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빼곡했던 천 년의 이야기 피로 물든 뒷 장은 감추고 싶은 듯 군데군데 이름조차 없구나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왕조사를 간단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천 년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소개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37대 선덕왕, 41대 헌덕왕, 희강왕, 민애왕 등은 왕들의 이야기가 집중되는 기이편에서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다.흥덕왕의 이야기도 아주 간단히 기록하면서 앞의 헌덕왕과 소성왕, 애장왕의 사연도 움푹 빠뜨렸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들추고 싶지 않았던 일연 스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원성왕 이후 잇따른 태자의 죽음과 소성왕, 애장왕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특기할만한 일이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고, 17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조들의 얼룩진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본격적인 신라하대를 열었던 형제들의 쿠데타를 픽션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삼국유사: 흥덕왕과 앵무제42대 흥덕대왕 때 보력 2년은 병오년(826)인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으나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암컷이 죽었다. 그러자 혼자 남은 수컷이 슬피 울어 마지않았다.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짝을 찾은 것으로 알고 이내 그 거울을 쪼아대었으나 그것이 그림자인 줄 알자 슬피 울다 죽었다.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IMG03}]◆새로 쓰는 삼국유사: 권력과 사랑-형제들의 쿠데타: 원성왕의 장남으로 태자에 임명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의 아들은 6형제였다. 준옹, 언승, 숭빈, 수종, 충공, 제옹 등이 6형제가 태어난 순서이다.원성왕은 이들을 순서대로 궁중으로 불러들여 나랏일을 익히게 했다. 준옹은 맏손자여서 아들들이 죽자 곧 태자로 임명하고 중책을 맡겨 말년에 병부령에까지 올랐다.이들 6형제는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성향은 각각 달랐다. 태자로 임명된 준옹은 천성이 심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했다. 준옹은 병부령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도 몸이 약해 잠깐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IMG03}]이에 반해 둘째 언승과 넷째부터 막내까지 수종, 충공, 제옹은 활달한 성격으로 나랏일에도 적극 참여해 권력에 대한 야망을 키우면서 자신들만의 세력을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셋째 숭빈은 소극적이고 차분한 편이었다.준옹이 원성왕의 죽음에 이어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소성왕은 왕좌에 오르면서 후계구도를 걱정해야 했다. 자신의 병이 심각해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았다. 아들은 아직 12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여서 스스로 나랏일을 이끌어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소성왕은 즉위 1년 만에 죽으면서 13살 어린 아들 청명에게 왕위를 넘겼다. 소성왕은 아들의 안위를 위해 동생들에게 섭정을 당부하면서도 몰래 비밀호위 무사들을 배치하고, 뛰어난 장수 명호와 정용을 시중으로 발탁해 아들을 엄호하도록 안배했다.소성왕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800년에 즉위했다. 이때부터 왕의 숙부 언승과 수종의 시대가 도래했다. 언승이 섭정하면서 병부령에서 상대등으로 스스로 옮겨 앉아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언승은 자신의 뜻을 잘 따르는 넷째 수종과 다섯째 충공을 병권과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으로 중용하고 실권을 휘둘렀다.그러나 애장왕이 18세가 넘어 성인으로 성장해 조금씩 자신의 의지를 펼치려 하자 삼촌 언승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애장왕이 23세, 재위 10년차에 접어들던 809년 일이 터졌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문제에서 왕과 삼촌 언승의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사신을 누구로 파견할 건지 예물을 무엇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로 마련할 것인지 등의 작은 문제로 시작해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상대등이었던 언승은 병부령과 상부령에 있던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병사들을 궁궐 깊숙이 배치하게 하고, 삼 형제가 칼을 빼들고 직접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애장왕의 비밀호위 무사들도 이미 언승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언승 형제들은 애장왕을 단숨에 베었다. 저항하던 애장왕의 동생 체명까지 처리하고,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애장왕은 23살의 젊은 나이에 이렇다 할 권력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헌덕왕은 특유의 괄괄한 성격으로 왕권을 박탈하는 일에 동생들을 모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없었던 헌덕왕은 자신의 일에 적극 찬동하고 앞장서는 수종을 태자로 삼았다. 이어 충공을 상대등으로 삼고, 막내 제옹을 병부령에 앉혔다.헌덕왕은 즉위 이후에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거문고를 타는 등으로 흥청망청하여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해 백성은 어려움에 처하며 신라하대 패망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흥덕왕의 사랑: 흥덕왕 수종은 애장왕의 여동생, 조카인 장화를 부인으로 맞았다. 당시 형 언승을 도와 병부령에 있으면서 권력을 자랑할 때였다. 수종과 장화부인의 애정은 궁궐을 벗어나 시중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별났다.장화부인은 언승과 수종 형제가 자신의 오빠 애장왕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장화부인이 10살, 어릴 때의 일이었고, 언승이 당나라에 소성왕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한 것처럼 백성에게도 그렇게 숨기고 즉위했기 때문이다.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헌덕왕이 죽고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장화부인은 28살에 왕비의 관을 썼다. 화려한 날들이 시작되던 무렵 장화부인의 귀에 오빠들에 대한 죽음의 진실이 들려왔다.믿어지지 않는 오빠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곰곰이 뒤집어 생각하니 왕이었던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둘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일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장화부인은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흥덕왕 즉위 1년을 맞은 날에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술에 취한 흥덕왕의 입을 통해 비극의 전말을 들었다. 절망하던 장화부인은 끝내 이승의 문턱을 스스로 뛰어넘었다.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쩌면 예고되었던 불운의 사랑인지 모른다. 현실로 닥친 사랑의 상실에 직면한 흥덕왕은 넋을 놓았다.그러나 흥덕왕은 당나라와 일본의 위협,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 흉년에 이어지는 도적떼들의 극성 등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대신들의 추궁으로 사랑의 병을 앓을 틈을 잃었다.흥덕왕은 헌덕왕 때와는 다르게 청해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그는 아들 없이 물러나 본격적인 피의 왕권쟁탈전 시대를 불러왔지만 죽음에 이르러 장화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사랑을 찾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③비극의 서막…저무는 영광의 시대…두 아들에 손자까지, 펼치지 못한 삶 끝나버려

원성왕은 통일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을 열었던 왕으로 분류된다. 그는 혜공왕을 시해한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면서 왕위에 오른 선덕왕과 함께 최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상대등의 자리에서 병권과 내정을 주무르면서 본격적인 왕좌에 오르기 위한 발판을 굳혔다.적절한 기회를 맞아 선덕왕의 죽음에 이어 38대 원성왕으로 등극한 김경신은 왕권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이어 장남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일찍 죽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그러나 둘째 아들마저 죽자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을 태자로 책봉해 그가 39대 소성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소성왕은 사형제의 맏이였다. 왕위에 오른 소성왕은 1년 만에 죽었다. 이어 소성왕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등극했지만 그의 삼촌들에게 살해됐다.김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를 죽이고 41대 헌덕왕으로 왕좌에 앉았다. 17년의 왕위에 이어 헌덕왕의 동생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이어지며 신라 하대는 비극적인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신라 하대 비극은 원성왕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사가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삼국유사: 원성왕의 죽음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다. 최치원이 쓴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서 있으며 또 보은사와 망덕루를 새로 지었다. 할아버지 훈입 잡간에게 흥평대왕, 증조할아버지 의관 잡간에게 신영대왕, 고조 할아버지 법선 대아간에게 현성대왕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 잡간이다.-이른 눈제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인 데 8월15일에 눈이 내렸다.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인데 3월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제46대 문성왕 기미년(839) 5월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원성왕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써가며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많은 심력을 기울였다.외교문제는 공격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유한 사신들을 당나라와 일본에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내적으로는 강한 나라의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잦은 사냥을 통해 건재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어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을 보여 외부의 침략에 대한 사기를 일찍이 차단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일찌감치 지정 공표했다. 원성왕은 사냥에 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대동해 왕손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원성왕은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매월 삭망일 두 차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냥을 했다.원성왕은 매월 초하루에는 어전 회의를 마치고 대신들과 함께 일찍 사냥에 나서 그달의 국운을 점치기도 했다. 사냥이 기분 좋게 잘 되는 날은 늦게까지 축하연을 열어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그의 보름날 달밤사냥이 문제를 가져왔다. 초하루의 사냥과 다르게 보름날의 사냥은 달이 높이 걸리는 시간에 맞춰 야간사냥으로 진행됐다. 큰 짐승을 잡기라도 하는 날에는 밤이 늦도록 주연이 이어졌다. 원성왕의 이 같은 사냥에 대한 취향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의 아들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통일신라 하대를 비운의 시대로 흐르게 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으로 내정되어 있던 김주원의 도움으로 가족들의 생명을 건지고 벼슬길에 오르게 된 김제공은 김주원의 은혜를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주원이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피신해버리자 김제공은 스스로 김주원과의 관계를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이어 제공은 원성왕에게 거짓 충성을 하면서 눈에 들어 각간의 위치까지 올랐다.김제공은 거처를 왕경숲 근처로 옮기고 스스로 궁술을 익혔다. 그리고 무인들과 벼슬아치들을 암암리에 포섭해 세력을 키웠다. 그의 목적은 원성왕의 세력을 꺾고 김주원을 모셔오는 것이었다.그러나 원성왕의 세력을 휘어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성왕 김경신은 타고난 무인체질로 활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태자 인겸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왕가로 뿌리를 내리며 튼튼한 울을 두르고 있었다.김경신이 오랜 장계를 통해 왕좌에 올랐듯이 김제공 또한 그의 튼튼한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장계를 세우고 곳곳에 복수의 함정을 마련했다.첫 번째 김제공의 복수는 쉽게 진행되는 듯했다. 792년 원성왕이 즉위 8주년을 기념해 전개하는 야간사냥 날이었다. 왕이 태자와 왕자를 대동하고, 대신들과 함께 대대적인 규모의 야간사냥을 축제로 진행하는 때를 기회로 잡았다. 많은 군사가 동원되고 무인들이 대거 참여해 위험했지만 오히려 반란세력들도 자연스럽게 사냥에 참여할 수 있었다.제공의 세력은 이날 왕과 태자를 한꺼번에 사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준비한 사냥감을 풀어 왕과 왕자팀이 두 곳으로 갈라지게 하고는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이날 사냥에서 왕은 충신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태자 인겸은 사냥감과 함께 함정으로 만들어놓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사고였다. 김제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덫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원성왕 또한 워낙 자신만만한 시기였고, 반대세력 또한 드러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반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태자를 잃어버린 원성왕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에게 벼슬을 주어 궁궐 가까이 두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구도를 한층 더 두텁게 했다.원성왕은 태자를 잃은 이후 사냥의 횟수를 크게 줄였다. 즐기던 야간사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천상 무인이었던 거친 기질의 원성왕도 나이가 들면서 차츰 기운이 쇠락해 갔다. 둘째 아들에 대한 왕위 수업과 손자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원성왕의 아들을 잃은 슬픔이 잊혀 갈 무렵 김제공의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을 맞은 해였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 축하연을 조촐하게 궁 안에서 열었다. 축하연에 이은 야간사냥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조촐한 행사로 진행했다.축하연에 참석했다가 늦게 동궁으로 돌아가는 태자의 말이 목에 피를 토하며 넘어졌다. 술에 취한 태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 김제공 무리들의 비수가 원성왕 두 번째 아들의 목줄을 끊었다.궁궐에서는 잠든 왕실로 잠입하려던 김제공의 무리들이 기다리던 왕의 비밀 호위군사들에게 포박을 당했다. 10년 복수의 칼을 갈며 준비했던 김제공의 난은 왕자 두 명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원성왕의 마음에 비수를 던지는 일로 막을 내렸다.원성왕 또한 8주년 축하연의 사냥에서 입은 상처와 연거푸 아들을 잃은 심적인 충격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원성왕은 즉위 14년인 798년 손자 준옹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그의 장계에 종지부를 찍고 저승으로 떠났다.제39대 소성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신라의 왕위는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②외세의 간섭…호시탐탐 뻗어오는 검은 손, 금은보화로 눈 가리고 ‘만파식적’에 슬금슬금

원성왕은 즉위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당시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춘추를 풀어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곡례, 논어, 효경 등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했다.왕은 조상의 5묘를 만들어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고 재상과 중앙과 지방정부의 조직을 정비했다. 발해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두텁게 하고, 봉은사를 건립했다.원성왕은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죽어 둘째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차례로 죽어버리자 인겸의 아들이자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삼아 나중에 39대 소성왕이 되었다.원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중국을 비롯 일본에서도 사신을 보내 보물 만파식적을 보고 싶어 하는 등으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연회 국사가 번번이 해결책을 내놓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야사가 설득력 있다.◆삼국유사: 신라 보물 노리는 외세왕은 진실로 잘되고 못 되는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은 조정의 만파식적을 전하여 왕에게 넘겨주었다. 왕이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정원 2년은 병인년(786)인데 10월11일에 일본의 문경왕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고자 했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은 사신에게 “짐도 윗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라고 말했다.다음해 7월7일 다시 일본왕은 사신에게 금 1천 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천 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왕이 즉위한 지 11년째인 을해년(795)이었다.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보름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 다음 하루는 두 여자가 궁 안에 들어와 “저희는 동지와 청지에 있는 두 용의 마누라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바꾼 다음 통에 넣고 돌아갔습니다”고 했다. 이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남편들은 나라를 지키는 용입니다”고 청했다.왕은 쫓아가 하양관에 이르러 손수 잔치를 베풀면서 하서국 두 사람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용 세 마리를 잡아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만약 사실대로 이르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그러자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풀어주니 물살을 한길 남짓 튀기면서 기뻐 뛰며 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왕의 명석함에 탄복하였다.왕이 하루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를 안으로 불러들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려 묘정이 매번 금광정에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안에서 잠겼다 올랐다 하였다. 묘정이 그때마다 남은 음식을 먹이며 놀았다. 50일간의 화엄경 강의가 끝나자 묘정이 자라에게 “내가 너에게 덕을 베푼 지 여러 날인데 무엇으로 갚아주겠니”라고 말했다.며칠이 지나 자라가 작은 구슬 하나를 마치 주려는 것처럼 뱉어냈다. 묘정이 그 구슬을 가져다가 허리띠 끝에 달고 다녔는데 그런 다음 대왕이 묘정을 보고 매우 아껴 내전에 불러들여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다. 그때 잡간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또한 묘정을 아껴 함께 가도록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같이 당나라에 들어가자 당나라 황제 또한 묘정을 보고 총애하니 주변의 정승들이 우러러 마지 않았다. 점을 치는 신하 한 사람이 “이 승려를 살펴보니 하나도 좋은 관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들로부터 존경과 믿음을 받으니 반드시 특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했다.사람을 시켜 검사해 보자 띠 끝에 작은 구슬이 보였다. 황제가 “짐이 여의주 네 낱을 가지고 있다가 지난해 하나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곧 내가 잃어버린 것이로구나”라고 말했다.묘정은 구슬을 얻은 일을 모두 갖추어 설명드렸다. 황제가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을 가만히 맞추어보니 같은 날이었다. 황제는 그 구슬을 두고 가라고 하였다. 다음부터 사람들이 묘정을 믿고 아끼는 일이 없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외세의 간섭원성왕은 즉위식에 이어 왕권 강화를 위해 축하연을 열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선보였다. 원성왕은 주연에서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직접 만파식적으로 태평가를 연주했다. 축하연에 참석했던 대신은 물론 모든 이들이 태평가의 연주에 맞춰 어깨동무하기도 하며 흥겨운 춤을 추었다.당시 축하연에 참석해 만파식적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술에 취했던 사람도, 근심 걱정이 많았던 사람도, 몸에 병이 들었던 사람도 모두 건강하게 활달해졌다. 축하연에는 당과 일본의 사신도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에 대해 보고했다.일본의 왕은 사신에게 50냥의 황금을 보내 만파식적을 한 번만 구경할 수 있도록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일본 왕의 저의를 의심해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고, 만파식적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깊이 감추었다. 일본의 왕은 끈질겼다. 다시 사신에게 1천 냥의 금을 주어 만파식적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은 3천 냥을 주어 위로하며 돌려보냈다.당나라 사신도 황제의 명을 받아 신라 궁궐을 찾았다. 역시 만파식적을 빌려 가려는 수작이었다. 당나라 사신은 일본 사신들이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원성왕의 측근에 있는 대신들에게 접근해 기회를 노렸다. 당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주술사들을 동원해 여차하면 술법으로 만파식적을 가져가려 했다.그러던 중 당나라 사신들은 만파식적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영물이 신라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꿩 대신 닭이 아닌 봉황을 잡은 셈이었다. 당나라 사신들은 신라 궁성 주변에 웅크리고 있는 영험한 힘을 가진 세 마리의 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신시켜 호리병에 넣어 도주했다.용의 아내들이 이러한 사실을 원성왕에게 보고해 신라의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원성왕은 자신의 길을 안내해주던 도력 높은 연희 스님을 모셔오라고 명했다.신하들이 연희스님을 모시려 파발마를 출발시키려는 때 삿갓을 깊이 눌러 쓴 훤칠하게 키가 큰 스님이 “먼 길 가는 수고를 덜어주려 하오”라며 궁으로 안내하라 전했다.연희 스님은 원성왕의 부탁을 직접 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사흘 만에 호리병 세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왕을 대동하고 월지와 황룡사, 분황사를 돌며 호리병에서 물고기를 방사했다. 물고기는 청룡, 황룡으로 모습을 바꾸어 모두 거대한 용오름으로 한차례 춤사위를 보이고는 다시 연못으로 들어갔다.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해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수행하던 연회 스님은 원성왕의 부름에 거절할 수가 없어 국사의 직을 맡았으나 나라에 위기가 발생할 때에서야 해결책을 내놓곤 할 뿐 일체 국사에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에만 정진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①즉위…한 발 물러나 ‘힘의 구도’ 재편 천재지변에 왕좌를 움켜쥐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이다. 그는 내물왕 12대손으로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6대 혜공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김양상을 선덕왕에 즉위하게 하고 김경신은 스스로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잡고는 본격적인 권력의 구도를 재편하기 시작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어디에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혜공왕을 살해하고, 김양상을 또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경신의 왕권에 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결국 원성왕 즉위 이후 신라는 왕좌를 두고 죽이고 죽는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천 년 사직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삼국유사: 원성대왕이찬 김주완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때 원성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자리에 있었다. 왕이 하루는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깨어나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다. “두건을 벗은 것은 직위를 잃는 조짐이고, 십이현금을 낀 것은 형틀을 차는 징조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히는 징조이고요.”왕은 이를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이 은밀히 왕을 뵙고자 하였으나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다시 통지가 오기를 “한 번만 뵙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응낙하였다.“공께서는 무슨 일로 그다지 꺼리십니까?”왕은 꿈을 점친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고 “이는 곧 매우 좋은 꿈입니다. 만약 공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께 맞는 해몽을 해 드리지요.”이에 왕은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 오지 못하게 한 다음 해몽을 부탁했다.“두건을 벗은 것은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 위에 없음이요,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십이현금을 낀 것은 열두 손대까지 이어질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움입니다.”“위로 주원이 있는데 어찌 윗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 하자 “청컨대 은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지내면 됩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랐다.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죽었다. 사람들이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와 즉위하였다. 주원의 부하들이 모두 복종을 하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바로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고 김씨인데 대개 좋은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주원은 명주로 물러가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어 그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내려 주었다. 왕의 후손이 다섯인데 혜충태자, 헌평태자, 예영잡간, 대룡부인, 소룡부인 등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경신의 조용한 쿠데타김경신은 전략가이면서 행동가이지만 직접 행하는 것보다 심복이나 주변 인물을 시켜서 뜻을 이루어가는 지시형 스타일이다.김지정의 난을 유발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도 김경신의 전략에 의한 작품이다. 이 또한 김경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철저한 계획에 따른 절차였다.김양상이 선덕왕에 즉위하면서 상대등의 자리를 꿰어찬 김경신은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경신은 선덕왕과 대신들이 자신보다 위의 상재로 있는 김주원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있을 때도 노골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장기적인 충실한 계획이 있었고 그는 또 그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김경신은 상대등으로써 입지를 굳혀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인사와 재정, 공부와 형부, 예부까지 대신들을 모두 자신의 수족으로 채웠다. 그 시간이 5년이나 걸렸지만 김경신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선덕왕 재위 6년에 이른 어느 여름 태풍이 동해안을 휩쓸고 서라벌에 상륙할 때였다. 김경신은 조용하게 병부의 대신을 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태풍이 서라벌을 지나갈 무렵 알천이 범람하는 때가 거사일이요. 만약에 대비해 병사들을 배치하고, 대신들에는 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함구하시오”라고 조용히 밀지를 내렸다.김경신은 전략가답게 김주원의 집이 알천을 건너 북쪽에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권을 손에 넣는 방법을 선택했다. 알천이 범람하면 북쪽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길은 차단된다. 토함산 고개를 넘어 명활산성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지만 지세가 험하고, 우기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목 때문에 군사들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알천은 매년 여름 적어도 두세 번은 범람했다.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면 궁궐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북쪽의 집을 고집했던 데는 뚜렷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선조들의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것과 복잡한 업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김경신은 그 두 가지를 아주 적절하고도 교묘하게 이용했다. 상재의 위치에 있는 김주원에게 잡다한 민원성 업무는 모조리 넘겼다. 골치 아프게 내전에서 일하도록 주원을 묶어두고, 대내외적인 행사는 상대등인 김경신 자신이 처리하면서 실권을 휘둘렀다. “백성의 아픔을 헤아리는 중요한 일은 상재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원을 인정해주는 척하며 철저하게 내전에 고립시켜 각 부서의 실권자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다.내성적인 김주원의 성격을 파악한 김경신의 약삭빠른 처세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주도면밀해 김주원도 무어라 항변할 길도 없었다.선덕왕 6년 785년 음력 칠월 그믐께 긴 장마가 기승을 부리며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돌변해 알천이 크게 범람한 깊은 밤. 비수를 품은 김경신이 왕을 치료하는 의사를 대동하고 왕의 침소를 찾았다. 내실 주변에는 살수의 눈을 번뜩이는 김경신의 병사들이 곳곳에 몸을 숨기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불편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만 겨우 일으켜 앉은 선덕왕은 주치의가 들고 온 약사발을 청하여 받아들었다. 왕은 김경신을 지긋이 바라보며 “내가 진작 대업을 경에게 넘겨야 하는데 눈 어두운 대신들의 중언부언에 밀려 늦었소. 백성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라오”라며 부탁하고는 천천히 약사발을 기울였다. 선덕왕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과 김경신이 추진하는 전략을 인지하고, 그의 뜻을 암묵적으로 따르기로 벌써 작정하고 있었다. 선덕왕은 이제나저제나 하던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왕표를 받아든 김경신은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오. 아무도 피 흘리지 않고, 백성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겠소”라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선왕을 반듯하게 누이고는 천천히 돌아서 성큼성큼 왕좌에 올랐다. 그가 신라 제38대 원성왕으로 52대 효공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본격적인 신라 멸망으로 가는 피의 시대 개막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혜공왕…정사 외면하고 백성을 등진 임금 분노의 파바람 천지가 진동하네

신라 제36대 혜공왕은 경덕왕이 하늘에 빌어 늦게 낳은 아들이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각간의 난을 비롯 많은 반란이 있었다.혜공왕 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났던 것은 측근과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정치적인 목적에서의 싸움과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오락에 빠져 이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반란이 주를 이루었다.혜공왕은 결국 김지정의 난이 발생해 김양상과 김경신이 진압하는 과정에 살해되는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혜공왕 때 처음으로 5묘를 지정해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5묘는 김씨의 시조 미추왕,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문무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이다.혜공왕은 경덕왕에 이어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었는데 1460년 영묘사로 옮겼다가 홍수로 떠내려가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관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을 새로 지어 지금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삼국유사: 혜공왕대력 초년(766)이었다. 강주의 관청 건물 본관의 동쪽 땅이 점점 함몰하더니 연못이 되었다.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인데 어디선가 잉어 대여섯 마리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연못 또한 따라서 커졌다.정미년(767)에 이르러 천구성이 동쪽 누각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꼬리는 3척쯤 되며 색깔은 타는 불 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또 이해 김포현에서는 논 5경 가운데 모든 쌀알이 이삭이 되었다. 이해 7월 북궁의 뜨락에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하나가 떨어졌는데 세별이 모두 땅속에 파묻혔다.이보다 앞서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가닥 연꽃이 피어났고, 또 봉성사 밭 가운데서 연꽃이 피었다.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공작새가 수없이 모여들었다.안국병법의 하권에 따르자면 천하에 군사가 큰 난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때 대사면을 내리고 살펴보며 조심하였다.7월3일 대공 각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왕도와 5도의 주군 모두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워 큰 난이 일었다. 대공 각간의 집은 없어지고, 그 집의 보물과 비단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신성과 장창에 불이 나 타버렸다. 역모를 저지른 무리의 보물과 곡식은 사량과 모량 등 마을 가운데 있었는데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난은 석 달 남짓 되어 그쳤다. 상급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고, 죽임을 당한 자도 무수히 많았다. 표훈대사의 말에 나라가 위태롭다 함이 이것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왕의 죽음혜공왕은 어려서부터 후궁과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심성 또한 점점 여성스러움에 길들여졌다. 왕위에 올라 있었지만 어머니의 섭정으로 정사가 진행되자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경향을 보였다. 혜공왕이 성인기에 접어들었어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 등의 대신들이 정치를 주물렀다.김양상 등의 대신들이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그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실세에서 밀려난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 김사인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기를 들면서 대신들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혜공왕 초기에는 김사공과 김사인 등의 대신들이 상대등과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양상이 상대등에 오르는 등으로 세력의 균형이 바뀌면서 대립의 강도가 커졌다.김사인 계열의 김대공과 대렴 형제가 각간들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공 형제는 지방의 귀족까지 상당히 많은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궁궐 내부까지 진입하지는 못했다. 중앙세력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96명의 각간들이 서로 패가름을 하여 전쟁을 치른 결과 대공 형제는 실패해 죽음을 맞았다.대신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혜공왕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혜공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음색에 빠져들며 정사에는 소홀하고, 대를 이을 후계자 또한 마땅치 않았다. 이러한 정황들은 무열왕의 12대손인 김경신이 최고 권력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특히 혜공왕이 여색을 가까이하는 한편 대신들의 자제 가운데 인물이 뛰어난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밤을 보내는 등으로 대신들의 공적으로 떠올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과 대신들의 이합집산은 김경신이 자신의 자리를 굳혀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김경신은 내물왕의 직계인 김양상이 상대등의 자리에 앉자 적극 동조자가 되어 김주원과 함께 내물왕계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했다. 경신은 김양상을 앞세워 병권을 거머쥐고, 인사·재정·공부에 이어 형부까지 전권을 수중에 집어넣었다.김경신은 반골기질이 뚜렷한 김지정을 희생의 제물로 점지했다. 그의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혜공왕의 여자 아닌 남자로 만들었다. 이어 속이 달아오른 김지정을 벽지 고을로 보낸다는 소문을 흘려 감정의 꼭짓점을 한껏 자극했다.김지정이 김경신의 그물망에 뛰어들었다. 김지정은 지방의 귀족세력까지 두텁게 포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각간의 난을 교훈 삼아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지방의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궁궐 내부 깊숙이 동조세력을 심었다.혜공왕이 24세의 생일을 자축하는 잔치를 1주일에 걸쳐 벌이는 기간이 김지정이 잡은 반란 D-Day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김양상과 김경신의 무리도 왕의 잔치에 적당히 취해 자리를 피하고, 자신의 세계로 빠져드는 혜공왕의 침소까지 김지정은 쉽게 접수했다.김지정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개로 삼은 혜공왕을 단칼에 죽였다. 그러나 나라의 왕좌에 오를 주인공을 정하지 못했다. 김지정의 무리가 왕좌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궁궐 내외부의 분위기는 더욱 어지러워졌다.김경신이 깔아둔 덫이었다. 김지정을 지원하고 나섰던 궁궐 내부의 조력자 대부분이 김경신의 사주를 받은 첩자들이었다. 혜공왕의 죽음을 묻어두고 자신들의 공을 서로 추켜세우기도 하며 어수선한 분위기에 빠져 지방의 동조세력 우두머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이던 어느 날. 술을 마신 김지정의 무리는 모두 약물에 마취되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다음날 아침 포승줄에 묶여 올가미를 쓴 채 무릎을 꿇었다. 김지정의 일족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김경신은 무열왕의 10대손 상대등 김양상을 왕위에 올렸다. 김경신의 잔꾀로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이다. 이어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어 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김양상의 조카 김주원이 서열상 자신의 윗자리에 있어 다음 전략을 추진해야 했다.김양상은 천성이 곱고 선이 굵지 않았으며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김경신이 주장하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왕관을 쓰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지 6년에 접어드는 시기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혜공왕과 선덕왕의 죽음은 김경신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작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덕왕과 표훈대덕…하늘의 경고에도 ‘딸보다 아들’ 욕심에 대가를 치르다

경덕왕이 통일신라 불교문화를 최고의 극치에 이르는 정점으로 끌어올린 시대의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덕왕의 큰아들이 왕비의 폐비에 이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둘째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 정치에 휘둘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경덕왕은 귀족세력이 오랜 기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왕위까지 능히 간섭하는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여러 각도로 추진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도 곳곳에서 나타난다.당시 불교적 사상이 통치이념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진표, 법해와 대현, 원표스님과 월명사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스님과 교류를 맺었던 기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안민가를 지어 바친 충담,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에 관여한 표훈과의 교류는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를 뚜렷하게 조명한다.삼국유사가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행사했던 스님으로 분류하고 있는 충담과의 관계에 이어 표훈과의 관계를 살펴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표훈대덕왕은 옥경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왕비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폐위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는 만월부인이다.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김의충 각간의 딸이다.왕이 하루는 표훈대사를 불러 명을 내렸다. “짐이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사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었으면 하오.”표훈이 상제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상제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고 답했다.“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오.”표훈이 다시 상제께 이를 청하자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씀을 전하자 왕이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라고 말했다.곧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섭정했지만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어린 왕은 여자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표훈대사 다음으로 신라에는 성인이 나지 않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고민과 표훈대덕성덕왕이 이뤄 놓은 왕권의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려 버렸다. 김순원과 김순정, 김의충 등이 성덕왕에 이어 효성왕, 경덕왕까지 자신들의 딸을 왕비로 추천하면서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 전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권, 인사, 재정, 형부, 공부, 예부 등 여섯 부문의 주요 관직을 꿰차고는 끝없는 힘겨루기로 권력구도를 재편하며 나라 살림이 기우는 것도 몰랐다.경덕왕은 즉위 1년 만에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비를 내쫓고 새로운 왕비를 맞도록 하는 등 왕실 내부까지 귀족세력의 힘이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자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하게 관제를 개혁했다.국학을 장려하기 위해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고 관직의 명칭을 크게 바꾸었다. 또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는 정찰을 임명해 권한을 주어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다. 지방관리들에게 월급 대신 녹읍을 주어 부정부패를 없애려 했다.경덕왕은 대신들이 왕비와 후궁을 선택해 궁궐로 들여보내 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계 구도를 잇기 위해 태자가 태어나지 못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했다. 이어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왕비를 폐비하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간청했다.경덕왕은 스스로 왕비를 지키지 못하는 지아비는 백성의 아비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대신들의 세력으로 폐비 절차를 밟는 일은 없애겠다고 다짐해 처음 이후 그를 지켰다.백성의 정신적인 평안을 위해 불교를 장려해 굴불사와 불국사를 건립하고, 석굴암을 축조했다. 내적으로는 관제 개혁에 이어 태자 살리기 전략을 구상했다. 대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후궁세력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무인들을 암암리에 배치하고 운영하는 조직을 가동했다.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거대한 용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데 옷자락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정도로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초청해 국사를 맡겼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점잖게 사양하면서 “제게서 공부한 제자 표훈이 있사온데 옆에 두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자를 천거했다.경덕왕이 그의 말을 듣고 의상의 제자 표훈을 황룡사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들었다. 그때 저녁 공양 이후에는 표훈이 어김없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훈이 탑돌이를 할 때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는데 발자국을 뗄 때마다 공중을 마치 평지처럼 내달으며 9층 목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탑 외부를 공중부양한 채 목탁을 치며 낭낭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표훈은 이미 경덕왕이 자신의 도력을 시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왕이 보는 앞에서 공중을 부양하며 탑돌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왕은 표훈의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주변을 지키며 후궁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이어 경덕왕은 누구든지 왕비와 후궁들이 아이를 낳는데 방해를 하거나 위해를 끼치면 역적과 같이 간주하고, 3대를 멸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어 여섯 명의 후궁들이 아이를 편안하게 낳을 수 있도록 각자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왕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다.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어가도록 왕비와 후궁 누구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비는 물론 여섯 명의 후궁들까지 아무도 임신조차 못했다.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태자에 대한 욕심이 깊어졌다. 또 대신들의 끝 모를 정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태자의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왕은 대신들에게 천명했다. 왕비는 물론 후궁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을 낳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했다. 이어 태어나는 태자의 안전을 위해 왕실과 같은 수준의 호위를 받게 해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 이후 3년이 지나 기적같이 왕비가 아들을 낳았고, 표훈이 동궁 주변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결계를 치고, 태자의 신변을 지켰다.경덕왕은 태자가 8살 되던 해에 죽음을 맞으며 태자가 왕위를 잇고, 왕후가 섭정하며 대신들이 모두 협조하도록 유언했다. 대신들의 세력 다툼은 경덕왕이 죽은 이후 더욱 기승을 부려 아들 혜공왕은 끝내 반란군의 칼에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불교문화 꽃 피운 찬란한 시절 끝 꺾여버린 국운…‘혼란의 시대’ 들어서

신라 35대 경덕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첫째 아들이 태자로 책정되었다가 왕비 폐위에 이어 사라졌다. 어떤 기록에는 죽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은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이름이 알려진 김교각이 첫째 아들이라 전한다.성덕왕이 새 왕비를 맞아들이면서 뒤늦게 태어난 둘째 아들이 효성왕이다.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도 귀족들의 정치세력 다툼에 따라 진행된 요식절차와 같았다. 그러나 경덕왕은 23년, 비교적 긴 시간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의 강화를 통한 안정적인 정치를 하려고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경덕왕은 통일신라 가장 화려한 중대 말기의 왕이다. 불교문화의 극치를 이루고, 문화예술적으로도 가장 최고 정점에 이르렀던 시대로 평가된다. 불국사와 석굴암 등의 뛰어난 문화예술과 과학적 기술력은 오히려 현대적 과학을 앞선다고도 평가된다.그러나 아들을 얻기 위해 왕비를 몰아내고 새로운 부인을 얻는 등의 상당히 무리한 정치로 신라 중기를 끝내고 하대로 이어지는 시대를 맞는 부덕한 왕이 되고 말았다.충담과 표훈 같은 고승과의 대화에서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와 말기정치로 이어지는 엇갈림을 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충담사당나라 사신이 도덕경 등을 보내와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아들였다.옹이 다스린 지 24년째였다. 5악과 3산의 신들이 간혹 어전의 뜰에 나타나곤 했다. 3월3일. 왕이 귀정문의 다락에 올라 주위 신하들에게 “누가 거리에 나가 좋은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그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엄 있게 잘 차려입고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다가 왕 앞에 보였지만 “내가 말하는 좋은 스님이 아니다”고 했다.다시 한 스님이 허름한 중 옷을 입고 앵통을 진 채 남쪽에서 왔다.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다락 위로 불러오게 했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가 가득했다.“그대는 뉘신가?”“충담이라 하옵니다.”“어디 다녀오시는겐가?”“저는 매번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지금 막 바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과인에게도 차 한 잔 주실 수 있는가?”충담은 곧 차를 끓여 바쳤다. 차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자욱했다.“짐은 일찍이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그렇습니다.”“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잘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주실 수 있는가?”충담은 곧바로 명령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좋다’ 하고 왕사에 봉하였다. 충담은 거듭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노래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하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 찬기파랑가는 또 다음과 같다.구름 장막을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에/ 기파랑의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 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랑이시여.◆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명을 고치고 행정 관제를 정비했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삽량주를 양주로 고쳤다. 청주는 강주, 한산주는 한주, 웅천주는 웅주, 하서주는 면주, 완산주는 전주, 무진주는 무주로 고쳐 지금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관직명도 크게 고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국사, 석굴암을 지으면서 불교중흥을 꾀하는 한편 당나라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유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려는 고심한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충담 스님을 궁궐로 불러 백성을 위한 정치를 물어 ‘안민가’를 받아들고 충담을 왕사로 초빙하려 했다. 충담이 간곡히 사양하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충담은 매이는 것을 싫어하며 혼자 공부하고, 거리낌 없이 행하기를 즐겨 했다.충담은 도력이 높았다. 한 번 발걸음에 30여m의 거리를 내닫고, 범인들이 아무리 달려 따라가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흔적을 못 찾게 되었다. 남산의 삼화령을 오르내리며 미륵세존에 공양을 하곤 했지만 남산 신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남루한 의복으로 경덕왕에게 나타나 안민가를 지어 바친 것도 일부러 백성을 위한 임금의 의지를 시험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충담은 나라의 대들보로 기능하고 있던 화랑들을 격려하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시로 지도하는 일도 비밀스럽게 맡아 했다. 훌륭한 기파랑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어 화랑들의 표상으로 삼게도 했다.경덕왕은 관리들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 관리들을 감찰하는 기구를 두어 소홀한 관리는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파면하기도 했다. 이어 충성스런 신하들의 바른말은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천재지변이 일자 상대등 김사인이 상소를 올려 정치의 잘잘못을 이야기하자 경덕왕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순이 풍악을 즐긴다는 왕에 대해 충고했다. “제가 듣기로 중국 하나라 주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오락을 즐겨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 아뢰었다. 경덕왕은 이후 풍악을 그치게 하고 이순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다.경덕왕은 백성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살폈다. 웅천주(공주)에 사는 향덕이란 백성이 너무 가난해서 아버지를 모시기 어려워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봉양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많은 선물을 내리고 정표문을 세우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대했던 꿈 어디가고 이룬 것 없이 사라져 되풀이 되는 역사 씁쓸한 뒷모습만

신라 34대 효성왕과 35대 경덕왕은 32대 효소왕과 33대 성덕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너무나 닮았다. 효소왕과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이자 형제다. 효소왕이 즉위 10년 만에 죽자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35년간 나라 살림을 돌봤다.효성왕과 경덕왕 역시 성덕왕의 아들이면서 형제로 효성왕이 5년간의 짧은 기간 왕위에 있다가 물러나고 동생인 경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24년간 나라의 살림을 책임졌다.두 형제 모두 처음에는 귀족들의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 성공하고, 차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경덕왕도 성덕왕과 비슷한 입장이었다.이러다 보니 효성왕도 효소왕과 같이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 가야 했다. 삼국유사 효성왕조에 효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성덕왕 당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관문성 이야기와 관문성과 관련된 원원사 이야기를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재구성해 본다.◆삼국유사: 효성왕개원 10년은 임술년(722)인데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을 지었다. 지금 모화촌은 경주의 동남쪽 경계에 속하고, 일본을 방어하던 요새이다. 둘레가 6천792보이고 높이가 5척이다. 일한 사람이 3만9천262명이며, 맡아서 한 이는 원진 각간이다.개원 21년은 계유년(733)인데 당나라가 북쪽 오랑캐를 치고자 신라에 군대를 청하러 사신 604명이 왔다가 돌아갔다.-역사: 관산성을 쌓은 722년과 당나라 사신이 다녀간 733년은 성덕왕 때이다. 성덕왕은 702년에 즉위해 7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복형인 태자 중경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궁궐을 나가자 성덕왕에 이어 34대 왕으로 737년 즉위해 742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었다.효성왕은 김순원의 딸,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와 결혼했다. 김순원 세력의 외압에 의한 강제적인 왕비 책봉이었다. 때문에 왕비에 대한 사랑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효성왕이 영종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왕비가 이를 질투해 후궁을 죽였다. 영종이 이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다.효성왕은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동생을 태자에 책봉했다. 효성왕의 동생이 35대 경덕왕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문성과 원원사지-원원사(遠願寺)는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점에 문무왕 당시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 건립됐다. 김유신과 김의원, 김술종 등의 대신들과 밀교의 종파인 신인종을 신라에 들여온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 낭융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호국사찰이다.사찰에서는 법회를 이어가며 국운을 강하게 하는 주문을 외웠다.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는 공부를 하는 한편 무술을 익혀 뛰어난 병사로 양성되었다.원원사지 동서 쌍탑은 가운데 석등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펼치는 진법의 중심 설치물로 건립됐다. 삼층석탑의 상층기단 면마다 3구씩 십이지상을 새기고, 탑신에는 악을 물리치는 사천왕상을 입체적으로 두텁게 새겨 넣었다. 사천왕과 12지신은 불교의 대표적 신장상으로 불법을 수호함과 동시에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문두루비법이 펼쳐지면 신장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구름을 타고 날아가 적들을 물리친다. 탑에 새겨진 신장상들은 지금도 금방 튀어나올 듯이 현실적으로 새겨졌을 뿐 아니라 붓으로 그린 듯이 섬세하게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김유신과 김술종은 명랑이 사천왕사를 지어 당나라 대군을 방어한 법력을 지켜보고, 왜군들이 신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경계지점에 호국사찰을 짓는데 직접 나섰다.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를 막기 위해서는 사천왕사가 제 몫을 하고 있지만 왜군을 막기 위해서는 별도의 군사적 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원원사를 서둘러 건립했다.사천왕사는 양지스님과 명랑법사가 법회를 이어가고, 원원사에는 명랑의 제자 안혜와 낭융 등이 주지하며 호국불법을 펼치게 했다.성덕왕 18년인 719년에 왜병들이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해왔다. 당나라를 섬기면서 왜나라와는 교류를 단절하고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명랑으로부터 술법을 이어받은 안혜와 낭융 등이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 이들의 술법은 법력이 약해 왜군 절반은 바다에서 침몰했으나 절반은 육지로 올라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관문성: 성덕왕은 원원사의 법력을 보완하기 위해 치술령 줄기를 따라 울산 바다로 이어지는 띠처럼 12㎞의 장성을 쌓았다. 산과 산을 잇고, 계곡을 메워 성을 길게 쌓아 신라의 만리장성이라 불렀다.성덕왕은 백성들의 안위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성덕왕은 궁궐 내부에서 김순원과 김순정 형제가 득세해 온갖 모략을 펼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리를 하지 못했다.단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수시로 평복으로 갈아입고 암행에 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필요한 정책들을 입안해 실천하곤 했다.울산과 양남지역 등의 동해안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역적으로 방어벽을 쌓아 올렸다. 만리장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이 4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덕을 등지고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외벽에서는 15m 이상 높았지만 내벽에서는 대부분 쉽게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쌓아 성을 방어하기에 쉽도록 했다.-성덕왕 18년 대규모 군함을 끌고와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병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병들의 목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꺾어버리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적의 화살과 칼질을 막는 갑옷도 입지 않았다. 머리에 절간의 화부가 두르는 두건을 질끈 두르고 여자라 할 정도로 날씬하게 허리에 끈을 묶고 있었다.기림사 광유선승의 절기를 이어받은 유천이었다. 유천은 김유신과 천관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천관이 몰래 낳아 기른 김유신의 아들이다. 유천은 본래 자질이 뛰어난 데다 기림사에서 글공부와 무학을 깊이 있게 갈고 닦아 성취가 높았다.유천은 기림사와 골굴사로 이어지는 혈사에서 우연히 광유선승의 깨달음을 얻는 기연으로 환골탈태했다.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지경에 이르는 도학을 깨우쳐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다.천관이 죽음에 이르러 유신과의 관계를 차분히 일러 주었다. “네 아버지는 나라의 기둥이신 김유신 장군 이시다.”유천은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에 품고, 김유신 장군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매초성전투에 참가해 먼발치에서 싸움에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유천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는 아버지와 해후했다. 이어 아버지가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 화부로 들어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묵묵히 이어갔다. 왜구들은 유천의 용보다 크고 원귀와도 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백 년 간 원원사와 관문성 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귀족 권력 다툼에 13세의 어린 왕은 왕비마저 빼앗기고

신라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 효소왕이 702년 17살의 나이로 죽자 성덕왕 또한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성덕왕은 35년간 왕위에 있었다. 전쟁이 없어 신라 중기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로 평가되는 시기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개발했다. 그러나 형 효소왕이 17세에 사망하고, 성덕왕도 세자 책봉의 과정 없이 어린 나이에 국인들의 추천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의한 왕손들이 자리에 오르고 내렸던 것으로 국정이 귀족들에 의해 움직여 왕권은 약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성덕왕이 첫 번째 왕비를 내치고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성덕왕의 아들 34대 효성왕도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김순원의 권력이 조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은 성덕왕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의 본래 이름이 중경이었다는 기록과 성덕왕의 첫 번째 세자 중경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성덕왕과 수로부인에 대한 삼국유사를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김교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는다.◆삼국유사: 성덕왕과 수로부인-성덕왕: 제33대 성덕왕 때인 신룡 2년 병오년(706)에 벼가 알곡을 맺지 않아 백성의 굶주림이 심했다. 정미년(707) 정월 첫날부터 7월30일까지 백성을 구하려 세곡을 풀었는데, 한 사람당 하루 3되씩을 기준으로 삼아 나누어주었다. 일이 끝나 계산해 보니 합계 30만500석 이었다.왕은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를 짓고, 인왕도량을 7일간 베풀면서 대사면을 내렸다. 처음 시중직을 만들었다.-수로부인: 성덕왕 때였다.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 바위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데 높이가 1천 길이나 되었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어 공의 부인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 없나요?”“사람의 발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종들이 그렇게 말하고 모두 손을 내저었다. 곁에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서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이틀쯤 길을 간 다음이었다. 또 바다 가까이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바다 용이 잽싸게 부인을 끌어다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공은 뒹굴며 땅을 쳤건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옛사람의 말에 ‘뭇 입은 쇠라도 녹인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한 놈이라도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가는 고충을 겪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교각의 새옹지마김교각은 통일신라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타고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시대는 짧았다.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 백성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농업과 상업 등의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효소왕을 17세에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다시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이찬 김순원은 일찍이 자신의 딸 소덕을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내보냈다. 다음해인 717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성덕왕은 집권 7년을 넘어서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으로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지역을 직접 돌아보는 행보를 자주 가졌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결국 왕비를 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태자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성덕왕은 김순원 세력의 정치적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태자인 아들 중경의 생명이 위험함을 직감하고, 왕은 중경을 내실로 불러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아들아, 아비가 못나 네 신병을 편하게 돌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비밀호위 일곱을 각자 너로 분장해 중국으로 피신하게 할 터이니 그중 하나와 승려로 위장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다시는 신라로 돌아올 생각도 말고.”어머니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본 중경은 왕인 아버지의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바라보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산소에 절을 올린 중경은 호위무사 김진과 함께 유람하듯 오히려 추적자의 뒤를 밟으며 중국으로 도망가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중경의 뒤를 추적하던 김순원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중국 경계지역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더이상 추적하지 마시오. 나는 살아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중경’이라는 목간을 받아들었다. 김순원도 일곱 갈래로 추적했던 대원들이 같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자 추적을 포기했다.성덕왕은 거짓 신분을 위장한 시신을 화장하고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순원 세력도 태자에 대한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태자의 사망 소식을 공식화하는데 동의했다. 이어 자신의 딸을 소덕왕후로 삼게 했다. 김순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심해져 성덕왕이 죽자 소덕왕후의 아들을 34대 효성왕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다른 딸을 효성왕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결혼해 왕비로 삼아야 했다.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어 도망할 때 입었던 승복을 그대로 걸치고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법을 전파하는데 열중했다. 김교각의 명성이 지장보살로 널리 퍼지면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김교각은 794년 99세 되는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하고 참선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그의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되었다.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아직도 그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다.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어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중국의 신도들이 제작한 입상으로 고향 땅 경주로 돌아와 대중을 만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제 사람 귀한 줄 알았던 죽지랑, 화랑 137인 거느리고 ‘득오’ 찾아나서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6세에 즉위해 어머니 신목왕후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나이가 어려 섭정으로 정치가 진행되면서 효소왕의 에피소드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 전해진다.효소왕은 즉위해 11년 만에 죽어 이렇다 할 업적은 없다. 낭산 동쪽에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확인되고 있지만 어머니의 주문으로 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망덕사 법회에서 진신석가와의 이야기, 만파식적 보물 잃어버린 것과 죽지랑, 부례랑 등 화랑들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효소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고, 33대 왕으로 동생 성덕왕이 즉위해 35년간 집권한다.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 이야기의 요약과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두 가지로 나누어 써본다.◆삼국유사: 효소왕대의 죽지랑제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 급간이 있었다. 이름을 화랑의 명부에 올리고 날마다 나오더니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득오의 어머니가 “당전 모량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발령했습니다. 서둘러 가야 할 길이 급해 낭께 사직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었지요”라고 답했다.죽지랑은 떡 한 바구니와 술 한 병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득오를 위로하러 갔다. 낭도 137인이 또한 의식을 갖춰 따르며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물었다.“득오가 어디 있느냐?”“익선의 밭에서 순서에 따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죽지랑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솔과 떡을 먹이려고 익선에게 시간을 달라 하면서 함께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익선은 완강하게 막으면서 내주지 않았다.마침 관원 간진이 퇴화군에서 세금 30석을 거두어 서울로 옮기다가 낭이 낭도를 귀중히 여기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익선의 꽉 막힌 태도를 답답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사지 진절이 타고 가던 말에서 안장을 풀어주자 그때서야 허락을 했다.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익선을 잡아 그 더럽고 추악한 때를 씻어 주라 하니, 익선이 도망가 숨어버렸다. 그러자 겨울에 익선의 아들을 잡아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어 죽게 했다.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데 때마침 온 나라가 전쟁통이라 기병 3천 명으로 지켜주게 하였다.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그 고개의 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거사 또한 공의 떨치는 기세가 매우 엄중함을 좋게 여겼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공이 삭주에 부임해 다스린 지 보름쯤 지나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어 더욱 놀라,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게 했더니 죽었다. 그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다” 하고, 다시 아랫사람들을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모셨다.아내는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태어나자 죽지라 이름 지었다. 어른이 되어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했다.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발전시켰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죽지랑과 망덕사-망덕사 유감: 망덕사는 경주시가지와 불국사역을 잇는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사천왕사와 마주보고 있다. 사천왕사터에서 동남산의 화랑교육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화랑교가 나오는데 다리 남쪽으로 펼쳐지는 논두렁 사이에 망덕사터가 있다.망덕사는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감추기 위해 갑자기 지은 호국사찰이다. 당나라 고종이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잇따라 실패하자 김인문과 함께 옥에 가두었던 박문준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다. 박문준은 당나라에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주 낭산 남쪽에 새로 절을 지었다고 들었다고만 대답했다. 고종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신라에 보냈다. 당으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사천왕사 남쪽에 새로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도착한 당의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안내했더니 그 사신이 문밖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하고 절로 들어서지도 않고 돌아섰다. 신라는 황금 천 냥을 주고 사신을 매수했다. 사신이 “신라에서는 과연 사천왕사를 지어 황수를 비옵디다”하고 거짓 보고했다. 새로 지은 절의 이름은 그 사신의 말대로 망덕사라했다.효소왕이 망덕사 법회에 참석했다.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왕에게 법회 참석을 부탁해 효소왕은 허락했다. 법회가 끝날 즈음 어렸던 효소왕이 스님에게 농담조로 “스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고 답했다.“스님은 돌아가시면 왕이 친히 공양하는 음식을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왕께서도 석가의 진신에게 정성을 바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 말하고 스님은 몸을 날려 남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효소왕은 크게 놀라 부끄러워하며 남산쪽으로 절을 하고, 스님을 찾아오게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스님을 찾지 못하고, 지팡이와 발우만 찾았다고 보고했다. 왕은 남산 비파암에 석가사를 세우고 스님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발우를 나누어 모셨다.-모량 참사: 죽지랑은 아버지 술종공으로부터 가전 무술을 이어받아 훌륭한 전사로 자랐다. 때문에 화랑도로 전쟁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죽지랑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법정과 함께 짝이 되어 김유신 장군의 전술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당나라를 몰아내는 매소성전투에서 죽지랑이 위험에 빠졌다. 이때 화랑 득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죽지는 득오를 끔찍하게 보살펴 주는 후원자가 되었다.삼국통일 이후 세력이 커진 모량의 익선이 화랑과 인재들을 포섭하면서 죽지랑의 군사였던 득오를 데려가 가둬 버렸다. 이에 격분한 죽지랑이 화랑들과 함께 모량으로 진격해 싸움을 벌였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 죽지랑은 상처 입은 몸으로 성으로부터 화랑과 군사적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익선이 도망가면서 그의 세력은 와해되고, 득오를 구해냈다.득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지랑이 상처를 입으면서 끝까지 싸움을 지휘한 데 감복해 더욱 충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두 영웅이 전한 보물의 울림에 적병은 물러가고 단비가 쏟아지네

신라 31대 신문왕은 이름이 정명으로 문무왕의 아들이다. 정명은 문무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6년째 되던 해에 태자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15년 동안 왕도에 대한 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신문왕은 문무왕이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를 적대 관계에서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디딤돌을 놓아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탄탄대로 같았다. 그러나 전쟁 끝이라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어지러운 시기였다.왕위를 이어받는 시점에는 장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그의 아내를 궁궐에서 내치는 등의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다.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동해에 이견대, 감은사를 지었다. 감은사 바닥에는 물길을 내어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특이한 구조다.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선물로 준 만파식적으로 평화스러운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신문왕편 만파식적에서 소개되고 있다.◆만파식적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김씨이다. 신문왕은 신사년(681년) 7월7일 왕위에 오른 후 돌아가신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에 감은사를 지었다.다음해인 임오년 5월 그믐께였다. 해관인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쪽 바다 가운데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 쪽으로 오고 있는데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다닙니다.”왕은 기이하게 여겨 일관 김춘질을 불러 물었더니 “돌아가신 임금께서 지금 바다용이 되어 이 나라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게다가 33천의 한 아들이신 김유신 공과 같이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주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해변으로 가신다면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고 했다.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 가마를 타고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았다.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신하가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 가서 잤다. 다음날 정오,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로 어두워지는데 7일간 이어졌다. 그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왕이 바다를 건너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쳐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마음으로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나더러 바치라고 했습니다”고 답했다.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 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으로 제사를 올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왕이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기림사에 이르러 서쪽 시냇가에 머무르며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이 궁궐을 지키다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경하하였다. 서서히 살펴보더니 왕에게 말했다. “이 옥대의 여러 구멍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구멍 하나를 떼어내 물에 담가 보시지요.”이에 왼쪽 두 번째 구멍을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시냇물은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지금까지 용연이라 부르고 있다.왕은 행차에서 돌아와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보관했다.◆장인의 목을 베고 만파식적으로 평화를 이루다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왜구의 침략에 대한 걱정과 함께 김흠돌의 반란 움직임에 대비책을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결국 김흠돌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사위가 왕위에 오르면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워낙 조심성이 많았던 문무왕인지라, 그는 아들 신문왕에게 김유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신검을 비법과 함께 전수했다. 또 그의 그림자로 움직였던 비밀결사대 조직도 고스란히 넘겼다.백전노장 김흠돌은 문무왕이 죽자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주인 태자 정명에게 “왕좌는 오래 비워두면 나라가 불안하니 빨리 즉위식을 해야 합니다”라며 즉위식을 촉구했다. 국상과 즉위식을 겹치게 해 혼란한 틈을 타 반란을 도모하려는 속셈이었다.정명은 어리지 않았다. 김유신의 신검으로 수련을 거듭하면서 속까지 가득 채워지는 기운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당백의 실력을 갖춘 결사대를 측근에 두게 되면서 자신감은 배가 되었다.“좋아요, 즉위식을 거행합시다. 백성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든든한 왕이 되겠다는 맹세를 하는 잔치로 식을 진행하겠습니다”며 정명은 당당하게 대답했다.정명은 장인 김흠돌 세력의 배후를 하나도 남김없이 파악했다. 그들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분석해 그들의 향후 계획도 깨알같이 알고 있었다. 즉위식은 그들이 움직이기 쉽게, 겉보기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게 틈을 마련해 두고, 일당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정명은 즉위식을 거대한 잔치로 진행했다. 중앙 귀족들은 물론 지방의 수령들도 한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정명은 신검으로 화려한 검무를 선보였다. 김흠돌뿐 아니라 모든 장군들조차 처음 보는 신묘한 검술이었다. 마지막에 높이 도약하면서 신검을 월지 가운데로 뿌리며 불기둥을 뿜어 올렸다. 이는 비밀결사대에게 내리는 명령의 신호가 되어 김흠돌 일당의 수뇌들 목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아연실색하는 김흠돌의 가슴에도 어느새 용포를 걸친 신문왕의 칼끝이 파고들고 있었다.김흠돌 세력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 가두고,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즉위식에 참여한 대중들을 향해 외쳤다.“나는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용서하지 않겠다. 짐은 선왕의 유지를 따라 오로지 백성들의 평화스럽고 행복한 날들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이다.”즉위식을 마친 신문왕은 백성을 위해 주검까지 바친 아버지의 희생에 감사하며, 장사지낸 동해에 감은사를 지었다. 또 감은사 바닥에는 용으로 화한 아버지가 쉴 수 있도록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신문왕이 감은사 상량식을 올린 이듬해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함께 거대한 물줄기를 타고 동해 한가운데에서 용오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안쪽은 호수와 같은 잔잔한 물 이랑이 윤슬에 반짝이고 조각배 위에 옥함이 빛을 받아 가끔 번쩍거렸다. 생시 같은 꿈에 놀란 신문왕이 다음날 동해로 행차했다.감은사 마루에 꿈에 보았던 그 옥함이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옥저와 옥대가 한 쌍으로 있었다. 옥대에는 용 무늬가 돌아가며 살아 움직이는 듯 조각되어 있었다. 피리를 손에 들자마자 향기를 뿜어내며 저절로 입에 닿았다. 피리는 미처 불기도 전에 천상의 소리가 흘러나오면서 마음이 편안해 졌다. 허리에 두르면 저절로 병이 낫게 될 뿐만 아니라 힘이 생기는 옥대, 불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만파식적, 신라의 보물이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용포가 아닌 갑옷이 익숙 평안함을 버리고 끝 향한 전쟁터로

문무왕은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왕으로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과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터이니 동해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은 눈물겹다. 문무왕은 나라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철저하게 방어함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했다. 스스로 무술을 익혀 전쟁터에서는 가장 앞에 나서서 적을 무찔렀다. 661년 왕위에 오르자 남산신성을 보수하고, 월성에서도 잘 보이는 게눈바위 부근에 큰 창고를 지었다. 백성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배가 든든한 마음이 들도록 무기와 쌀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의 유지를 받들어 고구려로 말을 몰아 668년 기어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왕위에 올라서도 용포를 벗어두고 갑옷을 입고 전쟁의 선봉에 섰다. 왕으로써 자신의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왕은 끝내 당나라 군사들까지 완전히 몰아내면서 진정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문무왕은 오늘날 위정자들이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길어 간단하게 요약해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의 전쟁사를 스토리텔링해 기술한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2)왕이 처음 왕위에 올라 남산에 큰 창고를 설치했다. 길이가 50보이고 너비가 15보이다. 이곳에 쌀과 무기를 저장했는데 이것이 우창이며 천은사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이 좌창이다.591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850보라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평왕 때 처음 쌓았다가 이때 와서 다시 수리한 것이다. 또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서 3년 만에 끝내고 안복의 냇가에 칠성을 쌓았다.또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고 이미 관리책임자를 정하였다. 이때 의상법사가 이를 듣고 글을 올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의 땅에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못할 것이오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게 할 수 있으나, 정치와 교화가 진실로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재해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라 하자 왕이 그때서야 이 일을 중지하였다. 또 고구려를 친 후 그 나라의 왕손을 데려와 진골의 직위를 주었다.왕이 하루는 배다른 아우인 거득공을 불러 “네가 재상이 되어 모든 관리들을 두루 다스리어 온 나라를 태평하게 하라”고 했다. 거득공은 “그렇다면 신은 나라 안을 몰래 다니면서 백성들이 겪는 부역의 괴로움과 안일함, 세금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관리들의 청렴과 부패 여부를 보고 난 후에 그 직책을 맡았으면 합니다”고 하니 왕이 이를 승낙했다.거득공이 비파를 들고 거사의 차림을 하고는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천), 북원경(지금의 충주)을 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에 도착하여 두루 고을을 돌아다녔다. 무진주 관리인 안길이 그를 비범한 사람으로 보고 집으로 모셔 정성껏 대접했다. 후일 안길이 서울에 올라와 거득공을 찾았다. 거득공은 안길을 후하게 대접하고, 임금께 전자의 일을 설명했다. 이에 왕은 성부산 아래에 있는 땅을 무진주에서 상수리 하는 자의 소목전으로 주어 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다. 산 아래 밭 30묘가 있어 종자를 석 섬이나 뿌렸는데 풍년이 들면 무진주에도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무진주 또한 그렇지 못하였다고 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의 대비책문무왕은 어릴 때 외삼촌인 김유신으로부터 실전무술과 신비의 검술을 전수받았다. 김유신을 가까이 두려는 김춘추의 술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평소 그의 실력을 절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전쟁터 선봉에서 길을 열 때는 신검을 휘둘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적군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아군들의 희생이 줄어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술전략들도 법민은 고스란히 몸으로 체득해 배웠다.단지 문무왕은 자신의 무술을 철저하게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다. 왕은 스스로 무술을 익히는데 무서우리만치 집요했다. 때문에 서른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실력은 김유신의 솜씨에 거의 육박했다. 문무왕은 그러한 자신의 실력을 절대 혼자 익히고 버리지 않았다. 전쟁터를 누비며 자질이 뛰어난 화랑들을 하나씩 몰래 자신의 휘하로 포섭해 아무도 모르는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동주, 서작, 남현, 북무는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자신의 호위무사이자 절대심복으로 삼았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적군 깊숙이 침투해 적장과 유력 인사들을 살상해 적군의 예봉을 꺾고, 힘을 빼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또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이 시전될 때 동서남북을 지키면서 침투하는 적의 첩자들을 척살하기도 했다.삼국통일을 이룩하고도 문무왕은 백성들에게는 무기를 묻고, 전쟁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평화스럽게 위장을 했지만 당군과 왜병의 침략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 비밀병기가 바로 비밀결사대였다.문무왕의 비밀결사대 주력부대는 남산에 은거했다. 월성과 동궁에서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게눈바위에 비밀 망루를 설치하고 궁성, 동궁의 결사대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문무왕은 남산 게눈바위 인근에 넓은 창고를 지어 곡식과 무기를 비치하고, 비밀결사대가 은밀히 은거하며 훈련장소로 활용하도록 했다.문무왕은 동궁과 월지를 지어 군사들의 훈련소로 활용했다. 평소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대신들의 회의와 연회 등을 위해 문이 열렸다.그러나 특히 월지는 당나라 군사와 왜병들이 침략할 때 반드시 거치는 바다 임해전의 모형대로 설계하고, 비밀결사대와 수군, 장수들의 전략적 훈련장소로 활용했다. 동궁과 월지의 군사적 활용도는 외부는 물론 궁중에까지 철저하게 비밀리에 운영됐다. 문무왕의 비밀결사대가 가장 활성화되었을 때는 300여명에 까지 이르렀지만 100명 규모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 100여명의 정예병들은 모두가 살수로 키워졌다. 아주 실전적인 무술을 익히고 음악과 시문 등의 문무를 겸한 인재로 양성해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예리한 눈을 가진 무인들도 이들을 무인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연했다. 문무왕의 비밀결사대는 그의 아들 신문왕으로 이어졌다. 김흠돌의 난을 소리 소문 없이 일거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비밀결사대의 뛰어난 정보력과 감히 일반 병사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걸출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결사대는 궁중을 호위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전을 지키는 숨은 비밀병기로 운영되어 왕의 측근들조차 감쪽같이 몰랐다. 이들은 왕의 사설 군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통일신라 초기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두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한 것도 비밀결사대의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신검이라 불리는 절대적인 검술의 무학을 문무왕이 고스란히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무왕의 전쟁 종식을 향한 집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죽으나 사나 신라백성 걱정 동해바다에 잠들어 수호 용이 되다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신라 제30대 왕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였다.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된 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에게는 부왕이 미처 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668년 당나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의 군사들은 철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왕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터를 누볐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후에 무기를 묻었다. 이어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노라며 바다에 묻혔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진정한 성군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1)총장 무진(668년)에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0년 2월에 당은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치게 했다.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하자,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당 고종이 문무왕의 동생인 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귀국하여 왕에게 알렸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김천존의 추천으로 명랑법사에게 비법을 물었다. 명랑법사는 남산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개설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벌써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절 집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이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법을 썼다. 이에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다. 671에 당나라가 다시 5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나, 다시 문두루 비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당시에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을 따라 감옥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랫동안 법석을 열었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 즉시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이라 하며 본국에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새 절에서 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이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그 절을 망덕사라 했다.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하여 당나라 황제가 인문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고 강수를 통해 인문을 석방해달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황제가 감명을 받고 인문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해인 6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보위하겠노라” 하니, 법사가 “용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찌 용이 되려 하십니까?”라 했다. 왕이 답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약에 추한 인연에 따라 축생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라던 바와 꼭 맞는 것이오”라 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두루비법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되 천 년이 지나도 그 양은 변하지 않는다. 태양열에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얼음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니 모습은 바뀌어도 전체 질량은 그대로 인 것이다. 단지 겉모습이 변하여 사람들이 종종 오인하는 일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모든 무기를 모아 산 아래 묻었다. 그리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전쟁은 없으니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지어다.”군사들은 토함산 북쪽 계곡에 무기를 묻고 무장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쟁은 그렇게 문무왕의 마음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 고종이 설인귀를 앞세워 50만의 군사로 신라를 공격하러 배를 띄웠다. 마침 당나라에 수도 중이던 의상대사가 옥중에 갇힌 왕의 동생 김인문을 면회하러 갔다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 신라의 궁궐에 위급한 정황을 알렸다. 문무왕의 고민을 풀어줄 해법은 딱 하나였다. 세상에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은 하나씩만 존재한다. 급하여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움직이다 보면 예상 밖의 평지풍파를 맞게 된다. 용궁에서 도를 닦은 명랑대사가 사천왕사를 지어 불법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지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불법으로 백성들의 안녕을 지키고자 했다. 나라를 지킬 도량을 짓는 일은 신승 양지가 맡았다. 그러나 양지가 미처 서까래도 올리기 전에 적군들의 배가 신라의 경계를 넘어섰다. 명랑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가명승들에게 위급을 알리는 전서구를 날렸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열흘이면 모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명랑과 해괴망측한 모습을 한 승려들이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12방향에 세웠다. 명랑은 왕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열흘간 비단으로 지은 도량 근처에 사람이 드나들게 해서는 아니되옵니다”라며 유가명승들이 술법을 펼치는 곳의 경계를 당부했다. 왕은 특별히 김유신으로부터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무예를 익히고 있었다. 왕 또한 비술을 네 명의 제자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왕은 그 네 명의 비밀스런 검사들에게 비법이 진행되는 도량의 동서남북을 방위하게 했다. 명랑을 비롯한 12명의 고승들은 12방향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도 밥을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가끔 진언을 외우는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비단으로 지은 절은 안개에 휩싸여 누구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됐다. 싸우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때 동해안에는 난리가 났다. 먼 바다에서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났다가 뒤집어지고 하면서 당나라군사들의 배가 서로 부딪치고, 좌우 앞뒤로 흔들리면서 파손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배 위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당나라의 35만 병사 중에 살아 돌아간 이들은 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가 미리 낌새를 알아채고 재빨리 후퇴를 지시하면서 재빠르게 배를 돌린 병사들이다. 그 이후 설인귀는 스스로 북방장군으로 임명해줄 것을 촉탁해 신라 쪽으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오래 살아남은 신책이었다. 문무왕은 사천왕사를 완공하고 명랑법사를 주지로 임명해 백성을 위한 불법을 이어가도록 명했다. 김유신은 명랑법사가 시전하는 문두루비법을 눈여겨보았다. 나라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왕에게 건의하여 신라로 들어오는 관문에 호국사찰 원원사를 건축했다. 사천왕사와 원원사를 건축하고 당나라군사는 물론 왜국에서도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하늘이 내린 ‘유신’ 앞세운 왕권 향한 치밀한 전략 역사에 최후의 승자로 남다

태종 무열왕은 신라에서 여러 가지 기록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최초의 신라왕이 되었다. 죽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왕릉 중에서 귀부가 있는 비석이 최초로 나타난 왕릉이기도 하다. 비석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은 귀부와 이수는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자랑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얻어 결국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18년 만에 그의 딸과 사위에 대한 원한을 갚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는 누구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사리가 깊었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눈도 밝아 전쟁에 대한 전술전략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김춘추는 51세에 왕위에 올라 백제 의자왕의 무릎을 꿇리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김유신과의 이중적 혈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나라와의 협력관계 유지를 위해 둘째 아들 인문을 당나라 황실 내부 깊숙하게 심어두었다. 김인문은 당의 정보를 신라에 전달하는 한편, 당나라가 신라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도록 상당한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는 태종 춘추공에 대한 기록을 길게 늘여 소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단락을 나누어 간략하게 줄여 소개한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3)당나라 고종은 백제가 멸망 이후에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일삼자 문무왕 5년 665년에 장군 유인원을 보내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형제의 의를 맺어 화친하고, 영원히 당나라에 복종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668년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신라에 군수물자를 요청했다. 문무왕이 적군 진영 깊숙이 있는 당나라 군사에게 누가 수송의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김유신 장군이 나서 군량 2만 섬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백제고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강물이 있다.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최후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을 할 지언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지는 않겠다”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쳐서 평정하고 또 신라를 칠 계획으로 머물고 있었다. 유신이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에게 짐이라는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여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가 있다.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백제의 남은 적을 추격하여 잡게 했다. 군사가 주둔한 한산성에 고구려와 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해서 마주 싸웠으나 포위를 풀지 못하더니 5월11일부터 6월22일 사이에 신라군사들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묻기를 “어떻게 할 계책이 없을까?” 하고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형세가 급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신의 술법으로만 구할 수가 있습니다”라 했다. 이에 성부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빌었더니, 갑자기 큰 항아리 만한 불빛이 번쩍거리며 제단 위로 나와 즉시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적들이 공격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번쩍번쩍하는 불빛이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포 30여 곳을 때려 부수었다. 적군의 활과 화살 그리고 창칼들은 주판알이 흩어지듯 산산이 부서지고 병사들은 모두 땅에 쓰러졌다. 태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니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나 되는 멧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해석하는 사람이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 할 좋은 징조입니다”라 했다. 태종 무열왕 때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과 아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지고 와서 전한 것이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천하를 통일하셨다. 그래서 태종 황제로 하였는 데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하여 천자의 이름을 범한 것은 불충하니 빨리 호칭을 고칠 것이다”라 했다. 신라왕이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거룩한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으로 한 것이오”라 했다. 당나라 황제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33천의 한 분이 신라에 내려와 유신이 되었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다 보고 놀랍고 두려워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권력 이양김춘추는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왕권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진해지면서 서서히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해 치밀한 작전을 빠르게 세우기 시작했다. 김유신을 앞세워 대신들을 지지 세력으로 우회시켰다. 김유신 옆에는 자신의 큰 아들 법민을 밀착시켜 감시하면서 친위세력으로 항상 가까이 두었다. 반면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구도를 짜 맞추었다. 진덕여왕 당시 상대등이자 완력으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알평을 고립시키고, 김유신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지지층을 두텁게 만들어 진골 출신이지만 왕위에 오르는 일을 착착 순조롭게 진행했다.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지만 두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첫 번째가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는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의 힘을 업고 백제 의자왕을 무릎 꿇게 하고, 윤충의 목을 베어 복수를 이룬 춘추는 하늘을 보며 다시 한 번 포효했다. 두 번째는 절대적인 우방이자 절친인 최고의 무신 김유신을 왕좌에 대한 욕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한편,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두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미리 간택하고, 처남인 김유신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이중적인 혈연관계로 두텁게 옭아맸다. 김춘추의 머리는 촘촘한 전략으로 짜여진 그물 같다. 그는 김유신이 처음 백제와의 전투에서 돌아와 좌절에 울부짖으며 단석산으로 들어가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이어 김유신이 보검을 차고, 한층 깊어진 눈으로 돌아왔을 때 절대 그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는 김유신의 경지가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짐작했다. 이어 유신과의 친분을 두텁게 쌓으면서 서둘러 그의 누이와 결혼해 확실한 우방으로의 관계를 맺었다. 춘추는 집요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아내와 아들을 수시로 유신의 집으로 보내 교류를 두텁게 쌓았다. 특히 아들이 걸음걸이가 자유로워질 무렵부터 유신에게 사정하여 사제지간의 정을 맺도록 했다. 춘추의 아들 법민은 외삼촌 김유신으로부터 검술과 전쟁의 기술을 오롯이 물려받은 장수로 성장했다. 김유신 또한 전쟁터에서 적군 깊숙이 들어가 적진을 혼란스럽게 휘저을 때는 뒤를 받쳐줄 실력 있는 우군이 필요했다. 법민은 빠르게 무술을 배워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전쟁터에 나섰다. 법민은 뛰어난 자질을 가진데다 유신의 신적인 기술의 지도와 실전에서 익히는 검법으로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고구려와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법민이 앞장을 서고, 유신이 뒤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법민은 전쟁을 끝내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문무왕 법민은 칠순에 이른 외삼촌이자 무술의 스승인 김유신을 전쟁의 선봉에 세울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김춘추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김유신의 신력을 가진 태산 같은 마음도 아들 같은 애제자이자 조카 법민, 즉 문무왕을 꺾고 왕위에 올라야겠다는 욕심은 애초부터 티끌만큼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등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김유신과 아들 법민의 손을 꽉 잡고 신라를 부탁하면서 이순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김유신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턱이 떨리지 않게 어금니를 깨물면서 법민을 도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겠노라 다짐하며 무열왕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여우 설치고 귀신 울던 의자왕 궁 당나라 군 몰고 온 신라가 삼키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일등공신 중의 일인이라는 데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 삼국통일의 방법 등을 두고 무열왕의 평가는 두 가지로 엇갈리기도 한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학자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른 것과 두만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넘겨준다는 밀약은 박수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당나라의 힘을 빌려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외세를 몰아내고 한민족의 뿌리를 하나로 결집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 했다는 긍정적인 해석도 있다. 또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거대한 힘의 중국에 잡아먹혀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라며 다행스럽다는 해석도 있다. 이번 호에서는 왕위에 오른 김춘추가 백제의 내환을 기회 삼아 당의 힘을 이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고구려 정벌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전쟁에 직접 나선 이야기를 풀어본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2)현경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희사에 있는 크고 붉은 말이 밤낮으로 6시간 동안 절을 도는 공덕을 닦았다. 2월에는 여러 마리의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한 마리의 흰 여우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수 물가에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느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다. 밤에는 대궐 남쪽 길 위에서 귀신이 울었다. 신라 태종이 백제의 나라 안에 괴변이 많다는 것을 듣고 현경 6년 경신(660)에 인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당의 고종은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13만을 이끌고 가서 치게 했다.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과 전쟁에 직접 나서 정예병사 5만을 거느리고 덕물도 쪽으로 진군했다. 의자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워서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과 달솔 상영, 흥수와 성충 등의 신하들이 서로 비방하며 대책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간신배의 말에 따라 전략을 세워 전쟁에 패했다. 당나라 소정방은 강 왼편 기슭으로 나와 산 밑에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밀물을 타고 병선들이 꼬리를 물면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쳐들어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 성 30리 밖까지 와서 머물렀다. 성안의 백제 군사들이 대항했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의자왕이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하노라!” 하고는 태자 융과 함께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지만 포로가 되었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황제를 뵈니 황제가 포로들을 책망만 하고는 용서해 주었다. 왕이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 벼슬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에게 장사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소정방과 신라군은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군영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그만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복수김춘추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선덕여왕 11년(642년) 김춘추의 나이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사위와 딸인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했다. 백제 의자왕이 집권 초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외부적으로 신라를 침략해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던 것이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삼일간이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오”라고 울부짖으며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김춘추의 비운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픔과 고통이 춘추로 하여금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게 했다. 특히 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힘을 받기 위해서 제3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략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김유신의 가야세력과 연합도 정략적인 결혼 등으로 두텁게 이루어졌다. 춘추는 선덕왕 16년(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김유신과 협력해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춘추로서는 매우 뜻깊은 승리였다. [{IMG06}]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와 김유신으로서는 차제에 왕위까지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덕여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더욱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든든한 배경을 마련한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했다. 춘추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진덕여왕 2년(648년)에 직접 그곳을 찾아 친당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탄력을 받은 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했다. 당나라의 예복을 입는 중조의관제의 채택(649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651년), 집사부 개편 등이 그것이다. 다분히 중국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신라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아주어야겠다. 자신의 왕정시대를 대비한 것이었다는 추측이다. 김춘추는 654년 51세가 되는 해에 김유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 춘추로서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왕위계승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의 확보, 율령정치 강화 등의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면서 즉위한 다음 해 바로 아들 법민을 태자에 책봉했다. 무열왕 춘추는 660년 일등공신 김유신을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이어 백제에 대한 복수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 태종 때 다짐받았던 군사지원 약속을 고종 즉위에 따라 무열왕은 아들 인문을 보내 다시 촉구했다. 김인문은 아버지 무열왕의 계략을 받아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가 고종의 황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틈을 노려 군사지원 약속을 얻어냈다. 신라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김인문을 앞장군으로 삼아 13만 명의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자, 무열왕은 복수의 칼을 들고 직접 김유신 장군과 태자 법민 등 장군들을 대동해 5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압박했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침내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의 비원이 18년만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무열왕 김춘추는 꿇어앉은 백제의 의자왕과 딸을 베었던 윤충을 죽일 듯 쏘아보면서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피를 토해내듯 울부짖었다. “네놈들이 우리 신라의 충신들을 무참히 짓밟고 그들의 피를 함부로 땅바닥에 뿌렸겠다.” 의자왕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지만, 윤충은 빳빳이 목을 쳐들고는 크게 웃어대며 응수했다. “그래 네놈의 여식과 사위의 목은 내가 아주 단칼에 베었다. 집단보다 가볍게 베어지는 칼맛이 아주 괜찮더구만. 음하하하….” [{IMG06}] 무열왕은 소정방이 있는 곳이라 의자왕은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큰 칼을 휘둘러 윤충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 신라는 충신들의 피를 대신해 선조들이 확보했던 고구려의 땅까지 회복해 삼국을 통일하고 원혼들을 위로하겠다”며 하늘 높이 팔을 흔들었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이어 의자왕은 태자와 왕자, 대신과 장병,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으며 망국의 주범이 되었고, 700년 역사의 백제는 무너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