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12·끝) 그외의 광장들

대구시는 1965년 ‘대구도시계획재정비’를 통해 대구지역 주요 교통의 요충지에 12개의 광장 설치 계획을 세웠다.그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 대구의 광장은 도시의 확장과 발전에 따라 60개가량으로 늘었다.일부 광장은 현재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광장도 제법 되며, 아직 조성되지 않은 곳도 있다.60여 개의 광장은 모두 교통광장이다.교통광장은 중구 동성로광장, 수성구 신매광장 등과 다르다.동성로광장과 신매광장은 임의로 지어진 이름일 뿐 정식 용어가 아니다.대구시 도시계획정책관 민병룡 팀장은 “현재 광장으로 지정된 곳은 도시계획 제도상의 시설로 결정돼 있는 곳”이라며 “실제 광장이라고 인식하는 곳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교차로 광장…지역의 중심으로 떠올라현재 대구의 주요 교차로 대부분에는 교통광장이 설치돼 있다.교통광장을 조성하면 도로의 입체화와 교통섬 설치 등이 가능해 지역 교통 소통이 원활해지기 때문이다.교차로 광장들은 지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교통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14번째 광장으로 지정된 곳은 현재 달서구 갈산동 성서공단 네거리다.지역의 발전을 책임지던 성서공단 안에 있다.‘19호 광장’인 달서구 죽전 네거리는 범어 네거리에 이어, 대구 제2의 ‘맨해튼’이라고 불린다.‘죽전’(竹田)은 과거 지역 인근에 대나무가 많아 대나무 갈퀴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최근 서대구 역세권 사업과 새롭게 이전하는 대구 신청사까지 죽전 네거리는 미래 대구의 도심으로 떠오르고 있다.달서구 신당 네거리는 ‘24호 광장’으로 대구 성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26호 광장인 수성구 연호 네거리, 28호 달서구 유천 네거리, 33호 수성구 용계 삼거리 등 광장으로 지정된 교차로들은 지역 교통의 중심지가 됐다. ◆고속도로 나들목으로 진화한 광장들지역 교차로 광장이 지역 교통의 중심으로 거듭났다면, 고속도로 나들목들은 대구지역의 관문 역할을 한다.17호 광장인 금호 분기점은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의 교차지점이다.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터빈형 분기점으로 부산과 전라도로 향하는 차량들이 지나가는 곳이다.북대구 나들목은 23호 광장으로 지정돼 있다.명실상부한 대구시의 메인 관문으로 나들목 자체는 동서변지구 인근에 있다.하지만 신천대로 및 신천동로와 인접해 대구 도심부와 가장 가까운 나들목이기 때문에 동대구 나들목이나 서대구 나들목같은 여타 나들목과 비교해 훨씬 많은 차량 유출입을 기록하고 있다.이밖에도 25호 광장으로 지정된 성서 나들목, 27호 화원 나들목, 29호 달성 나들목, 30호 동대구 나들목, 31호 수성 나들목, 52호 도동 나들목 등이 있다. ◆조성 전 광장들, 대구 미래의 중심계획만 세웠을 뿐 아직까지 조성되지 않은 광장도 많다.이곳들은 대부분 대구 계획의 중심으로 거듭날 4차 순환도로와 금호강변도로에 계획된 교통광장이다.20번째로 광장으로 지정된 동구 지묘동 일원은 2021년 ‘파군재 나들목’이 조성될 예정이다.대구 외곽순환도로의 교차로로 조성될 계획이며, 향후 대구 통합신공항이 경북으로 이전 시 주요 통로로 활용될 예정이다.32호 광장 서변 나들목도 아직 조성 중이다.역시 대구 외곽순환도로의 교차지점으로 활용될 예정이며, 트럼펫형 입체교차지점으로 조성된다.33호 설화 나들목과 38호 위천 나들목은 조성 중인 낙동강변도로의 교차로이다.또 39호 봉무 나들목, 40호 불로 나들목, 41호 만촌 나들목, 42호 고산 나들목 등은 금호강변도로의 교통광장으로 계획돼 있다.41호 광장인 강창 나들목, 42호 낙산 나들목은 4차 순환도로의 일부분이다.이처럼 도시의 확장과 함께 교통광장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대구시 관계자는 “이들 광장들이 모두 조성되면 대구는 남부권 교통의 수도로 거듭나 활력 넘치는 도시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람 중심의 광장들, 속속 모습 보여교통광장이 교통 요충지 역할을 했다면 시민의 소통을 위한 공간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시민 소통을 위한 광장은 도시계획 상의 광장과는 다르다.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광장으로는 오히려 더욱 광장다운 광장이라 할 것이다.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대구의 광장은 중구 동성로 광장이다.“시내에서 만나자!”대구 시민들에게 일반적으로 ‘시내’라고 지칭되는 곳은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광장이다.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한다면 흔히 통용되는 만남의 ‘광장’인 셈이다.이곳에 조성된 ‘동성로 야외무대’는 다양한 공연·놀이가 열리며, 때로는 시민들이 정치적 요구를 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최근 시위·집회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광장도 있다.2017년 조성된 동대구역 광장이 바로 그것이다.길거리가 아닌 대규모 시민들의 소통의 공간으로 조성된 광장은 대구지역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곳이다.면적은 7만여 ㎡에 달하며 3개의 테마공간과 2만5천여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광장 곳곳에는 대구를 웃는 얼굴로 형상화한 상징조형물, 미디어 월, 바닥분수, 구름쉼터, 둥근 안테나 모양으로 만든 벤치인 청경수 등이 조성됐다.이곳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들과 더불어 정치적 시위·집회 등이 열려 대구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사회에 알리고 있다.수성구 신매 광장도 지역민들의 소통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시지지역의 ‘시내’라고 불리는 이곳은 문화·체육을 즐길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상가 시설들이 집중돼 유럽의 광장과도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이처럼 사람 중심의 광장들은 대구에도 점점 늘어나며 시민들의 소통·휴식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영남대 윤대식 도시공학과 교수는 “광장은 언젠가부터 민주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정치적 단어로서 사용돼 왔지만 시민들의 소통과 휴식 공간으로서도 도시에 꼭 필요한 공간”이라며 “인터넷과 매체의 발달로 현대 도시는 점점 내부 공간처럼 변하고 있다. 살아있는 도시로의 발전을 위해서 도시 내 공공 공간 광장은 꼭 확보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11) 이현 삼거리

‘12호 광장’으로 지정된 대구 서구 이현삼거리 일대는 대구에서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이현삼거리 일대에는 오래된 공단뿐이다.주거시설도 없고 각종 생활 인프라도 전무해 해가 지면 이곳의 분위기는 거의 우범지대가 된다.공단에서 나오는 매연 등으로 대구에서 가장 공기 질이 나쁜 곳이기도 하다.1970~80년대 화려했던 영광은 오간데 없어졌다.다행히도 12호 광장은 서대구KTX라는 대형 호재를 만나 다시 한 번 비상할 기회를 잡았다.2021년 서대구KTX가 개통되면 다양한 편의시설과 인프라가 줄줄이 개발된다.또 인근 서대구공단도 재생사업을 통해 첨단산업밸리로 재탄생하는 만큼, 이현삼거리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다.이현삼거리는 교통 요충지이자 대구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현재도 그렇다.서쪽으로는 부산춘천고속도로와 서대구 나들목이 있다.이현삼거리는 서대구 나들목에서 나온 차량들이 만나는 첫 갈림길이라는 것.또 동쪽으로는 대구역과 동대구역, 남쪽으로는 죽전네거리와 본리네거리 등 대구시내로 진입하는 곳이다.하지만 많은 교통량에 비해 도로 폭이 좁고 신호체계가 불안정해 극심한 교통 정체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배 타고 강 넘어가던 곳은 흔적도 없어 서구 이현동에는 자연부락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1970년 대 서대구공단이 조성되면서 주변의 자연부락들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배고개’는 이현동의 몇 안 되는 자연부락이다. ‘대구서구향토사’에 따르면 1700년 경 달성 배씨와 고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당시 이곳에 수목이 우거져 주민들이 꿀벌을 많이 쳤다고 해 ‘꿀태’라고도 불렀단다. 200여 년 전 지금의 서대구공단 북쪽으로는 금호강 줄기가 흘렀다. 그 강을 건너가거나 강줄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했고, 그 배를 타는 나루터가 지금의 이현동에 있었다.배를 만들기 위한 나무도 많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즉 배고개는 ‘배 넘는 고개’라는 뜻이며, ‘배고개’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30여 년 전 땅을 높이 돋우며 강은 메워졌고, 그 위로 서대구 공단이 들어서며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또 다른 설은 강가에 오래된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에 배를 묶어 뒀던 것이 이현동이라는 지명이 생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교통지옥의 불명예…도로 정비 시급 이현삼거리 일대는 대구의 대표적인 악성 교통 정체구역 중 하나다. 이현삼거리 주변은 서대구 나들목과 신천대로 진·출입을 위한 교차로다.서대구 산업단지 입주기업과 서대구권 시민들의 관문도로 역할을 한다.하지만 삼거리에서 신천대로 및 상리동 방면으로 우회전 차량행렬로 상습적인 차량 정체가 생긴다.교통정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이 때문에 서대구공단 등 산업단지 물류차량의 정체로 입주 기업들의 활동에도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또 우회전 대기행렬에 끼어드는 차량으로 인해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심각한 교통정체 등을 해소하고자 대구시는 2018년 도로를 5차로에서 6차로로 넓혔고, 신호체계를 정비하고 도로선형을 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현삼거리의 출퇴근 시간 정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서대구공단, 재생사업으로 다시 비상 이현삼거리 인근에는 1970~80년대 대구 경제 발전의 역군인 ‘서대구공단’이 조성돼 있다. 서대구공단은 1975년 착공한 이래 1,2차로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서대구공단은 서구 이현동, 중리동, 달서구 죽전동에 걸쳐 일대의 불모 야산과 구릉지를 깎아 만든 단지다. 도심지에 있던 공장을 외곽인 와룡산 산기슭으로 이전해 시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노후 시설 현대화로 지역 경제력을 신장시키는 목적으로 탄생시킨 것. 총 면적은 241만7천㎡에 달하며 한때 한국 경제발전을 이끌던 섬유산업의 본산지다.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서대구공단은 화려했던 세월을 뒤로 하고 낙후됐다. 1990년대부터 중국산 저가 제품에 밀려 입주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으며 노후화가 급속도로 진행됐고, 지속적으로 재생 사업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대구시는 서대구공단의 산업 경쟁력 강화와 근로자 복지 증진, 주민 공동체 시설 건립 등을 위해 2021년까지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이 사업에 500억 원이 투입된다. 먼저 ‘미래비즈니스 발전소’가 건립된다.서대구 KTX역사 용지 북쪽에 연면적 8200㎡(지하 2층~지상 8층) 규모로 2021년 완공한다. 특히 2021년 서대구고속철도역이 완공되면, 대구 서쪽에 위치한 성서산단과 대구국가산단을 찾는 바이어도 많이 이용할 것으로 보여 서대구산단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형 복합지식산업센터도 계획되는 만큼, 서대구산업단지는 다시 태어나 업종 구조를 고도화하는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대구KTX 건립…역동적인 도시로 서대구고속철도(KTX)역의 공사가 한창이다. 서구는 서대구KTX역 조성에 다른 역세권 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대구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구시는 오는 2030년까지 총사업비 14조4천357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해 서대구KTX역 주변 역세권을 개발한다. 2021년 개통 예정인 서대구 고속철도역을 중심으로 인근 98만8천㎡(약 30만 평)을 민관공동추자개발구역, 자력개발유도구역, 친환경정비구역으로 세분화해 개발하는 것이다.민관공동투자개발구역(66만2천㎡)에는 복합환승센터와 공공문화시설이 들어서고, 3개의 하·폐수처리장을 지하화한 후 지상에는 친환경생태문화공원을 조성한다. 또한 환경기초시설이 이전한 후적지에는 첨단벤처밸리와 종합스포츠타운, 주상복합타운이 건설된다. 자력개발유도구역(16만6천㎡)에는 역 주변을 민간주도로 자율적으로 개발하도록 유도해 여가 및 주거지역으로 개발하고, 친환경 정비구역(16만㎡)은 친환경적인 정비와 함께 2030년까지 시설을 이전하고 민자유치를 통한 주상복합타운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대구시는 서대구 역세권을 대한민국 남부권 교통요충지로 만들기 위해 6개의 광역철도망 건설과 9개의 내부도로망을 확충하고 복합환승센터와 공항터미널을 건설한다. 광역철도망 건설은 8조1천326억 원을 투입해 서대구역 고속철도(KTX·SRT), 대구권 광역철도, 대구산업선과 함께 대구~광주 달빛내륙철도와 함께 통합신공항 연결철도가 추진된다. 또 서대구 역세권과 도시철도 1,2,3호선을 연결하는 트램 건설을 시범사업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내부도로망 확충은 매천대교~이현삼거리 간 연결도로 등 9개 사업에 2천996억 원을 들여 역세권 개발에 맞춰 교통혼잡을 사전에 해소하고 내부접근성도 개선한다는 것. 이와 함께 복합환승센터, 공항터미널, 환승주차장을 도입해 공항이용객과 철도·버스 및 승용차 이용객이 편리하게 환승할 수 있도록 한다. 서구청 관계자는 “서대구KTX가 낙후됐던 대구 서부권 발전의 촉매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그동안 동쪽으로 치우쳤던 대구의 도시 개발이 균형을 맞출 것이다. 특히 서구는 활력 넘치는 도시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10) 월드컵 삼거리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대구지역에서 11번째로 지정된 광장은 대구 수성구의 ‘월드컵 삼거리’ 일대다.‘11호 광장’ 월드컵 삼거리 일대는 지명에서도 나타나듯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영광이 그대로 남아 있다.월드컵 삼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대구 스타디움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대표팀의 예선전 미국전과 3·4위전 터키전이 열렸던 곳이다.월드컵 삼거리는 대구 수성구 고산동에 있으며 달구벌대로와 월드컵로가 만나는 지점이다.대구 시지지역과 경산·영천 등 타 지역에서 대구 시내권으로 한꺼번에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이 많아 출퇴근 시간에는 인근은 심한 정체현상을 빚기도 한다.남쪽으로 내려가면 대구 스타디움과 수성의료지구를 통과하는 유니버시아드로가 지나가며 이 도로는 지산·범물 및 달서구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범안로와 연결된다.특히 인근에 수성 나들목이 있어 부산을 비롯한 다른 도시로의 이동이 편리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월드컵 스타디움 앞에는 넓은 공간이 마련돼 광장과 상가 시설들이 입점해 있어 시민들의 여가와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때맞춰 도착해야 하는 곳 ‘시지(時至)’월드컵 삼거리 일대는 흔히 시지(時至)라고 하는 불리는 지역이다.1981년 대구직할시가 출범할 때 경산에서 대구로 편입됐다.‘시지’ 지명의 어원은 과거 시지원(時至院)에서 비롯됐다.고려, 조선시대 지방으로 출장하는 관원이나 과객들이 이용하도록 전국 주요 길목에 설치한 숙박 시설을 ‘원(院)’이라고 했다.현재까지 남아있는 지명의 흔적으로는 대표적으로 서울 이태원동, 이천시 장호원읍, 세종시 조치원읍, 안양시 인덕원동, 남양주시 퇴계원읍 등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개설 초기 전국에 1천310개소의 원이 설치됐는데 경상도에만 468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때맞춰 도착해야 한다는 의미로 시지(時至)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이다.이 일대는 성암산, 안산, 대덕산 등의 산지에서 흘러내린 유수에 의해 형성된 넓은 선상지다.이 선상지에 위치한 들판에는 지석묘가 분포돼 이 일대가 오래 전부터 생활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시지지역의 유적은 생활유적을 중심으로 주변에 고분유적, 생산유적, 성곽유적, 교육유적이 공간적으로 구분된다. ‘시지’ 자체는 행정동 고산2동 관할의 한 법정동이지만, 이곳이 옛 고산면 시절 면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고산면 일대에서 시지라는 지명을 널리 쓰고 있다.당시 지역의 대부분이 전부 다 과수원이나 농경지가 대부분이었지만, 1990년대 초 지역이 개발되며 현재 대구에서도 손꼽히는 부도심으로 성장했다. ◆대구의 문화·스포츠 일번지월드컵 삼거리는 대구지역의 대형 문화·스포츠 시설들이 모인 곳이다.월드컵 삼거리 바로 옆에는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가 있다.일명 ‘라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016년 개장했으며 다른 야구장과 달리 팔각형 모양의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대지 면적이 15만1천526㎡이며 지하 2층, 지상 5층으로 연면적 4만5천㎡에 달하는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는 고정 관람석이 2만4천 석, 최대 수용인원 2만9천 명에 달해 대구 시민들의 여가 증진에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대구스타디움도 빼놓을 수 없다.대구스타디움은 수성구 대흥동과 노변동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무려 6만6천여 석의 수용 규모를 자랑하는 다목적 경기장이다.1997년 착공돼 2001년 개장했다.처음 이름은 '대구종합경기장'이었지만, 2002년 ‘대구월드컵경기장’으로 명칭을 변경했다.2008년 현재의 명칭인 ‘대구스타디움’으로 바꿨다.당초 2002년 FIFA 월드컵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목적으로 건설됐다.2003년부터 지역 프로축구 팀인 대구FC의 홈 경기장으로 쓰였지만, 올해 대구FC가 나가고 이곳은 일반 시민을 위한 각종 체육대회, 생활체육의 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다양한 문화시설도 있다.1천500억 원을 들여 2011년 개관한 대구시립미술관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전시로 시민들에게 문화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대구간송미술관도 대구시립미술관 바로 옆에 조성 예정이라, 일대가 종합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이름뿐이었던 대구대공원 조성 사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계획이라 일대는 문화·스포츠 인프라들이 집중된 초대형 테마파크가 될 것이다. ◆대구 스마트시티 계획 월드컵 삼거리 주변에서 대구시가 야심차게 준비 중인 ‘스마트시티’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대구·경북자유구역청은 2025년까지 이 일대에 외국인 투자를 유치해 체류형 의료관광 시범단지인 ‘수성스마트시티’를 조성할 계획이다.대구는 정부로부터 스마트시티 혁신성장동력 프로젝트 실증도시로 선정됐다.이에 따라 수상알파시티를 스마트시티로 조성해 5세대 이동통신(5G) 기반 스마트시티 서비스 개발에 나섰다.또 지능형 교통정보 관제 인프라 구축을 통한 자율주행버스 시범운행도 진행 중이며 사물인터넷 기반의 스마트 홈 기술개발도 추진 중이다.대구도시공사는 스마트 가로등, 스마트 미디어월, 지하매설물 관리 시스템 등 스마트시티 통합 플랫폼을 선보일 예정이다.수성스마트시티는 향후 대구시 전체를 스마트화하고자 테스트베드로 구축됐다.2021년 8월에 ‘스마트 비즈니스센터’가 조성돼 스마트시티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또 대형 롯데쇼핑몰 타운도 들어설 예정이다. ◆대구 시민들의 쉼터, 스타디움 광장 대구 스타디움 주변으로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주말이 되면 이 일대는 시민들이 자전거·롤러스케이트 등 레포츠를 즐기는 공간이 된다.시민들은 유모차나 애견들과 함께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대구 스타디움 광장은 단풍의 명소로도 손꼽힌다.일대 거리에는 벚꽃나무, 단풍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대구에서 손꼽히는 데이트 장소다.서편 주차장 자리에는 ‘칼라스퀘어’라 불리는 대형 쇼핑몰이 있다.이곳에는 홈플러스를 비롯한 여러 상점들과 영화관이 입점해 있다.그 외에도 어린이 놀이시설이나 자동차 극장, 야외무대, 인라인 스케이트장들이 있어 많은 행락객이 모인다.대구호러페스티벌, 고모령 가요제, 생명사랑 밤길 걷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들도 이곳에서 개최돼 스타디움 광장은 다목적 종합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수성구청 관계자는 “스타디움 광장은 넓은 공간과 다양한 인프라로 지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콘텐츠와 여가 시설들을 확충해 지역민들의 종합 테마 시설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9) 파동 나들목

“대구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일파이무(一巴二無)’라.” 대구의 ‘10호 광장’은 대구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대구 수성구 ‘파동 나들목’ 일원이다. 수성구 파동은 수성구의 남동쪽 끝단에 위치하며 산성산(653m)과 용두산(187m) 사이의 골짜기에 형성된 동네다.남쪽으로는 달성군 가창면과 경계를 이루며 인구는 약 1만5천 명이다. 구전에 의하면 대구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단연 ‘일파이무(一巴二無)’를 꼽았다고 한다. 첫째가 파동이고 둘째가 무태(현 북구 칠곡지구)라는 뜻이다.그 정도로 파동은 수려한 산수와 맑은 물로 유명했던 곳이다. 1914년 대구부 달성군 가창면에서 1958년 대구시로 편입됐다.1980년 수성구가 생기며 지금의 수성구 파동이 됐다. 높고 낮은 산이 많다는 의미에서 ‘파잠(巴岑)’ 혹은 ‘파집’이라고 했고, 나중에 ‘파동’으로 불렀다.수성못 부근에서 달성군 가창면 초입까지 신천을 따라 길이 곧게 이어진다고 해서 ‘니리미’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동쪽의 법이산(334m) 정상에는 과거 조선시대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있다. 2013년 국내에서 7번째로 긴 터널인 앞산 터널이 개통되며 대구의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는 교통의 요충지가 됐다. ◆대구 선사시대 유적의 보고 파동은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대구향토사 문화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파동 일대 문화재가 발굴돼 대구의 역사가 3천 년에서 5천 년으로 끌어올려졌다”고 한다. 파동 일대에는 선사시대 주민들이 비와 바람을 피하며 생활했던 바위그늘 암음(岩蔭)이 밀집돼 있다. 바위그늘은 신천변에서 약 3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면서 연결되나 바위그늘 뒤쪽은 경사가 급한 산사면이다. 바위그늘의 크기는 가로 8.5m, 높이 3m 정도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형태는 전체적으로 앞쪽이 좁고 뒤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평면사다리꼴 모양이다. 앞면은 비교적 편평하며 측면에서 봤을 때 위쪽이 아래쪽보다 2m 정도 돌출됐다.30℃ 가량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국립대구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파동 바위그늘 아래 땅속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맨 위층에서는 조선과 고려의 도자기 조각이, 그 아래층에서는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출토됐다. 특히 맨 아래층에서는 구석기 시대 석기가 나온 것. 바위그늘 중앙부 상단에는 사람이 뚫은 것으로 보이는 둥근 구멍도 하나 있다.옛 사람들이 바위구멍에 나무를 꽂아 지붕을 덮고 거주공간을 확장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바위그늘 아래로는 신천이 유유히 흐른다.선사인들은 신천과 그 주변에서 수렵·채집 활동을 하며 삶을 이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파동의 신천 상류지점에는 바위그늘 외에도 다양한 선사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천변 상당수 지역에서는 지역의 수장들의 무덤인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혼이 깃든 ‘오천서원’, 대구 퇴계학의 본산 ‘무동재’, 변방의 정보를 횃불을 통해 전달하던 ‘법이산 봉수대’ 등 다양한 유적들이 파동에 자리잡고 있다. 수성문화원 관계자는 “바위그늘은 구석기 시절 대구 지역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소중한 증거이며, 대구의 역사가 늘어난 것”이라며 “파동에는 시대마다 다양한 문화재가 보존돼 있어 꾸준한 삶의 터전이 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구의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는 앞산 터널 “출퇴근 시간이 30분 이상 당겨졌어요.” 앞산 터널은 대구의 달서구 상인동과 수성구 파동을 잇는 터널이다. 도로 터널로는 국내에서 7번째로 긴 4.392㎞ 길이를 자랑한다.유료인 자동차전용도로다. 2013년 6월15일 정식 개통됐으며 앞산의 달비골과 용두골 사이를 관통한다. 기존 달서구 월배지역과 수성구 사이를 오가려면 상습정체 구간인 앞산순환로를 통해 남구 방향으로 돌아가야 했었는데 이 터널이 개통돼 시간이 대폭 단축됐다. 앞산터널은 개통 전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앞산에 터널공사가 진행되면 대구 앞산의 수맥을 끊고 숲이 파괴되는 등 생태계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산에서 매일 달서구로 출퇴근하는 하지환(41)씨는 “앞산 터널이 없을 때는 달구벌대로를 통해 출근할 시 1시간20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앞산 터널이 개통하며 30분이 넘게 당겨졌다”며 “앞산 터널로 인해 삶의 질이 더욱 올라갔다”고 말했다. ◆4차 순환도로의 연결고리 파동 일원은 조선시대 대구에서 한양을 잇는 통로였던 ‘영남대로’의 끝자락으로 자연촌락이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파동은 대구 도심과는 거리가 있지만 2021년 대구 경제를 바꿀 4차 순환도로 전 구간 개통이 예정돼 교통의 중심지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둥근 고리모양의 4차 순환도로가 완성되면 대구는 외곽지가 없는 원형의 도시구조가 완성된다.4차 순환도로는 도심을 통과하지 않고 외곽으로 단시간에 이동해 고속도로 또는 산업단지 등의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교통적으로 소외됐던 동구의 혁신도시, 이시아폴리스, 북구의 연경택지, 달서구의 성서5차산단, 죽곡택지 등과 인접해 대규모 물동량 이동 등 교통수요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4차 순환도로가 개통되면 경부·중앙 고속도로망과 신천대로·앞산순환로 등 주요 간선도로망을 연결하는 순환도로 구축으로 도심의 혼잡한 교통난을 해소할 것으로 기대된다. 성서산업단지 등 서남부권 대규모 인프라 확충에 따른 교통수요 대처 및 극심한 지정체를 겪고 있는 남대구~서대구간 도시고속도로의 교통량을 성서~지천간 고속도로로 우회해 교통량을 분산하는 효과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영남대 도시공학과 윤대식 교수는 “도심의 교통을 외곽 4차 순환도로로 분산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도심 교통이 완화될 것으로 본다”며 “대구와 경북을 아우르는 4차 순환도로이기 때문에 대구와 경북 상생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8) 삼각지 네거리

대구의 ‘9호 광장’은 대구 남구 대명동의 ‘삼각지 네거리’ 일대다.삼각지 네거리는 중앙에 교통섬을 두고 차량들이 원형으로 회전해서 들어가는 로터리 형식의 구조다.대구에 산재하는 70여 개소의 로터리나 네거리의 이름은 대체로 동명(洞名), 지명(地名)을 따거나, 혹은 행정 편의상 붙여진 번호에 의해 붙여졌다.하지만 ‘삼각지 네거리’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거리의 모양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 곳이다.중앙의 교통섬이 삼각형의 모양이어서 ‘삼각지 네거리’로 지었다.예전에는 ‘삼각로터리’라고 부르기도 했다.인근에 계명대 대명캠퍼스가 위치해 대학로가 조성돼 있고, 일대 노후한 주택가에 주택재개발 뉴타운이 곧 조성될 계획이다.삼각지 네거리는 남북으로 뻗친 현충로가 북으로는 계대 네거리, 남으로는 앞산 로터리를 지나 앞산 순환도로까지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달서구로 향하는 통로다.도시철도3호선 남산역이 인근에 있다.남산역은 3호선 역 중 유일하게 지상과 붙은 가장 큰 규모의 역사다. ◆교통섬에 테마공원 조성삼각지 네거리에는 중앙에 큰 교통섬이 있다.1937년 도시계획에 따라 계명 네거리에서 앞산순환로에 이르는 현충로가 개설됐고, 이어 1987년 삼각지 네거리에서 성당 네거리까지 이어지는 양지로가 개통하면서 이들의 교차지점에 삼각형 모양의 교통섬이 만들어졌다.이 교통섬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남구청은 그동안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남구청은 1997년 교통섬에 대형 분수대를 만들었으나 3년여 만에 가동을 멈췄다.2002년에는 토끼를 방목해 키웠다가 토끼가 도로변으로 나오면서 교통사고가 발생해 다음해 방목했던 토끼 20마리를 달성군농업기술센터에 분양하는 해프닝도 있었다.2009년에는 교통섬에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소나무와 야생화 등을 심었다.특히 섬유도시와 컬러풀 대구를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 ‘가배놀이’를 만들었다.민족의 명절놀이인 ‘가배놀이’에서 착안해 만든 이 조형물은 높이 16m, 폭 18m에 달하며 섬유와 패션도시인 대구에 걸맞은 원뿔 형태로 역동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야간에는 조형물을 중심으로 LED조명이 밝게 비춰 주변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교통섬으로 들어가는 횡단보도는 설치돼 있지 않아 눈으로만 즐길 수 있다.남구청 관계자는 “‘가배놀이’ 조형물은 아름답고 산뜻한 이미지를 발산하며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관광객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명나라 두사충 장군의 흔적대구 남구청에 따르면 대명동(大明洞)의 명칭 유래는 임진왜란과 정묘재란 때 조선에 원병 온 명나라 두사충(杜師忠) 장군에서 유래됐다.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선을 도우러 왔다.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작전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다.수륙지획주사로서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 되고 있다.그는 당시 수군을 총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아주 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 도독과 함께 다시 우리나라로 왔다.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됐다.이 같은 일은 그가 쓴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에서도 알 수 있다.충무공은 명나라의 장수가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해 그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으로 표하기도 했다.그 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그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에게 대구 시내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그 후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들어서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또 계산동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을 ‘뽕나무 골목’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누리는 행복이었기에 고향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두사충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이에 그는 최정산(현 앞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골,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전해진다.대명단(大明壇)이 있었던 마을이라 해 대명골이라 불렸으며, 이 대명골이라는 지명에서 지금의 대명동이 됐다. ◆영화 촬영의 명소 계명대 대명캠퍼스삼각지 네거리와 인접한 계명대 대명캠퍼스는 1953년 미국 북장로회 주한 선교부 대표였던 안두화 선교사와 최재화 목사, 강인구 목사 등 교회 지도자들이 대학 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1954년 계명기독학관을 설립한 것이 그 시작이다.1978년 본격 종합 대학으로 승격해, 계명대학을 계명대학교로 교명 변경 인가를 받아 지금에 이르렀다.대학본부는 개교 당시부터 1996년까지 남구 대명동에 있었으나, 1996년 달서구 신당동으로 이전했다.현재 대명캠퍼스에는 대구디지털문화진흥원이 입주해 있고, 미술대학, 패션대학 그리고 평생교육원이 있다.계명대 대명캠퍼스는 설립초기 지어진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이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과 잘 가꿔진 정원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특히 영화 및 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다.‘모래시계’부터 ‘동감’, ‘그해 여름’, 드라마 ‘사랑비’까지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대구의 공연 문화 일번지대구 삼각지 네거리 인근에는 ‘대명공연문화거리’가 조성돼 있다.대명공연문화거리는 남구 계명대 대명캠퍼스 앞에 위치한 공연문화거리로 예술단체 약 100개와 예술인 550여 명이 음악, 공연, 미술, 복합문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24개의 연극단체와 19개의 소극장 및 공연장이 조성된 지방 유일의 공연문화거리이다.대명공연문화거리는 1996년 계명대학교의 대학본부가 달서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번화했던 대명동의 대학가, 젊음의거리가 쇠락해 그 비워진 공간들을 예술가들이 채우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곳이다.매년 로드페스티벌도 개최돼, 여러 극단의 각양각색의 작품들이 대명문화거리에서 동시상영된다. 올해 벌써 7회째를 맞이했다.대명공연거리 일대는 2020년까지 문화특화지역으로 선정돼 있으며, 대명문화마을 조성사업도 곧 진행된다.남구청 관계자는 “대명문화거리는 지역문화를 관광자원화하고 명품관광 도시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7) 만평 네거리

“과거에는 여기가 넓은 들판이었어요. 1만 평이나 되는 넓은 평야라는 뜻으로 ‘만평’이라고 불렸습니다.”대구의 8번째 광장은 대구 서구와 북구 사이에 위치한 ‘만평 네거리’ 일대다.현재 만평 네거리는 팔달로와 공단3로 및 서대구로를 연결하며 대구 강북과 시내는 물론 북대구 나들목까지 연결하는 서북부의 중요한 관문이다.‘7호 광장’인 두류 네거리와 함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에게는 ‘8호 광장’으로 불릴 만큼 현재까지 광장으로 알려진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만평 네거리 이름의 유래는 과거 세워졌던 로타리의 면적이 1만 평이어서 대구시 지명 위원회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만평 네거리 인근에는 서대구고속터미널, 북부정류장이 위치해 있어 버스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2021년 서대구고속철도역이 개통되면 대구 서·남부권에서 전국으로 뻗어 나가는 시외 교통과 더불어 인근 염색산업단지 재생사업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이에 따라 8호 광장 일대의 주거 환경이 더욱 개선될 전망이다. ◆전국으로 뻗어나가던 미나리 밭만평 네거리는 서구 비산동 일대에 있다.대구서구향토사에 따르면 이 지역의 지명인 비산동(飛山洞)이란 이름은 산이 날아온 전설에서 유래했다.이 지역은 옛날엔 넓은 평야였으나 어느 날 새댁이 달천(현 달서천)에 나와 빨래를 하던 중 하늘에서 그윽한 음악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서쪽에서 커다란 산이 둥둥 떠 날려와 지금의 비산동 일대에 내려앉았다는 것이다.비산동은 1608년 해주 오씨, 인동 장씨, 경주 최씨 등이 정착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옛날엔 ‘날뫼’, ‘오장최동’이라 불렸고, 일제강점기 시절엔 ‘시목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과거 만평 네거리 서쪽 일대는 ‘미나리 꽝’이라는 자연부락이 펼쳐져 있었다.현 비산동, 평리동 일대에 대단위 미나리 밭이 형성된 것은 50여 년 전이며 침수로 벼농사를 망치는 일이 반복됐었다.그래서 선택한 작물이 바람에 피해가 적은 농산물인 미나리였다.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는 대구의 미나리 공급원으로 유명했다.이곳에서 생산되는 미나리는 대구는 물론 서울, 부산 등 전국 각지로 공급됐다고 한다.1978년부터 만평 로타리 건설이 본격화되며 이 일대 6만3천여 평을 메우기 시작해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이 자리에 북부 시외버스정류장과 상가가 들어섰다. ◆예전에는 대형 분수대 있는 로타리“예전에는 중앙에 대형 분수대가 있었습니다. 주위에 장도 열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어요.”만평 네거리의 처음 이름은 ‘만평 로타리’였다.1965년 2월2일, 건설부 고시 제1387호에 의거해 도시 계획으로 1968년 만평 로타리를 만들었다.로타리가 대구시의 서쪽 관문의 역할을 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량을 원활하게 소통시키기 위해서다.하지만 도시가 팽창하고 교통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만평 로타리가 차량 소통에 지장을 주자 로타리를 네거리로 바꿨다.당시 만평 로타리 중앙에는 큰 분수가 있고 주변으로 넓은 도로와 공간이 마련돼 있어 정치인들의 연설의 장과 시민들의 만남의 공간이 됐다.서구문화원 이종우 사무국장은 “당시 만평 로타리는 철저한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공간이었다. 넓게 펼쳐진 광장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의 장소가 됐다”고 말했다. ◆대구시내와 강북을 잇는 교통 요충지만평 네거리는 팔달교 북쪽의 칠곡지구와 대구 시내를 잇는 대구 서북부 교통의 요충지다.특히 노원로, 서대구로, 팔달로가 만나는 지점이다.출퇴근시간에는 통근차량과 북부정류장 및 서대구고속버스터미널을 오고가는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들로 팔달교~만평네거리~평리네거리 구간은 대구의 상습 정체 구간 중 하나가 됐다.로타리에서 교차로로 변경되며 면적은 2만4천130㎡로 다소 줄었다.2015년 도시철도3호선이 개통하며 만평역이 세워졌다.도시철도3호선은 지하를 달리는 1·2호선과는 달리 지상의 모노레일로 평균높이가 11m에 달한다.만평 네거리 한복판에는 도시철도3호선이 지나는 큰 규모의 사장교가 조성돼 있다. 대형 아치형 주탑이 있으며 폭 42m에 높이가 30m에 달하고 야간 경관조명도 설치돼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만평역의 형태는 인근 대구제3산업단지의 주력 산업인 안경 엉덩이 모습으로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4천여 명이다. 네거리의 혼잡한 교통량에 비하면 도시철도 이용객 수는 많지 않은 편.인근에는 서대구고속버스터미널과 북부정류장도 있다.북쪽으로는 대구염색산업단지가 밀집해 미세먼지와 악취 민원이 많은 등 정주여건은 좋지 않은 편이다.하지만 2021년 서대구고속철도역이 개통하고 도시 트램 4호선도 인근을 지날 것으로 예상돼 주변 환경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염색산업단지, 재생사업으로 다시 태어나대구시는 지난해부터 만평 네거리 북쪽의 염색산업단지에 대한 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대구염색산업단지는 염색가공업의 전문화와 협업화를 위해 1981년 조성돼 현재 84만6000㎡의 면적에 125개의 염색업체가 입주한 특화 산업단지이다.대구의 산업화를 견인한 염색산업단지는 현재 경부고속도로와 광주대구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대구포항고속도로는 물론 대구공항과도 인접하는 등 교통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원래 도시의 외곽지역에 조성됐지만 도시의 폭발적인 팽창과 함께 현재 대구의 도심지역에 포함됐다.하지만 기반시설의 노후화 및 지원시설 부족으로 입지 여건이 점점 악화됐다.이는 대구의 염색산업 경쟁력을 저하로 이어졌다.대구시는 이번 재생 사업을 통해 경쟁력을 제고시키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예정이다.총 사업비는 411억 원으로 도로와 교량 확장 및 주차장 조성 등 기반시설 정비와 가로등·벤치 등 각종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있다.또한 올해부터 단계별 기반시설 조성사업이 착수될 수 있도록 내실 있는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염색산업단지 재생 사업이 완료되면 서대구 역세권 개발과 연계돼 지역의 정주 여건이 확연히 나아질 것으로 기대된다.대구시 관계자는 “염색산단 재생사업을 통해 보다 좋은 환경의 정주여건을 제공할 것”이라며 “서대구 역세권 개발 사업과 연계해 서대구 지역이 대구의 관문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주변 여건을 개선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6) 7호 광장 두류네거리

“기사님, 7호 광장으로 갑시다.”대구에서 택시를 타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든 기사가 서구 두류네거리로 향한다.대구시민 중 7호 광장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대구의 7번째 광장은 서구 내당동에 있는 두류네거리다.서구 두류네거리 일대는 대구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재까지 광장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광장’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대략 두류네거리와 감삼네거리 사이의 구역이 광장이라고 한다. ‘광장코아’를 비롯해 인근 상가 대부분이 ‘7호 광장점’ 혹은 ‘광장점’이라고 표기한다.7호 광장은 오래전부터 이 일대를 칭하는 관습지명이 됐다. 또 두류네거리 일대는 ‘광코’ 상권이라 불리며 대구 동성로에 버금가는 대구 핵심 상권으로 특히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다.두류네거리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구와 달서구와 경계지점이기도 하다.인근에 대구의 대표관광지인 두류공원과 이월드가 있어 평일·주말을 가리지 않고 유동인구가 꽤 많다.두류네거리 지하에는 넓은 지하상가가 있고 지상에는 많은 교통섬들이 교차로에 배치돼 특이한 형태의 교통광장이 형성돼 있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 ‘감삼지’‘대구서구향토사’에 따르면 현재 서구 ‘내당동(內唐洞)’은 ‘당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부르는 것에서 유래됐다.1887년 ‘안땅골’이 전래돼 현재의 동명인 내당동이 됐다고 전해진다.안땅골은 현재 두류정수장 앞 동남편 산 아래로서 이곳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를 당산목이라 했다.또 그 나무가 있던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안단골’이라고도 했다.이를 한자어로 바꿔 내당동이 됐다는 것.이 지역에는 1970년대까지 ‘감삼지’라고 불리는 큰 못이 있었다.예전 감삼지는 현 달성고 인근에 있다. 둘레가 1천900m, 수심이 27m에 달하는 큰 못이었다.감삼못의 어원은 감삼못의 들판에 감나무가 많이 있어서 거기서 딴 이름이라고 한다.또 이 못이 서남부 지역 들판을 살찌게 하는 많은 단물(甘水)이 모인 곳이라는 뜻에서 감삼지라고 불렀단다.1984년 청구주택이 시유지인 감삼지를 매립해 900여 세대의 ‘광장타운’ 아파트를 지어 감삼못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도심에서 달서구로 향하는 길목두류네거리는 대구를 남북으로 가르는 달구벌대로와 서대구로·두류공원로가 만나는 지점이다.매일 이 인근은 서대구·성서산업단지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려 출퇴근 시간 때마다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고 있다.두류네거리의 차량 교통량은 지난해 기준 수성구 범어네거리와 달서구 죽전네거리에 이은 대구에서 3번째로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다.인근에 두류공원, 이월드 등 대구를 대표하는 휴양·놀이 시설이 있어 평일·주말을 가리지 않고 교통정체 현상이 극심하다.두류네거리의 면적은 2만5천500㎡에 달하며 복잡하게 조성된 교통섬들과 지하상가 입구로 인해 초행길이라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지난해 12월 대구시청 신청사의 부지가 두류네거리 인근 두류정수장으로 결정되기도 했다.◆제2의 도심 ‘광코’, 젊음의 거리“광코 앞에서 만나요.”요즘 대구의 젊은 층들에게 가장 핫한 만남의 장소를 꼽으라면 달서구 ‘광코’ 상권이 꼭 포함될 것이다.‘광코’는 광장코아 쇼핑센터의 줄임말로 두류네거리 인근에 1987년 건립된 대구의 대표적인 상업시설이다.흔히 광코 상권이라고 하면 두류네거리부터 감삼네거리 사이를 아우르는 광장코아, 두류네거리, 젊음의 거리 일대를 뜻한다.광코 상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2005년, 도시철도 2호선 개통 후다.도시철도2호선이 개통된 후 대구 전역은 1시간 거리로 연결됐고, 이후 젊은 층의 여가생활 패턴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지하철로 몇 코스 거리의 가까운 곳을 두고 굳이 시내까지 갈 필요성이 없어진 것.여기에 롯데시네마 광장점이 들어오며 젊은 층의 광코 유입은 폭발적으로 늘었다.이에 따라 광장코아 주변에는 화장품, 패션몰, PC방 등이 속속 들어섰다.광코 상권의 또 다른 장점은 집중성과 다양성이다.넓지 않은 공간에 집약된 150여 개의 점포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스크린야구장, 당구장, PC방, 게임장 등의 시설이 먹거리 골목 주변에 있는 점도 젊은이들을 광코로 모으는 이유다. 박동휘(34·달서구)씨는 “광코 거리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 이렇게 한 거리에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현재 광코 상권은 대구 제2의 동성로로 불리며 시내 중심인 동성로에 이은 최고 상권으로 평가받고 있다.최근에는 동성로보다 더 성장성 있는 상권으로 주목받을 정도다.주말이면 3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광코 상권을 찾는다.이제 광코는 대구의 대표적인 젊음의 상권으로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곳이 됐다.◆거대한 지하거리 형성두류네거리 지하에는 도시철도2호선 두류역이 위치해 있다.두류역은 지하 3층 규모로 섬식 승강장 규모로 지하상가가 넓게 펼쳐져 있다.두류역의 출구는 무려 20개로 전국 도시철도역 중 대구 반월당역(23개) 다음으로 많다.두류역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지난해 기준 1만7천211명으로 2호선 전체 4위를 차지한다.1호선과의 환승역이자 대구 최대 번화가인 반월당역을 제외하면 영남대역, 용산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승객이 타고 내리는 곳이다.두류역 지하상가 자체는 노후했지만 약 450m의 길이에 20개의 출입구가 모여 두류역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30년 만에 논밭에서 최고 번화가로“1970년대 이 일대는 그냥 논밭이었어요. 감삼못에서 낚시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두류네거리 인근 주민 최정화(73·달서구)씨는 당시 ‘7호 광장’ 일대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최씨에 따르면 이 일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감삼못이 매립되고 광장타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일대에 본격적인 상가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그는 “거리가 이렇게 휘황찬란하게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15년 정도 된 것 같다”며 “도시철도 2호선이 들어오며 젊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광코 상권이라는 말이 나돌며 지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고 떠올렸다.인근 두류공원과 이월드를 찾는 시민도 광코 상권의 주요 손님이다.여기에다 해마다 두류공원에서 열리는 ‘치맥페스티벌’은 지역 상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상가번영회 관계자는 “광코 상권에는 젊은 층의 유입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이는 시장의 매력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며 “신청사 유치 등 주변에 호재가 많아 일대 상권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고 웃음 지었다.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5) 6호 광장 범어네거리

“대구의 부자가 이곳에 모여 있어요.”대구의 ‘6호 광장’은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 일원이다.범어네거리는 동대구로와 달구벌대로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대구에서 차량 교통량이 가장 많은 교차로이기도 하다.범어네거리에는 두산위브 더 제니스, 범어센트럴푸르지오 등의 초고층 아파트가 밀집돼 있다. 또 범어네거리를 중심으로 금융기관 110개소가 집중돼 있으며 이밖에도 다양한 행정·경제·교육 인프라가 발달해 있어 중구 동성로에 이은 대구 제2의 도심으로 불린다.대구 도시철도 2호선역인 범어역이 있다.인근에 대구고법·대구고검·대구지법·대구지검과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된 법조타운이 조성돼 있다.범어네거리 일대는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수성구에서도 최고의 부촌이어서 ‘대구의 맨해튼’으로 통한다.넓은 공간과 함께 다양한 편의시설·전광판 등이 설치돼 예전 월드컵 기간에는 거리응원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떠 있는 형상범어네거리 일대는 고려시대 이래 주요 교통요충지였으며 ‘범어역’이 있었던 곳이다.당시에는 개경에서 경주로 내려가는 간선로에 자리 잡은 역참으로 ‘범어역’으로 불렸고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역참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며 접대하는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 기관이었다.이곳이 과거에도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다.이 일대는 1914년 달성군 수성면에 속해 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됐다.1975년 범어동을 범어1·2동으로 나눴고 1979년 범어2동을 범어2·3동으로 다시 갈라졌다.1982년 범어1동에서 범어4동이 분리됐다.1450년 철원부사를 지낸 구수종이 정착하면서 일군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마을의 형세가 마치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에 흐르는 냇물(범어천)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과 ‘고기 어(魚)’를 합하여 ‘범어(泛魚)’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대구로와 달구벌대로의 만남의 장소 범어네거리는 동대구로와 달구벌대로가 만나는 대구 교통의 요충지이자 수성구의 핵심으로 통한다.동대구로는 대구시를 동서로 나누는 도로며, 신천을 중심으로 한 동부 지역의 남북을 가로질러 동대구복합환승터미널을 통과하는 대구 교통의 핵심 교통망이다.달구벌대로는 도시철도2호선을 따라 대구를 남북으로 가르는 대구 교통의 동맥과도 같은 곳이다.이 두 곳이 만나는 지점이 범어네거리인 만큼 교통 요충지라는 설명을 굳이 할 필요조차 없다. 범어네거리는 대구시 모든 교차로 중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대구시의 ‘2018년 교통관련 기초조사’에 따르면 범어네거리의 교통량은 압도적인 1위였다.특히 출퇴근 시간 만촌네거리~범어네거리~반월당네거리 구간은 직장인들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빚기도 한다.범어네거리 지하에는 도시철도2호선 범어역이 있다.지난해 하루 평균 이용객은 1만5천299명으로 도시철도 2호선 중 6위를 차지했다. 범어역의 이용객 수는 매년 하락하는 추세지만 수성범어 푸르지오와 수성범어W 등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는 만큼 이용객 또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지하도에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조성돼 영어마을과 범어아트스트리트가 조성돼 있다.역세권의 범위가 넓고 유동인구가 굉장히 많은 곳이기도 하다.예비타당성조사를 앞둔 대구엑스코선도 범어역을 지날 것으로 계획돼 도시철도2호선과의 환승역으로서 더욱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 거리 응원의 메카범어네거리는 왕복 12차로의 달구벌대로와 왕복 16차로의 동대구로가 교차하고 있으며, 교통광장까지 조성돼 있다.범어네거리의 면적은 5만7천363㎡에 달해 대구지역 교차로 중 가장 넓다.네거리의 동서남북으로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있다.그래서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범어네거리에서 대규모 거리응원이 벌어지기도 했다.2002년 월드컵 당시 20만 명의 시민이 범어네거리에 모여 단체응원을 펼쳤으며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새벽시간이었지만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범어네거리로 나왔다.2010년 월드컵 때도 지역 내 최대 인파를 수용할 수 있는 범어네거리를 거리응원 장소로 개방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교통통제와 비용 문제 등이 걸림돌이 돼 거리응원은 중단됐다.거리응원은 멈췄지만 범어네거리에는 출퇴근 시간대에 다양한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한다.대형 전광판과 많은 교통량 등으로 광고효과가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대구지역 최고의 부촌범어네거리 일대는 1980년대 동구에서 수성구가 분리되며 지역 최고의 부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입지, 교통여건, 학군, 생활편의시설 등 각종 정주여건이 잘 갖춰졌다.범어네거리 일대에는 고급 아파트들이 밀집돼 있다.지역의 주요 관공서와 업무용 빌딩이 많이 들어선 부도심 지역이며 교육환경이 우수하다. 특히 서울의 강남학군에 버금가는 학군을 자랑한다.주거지역 선호도가 가장 높은 편이며 평균 집값도 대구에서 가장 비싸다.공중파 방송국 3사인 KBS대구방송총국, 대구 MBC , TBC가 모두 인근에 있으며 대구일보, 영남일보 등 대구지역 대표 일간지들도 자리하고 있다.범어공원, 야시골공원 등 도심 속 공원도 마련돼 지역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범어역 5번 출구에 위치한 대구그랜드호텔은 2015년 미국의 스타우드 그룹과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2021년에 ‘쉐라톤 대구 호텔’로 재탄생할 예정이다.영남대 도시공학과 윤대식 교수는 “동대구KTX의 개통과 더불어 범어네거리는 대구 동성로를 대신할 신도심이 됐다”며 “접근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대구·경북의 부자들이 모두 수성구에 몰려 왔다. 대구 교통의 핵심으로 정주여건의 모든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범어네거리는 앞으로도 승승장구 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4) 동대구 분기점

대구의 5호 광장은 동대구 분기점 일원이다.고속도로 분기점(JC)은 고속도로들을 서로 연결하는 도로 시설물이다.고속도로는 주행 속도가 80㎞ 이상으로 매우 빠르기 때문에 차량이 중간에 정차하는 것이 어렵고, 교통 소통에 지장을 주기 쉽다.그래서 고속도로가 서로 만나는 곳에는 입체 교차로 형식을 띠는 분기점을 설치한다.동대구 분기점은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만나는 곳으로 인근에 동대구복합환승터미널과 대구국제공항이 위치해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이 지역은 군사적 전략 요충지다.그래서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전투가 숱하게 벌어졌었다.최근 대구국제공항의 이전이 정상적으로 추진된다면 이 일대는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숱한 전투가 벌어진 전략적 요충지영남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5호 광장(동대구 분기점) 일대는 고려시대 당시 해안현(解顔縣)이라고 불렸던 곳이다.해안현은 치성화현(雉省火縣), 혹은 미리현(美里縣)으로도 통했다.대구에는 바다가 없지만, 낙동강과 금호강 덕분에 일찍이 수로가 발달했다.사방이 산으로 막힌 가운데 중앙으로 금호강이 흐르는 대구는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아 왔다.신라시대 신문왕은 천 년 신라 역사상 유일한 천도 계획을 대구(옛 달구벌)로 세우기도 했다.신라 말 해상왕이라 불렸던 장보고(張保臯)는 김우징(金祐徵)의 반란을 돕기 위해 경주로 향하던 도중 민애왕(閔哀王)의 군사와 이곳에서 맞닥뜨렸다.장보고가 이끄는 청해진의 오천 명 군사들과 신라 중앙군 10만 명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한바탕 격전을 벌였다.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이 명승부를 벌인 곳도 이 일대다.당시 견훤이 호남에서 세력을 확장해 경상도 일대까지 그 기세를 떨치자 위기를 느낀 신라 경애왕(景哀王)은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이에 따라 두 호걸의 대결은 대구 팔공산 동화사 일대에서 벌어졌다.개성에서부터 내려온 왕건은 충주와 상주, 칠곡을 통과했다.현재 지형으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타서 대구로 온 것이다.왕건이 이끈 1만 명의 군사는 기세등등한 견훤 군사와 힘겨운 싸움을 벌였는데 그 흔적은 동구 지묘동 일대에 남아 있다.이 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대구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있다.‘공산전투’가 벌어진 이 일대는 고려 입장에서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고, 후백제 입장에서도 기필코 차지해야 하는 길목이었다.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의병들의 흔적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해마다 10월이면 대구 동구 도동의 용암산성에서 열리는 옥천문화제는 임진왜란 당시 이 지역의 의병들을 기리는 행사이다.당시 일본군의 주요 병력들이 북쪽으로 내달릴 때나 남쪽으로 퇴각할 때 반드시 이 지역을 거친 것을 보면 현 동대구 분기점 일대가 예전부터 주요 교통로였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대구의 하늘 관문, 대구국제공항5호 광장 인근에는 영남에서 해외로 나가는 관문인 대구국제공항이 있다.대구공항은 올해 연간 이용객 400만 명을 달성하는 등 매년 성장하며 전국의 몇 안 되는 흑자경영 공항으로 발돋움했다.대구공항의 역사는 1931년 대구부가 도시계획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당시 새롭게 추진된 대구도시계획은 대구 인근을 대구에 편입하는 시구개정 사업과 함께 사단 유치, 비행장 건설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이때 대구비행장 예정지로 선정된 동구 동촌 일대는 대구 인근의 중요 농업지대였다.대구비행장이 건설됨에 따라 이 일대는 조선의 주요 공항이 되고, 동시에 조선과 일본, 만주를 연결하는 거점공항이 됐다. 경북의 주요 지역 대부분에서 대구공항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또 대구·경북에서 유일하게 국제교류 중심 기능을 수행해 영남권 거점공항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한편 대구국제공항은 전국에서 도심과 가장 인접한 공항인 만큼 가장 소음 피해가 심한 공항이기도 하다.특히 K2군공항에서 이·착륙하는 전투기의 소음으로 일대 주민들은 극심한 소음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통합신공항 이전…동구는 새 시대 맞아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이 급물살을 타면서 공항 후적지 개발 등으로 동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대구공항은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공항이다.전국 최고의 소음피해는 물론 동구전체 면적의 35%(182㎢중 63㎢)가 고도제한에 묶여 개발사업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이러한 이유로 대구국제공항과 K2군공항 이전에 대한 요구가 끊이질 않았다.공항 이전 움직임은 2008년부터 시작됐다.신공항 유치를 두고 밀양과 부산 가덕도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하지만 2011년 국토해양부가 “두 후보지 모두 불리한 지형조건으로 인한 환경문제, 사업비 과다, 경제성 미흡 등으로 현시점에서 사업 추진 여건이 적합지 않다”는 결론을 냈다.이후 대구시는 영남권 신공항의 대안으로 ‘K2공군기지와 대구공항 통합이전’을 추진 중이다.군위 우보(단독 후보지), 군위 소보·의성비안(공동 후보지)에 대한 주민투표로 최종 후보지가 결정되면 본격적으로 공항 이전이 시작된다.최근 대구공항 이전 움직임이 가시화됨에 따라 대구공항 이전 후 종전부지 활용방안도 주목받고 있다.대구시는 공항 이전부지를 미래형 복합신도시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대구시는 다양한 안을 놓고 고민 중이다.싱가포르의 클락키와 같은 특화된 상업지역 조성, 말레이시아의 푸트라자야를 벤치마킹한 글로벌 수변도시 개발, 대구형 스마트시티 구축 및 신교통수단 구축을 통한 친환경 도시 구현 등이 제시되고 있다.종전 부지는 기존 점 단위 개발에서 벗어나 고도제한이 해제된다.이에 따라 주변과의 연계개발을 통해 첨단기술 중심의 미래산업 유치로 신성장 거점이 될 전망이다.또 팔공산·금호강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친환경 주거·여가·문화 공간 조성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지만 대구국제공항 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일부 시민단체들은 대구국제공항의 가장 큰 이점인 접근성의 하락과 후적지 개발로 인한 구도심들의 슬럼화, 지역감정 유발, 안전 문제 등을 이유로 공항 이전을 반대하고 있다.대구시 관계자는 “이전부지가 결정 나는 대로 민간공항 및 통합이전 절차를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이라며 “반대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알고 있지만 대구·경북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서는 통합 신공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3) 칠곡 나들목

‘4호 광장’은 대구 북구 관음동의 칠곡 나들목 일원이다.‘3호 광장’인 서대구 나들목이 대구 서쪽의 관문이라면 4호 광장은 북쪽의 관문으로 통한다.‘대구 칠곡’은 정식 행정적 용어로는 사용되지 않지만, 북구의 금호강 이북 지역 중 무태조야동을 제외한 구역을 의미하는 관습 지명이다.칠곡지역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서 대구의 다른 지역과 지형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남쪽과 북쪽 입구가 좁게 열려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호강이 흘러 대구의 타 지역과 단절돼 있다.이 같은 지역적 특성으로 천연의 요새가 형성돼 6·25전쟁 당시 이 일대가 우리나라의 최후의 방어선이 구축되는 등 역사적 전투의 현장이기도 했다.칠곡지역은 대구에서도 다른 지역과 구분된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경상감영이 있었던 지역 행정 중심지팔거역사문화연구회에 따르면 ‘칠곡’이란 이름은 가산에서 유래됐다.가산은 ‘칠봉산’으로도 불렸는데 산꼭대기는 나지막한 7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골짜기가 사방 7개로 형성돼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칠곡지역의 옛 이름은 신라시대에는 ‘팔거리현’으로 불렸다.신라 경덕왕이 군현제도를 실시할 때는 수창군 소속 4개현의 하나로 ‘팔리현’이라고도 했다.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암동고분군은 팔거리 집단의 수장무덤으로 5~6세기 때부터 이 지역에 상당한 정치체제가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칠곡이라는 이름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세기 ‘고려사’에서 비롯된다.고려시대 당시 불렸던 ‘팔거현’의 별호로 칠곡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 경상감영이 이 지역에 3년 간 설치되기도 했다.1640년 팔거현이 칠곡도호부로 승격되고 이후 1895년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며 칠곡은 대구부 관할이 됐다.다음해인 1896년에는 대구부에서 분리돼 경북도에 편입됐다.1980년 칠곡면이 칠곡읍으로, 1981년 대구시가 직할시로 각각 승격하며 칠곡읍이 대구 북구에 속하게 됐다.현재까지도 이 일대를 경북 칠곡군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1981년 7월1일 이전까지 이곳은 칠곡군이 맞았다.특히 ‘칠곡’이란 명칭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칠곡군의 중심지였다는 것. 칠곡지역이 대구로 편입된 이후 한동안 ‘칠곡’이란 이름이 정식 행정구역 명으로 남아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에 법정동 명과 동일하게 행정동 명이 변경되며 이 지역의 칠곡 지명은 사라지게 됐다.하지만 과거 칠곡읍이었던 역사를 반영해 이 지역을 일컫는 관습적 지명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경북 칠곡과는 달라…강원도로 가는 길목 칠곡 나들목은 대구시 북구 관음동 일원에 조성됐다.중앙고속도로는 부산에서 춘천을 잇는 대한민국의 내륙 중심을 지나며 남북으로 잇는 도로다.1989년 춘천 나들목~금호 분기점 구간이 최초로 계획됐으며, 이후 1994년 대구~칠곡(6.1㎞) 구간이 개통함으로 칠곡 나들목이 세워졌다.칠곡 나들목의 이름은 설치 당시 해당 지역이 대구직할시 칠곡1동이었기 때문이다.2003년 대구시의 행정 구역에서 ‘칠곡’이라는 명칭이 사라짐에 따라 경북 칠곡군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관음 나들목’으로 명칭을 변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경북 칠곡군과는 별개로 이 지역의 고유지명이 ‘칠곡’이기 때문에 명칭 변경이 불필요하다는 지역민의 반대 여론이 많아 칠곡 나들목이라는 명칭이 유지됐다.그러나 이후에도 명칭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2003년에 대구 북구는 명칭을 변경할 경우 ‘강북 나들목’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칠곡 나들목이 있는 중앙고속도로는 대구에서 강원도·경북 북부지역으로 가는 길목이다.과거 칠곡 나들목 일원은 ‘고평역’이라는 역원이 설치돼 있었다.역원은 조선 시대 역로(驛路)에 만들고 국가가 경영하던 여관의 하나다.고평역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파발마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칠곡지역 남쪽으로는 금호강을 기점으로 대구 금호강 남쪽 지역과 분리돼 예전에는 팔달교를 통하지 않으면 대구 시내로 나갈 수 없었다.팔달교 남쪽에는 서대구고속버스터미널 및 북부정류장과 대구지역의 주요 공단들이 밀집돼 지금도 출퇴근 시간의 팔달교~만평네거리~평리네거리는 대구에서 가장 교통이 혼잡한 곳이기도 하다.대구 도시철도 3호선도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으며, 해당 노선의 상행선 종점인 칠곡경대병원역이 있다. ◆칠곡 정체성과 미래 찾아…팔거역사연구회 배석운 회장 “금호강의 기적이 절실하다. 대구는 금호강의 개발과 발맞춰 인·의·충이 숨 쉬는 역사문화관광의 도시로 재탄생해야 한다.”팔거역사연구회 배석운(71) 회장은 잊혀 가는 칠곡의 정체성과 역사를 되찾는 일에 동분서주하고 있다.1948년 대구시 북구 동천동에서 태어난 후 줄곧 칠곡에 살아 온 토박이다.2014년 설립된 팔거역사연구회는 칠곡의 ‘이름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역사 발굴과 교육, 인문학까지 칠곡을 대구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 삶의 근원이 되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배 회장은 역사 속에서 대구 칠곡의 희망찬 미래를 찾고 있다.그는 “지명과 문화가 도시의 확장과 함께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지명은 그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를 대변하고 있어 그 이름이 사라지면 결국 역사가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국가가 나서서 칠곡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한다”고 당부했다.또 대구의 위기 극복의 순간에는 항상 칠곡이 있었다고 강조했다.특히 “칠곡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6·25전쟁 때도 최후의 방어선이 세워졌던 곳”이라며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한국 경제를 책임지기도 했다. 이제는 대구의 미래를 책임질 때”라고 말했다.팔거역사연구회는 칠곡의 역사·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2015년 ‘대구 칠곡의 역사와 문화유산’이라는 책을 집필한 이래 5년 동안 ‘금호강 누정문학’, ‘칠곡천년이야기’ 등 칠곡을 알리는 10권의 역사·문화서를 만들었다.또 지역 학교에서 인성교육강의를 통해 대구가 인문학 고장이라는 점을 알리고 있다.매년 열리는 팔거문화제는 교육을 통해 대구가 인문학 고장이라는 것을 홍보한다.배 회장은 “선사시대부터 수많은 역사와 유물들이 남아있는 대구에 역사박물관이 하나도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칠곡의 구암동 고분군부터 금호강 누정문학, 함지산, 팔거산성 등 조상들이 물려주신 역사문화유산을 대구 미래 콘텐츠로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배석운 회장은 “그동안 칠곡지역은 행정주체가 6번이나 바뀌는 혼란 속에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다”며 “칠곡은 대구에서 역사와 문화가 가장 잘 산재된 곳이다. 금호강변 개발과 더불어 칠곡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통해 역사문화테마가 있는 고장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2) 3호 광장 서대구 나들목

1965년 대구시는 12곳의 교통 요충지에 광장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호 광장’ 반월당 네거리를 시작으로 12개의 광장은 도시 계획의 중심축으로 도시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기능을 상실한 곳도 있다. 남구 대명동 일원에 계획됐던 ‘2호 광장’은 미군부대가 들어서며 광장을 잃었다. ‘2호 광장’에 이어 ‘3호 광장’으로 지정된 곳은 현재의 대구 서구 상리동의 서대구 나들목(IC) 일원이다. 나들목은 ‘나간다’와 ‘들어간다’라는 뜻을 지닌 어간인 ‘나들’과, 사람이나 짐승이 잘 지나다니는 길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인 ‘목’이 합쳐진 단어다. 일반 도로에서 고속도로로 진·출입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서대구 나들목은 수도권 및 충청·강원권에서 대구로 들어오는 진입로이자 대구의 대표적인 관문 중 하나다.현재 서대구 나들목 주변 도로는 대구에서 가장 교통이 혼잡한 곳이기도 하다. 수도권 등 타지에서 대구를 찾는 방문객들과 주변 공단의 출퇴근 차량으로 매일 극심한 교통정체가 일어난다. 특히 2021년에는 인근의 서대구KTX역이 개통하는 만큼 서대구 나들목을 오가는 수요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한양으로 가던 통로, 곳곳에 자연부락 형성 서대구 나들목이 위치한 서구 상리동은 과거 조선시대 한양에서 대구를 지나가던 상인들이 드나들던 통로였으며, 곳곳에 자연부락들이 형성됐었다. 대구서구향토사에 따르면 과거 상리동 일대는 가르뱅이 위쪽에 있다고 상리(上里)라 불렀으며 ‘웃마’라고도 불렀다. 이후 대구부 달서면으로 편입된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방골’(현 상리1동)과 ‘가르뱅이’(현 상리2동)를 합쳐 상리동(上里洞)이라고 불렀으며,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됐다.1938년 10월1일에는 대구부로 다시 편입됐다. 1965년 상리동은 또다시 이웃 지역에 있던 이현동(梨峴洞)과 중리동(中里洞)과 합쳐져 현재의 상중이동(上中梨洞)으로 통합됐다. 현재 서대구 나들목이 위치한 ‘가르뱅이’ 일원은 과거 상리동의 자연부락이었다. ‘가르뱅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이 지역이 유독 장사가 잘 안 돼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아, 거지의 속칭 ‘걸뱅이’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설은 와룡산 자락이 귀처럼 길게 생겼다 해서 ‘괘이방’이라고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관리들이 토지 조사를 하며 발음이 어려워 ‘가르뱅이’라고 기록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 이와 함께 300여 년 전 한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꼬불꼬불하다고 해서 부른 ‘괘리뱅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현 분기점에서 서대구 나들목으로 서대구 나들목은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의 8번 교차로다.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은 1976년 건설된 대구~마산을 잇는 고속도로인 구마고속도로의 일부분이다. 2001년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가 변경됨에 따라 구마고속도로 중 내서 분기점~현풍 나들목 구간이 현풍 나들목~금호 분기점 구간으로 축소됐으며, 2008년 명칭이 바뀌며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지선으로 변경됐다.총 길이는 30㎞이며 너비 13.2m, 왕복 4~6차선이다. 서대구 나들목의 명칭은 여러 번 바꿨었다. 1984년 금호 분기점 개통 당시 명칭은 이현 분기점이었으며, 1992년 대구 이현동으로 진출하는 이현 나들목으로 변경됐다. 1995년 북구 서변동에 있던 서대구 나들목을 북대구 나들목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이현 나들목이 현재의 서대구 나들목으로 불리고 있다. ◆대구의 관문, 극심한 정체로 몸살 서대구 나들목은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관문이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3만4천710대의 차량이, 지난해에는 모두 1천245만여 대가 서대구 나들목을 통과했다. 특히 수도권 및 타 지역에서 대구를 찾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대부분이 서대구 나들목에서 진·출입하고 있다.인근에 북부정류장과 서대구고속버스터미널이 있기 때문이다. 대구의 고속버스 노선은 부산, 울산, 경주 등 동대구 나들목으로 들어가는 대구지역 동남쪽 노선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서대구 나들목을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있다. 서대구 나들목은 대구를 대표하는 공단인 서대구공단, 성서공단, 달성공단으로 진입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신천대로와 북비산로를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 차량이 많아 출퇴근 시간을 중심으로 서대구요금소를 통과할 때 극심한 정체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금호 분기점을 통해 경부고속도로로 빠져나가는 차량은 많지만 분기점 진입로는 좁아 늘 병목현상이 발생한다. 영남대 도시공학과 윤대식 교수는 “성서공단과 현풍공단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에 비해 입구는 턱없이 좁아 지역 교통이 극심한 혼잡을 빚고 있다”며 “대구시는 적극적으로 진입로를 신설하고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대구KTX 개통…대구의 중심으로 우뚝 대구의 서남부권 주민의 염원이던 서대구KTX역의 준공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서대구KTX역이 개통되면 서대구 나들목이 위치한 서남부권의 경제와 문화는 물론 지도까지 확 바뀔 것으로 보인다. 서대구KTX역은 서대구 나들목과는 불과 300m 가량 떨어져 있다. 특히 대구권 광역철도와 고속철도(KTX, SRT)가 정차하는 복합역인 만큼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대구KTX역은 대구시의 시조인 독수리가 비상하는 모습을 형상화해 대구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떠오를 전망이다. 서대구KTX역이 개통되면 서남부권 주민들의 철도 이용이 편리해지고 서대구 역세권 개발이 본격화되는 등 그동안 심각한 불균형을 보인 동·서지역이 균형 잡힌 발전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구청 관계자는 “서대구KTX역이 개통되면 서대구 역세권 개발과 도시재생사업 등 다양한 사업들이 본격적으로 추진돼 서남부권 중 특히 서구 일대가 대격변을 맞이할 것”이라며 “교통의 최중심지로 서구가 다시 한 번 대구의 중심으로 우뚝 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1) 반월당 네거리

대구에는 지명 대신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다.‘7호 광장’으로 불리는 대구 서구 두류네거리가 대표적이다.또 북구 만평네거리는 ‘8호 광장’이다.대구시가 1965년 ‘1차 도시계획재정비’에 나서면서 대구의 12개의 교통 요충지에 ‘광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번호를 매겼다.단순히 도면 확인의 편의를 위한 번호로 시작된 대구 광장의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광장이 현재 60여 개까지 늘어났다.‘2호 광장’처럼 현재 군부대 안에 위치해 본래 광장의 기능을 상실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광장들은 여전히 대구 교통의 요충지로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대구 도시의 확장과 함께 성장해 온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편집자 주〉-----------------------------------------------------------------------------------------“반월당에서 만나요.”1965년 발표된 ‘대구도시계획도’에 따르면 당시 계획된 12광장 중 가장 먼저 지정된 ‘1호 광장’의 위치는 현 대구 중구 남산동의 반월당 네거리 일원이다.반월당 네거리는 동성로와 함께 대구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고 붐비는 곳이다.현재 대구지역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반월당 네거리를 중심으로 지나고 있다.대형백화점들이 위치해 있고 대구 번화가로 들어가는 관문이어서 예전부터 만남의 장소로 사랑받아 왔다.‘반월당’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먼저 후삼국 당시 후백제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이 몸을 피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반달(半月)이 떠 있었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 최초의 백화점인 ‘반월당’의 명칭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지도상으로도 대구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반월당 네거리는 대구 교통의 심장과도 같은 곳으로 대구의 정치·문화의 일번지로서 대구의 역사와 함께 성장해 왔다. ◆대구 도심의 역사 ‘반월당’대구근대역사관에 따르면 반월당 네거리 일대는 조선 후기 전국에서도 손꼽혔던 서문시장과 약령시를 찾는 상인들로 늘 북적였다.1906년 대구읍성을 헐고 조성된 ‘중앙통’ 거리가 현재의 대구 동성로 번화가의 시초로 추정된다.1936년 당시 약전골목의 상인이었던 차병곤씨가 고급화장품, 수예품, 메리야스, 양산 등의 잡화류를 판매하는 목조 2층 건물로 된 ‘반월당’이라는 가게를 연 것이 반월당의 시초다.특히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라는 의미가 있다.당시 반월당은 현 중구 남산2동 반월당역 22번 출구 인근에 세워졌으며 고객은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1943년 경영난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공신백화점’으로 상호가 바뀌었고 해방 이후 백화점은 문을 닫았다.이후 여러 상점 등으로 분리돼 운영됐지만 1981년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반월당은 사라졌지만 반월당이라는 지명으로 여전히 통용될 만큼 당시 화려했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현재 동아쇼핑과 현대백화점 등이 옛 반월당의 명맥을 잇고 있다. ◆대구 관문을 넘어 중심상권으로 성장 경상감영 사백년사에 따르면 대구지역 최초의 도시계획은 1937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실행했다.당시 대구의 인구 15만 명을 기준으로 30년 후인 1965년에는 35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해 만든 계획이었다.하지만 1965년에는 대구의 인구가 80만 명에 달해 계획은 무용지물이 됐다.대구시는 1965년 ‘1차 도시계획재정비’를 발표하며 대구에 12개 교통광장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이 중 반월당 네거리를 ‘1호 광장’으로 지정했다.대구시 도시계획정책관 민병룡 팀장은 “건축법시행령에 따르면 교통광장으로 지정 시 복잡한 도로환경의 정리와 더불어 보행자들과 차량들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 설치가 용이해진다”며 “반월당 네거리를 대구 교통의 중심축으로 두고 대구의 도로들을 재개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다양한 도심과 부도심들이 공존하고 있는 비슷한 규모의 타 도시들과는 달리 대구는 유난히 상업지구가 단일 도심인 동성로에 집중돼 있다.반월당 네거리는 동성로의 입구인 동시에 대중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특히 2005년 도시철도 2호선 개통과 2011년 현대백화점 대구점 개점으로 주변상권도 다시 개편되는 등 관문을 넘어 중심상권으로 변모 중이다. ◆대구 ‘광장 민주주의’의 성지반월당 네거리는 많은 유동인구와 넓은 공간이라는 장점으로 예전부터 각종 모임 장소로 활용됐었다.특히 1960년 당시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항거한 2·28시위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2·28시위는 당시 대구지역 8개교 학생들이 부패한 정권의 불의와 부정에 항거해 자발적으로 일으킨 광복 이후 최초의 학생민주화 운동이다.특히 아시아 최초의 민주시민혁명인 4·19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최근 도시철도 반월당역의 지명을 2·28역으로 바꾸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이밖에도 1972년 유신반대시위에서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대구의 굵직한 민주화 시위들이 모두 반월당 네거리에서 열린 까닭에 대구 ‘광장 민주주의’의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현재도 대구지역의 대형 집회와 걷기행사 등이 반월당 네거리에서 열리고 있는 등 대구지역 집회·시위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통한다. ◆대구 시민의 만남의 ‘광장’ 대구 시민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는 바로 반월당이다.특히 반월당 네거리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도시철도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지점으로, 대구를 가로와 세로로 가르는 달구벌대로와 중앙로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위치상으로도 대구의 중심에 있으며 신천대로, 북대구IC 등 대구 주요도로의 진입이 용이해 다양한 교통 인프라를 갖춘 대구 교통의 최중심지다.도시철도 1호선과 2호선이 환승하는 반월당역의 출구는 무려 23개.반월당역은 전국 도시철도역 중 출구가 가장 많은 역이다.또 반월당역은 대구 도시철도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승하차 인원이 많은 역이다.두 노선을 합쳐 작년 기준으로 하루 평균 7만5천여 명의 이용객이 반월당역을 찾고 있다.이는 비수도권의 도시철도역 중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반월당 네거리는 대구 유일의 도심지이자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의 입구에 있다.2005년 도시철도 2호선 개통 이후 뛰어난 접근성으로 인해 상권의 중심지의 명성을 다시 찾았다. 반월당 네거리 지하에 조성된 메트로센터 지하상가는 7만5천900㎡(2만3천 평) 규모다.점포수는 400여 개이며 도시철도 이용객은 물론 메트로센터를 찾은 이들로 늘 북적인다.메트로센터 상가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는 넓은 공간의 광장이 있다.‘만남의 광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시민들의 대표적 약속장소다. 또 2009년 반월당 네거리~대구역을 잇는 1.05㎞ 구간이 국내 최초로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지정되기도 했다.영남대 도시공학과 윤대식 교수는 “반월당 네거리는 대구의 모든 교통이 관통하고 있는 대중교통의 중심지로 대구 도심의 얼굴이자 상징”이라며 “대중교통의 시작점으로 반월당 네거리를 중심으로 대구의 도심이 점차 재개편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대구 광장의 역사…차량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신 중

최근 광장과 광장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대구에서도 지역민들의 소통과 목소리를 표출하는 광장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대구의 광장 대부분은 차량 소통의 편의를 목적으로 조성되다 보니, 시민의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최근 시민의 소통과 휴식을 위한 공간들이 늘어나면서 광장은 차량에서 사람 중심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광장(廣場)은 도시계획시설 중 공간시설의 하나로, 시민이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자유롭게 각종 모임과 행사 등을 즐길 수 있는 만남의 공감을 뜻한다. 최근에는 이성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목소리를 통합해 표출하는 공간으로도 통한다. 대구에 ‘광장’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1960년 대다. 인구의 포화와 기반시설의 부족으로 도시의 재정비가 필요해지자, 대구시는 1965년 2월2일 ‘1차 도시계획재정비’를 발표했다. 당시 도시계획의 주요 내용은 시외 일부지역의 대구시 편입과 대구의 12개 주요 교통의 요충지에 ‘광장’을 설치한다는 것.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광장은 △교통 광장 △일반 광장 △경관 광장 △지하 광장 △건축물 부설광장으로 구분된다. 당시 계획된 광장은 혼잡한 주요도로의 교차지점에서 교통섬 설치, 도로의 입체화 등을 통해 차량과 보행자의 소통을 원활히 하는 교통 광장이었다. 교통 위주로 조성된 대구의 광장은 50여년 지난 현재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역사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2·28운동 등 대구 근대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이었던 중구 반월당네거리 일원을 비롯해 월드컵 거리응원의 명소 수성구 범어네거리, 집회·시위의 명소가 된 동대구역 광장 등 최근 대구에도 시민들의 소통을 위한 광장으로 바뀌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개인화 추세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도심 내 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영남대 도시공학과 윤대식 교수는 “그동안 대구의 광장은 차량 교통의 편의만을 위해 만들어진 탓에 시민의 생활과는 동떨어졌었다”며 “현대시대의 광장은 온라인의 목소리를 오프라인으로 표출하는 거점인 만큼, 광장은 새로운 형태의 소통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