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유교마을에 뿌리 내린 기독교 정신

등록문화재 654호로 지정된 안동교회는 10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안동교회 석조예배당은 화강암 덩어리를 하나하나 다져 쌓아 올린 돌 제단으로 미국인 보리스가 설계해 1937년 준공됐다.예전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잘 보존된 안동교회.이무열 기자 lmy4532@idaegu.com 안동은 경북 북부의 관문으로 내륙으로 들어서는 사방의 길이 다 열려있다. 20세기 초엽까지는 더욱 그랬다. 동쪽의 울진, 영덕에서 국토 안으로 깊숙하게 접어들려면 안동을 거쳐야 한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나그네들은 통상 두 가지 길을 선택하는데 영남좌로인 죽령을 넘어 영주-안동으로 들어서기도 하고 중로인 새재-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안동의 북쪽과 서쪽 길이 모두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런 안동을 조망해 보면 지역 구성이 자못 흥미롭다. 시 외곽에는 400~500년 족히 넘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내앞마을, 하회와 소산마을 그리고 봉정암과 학봉종택 등이 안동 외곽의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그들 고택군을 지나 한걸음 안동시내 중심으로 들어서면 다른 지역의 도심과 마찬가지로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속에 유독 두 개의 건물은 고건축물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 중 하나는 목조 건물인 태사묘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풍의 석조 건물인 안동교회다. 태사묘가 고려 건국 공신 세 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라면 11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안동교회(안동시 화성동, 등록문화재 654호)는 기독교 예배당이다. 결국 안동지역은 동심원 속의 바깥원은 전통의 고택마을, 중간원은 현대식 생활 건물군 그리고 중심원은 사원 건물로 배치된 듯하다. 안동의 여러 고건축물들은 하나 같이 제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지켜온 시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유학의 본산인 안동에 세워진 안동교회의 내력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기독의 길을 연 김병우 김병우는 안동의 서쪽 풍천 어담골의 한미한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기부터 밭을 갈고 논을 메면서 평범한 촌부로 성장했으나 짬짬이 가학으로 사장의 글귀만은 놓치지 않았다. 청년기에 이르도록 김병우의 생활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집 밖의 세상사는 물살같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일본 경찰들이 들어와 상투머리를 짤막하게 깎으라고 윽박지르는가 하면 조선이 곧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말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또한 서당이 없어지고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글방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의성과 일직 그리고 풍산 지역에도 서양 사람들이 만든 야소교를 믿는 장소가 생긴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병우는 문득 문득 마당 밖 넓은 곳으로 뛰쳐나가 달라져 가는 세상사를 보고 싶었다. 그냥 묵묵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맨몸으로 변화의 물결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닮은 채로 꽁꽁 묶고 있는, 고루하고 낡은 것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늦봄, 하얀 솜가락 같던 싸리꽃이 지고 산도화가 화사하게 피어나던 날 청년 병우는 풍산 장터에 나갔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대장간 앞에서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키가 크고 콧날이 오뚝할 뿐 아니라 머릿결이 노랗고 눈빛이 파란 게 아주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둘러싼 장터의 여러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이 어찌 저리도 하얄까. 참 별 사람이 다 있네. 어디서 온 사람일꼬.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인가 보네’, ‘아니야 구라파 사람이지’라며 한 마디씩 수군거렸다. 그러나 병우는 그 서양사람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이 어리고 있음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지만 결국 한 마디의 말도 섞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 혼을 빼앗긴 바라보았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는 1893년 4월, 부산에 입향해 한 달 동안 경북 북부지방까지 기독교의 미답지역을 여행하고 돌아간 영남의 최초 선교사 배위량(W.M.Baird)이었다. 그 후 김병우는 처음 만났던 그 이국 사람의 얼굴이 문득문득 빛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야소교인가 하고 상상해 보면서 은연중 자신을 채찍질하며 독백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려워 말고 이곳을 떠나리라. 나의 집안과 나의 방 그리고 나의 관습과 과거로부터 벗어나 맨몸으로 떠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1903년, 김병우는 대구선교부 경북북부 지역 책임자인 방위렴(W.M.Barrett)을 만나 신세계나 다름 없는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 풍산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만난 병우는 복음을 맞이한 댓가를 톡톡하게 치러야 했다. 대문간에 십자가를 내 걸고 찬송가를 부르던 병우를 마을 사람들은 숫제 역귀로 몰아세웠다. 가까운 친인척까지 합세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우리 마을이 역귀에 들었습니다. 야소교도의 집을 불태워 버립시다.” “병우를 잡아 마을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십자가를 붙인 병우의 초가집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병우는 더 이상 마을에 머물 곳도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마을사람들의 등살에 밀려난 김병우는 풍천과 인접한 소산 마을로 들어갔다. 일가들이 사는 곳이었지만 그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추웠지만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한다는 믿음으로 가는 길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더 넓은 마을로 나가자.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안동 읍내로 나가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살리라….’ 믿음을 향한 김병우의 신념은 더 굳건해져 나갔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교회 석조예배당 교회중심에 있는 유적지 안내도. 땅거미가 풀리기 시작하는 새벽, 그래도 골목길에는 어둠이 사라지지 않았다. 말끔하게 세수를 한 김병우는 참빗으로 머리를 다듬고 틀어 올렸다. 그리고 지난 날 방위렴에게 얻은 청나라 판 성경책을 펼쳤다. 문풍지를 타고 들어오는 바람결에 등잔불이 일렁거렸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의 한 구절을 읽고 묵상하던 병우는 그날따라 지난 날, 예수를 좇다 갖은 수모를 이겨 내고 안동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묵상을 멈추고 난 병우는 성경을 덮고 머리맡에 둔 둥그란 소가죽 북을 꺼내 둥둥 울렸다. 그리고 말끔한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옆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금새 찾아든 7명의 교도들을 정중하게 맞이한다. 자신을 포함해 남자 넷, 여자 넷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환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기도문을 봉송하였다. 1909년 8월, 안동 서문 밖 기독서원 다섯 칸짜리 방에서 김병우를 비롯한 8명이 처음 하나님을 경배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안동교회는 김병우를 필두로 안동지역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본산이 된 것이다. 한해 두 해 세월이 지나갈수록 성도의 수가 75명, 200명, 400여 명에 이르도록 급증해 나갔다. 그 다수가 안동의 양반 자제들이고 조선시대 관리의 후손들이다. 예배의 자리가 비좁기만 하였다. 1937년 이른 봄, 안동읍내의 꽤나 번잡한 거리인 화성동에 화강암 석조 2층 건물이 서서히 지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높이 쌓아져 가는 큰 집의 외벽을 구경하느라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곤 한다. 한참 쳐다보던 어떤 이는 ‘무슨 집이 돌집이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렇게 높은 집인데 대문은 측면에 있나 보네’ 하면서 자신들이 처음 마주하는 익숙지 않은 느낌을 숨기지 않고 내뱉곤 한다. 안동교회로 사용될 이 건축물은 주변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단순히 외형뿐만 아니라 높이와 지붕 모양 그리고 부재로 쓴 석물까지 단연 눈에 확 띈다. 우리네의 전통 집 형태와 전혀 다른 대문 등은 모두 보는 이들을 낯설게 한다. 성도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예배처소를 넓혀 나가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그 여섯 번째로 지어진 것이 곧 현재 모습의 2층 돌집 예배당인 안동교회이다. 서울 태생으로 안동에서 15년째 담임목사로 있는 김승학 목사는 교인들이 순후하고 신실하다고 말한다. 그와 장시간 교회의 내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전통의 추로지향(鄒魯之鄕)에 기독교가 그렇게 일찍 접목될 수 있었던 연유가 이해되면서 의구심이 풀렸다. 오랜 세월 동안 유학적 선비문화가 깊이 밴 안동 지역사회는 기독교를 배타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신학문 세계로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학습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식을 잘 습득하는 훈련된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오히려 더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들불 속 주인 구하다 죽은 개 이야기…사람들 감동해 ‘구분방’ 이름 붙였다네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군. 사적 제336호 낙동강 동안에 접한 해발 70m 내외의 구릉 지대에 흩어져 있는데, 구미시 일대의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산 부사 안응창이 1665년 의열도 의구전을 기록하고, 1685년 화공이 의구도 네 폭을 남겼다.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바람이 불었다. 떨어진 나뭇잎이 고분군을 덮고 있었다. 고분군 사이 길에 쌓인 떡갈나무 낙엽을 밟는 발걸음이 포근했다. 낙엽은 나뭇잎의 주검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들이 떨어진 낙엽을 보고 있었다.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잎 돋아나 녹음의 한때를 출렁일 것이다. ‘순환’이란 말이 떠올랐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삶을 위한 죽음은 장엄하고, 죽음을 위한 삶은 처연하다. 자연사든 인간사든 무릇 생명가진 것들의 가치 있는 운신(運身)은 장엄하고 처연하다. 역사 속에 누워 있는 고분군이, 고분군을 뒤덮은 나뭇잎의 주검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살피게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죽음은 삶을 되 비추는 거울임이 분명하다. 의구총을 찾는 길에 고분군에 들렀다. 사적 제336호로 지정된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은 의구총과 지척에 있었다.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이라고 한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낙동강 동편 해발 700m의 구릉지대에 1번에서 205번까지 이름 대신 번호표를 달고 누워 있었다. 원래 낙산 일대는 가야시대와 신라 진흥왕 때 일선주(一善州)의 소재지로서 대규모의 가야, 신라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곳, 금동제 귀고리와 가야시대 등잔, 토기 등의 부장품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낙산리 고분군은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 묘지로 추정된다. 그 이유야 무엇이었든지 불문하고 그 흔한 비석과 비문, 근사한 문체로 새긴 이름 석자가 없는 무명씨(無名氏)들의 무덤이어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덤의 주인들인 토착지배 세력들 간의 크기를 가늠할 길 없으므로 죽음은 참 공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년 세월을 거슬러 우리 곁을 찾아온 선사시대 정경처럼 고분군이 주는 조용하고 포근한 느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는 개의 무덤이다. 개 무덤 뒤에 있는 의구도 네 폭은 주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친 개의 충직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떨어진 나뭇잎은 새봄을 약속하고 이름 없는 고분군은 삶과 죽음의 공평함을 일깨운다. 의구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1994년 9월29일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된 의구총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 25번 국도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든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연향(延香, 지금의 해평 산양)에 사는 우리(郵吏) 노성원(盧聲遠)은 영리한 개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노성원이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때 들불이 나서 주인이 타죽을 위험에 처하자 개가 꼬리에 물을 적셔와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는 기진하여 죽었다. 깨어난 노성원이 감동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다. 후세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칭송하여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고 불렀다. 원래 있던 의구총 자리는 1952년 도로에 편입되어 공사 중 비(碑)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아울러 수습하여 일선리(一善里) 마을 뒷산으로 옮겼다. 그러다 또다시 일선리 마을이 조성되자 1993년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현 위치로 옮겼다.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의열도’에 있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이고,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의구 설화는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구미의 의구 설화는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유형, 즉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에 속한다. 이러한 전설은 여러 지방에 전하고 있지만 봉분이 남아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1994년 선산군에서 향토문화재 보전과 국민의 사회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정비하였다. 의구의 이야기는 사람 사는 세상에 크게 귀감이 되는 것이어서 1665년(현종 6) 선산부사 안응창이 고을 노인에게 의구 이야기를 듣고 ‘의구전(義狗傳)’을 지었고, 1745년 박익령이 화공에게 약가(藥哥)의 정열(貞烈)을 그린 ‘의열도(義烈圖)’ 4폭과 함께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하여 ‘의열도’에 첨부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낙산리 의구총에 관한 이야기는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청구야담’, ‘파수록’, ‘한거잡록’, 심상직의 ‘죽서유고’ 등에 기록, 전승되고 있다. 주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의구설화의 유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분포 지역 또한 광범위하다. 의구설화의 소중함을 보존, 전승하려는 노력과 필요성이 오랫동안 널리 있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곳 없이 개만큼도 못한 인간사의 행태가 그만큼 누적되어 왔다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하겠다. 고려시대 최자가 그 노래의 창작 동기를 ‘보한집’에 기록한 바, 무덤을 만들어 죽은 개를 장사 지내고 김개인은 아래와 같은 ‘견분곡(犬墳曲)’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人恥時爲畜)/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公然負大恩)/ 주인이 위태로울 때 주인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主危身不死)/ 어찌 족히 개와 한 가지로 논할 수 있겠는가(安足犬同論)//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의구설화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처럼 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또한 오래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대표적 욕설인 개**에서부터, 제 버릇 개 못 준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드린다, 개밥에 도토리, 개 팔자가 상팔자, 개가 똥을 마다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죽 쒀서 개 준다, 개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등의 속담을 지나, 무질서와 중구난방과 오합지졸을 지칭하는 개판, 여의도 정치를 두고 흔히 사용하는 야합이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무수하다. 개가 폄하의 대명사가 된 것은 웬일일까. 개의 생태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편견으로 말미암은 것일까. 개의 잘못일까, 사람의 잘못일까. 그 원인과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낙산리 의구총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이 야속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야속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아도 좋겠다. 보신탕집 옛 자리에 동물병원이 들어서고, 애완견은 이제 한 가족, 한 식구가 되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가는 반려동물의 대명사가 되어있지 않은가.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애완견에게 항렬자를 따서 이름을 지어주고, 그가 죽으면 조상들을 모신 선산에 묻겠다는 이웃도 한둘이 아니다. 이와 같은 개의 지위향상(?)이 의구총 주인의 살신성인 공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되풀이 하거니와,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고분군의 낙엽과 의구총의 전설이 내게 물었다. 저밖에 모르는 야박한 인심, 궁핍한 세태를 행해 컹, 컹, 컹, 꾸짖듯 물었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우뚝 솟은 ‘범종루’ 절의 위용·규모 자랑 정체 모를 보물 품어 호기심 자아낸다

경북 의성군 다인면 비봉산 동쪽 기슭에 있는 보물 1831호 대곡사 대웅전은 1368년(고려 공민왕 17) 인도 승려 지공과 혜근이 창건했다.창건 당시에는 대국사라 했는데, 이는 지공이 원과 고려 두 나라를 다니면서 불법을 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05년(선조 38) 탄우가 중창해 대웅전과 범종각·요사채 등을 새로 지었다.1687년(숙종 13) 태전이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대곡사로 바꾸었다.이무열 기자 lmy4532@idaegu.com 일주문 현판에 보면 비봉산 대곡사라고 적혀있다.비봉산은 봉황이 나는 산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대곡사 다층석탑. 대웅전 앞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성 다인(多仁). 사람이 좋고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난다는 인재의 고장이 지금은 급격한 노령화로 해마다 인구가 줄어드는 전형적 농촌 마을이 됐다.다인면 소재지에서 대곡사로 가는 이십리 길은 겨울 날씨처럼 투명하고 건조했다.대곡사를 품은 비봉산(579m)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산이다.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예천 풍양과 지보, 남으로는 안계평야를 내려다보는 비봉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산마루에 오르면 낙동강 너머 예천과 신도청, 문경과 상주에서 남으로 팔공산까지 조망된다.낙동강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고려 조선시대에는 강 건너 예천 지보를 잇는 나루터가 곳곳에 있었다.그런데 나루터에서 십리나 내려간 곳에 지금의 지인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봉이 날아오르는 형상의 비봉산은 태행산으로, 자미산으로도 불렸다.우공이 대를 이어가며 산을 옮겨 가겠다는 고사의 태행산이나 하늘나라의 궁전 자미궁으로 불렀다니 이 지역 사람들의 비봉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산을 닮았다.이곳에 봄이면 진달래며 산벚이며 만발한 꽃동산이 되었고 해방 전까지 대곡사 계곡에서 예천과 의성 일대의 주민들이 몰려와 화전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대곡사는 고려 공민왕때(1368년)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대곡사 중창사적기에는 “신라 때 창건했다고 하지만 오래되어 알 수 없다.중간에 고려 말 지공이 나옹에게 불법을 전수한 후 이곳에 와서 함께 절을 지었다”고 적고 있어 그 창건연대가 신라시대로 소급되고 있다.사찰기에 따르면 대곡사도 다른 사찰처럼 임진왜란때 왜적의 손에 분탕질 당해 초토화 되었다.임란 후 1605년 선조 때부터 숙종 9년(1683년)까지 꾸준히 중수했다.그동안 많은 고승들이 대곡사 중창과 대종 제작 등 주요 전각에서 사찰 기물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다고 사찰기는 기록하고 있다. ◆대곡사 문화재 보물 대웅전의 내부는 보궁형 닫집과 우물천 장으로 꾸며져 있고 금동석가여래삼존상 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에 그려 진 불상벽화 우람한 기둥의 일주문이 대곡사가 영지임을 알려준다.드넓은 청석 바닥의 개울을 세심교가 가로지른다.대곡사를 들어서면 우뚝 솟은 범종루가 절의 위용과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범종루에는 ‘범종루(泛鐘樓)’라고 쓴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으나 빛이 바래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보통 사찰의 범(梵)과는 다른 범(泛)자를 각(閣)이 아닌 루(樓)라고 분명히 썼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된 대곡사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집 양식으로 팔작지붕 중층 누각이다. 종루에 있었던 종은 예천 용연사에 가 있다고 한다. 지금의 종은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목우 운판 법고 등과 함께 2009년 새로 건립한 범종각에 있다.워낙 규모가 커서 절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전위누각이다.2층 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 지붕이다. 특히 2층 처마 밑에는 지붕을 받치는 다포 양식에 연꽃을 조각했는데 등목 주지스님은 범종루에 새겨진 연화대야말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자랑한다.건축가들은 이 범종루가 대웅전과 같은 건축 양식이어서 대웅전 조각 수법을 모방해 건립된 것으로 본다. 범종루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대웅전은 오래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단청을 했던 기억조차 없어 보였다.대웅전과 범종루는 각각 경북도 유형문화재 160, 161호였으나 대웅전만 2014년 보물 1831호로 승격됐다.건물은 자연석을 허튼 쌓기로 해서 높은 기단 위에 동향으로 들어서 있다. 대웅전 안 천장과 벽의 단청들도 낡아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대곡사에서 펴낸 사찰지 대곡사에는 대웅전 지붕 암막새에 조선 선조 37년(1604년)을 나타내는 명문이 적혀 있어 중창시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설명한다.대웅전 벽에는 대곡사가 자랑하는 보물이라 할 53불을 그리고 이름들을 써 놓았는데 오래 돼 읽을 수가 없었다.앞문은 모두 창호지를 발라 겨울을 대비했으나 출입문이 있는 옆 벽은 기둥과 벽체 사이의 벌어진 틈새로 겨울이면 황소바람이 들어올 것 같다. 마루바닥은 조심해서 걸어도 삐걱 소리를 내면서 그 연륜을 자랑하고 있다.대웅전 앞마당에는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13층 청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연화대좌, 높이 108cm의 탑신부만 남아있다. 작은 탑이지만 전국에 12개 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경북도 문화재자료 405호)으로 범종각과 함께 보물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화강암 기단부를 시멘트로 수리하면서 아쉽게도 원형이 훼손됐다. 일부 문헌에 탑신부가 원래 13층이었으나 현재는 12층이라 했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13층이다.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 같다.범종각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면 오른쪽에 명부전이 왼쪽에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 경북도 지방문화재 439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과 사자, 판관, 왕방울눈의 금강역사상이 봉안되어 있다.그러나 이들 불상과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가 불확실하고 자리조차 연구되지 않아 앞으로 대곡사의 숙제 중 하나라고 등목 스님은 말한다. ◆유일하게 남은 암자 적조암 대곡사에는 한때 9개의 암자가 있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절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대곡사 위 1km쯤 거리의 비봉산 중턱에 있는 적조암만 남아 있다. 적조암 구포루(경북도 문화재자료 626호)는 한 모퉁이가 잘려 나갔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은 남아 비봉산의 최대 절경을 바라고 있다.자연 그대로의 원목을 사용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누각 형태의 구포루는 지금의 극락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불상을 모신 법당의 역할을 했다. 대곡사의 9개 암자는 염불암 적멸암 원적암 보덕암 양진암 봉서암 구암 회동암 그리고 적조암이었다.햇볕 잘 드는 양지에 편편하게 자리잡은 적조암은 봄이면 꽃동산이 된다고 적조암 주지 홍법 스님은 말한다. 적조암에서 맞는 아침 풍경이 정말 좋다고 한다.비봉산이 명당이라면 그중에서도 명당이 바로 적조암이라고 다인면 출향인 김부일씨는 주장한다.특히 적조암에서 아침 안개가 올라오는 맞은편 산을 보면 임산부가 막 아기를 낳는 것 같고 그 임산부의 머리에 문필봉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명당터라는 것이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대곡사를 찾아 명문 시구들을 남겼는데 그 지리나 위치로 보아 대곡사는 적조암 터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그래서인지 의성 다인에서 수많은 문인 급제자가 근세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출신 인사들을 살펴보니 검찰총장, 대법관에서부터 장관 박사 등 수없이 많다. 김부일씨도 “이곳 출신은 모두 대곡사와 인연을 맺었다”고 단언한다.비봉산이 명당이었던 것은 비봉산에서 수많은 기우제가 올려졌던 데서도 알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명곡 최석정이나 대동운부군옥을 남긴 문신 초간 권정해, 낙파 김용한 등의 비봉산 기우제문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곡사는 대국사였다 대곡사는 처음엔 대국사였다. 많은 기록들은 태행산 대국사 등으로 기록했다.지공선사와 나옹화상이 왕명으로 사찰을 건립했고 공민왕이 대국사란 이름을 내려 보냈다는 거다. 이 후 임란으로 불탄 뒤 조선 숙종조에 태전선사가 중창하고 대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김부일씨는 고려시태 국사인 나옹선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초제사찰이었고 그 이름이 대국사였으나 후에 대곡사로 바꿨다고 주장한다.그런가 하면 마을에서는 암행어사가 “대국인 중국을 두고 절 이름을 대국사로 해서는 안 된다”는 꾸중에 대곡사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대국사라고 표시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대곡사를 방문하고 쓴 이규보의 시가 동국이상국집에는 대곡사이지만 범종루 현판에는 대국사로 써서 걸려있다는 것이다.이규보는 낙동강을 따라 선산에 왔다가 대곡사에서 하루 머물며 ‘17일 대곡사에 들어가다’라는 시를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후대 사람들은 이 시가 명종 26년(1196년) 29살의 이규보가 낙동강을 따라 선산에 왔다가 8월 17일 대곡사에서 하루 묵고는 예천 용궁과 풍양을 거쳐 간 것으로 밝혀냈다. 이로써 대곡사가 공양왕 이전에 건립된 것은 확실해졌다.대곡사를 소재로 시를 남긴 사람들은 대곡사가 낙동강과 비봉산을 안고 있는 명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과 우복 정경세를 비롯한 당대 명문대가들이 모두 대곡사 관련 글을 남겼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대곡사를 찾았고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하나씩 고증해야 할 숙제가 되고 있다고 주지 등목스님은 말한다. ◆배불숭유정책의 현장이었던 대곡사 대곡사는 배불숭유정책의 조선시대 유림으로부터 많은 수난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시절이 그러했고 대곡사가 위치한 낙동강변 비봉산도 유림들의 세력 한복판이었고 보면 많은 문인들이 공부 보다는 풍류삼아 대곡사를 찾은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우리나라 산중 사찰이 대개 절 입구에서부터 절 뒤 산까지 넓은 토지를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곡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규모에 비해 절터가 아주 좁은 편이다.또 대곡사 대웅전 기둥에 지금까지 새겨진 이름 낙서들도 그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하회마을 화경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에 ‘대국사는 지공선사의 도량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문서는 양반 선비들의 출입금지 경고장 같다.양반들이 절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출입을 금해달라는 문서일 것이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명문조각도 발견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공선사에서 나옹선사와 무학대사에 이르는 삼화상의 영정이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과 함께 대곡사 적조암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고승들의 뚜렷한 법계가 대곡사에서 이어지고 있었음은 대곡사를 지켜온 선사들의 불심과 대곡사의 사세가 이루어 낸 성과라고 짐작한다.삼화상을 한 폭에 담은 영정은 유례가 없는 데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대 영정 중 가장 오래되고 보관 상태도 좋아 현재 보물로 승격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수많은 보물이 보관돼 있고 알려진 것보다 연구하고 밝혀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미지의 사찰 대곡사다.등목 스님은 “절의 중요한 시기인 근세 200~300년 역사가 실종된 사찰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스님은 최근 대곡사 관련 사적과 시문 등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대곡사’로 발간하고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

‘5년 만에 남편과 사별’ 서씨부인 손그림 화사 이명기 덧그려 슬픈 이야기 짙어졌네

백죽각 입구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 숲. 성주 도씨 성동문중 사당. 사당인 모원제는 화재로 소실돼 최근 복원됐다. 군위군 효령면에 위치한 백죽각 전경. 백죽각에는 일찍 남편을 잃은 서씨부인을 기리기 위한 열녀 정려비가 있다. 1795년 늦은 봄날, 들판의 보릿골마다 푸르름이 넘실거린다.진달래꽃 진 산자락에서 송화가 희뿌옇게 날리고 개울가에 피어난 창포줄기에도 보랏빛 꽃대가 쏘옥 올라오고 있었다.여느 해 비길 바 없는 풍년을 예견하는 듯 남으로 팔공산을 기대고 있는 군위 효령고을의 산과 들녘은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넉넉하다.누대를 거쳐 효령 오시산 자락에 삶터를 일구어 온 성주 도(都)씨 문중에서는 아침부터 분주했다.문회의 가장 큰 어른인 행촌 도이구가 종택에서 문중의 몇 인사들과 함께 점심을 나눌 약속을 해 놓은 까닭이다.행촌은 사리 분별이 재바른 당질 필구와 함께 종택 사랑채의 서탁을 깨끗하게 닦고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이 든 오동나무 함도 조심스럽게 꺼내 올려놓았다. ◆화원 화가 이명기, 장수도 찰방으로 오다 오찬을 마친 대여섯 명의 문회 인사들 앞에서 도필구가 먼저 말머리를 열었다.“햇감자 조림 맛이 괜찮았습니까?”“괜찮다마다.별미였어.”“그럼 문장(행촌 도이구ㆍ당시 군위향교 전교)을 대신해 제가 먼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우선 지난 단오 때 재종질이 어린 나이지만 향시에 차석으로 입격했으니 이는 우리 문중 모두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도필구는 인사의 말을 집안의 경사로부터 시작했다.그리고 이어 “오늘 문장(도이구)께서 여러 족숙 및 족제들과 함께 문중 일 한 가지를 의논하려 합니다.”“무슨 또 좋은 일이 있소? 어서 말해 보시오.”문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두루마리가 든 함을 조심스레 열며 말을 꺼냈다.모두들 오동나무 함에 공경의 눈빛을 보낸다.“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선대가 내려준 이 그림은 언제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여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문장이 말을 맺기도 전에 종손도 반색하면서 나섰다.“네, 그렇고 말고요. 입향 선조비의 애절하고도 고결한 정절이 담긴 것이 아니던가요.”“그런데 이제 그림이 낡아 희미해져 가니 좀 더 귀한 화사를 모시고 다시 그려 둘까 고심하고 있습니다.”“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할 수 있다면야 더할 수 없는 귀한 일이지요.”좌중에서 누군가가 “어디 청할 만한 화사가 있는가요?” 하고 묻자 도필구가 재바르게 대답하고 나섰다.“네, 마침 도화서 화원을 지낸 이명기가 연전에 장수도(옛 영천 신녕 역참) 찰방으로 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이어서 몇 차례 오고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도이구가 “일전 신녕 환벽정에서 열린 시회를 다녀왔었습니다.신녕 관아에서는 현감을 비롯해 유림과 역리들까지 장수도 찰방이 그림을 잘 그릴 뿐만 아니라 어질고 선정을 베푼다 해 칭송이 자자합니다”며 이명기의 인물됨까지 일러주었다.다시 도필구가 말을 받아서 이었다.“우리 향내에도 장수도의 속역이 있는 터이니 찰방과 만나는 일을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까지 없을 것 같습니다.”“그럼 내킨 김에 당질이 한번 걸음하는 게 좋을 것이네.”문장 도이구가 결론을 짓듯이 말을 맺자 달리 이견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필구는 한결 자신감이 생겨났다.그러나 큰 역도의 수장인데다 더군다나 정조대왕의 어진을 두 번씩이나 그릴만큼 조야에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화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그야말로 화산관 이명기(생몰 미상)는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이다.1791년, 정조 어진 원유관본의 주관화사로 활동하였으며 미수 허목, 강세황, 서직수 등 대신들의 초상화를 도맡아 놓고 그렸던 터이다.이명기는 화가로서 기예뿐만 아니라 뭇화원들이 부러워하는 화원가문의 출신이기도 하다.화원이면서 문관벼슬을 지낸 종수의 아들이요 찰방을 지낸 화원 김응환의 사위다.그런 이명기가 1793년 여름에 장수도역 찰방으로 보직되어 온 것이니 영천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 소문이 널리 퍼짐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명기가 그린 ‘열녀서씨포죽도’ 군위군 효령면 도재홍씨가 소장하고 있는 ‘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서씨를 기리기 위한 그림으로 화산관 이명기의 작품이다.현재 이 그림은 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도필구는 마음을 다잡고 장수도를 향해 집을 나섰다.군위 땅과 신녕의 경계인 화산 자락에도 초여름의 햇살이 제법 길게 내렸다.갑령 고갯마루를 돌아내리니 신녕고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섰다.도필구는 역참이 있는 우물가에 말을 세우고 관가로 들어섰다.찰방의 관헌에는 등자를 비롯한 마구는 물론 김홍도의 원작인 ‘편자갈기’를 모사한 그림 한 점과 꽤 오래 전에 제작된 ‘마의방’의 영인본이 눈에 띄었다.그리다 만 몇 점의 그림과 젖은 붓도 윗목에 놓여 있었다.어렵게 마주한 찰방은 듣던대로 어질고 푸근한 모습이다.묵향을 풍기는 그의 얼굴에서 온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폐문의 입향 선조 할머니의 열녀도입니다.”도필구는 집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온 포죽도의 두루마리를 이명기 앞에 펴 보였다.유심히 살펴보던 화산관 이명기는 순간 그림의 상단에 눈이 멈춘 듯 미동조차 보이지를 않았다.그리고 이내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읍을 하며 공손하게 그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도 석사, 내 눈에는 이 그림에서 성군 세종대왕이 보입니다.삼강행실도에 수록된 귀 선조비 정부인 달성서씨 포죽도(抱竹圖)가 아닌가요. 임금이 앞서서 정의를 장려하고 백세토록 지켜나갈 교훈과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귀문 한 집안만의 영광이겠나이까….”“과찬이십니다.오래 전에 누군가가 ‘속삼강행실도’를 근거로 해서 이 열녀도를 그렸고 그것을 우리 집안에서 쭉 보존해온 것입니다.”‘세종실록’과 ‘속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서씨는 군위 효령의 도운봉과 결혼한 지 5년 만에 남편을 사별한다.서씨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17년 동안 날마다 집 뒤 대나무 숲에 나가 남몰래 대나무를 끌어안고 울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대나무 아래서 흰대나무(白竹) 세 떨기가 솟아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나자 다시 18떨기로 번져났다는 열녀 서씨의 애절한 이야기다. 백죽각 중수기. 열녀 서씨 정려각 입구. 그런 내력을 경상감사로부터 보고 받은 세종대왕은 백죽도(白竹圖)를 그리게 하고 어제시와 함께 정려를 내렸다.충효정, 삼강(三綱)을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서씨의 애모와 이적은 정절의 사표이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화산관 이명기는 두어 달이 지나도록 도필구가 두고 간 두루마리 그림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 보면서 서씨 부인이 간직한 청푸르고 애절한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그리고 마침내 그 본을 근거로 한 폭의 포죽도를 다시 옮겨 그리기로 결심하였다.두루마리로 된 원본과 달리 족자형으로 하고 141.5 X 69.4㎝의 크기의 종이 위에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화산관은 먼저 그림 속의 구도를 상중하단으로 구분하고 상단에 서씨의 남편이 묻힌 묘지 산을 그렸다.군위의 서북쪽에 있는 산을 가까이 잡은 뒤 그 능선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처리하였다.중간단에는 집 뒤의 그리 높지 않은 오시산 기슭에 무성하게 돋아난 대나무 숲과 유유히 흐르는 위천을 앉혔다.그리고 흰옷을 입은 채로 대나무를 끌어안고 강 건너 산을 바라보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서씨의 모습을 담았다.마지막 하단에는 서씨의 살림집으로 여겨지는 기와집을 그려 넣었는데 원근법으로 집을 제법 큼직하게 그려놓고 보니 너무 고즈넉해 보였다.그래서 다시 용마루 왼쪽 끝자락, 그러니까 대숲을 끌어안고 슬픔에 겨워하는 서씨를 바라보는 곳에 치미를 올렸다.치미라기보다는 작은 동물상을 대신 그려 넣어 서씨 부인을 지켜주도록 했다.붓을 놓고도 한참을 들여다보며 서씨의 애절한 마음이 절로 감정이입하게 된 화산관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강 그리고 울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푸른빛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서씨의 고조된 슬픔을 절절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상단에 중모기(重摹記) 까지 썼다.포죽도를 다시 그리게 된 까닭과 심정을 세세히 적어놓고 싶었던 것이다.도필구로부터 두루마리로 된 포죽도를 받고 보니 세종대왕의 시까지 게재되어 있어 공경한 마음이 한량 없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우게 한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도씨 한 집안만의 영광이겠는가/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다/ 아 훌륭하여라…/ 절의가 깊은 도씨 집안의 일에 나도 동참할 수 있어 영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열녀서씨포죽도’는 ‘속삼강행실도’를 근거로 누군가가 그려 놓은 것을 다시 화산관 이명기가 중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림은 곧 시다.또한 이야기다.서씨의 정절을 담은 ‘열녀서씨포죽도’를 그린 화산관 이명기는 그림으로 못다 한 것을 문장과 시로 말하고 있다.그래도 남은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국학진흥원 보관) 효령면 성2리의 도재홍씨와 도병관씨가 이어가고 있다.두 분은 하나 같이 서씨부인의 정려각(백죽각)과 함께 포죽도가 문화재로 지정돼야 그 이야기의 사회적인 힘이 될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단아한 모습으로 성리학 세계관 품어…김계행 선생의 고고한 선비정신 생각나네

안동시 길안면에 있는 묵계서원.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서 정면에 보이는 읍청루는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을 지닌 2층 누각이다. 구불구불 휘어진 아름드리 노송들이 서있는 사이로 사당인 청덕사가 보인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용어가 있다.2006년 특허청에 등록된 브랜드이다.21세기 안동만이 갖고 있는 정신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그 단어 속에는 선비정신을 계승 발전한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안동이 많은 서원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등록을 위한 하나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위대한 선비가 있으면 후학들은 그 정신을 이어받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한다.전통한옥의 형태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선비들의 드높은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서원이다.안동 묵계서원은 길안면 묵계리에 있다.가는 길은 안동에서 영천 방향 국도로 가다가 길안면사무소 네거리를 지나 5㎞가량 지나면 닿을 수 있는 강변 드라이브 코스이다.대구에서는 얼마 전 개통된 영덕~당진 고속도로 동안동IC에서 내리면 지척이다.그곳은 원래 거묵역 또는 거무역이라 하다가 1500년(연산군 6년)에 보백당 김계행이 머물게 되면서 묵촌으로 개칭하였다.그 후 그가 부근에 정자를 짓고 냇물이 잔잔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묵계로 바꾸었다고 한다.영남 사림의 발의로 1687년(숙종13)에 세워진 묵계서원은 김계행 선생과 세종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응계 옥고선생을 배향하고 있다.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광풍에 훼철되었다.그 후 1925년 일부가 복원된 후, 1998년 완전복원 되었다.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1980년)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묵계서원은 길안천이 앞으로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 임수형의 농촌 마을 옆에 자리 잡고 있다.주변이 멋진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숲길을 잠시 오르면 단정한 서원건물이 나타난다.평생을 대쪽 같은 삶을 살았던 청백리의 표상인 선비의 기상이 느껴진다.정문인 진덕문을 지나면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을 지닌 2층 누각 읍청루가 길게 가로로 서있다.선비들이 시문을 짓고 담소를 나누었던 누각이다. ◆지조 지킨 고고한 선비정신 충절을 지킨 정신을 기린다는 읍청의 의미를 새기며 고개 숙여 그 아래를 지난다.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묵계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당 입교당이 보인다.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 건물로 가운데 6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서원의 기숙사 역할을 하는 부속건물 동재도 배치되어 있다.그 앞에는 해마다 춘분 무렵 붉은 꽃을 피운다는 홍매화 나무가 서있다.맨 위쪽에는 낮은 기와 담장으로 둘러쳐진 묵계서원 사당인 청덕사가 자리 잡고 있다.늦가을 오후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대청마루에 앉으니 길안천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남쪽으로 바라보니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읍청루가 한옥의 아름다운 공간미를 보여주고 있다.소문난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의 모습이 연상된다.서원은 앞이 낮고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전저후고의 경사지에 자리 잡았다.앞으로 탁 트인 경관을 서원 영역으로 끌어들이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그래서 자연 순환체계에 거슬리지 않고 주위의 산천과 조화를 이룬다.건물들 자체는 장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절제되고 단아한 모습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건축배치와 그 공간으로 응축시키고 있다.잘 다듬어진 토담을 따라 서원 뒷편 언덕을 오른다.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아름드리 노송들이 구불구불 휘어진 자태로 서원 전체를 감싸고 서 있어 솔향기가 가득하다.사당을 바라보며 이곳에 배향된 보백당 김계행 선생을 생각한다.그의 본관은 안동이며 마흔아홉의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해 쉰이 넘어서야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그러나 점필제 김종직과 교분이 깊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심한 고초를 겪었다.연산군 시절에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왔다.선생의 고결한 자세는 고고한 선비정신이라 불리는 정신적 토양으로 널리 전파되어 승화됐다.그는 청백과 강직으로 일관한 삶을 살면서 90세 가까운 나이까지 장수했다.세종 조에 태어나 중종 때까지 여덟 임금이 바뀌는 동안 삶을 살았다.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봐서 지금이라면 백수를 넘긴 나이라고 볼 수 있다.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장수비결을 물으면 몇 가지 조건 중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선생은 강직했으므로 곳곳에 적이 널렸고, 청렴했으므로 사욕을 누리려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성품이 고결한 선비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파직을 당하고 곤장을 맞았으며 복직됐다가 다시 투옥되기를 반복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향한 후 자연 속에서 계속 학문을 연마하며 천수를 누린 그의 노후 생활은 어떠했을까.보백당 김계행은 만년에 속세를 잊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기 좋은 산속 너럭바위 밑에 자리 잡은 만휴정이라는 정자에 늘 머물렀다고 한다.묵계서원 앞을 흐르는 길안천을 건너면 바로 지척에 보인다.198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지정된 이 정자의 규모는 날렵한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집이다.앞쪽 전체를 모두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하였다.이는 만휴정 앞 계곡 아래로 펼쳐진 반석과 흐르는 물, 주위의 멋진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다.폭포와 계류, 산림경관 등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안동 만휴정 원림’이라는 명칭으로 2011년 8월 대한민국의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사랑받는 관광지로 거듭나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만년에 휴식과 학문연구를 위해 머물렀던 만휴정과 외나무 다리. 최근 드라마의 무대가 되면서 방문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만휴정이 얼마 전부터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젊은 방문객들로 넘쳐나고 있다.주변의 수려한 경관으로 그동안 몇몇 드라마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특히 최근에 끝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TV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대사가 잠시 유행어가 되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정자 앞 계곡에 걸려있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그 장면을 연출하며 사진을 찍는다.주말이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다리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고 있다.따라서 계곡 입구에는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하천 건너기 전에 차를 세우고 가볍게 산책하는 것이 좋겠다.그 옛날 보백당이 노후의 휴식과 학문을 닦기 위해 자리 잡은 공간이 미디어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는 새로운 명소가 된 것이다.만휴정 오른쪽 계곡에서부터 구불구불 태극 형상으로 힘차게 흘러 내려오던 물은 정자 앞에서는 완만한 경사를 타고 소리를 죽여 조용히 흐른다. 선생은 이 계곡을 묵계라고 이름 지었다.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오직 보물은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보백당이라는 선생의 호도 여기서 나온 듯하다.후손들에게 주는 이 글귀는 현판으로 새겨져 걸려있다.그 옆으로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身 待人忠厚) 즉 자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히 하며 남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후덕하게 대하라라는 내용도 함께 있다.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에서도 사진을 찍는다.그 의미를 안다면 한 가지 교훈은 얻어 가는 셈이다.다만 가까운 곳에 있는 묵계서원은 만휴정 보다 방문객이 적은 듯하다.보백당은 말년에 자손들에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를 구제할 수 없었으니, 내가 죽거든 장례를 갖추지 말고 명문(銘文)을 지어 비석도 세우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또 “착한 행실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라고 했다.그러나 그를 흠모하는 조선 중기의 선비 이광정은 김계행의 묘갈명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구십의 고령으로 임천에 살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관찰하였도다.오직 청렴하고 결백하라고 물려준 교훈에 자신은 부끄럽게 여겨 묘소를 꾸미지 못하게 하였도다.비명없는 작은 무덤은 대부(大夫)의 묘소가 아니도다.세대가 오래되어 많고 많은 자손들 그 사적을 기재하려고 생각하였도다.명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사치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며 공의 뜻을 바로 새기는 것이도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신 돌아보라”…중년의 궁시장이 되뇌는 ‘집궁제원칙’

김병욱 궁시장은 10월18일 경북도로부터 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받았다.경북도는 그가 전통성을 이어받은 죽시 제작 기술과 우수한 기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궁시장으로 선정했다.김 궁시장이 제작하는 죽시는 직선도가 오래 유지되고 명중률이 높아 전국 궁 도장에서 인기가 높다.이무열 기자 lmy4532@idaegu.com 화살 재료들이 가득한 공방. 포항시 북구 항도길, 좁은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낮은 기와집, 그의 공방에서 김병욱 궁시장을 만났다.1962년생, 생각보다 젊은 중년이었다.무형문화재라면 의레히 주름진 얼굴에 수염을 기른 연세 지긋한 분이리라는 나의 선입견이 빗나갔던 것이다.경상북도는 지난 10월18일 전통기능전수자인 그를 도무형문화재 44호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축하의 인사를 건네자 겸연쩍어 했다.문화재로 지정 받으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 궁금했다.지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도 엊그저께 일이고, 아직 문화재 지정서도 받지 않은 상태여서 마음만 무거울 뿐 어떤 혜택이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궁시장(弓矢匠)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궁시장은 활을 만드는 궁장과 화살을 만드는 시장으로 나뉘는데 김병욱 궁시장이 하는 일은 대나무로 만든 화살, 즉 죽시(竹矢)를 만드는 일이었다.1979년부터 전통 화살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1981년 죽시 공방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무형문화재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40년이 다 되도록 돈도, 명예도, 권력도 되지 않는 일에 한눈팔지 않고 전념해 온 그의 삶에 대한 마땅한 보상일 것이다.그가 만드는 죽시의 우수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직선도가 오래 유지되고 명중률이 높은 것이라고 했다.공방에는 강원도 고성에서 찬서리와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2~3년생 시누대가 완성된 죽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공방 여기저기 서 있기도 하고 누어있기도 했다.시누대, 꿩깃, 화살촉, 오늬 등으로 만드는 죽시는 화살의 생명인 살대를 고르는 일, 고른 살대를 불에 구워 강도와 색깔을 내는 일, 활줄을 끼울 오뉘와 깃을 다는 일 등 제작 과정이 까다롭고 정교해서 적어도 133번의 손이 가는 작업이라고 알려져 있기까지 하다.“좋은 화살이란 결과적으로 명중률이 높은 화살이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활의 강약과 화살의 강약이 잘 맞아야 합니다.궁사가 잡은 활의 세기에 따라 화살을 맞추어야하기 때문에 제가 하는 일은 궁사의 주문에 따라 화살의 세기를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요.” ◆신념과 내조로 일군 전통문화 계승 전통방식으로 제작되는 화살촉은 둥근 촉으로 대나무(죽시)에 장착된다. 김병욱 궁시장 공방 한켠에 세워놓은 화살. 화살 깃인 ‘치우’를 난로에 말리고 있다. 그가 하루에 만드는 화살은 6~7개 정도, 10개에 35만원을 받는다고 했다.아내의 헌신적인 내조 없이는 생계의 해결마저 어려운 이 일을 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가 태어나 자란 영일군 유광에는 큰 죽세공장이 있었다.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화살을 만드는 일이 먹고 살기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 첫발을 딛게 된 이유였다.죽세공장에 화살 재료를 구하러 온 김종국 선생과 인연이 되어 그의 문하에서 전통 화살 제작술을 익히기 시작했다.부모님과 잠시 헤어져 할머니 밑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불과 3~4년 동안이었지만 그 기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었다며 말끝을 흐렸다.공방 벽에는 조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했다.청소년기에 그가 겪은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던 날들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저간 사정을 묻지 않았다.“전업도 마땅치 않았고,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까 이제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이 들어요.”현재 우리나라의 국궁 애호가는 10만 명 정도에 이르지만 전통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전국에 걸쳐 고작 10여 명, 만들기 손쉬운 개량형 화살인 카본화살이 전국 활터에 보급되면서 전통 죽시는 거의 사멸에 이를 만큼 그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그럴수록 그는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무기인 죽시의 전통을 이어가야한다는 사명감,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이러한 그의 마음가짐에는 그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아내의 격려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두 딸의 성원이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대를 바로잡는 교죽과 불에 구워 색을 내는 염들이 기술은 다른 장인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그가 안내한 다른 방에는 찾아오는 어린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된 역사의 손때 묻은 활과 화살이 진열되어 있었다.그는 편전(片箭)과 통아(애기살을 쏠 때 쓰는 반으로 쪼갠 나무 대롱. 덧살이라고 함)를 가리키며 우리 국궁의 우수성과 민족의 지혜를 자랑스러워 했다.편전(애기살)은 조선시대 최고의 무기로 평가 받은 핵심병기라 했다.화살은 애기살처럼 짧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멀리 날아가는 파괴력이 아주 강한 화살이라며 적진을 향해 편전을 쏘는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전통 궁시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중국이나 일본의 궁시는 우리 것을 따라오지 못해요. 일본 활은 크고 화살도 길어 말 타고 할 쏘기가 불가능하지요. 교죽도 제대로 안된 상태이고 화살의 중심도 안잡혀 있지요. 중국 것은 싸리나무로 만들어 무겁기 때문에 우리 화살 비거리의 절반도 못가지요.”사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활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조선조의 경우 각궁이라 하여 무소의 뿔과 다양한 소재의 재질로 활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활을 만들기도 했다.중국은 창, 일본은 검, 조선은 활로 인식될 만큼 우리의 전통 활은 그 특유한 형태와 능력으로 동양 삼국 중 으뜸가는 병기였다.우리 민족은 활을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고 해서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리지 않았던가.먹고 살기 위해 17세에 죽시 만들기를 시작한 날로부터 2018년 오늘, 도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에 이르기까지 40년의 긴 세월 동안 그는 숱한 애환을 겪었을 것이다.자신이 만든 화살로 사섭대회에 장원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사섭대회에서의 장원이란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무과에 급제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아버지의 유언이라며 4년이 지나서야 죽시 스무 개의 값을 들고 찾아온 어느 사두(사정射亭의 우두머리)자녀의 떨리는 목소리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명궁칭호를 받은 어느 궁사가 주문한 죽시를 개량시처럼 빨리 제작해주지 않는다고 “너 아니면 죽시 구할 데 없는 줄 아느냐?”고 소리치던 딱한 사태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했다.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은 쓸만한 제자를 만나 죽시 전통을 이어주는 일이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신을 되돌아보라 죽시 제작술을 배우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은 자기가 쏠 화살을 만들고 싶은 궁사들 뿐이어서 평생해도 모자랄 일을 6개월에 끝내려 하니 기막힐 따름이고, 전통 궁사에 대한 정책의 우선 순위가 잘 보이지 않는 뒷자리이고 보니 누가 힘든 이 일을 등에 지려 하겠는가 안타까워했다.그래서 목마른 그는 자주 초등학교를 찾아 활쏘기 체험교실을 연다.국궁의 재미와 우수성을 알려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도록 “모든 국민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ㆍ발전시켜야 한다”는 ‘문화유산헌장’을 가르치기도 한다.야구 선수가 커브를 던지듯, 화살이 뒤에 숨은 사람의 얼굴을 맞추는 국궁의 비밀을 일러줄 때 반짝이는 그 눈빛, 전통 궁시 전승의 희망이 어쩌면 거기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참으로 고독하게, 전통 궁시의 등짐을 지고 사는 무형문화재 김병욱 시장(矢匠)의 바람은 의외로 소박했다.그 숱한 지자체 문화 행사 때 전통 궁시를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부스 한 칸 마련해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前推泰山 後握虎尾 (활을 잡는 손은 태산을 밀듯 하며 시위를 당기는 손은 호랑이 꼬 리를 잡듯이 하라)發而不中 反求諸己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그의 공방 벽에 붙어있는 집궁제원칙(執弓諸原則)이다.‘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활의 가르침이 편전(片箭)처럼 가슴에 꽂혔다.어찌 이 가르침이 활쏘기에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갈색 적삼 걸친 목조각장 자신과 닮은 불상 어루만지며 “세월 가는대로 흐르듯 왔지요”

올해 10월 경북무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된 조병현 목불명장은 1970년 목조각에 처음 입문해 40여 년간 불교조각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조 명장 작품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뛰어난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이무열 기자 lmy4532@idaegu.com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채 연꽃을 쥐고 있는 관세음보살상. 영천시 청통면 새학길 62. 지난 10월18일 경북무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 받은 목조각장 조병현의 집이다. 문패는 물론 공방을 알리는 현판이나 길을 안내하는 입간판마저 따로 없다. 마을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찾아간 그 집 앞에 이르자 순간 발걸음이 머뭇거려진다. 불그레하게 물든 담쟁이덩굴과 활짝 피어난 보랏빛 나팔꽃 줄기로 뒤덮인 지붕과 벽이 동굴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마을 동쪽 끝자락에 선 이 동굴 같은 50평짜리 한 칸이 목조각장 조병현의 공방이자 살림집이다. ◆나무토막의 변신, 그 재미를 좇아 50년 지옥에서 고통 받은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 목조각. 공방 한쪽 끝에 28번째 보리달마(달마대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공방이 어지럽다. 크고 작은 나무토막과 전기톱을 비롯한 다양한 공구들 그리고 겨울 화로와 깎아내린 나무의 속살들. 나무에서 풍겨나는 목향이 방안의 너즈레함을 덮어준다. 완성된 두어 개의 목조각 불상이 눈에 띈다. 짙은 갈색 적삼을 걸치고 평상에 선 달마대사의 길게 늘어뜨린 법의에 옷주름이 선명하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나한불 목각 하나가 그 옆에서 새로 조각하고 있는 조병현의 손놀림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목조각장 조병현은 파내던 칼질을 멈추고 찾아든 방문객에게 둥글게 자른 통나무 둥치를 내밀면서 앉으라 권한다. “지금 조각하고 있는 것도 불상입니까?” “네, 그렇고 말고요. 나는 불상 이외에 다른 조각은 할 줄 모릅니다.” 명장은 어슴프레 윤곽이 드러난 불상의 머리 부분을 쓰다듬어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구렛나루로 얼굴을 온통 뒤덮은 초로의 조 명장, 그는 자신을 닮은 듯한 얼굴선의 불상을 놀이감처럼 만지고 깎으며 마음에 담은 형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미소가 닮았어요. 조 명장님의 분신인 듯도 하고….” “글쎄요. 나는 오로지 조선 후기 불상 조각 양식을 이어나가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고유한 예술 의지를 키워나가는데 만족합니다.” 조 명장은 말을 아끼 듯 아니면 방문자의 말문을 막으려는 듯 한 마디 덧붙인다. “별 이유는 없지만 그저 인연따라 긴 세월 그렇게 살아온 것이지요.” 소년 병현은 맏형이 너무나 부러웠다. 경기도 양평,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별다른 놀이감이 없었다. 그래서 헛간채 밖에 땔감으로 널부러진 장작개비를 채곡채곡 쌓았다 허물었다 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톱으로 썰어보기도 하고 자귀로 나무 속을 홈처럼 파 보기도 하였다. 가지런하게 포개어 올린 장작더미는 마치 흙담을 쌓은 둣 매끈하였고, 톱으로 켠 나무 토막은 일정하게 잘라 놓은 절편 같았다. 형은 톱과 끌 등 몇 개의 연장으로 무엇이든 잘도 만들어냈다. 지게며 함지며…. 형이 만든 것들은 모두 농가에서 편리하게 사용되는 물건이 되었다. 한번은 적절하게 마른 소나무를 잘라 속을 파내고 다듬어 마치 큰 박을 갈라놓은 듯이 알곡을 담을 수 있는 매끈한 나무 바가지를 뚝딱 만들어냈다. 아궁이에서 재가 되고 말 어줍잖은 나무 토막들이지만 형의 손을 거치면서 변신한 그 모습들이 어린 병현의 마음을 현묘하게 끌어 당겼기에 병현도 눈만 뜨면 나무토막을 만지고 놀았다. “얘들아, 너희는 타고 난 손재주가 있나보다.” “어머니, 병현이는 어리지만 저보다 더 잘 합니다.” “그래, 둘다 솜씨가 좋구나!!” 병현의 형은 다만 겸양과 칭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무토막에 대패질과 끌질을 하는 자신을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병현이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터이다. 나무를 켜고 쪼개고, 깎고 결을 파내는 일에 몰두하던 형을 따라 병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치 화가의 모사 단계처럼 그렇게 초보 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비릿하면서 향긋한 내음과 따뜻하고 촉촉한 질감을 주는 나무 위에 내 손길이 모아지면 순간 하나의 쓰임새 있는 물건으로 바뀝니다. 나는 그 변신이 끌어당기는 호기심에서 도망쳐 나오지를 못했지요. 나무를 만지는 일은 어린 내가 폭 빠질 만큼 재미가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가야할 나이가 되었지만 공부는 뒷전으로 멀리 밀쳐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다 열다섯 살이 된 병현에게 아주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서울에서 이름 난 목공장인 김성수 선생(타계·노년까지 목조각 교육에 헌신)이 양평으로 내려와 목공 학원을 낸 것이다. 병현은 중학교 진학 대신 그 목공학원을 찾아 목조각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목불상의 태줄받이, 명장의 손목 나팔꽃 줄기로 뒤덮인 지붕과 벽이 동굴을 연상케 하는 조병현 목불명장의 공방. 작업실 입구에는 문패는 물론 공방을 알리는 현판이나 입간판 하나 없다. 조각은 오로지 손으로 한다. 명장은 손을 혹사(?)시킨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그의 손은 목불상을 받아내는 태받이 손이기에 신비롭고도 숭고하다. 불상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손이라 할 만하다. 조병현 명장의 손바닥엔 차돌처럼 단단한 굳은살이 깊게 배어있다. 50여 년 동안 끌과 조각칼을 잡은 아름다운 흔적이요 훈장이리라. 명장의 손놀림은 쉼이 없다. 원목은 큰 톱으로 켠다. 그후 잘라 낸 나무토막의 쓰임새를 재단하고는 다시 작은 톱으로 켠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의 끌과 조각칼로 나무결을 밀고 당겨서 각(角)을 없앤다. 그것이 조각의 시작이요 끝이기도 하다. 사포질을 하듯이 칼로써 불상의 몸매를 매끈하고 부드럽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조병현 명장은 늘 현재의 순간이 곧 시작이라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이제부터 나만의 세계를 더 천착해 나가야지요.” “명장이 추구하는 ‘나만의 세계’를 한번 엿들어 봐도 될까요?” “사실 초심자일 때는 하나의 목불상에 온갖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불상이 걸친 옷의 주름과 매듭의 정교함은 물론이고 다양한 수인(手印:불상의 손의 모양)을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기교를 부렸지요. 한 각 한 각을 뜨내는 데 숨가쁘게 매달렸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훨씬 단순해졌습니다. 선이 굵어졌다 할까요, 각의 숨을 느리게한다 할까요. 나의 귀착점은 곧 조선불을 조각하는 것입니다. 조선불상은 장식이 화려하지 않고 표정도 그리 환하지 않지만 그 수수함과 소박함에서 오히려 친근함을 느끼게 합니다. 예컨대, 법의의 주름 넓이라든가 채색의 단조로움 그리고 미소를 잃지 않고 현세를 극복해 나가는 단순하고도 강인한 겉모습이 그러합니다. 기교가 없는 것이 매력이지요. 나는 끊임없이 그런 불상을 내 조각칼로 다듬어 내고 싶습니다.” 조각칼을 잡을 때마다 조명장은 붓다의 거룩한 얼굴을 시대상황에 맞게 재현해보리라 다짐한다. 둥글고 밋밋하지만 턱과 빰에 약간 살이 오른 얼굴 형상에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로 하고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게 조형한다. 입은 콧망울보다 조금 넓게 표현하면서 꼭 다문 모습으로 그리고 양쪽 입술은 살짝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그는 밑그림이 없는 목조각을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밀고 당기는 칼질을 멈추지 않는다. 불상에는 시대정신과 부처님을 향한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투영되기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 이렇게 불상을 고집하는 조 명장의 조각 세계이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다거나 자기만족으로 정체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맥주캔 같은 향긋한 나무 조각통 한 개를 집어 들어 보이며 “감실불(龕室佛)입니다”하고 내민다. 20㎝ 높이에 지름이 70㎝ 정도의 원형의 전단나무 통을 열자 고유한 나무향이 풍겨났다. 촘촘하게 목불이 새겨진 세폭병풍 양식이다. 가운데 약사여래불을 비롯하여 좌우에 10대 제자불과 12위의 신장불을 새기고 법당 내의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여래불과 보살 그리고 나한들의 표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신구이다. 감실불은 그 섬세한 조각미가 으뜸이지만 실용성도 빠지지 않는다. 바랑이나 핸드백에 넣어 휴대하기에 알맞은 크기의 감실불은 산승이나 재가 불자들이 여행할 때 사용하는 휴대불이기도 하다. 조각의 이력이 깊어갈수록 단순미를 좇는다고 하던 조 명장의 작품세계와 전혀 다른 양식을 만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정체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명장의 면면을 볼수 있었다. 다듬다 만 불상 앞에 다시 앉은 조 명장은, 영조시대 도화서의 화원이자 스님이던 의겸에서 비롯된 조선불화의 맥을 김일섭과 임석정 스님이 이어갔고 그리고 자신이 사숙한 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송헌 전기만이 그 뒤를 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송헌의 수제자이자 현재 전수조교로 있는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후계자를 기르고 싶다던 그에게 곧 인연이 닿는 젊은이가 찾아 들 것이라 기원해 주며 하직인사를 나누었다. 공방문을 나서는 방문자의 등 뒤로 유정 조병현 명장의 초승달 같이 굽은 조각칼 미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건조된 나무살을 깎아내는 소리가 마치 단감을 깎는 소리인냥 정겹기 그지 없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오른손 내밀면 돌격 동채 떨어지지 않게 지켜라”…수백 명 겨루는 모습 장관이네“

차전놀이 장면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 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 현존하는 차전놀이 장면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 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 안동 차전놀이의 가장 중요한 준비는 좋은 참나무를 구하여 동채를 제작하는 일이다. 당당하고 씩씩하며 호탕한 민속놀이가 경상북도 안동에 있다.용감하게 상대편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고 지혜롭게 대결한다.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싸워야 하며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화랑의 고장에서 그 상무정신을 계승했으므로 당당한 모습이다.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 ‘안동 차전놀이’이다.최근에 끝난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벌 행사장에 위치한 안동차전놀이 보존회 사무실을 찾았다.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이재춘 차전놀이보존회 회장은 “지난 2일 국제탈춤 행사기간 중 탈춤공원 놀이마당에서 정기발표를 한 것이 가장 최근의 공연이었다”고 했다.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차전놀이 전수관이 협소하여 내년에는 2층으로 증축할 예정이라고 한다.수백 명이 운집하는 민속놀이이므로 상설공연을 할 수가 없다.그래서 영상을 통해 방문자들이 언제나 차전놀이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현재 전수관 내부에는 차전놀이 공연에 사용되었던 거대한 동채들이 공간을 메우며 전시되어 있다.벽면에는 그동안 발표했던 중요한 공연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사진들이 가득 걸려 있다.빛바랜 흑백사진들도 눈에 띈다.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이 담긴 귀한 사진이다.현존하는 차전놀이의 장면을 촬영한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이다.안동 차전놀이의 역사도 길고 그동안 엄청난 공연실적을 남겼다.이제 그 기록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아카이브 부분에도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민속놀이 안동 차전놀이가 생긴 기원을 보면 향토사기 영가지, 대동운부군옥 등 몇 가지 차전놀이에 관련된 기록이 있다.1천여 년 전 후삼국시대 고려 왕건과 백제 견훤이 안동에서 전투를 치른 후부터 시작된 놀이로 나온다.전설에 의하면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이 되어 안동 땅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결전을 하게 되었다.이때 권(權)ㆍ김(金)ㆍ장(張)씨의 세 장군이 있어 왕건 편을 들었고, 안동사람들은 견훤이 지렁이임에 착안하였다.낙동강에 소금을 풀어 짜게 만든 다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어깨로 밀어 견훤을 낙동강에 빠지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왕건은 자기를 도와준 세 장군을 삼태사(三太師)라 부르며 그 충성을 치하하였다.그 뒤 이 승전을 기념하여 동채싸움 즉 차전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1608년 14대 선조는 이 놀이의 정신을 가상히 여겨 계속되기를 염원하여 노력해 왔다.임만휘(1783~1834)가 지은 만문유고(晩聞遺稿)에 실린 ‘차전(車戰)’이라는 시는 18세기 임하면 금소리에서 전승된 차전의 모습을 담고 있다.솟구쳐 오를 때엔 새매가 나르는 듯/ 한바탕 버마재비짓에 바람이 뒤따르고/ 겹겹의 사람 숲엔 달빛이 비추이네/ 서북편이 이겼는가 개선소리 놀랍구나/ 골골의 장정들이 춤추며 돌아가네// 시의 내용을 보면 차전놀이가 전개되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1922년 안동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관심 속에 동ㆍ서로 관공서를 양분하여 지금의 안동역 터에서 놀이를 했었다.싸움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마침내 투석전으로까지 번져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이유로 동채싸움을 금지시켰다.그 후 지역민들의 수차에 걸친 요구에도 불구하고 금지했던 일제는 1936년 3월 경북선 철도 개통에 즈음하여 한편의 참여 인원을 50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동채싸움을 허가했다.인원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참여한 이 차전놀이는 동채가 등장하기도 전에 앞머리 꾼들의 싸움이 벌어져서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막을 내렸다.이후 북후면, 임하면 등에서 가끔씩 열렸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승이 단절되었다. 단절되어 있던 민속놀이를 1960년대 재현한 고 김영한 초대 예능보유자가 원로들과 함께 찍은 당시의 사진. 1966년이 되어 안동중학교 학생 300여 명이 고 김명한(안동차전놀이 초대 예능보유자)의 주선으로 재현하게 되었다.그 해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1968년 대전에서 개최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다시 출전하여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이재춘 차전놀이보존회 회장이 거대한 동채의 머릿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1969년 1월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는 이재춘씨가 지명됐다.지금은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존회가 설립돼 보존과 계승을 하고 있다. 서울시민의 날에 570명이 참가하여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선보인 시연.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 후 1970년부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비롯 각 학교,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 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각종 행사에 시연되거나 발표되고 있다.지난 2002년 서울시민의 날에는 570명이 참가하여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연, 서울 시민들의 환호성을 받기도 했다.수많은 해외공연 중에 2000년 5월31일 독일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인 ‘하노버 EXPO2000’에 아시아 대표로 초청됐다.이 행사에는 지역민 3백여 명이 직접 참가해 시연했다.2003년 하와이 공연을 비롯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되는 ‘제15회 한인문화의 날’ 행사에 초청돼 해외공연을 했다.지난 4월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도 초청됐는데 현지교민 300명이 동채를 어깨에 메고 출연했다.이제는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민속놀이가 됐다.안동 차전놀이는 원래 놀이 도구가 큰 지게 꼴로 생겼으므로 ‘동채싸움’, ‘동태싸움’이라고 불러왔다.우리나라 다른 지역에도 동채형 놀이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안동의 동채놀이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세계에서 전쟁과 승리에 연관된 민속놀이로는 안동차전놀이가 유일한 상무정신이 깃든 놀이로 인정되고 있다.힘으로 대결하여 승리를 차지하는 놀이로 끌어오면 이기는 줄다리기와는 정반대이다.차전놀이는 상대편을 밀어내고 동채를 찢거나 땅에 떨어뜨리면 이기는 놀이다.한 팀에 수백 명씩 힘을 합세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협동 단결심이 강한 놀이다.특히 안동차전놀이는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진 민족혼이 담긴 국보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당당하고 호탕한 놀이 안동 차전놀이의 준비과정 중 하나.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 거행 여부를 의논하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한다. 추수가 끝나면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서 차전놀이의 거행 여부를 의논하는 차전놀이의 준비과정이 시작된다.먼저 도감과 대장을 뽑는데, 이들은 대개 차전놀이의 경험이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추대된다.가장 중요한 준비는 참나무를 구하여 동채를 제작하는 일이다.적당한 나무가 발견되면 곧 금색을 치고 신성을 표시하여 부정과 잡귀를 막고 그 고을 현감에게 보고하여 보호를 요청한다.제작된 동채 행렬이 안동으로 진입하면 연도의 촌락마다 많은 사람들이 맞이한다.근교에 이르면 원로과 주민들이 도포차림으로 영접에 나간다.놀이장소는 정월대보름 무렵이어서 농작물이 없기 때문에 넓은 보리밭이나 낙동강변 백사장에서 거행된다.수백 명씩 편을 짜게 되고 응원하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수천 명이 모이게 되므로 이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싸움에 참가하는 인원은 정해진 것이 없다.편가르기는 안동을 동서로 갈라 편성하는데, 거주지 위주가 아니라 태어난 곳 위주로 하기도 한다.양편의 동채가 놀이판으로 들어오면 싸움을 시작한다.먼저 머리꾼들의 밀어내기가 격렬하게 전개된다.양편은 오랜 시간 동안 수백m씩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친다.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 왼손으로 끈을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한다.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약속된 수신호를 이용해 지휘한다.오른손을 앞으로 저어 내밀면 전진의 신호이고, 오른손을 뒤로하면 후퇴의 신호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이다.수백 명이 동시에 회전하는 장관이 펼쳐지고 동채가 하늘로 치솟는 이 모습이 안동 차전놀이의 특징이다.접전 끝에 한쪽의 동채가 땅에 떨어지면 승부가 결정된다.패한 측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원통해하고 승자는 함성과 함께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이 까맣도록 던져 올리며 승리를 자축한다.뜯어낸 동채의 부품은 나누어 메고 ‘월사 덜사’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밤늦도록 거리 곳곳을 누빈다.이처럼 안동의 차전놀이는 당당하고 호탕한 놀이이다.용감하게 상대편을 파헤치고 들어가 대결하는 동시에,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싸워야 하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동채를 메다가 어깨살이 벗겨지기도 하고, 상대편과 부딪치며 부상을 입기도 한다.그래도 모두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안동지역이 떠들썩하도록 이런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같은 전통문화의 저변에는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뚝심 있게 한 길을 걷는 사람들,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안동 차전놀이 보존회에는 예능보유자 외에도 두 명의 전수조교를 비롯, 많은 이수자와 전수생들이 지금도 자신의 생애를 바쳐 노력하고 있다.상무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이즈음 이들의 정성은 더욱 귀하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편안한 하루하루 누구 덕일까…한쪽 눈 뽑히는 고문 당하고도 끝끝내 싸웠던 의병대장 있었지

1908년 8월 17일 대전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의병장 노병대 체포에 관한 문서. “노병대(1856~1913)선생의 항일행적에는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쪽 눈을 빼어버리는 혹독한 고문에도 초지를 꺾지 않고 항거했다는 점이고, 셋째는 항일의 표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입니다.”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 열사’를 편찬한 상주문화원장 김철수 박사의 설명이었다. 노병대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것도 다 노병대 선생 같은 분이 나라를 지켜준 덕분이라며 상주가 낳은 인물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김 박사는 “선생이 남긴 글이나 문서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소실돼 선생의 생애를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노병대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 선생의 아우, 후재 노극신 선생의 13대 주손으로 1856년 12월4일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재조(才操)와 기국(基局)이 범인과 달라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며 성장했다.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의 행적은 존성상현(尊聖尙賢)하려는 유학자로서의 자세와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대장으로서의 활동으로 요약된다. 1895년 선생은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고 1898년 정월 허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진사 허운과 함께 도움을 청하러 중국 곡부를 찾아간다. 사람을 시켜 성묘(聖廟)일을 고했으나 공자의 72세 손 연성공은 병을 핑계 삼아 나타나지 않는다. “부자(夫子)의 가학(家學)이 어찌 이토록 오만하기에 이르렀는가?” 선생은 편지로써 연성공의 무례함을 꾸짖는다. 선생의 기개에 놀란 연성공은 사과를 하고 옛 친구처럼 맞아 수 십 편의 시(詩)를 주고받으며 교유한다. 연성공의 편지를 받아 조정과 태학(太學)에 전했지만 향교 향사의 회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림의 법도를 지키려는 선생의 발걸음은 멈춤이 없었다. 호남지방에는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을 정도로 당시 향교 부근에는 범장(犯葬)된 묘가 많았다. 선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해 모두 옮겨가도록 한다. 이렇듯 선생은 유학자로서 반듯한 자세와 숭고한 정신은 철저한 것이었다. 나라 안의 일을 나라 밖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는 자세나 향교에 대한 배타적 존중에 대한 옮고 그름에 대해 살피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학자로서 선생은 주자주의에 눌러앉은 공리공론의 관념론자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고종으로부터 밀조 받아 노병대선생과 500여 명의 의병들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던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전투를 벌인 후 의병들은 상주로 철수했다. 선생의 의병활동 일지의 대강은 이렇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참정대신 민영환은 자결하고, 지사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황성신문에 발표한다. 조야는 물끓듯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노도처럼 일어난다. 선생은 북향통곡하고 상경해 전 판서 이용원을 만난다.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를 하겠다”고 간청한 끝에 선생은 고종 임금으로부터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비서원 비서승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를 받는다. 1907년 8월20일 해산된 진위대 2백여 명을 규합, 속리산 계곡에서 창의한다. 해산병 수백 명이 추가로 합세해 의병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른다. 선생의 의병대는 충북 보은에서 적 2명을 사로잡고, 청주 미원에서는 5명의 적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린다. 적의 공격을 피해 상주 청계사로 진을 옮겼으나 적병의 급습을 받아 진영을 미원으로 옮긴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경북 성주, 경남 안의, 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투쟁을 하다가 거창의 우두령에서 크게 패한다. 속리산으로 귀환했을 때 남은 의병은 겨우 50여 명이었다. 1908년 7월13일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하던 중 보은군 관기면에서 왜군 수비대에게 체포된다. 왜군의 문초에도 선생은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는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희들의 종자를 없애고자 창의하였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의병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서 온갖 고문을 다했으나 자백하지 않자 왜군은 왼쪽 눈을 뽑는 만행을 저지른다. 1908년 9월1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기소돼 10년의 유형을 선고 받는다. 재판부는 선생에게 “이런 형벌은 너희 임금이 시행하는 것이니 우리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하자 선생은 대노하여 “우리 임금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으랴?”하고 꾸짖는다. 분을 참지 못한 왜적들은 선생을 형무소로 보내는 한편, 종자(從者)들을 시켜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에 있는 공의 야로당(野老堂) 종택을 불태워 버린다. 길거리로 내몰린 가족들은 호구지책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의 출옥은 기약도 없고, 집도 가재도 모두 잃은 부인 김씨는 사랑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1905년부터 8년간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답 300두락과 산 8필지 약 250정보 등 많은 재산을 모두 소진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특사로 강제 출옥 된다. “너희들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 “나는 내 나라를 구하려다 도적떼와 같은 너희에게 체포되어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옥중에서 죽어 금수만도 못한 네놈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며 끝까지 저항한다. 출옥 후 선생은 의병활동을 위해 군자금 모집을 시작한다. 1912년 11월 18일,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류참봉가에 군자금 협조를 부탁하고 왜병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총기를 휴대시켜 잠입시킨다. 총기 휴대 사실이 누설되어 1913년 3월12일 강도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돼 1913년 6월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는다.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한다. 1913년 6월6일 피를 토하며 감옥에서 순국한다. 선생의 나이 58세, 단식 28일만의 일이었다. 왜군들은 “강도 노병직(그의 옛 이름)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라고 발표한다. 정부에서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노병대 의병대장 알지 못해 안타까워 현재 포도밭으로 변한 생가터. 해질 무렵 화동면 이소1길 선생의 추모각 앞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후손 노진영(68)씨를 만났다.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는 뜻으로 추모각 대문에 늘 태극기를 걸어둔다고 했다. 1년에 한 차례씩 거행하는 추모행사 때 교통정리를 해주는 지구대 경찰들마저도 할아버지가 무엇을 한 분인지 모른다며 섭섭해 했다. 선생의 의로움을 돌에 새긴 순국비의 끝부분은 이렇다. “빛나는 노공이시여!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었도다. 다만 나라가 있음만 알고 내 몸은 생각하지 아니하였구나. 해를 꿰뚫는 곧은 충의는 문폐(文陛)와 같은 차례이다. 비석에 크게 새겨서 이로써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노라.”(장병규, 열사 금포 광선노공, 순국비명 부분) ‘다만 내 몸이 있음만 알고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못난 후손들을 채찍질하는 아픈 훈계이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죽은 주인 의관 매달고 돌아온 명마 ‘오추’…곁에 묻어주고 300년간 보살폈다네

병자호란이 수습된 후 나라에서는 이언의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렸다.후손들은 장군의 묘소 아래 영모재라는 재실을 세워 입향조인 진사 이근동과 아들인 충장공 이언의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을씨년스럽던 1637년 정월. 겨울이 저만큼 물러섰다.앞산의 잔설을 헤집고 노란 복수초가 피어나기 시작했다.그러나 여전히 새벽의 어둠은 무겁게 골목길에 드리워지고 있었다.뒤척이다 잠을 깬 배씨 부인은 여닫이를 열고 마당가를 내다보았다.땅거미가 채 걷히지 않은 하늘에는 빛을 잃은 희미한 별들이 자신의 마음처럼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 순간 누구인지 자신의 집 낮은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놀랄 만큼 큰소리에 배씨 부인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잠도 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누가 찾아왔남?” 대문 두들기는 소리는 더 다급한 듯했다.그런데 인기척 대신에 애절하게 울부짖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따라 들렸다.“하이힝~ 하이힝.”심상치 않은 예감이 부인의 머릿가를 스치고 지나갔다.배씨 부인은 옷매무새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황급히 대문을 열고 나갔다.문간에 버티고 있는 것은 전쟁터로 나간 바깥주인의 애마 오추가 땀을 빗물처럼 뚝뚝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추의 목덜미를 부둥켜안고는 마치 살아 돌아온 남편을 만난 듯이 쓰다듬으며 가슴 속의 말을 내뱉었다.“오추야, 너가 웬 일이냐. 주인은 어딜 두고 너 혼자 이 새벽에 이렇게 달려왔느냐?”“….”동물에 불과한 말이 어찌 대답을 하랴.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에 창상을 입은 오추는 더 이상 서 있지를 못하고 배씨 부인 앞에서 풀썩 쓰러지듯 주저앉고 만다.쓰러진 말 안장 위에는 피묻은 투구와 갑옷이 실려 있었다.전사한 이언의의 유품들이었다.남편을 대신한 의관 앞에서 배씨 부인은 다시 한 번 오열을 멈추지 못한다.오추는 배씨의 남편 이언의가 아끼던 애마이다.집안 사람은 그 누구도 오추를 모를리 없으리 만치 한가족이 되어 있던 말이다.자신의 소임을 마친 듯 오추는 배씨 부인의 지극정성에도 아랑곳없이 그로부터 3일 뒤 그만 죽어버리고 만다. ◆명마 오추의 눈물 김천시 감천면 도평마을의 이언의(1600-1637)는 문무를 겸전한 선비였다.청년기부터 그는 서재 한 켠에 공맹의 경서를, 또 다른 한켠에는 무경칠서를 두고 읽었다.언의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간청한다.“아버지, 군자는 모름지기 문약한데서 벗어나야 합니다.소자는 경서와 병서를 아울러 읽고 있습니다.이와 더불어 소자 스스로 마상술을 연마하고자 합니다.청하옵건대 비루한 말이라도 좋으니 한 필을 구하여 주소서.”언의의 아버지 이낭동은 아들의 간곡하고도 비장한 청원을 뿌리칠 수 없었다.아버지는 좋은 말은 구하지 못하고 비록 야위었지만 가슴팍이며 발굽이 튼실한 말 한 필을 구해 아들에게 주었다.“언의야, 그리 변변치 못한 말이다만 네가 잘 길들여 보려무나.”“아버지, 백락(伯樂)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보통의 말을 날래고 충성스러운 명마로 길러내면 그 또한 백락이 아니겠어요.”“그래, 네 생각이 옳다.기특하구나.”언의는 털색이 유별나게 검은 말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이제 너를 오추라 부르리라. 오추….” 고대 중국의 초패왕 항우가 아끼던 추마, 흰 반점이 있는 흑마로 천하를 누비던 항우를 위하여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전설 같은 말을 떠올리면서. 이언의는 경서를 읽다 여유로움이 생기면 말을 타고 달렸다.감천을 따라 넓은 도평 들길을 한없이 달렸다.장검을 들고 마상 도립을 하는가 하면 말 등에 누워 죽은 듯이 달리는 횡와양사의 기예를 터득하기도 하였다.적탄에 맞아 죽은 듯이 상대를 속이면서 적진을 돌파하기 좋은 마상무예이다.한번 말을 달리면 파란 하늘이 붉은 노을에 가릴 때까지 달렸다.오추와 함께 호연의 기운을 날로 다져갔다.그러던 어느 날 청나라가 국경을 넘어 침략해온다는 소식과 함께 민심이 흉흉하게 들끓더니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초야에 묻혀 글만 읽고 있으랴. 내가 만약 지난날, 왜란기에 태어나 있었다면 그냥 있지 않았을 터. 이제 청장년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나라 위한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치리라.”결기를 굳힌 이언의는 사재를 털어 내놓고 인근 동리의 지인과 친인척 등 많은 의병을 모아 청군에 대적하고자 마을을 나선다.그리고 1년 후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경상도 일대의 의병과 관군으로 편성된 근왕병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진격한다.그러다 1637년 정월 초,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청군 기병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의병장 이언의는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파죽지세로 우리 군을 짓밟던 청군은 주검마저 모두 불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이언의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전장에서 주인을 잃은 오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주검 옆을 떠나지 못했다.그때 누군가가 이언의의 피묻은 투구와 갑옷 등 의관을 수습하고 오추의 등에 싣고는 빈 등자를 밀어찼다.영민한 오추가 그 뜻을 모를 리 없었으니 밤낮으로 달리고 또 달려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다다른 것이다. ◆집 뒤 종산에 묻힌 애마 소용골은 마을입구가 좁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며 두 갈래의 골짜기로 나뉜다.말무덤인 의마총을 지나 재실 영모재를 돌아 들어 오솔길을 오르면 이언의 장군의 묘역이 나온다. 말무덤 의마총 옆에 세워진 의마비. 도평마을 소용골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이윽고 슬픈 마음을 추스르던 배씨 부인은 문중 어른들에게 간곡히 청한다.“문장 어른께서는 저의 뜻대로 장례를 치러주세요. 전사한 남편의 시신 대신에 전장에서 돌아온 의관을 정성껏 묻어 주고, 그 곁에 애마 오추의 무덤도 마련해 주세요.”문중에서는 이언의의 묘역은 도평마을 소용골의 서북쪽 숫돌봉으로 정하고 미망인의 뜻에 따라 오추가 싣고 온 이언의의 의관을 묻고(衣冠葬) 분봉하였다.그리고 오추는 그 맞은편이자 마을 뒷산 아랫자락에 묻어 무덤을 만들고 앞에도 ‘의마총’이라 비를 세웠다.말 무덤이지만 여느 일반 사람의 묘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호란의 공신으로 책봉된 충장공 이언의의 애마 무덤이 곧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의마총과 의마비(義馬碑)다.이번 추석에도 의마총은 여전히 말끔하게 벌초가 되었고 의마비도 깨끗이 닦은 듯 반짝거렸다.성주 이씨 문중의 한결같은 손길이 미치고 있는 까닭이다.소용골에 사는 문중의 유사 이점상씨의 의마총에 대한 애정은 특별하다.“우리들은 의마총을 성심껏 살핍니다.충장공 선조묘소와 꼭 같이 의마총을 관리하고 있지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력이니까요.”김천문화원과 충장공 후손들인 성주 이씨 문중에서는 의마총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음을 못내 아쉬워한다.그러면서 “의성 구촌과 경남 진양 그리고 영천 등지 몇 곳에 말 무덤이 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가시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우리 마을 의마총만큼 묘지봉이 뚜렷하고 숨은 이야기가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300년이 넘도록 관리해 온 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며 자신 있게 덧붙인다.말무덤은 말문화의 중요한 민속 원형자원의 하나이다.우리 주변에 현존하는 말 무덤은 비록 그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모두 하나의 민속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대로부터 농경시대에 이르기까지 말은 인간 삶의 한 축선을 지키고 있었다.비천의 신마(천마)로서 권위와 전승자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생활 운송의 수단으로 실생활에 다양하게 사용해 왔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말 무덤은 매우 드물다.구전되는 것으로 그칠 뿐 그 형태가 분명하지가 않다.그런 현실에 비하면 감천 도평리 의마총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그 총(塚)이 지닌 충성스러운 이야기도 이 시대의 귀감이 되고 외형의 규모와 선명함도 인간의 그것 이상으로 돋보인다.의마총 앞에 앉아있으면 그 옛날, 오추와 주인 이언의의 교감이 오롯이 전해지며 신비로운 기운에 휩싸이게 된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매화꽃 향기 가득했던 마을…지금 변한 모습 속에도 꼿꼿한 양반 정신 남아있어

윤광수 가옥은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었던 윤촌마을(매화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다.1750년경 건립된것으로 추정되며 1960년경 중수하였다.이 집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뜰집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연이어져 □자형을 이루고 있다.이 가옥은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부분적으로 개조되기는 하였으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쪽마루를 부설한 뜰집형으로 생활의 변화에 따른 한옥의 공간 변용과정을 살필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의미있다.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매화 마을이라지만 철이 아니어서 매화는 없고 꽃이 없으니 매화향도 없었다.옛날 도도했던 양반마을의 기품은 마을 입구 길 양편에 휘날리는 석회광산 반대 깃발로 오히려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마을 뒤 남수산 정상의 거대한 싱크홀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원전 건설이 일시 중단되면서 군 전체 분위기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지역민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멀리 현종산 정상에는 수많은 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고 있다.경북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포항에서 울진으로 달리다가 덕신네거리에서 성류굴 못미처 왼쪽으로 남수산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동해안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남수산은 일월산의 지맥으로 조선조 예언가 격암 남사고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었다.남사고는 풍수가로서 민간에 많은 설화와 전설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지금도 가뭄이 심할 때면 남수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올려 지역민의 마음을 전하는 곳이다.매화마을. 마을에 매화가 많았다고도 했고 그래서 예부터 고을 이름에 매화의 매(梅)자가 들어간 곳이 많았다.남수산 부근이 매화꽃을 닮았다는 이야기나 산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매화꽃을 닮았다는 말은 산을 올라보지 않았어도 이곳이 풍수상 매화낙지(梅花落地)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매화면은 2015년 4월까지 원남면으로 불렸다.울진군청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곳은 근남이고 멀리 떨어졌다고 원남면이라 했으나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매화면으로 바꿨다.당시 주민들은 매화와 매실로 유명한 고을 이름으로 원남면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름을 매화면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면에서는 지역별로 넓은 매화 동산을 가꾸고 가로수를 매화로 심는 등 매화 이름값을 하는데도 열성이다.매화리는 해발 437m의 남수산 아래 왕피천 상류 매화천을 사이에 두고 2리와 1리가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있다.2리에는 성씨에 따라 파평윤씨의 윤촌, 강릉최씨의 최촌, 영양남씨의 남촌, 담양전씨의 전촌 등으로 집성촌이 구성돼 있는데 이들 외에도 신안주씨와 평산신씨 등이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이곳도 어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대부분 떠나고 노인들이 남아 있다. ◆비굴하지 않은 삶의 향기 후세에 남아 진군 매화면 이현세만화거리. 이현세 만화거리의 벽화 앞으로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마을 한복판에는 수백 년 된 회화나무와 팽나무가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돼 있다.옛날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제를 지내기도 했고 마을 우물이 있었던 곳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매화 마을의 중요 기능들이 모두 매화 2리에 있었으나 하나씩 허물어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이 정자 앞쪽이 구 장터였다.이장 장영철씨는 “일제강점기 매화장으로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양반 동네에 백정과 기생들이 들어와 마을 기풍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 당시 마을 어른들의 장터 이전 이유였다고 증언한다.이런 마을의 기풍이 오늘에 와서 행정단위인 면의 이름을 원남에서 매화로 바꾸게 만든 저력이었을 것이다.조선시대부터 형성되던 장터가 매화1리로 옮겨가면서 면의 중심도 매화천 건너 매화 1리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장터가 있던 자리는 논밭으로 변했고 면사무소도 매화 1리에 자리 잡았다.매화1리는 최근 만화가 이현세의 만화들로 벽화거리가 형성돼 전국적으로 새로운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마을에는 고가옥들이 많았으나 최근 들면서 증ㆍ개축과 함께 전통 가옥이 상당수 사라졌다고 마을 주민들은 말한다.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윤광수 가옥은 그 매화2리 윤촌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다.정면 4칸, 측면 4칸의 뜰집으로 크지 않은 ‘ㅁ’ 자형 골기와집이다.안동이나 경주의 번듯한 대가집 위세와는 다른, 소박하면서도 검소한 선비의 단아함이 풍겨 나오는 집이다.가운데 뜰이 3평 정도 좁은, 따라서 하늘도 3평 정도로 뚫려 있다.집 밖에서 보면 사랑채가 길게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뜰 안에서는 안채와 부엌, 대청마루 등이 이어져 있다.크지 않은 규모에 화려하지 않은 건축이지만 동해안 지역의 중요한 건축 문화 자료로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조선 영조때인 1750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동안 여러차례 고쳐 지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10여 년 전 서 있던 앞마당 커다란 감나무도 베어졌고 정감있는 옛 돌담에 옛 골기와였으나 담장과 마루 등 곳곳을 현대식으로 손질했다.들어서는 대문격인 정지문과 대청마루 쪽문, 앞쪽 남향 사랑채의 쪽마루와 난간 기둥이 예사롭지 않았을 옛 주인의 품위를 가늠케 한다.동해안 한적한 바닷가 마을, 그곳에 터잡은 양반 가문들의 겸허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자연과 순응해 살았던 모습을 매화마을에서 느낄 수 있었다.대대로 이어온 성씨들이 서로 안으로 경쟁하고 밖으로 화합하면서 각기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이다.윤광수 가옥은 그의 4대조 괴은공 윤상일(1849~1907)이 고쳐 거주했을 것으로 후손들은 추측한다.이 집의 현판에 윤상일의 호 괴은을 흠모하는 ‘모은태장’에서부터 집의 건축연대와 그의 생몰 연대를 유추해서 나온 결론이다.윤상일은 구한말 교수를 역임했고 행적이 유학자로 독립운동가 향산 이만도와 학봉 김성일의 종손 김흥락 등과 교유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문집과 비문 등에 남아 있다.마을 이름이나 장터를 옮겨가게 만든 이곳 집성촌 지역민들의 자존심과 특히 파평윤씨 일문 일문의 행적은 이웃한 금매리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에서 확인된다.효종 때 극심한 한해로 굶어 죽는 백성이 생겨나자 이 고을 출신의 우암 윤시형이 임금의 부덕함과 정치 잘못을 상소한다.효종은 “초야에 묻힌 선비가 나라 사랑과 충성심에 심히 기뻐하며 마땅히 정치 폐단을 논의해 처리하리라”는 비답을 내린다.우암은 문장으로 동료 선비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말년에는 몽천에서 유생들을 모아 강독했던 선비였다.그 뒤 숙종 때 우암의 맏아들 삼족당 윤여룡이 정치의 부패상과 민생고를 열거하고 광정책을 상소해 왕으로부터 “적절한 건의에 기쁘고 고맙다”는 비답을 받는다.정조 때는 우암의 증손 황림 윤사진이 정관치설을 상소해서 비답을 받았다.황림은 정조 때 성리설 주역 등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정조로부터 “벽지에 이처럼 학행이 높고 독실한 선비가 있으니 기쁘다”며 ‘조봉대부특수영동교양관’으로 임명했다고 그의 신도비에 새겼다.이 윤씨 3대가 3대의 왕으로부터 받은 비답을 소장한 곳이 ‘삼조어비각’이다.이 자리에는 광해군 때 몽천사가 있었으나 윤사진은 그 자리에 몽천서당을 지어 울진의 청년들을 가르쳤다.그가 돌아가신 후 지역민들이 몽천서원을 세우고 윤씨 3대의 위패를 모셨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3조의 비답과 위패는 삼조어비각에 소장됐다.비각이 세워진 자리의 몽천은 물이 줄거나 불어나는 일도 없고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해 명승지로 꼽히고 있는 곳이다. ◆구국과 교육의 요람지 매화리는 울진의 교육 요람이기도 하고 항일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매화2리 마을에 있던 만흥학교도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울진 출신 독립운동가인 백운 주진수는 교육 구국의 뜻을 품고 1907년 지역 유지들과 함께 이곳에 울진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만흥학교를 설립한다.이 학교는 신교육과 함께 애국 계몽가들을 초빙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했다.그러다가 1919년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이 만흥학교 출신들임을 알게 된 일제가 학교를 폐쇄한 것이다.마을 사람들은 학교가 있던 자리가 마을 중심의 팽나무가 지키고 있는 자리라고 증언한다.그러나 어떤 표지석도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일제가 깡그리 없애버렸다.또 1939년에는 울진 최초의 공립농민학교가 매화2리에 설립됐으나 44년 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폐쇄되고 울진공립여자실천학교로 되었다가 합병과 폐교를 반복했다.지금 해군부대가 설립돼 있는 자리가 고등학교 자리였다고 한다.서울에서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영향을 받아 같은 해 4월 울진 매화장터와 북면 부구리 흥부장터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매화에서는 4월10일 밤 남수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걸어놓으면서 만세운동은 시작됐다.매화장날인 11일을 받아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만흥학교 학생들과 청년 유림 등 주민 5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학생들은 일본군들에게 쫓기면서 부구리까지 산길 20km를 내달렸고 이튿날 흥부장의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윤현수씨는 전한다.당시 어른들로부터 “기다란 장대에 태극기를 매달아 마을 뒤 남수산 꼭대기에서 흔들어 지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때 검거된 사람들이 대부분 울진 매화의 만흥학교 출신들이었고 그것이 만흥학교가 폐교된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 있는 울진기미독립만세기념탑. 지금 매화면 매화1리 매화동산에 당시의 감동적 현장과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울진기미만세기념탑이 남수산을 바라며 우뚝 서 있다.기념비에는 3·1운동지사로 매화 출신에 독립운동가 13명과 500여 인, 흥부 출신에 11명과 1천여 인 등이 참여했다고 적고 있다.매화에서는 3ㆍ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만도 20여 명에 이른다. 매화리에서 금수산을 한 바퀴 돌아 반대쪽 근남면 왕피천 상류 계곡에 윤상일이 형 윤건일을 위해 지었다는 청암정이 있었으나 부서지고 지금은 새로 지은 청암정이 새로 들어섰다고 해서 찾았으나 입구 주변을 둘러막아 찾을 수 없었다.더 깊은 계곡 끝에 구산리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이 모양을 갖춰 자리를 지키고 있다.동행한 주민 김임동씨(70)는 “해체돼 흩어진 돌무더기를 1968년 탑으로 형체를 복원해 보물 498호로 지정 되었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금동 불상과 명문 기와 등이 발굴되었으며 청암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우리의 옛 생활 자취와 문화유적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에서 지금은 우리 것을 보전하고 그 의미를 새기려는 노력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기쁨이다. 이경우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오체투지하듯 40년째 엎드려 작업…흙·나무·베 재료로 마음속 부처님 그려내다

불화를 그리는 과정. 오른쪽 밑그림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완성된 불화작품. 불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김종섭 불화장. 경북 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그는 종일 엎드려 작업하다 보니 힘들지만 조심스럽고 경건한 이 시간이 행복하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불화 그리는 일을 하늘의 소명이라 여겼다. 한 번 붓을 들면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는 줄 몰랐다. 하나의 색을 내기 위해 서너 번의 채색. 다시 색을 입히기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몸과 마음을 닦고 오체투지 하듯 엎어져 작업한 지 40년. 마음속 부처님을 꺼낼 정도로 내공이 여물어 갔다.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불화작업을 해온 김종섭씨는 지난 2016년 5월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9호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불화 분야로는 도내에서 유일하다. 전국에서 무형문화재 불화장으로 지정된 장인은 모두 네 명으로 김씨는 그 중 한 명이다. 불화장은 불화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단청장으로서 모든 일을 했기에 금어(金魚)나 화승(畵僧), 화사(畵師) 등으로 불렸다. 한동안 불화는 단청장 보유자에 의해 전승됐다. 그러나 종목 특성상 2006년부터 단일종목으로 분리돼 무형문화재로 불화장이 지정됐다. 김종섭 장인은 하늘재 아래 고요한 산중에 묻혀 불화를 그리며 홀로 지낸다. 그는 충남에서 태어나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불화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스님으로 출가해 3년 정도 수행한 적이 있는데 군종법사로 제대를 하고 동국대, 불교대 등 대학에서 불교미술 강사로 활동해 왔다. 보응 문성스님, 1972년 단청장으로 지정됐던 일섭스님, 그의 수제자인 김익홍으로 이어지는 사승관계를 거쳤다. 불화를 그리는 이는 종교적 열정뿐 아니라 예술적 자질이 조화를 이뤄야 진정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형문화재 불화장이 되기까지는 그만큼 신심이 맺혀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의 불화 및 근현대기 불화승의 초본과 유작을 바탕으로 전통불화의 기법을 재현한다. 자신의 작업장에 ‘관음불교미술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며 불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불교 미술을 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모든 것을 다 전해줄려고 준비하고 있으나 불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가 문경읍 관음리에 자리 잡은 연유는 지명이 관세음보살의 발음과 같아 마음에 들었다. 또 다른 이유는 오래전부터 불교관련 화맥으로 이름 높은 사불산 대승사와 운달산 김룡사가 가까워 이 땅에 왔다고 한다. 3년에 걸쳐 완성한 ‘500 나한도’는 길이 21m에 달하는 불화 작품인데 모두 다른 나한상이 담겨 있다.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그린 수많은 불화들은 우리나라 전국 곳곳 절집 법당의 내ㆍ외부를 장식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10년 전에 그린 ‘500 나한도’는 지금도 불화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21m에 달하는 이 불화는 3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제각각 모두 다른 500의 나한상이 한 폭에 담겨 있다. 김종섭 불화장은 가능하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물감을 사용한다. 포항 장기면에서 구한 돌을 갈아서 낸 석채. 청록색을 낸다. 수많은 불화를 작업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한 가지가 있다. 가능하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장 앞에는 전국을 다니며 구한 돌과 흙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화학안료와 달리 자연안료는 돌을 갈아서 낸 석채로 색을 낸다. 인체에 유익한 기가 발산되는 걸로 알려져 예부터 유용하게 이용됐다. 불화의 바탕은 흙, 나무, 베, 종이, 금속, 돌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하다. 이러한 재료의 성질은 불화의 기능은 물론 교리적인 면에까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보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불화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압축하여 표현한 그림으로, 불탑과 불상 등과 함께 불교 신앙의 대상이다.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벽화와 탱화, 경전에 그린 그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이나 비단 또는 삼베에 불교 경전 내용을 그려 벽면에 걸도록 하는 탱화가 주류를 이룬다. 불화는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선함만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며 불교 이념에 따른 내용을 그려야 하는 성스러운 분야이다. 좁은 의미로는 법당에 걸어 놓고 예배하기 위한 그림을 말한다. 경전의 내용을 설명적으로 나타낸 그림과 법당의 내 외부를 장식하는 그림도 넓은 의미의 불화에 속한다. 불교가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가장 성공적인 불화는 이러한 장면을 가장 멋지게 그린 그림이 가장 명작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불화들은 대부분 18~19세기의 것이다. 오히려 일본 등 외국에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의 불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불화는 권문세족과 관련되어 귀족적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고 고귀한 금선과 밝고 찬란한 채색을 주로 해서 그려져 있다. 이들 불화는 고귀하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불화의 특성은 비슷한 색상과 좌우 대칭으로 볼 수 있다. 빨강ㆍ녹청ㆍ군청이 주조색이면서 황토와 백록색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대체적으로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중앙에 그 불화의 주인공을 크게 표현하고 좌우에 여러 보살과 신들을 대칭되게 그려 넣는다. 김종섭 장인은 불화와 파랑새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었다. 지금부터 약 5백 년 전의 일인데 강진 무위사 주지스님은 곤혹스러웠다. 완공된 극락보전에 벽화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었다. 마침 한 노스님이 찾아왔다. “그 벽화는 내가 그릴 테니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그는 한 달이 지나도 법당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궁금했던 주지는 48일째 일을 그르쳤다. 문틈으로 몰래 안을 엿봤는데 노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파랑새는 사라졌다. 관세음보살의 점안만 남겨둔 상태였다. 김 불화장의 작업실에 놓여있는 수많은 붓. 그는 이 붓에 정성을 담아 불화 작업에 임한다. 국보 제313호 후불탱화 아미타여래삼존불도에 묘사된 관세음보살에는 현재 눈이 없다. 왜 하필 관음보살이고 파랑새일까. 불화에 걸린 화두이다. 붓끝에 서린 신심으로 부처님을 그리는 그 정성에 사심이 끼어선 안 된다는 경책으로 본다. 사람의 능력 밖에서 지극정성으로 그린 까닭에 관음보살의 분신인 파랑새를 등장시킨다.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막힘없이 그린 그림을 불화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김씨는 제일 그리기 어려운 부분이 부처님 얼굴 상호 부분이라고 한다. 불화 작업 중 언제나 마지막에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소중하게 다뤄야 할 부분인 만큼 마지막에 정성 들여 기도하고 지극한 마음이 채워질 때 붓질을 한다. 그래서 하루에 3, 4번이라도 별도로 마련한 불단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한다. “삼가 귀의하옵고, 무지랭이의 손길 따위로 어찌 부처님 존안을 더럽히겠습니까마는, 어차피 색즉시공이니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더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당신의 밝은 눈만이 색을 깨치고 공을 채웁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림에 기운이 깃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랑새 설화는 삿된 마음으로 하는 붓질은 안 될 일이고 붓끝에 정신을 집중하여 표현한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작가 자신이 느끼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불화는 극적인 순간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불화를 그리는 일이 불자의 수행과 같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가 현재 작업실로 쓰고 있는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사이 하늘재는 예로부터 군사요충지였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전쟁터였고 임진왜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의병이 숨진 곳이었다. 수천의 한이 서린 곳에서 불화를 그리는 그는 2005년부터 매년 11월 사비를 들여 하늘재에서 불교식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영혼들의 원혼을 달래고 극락왕생을 비는 이 일을 하늘재와 맺은 인연의 업보쯤으로 여긴다. 장인의 작업 모습을 본다. 엎드린 자세로 가늘고 긴 선을 그려내려면 장시간 고도의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종일 엎드려 작업하다 보니 허리가 휘고 관절이 아프지만, 그는 불화장을 천직이라 생각한다. 조심스럽고 경건한 이 시간이 행복하다. 극도의 섬세한 붓질로 표현한다. 삼각형, 마름모, 원의 기하학적 패턴이 중중무진으로 중첩하고 무한히 연속한다. 연기법계의 그물망이다. 그의 불화에는 성스러움의 영성이 충만하다. 선 하나하나에도 정신과 혼을 담아 시대의 문화재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장엄의 성스러움으로 한국 불화의 맥을 이어 나간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대종 있다는 감포앞바다 바람 불면 ‘웅~’ 우는 소리…“나 구해달라” 간절하게 들리네

신라 황룡사의 종루에는 대종이 있었다.이 대종은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보다 5배나 컸다.황룡사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건재했지만 제3차 고려ㆍ몽골 전쟁으로 소실되었다.몽골 군대는 황룡사 대종을 약탈한 뒤 토함산, 대종천을 거쳐 동해안까지 운반했다.그들은 배에 대종을 싣고 떠나려 했으나 그만 물속에 빠트리고 말았다.감포 문무대왕암 부근에 대종이 가라앉아 있다고 전해진다.사진은 대왕암.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몽골군이 황룡사 대종을 약탈해 운반했다는 경주시 양북면 구길리의 대종천.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최윤섭 전 경주 부시장을 만났다. 보물이 실렸다는 러시아 선박 돈스코이호 인양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무렵 황룡사 대종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황룡사 대종이 아직도 감포 앞바다에 묻혀 있느냐고 물었다. 머뭇거림 없이, 노력과 기술이 부족해서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들려준 황룡사 대종 찾기 전말은 이렇다. “이상 물체 발견!” 레이더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크기 2m가량의 타원형 물체가 레이더에 잡혔다는 보고를 받은 함장은 즉시 침투조 5명을 투입시켰다. 배를 타고 뒤쫓던 모 방송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룡사 대종이 천 년의 비밀을 벗고 세상에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97년 5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 타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만든 장엄한 평화의 대종소리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에 땀이 났다. 침투조가 황룡사 대종 발견 소식을 들고 나올 6~7분 안팎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망망한 바다 위를 밭이랑 갈 듯 누비던 허탈과 실망의 나날들, 20여 일의 가슴 졸이던 일들이 무성영화처럼 흘러갔다. 해군 탐사선의 작전 허락 기간이 닷새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는 소주 한 병과 북어 포 한 마리를 사들고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 제발,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세요. 어머니는 제가 바라는 것 다 들어주셨잖아요.” 경주 일대의 사찰들이 간절하게 올리는 불공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독교 신자의 조언도, 대종 찾기를 바라는 언론의 관심도, 마을 어른들의 전언도 끝내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지 못한 뒤의 일이었다.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어머니께 우리 집엔 왜 용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뒤뜰 항아리를 열고 용을 보여주셨다. 몸체는 꿈틀거리는 용이었으나 완성되지 못한 입 모양이 특이했다. 병아리 부리처럼 노란 입으로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이한 꿈이었다. 어느 날보다 더 환한 아침이 밝았다. 분명 오늘은 대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를 설레게 했다. 종뉴(鐘紐)는 모두 용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는 함장에게 문무수중왕릉 뒤쪽을 샅샅이 살펴보자며 탐사선에 올랐다. 용이 있었던 뒤뜰이 수중왕릉 뒤쪽과 겹쳐보였던 것이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룡사 대종 삼국유사에도 전해져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타원형 모양의 2m 크기의 이상 물체는 황룡사 대종이 분명할 것이었다. 삼국유사권3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만든 황룡사 종은 그 무게가 49만7천581근이나 되는 실로 거대한 종이었다. 종뉴의 길이를 제하고 나면 그 크기는 2m 정도로 추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투조가 확인한 이상물체는 타원형의 바위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꿈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렁이는 바다가 야속하기만 했다. 허망했다. 그의 고향은 경주시 양북면이다. 마을 어른들로부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봉길리 바다 쪽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 또한 멱을 감으며 놀다가 바다 쪽에서 웅~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 종소리는 고래가 우는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목소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종 이야기를 쓰고 있다. 황룡사 대종은 에밀레종(사진)보다 5배 이상 컸다.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을 불태운 몽고군이 황룡사 대종을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대종은 에밀레종보다 무게가 5배 이상일 정도로 컸다. 이 작전은 바닷길이 아니고는 운반이 불가능해 대종을 뗏목에 싣고 강에 띄워 바닷가로 운반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바닷가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만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았고 이후 이 하천을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황룡사의 역사를 읽고 여몽전쟁사를 공부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창건이 시작되어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이르기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동양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근대에 가장 높았던 80m가량의 9층 목탑과 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 그리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대종으로 유명하다.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된 황룡사지에는 건물과 탑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들만 남아 있다. 1963년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6호로 지정되고,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7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기와를 비롯한 금동불, 풍탁(처마 끝에 매다는 장식물), 금동귀고리, 유리 등 유물 4만여 점이 출토됐다. 몽골군들은 왜 50만 근에 이르는 그 무거운 종을 가져가려 했을까? 세계정벌에 필요한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서? 군사적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가 욕심이 나서? 오랑캐 종족에게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그만한 이해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왜 전란의 와중에 무거운 종을 메고 토함산을 넘었을까? 내 궁금한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리 짓밟아도 끝내 짓밟히지 않는 고려인들의 대몽항쟁, 그 원동력의 불가사의한 출처를 황룡사 대종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요? “섬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면서 백성과 장정을 칼과 화살에 죽게 만들고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와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장계(長計)가 아니다” 라고 조정의 강화도 천도를 저지하려던 종2품 문신 참지정사 유승단의 기개, 서슬 푸른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의 집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군사 양식이 풍족하니 천도는 불가하다”고 외치다 그 자리에 참수당한 삼별초 부대장 김세충의 결사항전의 용맹이 대종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그의 추정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지만 대몽항쟁은 끝없이 전개되었다. 1206년 건국 이후 불과 50년 만에 모스크바를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집어삼킨 몽골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은 나라 고려를 정복하지 못했다. 국토를 초토화하고 백성을 짓이겨도 항복을 거부했다. 고려는 몽골에게 불가사의한 나라였던 것이다. 외세를 무찌르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과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킨 문무대왕의 문두루비법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몽골 군사들에게 황룡사 대종은 예사롭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꼈을지 모를 일이었다. ◆종은 국태민안의 상징 종이란 무엇인가? 종이 울지 않자 한 여인의 무남독녀를 쇳물 가마에 넣어 만들자 울었다는 에밀레종,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자 나타났다는 돌종, 부부가 그 돌종을 치자 웅숭깊은 소리가 왕에게까지 들려 집 한 채와 벼 50석을 하사받았다는 모량리 사람 손순의 종. 불가에서는 우주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무병장수와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종을 친다고 한다. 종이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국태민안의 상징이다. 그것이 황룡사 대종을 찾아야 할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서 최윤섭 전 부시장에게 소주 한 잔 하자고 권했다. 건강검진이 약속되어 있어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황룡사 대종 찾기를 다시 하겠냐 물었다. “전설 속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 기록했다는 것으로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습니다.” 구전되는 전설은 구전자와 함께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의 대종탐사기는 기록되어 있어 지워지지 않을 테니 다행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돈벌이와 관계없이, 감포 앞바다에서 벌였던 순정한 그의 대종탐사기가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꾸밈없는 ‘본질의 미’ 밴 글씨…초서 연구 매진 50년 ‘일상적 삶’ 보이는 듯

김태균 선생의 ‘상선약수’ 영주시청 인근 대로변에 위치한 김태균 선생의 자택 2층에는 조그만한 서예연구실이 마련되어 있다. 김태균 선생의 ‘서애 선생의 춘수(春愁)’ 김태균 선생은 경북의 원로서예가이자 한국현대서단 초신(草神)으로 불리는 초서의 대가다.선생은 1934년 안동시 녹전면 세칭 듬버리에서 아버지 세희(일명 세영)공과 어머니 옥천 전씨의 3남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의성김씨 집안으로 명필이 많이 배출된 가문이다.김태균 선생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년기부터 자연스럽게 서예공부를 했다.그의 글 솜씨는 군계일학이라는 평을 받았다.중년기에 이르러 시암 배길기 선생을 사사하면서 초서로 필명을 날렸고, 70대 이후에는 한 점, 한 획 흐트러짐 없는 청아한 격조를 지닌 작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김태균 선생의 아호는 삼여재(三餘齋), 석계(石溪), 석개(石芥) 등이다.젊은 시절에는 석계를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삼여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삼여재는 시암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삼여는 책읽기에 알맞은 세 가지 넉넉한 때이다.중국 위나라 동우는 ‘삼여지설(三餘之說)’에서 일을 할 수 없는 밤과 비가 올 때 겨울철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했다.김태균 선생은 삼여 아호를 받은 뒤 쉬지 않고 공부하면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유년기 선생은 집안에서 가학으로 천자문을 익히고 집안 어른들의 체본에 따라 글씨 공부를 했다.퇴계 선생과 한석봉의 글씨를 임서(臨書)하면서 주로 사서삼경을 필사했다.십 대와 이십 대에는 옛 서예가의 글씨본인 법첩을 따라 임서하다 삼십 대부터 체계적인 서예공부를 위해 남석 이성조 선생의 소개로 시암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 서울까지 다니면서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했다.당시 시암 선생의 체본을 몇 장 받으면 소중히 여겨 모서리가 해어지도록 임서하면서 조금씩 글씨의 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서체는 전서부터 시작해 오창석의 글씨본인 ‘서령인사기’를, 예서는 ‘조전비’를 익혔고, 해서는 당나라 안진경의 ‘안근례비’를 자습했다.또 행서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를, 초서는 손과정의 ‘서보’와 왕희지의 ‘십칠첩’을 연습하면서 교정을 받았다.한글 서예는 독습(獨習)으로 익혔다.이렇게 서울과 둥지를 튼 영주를 내왕한 지 30년 세월이 지나자 서예에 대한 심미안이 열리고 경북의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하면서 필명을 얻게 된다.선생은 50세를 지나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초서 연구에 진력한다.초서는 한문 서예 오체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운필하면서 작가의 임의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다.전서로는 스승인 시암 선생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유분방하면서 자신의 감성을 담아낼 수 있는 초서를 집중적으로 연찬(硏鑽)하고자 10년 공부계획을 세웠다.당시 2년에 손과정의 서보를 100번씩 임서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0년 동안 500번을 임서했다.매주 1번씩 손과정의 ‘서보’를 배껴쓰다보니 서보의 어느 부분이나 어떤 글자든 외워서 쓸 정도가 됐다.그러면서 틈틈이 왕희지의 ‘십칠첩’과 왕탁의 글씨를 참고했지만 계속 연결해서 쓰는 연면초서보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렷이 휘호하면서 가독성이 분명하고 우아한 독초(獨草)를 선호했다.이런 서풍의 배경에는 유년기부터 안동지역에서 퇴계로부터 내려오는 유가의 단정한 경향의 글씨를 존중하고 지켜가려는 선생의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이렇듯이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선생은 삼여의 깊은 뜻을 새기며 열정적으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초서의 새길을 열려고 노력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아 연구실에서 글을 쓸 화선지를 고르고 있는 서예가 삼여재 김태균.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 청대 유희재가 한 말이다.그는 글씨는 그 사람의 학문, 재능, 성격, 의지 등 한 개인이 지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반영된 결정체라고 말했다.그래서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작가의 글씨에는 학식과 인품, 그리고 예술정신과 조형미까지 총체적인 모든 면이 반영돼 있다.특히 서예는 예술과 인격의 일치를 중시하는 전통이 남아있다.김태균 선생은 38세인 1973년 부인 이민자 여사를 만나 예술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어 상호 간에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다.이민자 여사는 홍익대 동양화학과를 졸업한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동양화가로서 부군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조언하면서 내조한다.슬하에 아들 넷을 두고 있으며 장남은 영주 선영여고 교장으로, 둘째는 봉화군 공무원으로, 셋째는 동양대학교에서 재직하고, 넷째는 건축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그런가 하면, 김태균 선생은 지역 후학들에게도 사표가 되고 있다.1972년부터 안동서도회를 지도하고 있으며 1976년부터 영주서도회에서 강의를 시작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1986년에는 제자들이 교남서단을 창설해 경북서예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1990년대는 계명대와 안동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교남서단에서는 2013년 스승을 기리고자 서집을 발간했다.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 가운데 교수나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평소 학예일치를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무엇보다 스승에 대한 경외감이 실종된 요즘에 타계한 시암 선생의 비문을 건립하는데 앞장서서 실천한 일은 서예계에 귀감이 되고 있다.김태균 선생 스스로 작고한 스승의 비문에 전액(전서로 비문의 표제를 쓴 글)을 직접 쓰고 1년 동안 정성을 다해 수많은 글자들을 손에 정을 들고 새겨 비문을 완성해 묘지에 세움으로써 후학들의 사표가 되었다.그는 말없이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서여기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한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북 서예의 깊은 뿌리가 되다 절제된 삶, 무욕의 삶을 살고 있는 서예가 삼여재 김태균. 선생은 1934년 안동 출생으로 30세때 시암 배길기 선생께 사사받았으며 전, 예, 해, 행, 초 등 다섯 가지 서체를 두루 섭렵했다.특히 예서와 초서의 대가이다.전통적 서법을 구사하는 법고를 중요시하는 작가다.70년대 초반 안동서도회와 영주서도회를 창립해 현재까지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있다.서예 역시 마찬가지다.그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녹아있고 작가의 철학이 담겨있는 글씨여야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평가를 받을 수 있다.다른 지역의 유행을 따른 획일화된 작품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한 작품으로는 정체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김태균 선생의 작품에 내재된 정체성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초서 작품은 전서의 필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줍은 시골처녀같이 순박하고 질박하면서 꾸밈이 적어 보인다.도자기로 말하면 조선의 백자와 같아 보인다.꾸밈이 극에 달하면 꾸밈에서 본질을 잃게 된다.본질을 중시하면서 꾸밈이 적으면 심심해 보이지만 화려함으로 실질을 매몰시키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꾸밈없는 은근함 속에 변화가 있다.당나라 손과정이 ‘서보’에서 말한대로 초서는 유려하면서 통창(通暢)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듯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곱고, 부드러움으로 온화함을 더하고, 조용하고 우아한 정취에 의해 그윽한 안정감이 부여된다.언뜻 보면 김태균 선생의 작품은 무미건조한 듯이 보이지만 수식없는 본질적인 멋으로 표현된다.작품 소재는 유가 경전과 우리나라 선대 명인들의 시문을 주로 이용하지만 퇴계 선생의 문집에서 경계로 삼을 만한 시문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그 내용은 사람의 마음을 수양하고 성정을 다스릴 수 있는 주옥같은 문장들이다.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정체성을 지닌 초서 작품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지난 50년 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초서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그는 경북 서예의 든든한 뿌리가 되고 후학들이 자신을 통해 가지를 치고 열매를 거두기를 바라고 있다.그러면서 그는 젊은 서학도들에게 “바탕은 튼튼히 하고 창작을 서두르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억지로 변화를 주려고 하지 말고 적공의 세월을 보낸 뒤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김태균 선생은 전통 유가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에 유가적인 습속이 몸에 배어 있다.그의 작품도 수식을 배제한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마치 겉으로는 화려한 형용사와 부사가 없는 동사로 지어진 문장처럼 무덤덤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함축의 미와 절대적인 서예 본질의 아름다움이 담긴 자신만의 세계가 함축돼 있다.서예는 무엇이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선생은 “서예는 내 인생에 있어 일상적인 삶”이라고 대답했다.오랫동안 그 일상적인 삶을 여러 사람들이 보았으면 한다. 정태수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나무 밑동 금줄 마디마디 ‘하얀 소원’… 백발 삼신할매 벙긋 웃으며 들어줄듯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 동성마을인 하회마을 중앙에는 수령이 600년 된 느티나무(높이 15mㆍ둘레 5.4m)가 자리하고 있다.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삼신당이라 부른다.삼신은 예로부터 며느리들이 아이를 낳으려 할 때 빌었던 대상으로 아이의 출산과 건강을 관장한다.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하회마을을 조감하면 마치 한 조각의 감나무 잎 같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감나무 잎은 잎몸이 타원형이고 둘레가 부드럽다. 잎자루가 단단하고 잎맥이 고루 대칭을 이루면서 잘 발달되어 있다. 감나무 잎자루를 손거울 잡듯 바로 잡고 잎 속을 들여다보면 실핏줄 같은 잎맥이 중심선을 기준으로 좌우, 가로ㆍ세로로 살아서 움직인다. 감잎 형태의 하회마을 가운데 잎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오른쪽 끝단에 충효당이 그리고 왼쪽 끝단에 양진당이 자리하고 그 중심에 삼신당(三神堂)이 위치한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지나갔다. 일행 3명이 하회마을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하회를 처음 찾는 이들이었다. 일행들은 물병 하나를 든 채 마을을 샅샅이 살피듯이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골목길로 숨어들어 마침내 출구를 찾지 못한다. 미로를 헤매듯 했다. 땀이 젖은 얼굴을 서로 마주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그린다. 130여 호 남짓한 집들과 흙담, 그리고 담 사이사이 실개천 같은 골목길에서 일행은 모두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등줄기와 가슴팍에는 이미 땀으로 강물이 되어 흠뻑 젖어 있었다. 일행들은 어느 막다른 골목길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지도를 손에 쥐고 있던 여행작가 김청운 선생이 마을 지도를 펼치면서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구조가 절묘하네요. 모두들 마을 당나무를 찾아갑시다.” 그는 지도에 표시된 삼신당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삼신당에는 반드시 크고 오래된 나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마을의 중심 터일 것이니 빠져나가는 길 표시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일행은 하회의 남촌댁 북쪽으로 난 흙담 길을 따라 삼신당이 있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정오의 햇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른 흙담조차 녹아내릴 것만 같다. 담을 덮어 놓은 숫기와 위로 하얗게 마른 석화가 피어났다. 붉은 모래흙으로 된 길바닥에서 작은 먼지가 일었지만 싫지 않았다. 도회에서 좀처럼 체감할 수 없는 황토가루, 일행 중 한 사람이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기 시작하자 모두 따라했다. 발바닥 찜질이다. 마침내 일행들은 자신들의 키보다 높은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의 담과 솟을대문 앞을 돌아 마을 한가운데 있는 삼신당에 이르렀다. 당집이 아니라 느티나무다. 높이가 15m, 몸 둘레가 5.4m가 되는 당나무는 노목인데 새끼 금줄로 자신의 허리둘레를 동여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찾아드는 모든 사람들이 영험이 있는 신목으로 믿고 있다. 당나무는 600여 년 전 이 마을의 입향조 류종혜가 심었다는 전설을 안고 성장한 건강한 나무다. 하회마을의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는 이 당나무는 그 자체가 삼신당이요 성황당(서낭당)이다. 그래서 하회마을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무병 그리고 풍년을 비는 동신제를 모신다. 하회별신굿 탈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에서 탈춤판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 당나무 아래에서다. ◆기원(祈願)의 신목, 하회 삼신당 삼신당에는 빈손으로 가도 소원을 적고 매달 수 있는 한지와 펜이 준비돼 있다. 나무 밑동을 둘러맨 금줄 마디마디에는 갖가지 기원의 문구를 깨알같이 써놓은 소원지로 가득 둘러쳐져 있다.하얀 수술로 치장한 듯 바람에 나풀거린다.동신을 드릴 때 매둔 금줄이 소원지를 꽂은 띠로 변신해 버렸다. 합격, 사랑, 건강, 취업 등 다양한 어귀의 소원지는 국적도 다양하다.일본어,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로까지 섞여 있다. 우리의 삶 주변에 기원의 공간이 함께 하는 현대판 서낭당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우리의 당나무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등지의 관광지에도 멋들어진 다리의 난간 난간마다 소원지와 자물쇠가 조롱조롱 매달린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하얀 종이에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기록해 붙이는 소원지, 교각의 난간에 꼭 붙들어 매듯 잠궈 채우는 사랑의 자물쇠 등 자신의 미래를 간구하고 상대와 사랑을 언약하는 주술이다. 일행 중의 이 화백이 백지로 접어 만든 작은 소원지 한 장을 삼신당 금줄에 꽂았다.그 순간, 평소의 유머스럽던 그와 달리 진지한 모습이었다. “삼신 할매, 셋째 딸을 시집보냈습니다.때맞게 건강한 외손자를 안겨 주소서.” 그는 삼신 할매의 영험을 믿었다.나이가 꽉 차 시집을 보낸 딸아이를 위한 자신의 소원을 삼신 할매가 귀담아들어 줄 것으로 믿었다.삼신당 단위에 백발을 곱게 빚어 올림머리를 한 삼신 할매가 벙긋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단이랬자 별것이 아니다.허물어진 주춧돌 혹은 석탑의 기단석 같이 다듬어지되 특별한 문양을 새겨 넣지 않은 밋밋한 돌 서너 개를 포개듯이 쌓아 올려놓은 단석이다.당나무 주변은 그것 이외는 달리 꾸밈이 없다.당나무 앞에서 제각각 자신의 소원을 간절하게 비는 모습이 그리 생경하다거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회마을은 이 삼신당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뻗어나 있다.마을을 조감하면 삼신당은 곧 양진당과 충효당 그리고 남촌댁과 북촌댁 그리고 원지정사에 둘러싸여 있다 할 수 있다. 삼신당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와 일행은 다시 길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비슷비슷한 고택들이 운집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모두 유서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이러한 기반 위에 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반세기 이상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로 정위된다. ◆감나무 잎맥 같은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충효당 풍산 류씨 대종가 양진당 너댓 시간 하회마을을 심방하고 나온 일행들은 저마다 견문록이 없지 않았다.화회마을의 전통과 권위를 상징하는 충효당과 양진당을 말하는가 하면 북촌댁의 건축규모와 미에 감탄을 쏟아내기도 하였다.그러면서 골목길과 담길에 매혹됐다면서 계절을 달리하여 한 번 더 여행 오고 싶다고도 하였다.그때 50대의 이 화백이 꺼내놓는 말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하회마을은 내 눈에 마치 하나의 큰 감나무 잎을 밟고 걷는다는 착각을 하게 했습니다.” “아니 왜요?” “우리가 헤맸던 그곳은 감잎의 왼쪽 중간쯤 되었을 것이고 삼신당은 북쪽 방향인데 마을의 거의 가운데쯤 되었을 것입니다.” 감나무 잎을 모를리 없는 일행은 하나같이 공감을 표했다.그러고 보니 하회마을은 한 조각의 감나무 잎에 비유될 만했다.동에서 서쪽으로 난 가운데 큰길이 감잎의 중심이 되는 잎맥과 같다면 그 잎맥 좌우로 뻗어난 작은 실선들은 마을의 북쪽과 남쪽으로 난 좁은 골목길들이 될 테니까. 전통사회에서 우리의 초민들이 믿던 신앙은 결코 현실세계와 이격되지 않는다.현실과 신의 세계는 어떤 경계가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삼투작용을 하면서 존재해 왔다고 믿었다.마을신은 다름 아닌 마을 사람과 같이 살고 있으며 그 모습 또한 마을 사람을 닮았다는 것이다.마을신은 달리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속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신을 즐겁게 하면서 신이 늘 깨어 있도록 밤낮으로 모신다.그러다 보면 신은 사람에게, 사람은 신에게 서로 일깨움을 준다.이 양자관계 즉 신과 사람을 서로 만나게 하고 이어주는 마당이 서낭당이고 삼신당이 아닌가. 서낭당은 전통사회의 믿음 체계의 하나다.성황당처럼 오래된 당집일수록 마을 안에 있었으나 조선 중후기로 접어들면서 마을 밖으로 벗어나기도 했다. 그 당집이 어디에 위치하든 여전히 민간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의 실핏줄처럼 숨 쉬고 맥박이 되어 돌고 있다.성황당으로부터 보다 구체화 된 삼신당 역시 읍성안을 지키는 마을신이다.삼신당은 삼신 할매를 매개로 하여 자손을 번창하게 해 주는 신성한 곳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회 사람들은 예부터 삼신당과 자신이 하나 되어 있음을 믿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제는 하회마을을 찾는 많은 사람들도 하나같이 삼신당에 들려 좋은 기운을 얻고자 소원지를 꽂고 간절하게 기도한다.지금까지 삼신당신이 지켜 준 것을 감사하며 앞날도 지켜줄 것을 믿고 의지하고픈 마음으로….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