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군위 열녀서씨포죽도

백죽각 입구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 숲.

성주 도씨 성동문중 사당. 사당인 모원제는 화재로 소실돼 최근 복원됐다.

군위군 효령면에 위치한 백죽각 전경. 백죽각에는 일찍 남편을 잃은 서씨부인을 기리기 위한 열녀 정려비가 있다.


1795년 늦은 봄날, 들판의 보릿골마다 푸르름이 넘실거린다.
진달래꽃 진 산자락에서 송화가 희뿌옇게 날리고 개울가에 피어난 창포줄기에도 보랏빛 꽃대가 쏘옥 올라오고 있었다.

여느 해 비길 바 없는 풍년을 예견하는 듯 남으로 팔공산을 기대고 있는 군위 효령고을의 산과 들녘은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넉넉하다.

누대를 거쳐 효령 오시산 자락에 삶터를 일구어 온 성주 도(都)씨 문중에서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문회의 가장 큰 어른인 행촌 도이구가 종택에서 문중의 몇 인사들과 함께 점심을 나눌 약속을 해 놓은 까닭이다.

행촌은 사리 분별이 재바른 당질 필구와 함께 종택 사랑채의 서탁을 깨끗하게 닦고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이 든 오동나무 함도 조심스럽게 꺼내 올려놓았다.


◆화원 화가 이명기, 장수도 찰방으로 오다

오찬을 마친 대여섯 명의 문회 인사들 앞에서 도필구가 먼저 말머리를 열었다.

“햇감자 조림 맛이 괜찮았습니까?”
“괜찮다마다.
별미였어.”
“그럼 문장(행촌 도이구ㆍ당시 군위향교 전교)을 대신해 제가 먼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우선 지난 단오 때 재종질이 어린 나이지만 향시에 차석으로 입격했으니 이는 우리 문중 모두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필구는 인사의 말을 집안의 경사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오늘 문장(도이구)께서 여러 족숙 및 족제들과 함께 문중 일 한 가지를 의논하려 합니다.

“무슨 또 좋은 일이 있소? 어서 말해 보시오.”
문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두루마리가 든 함을 조심스레 열며 말을 꺼냈다.
모두들 오동나무 함에 공경의 눈빛을 보낸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선대가 내려준 이 그림은 언제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여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문장이 말을 맺기도 전에 종손도 반색하면서 나섰다.

“네, 그렇고 말고요. 입향 선조비의 애절하고도 고결한 정절이 담긴 것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제 그림이 낡아 희미해져 가니 좀 더 귀한 화사를 모시고 다시 그려 둘까 고심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할 수 있다면야 더할 수 없는 귀한 일이지요.”
좌중에서 누군가가 “어디 청할 만한 화사가 있는가요?” 하고 묻자 도필구가 재바르게 대답하고 나섰다.

“네, 마침 도화서 화원을 지낸 이명기가 연전에 장수도(옛 영천 신녕 역참) 찰방으로 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이어서 몇 차례 오고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도이구가 “일전 신녕 환벽정에서 열린 시회를 다녀왔었습니다.
신녕 관아에서는 현감을 비롯해 유림과 역리들까지 장수도 찰방이 그림을 잘 그릴 뿐만 아니라 어질고 선정을 베푼다 해 칭송이 자자합니다”며 이명기의 인물됨까지 일러주었다.

다시 도필구가 말을 받아서 이었다.
“우리 향내에도 장수도의 속역이 있는 터이니 찰방과 만나는 일을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까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킨 김에 당질이 한번 걸음하는 게 좋을 것이네.”
문장 도이구가 결론을 짓듯이 말을 맺자 달리 이견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필구는 한결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큰 역도의 수장인데다 더군다나 정조대왕의 어진을 두 번씩이나 그릴만큼 조야에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화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화산관 이명기(생몰 미상)는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이다.
1791년, 정조 어진 원유관본의 주관화사로 활동하였으며 미수 허목, 강세황, 서직수 등 대신들의 초상화를 도맡아 놓고 그렸던 터이다.

이명기는 화가로서 기예뿐만 아니라 뭇화원들이 부러워하는 화원가문의 출신이기도 하다.
화원이면서 문관벼슬을 지낸 종수의 아들이요 찰방을 지낸 화원 김응환의 사위다.

그런 이명기가 1793년 여름에 장수도역 찰방으로 보직되어 온 것이니 영천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 소문이 널리 퍼짐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명기가 그린 ‘열녀서씨포죽도’

군위군 효령면 도재홍씨가 소장하고 있는 ‘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서씨를 기리기 위한 그림으로 화산관 이명기의 작품이다.
현재 이 그림은 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도필구는 마음을 다잡고 장수도를 향해 집을 나섰다.
군위 땅과 신녕의 경계인 화산 자락에도 초여름의 햇살이 제법 길게 내렸다.
갑령 고갯마루를 돌아내리니 신녕고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도필구는 역참이 있는 우물가에 말을 세우고 관가로 들어섰다.

찰방의 관헌에는 등자를 비롯한 마구는 물론 김홍도의 원작인 ‘편자갈기’를 모사한 그림 한 점과 꽤 오래 전에 제작된 ‘마의방’의 영인본이 눈에 띄었다.

그리다 만 몇 점의 그림과 젖은 붓도 윗목에 놓여 있었다.
어렵게 마주한 찰방은 듣던대로 어질고 푸근한 모습이다.
묵향을 풍기는 그의 얼굴에서 온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폐문의 입향 선조 할머니의 열녀도입니다.

도필구는 집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온 포죽도의 두루마리를 이명기 앞에 펴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던 화산관 이명기는 순간 그림의 상단에 눈이 멈춘 듯 미동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읍을 하며 공손하게 그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도 석사, 내 눈에는 이 그림에서 성군 세종대왕이 보입니다.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귀 선조비 정부인 달성서씨 포죽도(抱竹圖)가 아닌가요. 임금이 앞서서 정의를 장려하고 백세토록 지켜나갈 교훈과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귀문 한 집안만의 영광이겠나이까….”
“과찬이십니다.
오래 전에 누군가가 ‘속삼강행실도’를 근거로 해서 이 열녀도를 그렸고 그것을 우리 집안에서 쭉 보존해온 것입니다.

‘세종실록’과 ‘속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서씨는 군위 효령의 도운봉과 결혼한 지 5년 만에 남편을 사별한다.

서씨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17년 동안 날마다 집 뒤 대나무 숲에 나가 남몰래 대나무를 끌어안고 울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대나무 아래서 흰대나무(白竹) 세 떨기가 솟아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나자 다시 18떨기로 번져났다는 열녀 서씨의 애절한 이야기다.

백죽각 중수기.



열녀 서씨 정려각 입구.


그런 내력을 경상감사로부터 보고 받은 세종대왕은 백죽도(白竹圖)를 그리게 하고 어제시와 함께 정려를 내렸다.

충효정, 삼강(三綱)을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서씨의 애모와 이적은 정절의 사표이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화산관 이명기는 두어 달이 지나도록 도필구가 두고 간 두루마리 그림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 보면서 서씨 부인이 간직한 청푸르고 애절한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본을 근거로 한 폭의 포죽도를 다시 옮겨 그리기로 결심하였다.
두루마리로 된 원본과 달리 족자형으로 하고 141.5 X 69.4㎝의 크기의 종이 위에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화산관은 먼저 그림 속의 구도를 상중하단으로 구분하고 상단에 서씨의 남편이 묻힌 묘지 산을 그렸다.
군위의 서북쪽에 있는 산을 가까이 잡은 뒤 그 능선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처리하였다.

중간단에는 집 뒤의 그리 높지 않은 오시산 기슭에 무성하게 돋아난 대나무 숲과 유유히 흐르는 위천을 앉혔다.
그리고 흰옷을 입은 채로 대나무를 끌어안고 강 건너 산을 바라보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서씨의 모습을 담았다.

마지막 하단에는 서씨의 살림집으로 여겨지는 기와집을 그려 넣었는데 원근법으로 집을 제법 큼직하게 그려놓고 보니 너무 고즈넉해 보였다.
그래서 다시 용마루 왼쪽 끝자락, 그러니까 대숲을 끌어안고 슬픔에 겨워하는 서씨를 바라보는 곳에 치미를 올렸다.

치미라기보다는 작은 동물상을 대신 그려 넣어 서씨 부인을 지켜주도록 했다.

붓을 놓고도 한참을 들여다보며 서씨의 애절한 마음이 절로 감정이입하게 된 화산관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강 그리고 울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푸른빛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서씨의 고조된 슬픔을 절절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상단에 중모기(重摹記) 까지 썼다.
포죽도를 다시 그리게 된 까닭과 심정을 세세히 적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도필구로부터 두루마리로 된 포죽도를 받고 보니 세종대왕의 시까지 게재되어 있어 공경한 마음이 한량 없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우게 한 것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이 어찌 도씨 한 집안만의 영광이겠는가/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다/ 아 훌륭하여라…/ 절의가 깊은 도씨 집안의 일에 나도 동참할 수 있어 영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열녀서씨포죽도’는 ‘속삼강행실도’를 근거로 누군가가 그려 놓은 것을 다시 화산관 이명기가 중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은 곧 시다.
또한 이야기다.

서씨의 정절을 담은 ‘열녀서씨포죽도’를 그린 화산관 이명기는 그림으로 못다 한 것을 문장과 시로 말하고 있다.

그래도 남은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국학진흥원 보관) 효령면 성2리의 도재홍씨와 도병관씨가 이어가고 있다.

두 분은 하나 같이 서씨부인의 정려각(백죽각)과 함께 포죽도가 문화재로 지정돼야 그 이야기의 사회적인 힘이 될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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