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1934년 안동시 녹전면 세칭 듬버리에서 아버지 세희(일명 세영)공과 어머니 옥천 전씨의 3남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의성김씨 집안으로 명필이 많이 배출된 가문이다. 김태균 선생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년기부터 자연스럽게 서예공부를 했다. 그의 글 솜씨는 군계일학이라는 평을 받았다. 중년기에 이르러 시암 배길기 선생을 사사하면서 초서로 필명을 날렸고, 70대 이후에는 한 점, 한 획 흐트러짐 없는 청아한 격조를 지닌 작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김태균 선생의 아호는 삼여재(三餘齋), 석계(石溪), 석개(石芥) 등이다. 젊은 시절에는 석계를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삼여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삼여재는 시암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삼여는 책읽기에 알맞은 세 가지 넉넉한 때이다.
중국 위나라 동우는 ‘삼여지설(三餘之說)’에서 일을 할 수 없는 밤과 비가 올 때 겨울철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했다. 김태균 선생은 삼여 아호를 받은 뒤 쉬지 않고 공부하면서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유년기 선생은 집안에서 가학으로 천자문을 익히고 집안 어른들의 체본에 따라 글씨 공부를 했다. 퇴계 선생과 한석봉의 글씨를 임서(臨書)하면서 주로 사서삼경을 필사했다. 십 대와 이십 대에는 옛 서예가의 글씨본인 법첩을 따라 임서하다 삼십 대부터 체계적인 서예공부를 위해 남석 이성조 선생의 소개로 시암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 서울까지 다니면서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시암 선생의 체본을 몇 장 받으면 소중히 여겨 모서리가 해어지도록 임서하면서 조금씩 글씨의 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서체는 전서부터 시작해 오창석의 글씨본인 ‘서령인사기’를, 예서는 ‘조전비’를 익혔고, 해서는 당나라 안진경의 ‘안근례비’를 자습했다. 또 행서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를, 초서는 손과정의 ‘서보’와 왕희지의 ‘십칠첩’을 연습하면서 교정을 받았다. 한글 서예는 독습(獨習)으로 익혔다. 이렇게 서울과 둥지를 튼 영주를 내왕한 지 30년 세월이 지나자 서예에 대한 심미안이 열리고 경북의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하면서 필명을 얻게 된다.
선생은 50세를 지나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초서 연구에 진력한다. 초서는 한문 서예 오체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운필하면서 작가의 임의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다. 전서로는 스승인 시암 선생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유분방하면서 자신의 감성을 담아낼 수 있는 초서를 집중적으로 연찬(硏鑽)하고자 10년 공부계획을 세웠다. 당시 2년에 손과정의 서보를 100번씩 임서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0년 동안 500번을 임서했다.
매주 1번씩 손과정의 ‘서보’를 배껴쓰다보니 서보의 어느 부분이나 어떤 글자든 외워서 쓸 정도가 됐다. 그러면서 틈틈이 왕희지의 ‘십칠첩’과 왕탁의 글씨를 참고했지만 계속 연결해서 쓰는 연면초서보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렷이 휘호하면서 가독성이 분명하고 우아한 독초(獨草)를 선호했다.
이런 서풍의 배경에는 유년기부터 안동지역에서 퇴계로부터 내려오는 유가의 단정한 경향의 글씨를 존중하고 지켜가려는 선생의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선생은 삼여의 깊은 뜻을 새기며 열정적으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초서의 새길을 열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