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모습으로 성리학 세계관 품어…김계행 선생의 고고한 선비정신 생각나네

발행일 2018-11-20 19:52:3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5> 안동 묵계서원·만휴정

안동시 길안면에 있는 묵계서원.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서 정면에 보이는 읍청루는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을 지닌 2층 누각이다.


 


 
구불구불 휘어진 아름드리 노송들이 서있는 사이로 사당인 청덕사가 보인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용어가 있다.

2006년 특허청에 등록된 브랜드이다.

21세기 안동만이 갖고 있는 정신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그 단어 속에는 선비정신을 계승 발전한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안동이 많은 서원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등록을 위한 하나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위대한 선비가 있으면 후학들은 그 정신을 이어받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한다.

전통한옥의 형태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선비들의 드높은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서원이다.

안동 묵계서원은 길안면 묵계리에 있다.

가는 길은 안동에서 영천 방향 국도로 가다가 길안면사무소 네거리를 지나 5㎞가량 지나면 닿을 수 있는 강변 드라이브 코스이다.

대구에서는 얼마 전 개통된 영덕~당진 고속도로 동안동IC에서 내리면 지척이다.

그곳은 원래 거묵역 또는 거무역이라 하다가 1500년(연산군 6년)에 보백당 김계행이 머물게 되면서 묵촌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그가 부근에 정자를 짓고 냇물이 잔잔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묵계로 바꾸었다고 한다.

영남 사림의 발의로 1687년(숙종13)에 세워진 묵계서원은 김계행 선생과 세종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응계 옥고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광풍에 훼철되었다.

그 후 1925년 일부가 복원된 후, 1998년 완전복원 되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1980년)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묵계서원은 길안천이 앞으로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 임수형의 농촌 마을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이 멋진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숲길을 잠시 오르면 단정한 서원건물이 나타난다.

평생을 대쪽 같은 삶을 살았던 청백리의 표상인 선비의 기상이 느껴진다.

정문인 진덕문을 지나면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을 지닌 2층 누각 읍청루가 길게 가로로 서있다.

선비들이 시문을 짓고 담소를 나누었던 누각이다.

◆지조 지킨 고고한 선비정신

충절을 지킨 정신을 기린다는 읍청의 의미를 새기며 고개 숙여 그 아래를 지난다.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묵계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당 입교당이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 건물로 가운데 6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원의 기숙사 역할을 하는 부속건물 동재도 배치되어 있다.

그 앞에는 해마다 춘분 무렵 붉은 꽃을 피운다는 홍매화 나무가 서있다.

맨 위쪽에는 낮은 기와 담장으로 둘러쳐진 묵계서원 사당인 청덕사가 자리 잡고 있다.

늦가을 오후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대청마루에 앉으니 길안천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남쪽으로 바라보니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읍청루가 한옥의 아름다운 공간미를 보여주고 있다.

소문난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의 모습이 연상된다.

서원은 앞이 낮고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전저후고의 경사지에 자리 잡았다.

앞으로 탁 트인 경관을 서원 영역으로 끌어들이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자연 순환체계에 거슬리지 않고 주위의 산천과 조화를 이룬다.

건물들 자체는 장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절제되고 단아한 모습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건축배치와 그 공간으로 응축시키고 있다.

잘 다듬어진 토담을 따라 서원 뒷편 언덕을 오른다.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아름드리 노송들이 구불구불 휘어진 자태로 서원 전체를 감싸고 서 있어 솔향기가 가득하다.

사당을 바라보며 이곳에 배향된 보백당 김계행 선생을 생각한다.

그의 본관은 안동이며 마흔아홉의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해 쉰이 넘어서야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점필제 김종직과 교분이 깊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심한 고초를 겪었다.

연산군 시절에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왔다.

선생의 고결한 자세는 고고한 선비정신이라 불리는 정신적 토양으로 널리 전파되어 승화됐다.

그는 청백과 강직으로 일관한 삶을 살면서 90세 가까운 나이까지 장수했다.

세종 조에 태어나 중종 때까지 여덟 임금이 바뀌는 동안 삶을 살았다.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봐서 지금이라면 백수를 넘긴 나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장수비결을 물으면 몇 가지 조건 중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선생은 강직했으므로 곳곳에 적이 널렸고, 청렴했으므로 사욕을 누리려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성품이 고결한 선비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

파직을 당하고 곤장을 맞았으며 복직됐다가 다시 투옥되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향한 후 자연 속에서 계속 학문을 연마하며 천수를 누린 그의 노후 생활은 어떠했을까.

보백당 김계행은 만년에 속세를 잊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기 좋은 산속 너럭바위 밑에 자리 잡은 만휴정이라는 정자에 늘 머물렀다고 한다.

묵계서원 앞을 흐르는 길안천을 건너면 바로 지척에 보인다.

198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지정된 이 정자의 규모는 날렵한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집이다.

앞쪽 전체를 모두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하였다.

이는 만휴정 앞 계곡 아래로 펼쳐진 반석과 흐르는 물, 주위의 멋진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다.

폭포와 계류, 산림경관 등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안동 만휴정 원림’이라는 명칭으로 2011년 8월 대한민국의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사랑받는 관광지로 거듭나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만년에 휴식과 학문연구를 위해 머물렀던 만휴정과 외나무 다리. 최근 드라마의 무대가 되면서 방문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만휴정이 얼마 전부터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젊은 방문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주변의 수려한 경관으로 그동안 몇몇 드라마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특히 최근에 끝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TV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대사가 잠시 유행어가 되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

정자 앞 계곡에 걸려있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그 장면을 연출하며 사진을 찍는다.

주말이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다리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고 있다.

따라서 계곡 입구에는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하천 건너기 전에 차를 세우고 가볍게 산책하는 것이 좋겠다.

그 옛날 보백당이 노후의 휴식과 학문을 닦기 위해 자리 잡은 공간이 미디어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는 새로운 명소가 된 것이다.

만휴정 오른쪽 계곡에서부터 구불구불 태극 형상으로 힘차게 흘러 내려오던 물은 정자 앞에서는 완만한 경사를 타고 소리를 죽여 조용히 흐른다.



선생은 이 계곡을 묵계라고 이름 지었다.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오직 보물은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보백당이라는 선생의 호도 여기서 나온 듯하다.

후손들에게 주는 이 글귀는 현판으로 새겨져 걸려있다.

그 옆으로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身 待人忠厚) 즉 자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히 하며 남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후덕하게 대하라라는 내용도 함께 있다.

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에서도 사진을 찍는다.

그 의미를 안다면 한 가지 교훈은 얻어 가는 셈이다.

다만 가까운 곳에 있는 묵계서원은 만휴정 보다 방문객이 적은 듯하다.

보백당은 말년에 자손들에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를 구제할 수 없었으니, 내가 죽거든 장례를 갖추지 말고 명문(銘文)을 지어 비석도 세우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또 “착한 행실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를 흠모하는 조선 중기의 선비 이광정은 김계행의 묘갈명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십의 고령으로 임천에 살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관찰하였도다.

오직 청렴하고 결백하라고 물려준 교훈에 자신은 부끄럽게 여겨 묘소를 꾸미지 못하게 하였도다.

비명없는 작은 무덤은 대부(大夫)의 묘소가 아니도다.

세대가 오래되어 많고 많은 자손들 그 사적을 기재하려고 생각하였도다.

명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사치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며 공의 뜻을 바로 새기는 것이도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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