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주 제와장 정문길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정문길(77) 제와장(製瓦匠)을 찾았다.그는 최근 경상북도로부터 무형문화재 43호로 지정받았다며 기뻐했다.어깨가 무겁다 했다.문화재 보수에 크게 기여하고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기와 가마를 복원 축조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전통기와를 만들어 온 공로에 따른 것이었다.77세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건강의 비결을 물었다.흙을 주무르고 불을 지피느라 늙을 여가가 없었다며 웃었다.흙과 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인고의 세월, 그 먼 길을 함께 걸어온 정문길 제와장의 반려이자 도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도반(道伴)이라는 말 속에는 도를 공부하고 그것을 익히는 자, 그것의 기쁨을 느끼는 자, 그런 자가 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함께 도를 논하며 함께하는 기쁨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다.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기쁨과 보람을 함께 나누는 평생의 반려이자 도반들인 흙과 불이 수키와, 암키와, 암막새, 수막새, 귀면기와, 치미, 용두(龍頭), 망와(望瓦) 등의 서로 다른 이름과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그의 작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친구처럼 정이 가고 자식처럼 소중하다고 했다.흙과 불이 만나 저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다니 신성한 느낌이 들었다.노당기와는 4대째 제와장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가업이다.일제 강점기인 1940년 그의 할아버지가 처음 가마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먹고살기 힘든 시절, 할 일이 없어 기와 만드는 일을 배웠던 것이었다.정문길 제와장이 그의 아버지가 하는 일에 뛰어든 것은 1967년, 기와와 함께 한 세월이 50년이 지났다.지금은 아들이 2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노당건설 대표를 맡고 있다.196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기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주거형식이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면서 전통기와가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연간 매출이 얼마인지 궁금했지만 경영에 어려움이 없느냐고 에둘러 물었다.대를 이어온 가업이기 때문에 전통기와의 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가마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노당리 인근에는 기와공장들이 10군데가 넘었었는데 경영난으로 하나둘씩 문을 닫고 지금은 노당기와 하나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노당리, 기와에 알맞은 점토 산재해 가마터와 옹기점이 많아 노당리는 옛날부터 옹기골 혹은 기왓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전성기 서라벌에는 17만 8,936만 호 기와집에서 숯불을 피워 밥을 해먹었다 하고 서라벌 도성에는 기와집이 겹겹이 펼쳐져 비가 내려도 어깨가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되돌아보면 그 많은 기와 수요의 공급을 서라벌이 지척인 노당리 가마가 담당했을 것이었다.노당리가 기왓골이 된 것은 기와 굽기에 알맞은 점토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었다.돈도 명예도 아닌 제와장으로서의 한 생을 살아가는 데는 남다른 이유와 연유가 있을 것이다.힘들지만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200㎏의 무게에도 끄떡없는 강도 높은 기와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한 것, 단열과 통풍이 뛰어나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지붕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큰 기쁨이자 보람이라 했다.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창덕궁 보수공사에도 사용되었고 경복궁, 청와대 춘추관, 개성공단 일주문 등으로 수요처를 넓혔을 때의 기쁨과 보람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문의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흐뭇해했다.1,500년 전통공법으로 조성되고 있는 한국불교 전통사찰 뉴욕 원각사 대웅전 지붕도 자신이 만든 기와가 쓰이게 되었다며 노당기와 해외진출의 꿈에 설레고 있었다.노당기와가 국내는 물론 나라 밖에서까지 유명세를 얻게 된 까닭이 무엇이냐 물었다.정성 덕분이라 잘라 말했다.한 장의 기와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기계로 찍어내는 기와와 달리 전통기와의 제조는 흙을 반죽하고 반죽한 흙으로 모골(模骨)을 사용하여 기와의 형태를 만들고 성형을 하고 다시 그것을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룰 때까지 음지와 양지를 번갈아가며 건조하는 일, 가마에 불을 지피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도 허투루 해서 되는 일은 없다.정성 그 자체가 생명인 것이다.가마에 불을 지필 때는 성급한 마음이나 삿된 생각을 버리고 한없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솔잎이나 장작으로 1천 도의 열을 가해 15시간에서 20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며칠간 마무리 소정과 냉각 과정을 거치면 드디어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한다.기와를 자식 다루듯 소중하게 다루어야 양질의 기와가 탄생한다.정문길 제와장은 ‘운’이 따라야 기와가 제대로 구워진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기와를 만드는 사람과 기와를 가져갈 사람이 서로 운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그가 말하는 운이란 정성을 다르게 표현하는 말처럼 들렸다.흙과 물, 불, 바람 그리고 와공의 정성이 어우러져야 좋은 기와를 빚어낼 수 있다고 했다.가마 안에 차곡차곡 재워 둔 550장의 기와(노당리 가마가 수용할 수 있는 분량) 가 흠 없는 모습으로 태어나도록 제와공은 가마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었다.점토 채취→체질→탈수→반죽→성형→건조→소성(燒成)→냉각의 순으로 진행되는 전통기와의 제작 공정에 대한 정문길 제와장의 설명은 이렇다. 점토를 채취하고 흙을 고른 뒤 물 섞은 흙무더기를 발로 밟아 반죽하는 벼늘작업을 한다.첫 번째 흙더미인 첫벼늘과 중벼늘을 거쳐 중벼늘을 줄깨끼 질한 막벼늘을 쌓고 난 뒤에 기와 크기에 맞게 쨀줄(흙 자르는 철사줄)로 흙을 잘라 나무로 만든 와통에 흙판을 붙인다. 바대치기(문양 넣기 혹은 흙 다짐)를 한 다음 기와 끝 면을 다듬어 곡선을 만들고 2~3일간 볕 좋은 곳과 볕 안 드는 곳을 번갈아 가며 말린 뒤에야 비로소 가마에 기와가 든다.이른바 가마재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마재임을 할 때는 쓰러져 파손되거나 불길이 잘 통과될 수 있도록 간격을 잘 조정해야 한다.불 때는 일은 더 조심스럽다.연기로 말리기 위해 짚단, 나무껍질 등에 말림불을 붙여 초불을 넣는다.불을 가마 안으로 깊숙이 넣어 불기운이 굴뚝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도록 2-3시간 불을 때는 중불에서는 창구멍 3분의 2를 막고 창에 작은 구멍만 남긴다.중불이 끝나면 굵은 나무를 가마 가득 넣어 가마 안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대불을 놓는다.마지막 공정인 막음불은 아궁이를 포함해 가마 전체에 진흙을 개어 작은 틈도 생기지 않도록 모든 구멍을 막고 기와를 굽는다.그렇게 1천 도 가까운 온도에서 20시간 굽고 잔불로 72시간을 식혀야 전통기와 한 장이 세상 빛을 본다. ◆한 장의 기와가 탄생되기 까지 시간과 정성이 필요 기와를 만드는 것은 이렇듯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어서 예로부터 나라에서도 와공 관련 제도가 있었다.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법정공장 중 건축분야 종사직으로 와장(瓦匠)이 있었고, 기와 만드는 공인은 와서(瓦署) 소속으로 정원을 40명으로 책정했다.흙을 반죽하는 소를 정부에서 지급했고, 법대로 기와를 만들지 않으면 엄중 처벌하기도 했다.대구와 경주를 잇는 안강읍 노당리 국도변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기와들이 꽃샘바람을 맞고 있었다.을씨년스런 날씨 탓일까, 집 없는 아이들 같이 추워 보였다.한옥이 아파트에 밀려난 지 오래, 전통가옥이 줄어 와공도 전통기와도 소멸될 지경에 이르게 된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졌다.기와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는 정문길 제와장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기능인이 존중받는 세상이 오는 것이라고 했다.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는 24개 직종에 화공, 목수 등 8,600여 명의 기능인이 참여하고 있는데도 나라로부터 변변한 사무실 하나 지원받지 못했다 한다.아직도 기와장이, 옹기장이와 같이 장이로 불리는 직업은 천직이라는 무의식의 잔뿌리가 남아 있는 듯하여 씁쓸했다.전통기와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그의 꿈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의 꿈은 평생의 반려이자 도반들인 흙과 불의 꿈이기도 해서 사적인 욕심 없이 깨끗해 보였다.일체가 불타고 남은 재의 빛, 비바람을 막아줄 누군가의 지붕이 되어 주기를 기다리는 잿빛 기와처럼 말이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