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기업가로 교육입국 꿈꾼 이동녕

▲ 198 2년 부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가족과 함께 한 이동녕 부부.
▲ 198 2년 부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가족과 함께 한 이동녕 부부.

이 같은 호황에 힘입어 1953년 그가 동창실업의 사장에 취임하면서 봉명광업은 흑연 채굴량 월 2천t을 반은 내수용으로 반은 수출할 만큼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1956년에는 동창실업이 수출실적 20만 달러 이상의 실적을 가진 19개 업체에 랭킹 됨으로써 재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무역업체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창행사에서 수상했고 무역협회의 이사로 피선됐다. 이같이 사업이 순조롭게 번창해가자 그는 젊었을 때의 꿈인 육영사업에 관심을 갖고 1955년 사단법인 문경여자학원을 설립, 문경여중과 문경여고를 차례로 개교함으로써 자신이 이룩한 재산과 부를 고향주민을 위해 돌려주기 시작했다. 이 무렵 대전에서 대흥양조주식회사와 부국연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민간연구기관으로 국내 최초인 광일생산기술연구소를 창설했고 삼신해운주식회사와 한국규조토공업주식회사도 설립했다. 특히 봉명광업은 종업원 복지를 위해 단일사업장으로는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것이 당시 업계의 귀감이 됐다. 사업에만 전념하던 서봉은 문경지역의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 윤만석이 탈당함으로써 뜻밖에 이정림씨의 추천으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이 지역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정치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던 차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국회의원직을 사임했지만 5ㆍ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권유로 6, 7대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재개하게 된다.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 졸업후 첫 발령지가 문경보통학교였고 서봉이 그 학교의 학부모로서 오랜 인연을 맺었던 터라 거절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8대 총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출마를 종용했으나 그는 무투표 당선됐던 지역구를 기어코 후진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정부의 축산장려책에 따라 경주 보문지구에 삼주개발을 설립하고 목축과 유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게 됐고 이와 함께 관광레저를 겸한 주식회사 도투락을 설립했다. 서울역 앞에는 20층 규모로 삼주개발의 오피스 건물을 지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건물이었다. 광산과 함께 봉명의 2대 사업인 ‘충북시멘트’를 인수해 확장시키면서 아세아시멘트로 사명을 바꿨다. 이 같이 서봉은 나라의 경제성장에 맞춰 사업확장을 하는 한편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1968년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합쳐 영남대학을 건립해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9년에는 성균관대학을 인수해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고향 문경에서는 문경여중고뿐만 아니라 인문계고인 문창고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았다.
88세에 작고한 서봉은 슬하에 4남2녀를 두었고 아들들에게 사업체를 나눠 경영하게 했다. 묘소는 점촌 문창고교 뒷산에 있다.

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연보

1905년 문경군 문경읍 팔영리에서 출생
1914년 문경공립보통학교입학
1922년 문경군청근무
1935년 경북도청 회계과로 전근
1940년 경북도산림과 지방주사 사임
1942년 봉명흑연광업소 총무부장
1947년 봉명흑연광업소 관리인
1950년 동창실업주식회사 설립
1955년 재단법인 문경여자학원 설립
1957년 봉명광업소 불하 매입
1958년 제4대 민의원 당선(문경)
1960년 민의원 사임, 동창연료주식회사 설립
1963년 제6대 국회의원당선(문경), 광일생산기술연구소 설립
1967년 제7대국회의원 당선(문경), 삼주개발주식회사 설립
1968년 학교법인 영남학원 초대이사장 취임, 충북시멘트 인수
1969년 삼주빌딩 기공(1970년 완공), 문창종합고등학교 설립인가
1972년 정계은퇴
1974년 주식회사 도투락 설립
1976년 대영전기, 대영주공 인수
1979년 성균관대학재단 이사장 취임
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83년 대한판지주식회사 인수
1992년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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