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천 도평마을 의마총(義馬塚)

병자호란이 수습된 후 나라에서는 이언의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은 장군의 묘소 아래 영모재라는 재실을 세워 입향조인 진사 이근동과 아들인 충장공 이언의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을씨년스럽던 1637년 정월. 겨울이 저만큼 물러섰다.
앞산의 잔설을 헤집고 노란 복수초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새벽의 어둠은 무겁게 골목길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뒤척이다 잠을 깬 배씨 부인은 여닫이를 열고 마당가를 내다보았다.
땅거미가 채 걷히지 않은 하늘에는 빛을 잃은 희미한 별들이 자신의 마음처럼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누구인지 자신의 집 낮은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놀랄 만큼 큰소리에 배씨 부인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도 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누가 찾아왔남?”
대문 두들기는 소리는 더 다급한 듯했다.
그런데 인기척 대신에 애절하게 울부짖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하이힝~ 하이힝.”
심상치 않은 예감이 부인의 머릿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배씨 부인은 옷매무새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황급히 대문을 열고 나갔다.

문간에 버티고 있는 것은 전쟁터로 나간 바깥주인의 애마 오추가 땀을 빗물처럼 뚝뚝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추의 목덜미를 부둥켜안고는 마치 살아 돌아온 남편을 만난 듯이 쓰다듬으며 가슴 속의 말을 내뱉었다.

“오추야, 너가 웬 일이냐. 주인은 어딜 두고 너 혼자 이 새벽에 이렇게 달려왔느냐?”
“….”
동물에 불과한 말이 어찌 대답을 하랴.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에 창상을 입은 오추는 더 이상 서 있지를 못하고 배씨 부인 앞에서 풀썩 쓰러지듯 주저앉고 만다.
쓰러진 말 안장 위에는 피묻은 투구와 갑옷이 실려 있었다.
전사한 이언의의 유품들이었다.
남편을 대신한 의관 앞에서 배씨 부인은 다시 한 번 오열을 멈추지 못한다.

오추는 배씨의 남편 이언의가 아끼던 애마이다.
집안 사람은 그 누구도 오추를 모를리 없으리 만치 한가족이 되어 있던 말이다.
자신의 소임을 마친 듯 오추는 배씨 부인의 지극정성에도 아랑곳없이 그로부터 3일 뒤 그만 죽어버리고 만다.


◆명마 오추의 눈물

김천시 감천면 도평마을의 이언의(1600-1637)는 문무를 겸전한 선비였다.

청년기부터 그는 서재 한 켠에 공맹의 경서를, 또 다른 한켠에는 무경칠서를 두고 읽었다.

언의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간청한다.

“아버지, 군자는 모름지기 문약한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자는 경서와 병서를 아울러 읽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소자 스스로 마상술을 연마하고자 합니다.
청하옵건대 비루한 말이라도 좋으니 한 필을 구하여 주소서.”
언의의 아버지 이낭동은 아들의 간곡하고도 비장한 청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좋은 말은 구하지 못하고 비록 야위었지만 가슴팍이며 발굽이 튼실한 말 한 필을 구해 아들에게 주었다.

“언의야, 그리 변변치 못한 말이다만 네가 잘 길들여 보려무나.”
“아버지, 백락(伯樂)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보통의 말을 날래고 충성스러운 명마로 길러내면 그 또한 백락이 아니겠어요.”
“그래, 네 생각이 옳다.
기특하구나.”
언의는 털색이 유별나게 검은 말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이제 너를 오추라 부르리라. 오추….” 고대 중국의 초패왕 항우가 아끼던 추마, 흰 반점이 있는 흑마로 천하를 누비던 항우를 위하여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전설 같은 말을 떠올리면서.
이언의는 경서를 읽다 여유로움이 생기면 말을 타고 달렸다.
감천을 따라 넓은 도평 들길을 한없이 달렸다.
장검을 들고 마상 도립을 하는가 하면 말 등에 누워 죽은 듯이 달리는 횡와양사의 기예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적탄에 맞아 죽은 듯이 상대를 속이면서 적진을 돌파하기 좋은 마상무예이다.
한번 말을 달리면 파란 하늘이 붉은 노을에 가릴 때까지 달렸다.
오추와 함께 호연의 기운을 날로 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청나라가 국경을 넘어 침략해온다는 소식과 함께 민심이 흉흉하게 들끓더니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초야에 묻혀 글만 읽고 있으랴. 내가 만약 지난날, 왜란기에 태어나 있었다면 그냥 있지 않았을 터. 이제 청장년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나라 위한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치리라.”
결기를 굳힌 이언의는 사재를 털어 내놓고 인근 동리의 지인과 친인척 등 많은 의병을 모아 청군에 대적하고자 마을을 나선다.
그리고 1년 후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경상도 일대의 의병과 관군으로 편성된 근왕병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진격한다.
그러다 1637년 정월 초,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청군 기병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의병장 이언의는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파죽지세로 우리 군을 짓밟던 청군은 주검마저 모두 불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이언의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 주인을 잃은 오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주검 옆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이언의의 피묻은 투구와 갑옷 등 의관을 수습하고 오추의 등에 싣고는 빈 등자를 밀어찼다.
영민한 오추가 그 뜻을 모를 리 없었으니 밤낮으로 달리고 또 달려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다다른 것이다.


◆집 뒤 종산에 묻힌 애마

소용골은 마을입구가 좁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며 두 갈래의 골짜기로 나뉜다.
말무덤인 의마총을 지나 재실 영모재를 돌아 들어 오솔길을 오르면 이언의 장군의 묘역이 나온다.

말무덤 의마총 옆에 세워진 의마비.


도평마을 소용골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윽고 슬픈 마음을 추스르던 배씨 부인은 문중 어른들에게 간곡히 청한다.

“문장 어른께서는 저의 뜻대로 장례를 치러주세요. 전사한 남편의 시신 대신에 전장에서 돌아온 의관을 정성껏 묻어 주고, 그 곁에 애마 오추의 무덤도 마련해 주세요.”
문중에서는 이언의의 묘역은 도평마을 소용골의 서북쪽 숫돌봉으로 정하고 미망인의 뜻에 따라 오추가 싣고 온 이언의의 의관을 묻고(衣冠葬) 분봉하였다.
그리고 오추는 그 맞은편이자 마을 뒷산 아랫자락에 묻어 무덤을 만들고 앞에도 ‘의마총’이라 비를 세웠다.
말 무덤이지만 여느 일반 사람의 묘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호란의 공신으로 책봉된 충장공 이언의의 애마 무덤이 곧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의마총과 의마비(義馬碑)다.
이번 추석에도 의마총은 여전히 말끔하게 벌초가 되었고 의마비도 깨끗이 닦은 듯 반짝거렸다.
성주 이씨 문중의 한결같은 손길이 미치고 있는 까닭이다.

소용골에 사는 문중의 유사 이점상씨의 의마총에 대한 애정은 특별하다.

“우리들은 의마총을 성심껏 살핍니다.
충장공 선조묘소와 꼭 같이 의마총을 관리하고 있지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내력이니까요.”
김천문화원과 충장공 후손들인 성주 이씨 문중에서는 의마총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면서 “의성 구촌과 경남 진양 그리고 영천 등지 몇 곳에 말 무덤이 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가시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을 의마총만큼 묘지봉이 뚜렷하고 숨은 이야기가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300년이 넘도록 관리해 온 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며 자신 있게 덧붙인다.

말무덤은 말문화의 중요한 민속 원형자원의 하나이다.
우리 주변에 현존하는 말 무덤은 비록 그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모두 하나의 민속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대로부터 농경시대에 이르기까지 말은 인간 삶의 한 축선을 지키고 있었다.

비천의 신마(천마)로서 권위와 전승자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생활 운송의 수단으로 실생활에 다양하게 사용해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말 무덤은 매우 드물다.
구전되는 것으로 그칠 뿐 그 형태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런 현실에 비하면 감천 도평리 의마총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그 총(塚)이 지닌 충성스러운 이야기도 이 시대의 귀감이 되고 외형의 규모와 선명함도 인간의 그것 이상으로 돋보인다.

의마총 앞에 앉아있으면 그 옛날, 오추와 주인 이언의의 교감이 오롯이 전해지며 신비로운 기운에 휩싸이게 된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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