 사정으로 중단됐던 이 가요제를 속개해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밝혔다.또한 기념사업회는 2018 ‘나화랑 가요무대’를 지난 16일 김천시문화회관에서 개최했다. 2015년부터 매년 추모음악제로 열고 있다.김천 직지 문화공원에는 ‘고려성·나화랑 형제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 새겨진 ‘나그네 설움’과 ‘무너진 사랑탑’ 을 한 번쯤 흥얼거려봐도 좋으리라. 어쩌면 두 형제는 생전처럼 하늘에서도 함께 작사·작곡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전경옥 언론인자료제공: 민경탁 가요사학자연보 1921년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에서 출생1935년 김천고등보통학교 입학·학교 브라스밴드 악단장 활동.1940년 일본 동경 중앙음악학원 입학(바이올린 전공)1943년 ‘삼각산 손님’ 으로 작곡 데뷔1945년 김천여자중학교 음악교사 부임1948년 교직 사임 후 서울레코드사 창설 멤버로 입사 1952년 육군본부 군예대 입대해 악단장 활동1954년 킹스타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겸 문예부장1956년 KBS 서울 중앙방송국 경음악단 상임 지휘자 취임·대한레코드작가협회 창립 이사 선임1962년 라미라레코드사 창립1964~1980년 지구레코드사, 그랜드레코드사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활동1983년 11월17일 향년 62세로 타계

제3공화국 정치 주역…‘3선 개헌’ 앞장 ‘10·2 항명 파동’ 4인방

‘10ㆍ2 항명 파동’의 빌미가 됐던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당시 정계의 지형을 바꾼 ‘10ㆍ2 항명 파동’은 권력의 속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다. ‘10ㆍ2 항명 파동’은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1971년 국회 본회의에서 여당 일부 세력이 주도적으로 가결시켰던 사건이다.‘실미도사건’은 특수부대가 실미도에서 북파를 위해 지옥훈련을 받던 중, 인천으로 진출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진입하려던 사건이다. 그 후, ’실미도사건은 소설과 영화로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그 진상은 아직 베일에 쌓여있다.‘광주대단지사건(廣州大團地 事件)’은 1971년 8월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해 일으킨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이는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10ㆍ2 항명 파동’은 일견 중대한 사건을 책임지고 있던 소관 장관에 대한 일종의 책임 추궁이었으나 실상은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한 항명 사건이었다. 항명을 주도한 인사들은 당시 공화당 실세 4인방으로 불렸던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이었다. 삼선개헌을 주도한 공을 내세워 4인방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자 박 대통령은 친 김종필 계 구주류였던 오치성을 내무부장관에 기용해 4인방을 견제할 요량이었다.이에 4인방이 일대 반격을 가한 것이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사건이었다. 반격 찬스를 노리던 중, 야당이 빌미를 제공했고 4인방이 거사에 성공한 셈이었다.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신주류 4인방 중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계를 은퇴해야 했고, 백남억과 김진만은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야 했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10ㆍ2 항명 파동’을 유신체제를 도입해 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백남억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천ㆍ상주 선거구에서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이때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백남억은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겸 총재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정계 은퇴1978년 백남억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천에서 출마했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백남억은 정계를 은퇴했다.1988년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에 취임했고, 1991년 서봉문화재단(성균관대학교 운영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9월15일 백남억은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고향인 김천의 금릉공원 묘지에 묻혔다. 유족으로 백종현(白種玹) 전 국민대 경상대학장 등 3남 1녀가 있다. ‘단독범의 이론’, ‘형법총론’ 등 저서를 남겼다.오철환 칼럼니스트연보1914년 11월11일 김천에서 아버지 백낙준과 어머니 김금옥 사이에 출생1928년 봉계공립보통학교 졸업1931년 대구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시, 독서회사건으로 퇴교1936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1939년 일본 규슈제국대학교 법문학부 졸업, 평양철도국 입사1941년 부산철도국 재직·박갑규 여사와 결혼1947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조교수1955년 교환교수로 도미,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형사법 연구1958년 경북문화상(학술부문) 수상1959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대학원장1960~1973년 제5, 6, 7, 8, 9대 국회의원1964년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1970년 민주공화당 의장1973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1988년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1991년 서봉문화재단(성균관대 운영재단) 이사장2009년 9월15일 87세를 일기로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