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대구문화사 최후의 증인’ 소설가 윤장근
그는 소설가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현실의 암울함을 잊기 위해 문학에 매달렸고 문학에 대한 좌절과 고민이 갈수록 깊어졌으나 끝내 놓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숙명’으로 여겼다. 윤장근은 사람을 좋아했다. 흔히들 그를 두고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50년대 향촌동 술집과 다방에서 문학과 예술을 논했던 이중섭, 박두진, 마해송, 김동리, 현진건, 조지훈, 김광섭, 유치환, 이호우, 이영도, 정비석, 양주동 등등…. 그들이 속절없이 잊혀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기를 원했고, 시비(詩碑)를 세우는 것도 그런 작업 중의 하나였다. 그는 대구를 사랑했다. 전쟁 통에 한국 문화예술인의 은신처이자 활동무대였던 향촌동이 정전과 더불어 빛을 잃고 날로 퇴색하며 늙은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옛날처럼 골목 곳곳에 정이 흐르고 인간정신이 축적된 공간으로 되돌려 놓고 싶어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람이 정을 잃으면 얼마나 허무해지는지, 사람이 떠난 거리는 얼마나 적막한지, 찬란함 뒤의 스산함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를. 그는 그것을 이겨내 보려 했다. 문화의 이름으로 혹은 문학의 이름으로…. ◆절망의 삶 속에서 소설가의 길로 윤장근(尹章根)은 1933년 10월10일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 때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서 서울숭문중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 1·4 후퇴 때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다. 10대에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피폐한 삶을 체험한 그는 문학에서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 책과 글을 통해 현실의 암울함을 잊을 수 있었고 삶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의 작가적 유전자는 가난과 울분으로 점철된 50, 6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소설가 최태응이 있었기에 꽃 피울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집 근처에 살고 있었던 최태응은 “남의 글을 많이 읽어라”는 주문을 했고, 이에 윤장근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등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최태응과 윤장근은 북성로, 향촌동, 동성로, 남산동 술집을 전전하며 술을 밥처럼 마셨고 한국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과 어울렸다. 녹향 음악감상실과 옥이집, 백파집, 백조다방을 거쳐 집에 오면 그는 절망한 자신을 끌어안고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그는 빛을 보지 못하는 소설을 쓰다가 지쳐 통곡하는 게 삶의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1967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첫 소설집 ‘돌아온 사람’을 지역의 영웅출판사에서 발간하기로 결정해 문단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1957년 경북문학협회 창설회원이기도한 그는 첫 소설집 ‘돌아온 사람’에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해보였다. 1970년 한국문협 대구지부 소설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에 산문집 ‘산성의 바람소리’를 펴냈다. 1987년에는 매일신문에 중편 ‘살풀이 변조’를 연재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첫 소설집에 이어 30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먼 북소리’(1996년)를 발표했다. 이 작품 속에서도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던 주제인 죽음을 다루었다. 그는 책머리에서 ‘내가 그리고 싶은 죽음은 특정한 삶의 종언으로서가 아니라 죽음의 객관화였다’고 적었다. 그는 문학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서이기 때문에 당연히 문학은 허망감과 고독감, 상실감을 극복하는 인간 정서를 담아내는 인간지향의 것이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구상 시인과의 교유 윤장근은 2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통에 대구에 모인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쉽게 어울렸다. 그것은 그가 책을 좋아하고 헌책방을 순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역마살이 낀 듯 헌책방을 다니며 귀한 책들을 모으고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의 글을 읽었기 때문에 오상순, 조지훈, 최태응, 구상 등 기라성 같은 선배문인들이 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었다. 그들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막걸리를 양식처럼 마시며 문학과 인생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많은 문인들을 좋아했지만 시인 구상(具常)과는 각별했다. ‘윤장근하면 구상이 생각난다’고 할 정도로 구상시인과 친밀했다. 그는 시인 구상에 대해 “정치와 예술 사이에서 수많은 유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예술을 고집한 정신을 존경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구상시인의 사생관에 더 매료된 것 같다. 그 역시 죽음을 주제로 글을 써온 터라 죽음을 종말이 아니라 회귀로 생각해온 구상시인의 시선에 공감하며 좋아했다. 그는 구상시인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구상 시인의 구도자적 삶을 흠모해오던 그는 가톨릭에 입문해 독실한 신앙인이 됐다. 2004년 시인이 세상을 떠나자 “텅 빈 공간에 내던져진 듯 한 공허감과 함께 한시대의 종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구상시인의 타계 이후 시인을 따랐던 후학들과 2005년 ‘그리스토 폴의 강’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그를 기억했다. 그는 시인 이상화를 닮고 싶어했다. 상화시인상과 상화 백일장을 만든 이윤수 시인의 뒤를 이어 그는 2001년 상화 탄생 100주년 사업을 직접 맡기도 했고, 이상화 고택보존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8년 이상화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이상화 현창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가 이처럼 이상화를 사랑한 것은 공론에만 그치지 않는 실천의 시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그는 상화를 “관념적인 언어의 유희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문인으로는 일인자다”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시가 없어도 상화는 자립할 수 있고 인간으로서도 허물이 없는 분을 우리 고향에서 가졌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하다”고 말 할 정도였다. 그는 상화의 가족보다 상화와 그의 일가에 대한 것을 더 많이 알만큼 그에 대해 애정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선배들의 현창사업에도 열심이었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옛 문인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잊혀지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목우 백기만 시비(1991) 빙허 현진건 문학비(1996) 이윤수 시비(2000) 이설주 시비(2002) 구상 시비(2011)등을 세우는데 그는 큰 힘을 쏟았다. 윤장근하면 죽순문학회가 연상될 만큼 죽순문학회와의 인연 또한 깊다. 해방 후인 1946년 국내에서 최초로 생긴 순수문학동인인 죽순문학회는 1979년 새롭게 태어났다. 1996년부터 죽순문학회 회장직을 10여 년 맡은 그는 죽순의 화려한 부활을 이끌어냈고 상화시인상을 비롯해 시서화전을 통한 한일 교류전도 활발하게 추진했다. ◆대구의 근현대사 복원에 힘쏟다 그의 집에는 기자, 공무원, 문인, 향토사연구자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수집한 자료들이 가진 가치 뿐 아니라 그의 비상한 기억력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50, 60년대 작가와 예술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이 저장돼 있었다. 움직이는 문화사 사전이었고 대구의 골목을 생생히 기억하는 증인이기도 했다. 그가 자료에 열정을 쏟게 된 것은 1980년대 부터였다. 1970년대 까지 문학적으로 열정을 퍼부은 시기였다면 1980년대부터는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던 시기였다. 문화적 열정은 대학강단에서 시작됐다. 대학에서 일본근대문학과 문장론을 가르치던 그는 강의가 끝나면 허탈감에 시달렸다. 이를 채우기 위해 문화재 수집에 매달렸다. 수업이 끝나면 경기도 이천, 전남 강진 등 전국의 유명 도예지를 비롯해 사찰 골동품 가게로 달려가면서 점차 옛것에 매료됐다. 이 과정에서 도자기와 향토문학사에 일가견이 생겼다. 그가 모은 장서 중 900여 권은 대구시립서부도서관에 기증돼 대구향토문학관(2002)을 탄생시켰다. 그가 애정을 갖고 수집했던 일본서적들은 중앙도서관에, 그 외 책들은 대구근대 역사박물관, 대구문학관, 향촌문화관에 기증해 대구의 근현대사 복원에 많은 힘을 보탰다. 2010년에는 평생 모아온 향토 문인들에게 대한 자료를 정리해 ‘대구문단인물사’를 펴냈다. 이책에는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이장희, 이육사, 장혁주, 오상순, 김동리, 이윤수, 이설주, 구상, 신동집, 서정희, 서석달 등 19명 문인들의 뒷 이야기와 각종 자료들이 수록돼 관심을 끌었다. 문학을 논하려면 술이 빠질 수 없다며 한낮에도 향촌동에서 ‘여기 한병 더’를 외치던 그는 2015년 6월 이곳을 떠났다. 부인과 아들과 두 딸을 남겨두고.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문화사전’, ‘대구의 마지막 문화사 증인’ 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는 지나간 바람을, 흘러간 강물을 다시 잡아보려는 스산하고 허허로운 낚시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글=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피란시절의 은신처…그곳엔 낭만 그리고 사람이 있었다향촌동과 윤장근“향촌동을 이야기를 하려면 술잔을 앞에 놓아야지! 마른 목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향촌동의 술집이라면 안 가 본 곳이 없던 그에게 지금의 향촌동 모습은 가슴 아린 기억이었다. 피란시절의 향촌동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인의 은신처이자 활동무대였다. 비록 거리는 보잘것 없었으나 그 곳에는 예술이 있고 낭만이 있고 그리고 사람이 있었다. 그 시절 그는 향촌동 술집을 출근하다시피 하며,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과 생존을 위해 서로 몸을 비벼댔고 문학과 인생을 뜨겁게 이야기했다. 1953년 정전과 더불어 예술인들이 서울로 빠져나가자 향촌동은 갑자기 진공상태가 됐다. 대구는 무더위와 권태만 남은 채 감흥이 없고 지루한 도시로 빠져들었다. 윤장근은 감흥이 없는 향촌동의 모습을 참기 어려웠던 듯하다. 그래서 그가 가진 기억과 기록과 자료로 옛날의 화려함을 되돌려 놓고 싶어했다. 그는 ‘향촌동을 빼놓고 50, 60년대 한국문학을 논할 수 있겠는가’라며 이 거리가 잊혀져가는 것이 답답했고 이를 살려내지 못하는 대구가 안타까웠다. ‘이중섭과 인연으로 따지자면 향촌동이 서귀포만 못할까? 그런데 제주도에는 이중섭 거리가 있는데 대구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술 한 잔이 들어가면 아쉬운 마음을 터놓았다. 실제로 그는 1955년 대구의 미 문화공보원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렸을 때 그의 전시회를 뒷바라지 하기도 했다.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는 이중섭이 즐겨찾던 다방, 구상이 술을 마시던 술집을 보면서 사람이 사라지고 정이 사라지고 낭만이 사라지면 얼마나 허무해지는 가를 느낀 듯, 그는 가끔 ‘낙화유수’를 조용히 불렀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김순재 언론인윤장근 연보1933년 대구출생1957년 경북문학협회 창립회원1967년 첫소설 집 ‘돌아온 사람’ 간행1970년 한국문협 대구지부 소설분과 위원장1979년 산문집 ‘산성의 바람소리’ 간행1987년 중편 ‘살풀이 변조’ 매일신문 연재1994년 제 8회 금복문화상 수상1996년 제 16회 대구문화상 수상 , 소설 ‘먼 북소리’ 간행1996-2007년 죽순문학회 회장2001년 이상화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주관2002년 백기만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개최2004년 일본 오사카서 죽순 60주년 기념 서화전 개최2008년 이상화 기념사업회 회장, 왜관 구상문학관에 시비건립2009년 향촌동 북성로 예술인 표징작업2010년 ‘대구문단인물사’ 출간2015년 6월24일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