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삼여재 김태균 서예가

김태균 선생의 ‘상선약수’

영주시청 인근 대로변에 위치한 김태균 선생의 자택 2층에는 조그만한 서예연구실이 마련되어 있다.

김태균 선생의 ‘서애 선생의 춘수(春愁)’

김태균 선생은 경북의 원로서예가이자 한국현대서단 초신(草神)으로 불리는 초서의 대가다.

선생은 1934년 안동시 녹전면 세칭 듬버리에서 아버지 세희(일명 세영)공과 어머니 옥천 전씨의 3남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의성김씨 집안으로 명필이 많이 배출된 가문이다.
김태균 선생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년기부터 자연스럽게 서예공부를 했다.
그의 글 솜씨는 군계일학이라는 평을 받았다.
중년기에 이르러 시암 배길기 선생을 사사하면서 초서로 필명을 날렸고, 70대 이후에는 한 점, 한 획 흐트러짐 없는 청아한 격조를 지닌 작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김태균 선생의 아호는 삼여재(三餘齋), 석계(石溪), 석개(石芥) 등이다.
젊은 시절에는 석계를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삼여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삼여재는 시암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삼여는 책읽기에 알맞은 세 가지 넉넉한 때이다.

중국 위나라 동우는 ‘삼여지설(三餘之說)’에서 일을 할 수 없는 밤과 비가 올 때 겨울철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했다.
김태균 선생은 삼여 아호를 받은 뒤 쉬지 않고 공부하면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유년기 선생은 집안에서 가학으로 천자문을 익히고 집안 어른들의 체본에 따라 글씨 공부를 했다.
퇴계 선생과 한석봉의 글씨를 임서(臨書)하면서 주로 사서삼경을 필사했다.
십 대와 이십 대에는 옛 서예가의 글씨본인 법첩을 따라 임서하다 삼십 대부터 체계적인 서예공부를 위해 남석 이성조 선생의 소개로 시암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 서울까지 다니면서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시암 선생의 체본을 몇 장 받으면 소중히 여겨 모서리가 해어지도록 임서하면서 조금씩 글씨의 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서체는 전서부터 시작해 오창석의 글씨본인 ‘서령인사기’를, 예서는 ‘조전비’를 익혔고, 해서는 당나라 안진경의 ‘안근례비’를 자습했다.
또 행서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를, 초서는 손과정의 ‘서보’와 왕희지의 ‘십칠첩’을 연습하면서 교정을 받았다.
한글 서예는 독습(獨習)으로 익혔다.
이렇게 서울과 둥지를 튼 영주를 내왕한 지 30년 세월이 지나자 서예에 대한 심미안이 열리고 경북의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하면서 필명을 얻게 된다.

선생은 50세를 지나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초서 연구에 진력한다.
초서는 한문 서예 오체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운필하면서 작가의 임의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다.
전서로는 스승인 시암 선생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유분방하면서 자신의 감성을 담아낼 수 있는 초서를 집중적으로 연찬(硏鑽)하고자 10년 공부계획을 세웠다.
당시 2년에 손과정의 서보를 100번씩 임서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0년 동안 500번을 임서했다.

매주 1번씩 손과정의 ‘서보’를 배껴쓰다보니 서보의 어느 부분이나 어떤 글자든 외워서 쓸 정도가 됐다.
그러면서 틈틈이 왕희지의 ‘십칠첩’과 왕탁의 글씨를 참고했지만 계속 연결해서 쓰는 연면초서보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렷이 휘호하면서 가독성이 분명하고 우아한 독초(獨草)를 선호했다.

이런 서풍의 배경에는 유년기부터 안동지역에서 퇴계로부터 내려오는 유가의 단정한 경향의 글씨를 존중하고 지켜가려는 선생의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선생은 삼여의 깊은 뜻을 새기며 열정적으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초서의 새길을 열려고 노력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아

연구실에서 글을 쓸 화선지를 고르고 있는 서예가 삼여재 김태균.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 청대 유희재가 한 말이다.
그는 글씨는 그 사람의 학문, 재능, 성격, 의지 등 한 개인이 지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반영된 결정체라고 말했다.
그래서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작가의 글씨에는 학식과 인품, 그리고 예술정신과 조형미까지 총체적인 모든 면이 반영돼 있다.
특히 서예는 예술과 인격의 일치를 중시하는 전통이 남아있다.

김태균 선생은 38세인 1973년 부인 이민자 여사를 만나 예술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어 상호 간에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민자 여사는 홍익대 동양화학과를 졸업한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동양화가로서 부군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조언하면서 내조한다.
슬하에 아들 넷을 두고 있으며 장남은 영주 선영여고 교장으로, 둘째는 봉화군 공무원으로, 셋째는 동양대학교에서 재직하고, 넷째는 건축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태균 선생은 지역 후학들에게도 사표가 되고 있다.
1972년부터 안동서도회를 지도하고 있으며 1976년부터 영주서도회에서 강의를 시작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1986년에는 제자들이 교남서단을 창설해 경북서예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90년대는 계명대와 안동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교남서단에서는 2013년 스승을 기리고자 서집을 발간했다.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 가운데 교수나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평소 학예일치를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스승에 대한 경외감이 실종된 요즘에 타계한 시암 선생의 비문을 건립하는데 앞장서서 실천한 일은 서예계에 귀감이 되고 있다.
김태균 선생 스스로 작고한 스승의 비문에 전액(전서로 비문의 표제를 쓴 글)을 직접 쓰고 1년 동안 정성을 다해 수많은 글자들을 손에 정을 들고 새겨 비문을 완성해 묘지에 세움으로써 후학들의 사표가 되었다.
그는 말없이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서여기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한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북 서예의 깊은 뿌리가 되다

절제된 삶, 무욕의 삶을 살고 있는 서예가 삼여재 김태균. 선생은 1934년 안동 출생으로 30세때 시암 배길기 선생께 사사받았으며 전, 예, 해, 행, 초 등 다섯 가지 서체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예서와 초서의 대가이다.
전통적 서법을 구사하는 법고를 중요시하는 작가다.
70년대 초반 안동서도회와 영주서도회를 창립해 현재까지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이 있다.
서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녹아있고 작가의 철학이 담겨있는 글씨여야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유행을 따른 획일화된 작품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한 작품으로는 정체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김태균 선생의 작품에 내재된 정체성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초서 작품은 전서의 필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줍은 시골처녀같이 순박하고 질박하면서 꾸밈이 적어 보인다.
도자기로 말하면 조선의 백자와 같아 보인다.
꾸밈이 극에 달하면 꾸밈에서 본질을 잃게 된다.
본질을 중시하면서 꾸밈이 적으면 심심해 보이지만 화려함으로 실질을 매몰시키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꾸밈없는 은근함 속에 변화가 있다.
당나라 손과정이 ‘서보’에서 말한대로 초서는 유려하면서 통창(通暢)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듯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곱고, 부드러움으로 온화함을 더하고, 조용하고 우아한 정취에 의해 그윽한 안정감이 부여된다.
언뜻 보면 김태균 선생의 작품은 무미건조한 듯이 보이지만 수식없는 본질적인 멋으로 표현된다.

작품 소재는 유가 경전과 우리나라 선대 명인들의 시문을 주로 이용하지만 퇴계 선생의 문집에서 경계로 삼을 만한 시문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 내용은 사람의 마음을 수양하고 성정을 다스릴 수 있는 주옥같은 문장들이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정체성을 지닌 초서 작품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지난 50년 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초서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그는 경북 서예의 든든한 뿌리가 되고 후학들이 자신을 통해 가지를 치고 열매를 거두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젊은 서학도들에게 “바탕은 튼튼히 하고 창작을 서두르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억지로 변화를 주려고 하지 말고 적공의 세월을 보낸 뒤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태균 선생은 전통 유가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에 유가적인 습속이 몸에 배어 있다.
그의 작품도 수식을 배제한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치 겉으로는 화려한 형용사와 부사가 없는 동사로 지어진 문장처럼 무덤덤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함축의 미와 절대적인 서예 본질의 아름다움이 담긴 자신만의 세계가 함축돼 있다.

서예는 무엇이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선생은 “서예는 내 인생에 있어 일상적인 삶”이라고 대답했다.
오랫동안 그 일상적인 삶을 여러 사람들이 보았으면 한다.






정태수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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