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유교마을에 뿌리 내린 기독교 정신

발행일 2018-12-18 21:03:2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9> 안동교회

등록문화재 654호로 지정된 안동교회는 10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안동교회 석조예배당은 화강암 덩어리를 하나하나 다져 쌓아 올린 돌 제단으로 미국인 보리스가 설계해 1937년 준공됐다.

예전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잘 보존된 안동교회.

이무열 기자 lmy4532@idaegu.com


 


 


 




안동은 경북 북부의 관문으로 내륙으로 들어서는 사방의 길이 다 열려있다. 20세기 초엽까지는 더욱 그랬다.

동쪽의 울진, 영덕에서 국토 안으로 깊숙하게 접어들려면 안동을 거쳐야 한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나그네들은 통상 두 가지 길을 선택하는데 영남좌로인 죽령을 넘어 영주-안동으로 들어서기도 하고 중로인 새재-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안동의 북쪽과 서쪽 길이 모두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런 안동을 조망해 보면 지역 구성이 자못 흥미롭다. 시 외곽에는 400~500년 족히 넘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내앞마을, 하회와 소산마을 그리고 봉정암과 학봉종택 등이 안동 외곽의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그들 고택군을 지나 한걸음 안동시내 중심으로 들어서면 다른 지역의 도심과 마찬가지로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속에 유독 두 개의 건물은 고건축물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 중 하나는 목조 건물인 태사묘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풍의 석조 건물인 안동교회다. 태사묘가 고려 건국 공신 세 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라면 11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안동교회(안동시 화성동, 등록문화재 654호)는 기독교 예배당이다.

결국 안동지역은 동심원 속의 바깥원은 전통의 고택마을, 중간원은 현대식 생활 건물군 그리고 중심원은 사원 건물로 배치된 듯하다.

안동의 여러 고건축물들은 하나 같이 제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지켜온 시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유학의 본산인 안동에 세워진 안동교회의 내력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기독의 길을 연 김병우

김병우는 안동의 서쪽 풍천 어담골의 한미한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기부터 밭을 갈고 논을 메면서 평범한 촌부로 성장했으나 짬짬이 가학으로 사장의 글귀만은 놓치지 않았다.

청년기에 이르도록 김병우의 생활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집 밖의 세상사는 물살같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일본 경찰들이 들어와 상투머리를 짤막하게 깎으라고 윽박지르는가 하면 조선이 곧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말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또한 서당이 없어지고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글방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의성과 일직 그리고 풍산 지역에도 서양 사람들이 만든 야소교를 믿는 장소가 생긴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병우는 문득 문득 마당 밖 넓은 곳으로 뛰쳐나가 달라져 가는 세상사를 보고 싶었다. 그냥 묵묵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맨몸으로 변화의 물결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닮은 채로 꽁꽁 묶고 있는, 고루하고 낡은 것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늦봄, 하얀 솜가락 같던 싸리꽃이 지고 산도화가 화사하게 피어나던 날 청년 병우는 풍산 장터에 나갔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대장간 앞에서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키가 크고 콧날이 오뚝할 뿐 아니라 머릿결이 노랗고 눈빛이 파란 게 아주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둘러싼 장터의 여러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이 어찌 저리도 하얄까. 참 별 사람이 다 있네. 어디서 온 사람일꼬.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인가 보네’, ‘아니야 구라파 사람이지’라며 한 마디씩 수군거렸다.

그러나 병우는 그 서양사람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이 어리고 있음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지만 결국 한 마디의 말도 섞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 혼을 빼앗긴 바라보았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는 1893년 4월, 부산에 입향해 한 달 동안 경북 북부지방까지 기독교의 미답지역을 여행하고 돌아간 영남의 최초 선교사 배위량(W.M.Baird)이었다.

그 후 김병우는 처음 만났던 그 이국 사람의 얼굴이 문득문득 빛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야소교인가 하고 상상해 보면서 은연중 자신을 채찍질하며 독백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려워 말고 이곳을 떠나리라. 나의 집안과 나의 방 그리고 나의 관습과 과거로부터 벗어나 맨몸으로 떠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1903년, 김병우는 대구선교부 경북북부 지역 책임자인 방위렴(W.M.Barrett)을 만나 신세계나 다름 없는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

풍산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만난 병우는 복음을 맞이한 댓가를 톡톡하게 치러야 했다. 대문간에 십자가를 내 걸고 찬송가를 부르던 병우를 마을 사람들은 숫제 역귀로 몰아세웠다. 가까운 친인척까지 합세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우리 마을이 역귀에 들었습니다. 야소교도의 집을 불태워 버립시다.”

“병우를 잡아 마을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십자가를 붙인 병우의 초가집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병우는 더 이상 마을에 머물 곳도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마을사람들의 등살에 밀려난 김병우는 풍천과 인접한 소산 마을로 들어갔다. 일가들이 사는 곳이었지만 그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추웠지만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한다는 믿음으로 가는 길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더 넓은 마을로 나가자.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안동 읍내로 나가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살리라….’ 믿음을 향한 김병우의 신념은 더 굳건해져 나갔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교회 석조예배당
 


 
교회중심에 있는 유적지 안내도.
땅거미가 풀리기 시작하는 새벽, 그래도 골목길에는 어둠이 사라지지 않았다. 말끔하게 세수를 한 김병우는 참빗으로 머리를 다듬고 틀어 올렸다.

그리고 지난 날 방위렴에게 얻은 청나라 판 성경책을 펼쳤다. 문풍지를 타고 들어오는 바람결에 등잔불이 일렁거렸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의 한 구절을 읽고 묵상하던 병우는 그날따라 지난 날, 예수를 좇다 갖은 수모를 이겨 내고 안동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묵상을 멈추고 난 병우는 성경을 덮고 머리맡에 둔 둥그란 소가죽 북을 꺼내 둥둥 울렸다. 그리고 말끔한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옆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금새 찾아든 7명의 교도들을 정중하게 맞이한다. 자신을 포함해 남자 넷, 여자 넷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환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기도문을 봉송하였다.

1909년 8월, 안동 서문 밖 기독서원 다섯 칸짜리 방에서 김병우를 비롯한 8명이 처음 하나님을 경배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안동교회는 김병우를 필두로 안동지역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본산이 된 것이다.

한해 두 해 세월이 지나갈수록 성도의 수가 75명, 200명, 400여 명에 이르도록 급증해 나갔다. 그 다수가 안동의 양반 자제들이고 조선시대 관리의 후손들이다. 예배의 자리가 비좁기만 하였다.

1937년 이른 봄, 안동읍내의 꽤나 번잡한 거리인 화성동에 화강암 석조 2층 건물이 서서히 지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높이 쌓아져 가는 큰 집의 외벽을 구경하느라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곤 한다. 한참 쳐다보던 어떤 이는 ‘무슨 집이 돌집이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렇게 높은 집인데 대문은 측면에 있나 보네’ 하면서 자신들이 처음 마주하는 익숙지 않은 느낌을 숨기지 않고 내뱉곤 한다.

안동교회로 사용될 이 건축물은 주변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단순히 외형뿐만 아니라 높이와 지붕 모양 그리고 부재로 쓴 석물까지 단연 눈에 확 띈다. 우리네의 전통 집 형태와 전혀 다른 대문 등은 모두 보는 이들을 낯설게 한다.

성도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예배처소를 넓혀 나가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그 여섯 번째로 지어진 것이 곧 현재 모습의 2층 돌집 예배당인 안동교회이다.

서울 태생으로 안동에서 15년째 담임목사로 있는 김승학 목사는 교인들이 순후하고 신실하다고 말한다.

그와 장시간 교회의 내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전통의 추로지향(鄒魯之鄕)에 기독교가 그렇게 일찍 접목될 수 있었던 연유가 이해되면서 의구심이 풀렸다.

오랜 세월 동안 유학적 선비문화가 깊이 밴 안동 지역사회는 기독교를 배타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신학문 세계로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학습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식을 잘 습득하는 훈련된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오히려 더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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