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안동 차전놀이

현존하는 차전놀이 장면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 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 차전놀이 장면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 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

현존하는 차전놀이 장면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 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

안동 차전놀이의 가장 중요한 준비는 좋은 참나무를 구하여 동채를 제작하는 일이다.<br>

안동 차전놀이의 가장 중요한 준비는 좋은 참나무를 구하여 동채를 제작하는 일이다.


당당하고 씩씩하며 호탕한 민속놀이가 경상북도 안동에 있다.

용감하게 상대편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고 지혜롭게 대결한다.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싸워야 하며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화랑의 고장에서 그 상무정신을 계승했으므로 당당한 모습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 ‘안동 차전놀이’이다.

최근에 끝난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벌 행사장에 위치한 안동차전놀이 보존회 사무실을 찾았다.
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이재춘 차전놀이보존회 회장은 “지난 2일 국제탈춤 행사기간 중 탈춤공원 놀이마당에서 정기발표를 한 것이 가장 최근의 공연이었다”고 했다.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차전놀이 전수관이 협소하여 내년에는 2층으로 증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수백 명이 운집하는 민속놀이이므로 상설공연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영상을 통해 방문자들이 언제나 차전놀이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현재 전수관 내부에는 차전놀이 공연에 사용되었던 거대한 동채들이 공간을 메우며 전시되어 있다.
벽면에는 그동안 발표했던 중요한 공연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사진들이 가득 걸려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들도 눈에 띈다.
1922년 안동에서 행해졌던 차전놀이의 모습이 담긴 귀한 사진이다.
현존하는 차전놀이의 장면을 촬영한 사진 중에 가장 오랜 것이다.
안동 차전놀이의 역사도 길고 그동안 엄청난 공연실적을 남겼다.
이제 그 기록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아카이브 부분에도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민속놀이

안동 차전놀이가 생긴 기원을 보면 향토사기 영가지, 대동운부군옥 등 몇 가지 차전놀이에 관련된 기록이 있다.

1천여 년 전 후삼국시대 고려 왕건과 백제 견훤이 안동에서 전투를 치른 후부터 시작된 놀이로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이 되어 안동 땅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결전을 하게 되었다.

이때 권(權)ㆍ김(金)ㆍ장(張)씨의 세 장군이 있어 왕건 편을 들었고, 안동사람들은 견훤이 지렁이임에 착안하였다.
낙동강에 소금을 풀어 짜게 만든 다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어깨로 밀어 견훤을 낙동강에 빠지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자기를 도와준 세 장군을 삼태사(三太師)라 부르며 그 충성을 치하하였다.
그 뒤 이 승전을 기념하여 동채싸움 즉 차전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1608년 14대 선조는 이 놀이의 정신을 가상히 여겨 계속되기를 염원하여 노력해 왔다.
임만휘(1783~1834)가 지은 만문유고(晩聞遺稿)에 실린 ‘차전(車戰)’이라는 시는 18세기 임하면 금소리에서 전승된 차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솟구쳐 오를 때엔 새매가 나르는 듯/ 한바탕 버마재비짓에 바람이 뒤따르고/ 겹겹의 사람 숲엔 달빛이 비추이네/ 서북편이 이겼는가 개선소리 놀랍구나/ 골골의 장정들이 춤추며 돌아가네//
시의 내용을 보면 차전놀이가 전개되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1922년 안동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관심 속에 동ㆍ서로 관공서를 양분하여 지금의 안동역 터에서 놀이를 했었다.
싸움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마침내 투석전으로까지 번져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이유로 동채싸움을 금지시켰다.

그 후 지역민들의 수차에 걸친 요구에도 불구하고 금지했던 일제는 1936년 3월 경북선 철도 개통에 즈음하여 한편의 참여 인원을 50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동채싸움을 허가했다.
인원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참여한 이 차전놀이는 동채가 등장하기도 전에 앞머리 꾼들의 싸움이 벌어져서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막을 내렸다.
이후 북후면, 임하면 등에서 가끔씩 열렸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승이 단절되었다.

단절되어 있던 민속놀이를 1960년대 재현한 고 김영한 초대 예능보유자가 원로들과 함께 찍은 당시의 사진.

단절되어 있던 민속놀이를 1960년대 재현한 고 김영한 초대 예능보유자가 원로들과 함께 찍은 당시의 사진.


1966년이 되어 안동중학교 학생 300여 명이 고 김명한(안동차전놀이 초대 예능보유자)의 주선으로 재현하게 되었다.
그 해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1968년 대전에서 개최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다시 출전하여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이재춘 차전놀이보존회 회장이 거대한 동채의 머릿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br>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이재춘 차전놀이보존회 회장이 거대한 동채의 머릿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1969년 1월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는 이재춘씨가 지명됐다.
지금은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존회가 설립돼 보존과 계승을 하고 있다.

서울시민의 날에 570명이 참가하여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선보인 시연.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br>

서울시민의 날에 570명이 참가하여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선보인 시연.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 후 1970년부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비롯 각 학교,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 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각종 행사에 시연되거나 발표되고 있다.
지난 2002년 서울시민의 날에는 570명이 참가하여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연, 서울 시민들의 환호성을 받기도 했다.
수많은 해외공연 중에 2000년 5월31일 독일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인 ‘하노버 EXPO2000’에 아시아 대표로 초청됐다.
이 행사에는 지역민 3백여 명이 직접 참가해 시연했다.

2003년 하와이 공연을 비롯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되는 ‘제15회 한인문화의 날’ 행사에 초청돼 해외공연을 했다.
지난 4월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도 초청됐는데 현지교민 300명이 동채를 어깨에 메고 출연했다.
이제는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민속놀이가 됐다.

안동 차전놀이는 원래 놀이 도구가 큰 지게 꼴로 생겼으므로 ‘동채싸움’, ‘동태싸움’이라고 불러왔다.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도 동채형 놀이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안동의 동채놀이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전쟁과 승리에 연관된 민속놀이로는 안동차전놀이가 유일한 상무정신이 깃든 놀이로 인정되고 있다.
힘으로 대결하여 승리를 차지하는 놀이로 끌어오면 이기는 줄다리기와는 정반대이다.

차전놀이는 상대편을 밀어내고 동채를 찢거나 땅에 떨어뜨리면 이기는 놀이다.
한 팀에 수백 명씩 힘을 합세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협동 단결심이 강한 놀이다.
특히 안동차전놀이는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진 민족혼이 담긴 국보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당당하고 호탕한 놀이

안동 차전놀이의 준비과정 중 하나.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 거행 여부를 의논하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한다.<br>

안동 차전놀이의 준비과정 중 하나.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 거행 여부를 의논하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한다.

추수가 끝나면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서 차전놀이의 거행 여부를 의논하는 차전놀이의 준비과정이 시작된다.
먼저 도감과 대장을 뽑는데, 이들은 대개 차전놀이의 경험이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추대된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참나무를 구하여 동채를 제작하는 일이다.

적당한 나무가 발견되면 곧 금색을 치고 신성을 표시하여 부정과 잡귀를 막고 그 고을 현감에게 보고하여 보호를 요청한다.
제작된 동채 행렬이 안동으로 진입하면 연도의 촌락마다 많은 사람들이 맞이한다.
근교에 이르면 원로과 주민들이 도포차림으로 영접에 나간다.

놀이장소는 정월대보름 무렵이어서 농작물이 없기 때문에 넓은 보리밭이나 낙동강변 백사장에서 거행된다.
수백 명씩 편을 짜게 되고 응원하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수천 명이 모이게 되므로 이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싸움에 참가하는 인원은 정해진 것이 없다.

편가르기는 안동을 동서로 갈라 편성하는데, 거주지 위주가 아니라 태어난 곳 위주로 하기도 한다.
양편의 동채가 놀이판으로 들어오면 싸움을 시작한다.
먼저 머리꾼들의 밀어내기가 격렬하게 전개된다.
양편은 오랜 시간 동안 수백m씩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친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 왼손으로 끈을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한다.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약속된 수신호를 이용해 지휘한다.
오른손을 앞으로 저어 내밀면 전진의 신호이고, 오른손을 뒤로하면 후퇴의 신호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이다.
수백 명이 동시에 회전하는 장관이 펼쳐지고 동채가 하늘로 치솟는 이 모습이 안동 차전놀이의 특징이다.
접전 끝에 한쪽의 동채가 땅에 떨어지면 승부가 결정된다.

패한 측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원통해하고 승자는 함성과 함께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이 까맣도록 던져 올리며 승리를 자축한다.
뜯어낸 동채의 부품은 나누어 메고 ‘월사 덜사’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밤늦도록 거리 곳곳을 누빈다.

이처럼 안동의 차전놀이는 당당하고 호탕한 놀이이다.
용감하게 상대편을 파헤치고 들어가 대결하는 동시에,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싸워야 하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
동채를 메다가 어깨살이 벗겨지기도 하고, 상대편과 부딪치며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래도 모두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안동지역이 떠들썩하도록 이런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통문화의 저변에는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뚝심 있게 한 길을 걷는 사람들,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안동 차전놀이 보존회에는 예능보유자 외에도 두 명의 전수조교를 비롯, 많은 이수자와 전수생들이 지금도 자신의 생애를 바쳐 노력하고 있다.
상무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이즈음 이들의 정성은 더욱 귀하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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