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빨리 일어나라는 신호인가. 늦가을 햇살이 슬그머니 창문을 넘어온다. 거실 안으로 들여놓은 갯국화는 진한 향기를 뿜으며 코끝을 간질인다.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을 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요동친다. 단김에 청암사 단풍놀이를 가기로 마음먹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물이 맑아 바위가 푸르게 보인다는 청암사. 성주 무흘구곡을 지나 청암사 들머리에서부터 흥분된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고샅길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는 물감을 쏟아 부은 듯 휘황찬란하게 변신해 있었다. 다래다래 붙은 나뭇잎은 가지가 좁다고 아우성을 질렀다. 이른 봄에는 연둣빛 새순이 상큼하게 다가오더니 가을에는 하늘을 뒤덮은 단풍이 고즈넉한 숲길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한 걸음씩 발길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붓한 길로 들어서니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굵직한 금강송 여남은 그루가 대장군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청암사 일주문은 늦가을 햇볕을 푸근하게 쬐고 있었다.
청암사를 알게 된 지는 십여 년이 넘었다. 어느 해 이른 봄, 김천 수도산으로 등산을 갔다. 봄이라 산 아래는 파릇한 나뭇잎이 골짜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산 위로 오를수록 겨울의 잔재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도산 정상에 도착하니 해는 벌써 서쪽 하늘에 뉘엿뉘엿 걸려 있었다. 산속이라 해 떨어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섬광과 같은 둥근달이 휘영청 올랐다. 머리 위로는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고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은 산길의 길잡이가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산새들조차 고요히 잠든 시간에 멀리서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절이 있을까 하며 소리를 따라 내려가니 달빛 속에 비치는 아늑한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깊은 산중에 사찰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구름 속에서 벗어난 보름달이 사찰 경내를 비출 때는 섬뜩했다. 기와지붕 용마루에 올라앉은 이문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용솟음칠 것 같은 위엄 있는 자세로 포효하고 있었다. 그나마 간간이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이곳이 사찰임을 짐작하게 했다. 집에 돌아온 후로는 어둠 속에 보았던 그 사찰에 대해 궁금증이 곰비임비 쌓여만 갔다.

밤 풍경이 아름다웠던 그곳은 청암사였다. 경북 김천시 증산면 불령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청암사. 소소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이곳은 대한불교 조계종 직지사 말사로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다. 천 년 전, 신라 헌안왕 때 도선 국사가 주춧돌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인조와 정조 때 화재로 모두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1900년 초 대운 스님이 복구하여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청암사 들머리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감돌았다. 우거진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공기는 삶에 찌든 정신까지 말끔히 씻어 주었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까지 가는 길은 크고 작은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그 옆에 조선 시대 정혜스님의 일생을 적어 놓은 비문이 있었다.
사찰로 가는 길목에 작은 샘이 나왔다. 돌에 ‘우비샘’이라고 새겨 놓았는데 청암사는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란다. 대웅전이 있는 곳이 소의 머리라면 이곳은 코에 해당한다고 적어 놓았다. 바가지에 물이 넘치도록 퍼서 마셔보니 물맛이 달고 차가웠다. 향기로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속은 이내 푸르게 젖어 들었다. 우비샘과 마주하고 있는 바위에는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사연을 안고 이름을 팠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후대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암사는 인현왕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숙종의 정비였던 그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 후궁 장희빈에게 왕후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폐서인이 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왔으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한옥을 다시 지었다. 그곳이 지금의 극락전이다. 청암사에 오게 된 연유는 친정어머니 외가가 이 부근에 있었다. 청암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서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에서 복위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청암사에는 시간조차도 멈추어 있는 듯했다. 사찰은 여느 양반집같이 오밀조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육화전에서는 승가대학 비구니 스님이 모여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낭랑하면서도 차랑차랑한 음성이 청암사 경내를 휘돌아 감았다. 그 광경을 보느라 한동안 서 있다가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을 햇살을 받은 목조 석가여래좌상 얼굴에는 동그마니 미소가 번져 나갔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인현왕후도 소슬바람을 가슴에 안고 이 길을 걸었으리라.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단풍잎도 하나둘씩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뒹굴고 있다. 느직느직 청암사 경내를 돌고 나니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던 번뇌가 조금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해는 서산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을 무렵 청암사를 빠져나왔다.

“기억 속 글감을 더듬어 한 편의 좋은 추억 기록”

수상소감


가을이 무르익는 냄새인가요, 흩어지는 바람 속에 미묘한 향기가 묻어옵니다. 낮에는 불볕더위, 밤이면 열대야. 좀처럼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더위도 계절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낮게 떠도는 새털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높게만 보입니다. 길섶에 줄지어 피어 있는 코스모스는 가는 바람에도 허리를 휘청거리며 은은한 향기를 뿌립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결실의 계절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경북문화체험 전국 수필 대전에 입상했다는 소식은 저에게 상큼한 청량제가 됐습니다.
나들이하러 다니면서 눈여겨보았던 것을 글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글감이 되겠냐 싶다가도 기억을 더듬어 펜을 잡으면 한 편의 좋은 추억으로 기록됐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당선시켜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함께 한 지인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계간 문장 신인상
△문장 작가회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대구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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