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명지특수가공 김이진 대표이사

▲ 대구 서구 비산동 염색공단 내에 위치한 명지특수가공 회사의 김이진 대표이사는 이력이 독특하다. 회사의 간부로의 삶을 포기하고 기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2005년 당시 사양사업으로 치부됐던 섬유사업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섬유는 첨단고부가가치 사업이다. 계속 발전할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엄창현 기자 taejueum@idaegu.com
▲ 대구 서구 비산동 염색공단 내에 위치한 명지특수가공 회사의 김이진 대표이사는 이력이 독특하다. 회사의 간부로의 삶을 포기하고 기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2005년 당시 사양사업으로 치부됐던 섬유사업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섬유는 첨단고부가가치 사업이다. 계속 발전할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엄창현 기자 taejueum@idaegu.com

3ㆍ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 현지에서 필라델피아 독립 선언에 참여한 고(故) 유일한 박사. 그는 이때부터 민족을 위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25년까지 50만 달러의 돈을 번 뒤 이듬해 귀국해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당시 주식의 30%를 사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종업원 지주제와 전문 경영인 도입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어 냈다. 1965년에는 사비를 털어 여러 장학 사업과 사회 복지 사업에도 앞장섰다. 197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에게 재산을 물려 주지 않고 모든 재산을 공익 기업에 기부했다.

고 유일한 박사의 자서전을 읽고 기업가의 꿈을 꾼 청년이 있다.
한때는 직장인이었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이윤의 사회환원과 사회봉사 정신을 실천하는 참 기업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에 자신의 전공이던 섬유를 발판삼아 기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는 섬유류 가공 전문업체 (주)명지특수가공의 김이진 대표이사다.

◆기업인이 되기까지

김 대표이사(57)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화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영남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섬유회사에 취직했다. 기업가의 꿈은 가지고 있었지만 결혼과 자본부족 등의 이유로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지 못한 것. 하지만 미래를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에 공학박사 학위까지 따냈다.
더 이상 꿈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 2005년 대구 서구 이현동에 명지특수가공을 설립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이유를 묻자 “인재양성을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많은 이공계 고급 인력들이 기업은 안정적이지 못하고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 기업보다 대학에 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때문에 R&D(연구개발) 예산의 대부분이 연구기관이나 대학으로 가고 있어 그 성과가 기업으로 제대로 이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많은 학생에게 알려 그들이 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이 학생들에게 통한 탓인가. 현재 회사에는 그의 제자들이 대다수 근무하고 있다.

◆섬유산업, 그 장밋빛 희망을 믿다

장래가 촉망받는 회사의 간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기업가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섬유사업이 사양사업으로 치부됐던 2005년에 말이다.
물론 기업인이 되는 것이 오랜 꿈이었기도 했지만 섬유산업의 장밋빛 희망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섬유는 첨단고부가가치 사업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섬유관련 사업은 계속 발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섬유산업은 60년대와 7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끈 핵심기간산업이며 지역의 뿌리 깊은 연고산업이다.
90년대 후반 중국 등 후발개도국의 저가공세와 IMF로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신제품개발, 품질개선 등 끊임없이 경쟁력 강화에 몰입한 결과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역 섬유수출은 2007년부터 본격적인 증가세로 전환했으며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특수상황인 2009년을 제외하면 매년 2자리의 수출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기술보유가 살길이다

▲ 제품이 생산되는 명지특수가공 회사 설비 모습.
▲ 제품이 생산되는 명지특수가공 회사 설비 모습.

‘최고의 섬유기술을 보유하는 것’. 김 대표이사가 가장 중요시하는 경영철학이다.
그는 “기업을 이끄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회사만의 기술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도입과 자체 R&D를 통해 기술력과 브랜드를 핵심경쟁 분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초반에는 자본과 기술, 연구인력이 모두 부족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련의 시간도 많았다.
하지만 R&D 분야에 대한 투자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군납용 원단과 산자용 소재(현대자동차 시트커버)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군납용 원단은 대한방직과 함께 3년에 걸쳐 탄생시켰다.
이와함께 ‘의(義)’도 중요시 하고 있다.
그는 “신의, 대의, 정의 등 의(義)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며 “아무리 많은 경쟁상대가 있어도 의로 뭉친 경험과 기술, 좋은 인간성을 가진 직원들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로 떠나다

올 10월 그는 나이지리아 방문을 앞두고 있다. 이번이 세번째 방문이다.
올 6월에는 해군참모 총장의 초청으로, 8월에는 대통령 초청으로 나이지리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개발한 군납용 원단을 수출하기로 했기 때문.
그가 수출시장으로 아프리카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는 아직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가격을 시장이 아닌 기업이 결정할 수 있다. 소비자에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투자자에겐 좋은 시장이란 얘기다.
그는 “특히 나이지리아는 2000년 40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GDP)이 지난해 1천600달러까지 증가했다”며 “수출시장으로 최적이라는 판단 아래 막무가내로 나이지리아 비행기를 탔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군납용 원단을 나이지리아 해군본부에 선보인 결과 큰 만족도를 보였다.
우선 1년에 12만벌을 수출하기로 계약했다. 돈으로 환산하면 100억원 정도다.
그는 “점차 범위를 넓혀 해군복과 공군복 등을 제작해 수출할 계획이다”며 “나이지리아는 인구의 40%가 14세 이하인 만큼 향후 시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게다가 김 대표이사는 대학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분기별로 나이지리아에서 군복을 제작하는 근로자들에게 직접 섬유관련 강의를 펼치기로 했다.
명지특수가공은 나이지리아뿐만 아니라 미국, 이집트 등에도 폴리에스텔감량물 등을 수출하고 있다.

◆지역기업 육성에 힘써야

마지막으로 대구 경제정책에 대한 바람도 언급했다.
김 대표이사는 “지역기업을 육성하는 데 힘을 더 쏟았으면 좋겠다”며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지역의 대표적인 강소기업으로 육성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지역 기업들이 인천공항까지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여객과 물류비용 부담이 크다. 대구시에서 앞장서 남부권 신공항 건설에 역량을 집중했으면 한다”며 “놀고 있는 땅을 대기업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기업을 지역에 유치해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했다.
“고 유일한 박사처럼 회사를 최고의 기업으로 키워내 언젠가는 회사를 직원들에게 물려주고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꿈에 하늘도 동참해 주었습니다. 저에겐 기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거든요. 하하.”

이혜림 기자 lhl@idaegu.com

명지 특수가공은?

(주)명지특수가공은 2005년 설립된 섬유류 가공 전문 업체로, 지역에서는 중견기업에 속한다. 섬유가공사업부와 염색가공사업부 및 무역부, R&D사업부로 구성돼 있다. 특히 R&D사업부는 차세대 산자용 염색기술 및 의약품용 원단 염색가공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명지특수가공의 기술력은 대한방직, 도레이, 새한 등 국내 유수의 섬유 대기업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대한방직과 함께 각종 군납용 원단을 공동 개발했으며 차세대 산자용 소재 개발 및 가공 기술확보에 힘쓰고 있다. 지난 4월에는 40억원을 투자해 설비를 최신형으로 교체하는 등 설비투자에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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