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영풍열처리 권숙철 대표

▲ 영풍열처리 직원이 플로그를 이용한 최신 기계로 부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 영풍열처리 직원이 플로그를 이용한 최신 기계로 부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1988년은 서울 잠실에서 86아시안게임에 이어 88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성장의 정점에서, 올림픽은 한국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이기도 했다.
권숙철 (주)영풍열처리 대표이사는 “우리나라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은 88년도라고 할 수 있다”며 “그전까지는 (대부분이) 못살고 어려웠다”고 기억했다. 현재 지역뿌리기술 전문기업이자 연매출 170억여원에 달하는 (주)영풍열처리 역시 시작은 소소했다.
1987년 북구 노원동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자본금은 집세와 저축을 합친 450여만원. 대구지역 공단을 드나드는 차량은 지금의 1/4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많은 자본을 가지고 시작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영업도 자전거로 뛰는 시절이었다.
그는 “설립 첫해는 직원이라야 1~2명이었다. 몇 년 후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영업을 했다”며 “어려웠지만, 그런 경험이 살면서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뚝심 덕분일까. 그는 IMF 때 기업이 줄도산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기업을 키웠다. 리먼사태로 빚어진 글로벌 경제위기를 넘겼고 몇 년간 이어진 경제불황에도 살아남았다. 현재 (주)영풍열처리는 직원 수 120여명에 달하는 대구시 스타기업이다.
권 대표는 수천 배의 매출 증가를 이룬 영풍의 저력을 ‘성실과 혁신’이라고 했다.

◆맨손으로 부딪혀 지역뿌리산업 일구다.

▲ 권숙철 영풍열처리 대표는 ‘성실과 혁신’이라는 신조를 설명하며 “한 분야에서 선도회사가 되려면 먼저 성실이라는 기본을 갖추고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권숙철 영풍열처리 대표는 ‘성실과 혁신’이라는 신조를 설명하며 “한 분야에서 선도회사가 되려면 먼저 성실이라는 기본을 갖추고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처리산업은 3D업종이라는 인식이 많아요. 실제로 힘든 과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죠”
권숙철 대표는 경북 영주 출신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 첫 직장을 얻었다. 금속(열처리) 분야였다.
기술 경험을 쌓은 그는 29살에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연고는 없었지만 고향에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업을 하면서 공부도 계속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6년 반이 걸렸다.
그는 “학부 과정이 특히 힘들었다. 어려움을 어떻게 견뎠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주경야독에 중독인 것처럼 지냈다”며 “젊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맞다고 생각하면 달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지리에 어둡다는 점도 애로사항 중 하나였다. 거래처를 트고 터를 잡는 데만 7~8년이 걸렸다. 권 대표는 “열처리산업은 소위 ‘대장간’이라는 인식과 달리 장치산업에 가깝다”며 “새로운 장비를 들이고 일정 규모를 갖추고 나니 10년이 흘러 있었다”고 말했다.
자리를 잡고 나서는 매출 성적이 고민거리가 됐다. 열처리 특성상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요를 끌어올리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2003년, 그는 자동차 부품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품을 찍는 금형에서 부품 사업 자체로 영역을 넓힌 것이다. 언뜻 연관성이 없을 것 같지만, 오토미션(자동변속기)을 비롯해 차량 내 구동되는 부품은 대부분 열처리 과정을 거친다. 열처리를 한 쇠는 더 질겨지면서 쉽게 깨지지도, 찌그러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의 결단은 영풍을 결정적으로 궤도 위에 올려놨다. 부품 사업에 뛰어든 영풍은 2003년부터 SQ 인증ㆍTS 16949ㆍISO 9001-2000 인증ㆍ이노비즈 인증 등 잇달아 기술혁신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부품 사업을 하는 열처리 업체도 우리 말고도 많았다”며 “새로운 시도에 대해 누구나 우려를 한다. 우리는 그저 자동차 부품에 대해 완벽한 품질을 만들어내겠다는 각오로 임했고, 여전히 자부심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본과 혁신을 추구한다.

영풍의 특허는 현재까지 3건. 피트로 타입 냉각장치 개선, 가열실과 냉각실을 분리한 설비 배치와 함께 가장 주요한 것이 작년 획득한 고주파 가열 플러그 퀜칭 기술이다.
이는 집탄열처리와 고주파가열 플러그 퀜칭 기술이 결합된 것이다.
통상 쇠 제품을 아무런 처리 없이 가열하면 원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다. 이때 고주파 가열 플러그 퀜칭기술을 이용하면 플러그로 형상을 유지한 채 냉각시킬 수 있어 찌그러짐을 방지할 수 있고, 원하는 치수로 맞출 수 있다.
우리나라 6단 변속기에 처음 적용됐으며, 정밀성을 추구한 영풍의 특허다.
권 대표는 “중요한 것은 기본과 혁신이다. 먼저 기본을 갖추고,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그가 새로운 기술에 매진하는 이유는 ‘5년 뒤의 영풍’을 위해서다.
권 대표는 “20여년간 공장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차세대 기술이었다”며 “어떻게든 당장은 먹고살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5년 뒤, 10년 뒤에 무엇을 해야 기업이 살아남을지는 모든 경영진의 가장 큰 화두일 것”이라고 말했다.
‘혁신’이라는 신조에 걸맞게 꾸준한 R&D 연구, 특허 획득과 함께 10년 전부터 매년 회사 내에서 혁신활동도 하고 있다. 1주일에 한 차례 외부 강사를 초청해 테마에 따라 현장관리 교육방식, 회사관리 등 관리자나 직원의 자기개발을 돕고 있다는 것.
그는 이 같은 ‘자기개발’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어지고, 결국 회사 톱니에 기름칠을 하는 새로운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했다.
권 대표는 “현장감, 혁신성을 살리기 위해 월요일마다 조기 출근해 직원들과 현장에서 토론한다”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또 현장에 적용한다”고 말했다.
생산라인에 POP(Point of Production, 생산시점관리)와 바코드 기능을 적용한 시스템을 만든 것도 이러한 현장 아이디어 중 하나다. 이 시스템 덕분에 사무실에서도 생산공정을 확인하고 미리 위험 사항을 판단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처음에는 직원들이 잘 적응을 못했다. 의무적으로 밀어붙이는 통에 그만두는 직원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적응했다”며 “이 같은 혁신활동이 업계에서 우리 회사를 선도회사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다”고 말했다.

◆5년 뒤의 영풍은

그렇다면 권 대표의 5년 뒤, 10년 뒤 청사진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일차적으로는 매출 400억원대를 달성해 월드스타기업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라며 “자동차 부품 사업 외에 다른 업종을 추가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혈기 넘치던 시절에는 ‘오직 1등’을 추구했지만, 지금은 더 넓은 시각에서 회사를 알차게 성장시키는 것이 포부라고. 현재 단품조립을 중심으로 외주작업이 많지만, 훗날 해외법인을 세우고 글로벌 회사로 키우겠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그는 “자동변속기 쪽 제품이 주력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 외국에서도 수요가 항상 있다”며 “차별화를 위한 특허 출원과 기술개발에도 힘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속성을 키우기 위해 현풍 테크노폴리스 일대에 제2공장도 신축 중이다. 제2공장은 1만5천여㎡로 내년 3월께 완공되면 현재 6천600여㎡에 달하는 달서구 본사와 함께 단숨에 3배 규모로 늘게 된다.
권 대표는 “공장을 신축하면 창원ㆍ경남 쪽으로 영업망 규모도 더 키울 수 있을 것”이라며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직원 복지를 한 단계 끌어올려 질적인 성장도 함께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정혜윤 기자 hyeyoo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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