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시작했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며칠 지나면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 속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꼬리를 감추리라. 해마다 이맘때면 송년 모임으로 노곤해진 몸을 달래며 벌떡 일어나 마구 달려가야 하는 출근길이다. 환절기 감기와 유행성 독감이 한창인 요즘이라 마음을 다잡으며 짐짓 씩씩한 걸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선다. 오늘 하루도 제시간에 맡은 일 잘해 낼 수 있기를 고대하며.
가운을 걸치고 책상 앞으로 다가서자 컴퓨터 모니터에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붙어있다. 투명한 셀로판지로 두른 포장엔 작은 종이 카드도 있다. 자세히 보니 며칠 동안 몹시 아팠어도 엄마가 없어 입원을 못 한다며 할머니와 함께 다니던 어린아이의 이름이 적혀있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아플 때마다 엄마처럼 보살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제법 어른스러운 필체로 써 내려간 글이 내 가슴을 울컥하게 하였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병원에 오면 늘 아련한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쳐다보곤 하더니…. 엄마가 얼마나 그리울까?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이미지였을까. 엄마였을까. 아니면 학교 선생님 느낌이었을까. 다음에 만나면 품에 꼭 안아 주어야겠다 다짐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매듭 달이 되자 송년이라는 단어가 날아다닌다. 한 해 동안 느꼈던 괴로운 일들은 송년(送年)회라는 구실로 그냥 툴툴 털어버리고, 밝아오는 새해엔 오로지 새 희망으로 맞고자 하는 치유의 행사가 아니겠는가. 해가 바뀔 때마다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다진다. 돌아보면 잠시도 쉬지 않고 몸과 마음 모두 바쁘게 움직인 것 같은데도 턱 하니 내놓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크게 마음먹고 시작했지만, 이런저런 일이 중간중간 끼어들다 보니 주변에 폐를 많이 끼친 것 같은 해다. 작심삼일의 기억도 많다. 하지만 어쩌랴, 그 모든 것이 나의 인연으로 맺어진 일들로 인한 것인 걸, 인연이란 하늘에서 좁쌀 한 개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다가 거꾸로 박힌 바늘에 탁 꽂히는 것만큼 소중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모든 이들에게 잠시나마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하리라.
한 해 동안 정말이지 많은 일이 있었다. 기쁜 혼사도 있었고 또 집안 어른이라고는 시어머니가 유일하였는데 그분까지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는 슬픈 일도 있었다. 예견하지 못했던 일들을 치르면서 주변의 도움을 참으로 많이 받은 해이기도 하다. 눈 덮인 언 땅을 비집고 올라와 샛노란 꽃을 피우던 복수 초를 만난 듯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달랑 남은 달력을 보며 한 해를 정리해보려고 그동안의 마음을 담아 연하장을 만들기로 하였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자체 제작 연하장이 인기라고 한다. 가족사진을 넣기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글귀를 담아 나만의 개성으로 만들어 인쇄하여 보내기도 한다. 우체국에서는 성탄절까지 그런 연하장을 받아 새해 아침 1월 1일이 되면 집집이 정확하게 배달하여둔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인근 우체국으로 연하장을 사러 갔다. 요즘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연하장을 그다지 많이 만들지 않았다며 통틀어 100여 장 남짓 남아있었다.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써주면 속지를 따로 인쇄하여 주문제작 연하장을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귀띔한다. 얼른 인사말을 적고 주소까지 적어서 몽땅 주문하였다. 연하장을 쓰려고 주소록 앞에 앉으니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하늘에서 별똥별 한 개 떨어지듯/ 나뭇잎에 바람 한번 스치듯/ 빨리 왔던 시간들은 / 빨리도 지나가지요?/ 나이 들수록 시간들은 더 빨리 간다고. //중략//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어요./ 목숨까지 떨어지기 전 /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중략// 아름다운 삶을 /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 보면 / 첫 새벽의 기쁨이 / 새해에도 / 우리 길을 밝혀 주겠지요.’
이해인 수녀님의 ‘송년의 시’처럼 하루를 지내고 나면 더 즐거운 하루가 오고 사람을 만나고 나면 더 따스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더 행복한 일을 만드는 아름다운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