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상주 의병대장 노병대

▲ 1908년 8월 17일 대전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의병장 노병대 체포에 관한 문서.
▲ 1908년 8월 17일 대전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의병장 노병대 체포에 관한 문서.

“노병대(1856~1913)선생의 항일행적에는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쪽 눈을 빼어버리는 혹독한 고문에도 초지를 꺾지 않고 항거했다는 점이고, 셋째는 항일의 표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입니다.”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 열사’를 편찬한 상주문화원장 김철수 박사의 설명이었다.
노병대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것도 다 노병대 선생 같은 분이 나라를 지켜준 덕분이라며 상주가 낳은 인물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김 박사는 “선생이 남긴 글이나 문서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소실돼 선생의 생애를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노병대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 선생의 아우, 후재 노극신 선생의 13대 주손으로 1856년 12월4일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재조(才操)와 기국(基局)이 범인과 달라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며 성장했다.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의 행적은 존성상현(尊聖尙賢)하려는 유학자로서의 자세와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대장으로서의 활동으로 요약된다.
1895년 선생은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고 1898년 정월 허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진사 허운과 함께 도움을 청하러 중국 곡부를 찾아간다.
사람을 시켜 성묘(聖廟)일을 고했으나 공자의 72세 손 연성공은 병을 핑계 삼아 나타나지 않는다. “부자(夫子)의 가학(家學)이 어찌 이토록 오만하기에 이르렀는가?” 선생은 편지로써 연성공의 무례함을 꾸짖는다.
선생의 기개에 놀란 연성공은 사과를 하고 옛 친구처럼 맞아 수 십 편의 시(詩)를 주고받으며 교유한다. 연성공의 편지를 받아 조정과 태학(太學)에 전했지만 향교 향사의 회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림의 법도를 지키려는 선생의 발걸음은 멈춤이 없었다.
호남지방에는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을 정도로 당시 향교 부근에는 범장(犯葬)된 묘가 많았다. 선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해 모두 옮겨가도록 한다. 이렇듯 선생은 유학자로서 반듯한 자세와 숭고한 정신은 철저한 것이었다.
나라 안의 일을 나라 밖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는 자세나 향교에 대한 배타적 존중에 대한 옮고 그름에 대해 살피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학자로서 선생은 주자주의에 눌러앉은 공리공론의 관념론자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고종으로부터 밀조 받아

▲ 노병대선생과 500여 명의 의병들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던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전투를 벌인 후 의병들은 상주로 철수했다.
▲ 노병대선생과 500여 명의 의병들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던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전투를 벌인 후 의병들은 상주로 철수했다.

선생의 의병활동 일지의 대강은 이렇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참정대신 민영환은 자결하고, 지사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황성신문에 발표한다.
조야는 물끓듯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노도처럼 일어난다. 선생은 북향통곡하고 상경해 전 판서 이용원을 만난다.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를 하겠다”고 간청한 끝에 선생은 고종 임금으로부터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비서원 비서승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를 받는다.
1907년 8월20일 해산된 진위대 2백여 명을 규합, 속리산 계곡에서 창의한다. 해산병 수백 명이 추가로 합세해 의병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른다. 선생의 의병대는 충북 보은에서 적 2명을 사로잡고, 청주 미원에서는 5명의 적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린다.
적의 공격을 피해 상주 청계사로 진을 옮겼으나 적병의 급습을 받아 진영을 미원으로 옮긴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경북 성주, 경남 안의, 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투쟁을 하다가 거창의 우두령에서 크게 패한다. 속리산으로 귀환했을 때 남은 의병은 겨우 50여 명이었다.
1908년 7월13일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하던 중 보은군 관기면에서 왜군 수비대에게 체포된다. 왜군의 문초에도 선생은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는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희들의 종자를 없애고자 창의하였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의병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서 온갖 고문을 다했으나 자백하지 않자 왜군은 왼쪽 눈을 뽑는 만행을 저지른다.
1908년 9월1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기소돼 10년의 유형을 선고 받는다. 재판부는 선생에게 “이런 형벌은 너희 임금이 시행하는 것이니 우리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하자 선생은 대노하여 “우리 임금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으랴?”하고 꾸짖는다. 분을 참지 못한 왜적들은 선생을 형무소로 보내는 한편, 종자(從者)들을 시켜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에 있는 공의 야로당(野老堂) 종택을 불태워 버린다. 길거리로 내몰린 가족들은 호구지책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의 출옥은 기약도 없고, 집도 가재도 모두 잃은 부인 김씨는 사랑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1905년부터 8년간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답 300두락과 산 8필지 약 250정보 등 많은 재산을 모두 소진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특사로 강제 출옥 된다. “너희들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 “나는 내 나라를 구하려다 도적떼와 같은 너희에게 체포되어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옥중에서 죽어 금수만도 못한 네놈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며 끝까지 저항한다.
출옥 후 선생은 의병활동을 위해 군자금 모집을 시작한다. 1912년 11월 18일,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류참봉가에 군자금 협조를 부탁하고 왜병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총기를 휴대시켜 잠입시킨다. 총기 휴대 사실이 누설되어 1913년 3월12일 강도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돼 1913년 6월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는다.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한다. 1913년 6월6일 피를 토하며 감옥에서 순국한다. 선생의 나이 58세, 단식 28일만의 일이었다. 왜군들은 “강도 노병직(그의 옛 이름)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라고 발표한다. 정부에서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노병대 의병대장 알지 못해 안타까워

▲ 현재 포도밭으로 변한 생가터.
▲ 현재 포도밭으로 변한 생가터.

해질 무렵 화동면 이소1길 선생의 추모각 앞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후손 노진영(68)씨를 만났다.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는 뜻으로 추모각 대문에 늘 태극기를 걸어둔다고 했다. 1년에 한 차례씩 거행하는 추모행사 때 교통정리를 해주는 지구대 경찰들마저도 할아버지가 무엇을 한 분인지 모른다며 섭섭해 했다. 선생의 의로움을 돌에 새긴 순국비의 끝부분은 이렇다.
“빛나는 노공이시여!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었도다. 다만 나라가 있음만 알고 내 몸은 생각하지 아니하였구나. 해를 꿰뚫는 곧은 충의는 문폐(文陛)와 같은 차례이다. 비석에 크게 새겨서 이로써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노라.”(장병규, 열사 금포 광선노공, 순국비명 부분)
‘다만 내 몸이 있음만 알고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못난 후손들을 채찍질하는 아픈 훈계이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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